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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8월 25일 주일아침예배   요 11:17-44   라면신앙

 

 

안도 모모후쿠(일본어: 安藤 百福 또는 중국어: 우바이푸吳百福 Wú Bǎifù, Wu Pai-Fu, 1910년 3월 5일 ~ 2007년 1월 5일) 라는 일본 기업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 제국 치하의 타이완에서 태어나 1932년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 일본 국민들 대다수는 미군이 제공하는 밀가루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뒤집어 보면 국수 장사로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침 직장을 잃은 안도는 장기간 보관해도 원래의 맛을 살릴 수 있는 국수를 대량 생산해 사업화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1948년 닛신식품회사를 차렸지만 사업이 생각처럼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10년 동안 국수 개발에 매달린 안도는 마침내 가진 돈을 모두 날려버리고 가정은 파탄나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나이도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안도는 좌절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국수 한그릇 먹자며 포장마차를 찾았다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음식 만드는 모습을 보던 안도는 포장마차 주인이 어묵에 밀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기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맀습니다. 젖은 국수를 기름에 튀기면 밀가루 반죽에 포함된 수분이 빠르게 증발하면서 밀가루에 숱한 구멍을 남기게 됩니다. 이 구멍에 뜨거운 물이 들어가면 국수가 다시 부드러운 상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는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연구에 매달린 끝에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치킨 라면을 만들어 상표 등록을 하고, 1963년 닛신 식품은 도쿄 증권거래소와 오사카 증권거래소 모두 2부에 상장되는데 이르렀습니다. 1971년에는 세계 최초의 컵라면인 컵누들을 개발하였습니다. 1981년 사장직을 내놓고 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99년에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케다 시에 라면 박물관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1월 5일 심장마비로 향년 96세에 사망하였습니다. 간편하게 먹는 즉석 라면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연히 라면 생산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안도가 라면 제조 방법을 특허로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우리도 쉽게 라면을 만들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언제 누가 라면을 만들기 시작하였을까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아 한국 사람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던 1961년 어느 날 삼양식품(주) 전중윤 사장은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 배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봅니다. 전 사장은 "저 사람들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전 사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 기술을 들여옵니다. 하지만 외화가 없고 국교가 단절됐던 때라 라면을 제조하는 시설을 들여오기는 하늘에 별 따기 이였습니다. 한 라인에 6만 달러인 라면 제조 시설을 수입하기엔 전 사장도 돈이 부족 했고 가난한 정부도 옹색하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전 사장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 종필(JP) 씨를 찾아갑니다. "국민들 배 곯히지 말자"는 전 사장의 호소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의 세도를 가진 JP는 마침 농림부가 가지고 있던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전 사장이 사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우정은 이후 오랜 세월 이어집니다. 신용장을 열고 전 사장이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 했답니다. 일본도 어렵던 시절, 라면 제조시설을 국교도 없는 한국에 선뜻 팔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전 사장은 묘조(明星) 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다음 날 대답을 들으러 다시 찾은 전사장에게 오쿠이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한국에 가본 일이 없고 아직 국교 정상화도 안 됐지만 한국 전쟁이 일본 경제를 재건해 준 셈입니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덕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습니다." 오쿠이 사장은 한 라인에 6만 달러라 하던 라면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만5,000 달러로 즉석에서 발주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전 사장은 일본 현지에서 라면 제작의 전 공정을 배우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은 가르쳐주지 않더랍니다. 전 사장이 끝내 비율을 못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 사장에게 전해줍니다. 비행기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안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라면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1963년 9월 15일 삼양 '치킨라면'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가격이 10원, 식당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30원이고, 커피 한 잔이 35원이던 시절이니 저렴한 가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라면이 널리 보급된 것은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 덕분이었습니다. 쌀을 아끼려고 라면 보급을 장려한 것인데 대통령까지 관심을 보였습니다. 대통령이 우리 국민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니 느끼한 국물 대신 고춧가루를 이용한 수프를 개발해보라고 제안하면서 개발 자금까지 지원하였습니다. 일본 라면이 패전의 허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발달했다면, 한국 라면은 산업화 도중 식량 자급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위키백과, Daum백과, 라면의 역사 애견택시 붕붕 인용)

 

 바로 오늘이 1958년 8월 25일 세계최초로 일본의 안도 모모후쿠가 라면을 만든 날입니다. 오늘이 라면의 생일입니다.

