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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윌리엄 멕컬리 전킨 목사를 회상하며

아내 메어리 전킨

 

 

1892 년 내쉬빌에서 해외 선교 사업 자원 봉사자 회의가 열렸는데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 (University Theological Seminary)에 다니는 W.D. 레이놀즈 와 카메론 존스턴 (Kerman Johnston)이 참석하였습니다. 전킨 (Wm.M Junkin)은 이 두 학생의 동급생 친구로 이들이 듣고 돌아와 들려준 언더우드 박사의 한국에 대한 호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와싱톤앤리 대학교의 학생이었던 전킨의 영혼에는 이미 선교의 정신이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포맨(Forman)과 와일더(Wilder)가 학생 자원 봉사 운동(SVM)을 위해 여러 학교들을 방문하였을 때 선교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감동에 빠져 이었었던 터였습니다.

 

당시 우리의 남부 장로교 교회는 이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정당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타자기 회사 책임자 인 언더우드 박사의 형제가 기업에 2 천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까지 그들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젊은 자원 봉사자들의 열정을 약화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잔킨은 1865 년 12 월 15 일 버지니아 크리스천 스 버그에서 조지 준킨 판사와 베티 몬테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892 년 11 월 4 일 서울에 도착한 7 명의 선교사들의 선교개척단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동학혁명과 중일 전쟁으로 도착하자마자 3 년 동안 서울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헛되게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장로교 협의회는 한국에서 일하는 모든 장로교 단체로 구성되었으며, 전킨은 94 년에 서기 및 95 년에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한반도의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 선교부를 설치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전킨은 소서문 밖에 있는 개인 주택을 개인 자금으로 구입하고 가족과 함께 이사하였고 드루 의사와 함께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의료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드루 박사와 전킨은 한 작은 범선으로 가족을 옮겨와 군산선교부를 개설하였습니다, 그 집은 밀물썰물이 오고가는 인근 지역에 있는 작은 초가집으로 그곳에서 4 년간 살았습니다.

전킨은 드루박사와 함께 군산의 섬들, 시골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1904 년에 힘에 부쳐 건강에 위기가 왔습니다. 소년 학교를 책임지고 학교 건물을 짓고 선교 훈련 수업을 가르치고, 평양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특히 순회 전도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임무를 전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전주 교회와 그의 선교활동을 반경 6 마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가 그의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선교지역의 사람들이 군산으로 몰려와 그가 떠나는 것에 항의들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목사님을 지키기 위해 서울과 미국으로 전보를 보내려 하였습니다.

 

전주에서는 많은 어려움과 낙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로 우리의 가장 큰 교회 건물을 세웠고 인근 지역 열두 곳에서 예배모임 장소를 세웠습니다.

레이놀즈 박사는 그에게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는 부지런한 성서 연구, 충실한 준비, 주민들에게 알기쉽게 설교를 함으로 그를 인기 있는 설교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여관에서, 증기선이나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수천 명 사람들에게 '계절과 계절에 관계없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15 년 이상의 선교사 생활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많은 위험에 처해 있었고 또 다른 때는 즐거운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 번 그는 해안가에서 거의 배가 난파되는 것을 경험하였고, 폭우로 물이 넘치는 개울을 건너면서 미끌어 떨어졌지만 한 한국인이 그의 익사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는 95 년 간호사 한사람과 콜레라 걸린 사람들의 집들을 방문을 하였습니다. 장마철 어느 안식일 아침에 그는 집에서 16 마일 떨어진 곳에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도중에 그는 어린 소년을 태웠는데, 그는 종종 어머니 등 뒤에 업혀 있어서 짐을 덜어주기 위해 그와 함께 탔었던 것입니다. 논 사이의 길은 좁고 미끄러웠으며, 그래서 당나귀와 짐이 진흙바닥인 논바닥에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 치지 않았지만, 전킨씨의 하얀 여름옷과 모자는 설교강단에 서기에 적합하지 않게 더럽혀졌고, 어린 소년은 마음이 심히 상하게 되고 당나귀에 대한 실망을 하므로 전목사와 함께 다시는 타지 않게다고 하였습니다.

전킨은 예배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가서 예배를 인도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는 전자 코스를 선택했고, 한 마음씨 좋은 여인이 그녀의 남편 흰 두루마기와 헐렁한 한복바지를 제공했지만 양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신발이나 양말을 신지 않고 일어서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설교하는 동안 마음씨 좋은 부인은 근처 냇가에서 전킨의 못을 빨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것을 남편이나 목사에게 좋은 일을 하였는지 여부는 여러분이 판단 할 것입니다.

