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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금산지역 선교활동

 

금산제일교회

 

금산에 여러 교회가 있어 방문하였지만 관계자를 만나지 못하기도 하고, 만났다해도 전혀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6.25전쟁 때 교회자료들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금산의 대표적인 교회인 금산제일교회를 탐방하고 여러 자료와 소식을 듣게 되어, 금산제일교회의 역사와 인물 그 수난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금산은 온통 산으로 강으로 둘러싸인 고장이다. 금산이 금수강산의 줄임말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금산은 그만큼 산과 강이 수려하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란 뜻일 것이다.

 

금산을 주위로 하여 한국 100대 명산중의 하나인 대둔산과 운장산이 인접하고 있으며 충남의 최고봉 서대산 과 영동의 천태산과 월영산이 금산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유유히 흐르는 금강은 금산의 이름이 글자 그대로 금수강산 이라 불리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느끼지 못 하게한다.

 

또한 천하절경 12폭포와 역사의 요람 칠백의총은 금산의 이름을 빛내는데 일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금산에서도 특히 진악산은 순전히 금산 군내에 위치하고 금산 읍내를 조망하기 에는 더 없이 좋은 산이고 천년고찰 보석사와 신비의 샘 영천샘 으로 유명한 영천암 을 품고 있으며 산명에서 알 수 있듯이 시와 더불어 즐겁게 산행할 수 있는 금산의 진산이라 할 것이다.

 

원래 전라북도 금산군에 속하였었으나, 1963년부터 현재의 충청남도 금산군이 되었습니다. 금산군 중앙부에 금산읍(錦山邑)이 있습니다. 읍의 면적 21.54 km2. 9개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940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북쪽으로 구릉에 의해 금성면·군북면, 동쪽으로 봉황천에 의해 남일면, 남서쪽으로 진악산 줄기와 구릉에 의해 남이면·진산면과 접하며, 작은 분지를 이루었습니다. 읍의 중앙을 작은 하천들이 동류하여 평지를 이루었습니다. 벼농사와 인삼재배가 활발한데, 많은 농지가 고장의 특산물인 인삼 재배지로 이용되고, 또 산지가 여름에도 서늘하여 1모작이 많기 때문에 식량의 자급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인삼 재배지는 인삼재배 후에 사과 과수원으로 전용되기 때문에 인삼과 더불어 사과 생산도 많았습니다. 이곳은 또 군내 각지 및 인접한 각 군을 연결하는 도로교통의 중심지로, 2일과 7일에 정기시장이 열려 인삼을 비롯한 농산물의 집산이 활발하다.

 

이곳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구역인 관계로 전주 선교부에서는 금산구역을 비롯해서 무주군, 장수군, 진안군, 임실군, 완주군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전주 선교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더구나 충청남도 영동군과 그 경계가 맞닿아 있었습니다. 미국 남장로교회 멕커첸선교사는 이런 곳을 멀다고 외면하지 않고 이 지역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금산지역을 맡았습니다. 또한 그는 익산군 동부 일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1905. 03. 16 논산에 있는 감리교회의 청년전도대가 금산읍에 와서 전도를 하였는데 청년 여러명이 청년회에 가입하였고, 이들을 데리고 이경필씨가 자기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려ㅆ습니다. 선교지역 분활에 따라 이곳은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지역이 되었습니다. 멕커첸선교사와 조사 최대진이 와서 학습교인 7명을 세우고 교인이 많아졌고 사정을 읍내 유직들에게 교섭하여 중도리의 집을 영구히 임대받아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멕커첸선교사는 교회 내에 삼광학교를 설립하고 1909년 이원필이 장로 장립을 받습니다. 1914년 10월 10일에는 개복동교회에서 있었던 전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포 양림교회, 모슬포교회 광주제일교회에서 시무하게 됩니다. 1917년 8월 24일 전북노회장으로 피선되는데 이때에 전북노회와 전남노회가 분립됩니다.