 

제가 카투사군인으로 의정부 미 육군 사령부내 59육군비행대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 미군부대 음식은 한국군과 비교할 때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한국군부대에서는 시레기된장국 고춧가루 묻은 신김치 콩나물 무침에 쌀과 보리혼합밥 이었습니다. 가끔 고기 국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소지나간 국으로 휘휘저어 실오라기 같은 고기가 한 가닥 올라올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군부대 음식은 미국 본토인 중류 생활하는 미국인 식단이었습니다. 점심에는 손 바닥만한 비후스테이크가 올라옵니다. 처음 한국 카투사들은 환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매일 그렇게 먹으니 이럴 때 얼큰한 라면이 간절히 먹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 비후스테이크 소고기를 가지고 부대 울타리에 가면 한국 장사꾼들이 라면을 끓여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비후스테이크를 그들에게 주고 서서 라면을 먹습니다. 후르르 먹는 그 맛이 얼마나 맛있는지, 장사꾼들은 그 고기를 가져가 그 유명한 의정부 부대찌개를 만들어 팝니다.

 

라면을 인스턴트 식품이라고 말합니다. 즉석으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란 말입니다. 인스탄트 라면의 특징은 "은근한 불에 오랫동안 끓여 진국을 얻어내는 과정을 생략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루한 기다림의 과정을 생략한 채 3분 만에 편리하고 실용적이며 대중적인 조리법으로 고기국의 맛을 흉내 내는 것이 인스탄트 라면의 특징입니다. 고기국을 라면으로 대체함으로써 완숙함에 이르는 과정의 필연적인 '시간'을 생략하는 것입니다. 성숙의 과정에서 시간을 생략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효율성'이며 이것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빨리빨리 문화와 맞아 떨어져 모든 사람들의 절대적인 음식문화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앉으나 서나 라면은 쉽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점점 입맛을 돗구는 라면들이 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라면문화가 우리들의 생활 전반에 인스턴트 즉석문화로 적용되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라면만이니라 여러 다양한 음식들이 만들어 저 즉석에서 별의별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무슨 가구나 심지어 집을 짓는 것도 이미 만들어 저 조립만하는 즉석건축방법으로 왠만한 이층집도 한 달이면 완성을 보게 됩니다. 시간생략 과정생략이 생활화되어 교회도 인스턴트 예배가 인기입니다. 물론 아직은 일부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예배를 아주 간략하게 드립니다. 찬송 기도 성경 말씀 축도로 끝납니다. 목사님이 미리 말씀을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그날 아무 곳이나 성경을 펼쳐 눈에 띄는 말씀으로 증거 합니다. 교인들은 성경 찬송가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강대상 전면에 걸쳐있는 스크린에 다 보여줍니다. 설교도 농담반 진담반 웃기고 박수치게 하고 그렇게 끝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좋아하고 그것을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니요 신앙은 즉석으로 만들어 먹는 라면이 아닙니다. 후루룩 먹는 라면이 아니라 씹고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어 소화시키고 건강하게 하듯 신앙도 말씀의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그러나 점점 깊은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가운데 펼치어 살아가는 신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날마다 은혜가운데 사는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하나>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은 배고픈 이들에게 밥을 대접하는 서영남씨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25년간 천주교회의 수사생활을 마감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세상으로 나오셨다고 합니다. 수사 시절부터 전국의 교도소를 다니면서 장기수 면담활동을 하고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외로운 사람들의 벗으로 살아온 이야기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서영남씨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 사람이 변화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쯤이면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다시 같은 죄를 지어 감옥에 가고,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호의를 베풀었던 이들은 잘못을 하더라고 다시 감옥에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랍니다. 사랑받는 법, 사랑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이들과 함께 늘 새롭게 시작하며 한결같은 사랑과 관심으로 상대방이 새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는 서영남씨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국 같은 신앙인' 입니다.

