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7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창 16:1-16 라온 코이노니아를 살피시는 하나님(엘 라이)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아직 믿음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인간적으로 후손을 보아야 겠다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점점 나이 들어가고 사라는 이미 경도가 끝 난지 오래되어 한 가지 결단을 하게 됩니다. 사라는 자신의 젊은 몸종인 애급 여인 하갈에게서 자손을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을 하니 아브라함은 못 이긴척하여 하갈의 방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갈이 임신을 합니다. 지금까지 몸종으로 있던 하갈이 임신을 하니 신분상승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몸종이 아니라 주인의 유업을 이을 자식을 낳게된다고 생각하니 하갈은 기세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섬기던 사라를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며 업수히 여겼습니다. 사라는 분통이 났습니다. 지가 미꾸라지 때를 생각 못하고 용 됐다고 설쳐 되는 하갈을 보니 못 볼 일이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저애라 못살겠으니 재가 나가든가 내가 나가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사라를 나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갈이 아무리 자기의 씨를 잉태 하였다고 해도 쫒아냅니다. 갈 곳 없는 광야에서 하갈은 낮에는 더위에 지치고 밤에는 추위에 떨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죽을 지경 이였습니다. 하갈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배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기도하니 하나님이 도와 주셨던 것을 하갈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아마도 하갈은 이런 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시편 123편 1절과 2절에
“하늘에 계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 하갈이 말하기를 “나는 내 여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다시 여호와의 사자가 말하기를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에서 하갈을 부르기를 “ 사래의 여종 하갈아” 라고 부릅니다. 그냥 이름만 부르지 않고 하갈의 소속을 분명히 밝혀 부릅니다. 하갈이 아무리 임신을 하였어도 사라의 여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쫒겨 난 것입니까? 자기가 여종이란 신분을 망각하고 마치 여 주인 행세를 할 뿐아니라 교만하여 사라를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아브라함에게 돌아가 본디 여종의 처신을 잘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네 아들이 크게 번성할 날이 올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갈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갈은 자기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펴주셨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서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나아 아브라함이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다”란 의미입니다.
하갈이 하나님을 “살피시는 하나님(엘 라이)”이라고 하였다는 말씀에서 전에 개역 성경에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찰하다”라는 의미가 마치 검사가 죄지은 사람을 뒷조사하는 것 같은 법정 용어로 성경 원어(라아. 인지하다 바라보다 탐지하다)에 합당하지 않아 개역 개정 성경에서 “살피다”라는 말로 번역을 다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자들이 여러 사람들이라 어디서는 “살피다”로 또 다른 데서는 ‘감찰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이런가 저런가 자세히 살펴본다는 의미라고 아시면 됩니다.
살전 2:4에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의 우리의 뒷조사를 하는 감찰관이란 말이 아니라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도와주시기 위해 살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3:1-3에서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와 우리 가족들을 군대가 있는 아들도 외지에서 일하는 자녀들도 지켜 주십니다. 어떤 환난이나 병고나 고난과 역경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 주십니다.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미국에서 한 운전기사가 차량정비소에 와서 차를 수리한 다음 수리비를 내기 전에 말했습니다.“사장님, 여기에 부품을 몇 개 더 교환했다고 써 주세요.” “안 됩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내가 우리 회사에 가서 돈을 더 받아 가지고 사장님께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면 나도 좋고 사장님도 좋은데 왜 안 해요?” “우리는 그런 것 하지 않습니다.” “다른 정비소는 다 그렇게 해주는데 왜 이 정비소만 안 해줘요?” “다른 데서는 다 그렇게 해주어도 우리는 안 합니다. 하나님이 내려다보십니다. 그런 곳으로 가 보세요.” 그러자 운전기사가 “고맙습니다. 사실 나는 운수 회사 사장인데 믿을 만한 정비소를 찾기 위해 일부러 해 본 말입니다. 이제야 내가 원하던 정비소를 찾았습니다. 우리 회사의 모든 차를 여기로 보낼 테니 잘 정비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계시니 우리의 잘한 것도 보시고 우리의 잘못된 것도 보십니다. 잘한 것은 복 주실 것이고 잘 못한 것은 벌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복 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반듯이 벌을 주실 것입니다.