1915. 03. 임구환이 제 2대 장로 장립되고, 1921. 08. 23 이춘원이 제3대장로 장립도며 이때에 부흥사경회 후 3,000원을 연보하여 면적 20칸의 기와 예배당을 신축 하게 됩니다. 이춘원장로는 1924년 1월 24일 목사 안수를 받고 전북완주군 소룡교회와 서천지역에서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멕커첸선교사는 혼자 넓은 선교 활동지역을 감당할 수 없어 전주 선교부를 통해 전주 성경학교를 설립하고 전도사를 양성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덕봉장로입니다. 그는 1900년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에서 인삼을 경작하는 이춘구과 손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이덕봉이 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금산에 첫 발을 내디딘 멕커첸선교사는 금산읍 장날 서툰 발음으로 “여러분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라고 복음을 전했고 바로 이때 이덕봉의 아버지가 장에 나왔다가 예수를 영접하고 금산읍교회 초대 교인이 되었습니다. 금산읍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멕커첸선교사는 초등학교 과정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심광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였습니다. 이덕봉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심광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전주 선교부에서 설립한 전주 신흥학교를 다니었습니다. 그가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멕커첸선교사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전주 신흥학교 중등과를 졸업하자 멕커첸선교사는 이덕봉을 장차 목회자로 키우고자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전주 성경학교에 진학시켰습니다. 이덕봉은 방학이 되면 고향 교회에 와서 집안일은 물론 성경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하기학교 봉사팀을 만들어 금산군 일대와 그 옆의 무주군에 속한 교회까지 다니면서 봉사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멕커첸선교사는 이덕봉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이덕봉 학생, 이제 성경학교를 졸업하면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앞으로 전북지방의 목회자가 되어 나와 함께 교회에서 사역하는 게 어떤가?”

 

“선교사님의 그 말씀은 참으로 감사합니다만 저의 숙부 이춘원과 조카인 이재봉이 모두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인삼밭을 운영해서 두 분의 학비를 충당해야 합니다. 그냥 조사로 남아 사역하겠습니다.”

 

이덕봉은 계속해서 금산 역평교회 조사로 사역을 했고 교인들은 그를 장로로 피택했으며, 역평교회의 당회장인 멕커첸선교사의 집례로 장로 장립을 받았습니다.

 

장로가 된 이덕봉은 평소 자신이 섬기고 있는 금산 역평교회에서만 아니라 인삼을 재배하면서 얻은 수입 가운데 십일조도 헌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멬커첸선교사가 1938년 신사참배 반대 문제로 철수하는 일이 일어났고 이러한 문제는 그의 모교인 전주 신흥학교를 비롯해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했던 전주 기전여학교, 군산 영명학교, 군산 맬본딘여학교, 목포의 목포 영흥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광주의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순천의 매산학교가 모두 폐쇄되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철수 하였습니다.

 

1940년 선교사들이 완전히 철수하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를 실시하면서 교회를 맡을 수 없다는 교역자가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교역자가 부족한 상황에 이르자 이덕봉장로는 이웃에 있는 수영리교회의 청빙을 받고 교역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 총독부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고 나섰습니다. 과거 조선총독부는 철저하게 조선에 대해서 차별정책을 펴 오다가 갑자기 조선과 일본본토는 하나라는 뜻으로 내선일체를 앞세우고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갔습니다.

 

이 일로 금산에서는 많은 청년들이 일본군의 징병으로 끌려가고 심지어 여성들은 근로봉사대라는 미명으로 위안부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중에서도 이덕봉장로는 더 열심히 기도했고 “우상을 숭배하면 나라는 망한다”는 확신에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정오를 기해 일본 천황(왕)이 연합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덕봉 장로는 마을 청년들을 불러 모아 거리로 나가 손수 그린 태극기를 흔들면서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어느덧 많은 회중이 모여들자 그 행렬을 수영리교회 안으로 인도하고 해방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수영리교회는 매 주마다 새로운 교인들이 등록하면서 부흥하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금산까지 점령해 들어왔습니다. 이덕봉장로가 수영리교회에 나타나자 인민군은 곧 그를 체포하여 인민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죄목은 멕커첸선교사의 앞잡이였다는 것입니다. 이덕봉장로의 구제 사업으로 많은 혜택을 입었던 사람들이 구명운동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9월 22일 유난히도 달빛이 밝던 날 그는 순교하였습니다.(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이덕봉장로 이야기를 조금 더 다음페이지에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2015년 3월 8일 금산제일교회가 창립한지 110주년을 기념하여 감사예배를 드리었습니다. 금산제일교회는 1905년에 설립된 후 충청남도 금산군 기독교의 모교회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금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이 교회는 교인수와 사역의 다양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통해 1908년에 금산지역 최초로 신광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 학교는 교육사업과 군민들의 계몽활동을 감당해 왔습니다. 이 학교는 일제시대 때 정부의 일방적인 통지로 폐교된 후 중앙초등학교와 합병되었습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 자리에 애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와 미마인들을 섬겼습니다. 또한 교회 설립 1년 후인 1906년부터 지역교회들을 세워 상가교회를 비롯한 요광교회, 역평교회 등을 개척했다. 지금도 교인들은 금산지역의 대표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12.11 기독교신문 발췌)

