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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7월 21일 주일아침 설교 롬 15:1-6 예수 닮기(π)근사치

 

 

이 컵의 밑면의 둘레 길이가 몇 cm가 될까요? 공식이 있습니다. 지름x3,14=입니다. 그러면 이 컵의 지름이 5cm로 x3,14하면 15.7cm입니다. 그러면 이 컵 밑면의 넓이는 어마가 될까요? 역시공식이 있습니다. 반지름x반지름x3.14=입니다. 반지름이 2.5cmx2.5cmx3.14는 164.85cmcm입니다. 이 계산에서 중요한 것은 3.14입니다. 원둘레를 지름으로 나누면 3,14.....가 나오는데 이것을 원주율이라고 하고 기호로 π(파이)라고 합니다. 수학의 역사에서 이 파이π의 발견이 아주 중요한 발견이라 하겠습니다. 이 파이π는 이미 고대 이집트인들이 알고 있었으며, 수학자들은 성경에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에 이 파이 π계산이 적용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212)는 파이π에 근접한 값을 계산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이 π기호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1647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오트레드(1575-1660)로 처음으로 파이 π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파이π 계산은 오늘날 우주과학에 까지 모든 과학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수치입니다.

 

영국 웨일스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1675~1749)는 자신의 책 《새 수학 입문서》에서 원둘레를 뜻하는 ‘πρτψετετα(periphery)’의 첫 글자인 π를 따서 원주율 기호로 처음 사용했으며, π를 ‘3.14159 andc. [sic]=π’로 기술하였습니다. 그런데 1767년 독일의 수학자 람베르트가 파이π를 아무리 계산해도 끝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이의 값은 소수점 아래 20자리까지 쓰면 3.1415926535 8979323846입니다. 이 파이는 무한소수로 연구가들은 지난 2016년 11월 11일 Peter Trueb이 105일 동안 22조 4591억 5771만 8361자리까지 계산하였다고 합니다.

 

세계 수학학회에서는 파이π의 수 3.14159에서 3월 14일을 파이π의 날이라고 정하고 오후1시 59분에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7월 22일을 파이π의 근사치의 날이라고 또 기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2를 7로 나누면 3.14...π의 근사치(≒)가 되기 때문입니다.(12월 21은 1년의 355번째 날로 355를 113으로 나누면 3.14...π의 근사치가 되기 때문에 오후 1시 13분에 파이π 근사치 기념식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내일 7월 22일은 세계 수학자들이 파이π의 근사치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왜 오늘 파이π의 근사치의 날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가하면 우리 믿음(피스티스πίστις)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마치 원처럼 우리를 빙 둘러 보호 하여 주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위로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보혜사가 헬라어로 ‘파라크레토스παράρκκλητος“로 헬라어 파이π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X)는 우리 믿음의 파이π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거리r x Xπ ≒ rXπ 예수근사치가 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예수처럼 되지는 못하고,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 가고 있는가? 에 대한 예수 근사치가 곧 우리의 믿음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성삼위 의미로 π의 첫 머리 수 3. 이라한다면, 소수점 이하 그다음 1에 해당한수는 아마도 베드로일 것이고, 4는 요한, 이렇게 12사도들일 것이고 그다음 13번째 7이 사도 바울이고 그러면 우리는 몇 번째 가 되겠습니까? 1415926535 8979323846....1000번째 가면 ...2164201989로 9번째 이고 1만 번째 ....55256375678로 8번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이 자리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이하 죽 내려 10억 번째 자리 수가 9인데, 그러면 저는 이 10억 번째 쯤 자리가 예수님 가까이 자리가 될까요? 현재 세계적으로 기독교인이 25억이 넘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계산해 보면 19억4442만 번째쯤은 될 것이 아닐까? 하순녀집사님은 19억3082만 3000번째이고, 김용섭집사는 19억6801만8000번째라고 할수 있을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 저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를 보신다면 가물가물하여 망원경으로 바라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들의 자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몇 번째 쯤 일까요? 그러나 너무 멀다 섭섭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편 17:8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 저 있다 하여도 파이π 되시는 예수님 중심에서 벗어 나가 있지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눈동자에 담아주시고 주님의 팔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 가까운 거리의 근사치가 되느냐? 얼마나 예수님을 얼마나 닮게 가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보람과 승리와 만족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해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두어야 합니다. 왜 인생을 사는 가? 누가 묻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대답하여야 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짐심으로 진심으로 예수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

 

우리는 완전히 예수님을 꼭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근사치로 닮아는 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기리요 깊이요 높이요 넓이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닮아가는 근사치에 있는 우리의 자리가 어디 쯤 일까? 판단의 기준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알아보려 합니다.

