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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5322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시편 1261-6 라온 코이노니아의 놀일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은 머나먼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주전 538년에 포로 생활이 끝나고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어른으로 끌려 간 사람들은 이미 이국 땅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죽었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에서 태어났던 포로 2세들 이였습니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날에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70년이 지났고 바벨론에서 새 삶을 살고 있어 그냥 남아 살만도 한데 그들은 여전히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70년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25:11) 약속하신 그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살고 있던 모든 외국인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 살아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처음 예루살렘 땅에 돌아온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들의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의 기쁨에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때의 감격을 시편 126편 시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 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찬양이 찼다린나라는 말로 무슨 노래를 불렀다가 아니라 너무 기뻐서 지르는 소리를 말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너무 기뻐 싱글벙글 어떤 사람들은 길길이 뛰고 춤추며 악악마음껏 함성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70년 전 포로로 잡혀갔을 때의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듯 나라 잃은 슬픔과 앞으로 포로생활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며 가슴을 쥐어 찌듯 통곡하며 끌려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70년의 포로생활이 끝나고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된 그들의 감회는 참으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4절에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번역으로 남방시내라고 하였는데 이스라엘 남쪽 애급과 국경을 맞닿은 네게브라는 광야지역을 말합니다. 남방이라 하지 말고 이름 그대로 네게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네게브는 광야 지대는 거의 비가 오지를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비가 한번 내리면 골자기로 물이 흐르는데 갑자기 큰 시내를 이루어 흐릅니다. 이 시내를 와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목말랐던 네게브광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야생 동물들이 그 물을 마시게 됩니다. 얼마나 시원하였겠습니까?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쁨의 눈물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새롭게 소생하는 희망의 눈물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릴 때 너무 힘들어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 눈물은 수고와 헌신을 통해 얻게 될 열매를 소망하며 흘리는 눈물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126편 시인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여기서 울며 씨를 뿌린다는 말은 노동의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지만, 곡식을 거둘 때는 그 괴로움보다 더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니, 결국 눈물은 기쁨의 씨앗이 되었다란 말입니다.

오늘의 설교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에 돌아온 기쁨을 말씀드리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고향에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쁨처럼 우리의 인생 역시 죄로부터 구원받았으니 우리인생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체조선수로 양학선 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기술종목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지난 올림픽경기장에서 금메달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쉽게 딴 금메달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 계속되었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너무 힘들어 울기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목에 금메달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가 금메달을 땄을 때 그의 어머니가 한 노래를 그에게 불러 주었다고 합니다, 노라조라는 남성 두엣이 부른 ‘(이영준 작사 이상준 작곡)이란 노래입니다. 노래 제목으로는 별로 흥미롭지가 않은데 왜 어머니가 이 노래를 불러주었는가 그 가사를 찾아보았습니다. 가사가 흥미로웠습니다.

 

삶이란 시련과 같은 말이야

고개 좀 들고 어깨 펴 짜샤

형도 그랬단다

죽고 싶었지만

견뎌보니 괜찮더라

 

맘껏 울어라

억지로 버텨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

바람이 널 흔들고 소나기 널 적셔도

살아야 갚지 않겠니

 

더 울어라 젊은 인생아

져도 괜찮아

넘어지면 어때

살다보면

살아가다보면

웃고 떠들며 이 날을 넌 추억할테니

 

세상에 혼자라 느낄테지

그 마음 형도 다 알아 짜샤

사람을 믿었고

사람을 잃어버린 자

어찌 너뿐이랴

 

맘껏 울어라

억지로 버텨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

더 울어라 젊은 인생아

져도 괜찮아

넘어지면 어때

살다보면

살아가다보면

웃고 떠들며

이 날을

넌 추억할테니

 

세상이 널 뒤통수 쳐도

소주 한잔에 다 털어버려

부딪히고 실컷 깨지면서 살면

그게 인생 다야

넌 멋진 놈이야

 

양학선 선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었다니 어머니야 말로 멋진 엄마이십니다.