서영남씨는 "사람이 변하는 데 겨우 10년이 걸렸다"고 말합니다. 10년을 '겨우'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은 아닌데 더 길을 수 있었지만 10년도 빠르다란 것입니다. 어떤 전도인은 한 두 차례의 인스턴트 라면 끓이듯 만남으로 상대방이 호의적으로 변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겨우 10년'이라고 말하는 서영남씨의 말은 신앙은 인스턴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10년 동안 눈에 보이는 성과 없이 자신이 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상대방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이와 같은 지치지 않는 헌신적인 이웃사랑의 힘은 하나님에 대한 성숙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하겠습니다. 인스턴트 라면 마시 아니라 밤새토록 가마솥 단지에서 고아내어 얻어지즌 진국 같은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100년 전 우리 군산에 선교사로 활동하시던 불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부인은 엘비라고하는 여선교사입니다.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한 80년 전 어느 마을에 두 부부가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내 놓았습니다. 마당에는 종탑도 세웠습니다. 그 부인은 날마다 아침 6시면 종을 칩니다. 그러나 예배에 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변함없이 아침 여섯시면 종을 뎅그렁 뎅그렁 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종소리를 듣고 논밭에 나가 일을 하지만 교회는 오지 않습니다. 부인은 종을 치고 교회에 들어와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이렇게 홀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게 하기를 십년,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젊은 부부가 이 동리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젊은 부부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세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몇 해가 지났습니다. 그렇게 완고하던 마을 사람들 한 두 사람이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 만에 엘비선교사가 그 교회를 찾아 갔을 때 그 부인은 90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은 마치 햇빛이 얼굴에 가득한 것처럼 밝게 빛났습니다. 그 동리 모든 사람들이 이제 그 교회 교인이 된 것입니다. 90이 넘은 이 할머니는 여전히 아침 6시에 종을 쳤습니다. 이 할머니의 신앙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국 이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나온 라면은 모두 몇 종류나 될까요? 액 104가지입니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ㄱ 간짬뽕 감자라면 감자탕면 갓비빔 갓짜장 갓짬뽕 건면세대 고추짜장 공화춘 기스면

김치라면 꼬꼬면

ㄴ 남자라면 녹두국수 봄비 놀부 부대찌개 라면 농심 生生우동 농심 감자면 농심 너구리

농심 메밀소바 농심 육개장 농심 찰비빔면 농심 하모니 농심라면 뉴면

ㄷ 도전 하바네로 라면 돈라면 동원참치라면 둥지냉면 둥지쌀국수 뚝배기 드레싱 누들

ㄹ 롯데라면 라면사리

ㅁ 맛있는 라면 맛짬뽕 맵시면 머그면 메밀비빔면 멸치칼국수 모듬 해물탕면 무파마탕면

미인국수275

ㅂ 바지락 칼국수 보글보글 부대찌개면 볶음김치면 부대찌개 라면 북경짜장 뷰티칼로리면

비빔면 불닭복음면

ㅅ 사리곰탕면 사발면 사천짜장 삼양 나가사끼 짬뽕 삼양 불닭볶음면 삼양 수타면

삼양라면 생라면 쇠고기면 쇼킹면 스낵면 신라면 신라면 블랙 쌀국수 소고기짜장면

ㅇ 아라비아따 안도 모모후쿠 안성탕면 알통통 스마트면 액상스프 앵그리 꼬꼬면

어뎅탕면 열라면 열무비빔면 오뚜기 스파게티 오모리김치찌개라면 오징어짬뽕 우육탕면

이라면 일품 짜장면

ㅈ 자연은 맛있다 진라면 진짜장 진짜진짜 진짬뽕 짜왕 짜짜로니 짜파게티 짜파구리

ㅊ 착한라면 참깨라면 참라면 치즈라면 친환경우리쌀로만든쌀라면

ㅋ 카레라면

ㅌ 태풍냉면 토마토 비비올레 틈새라면

ㅍ 팔도 도시락 팔도 부산밀면 팔도 불낙볶음면 팔도 불짬뽕 팔도 비빔면 팔도 짜장면

팔도라면

ㅎ 한우특불면 홍라면 후루룩 국수 후루룩 칼국수(2016.09.09. 현재)

 