어느 아이가 길을 가는데 길가에 구리철사와 고물들이 많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주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옳다, 됐다 이것을 갖다가 엿이나 사먹어야겠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것을 안고서 몇 발자국 가는데 '이놈! 거기 놓고 가거라'하고 위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 아이는 사방의 땅은 다 둘러보았지만 전주(電柱)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전기 수선공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땅만 바라보면서 아무도 날 보는 사람 없다고 생각하고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날 내려다보고 계심을 모른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공위성 가운데 군사용 방송통신용 기상관측용 우주관측용 항법위성등 여러 위성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는 지난 3월 26일에 다 목적용 아리랑 3A호(KOMPSAT-3A)를 우주에 올려 보냈습니다. 55cm급 해상도의 전자광학카메라와 적외선 센서를 탑재한 고성능 고해상도 지구관측위성이다. 528km 상공 우주에서 자동차 번호판까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이나 독일 영국의 위성 보다 월등한 기술이라고 합니다. 그전에 아리랑 2호와 5호와 함께 하루 24시간 우리 한반도를 살펴본다는 것입니다.(아리랑 2호:오전10.30-2시, 아리랑 3A:오후12시-2시, 0시-2시, 아리랑 5호는 새벽시간 저녁시간 한반도를 관측합니다) 자동차에는 네비게이션이 있어 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바로 인공위성을 통해 안내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시간 아리랑 2호의 카메라가 눈동자같이 저 우주에서 우리나라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시 139:1-3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 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우리가 어디 있던지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어느 때던지 우리는 하나님의 눈동자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거기 계시며” 즉 우리가 어디 있던지 주님은 거기 계십니다. 거기서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시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는 말씀은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시고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쫓겨 난생 처음 집을 떠나 광야에서 돌베개를 하고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집을 떠났습니다. 엄마가 그립고 비록 눈이 멀었지만 자애로우신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꿈에 천사가 나타납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로 연결되어 있는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깹니다. 그때 그가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창28:16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아켄 에쉬 야훼 빠마콤 핫제, 웨 아노키 로 야나엣티. 확실히 여호와께서 이 장소에 계시는데 내가 깨닫지 못하였구나. ‘에쉬’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어 나를 지켜보신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외로움도 사라졌습니다. 그 후 타향살이 20년 야곱은 자신만만하게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의 기준이 “여호와 보시기에(뻬에이네이 야훼) ”입니다. 여기서 ‘보시기에’는 ‘눈동자로’ 즉 눈을 부릅뜨고 살펴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왕들을 보시니 “악을 행하였다”가 80%에 해당되고 “정직히 행하였다”라고 평가 받는 왕은 몇 사람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성군이라 함은 다윗 왕입니다. 그러나 다윗왕이 비록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지만 그러나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어 삼하11:27절에 보면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악하다“란 ”라아-“라는 말로 ”불쾌하다, 화내다“란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의 잘못된 행동을 보시고 부쾌히여겨 화를 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아사왕이 있습니다. 역대하 14:2절 이하에 보면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아사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왕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아사왕도 예언자의 말이 자기 비위에 거슬린다 하여 그에게 화를 내고 옥에 가두었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심한 중병에 걸려 죽고 맙니다.
그 아사왕의 아들인 여호사밧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왕이었습니다.
왕상 22:43절에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여호사밧왕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백성들이 바알 우상을 따르는 것을 막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평소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훌륭한 왕들도 믿음의 흠이 있었습니다. 성경기자는 이 믿음의 흠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눈동자 앞에 아무리 사소한 믿음의 흠이라도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소한 믿음의 흠을 찾아 볼 수 없는 한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시아 왕입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 가장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왕은 31년간 유대나라를 다스렸던 요시아 왕 뿐이었습니다. 왕하 22:2절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 왕하 23:25절에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결국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 나라의 왕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많은 악을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아래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어찌 이스라엘과 우대나라 뿐이겠습니까? 세계 역사의 모든 나라들도 또 모든 왕이나 정치 지도자들도 그 사화나 개인까지도 하나님의 눈동자를 피할 수 없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면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역대하 16:9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하나니 선견자가 아사왕에게 이 말씀을 전하니 아사왕이 하나님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눈을 피하고 그 누가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국가이던지 개인이던지 그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 애국가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하나님이 살펴보시고 보호해주시고 인도해 주셔야만 무궁화 삼천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눈에 어찌 보일 것입니까? 하나님이 박근혜 대통령을 보고 “정직히 행한다”고 하실 것인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보시고 정치를 잘한다고 하실 것인가? 메르스라는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데 만일 전쟁이라도 나면 어찌 될 것인가? 안보는 군인들만의 책임이 아니고 정치인들이 백성들이 안심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도록 정치하는 것이 안보의 제일입니다. 누가 우리나라를 흔들고 있습니까? 좌익입니까? 종북 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런 사회 지도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첫째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닙니다. 백성들 역시 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백성들이 과연 이 땅에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이 살펴보시고 보호해 주시려고 할 만한 백성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에스겔 8장에 보면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어떤 뜰 문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큰 벽에 조그마한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구멍이 너무 작아서 아무리 들여다보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벽을 헐라." 그래서 에스겔은 구멍을 크게 하고 그 벽을 헐었습니다. 그랬더니 큰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문을 열라" 하셔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큰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큰문을 열고 보니까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안에는 온갖 더러운 짐승, 벌레와 우상이 벽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에스겔이 깜짝 놀란 것은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그 우상에게 분향하고 서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아라. 입술로는 나를 섬긴다고 하면서 마음에는 온갖 더러운 것과 우상을 섬기고 있다, 이 사람들은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줄알고 이렇게 방안에 숨어서 있지마는 나는 그들의 모습을 다 보고 있다. 그리고 8:18절에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마음을 담으로 쌓고 문을 꼭꼭 닫은 다음에 “누가 내 속을 알 것인가?”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어찌 여러분의 속 마음을 알 것입니까? 사람은 모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水深可測 人心難測 이런 말도 있습니다.人心隔肚皮=知人知面不知心: 사람을 알고 얼굴도 알지만 마음은 모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속을 다 알고 계십니다. 무엇을 하나님께 숨길 수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무엇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복 주실는지 화를 내실는지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속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셨습니다.