그런데 이 노래 마지막 구절이 영 맘에 안 듭니다. “세상이 널 뒤통수 쳐도 소주 한 잔에 다 털어버리고” TV 드라마를 보면 억울하다고 소주를 들이키고, 실패 했다고 소주를 들이키고, 애인이 변심했다고 소주를 들이키는 장면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곤드레만드레되고 실수하고 더욱 괴로워하고 소주 마셨으니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과연 소주 한두 잔 마시면 해결되는 세상일이 아닙니다.

한국 지병관리본부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자살한 사람의 39%가 자살 직전에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인생이 괴롭다고 소주 한 병 마시고 아 이제 문제 해결되었으니 잘살아 보자가 아니라 이제 내가 갈 곳은 한강다리뿐이다하는 사람들이 자살자 열 명 중에 3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술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왜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처럼 술에 취하여 살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카이스트 대학하면 우리나라 최 정예 과학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대학교입니다. 이 카이스트대학생들이 학교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인가를 조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동아리방에서 술먹었을 때 두 번째가 선배들이 술 사주웠을 때 세 번째가 후배들이랑 술먹었을 때 네 번째가 엠티가서 술 먹었을 때 다섯 번째가 졸업식에서 술먹었으 때 였다고 합니다. 교수와 함께 있었던 때는 없습니다. 술에 취한 학생들이 스트레스 해소위해 마셨다고 그러면 공부가 더 잘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니요 그 학생들의 혁신과 창의력은 대학생 그 시절로 끝나고 말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의 앞날이 캄캄하다란 말입니다. 왜 요즈음 대학생들이 술에 취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재미가 술먹는 재미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는 매 년 '올 해의 단어'(the Word of the Year)를 선정하는데, 2013년에는 omnishambles라는 단어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이 단어를 "지속적인 실수와 착오가 만들어 낸 총체적 엉망진창 상태"(a situation that has been comprehensively mismanaged, and is characterized by a string of blunders and miscalculations)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올 해의 단어로 선정한 이유는 지금 이 세상이 그런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사상, 윤리 등 모든 면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모든 형편이 엉망진창 뒤죽박죽이란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총체적 난맥상태애 빠져 있다고 합니다.

 

온통 세상이 미처 돌아가는 때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 어떻게 이 뒤죽박죽 엉망진창 세상에서 평안과 행복한 인생을 살 것입니까?

시편 126편에서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지금 위들의 살림살이가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엉망은 아니더라도 진창에 빠진 수레바퀴처럼 헛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시대는 웃음을 읽어버린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웃고 살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방송국마다 개그맨들이 나와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방송국마다 예능이 대세입니다. 아나운서도 예능프로에 나오고 축구선수 농구선수 씨름 하던 사람도 예능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웃는 웃음은 그 때 뿐입니다. 그 프로가 끝나면 웃음도 사라집니다. 웃어야 건강해진다고 웃음치료사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억지로라도 웃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웃어야 할 이유가 너무나 없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웃는 것이 웃음입니까? 몸은 웃는 줄 아겠지만 마음은 아니라 할 것이니 정신적으로 다중인격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웃을려면 진정으로 웃어야 합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얀 키콜트 글라져 박사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 몸에 난 상처가 빨리 아문다는 실(Jan Kiecolt-Glaser)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여자의 팔뚝에 상처를 낸 다음 아무는 시간을 조사한 결과, 웃고 즐기는 사람의 상처가 훨씬 빨리 아물었다고 합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30대 젊은 나이에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콜레라, 이질, 열병으로 쓰러져가는 병사들과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밤 낮 가리지 않고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백의의 천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는 극심한 피로로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그를 쓰러트린 것입니다. 훗날 학자들은 만성피로 증후군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이 80이 지난 화가 피카소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플라멩고 춤을 추는가 하면 그림, 조각, , 희곡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이유는 늘 웃으며 낙천적으로 일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광대 보건복지학부 김종인 교수팀이 199912월부터 1년 동안 전국의 100세 이상 노인의 장수요인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조사대상 노인은 507명 이었습니다.