 

첫째로 약자와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학생이 혈액암을 치료하므로 머리가 다 빠졌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옆자리 친구가 자기도 머리를 모두 깍아 빡빡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친구들도 머리를 밀었습니다. 급기야 그 반 학생들 모두가 빡빡 머리가 되었습ㄴ다. 이런 아이들의 우정을 본 담임선생도 머리를 깍아 빡빡 머리가 되었습니다. 친구의 아픔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이웃의 연약함을 있는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모습이야말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근사치의 자리는 약한 자와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얼마나 약한자에게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예수님께 보다 가까이 있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봉독한 롬15: 1절에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약점은 헬라어로 “타 아스데네마타”로 연약함을 말하고 “담당하고”의 헬라어는 “바스타제인”으로 “무거운 것을 짊어지다”란 의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연약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 주시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건강하다면 연약한자의 슬픔을 나눠지고 우리가 물질로 넉넉하다면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의 고난의 짐을 나눠 질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서 기쁨이 있다면 낙심하고 인생을 괴롭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기쁨을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예수님을 근사치 닮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둘째로 인내와 위로의 자리를 펴야 합니다.

5절에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위로는 근심과 걱정에 있는 이에게 격려와 소망을 주는 일입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씀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4절에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제가 제주복음교회에서 목회할 때 일입니다. 한라산에 올라가는 길이 4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4길을 통해 한라산에 올라갔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길로 올라가다가 문뜩 생각하기를 그런 정해진 길 말고 다른 길을 개척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상 코스를 벗어나 새 길을 개척해 보겠다는 용기로 올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길이 어찌 심한지 계곡을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나무숲을 헤치고 바위를 타 넘어가고 몇 시간째 그렇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쯤이면 정상이 이를 터인데 가도 가도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생각하고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계곡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관목숲을 헤치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바위를 타고 이리저리 내려갔는데 몇 시간째 내려가도 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헤메고 있는데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한라산에 인삼 씨를 여기 저기 뿌리고 몇해 후에 거두러 다니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당신은 여기서 무얼하고 있습니까?” 나는 얼마나 반가운지 “한라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었는데 도무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웃으면서 “당신은 지금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라산에서 길을 잃으면 산을 헤매다 지쳐서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고 말하며 자기 따라 내려가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다니면서 기도하기를 내려갈 길을 알려 주시옵소서 수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만나게 해주셨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9시에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집에 오니 밤 9시였습니다. 꼬박 12시간을 한라산에서 헤매었던 것입니다.

인생에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세상으로 급히 내려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인생 인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좋은 인도자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가야 합니다. 비로서 그때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나 갈 길을 보게 됩니다.

(복232 주님여 이손을 꼭잡고 가소서---)

2절“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에 주님여 날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소리 귀기울이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닮아가는 사람은 바로 인내하며 예수님의 말씀가운데서 위로와 소망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있는 그 자리가 인내와 위로와 소망이 있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자리인가를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을 닮아가는 근사치 자리는 뜻을 같이 하는 자리입니다. 5절 하반절에 “뜻을 같이 하여 주사” 이 말씀에서 뜻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프로네오’라는 말로 ‘이해하다 배려하다 마음을 두다“란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내 생각에 따라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의중을 생각하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을 모으는 일을 말합니다. 요즈음 세상은 사분오열 이리저리 갈래갈래 쪼개지고 나눠지고 있습니다. 우익이니 좌익이니 진보니 보수니 정치권이 나눠 저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정부는 민생을 살리기 위한 시급한 추경예산 집행을 해야 하는데 당리당략으로 이것을 국회에서 논의조차 안하고 6월 국회도 끝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일본산 불매 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적 압박은 새로운 침략이라고 할 것입니다. 112년 전 우리나라 고종황제가 헐버트 선교사를 통하여 은밀하게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보내어 한국을 도와 달라고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일본에게 이 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일본의 이등박문은 노발대발 하여 고종황제를 겁박하여 폐위시키었습니다. 지금 일본의 아베수상은 마치 이등박문 같고 트럼프 대통령은 루즈벨트 같다고 하겠습니다. 한 일본인 언론인은 공개적으로 한국에서 문재인대통령을 탄핵해야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당시 여기저기에서 의병들이 일어났지만 이완용을 비롯한 당시 보수파들이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아들 순종을 강제로 황제자리에 앉혔습니다. 결국 일본은 강제로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109년 전 일입니다. 여기서 일제물건 안사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의병과 같습니다. 그러나 109년 전의 우리나라와 오늘의 우리나라는 전혀 그 위치가 다릅니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만만히 보던 109년 전 과는 전혀 다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 강력한 국가입니다.