모든 라면은 제각기 특색과 맛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라면보다 최고의 라면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라면 이름은 “주께서 함께 라면”입니다. 이 시간 이 주께서 함께 라면을 우리 모두 맛보아 알기를 원합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도 죽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명들은 제각기 고유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 베들레헴은 「떡 집」,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등 복되고 밝은 뜻의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이곳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라는 의미로 매우 어둡고 불행한 고장의 이름입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마리아, 마르다 자매와 함께 사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마다 이 베다니 삼남매 집에서 머무시곤 하여습니다. 그런데 호주격인 나사로가 병들아 죽어 장사지내기까지 지낸 후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섭섭한 마음으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진작 빨리 오셨더라면 예수님께서 고처 주셨을 것이니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오빠가 다시 살 것입니다“라고 말하닌까 마르다는 ’오빠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오빠가 이미 죽어 장산한 후이기에 먼 미래에 있을 때를 기다림보다는 당장 이별의 슬픔을 참아낼 수 없다는 하소연입니다. 그러나 또한 마르다는 울머이면서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얼마나 그들이 불쌍하였던지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 와서 울면서 위로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록가운데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교회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계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이 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지구상에 살다가 죽은 사람이 약 600 억 명이라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의 무덤에는 십자가의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모든 십자가에는 부활의 소망이 간직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부활 소망 메시지가 나사로를 살리면서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개인적인 문제 가정적인 문제 질병의 문제 죽음의 문제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해결해 주시는 역사가 함께 할 줄 믿습니다. 국가적으로 일본의 경제도발 그리고 북한의 핵무기 문제 ,미국의 군사비 증액문제, 국내적으로 조국법무장관 후보문제 등 국내외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기도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기도 하며 이제라도 주님이 함께라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밴쿠버에 버나비 머운틴이란 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산을 테리 팍스 산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렇게 부른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산 정상에 고려대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은 SFU(Simon Fraser University)대학이 있습니다. 캐나다 대학 중 톱 5위 내에 드는 명문대학입니다. 이 대학에 1958년 생 테리 팍스라는 학생이 일학년에 재학 중에 있었는데, 그만 골수암으로 다리를 잘라야 했습니다. 테리는 21살에 다리에 암이 퍼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골육종이라는 병입니다. 할 수 없이 오른쪽 다리를 잘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암 세포가 남아 있어서 온 몸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죽음의 문턱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테리는 병석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죽는다. 그러나 암은 아직 극복되지 못 하였다. 암을 극복하려면 연구비가 엄청나게 들 것이다. 암 정복을 위하여 돈을 모금하자. 그리고 죽자. 나같이 암으로 죽는 이가 없도록 하자" 테리의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는 <희망의 마라톤>을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카나다 대륙 5,375 km를 혼자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린다. 생명이 꺼져 갈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주께서 힘께 라면 나는 계속 달릴 것이다. " 테리는 달리면서 만나는 이에게 마다 1불씩 기부하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암 극복 연구비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온 캐나다에 퍼져 나갔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돈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두가 박수갈채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이마다 돈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모은 돈이 모두 24,000,000 불이었습니다. 이 돈을 모두 암 연구에 써달라고 기부하고 죽었습니다. 1981년 6월 22일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래서 3,954 m인 이 산을 그를 기념하여 테리산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 후 카나다에서는 해마다 9월이면 <테리 팍스 달리기> 대회를 합니다. 멋진 생각에 멋진 결과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갔지만 그의 마지막 생각은 온 인류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과함께라면만 있으면 깊은 산속 홀로 있어도, 도시 속 아파트에 갇혀 지낸다 해도, 종일 찾는 사람 없고, 한마디 말 없고, 무슨 티브이 신문 보지 않아도 정말 괜찮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으면 어떤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면 또 어떤가.

 

김성균작사 작곡한 괜찮아요 하는 동요가 있습니다.

가사는“바람 불어도 괜찮아요 쌩쌩 불어도 괜찮아요, ....호호 추워도 괜찮아요 꽁꽁 얼어도 괜찬아요 ”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난 풍파 질병 고생 끊이질 않아도 괜찮아요. 목에 칼 들어와도, 산 입에 거미줄 쳐도 괜찮아요, 여기저기 통증 때문에 눈물 나도,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더라도, 난 난 나는 괜찮아요. 왜 그렇습니까? 주님과 함께 라면! 괜찮은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주님 함께 하시는데, 온 천하 만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 장차 임할 심판에서 나를 건져주시어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고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원히 찬송 감사로 예배하는 기쁨 중에 살게 하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데, 어찌 염려 근심 걱정으로 한 인생 허송세월을 보낼 것입니까.

 

당신과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환경 탓, 팔자 탓 하면서 기쁨 즐거움 감사 찬송 잃어버렸다면, 잊어버렸다면,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께서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라면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가운데 날마다 승리하면 살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언제나 주께서함께라면을 먹고마시고 입고자고 생활하는 우리 모두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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