 

 

이덕봉장로(李德奉1900~1950)

 

앞서 이덕봉장로에 대한 소개가 있었지만 닷 부연하여 소개하려 합니다.

1902년에 20대의 미혼 청년선교사로 한국에 온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멕커첸은 앞에서 소개한바 있습니다만, 서울에서 어학교육을 받은 뒤 1903년 전주에 와서 일제 말기 강제추방령으로 한국을 떠난 1941년까지 38년 동안 전북지방에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며 헌신적으로 사역하였습니다.

금산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충남 논산에 있던 미 감리교 청년전도대가 금산읍을 드나들면서 부터였습니다. 이때 기독교를 접한 이경필은 멕커첸선교사와 그의 조사 최대진과 동행하며 금산 읍내에서 7명의 신자를 얻었고, 임시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금산읍교회(현, 금산제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멕커첸선교사는 교회 내에 심광학교를 설립하고 근대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1889년 12월 8일 충청북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382번지에서 부친 이구봉씨와 모친 손성녀씨 슬하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일찍 부친을 여읜 이덕봉은 숙부 이춘원의 전도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금산읍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덕봉을 눈여겨본 멕커첸선교사는 그가 심광학교를 졸업하자 전주 선교부에서 설립한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전주 신흥학교 중등과를 졸업하자 이덕봉을 장차 목회자로 키우고자 자신이 운영하는 전주성경학교에 진학시켰습니다. 이덕봉은 방학이 되면 고향 교회에 와서 집안일을 돕는 한편, 성경학교 학생들과 하기학교 봉사팀을 만들어 금산군 일대와 무주군에 속한 교회까지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어느덧 이덕봉은 성경학교 3년 과정까지 다 이수하였습니다. 하루는 멕커첸선교사가 그를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로 자신과 함께 전북지방 교회에서 사역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덕봉은 인삼밭을 운영해서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인 숙부 이춘원과 조카 이재봉의 학비를 충당해야 한다면서 제의를 거절하고 평양신학교 진학을 포기하였다.

 

이후 이덕봉은 조사로 임명 받고 금산읍교회를 비롯해서 부림교회, 금성교회, 내밀교회를 돌보면서 목회하였습니다. 특히 역평교회 예배당은 그가 직접 설계하였을 뿐 아니라, 건축과정에서도 자신이 집에서 키우던 소를 팔고, 직접 경작한 인삼밭에서 난 인삼도 팔아서 건축 경비에 보태서 예배당을 완공하였습니다. 이렇게 건립한 역평교회에서 이덕봉은 장로로 피택 되어 당회장 마로덕 선교사의 집례로 장로 장립을 받았습니다.

 

한편 1938년 신사참배 반대 문제로 이덕봉의 모교인 전주 신흥학교를 비롯하여 미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학교들이 모두 폐쇄되었고 1940년 마로덕 선교사 등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하였다. 그리고 미 남장로교 선교부의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은 교역자들은 일본의 강요에 신사참배를 하면서 교회를 맡을 수 없다는 교역자가 속출하였다. 이같이 교역자가 부족할 때 이덕봉장로는 수영리교회의 청빙을 받고 무보수 전도사로 시무하였습니다. 한편 이덕봉은 인삼재배 수입으로 생활하고 십일조를 성실히 하며 가난한 교인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신기하게도 그의 인삼밭에서는 질 높은 인삼이 재배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장날이면 이덕봉장로 밭에서 나온 인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삶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은혜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 가운데서 “우상을 숭배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졌던 그였기에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격은 누구보다 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6.25전쟁은 충북 금산도 예외없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당시 이덕봉은 충청북도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수면 부면장 직위와 국가의 일로 조직된 대한청년회에 관련된 것으로 그것이 반동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공산당은 이 교회의 예배를 중지시키고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치는 것도 그만두게 하였으며 누구든지 예배행위를 하는 신도는 반동으로 취급하여 엄벌에 처한다는 경고문을 교회당 앞에 붙여 놓고 잠복하며 감시하였습니다.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도 이 장로님은 매일 새벽과 황혼길에 흰 바지저고리와 흰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교회 입구 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하셨습니다. 교회는 공산당들이 출입구를 봉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공산당 좌익 사상가들은 그를 금산군 중앙에 있는 내무서를 동원하여 반동분자로 낙인을 찍고 연행하였습니다. 이 때 같이 수감된 사람 중에 정은석집사도 있었습니다. 공산당들은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기울어지자 9월 25일 금산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43명이 군북면 호티리 비비미재로 끌고가서 구덩이를 파게하고 묶인 채로 가슴과 머리 등 온 몸을 맞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쓰러진 이덕봉장로에게 총을 쐈습니다. 그 중 한 총알은 목을 관통하게 되어 이덕봉장로는 순교하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장24절)