 

전킨은 1907 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장티푸스 폐렴으로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고통은 처음부터 매우 컸으며, 세 명의 의사와 숙련 된 간호사가 질병의 진행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 떠나기 전에 그가 하였던 일들에 대해서 침착하게 지시 내리고, 한국인들에게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주위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는 다는 것이 좋은 것이요”라고 말한 다음에 “나는-지금-갑니다.-너무-행복합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1908 년 1 월 2 일에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었으며, 군산 선교부에서 3 명의 어린 아들과 함께 랭킨 박사의 무덤 인근에 안장을 하였습니다..

 

그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는데, 한 선교사가 천국으로 가면서 그의 미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절대로 내 일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미국에서 3 년 동안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의 두 장로가 전킨을 기억하는 기념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간단하지만 그의 무덤 위에 비가 놓여 졌음을 발견하고, 그의 이름이 새겨진 교회 종을 보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죽음 이후 몇 년 동안, 주일날 전킨의 이름으로 정겨운 종소리가 사람들에게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땅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를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메어리 모어랜드 전킨(토야)에 대한 단상

오빠 에드워드

 

1) 배경

토야의 조상은 스코틀랜드 계 아일랜드 인 (그리고 장로교 인)이었고,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전킨 (George Junkin)은 워싱턴 대학 (현재는 워싱턴 리 대학교는 그의 삼촌 조지 전킨이 총장으로 있었던 대학교로 조지 총장은 펜실바니아 라파옛 대학(Lafayette College)의 총장으로도 재직하였습니다)에 재학 중에 남부동맹군을 지지하여 한동안 스톤웰 잭슨(Stonewall Jacksion) 장군 밑에서 젊은 장교였습니다.

나중에 할아버지 조지가 판사가 되어 버지니아 주 크리스천스버그에 살았습니다. 그는 직책에서 은퇴했을 때 그의 동료들이 그에게 손잡이가 금으로 된 지팡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전킨 판사의 장남인 토야의 아버지인 윌리엄 멕컬리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이었습니다. 그는 워싱톤 리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렉싱톤에 사는 레이번(Mary Leyburn)과 사랑에 빠졌고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다녔고, 목사안수를 받았고 메어리 레이번과 결혼하여, 1892년 여름, 남장로교회의 파송 받은 다른 다섯 분들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토야의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로부터 지금은 마우리(Maury) 강 북쪽 옆에 큰 농장과 방앗간을 물려 받았으며 건축을 설계하고 짓는 사업가로 있었습니다. 렉싱톤에 있는 석조 성공회당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습니다.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에있는 장로교회 석조 예배당도 건축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재봉틀 부착물을 발명하면서 상당히 창의적인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가 타작기도 발명하였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둘째딸 토야의 어머니인 메어리는 크레용 그림이나 수채화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는 궁멀 우리 방 중 하나의 벽에 세 마리 여우 머리의 크레용 그림을 기억합니다. 토야는 아마도 어머니로부터 예술적인 감각을 받았을 것입니다.

 

 

2) 토야의 부모님

 

토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울의 기와집을 빌려 처음으로 살면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조지가 18개월 사망한 후 제가 태어났습니다. 한국어는 미국인들에게 매우 어려운 언어입니다. 언표의 방법과 형태가 영어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사는 동안 끔찍한 아시아 콜레라 전염병이 발생하여 수천 명이 죽어 갔습니다. 아버지와 다른 여섯 명의 선교사들은 간호사로 자원하여 아무도 질병의 원인이나 확산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정말 영웅적으로 환자들을 보살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씻겨 주고 쌀죽을 쒀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사망률은 정말 무서울 지경이었으니, 격렬한 메스꺼움과 경련 일어 난 후에 보통 하루나 이틀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전염병이 마침내 사라진 후, 한국의 왕은 장식하는 시장 상품이 아닌 왕실의 기술자들이 금과 은으로 세공한 은색 잉크스탠드(*아마도 붓통) 7 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7 명의 자원 봉사한 선교사들에게 궁전 의식을 열어 선물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의 가장 소중한 물질적 소유물을 가지고 습니다. 토야는 아름답게 녹색 청색 세라믹 복제품을 만들었던 그것을 알프레드(Alfred)에게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장 활동적이고 활달한 선교 생활을 통하여, 오늘날 성장하고 번영하고 있는 남한의 군산과 전주 지역에 있는, 전북 지방의 교회들을 "순회"하고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포사이드(Forthyths) 박사와 함께 몇 명의 나병 환자를 모아서 현재 순천에 있는 큰 나병 환자 촌을 시작하였으며, 이 일에 일생을 바친 후 리치몬드로 은퇴 한 윌슨(*R.M. Wilson 1880-1963. 여수 애양원설립 한국명 우월순) 박사에 의해 모범 나병 환자촌으로 발전했습니다.