그런데 우리 백성들이 불매운동을 하는 것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적 앞에서는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싫든 좋든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여야가 하나 되고 진보와 보수가 하나되고 노동자들도 자기 이익을 위해 시위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모두가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과 야당이 한마음으로 일단 오늘의 일본과의 경제적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함께 하나 되어 싸워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와의 싸움이니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만5천 귀신을 섬기는 우상국가 일본과의 경제적 싸움이기 전에 먼저 영적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일본을 억누르고자 함이 아니요 이때가 일본사람들을 우상국가로부터 구원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하나 된 한마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나 또 평신도들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근사치 마음으로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요 네 마음이 내 마음인 나와 너가 하나 된 그 마음의 자리가 가장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8절에 ”한 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영광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된 자리입니다

엡5:1,2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몸은 찢기어지고, 주님의 피는 흘리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죄악 대신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제물 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고, 만세 전부터 섭리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보리에서 드려진 희생 제물은 하나님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상달이 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었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 완전한 사랑에 가까이 나가기 위해 우리의 근사치 십자가 사랑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근사치의 사랑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람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여 친절한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에는 별반 놀라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라도, 그러한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 하는 것은, 우리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행하신 방식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사,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까다로운 사람들, 비열하고 싫어할 만한 사람들, 가장 어리석고, 우리를 핍박하고, 우리를 악하게 대접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에라도, 주님이 우리를 대하신 것처럼,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랑 가운데 행하라!(페리파테이테 엔 아가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들을 바라보면서 불쌍한 마음을 가지라! 그리하여 그들을 건져내야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라! 무릎을 꿇고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라! 참으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특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라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근사치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결코 그러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며, 얼마나 큰 영예이며, 얼마나 높은 부르심인지 모릅니다.

 

작가 김동인씨가 쓴 ‘발가락이 닮았다’는 단편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결혼 전의 한 남자가 허랑 방탕을 일삼다가 생식 능력을 잃게 되는데, 그 사실을 숨긴 채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뜻밖에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고,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이가 반년 쯤 자랐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제 아비를 닮은 데가 없습니다. 번민이 이반 저만이 아니지만, 결국 그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발가락은 다른 사람과 달라서, 가운데 발가락이 긴데, 아들의 발가락이 꼭 자기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외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아도 하나님을 닮은 데가 전혀 없다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하나님을 본받고 닮은 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눈도 닮아야 하고, 표정도 닮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외모가 잘생기고 못생기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얼굴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듯이, 우리의 눈동자 속에서, 우리의 언어 속에서, 우리의 불행을 통해서, 우리의 고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은 말함으로 배우고, 노래는 노래함으로 배우고, 권투는 권투를 함으로, 일은 일함으로 배우듯이, 사랑은 행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서만 키울 수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행함으로서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 파이 π 의 근사치는 곧 예수님 사랑의 근사치 π입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닮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야합니다. 완전한 예수님처럼은 아니지만 예수님 사랑의 근사치라도 아니 세계 기독교인 20억 끄트머리에 있다하더라도 예수님 발가락만큼이라도 닮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귀로부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하므로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하는 증표가 됩니다.

 

라온코이노니아는 우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근사치 자리입니다. 곧 약자와 함께하는 자리요, 인내와 위로의 소망이 있는 자리요, 주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사는 자리인 우리 라온코이노니아에서 하나 된 우리 믿음의 자리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축복하시고 은혜주시는 가장 복된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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