(연합기독뉴스.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멕커첸 선교사가 선교활동하던 당시 교회가 35개 이상이었으며 현재 금산군은 인구 5만여 명이 인삼과 약초을 재배하는 지역으로 120여 개의 교회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지역라고 하겟습니다.

 

 

‘실학로(實學路)’.

 

조선 후기. 성리학의 관념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실사구시의 학문태도를 강조한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 외에도 유형원 이익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김정희 최한기 등이 이 사상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세력가들은 정약용 등 실학사상을 지닌 주로 남인계의 이들을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대참수를 감행하였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 실학을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삼고 있습니다.

 

도로명이 실학로입니다. 정약용이 태어난 경기도 양평이나 그의 유배지 전남 강진에 있는 길이 아닐까?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실학로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있습니다. 대둔산 자락 아래 산골 동네입니다.

 

이 ‘역사 이름 길’은 6.5㎞. 서대전역에서 635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 보면 15㎞ 지점에서 대둔산 쪽으로 이어집니다. 올해 전면 시행된 새로운 주소 체계에 따라 붙여진 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 실학로 중간 지점이 지방리, 지방장로교회와 천주교 진산성지성당이 800m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신,구교 교회 두 곳이 실학로로 명명된 이유입니다.

 

금산제일교회 은퇴장로로 지역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는 류흥수장로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1791년 바로 이 마을에서 조선을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인 ‘진산사건’이 발생합니다. 실학자 윤지충(1759∼1791)과 권상연(1759∼1791)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참수당하는 사건 말입니다. 이곳 출신인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면서 한국 기독교 최초 순교자입니다. 그가 어머니 권씨 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왔고 교리에 따라 위패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종사촌 권상연도 함께했고요. 이 벽촌에서 일어난 제사 문제가 조선 정국을 뒤흔들 줄 누가 알았겠고, 하나님 믿는다는 이유로 3대가 멸문지화를 당할 줄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진산성지성당 출입구 오른쪽엔 두 순교자의 기념비가 나란히 있습니다.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 조정에 알려졌고 정파 싸움의 빌미가 됐죠. 정약용 등 소위 남인 제거를 위한 ‘신유박해’의 시작이었죠. 진산은 지금도 산에 둘러싸인 오지인데 당시엔 어떠했겠습니까? 중앙정부의 관심 지역이 아니었죠. 진산관아에선 바로 윤지충을 체포했어요. 권상연은 관아에 자진 출석해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신앙이 아니라며 항변했으나 먹힐 리 없죠.”

 

류 장로는 한참을 설명하다 교회 앞길에 대해서 말을 이어갑니다. 이 길이 ‘실학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소명해 그 명칭을 관철시키었습니다.

 

“이쪽이 전주(全州) 방향입니다. 진산은 당시 전라도 땅이었으니까요. 두 순교자와 권씨, 윤씨 3대가 손발이 묶인 채 전주 감영으로 향했겠지요. 그때 전주 가는 길이 오죽 험난했겠습니까? 죄인을 말 태워 보냈을 리 없고 순전히 산길을 걸어서였겠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세 살배기까지 죽였어요.”

 

팔순의 장로는 이렇게 설명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후좌우를 둘러봐도 산만 보이는 동네. 한양이 걸어서 보름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윤지충, 권상연에겐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며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해 12월 8일 끝내 전주 감영에서 참수됩니다.