아버지는 토야가 겨우 10 개월이 되었을 때인 1908년 1월 2일 전주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셨습니다. 그래서 토야는 어버지를 기억할 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봉사에 대한 그녀의 깊은 열망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국에서 일하셨던 다양한 형태의 일들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3) 토야는 1907년 3월 9일,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 성벽에서 약 1.6km 떨어진 선교사들이 있는 언덕의 한 벽돌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위 오빠인 마리온(Marion)은 1905년 8월 23일에 태어났습니다. 17 개월 된 통통한 아이였는데, 아기가 기분이 상해 얼굴을 숙이고 소리 지를 때 내가 유아들에게서 들어보았던 그 어느 소리보다 가장 큰 베이스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 부모는 어머니 이름 메어리(Mary)와 숙모 모어랜드(Sally Moreland)의 이름을 따서 메어리 모어랜드(Mary Moreland)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토야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마리온은 "동생"이나 "여동생"을 의미 할 수 있는 한국어 단어 "동생"을 말할 수 없었고 습관적으로 "토-야 to-ya"라고 발음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온이 부른 대로 토야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평생 동안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토야는 유일한 딸 이였고 3 명의 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매우 사랑 받았습니다. 우리는 아기들을 위한 밝은 회색의 고무풍선 욕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온은 그 안에 아기 목욕물을 넣은 다음 토야를 넣었습니다. 때때로 날씨가 밝고 따뜻할 때 우리는 앞 잔디밭에 욕조를 설치하고 마리온 과 또는 토야가 그 안에서 놀았습니다.

이 잔디밭에서 원형으로 우뚝 솟은 산들 아래, 그리고 그 너머 아래에 있는 웅장한 전주의 성곽을 볼 수 있었습니다. 1954 년에 다시 천주를 방문했을 때, 나는 공산군이 사용하였던 것인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살았던 집 마당에 기관총 놓았던 자리를 보았습니다.

 

그 당시 관습대로 우리에게는 한국인 엄마(보모)가있었습니다. 이 한국 엄마들은 참 좋은 제도로, 헌신적인 도우미, 항상 사랑하는 동반자들 이였습니다. 내 평생 동안 나는 서울의 한국인 엄마보다 더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관련을 맺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이질로 사망 한 형 조지(George)를 한국식으로 넓은 포대기로 등에 업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아기에게 매우 편안했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편안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속적인 동반자 관계와 안정감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죽음이 올 것을 알고 있던 1월 아침, 나는 엄마가 들어 왔을 때 내 침실의 따뜻한 한국 온돌바닥에 다리를 꿇어 앉아 말했습니다. "훌륭한 목사님이신, 너의 아버지, 하늘에 가셨단다." 그녀의 슬픔은 우리 중 누구보다도 깊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그런 슬픔 속에 있었던 그 시간 들 그리고 다음 날에도 그녀의 헌신적인 마음을 다해 토야와 우리 모두를 돌보았습니다. 회색 담요 아래 들것을 짊어진 모습 뒤에 군산까지 50km를 가는 슬픈 행렬에서 어머니는 어깨에 묶인 네 명의 운반자가 메고 있는 고리 버들 의자(*藍輿) 하나를 탔고, 엄마는 마리온과 토야를 무릎에 앉히고 다른 남여를 탔다. 나와 동생 빌은 아버지 선교사 친구와 함께 한국 조랑말을 탔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시신은 군산 항구에서 금강에서 약 4km 떨어진 궁멀 언덕에 있는 선교 묘지에 묻혔습니다. 며칠 후 우리는 전주로 돌아가 봄에 까지 머물면서 가구들을 나눠주고 작은 물건들을 챙겨서 다시 마차로 군산항으로 갔습니다. 한국을 떠날 때보고 생각할 일 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작은 배로 일본 증기선으로 나가는 동안 엄마에게 토야와 함께 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긴 내려앉은 계단을 오르는데 흔들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아기를 조심히 하였다고 확신합니다. 비록 엄마가 전용실에 있는 우리 각자에게 그녀의 팔을 껴안고 울부짖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별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선교사 친구인 맥커천(McCutcheon)씨는 휴가를 갈 예정으로 우리와 함께 미국에로갔습니다. 고베에서는 아버지와 신학교 시절부터 친구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 (해리 마이어스Harry Myers)가 승선 해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토야에게는 딸랑이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은 끈으로 움직이게 하는 작고 검은 물건이었습니다. 망가졌지만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헤리 마이어 선교사의 친절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한국 우리 집을 떠나 배에서 줄 곧 우리는 슬픔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베 와 요코하마에서 우리는 큰 원양 정기선으로 옮겨 탄 기억은 없습니다. 영국 엠프레스 라인, 인도 엠프레스 또는 중국 엠프레스 라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태평양(pacific)은 항상 평화롭지(pacific)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매우 거친 여행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우리의 첫 번째 피난처는 볼티모어 외곽의 멕도너 소년(McDonough Boys) 학교에서 삼촌과 숙모, 시드니와 샐리 모어랜드 와 함께 있었습니다. 시드니 삼촌은 교장이었습니다. 8월 20일 알프레드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토야는 당시 17 개월이었습니다.