첫째,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둘째, 허리둘레가 31인치 이내로 가늘다. 셋째, 매일 운동을 한다. 넷째, 화를 내지 않고 스트레스가 없는 낙천적 성격이다. 즉 매일 웃고 산다. 다섯째, 생선과 채식, 된장국을 즐겨 먹는다. 여섯째, 소식한다. 이상의 요인들이 100세 무병장수를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김종인 교수팀은 1963년부터 2010년까지 48년간 언론에 난 3215명의 부음 기사와 통계청의 사망통계자료 등을 바탕으로 국내 11개 직업군별 평균수명을 비교 분석한 결과 (한국보건복지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보건과 복지최근호에 실렸다.) 48년 치 전체 직업별 평균수명은 종교인이 82세로 가장 높았습니다. 그리고 고위공직자·예술인·작가(74), 언론인(72), 체육인(69), 연예인(65)이였습니다. 김 교수는 유의미한 차이 확인을 위해 연예인의 자살보도는 통계에서 제외했다면서 연예인들의 출세에 대한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조기 출세에 따른 정상적인 생활 및 자기 절제의 어려움 등이 수명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이 통계에서 남을 웃기고 사는 것으로 돈을 버는 연예인들이 정작 자기 자신은 전혀 웃지 못 할 현실 속에 살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종교인이 가장 높은 장수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또는 일반 사람들 보다 정직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실 목회자의 일은 상당히 긴장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평균적으로 장수 할 수 있는 것은 일에 대한 생각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에취!’하고 재채기를 했습니다. “! 감기네. 이를 어쩌지? 내일 중요한 면접시험인데 컨디션이 왜 이 모양이야. 보나마나 내일은 열이 나겠지. 이놈의 감기는 왜 나만 졸졸 따라다녀? 재수 더럽게 없군. 왜 하필 이럴 때 감기야.”라고 생각하고 투덜거리는 순간 실패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락없이 그 사람은 다음날 열나고, 머리는 멍해지고 면접시험에는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취!’하고 재채기를 했습니다. “어이~ 시원하다! 속이 뻥 뚫리네. 속이 시원해지는 걸 보니 내일 면접시험에 붙을 것 같구먼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거야.”라며 !’하고 코를 풀어버리고 준비하는 사람은 다음날 시험도 잘 치루고 일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웃음치료사인 노사카 레이코는 이것을 플러스 발상이라고 했습니다. 즉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을 생각해야 하겠다고 긍정적인 사고가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왜 연예인들의 평균수명이 다른 직업군 보다 짧은가 하면 남을 웃기지만 자기는 긍정적인 인생을 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봉서씨는 90세이고 송해씨는 89세입니다. 송해씨는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본인들 스스로도 긍정적으로 즐겁게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일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겨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하냐 기뻐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사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나운교회에 있을 때에 솔직히 설교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였습니다.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눈앞에 버티고 앉아있는데 그들을 바라보며 설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였습니다. 설교할 때 마다 저는 영적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만일 제가 괴로워하였다면 마귀에게 지는 일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 귀 있는 사람에게 전한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였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설교를 하셨는데 그때마다 율법사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지켜보고 흠을 잡고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설교하기를 멈추지 않으셨고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보니 나운교회에서 들을 귀 있는 사람들이 누구였었는지 알겠습니다. 바로 여기 있는 여러분들입니다. 제 설교가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와는 좀 다르죠? 좀 듣기에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안다는 사람들의 귀는 막으시고 어린아이의 귀를 열어 주심을 감사합니다고 기도하신 것처럼, 저도 스스로 잘났다고 교만한 사람들의 귀는 막으시고 여기 할머님들의 귀를 열어 주심을 저는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즐겁게 기쁨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의 설교제목이 바로 라운 코이노니아의 놀일 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놀이가 일이다. 일이 놀이다란 말입니다. 우리가 놀이라 하면 일의 반대로 생각합니다.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자고 말합니다. 늙어서는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노새 노새 젊어서 놀자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아주 틀린 말입니다.