 

패역한 땅 진산 이 땅에 신, 구교와 여러 종교들이 퍼져 있습니다.

 

이렇게 패역한 성읍 진산은 당연히 폐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유배자, 몰락한 양반, 전쟁 및 범죄 도망자 등이 몰렸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노인들은 “산세가 험하니 당연히 기가 센 땅이 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합니다. 때문에 진산 사람들은 기복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연유로 지금도 이 지역엔 크고 작은 사찰은 물론 무속, JMS, 구원파 등 종교적 특수성이 어느 지역보다 크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JMS 정명석교주가 태어난 석막리란 곳은 그들에 의해 성역화(?)되었습니다.

 

18세기 말 두 순교자의 피는 100여년이 지난 뒤 한국사회에서 흔치 않은 자생적 개신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집니다. 지금의 지방리교회(당시 명칭)입니다. 설립연도가 문서상으로는 1906년, 구술상으로는 1903년인 금산지방 첫 교회가 바로 이곳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류 장로는 “집안 구전으로는 할아버지 류기택(한학자·1860∼1919) 어르신께서 1903년 서울에서 YMCA 창립 멤버로 가입하시고 1903년 12월 12일 사랑방에서 ‘기독청년’이라는 간판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부모님께 수없이 들었다”며 “하지만 ‘지방리교회사’는 190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지방리교회는 초대 영수 류기택에 의해 진산 및 금산 복음화에 불을 붙이였습니다. 류기택은 미국남부장로교 선교사들의 지원으로 1909∼1919년까지 매서인 및 권서인으로 활동하며 구령 및 문명퇴치 교육에 힘썼습니다. 또 그는 1909년 대한제국의 인가를 받아 교회 안에 4년제 민족학교 심상소학교를 세웠습니다.

 

“1907년 무렵 두메산골 교회였지만 교인이 100명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하였습니다”며 “초대 당회장으로는 남장로교회 메커첸선교사이나 워낙 산골이라 연 2회 정도 순회하며 문답과 성례전을 집례했습니다”(현재 양광연 담임목사)

 

그리고 이 교회를 중심으로 배출된 기독교 인재들은 1914년 진산군이 금산군에 흡수되면서 금산 지방의 초기 기독교인이 되어 지금의 진산교회 등 곳곳에 교회 설립을 이어갓습니다. 한편 금산군은 1963년 1월 1일 전북에서 충남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향촌사회, “성경 가르침대로 못하겠다”

사실 진산 성읍은 전통적 향촌 사회가 기독교 전래와 함께 어떻게 변해 가는지 엿볼 수 있는 지역공동체라 하겠습니다. 조선 후기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남인 계열 양반이 진산이라는 험한 산세의 향촌에 자리를 틀었습니다. 진보적인 그들은 서학(기독교)을 받아들이며 반상 갈등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류기택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형제요, 평등하다”며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습니다.

 

류흥수장로의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지방리 토호였고 텃도지(가난한 사람이 땅을 빌려 지은 집의 집세를 일걷는 말) 등을 받았죠.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 살기 힘들었죠. 개명한 할아버지가 ‘교회 출석하면 텃도지와 장리를 깎아주겠다. 내 소유 산에서 나무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는데 누가 안 나오겠어요. 지게에 ‘지방리교회’라는 화인도 찍게 했어요. 초기 선교 형태였죠. 한데 문제가 발생해요. 증조부의 경우 ‘상것에게 텃도지 낮게 해줬더니 그것마저 못 내겠다며 버티며 양반에게 덤비냐’며 ‘성경 가르침대로 못 하겠다’고 형님에게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경제적인 것들과 맞물려 지역공동체의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교인이라 하더라도 신분과 처지에 따라 계급 갈등을 겪었던 거죠. 식민 지배와 전쟁 등이 개입되면서 이런 불화가 증폭됩니다.”

 

이 작은 진산 지역만 해도 교회의 분리 개척과 분열 개척 등이 혼재한다. 이 같은 불편한 진실은 어느 지역이나 비슷하다. 현재 인구 350여명에 불과한 지방리만 해도 교회가 세 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탄의 책략 같은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거예요. 이방신이 유독 많은 이곳에서 신앙심이 더 깊어지는 이치와 같죠. 회당은 형제의 하나 됨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품 같은 곳입니다. 진산의 구령운동이 그러했습니다.”

(국민일보 전정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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