 

가을에 우리는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로 이사했는데 당시 남장로교회는 한 작은 대학과 대학예비학교를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캠퍼스 근처의 아담한 집을 4천불에 구입했습니다. 당시 인구 8,000명이 살고 있는 이 프레데릭스버그에서 우리는 1914년 6월 졸업 후 자금 부족으로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6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장로교와 주일 학교에 다녔으며, 주일 학교 예배는 석조건물 예배당에서 드렸습니다. 이 건물은 할아버지 에드워드 래이번(Edward Leyburn)이 건축하였습니다. 유아반에서 토야는 처음으로 교회학교를 다녔습니다.

 

프레데릭스버그에서 토야에 대한 나의 가장 생생한 기억은 큰 오빠로서 훈계를 잘못 하려고 한 경우였습니다. 토야가 5살 때입니다. 어머니는 그날 오후 지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토야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토야를 잠시 화장실에 가두어 벌을 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하려고 했을 때 토야는 갑자기 격렬한 엄청 화를 냈습니다. 나는 전략적으로 재빠르게 물러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릴 적 기억나는 토야는 보통 의젓하게 행동하는 어린 소녀 이였지만 어떤 때는 단호하고 자기 주도형 성격 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의지를 꺽을 수 있는 사람은 찾지 못 하였습니다.

 

토야의 렉싱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없습니다. 토야의 첫 학교 경험은 1914 년 여름이가 가을에 이사 한 렉싱톤에서 이였습니다. 나는 렉싱톤에서 단 2 년 동안 워싱톤엔리대학교에서 MA를 취득한 다음 뉴오리온스(New Orleans)에서 교사 겸 축구 코치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칸사스(Arkansas)의 로간항구(Port Logan H. Roots)에 있는 제일사관학교훈련소(First Officers 'Training Camp)에서도 코치로 있었습니다.

렉싱턴에 살면서 Marion과 나중에 Alfred와 함께 Toya의 학창 시절에 여러가지 가장 좋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토야는 랙싱톤 고등학교(the Lexington High School )를 졸업한 후 사촌 에드와드와 프란시나 모어랜드(Francina Moreland)의 도움으로 2 년 동안 아그네스 스콧대학(Agnes Scott College)에 다녔습니다. 이 기간 동안 토야는 별로 좋게 발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때 학교생활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습니다. 토야는 보스턴의 베스퍼 조지 학교(Vesper George School)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보스턴 섬유 회사에서 섬유 디자인 직업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디자인의 독창성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주의 봉사에 대한 충동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녀는 직장을 사임하고 보스톤 작업치료학교(Boston School of Occupational Therapy)에 입학했으며 (정확한 직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사추세츠주의 제네럴 병원(Mass. General Hospital)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연습생인지 치료 대학원생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병원에 기록이 있을 것입니다.