 

놀이란 말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 드립니다. 옛 날 어떤 사람이 큰 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눈을 뜨고 귀를 기울려 보니 바로 나무에서 들려 왔습니다. 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 흔들거릴 때마다 윙윙 삭삭하며 소리가 들리니 나무에 있는 신이 춤을 추며 노래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무의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나도 그렇게 흉내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노래와 춤의 유래입니다. 그래서 노래와 춤은 신에게 바치는 제의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냥을 할 때나 농사일을 할 때나 신의 도움을 받으면 잘 되리라 생각 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놀이는 노래 부르는 일 즉 신을 즐겁게 하는 일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래서 놀이와 일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말입니다. 즉 놀이를 일처럼, 일을 놀이처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는 인간을 일하는 인간 homo faber’ 이고 또 놀이하는 인간 Homo lugens’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놀이는 감정을 자극하는 일이고, 일은 이성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과 놀이는 나의 본능이고 의지이고 행위입니다. 흔히 논다라고 말할 때 작난친다라고 말합니다. 작난과 놀이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작난은 특별한 목적과 규칙이 없습니다. 그러나 놀이에는 목적이 있고 규칙이 있고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영어로 놀이를 play라고 합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친다고 할 때 play piano라고 말합니다. 농구한다고 할 때 play basketball 이라고 합니다. 운동경기 할 때 응원단들이 응원할 때 ‘play play 우리 선수 잘 한다고 응원합니다.MBC TV의 무한도전 프로를 보면 유재석 박명수 정형돈 등이 항상 새로운 도전과 미션을 수행함으로 싳자들에게 웃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프로를 보면 다 큰 어른들이 잘 놀고 있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그들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play는 일입니다. 피아노 연주하는 것이 놀이가 아닙니다. 피아니스트에게는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에게는 놀이입니다. 농구선수에게 농구는 놀이요 개그맨들에게 개그는 일입니다.

왜 사람들은 일을 할 때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일을 놀이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 까요? 아니요 전혀 힘들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역사는 하나님의 일로 놀이였습니다. 그래서 창조하신 일을 보실 때에 좋았고 즐거워하셨습니다. 인간적인 표현을 한다면 좋으셔서 깔깔거리시며 박수를 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평생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괴로워하시거나 스트레스 받았다고 호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누가 비아냥거리고 시비 걸어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즐겁게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예수님의 놀이이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청년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였습니다. 즐겁게 놀다가 교회에 들어와서는 긴장하고 목에 힘을 주고 권위를 내세우고 그것 때문에 피곤해 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즐거움을 다시 이해해야 합니다. 열심히 공을 차고 즐거워하였으면서, 목회는 피곤하다고 스트레스 쌓인다고 괴로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목회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목사도 목회를 놀이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저는 이제까지도 그리하였지만 지금도 목회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목회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이 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43년 만에 가장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여러분과 하께 하는 이 즐거운 라온 코이노니아 여기는 놀이의 장소요 기쁨의 장소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동무들과 밤 12시가 되도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란 놀이를 하면서 교회 앞마당에서 놀았습니다. 그때 즐거웠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코끝에서 기쁨이 몽골몽골 솟아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주일날만 되면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운 라온 코이노니아 시간을 가지니 다시금 코끝에 기쁨이 몽골몽골 솟아나오니 不亦樂乎아라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의 말씀에,

배우고 때에 알맞게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을 조금 바꾸어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전하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성도들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도리어 기뻐하니 또한 하나님의 자녀 아니던가!“

 

오늘의 시편126: 3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우리는 기뻐하는 자이다!)”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힉귿딜 야훼 라아소드, 임마누 하이누 세요.)

신앙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놀이하는 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또 내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기쁨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기뻐하시는 일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로서 놀이가 됩니다. 천국놀이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성도들이 함께 놀이하며 기뻐하는 자(세요)입니다. 놀이로서 일하면 즐겁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들이 함께 믿음 생활하는 천국놀이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기쁨이 넘치고 성도들은 하하호호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직장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이라고 생각하면 직장일이 즐겁습니다. 그곳이 천국직장입니다. 일의 능률도 오르고 다른 동려들과도 재미있게 일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하는 게 행복하고 일하는 게 보람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과 가족들과 하께 재미있게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며 가정에 기쁨이 넘치고 화목한 천국가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라온코이노니아 가족들의 직장일 가정일 교회일 그 모든 일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천국 놀일 입니다. 천국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나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과 함께 천국 놀 일을 하고 영생토록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든 놀일, 가정과 직장과 모든 행사에 함께하시고 평강과 기쁨을 더하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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