마23:25-28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여기서 “화 있을진저!(우아이 휘민)”라는 말은 예수님이 저주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은 “아이, 어쩌면 좋아, 큰일 났네라 는 안타까워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를 행할 때 이를 주님이 보시고 안타까워 발을 동동구루시며 괴로워하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슬프게 해 드리는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틴어 문구로 "Me Vidit Deus“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진지한 신앙인의 자세일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늘 긴장하며 신경 습니다. 이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눈치 생활에 익숙해지고 체면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그것도 필요합니다. 눈치코치도 없이 멍청하고 안하무인으로 이리집쩍 저리집쩍 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합니다. 그러나 더 눈치를 보면 살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의식하며, 하나님께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나님이 나를 정직하다고 보실까? 하나님이 나를 보고 기뻐하시며 웃으시고 너에게 많은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실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나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언행심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흡족할 말을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치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욕하고 싸우고 거짓말하고 그럴 때 우리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우아이 휘민”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우리를 향한 축복의 손을 거두실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외국의 유명한 한 가수가 있습니다. 에릭 크래프톤이란 가수입니다. 크래프톤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키타리스트이고 작곡가이고 가수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유일하게 3중의 헌액자이기도 합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유명한 주제가 “My heart will go on”을 작곡하였습니다. 지금 그는 71세입니다,(1945년 3월 30일생) 1960년대부터 여러 밴드와 솔로로 활동하고 있는 록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뮤지션으로 기타의 신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의 형 김정철이 그의 광팬이기도 합니다. 지난 5월 중순 영국에서 에릭 크래프톤의 연주장에 몰래 참석하였다가 기자들에게 들킨바 있습니다. 에릭크래프톤은 그 이름만큼 바람둥이였습니다. 많은 여자들이 그를 따랐고 여러번 결혼도 하였습니다. 특히 6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슈퍼 모델로 트랜드셋터로 잇걸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페티 보이드와의 사랑스캔들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그의 히트곡 Layla, Wonderful tonight는 패티를 향해 작곡한 노래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럼프에 빠져 알콜에 짜들고 마침내 마약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퇴폐적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5살 어린 아들 코노의 노래를 듣고 마약을 끊겠다고 결심을 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아들 코노와 동물원에 놀러가기로 약속하날 55층 베란다에서 아빠 오기를 기다리던 코너가 그만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에 죄책감으로 한동안 괴로워하며 방황하다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노래에 담았습니다. “하늘에서 흘리는 눈물 ”Tears in Heaven)”이란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이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천국에서 널 다시 만난다면 내 손을 잡아줄래? 천국에서 다시 널 만난다면 날 일으켜줄 수 있겠니? 난 천국에 머물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어, 그래서 밤낮으로(그 곳에 갈 수 있는) 나의 길을 찾을 거야” 이 노래가 1992년 미국의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고 2,000만장 이상의 음반이 팔렸으며 다시 에릭 크래프튼을 세계 최고의 가수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더욱 높여 준 노래는 “주님의 임재(presence of the Lord)”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는 마침내 내가 살아갈 길을 발견하였네.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그는 이제 마약 중독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카리브해 앤티카라는 작은 섬에 마약 중독 치료 센터를 설립운영하고 있습니다.
에릭 크래프튼은 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게 살고 전에 자기와 같이 방황하던 영혼들을 도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분이 고고학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기자들이 고고학자와 결혼한 소감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성에게는 고고학자가 최고의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늙으면 늙을수록 더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될 것이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살피심은 우리에게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 앞에 우리는 근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앞으로도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살피시고 도우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살펴보시고 우리의 선함을 복주시고, 우리의 악함에 대해서는 벌을 주십니다. 그럼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메 비디트 데우스를 잊지 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상 받을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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