 

토야는 보스턴에서 리치몬드에 왔고 그곳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고 자신의 자금, 장비, 도우미 및 이사회를 모아야했습니다. 제 2 차 세계 대전 중 군대는 그녀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책임감과 급여 면에서 좋은 일이었습니다.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고 인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독립 정신과 아직 숙련 되어있지 못한지라 환자에게 필요한 자기라고 방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일을 잡지 못하고 있는 동안 토야는 어머니와 이모 마가렛 길 케슨 (Margaret Gilkeson)이 노스 바인가 305(305 North Vine Street)번지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1952년 11월 86 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는 가끔 토야가 작업치료소(Occupational Therapy Curative Workshop)에서 하는 일로 그녀의 긴장과 불확실성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사실, 그 장기간의 긴장이 그녀의 죽음을 초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위궤양이 생겼습니다. 나는 그녀가 몇 년 동안 특별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다음 수술이 있었고 수술하기에는 암이 너무 광범위하게 번지었습니다.

 

Toya는 잘못에 관대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환자를 염두에 두고 환자를 격려하기 위해 할 수있는 작은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녹색을 좋아했고 집 주변의 작은 구역에 식물과 덩굴로 가득 채웠습니다.

휴식을 위해 그녀의 취미는 그림, 도자기, 특히 유목(*流木강이나 바다에 오랫동안 떠돌던 나무 마크라메 재료로 쓰임)으로 이상한 생물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녀의 그림 중 일부는 릿치몬드 T.V(Richmond T.V) 프로그램으로 버지니아 예술 박물관(Virginia Museum of Art에 전시되었습니다.

휴가 때마다 아내와 내가 8 월에 그녀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적어도 하루는 동부 해안에서 파도에 밀려다니는 유목의 특이한 조각들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우리가 토야와 함께 보낼 수 있는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토야에 대한 특별한 모습의 한 면은 그녀가 스무트(Smut)라고 부르는 개에 대한 태도입니다.스무트는 토야에게 계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암흑 색, 중간 크기, 매우 예민라고 훈련되지 않은 잡종 개이었습니다. 토야 가족의 모든 구성원의 만장일치로 스무트는 땅을 초조하게 배회하고 흥분하여 짖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고 혐오스럽고 비참하고 불쾌한 성가신 개라고 보았습니다. 이 개는 괜히 이유도 없이 항상 격렬하게 짖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이나 낯선 사람들에게 뛰어올랐습니다.

토야는 스무트가 누군가를 물었거나 그의 시끄럽게 짖는 소리로 이웃을 괴롭혔기 때문에 여러 번 법정에 가야했습니다.

토야는 개가 필요했지만 그녀의 형제들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토야의 많은 친구들은 스무트 때문에 토야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토야는 엄마가 결함이 있는 아이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스무트를 돌보아습니다. 그녀는 고속도로에서 길을 잃은 강아지를 발견 한 트럭 운전사에게서 스무트를 얻었습니다. 토야의 동정심은 아무것도 움직일 수없는 보호적인 애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스므트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의 질병이 절박한 시기에도 그를 처분하지 않았습니다. 토야가 죽음 이후까지에도 스무트를 수의사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토야가 죽기 전 여름 동안 나는 그녀와 함께 휴가를 보내는 2 주 동안 렉싱턴에서 32km 떨어진 록브릿지 베스(Rockbridge Bath) 근처의 작은 오두막을 고치는 것을 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앙상하게 말랐고 약해졌지만 일어나서 오두막에서 일하면서 저나 화가를 돕고 더 이상 서있을 수 없을 때 소파에 엎드렸습니다.보통 사람이라면 병원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일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의사들은 그 일이 그녀를 더 행복하게 해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그녀가 이 별장을 그녀의 형제들을 위한 일종의 마지막 몸짓으로 고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 주마다 그녀는 몸에서 액체를 빼내기 위해 병원에 갔습니다. 나는 그녀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압니다. 때때로 그녀의 잠에서 또는 그녀가 내가 자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울었습니다.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세 번이나 밖에 나갔습니다. 토야는 나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의사가 처방 한 약과 주사를 맞았습니다. 나는 그녀와 즐거운 척 하였지만, 얼마나 성공적 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나아지고 있는 일시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가족 중 일부는 토야가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녀가 의사들이 자신이 불치병이라고는 것을 알았지만 가족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현지 여성에게 말한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이런 순전 한 담력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와 나는 목회자에서 은퇴 한 후 1 월에 내려 와서 그녀와 함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싫어했고, 나는 그녀가 밤에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촌 찰스(Charles) 와 비 길켄슨(Bee Gilkenson)이 매일 와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죽기 이틀 전에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에 가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토야는 그녀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용감하고 확고한 헌신적인 봉사에 상을 주신다면 토야의 왕관은 정말로 빛나는 왕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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