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영8월17일 목회자세미나 주제강연
예수 영성으로의 모성적 목회의 필요성에 대해서 전 병호 목사
성경 마태 9: 35-36
1.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예레미야는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1:1)고 눈물을 흘리며 애가를 노래하였습니다. 참으로 당시의 참담함이란 말로다 다 말할 수 없고 그 비참함을 무엇이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약하였던 소수 민족인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백성으로 그렇게 자랑하고 엄청난 축복을 누렸는데 어찌하여 이제는 망하게 되었는가? 예레미야가 부끄럽고 가슴아픈 일은 "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들을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도다 하도다"(애2:15,16)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환상을 본 에스겔은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겔7:6)고 이는 여호와가 내린 재앙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래서 바벨론을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여기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8,9) 유대인들은 다시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 가지 작업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천지만물에 오직 창조주 하나님 밖에 다른 신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선포합니다. 두 번째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것이고 세 번째는 율법을 확고히 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여러 율법의 자료들을 편집하고 확정지은 것이 오늘의 오경입니다. 이러한 바벨론 포로민들의 신앙 역사는 여호와 신앙을 확립하고 지속시켜나가는 놀라운 변혁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새롭고 보다 더 탁월한 방향으로 역사를 변혁시켜 나감으로 여호와 신앙을 한 단계 드높이고 있음을 성경역사에서나 기독교 역사에서 우리는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위기는 새로운 발전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생명의 흐름에서 생명의 매 순간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비약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생의 비약(Elan Vital)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에 새로운 생의 비약의 시기가 오게 하시는데 이 카이로스 때가 바로 역사의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2. 철학자 야스퍼스(Kahl Jaspers 1883-1969)가 차축시대(車軸時代)란 말은 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해서부터 3세기를 전후까지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시대에 중국에서는 노자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일어났으며, 인도에서는 석가모니와 그의 불제자들이 활약하였으며 그리스에서는 쏘크라테스 프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 밖의 수많은 쏘피스트들이 제 목소리들을 내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문서 예언자들이 활동을 하였던 시대입니다. 오늘 날 까지 이르는 인류 사상사의 맥락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로 이 차축시대로 부터 굴러 왔으며 아직도 그 엔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흥미로운 것은 이 차축시대로 부터 인간들은 사고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엄격한 구분이야 어렵습니다만, 굳이 비교한다면 차축시대 이전에 인간들은 일차원적 사고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일차원의 사고에서 2차원의 사고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일차원의 사고란 자연과 인간과 신을 한 세계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 인간이 있고 또 그 안에 신도 함께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셋은 서로 나누어지면서 합해져 있고 구분되어 있으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차축시대는 일차원의 사고에 큰 전환기를 가져 왔습니다. 이차원 사고가 생겨난 것입니다. 엄청난 변혁입니다. 나누어지지 않던 것이 갈라지고 구분되지 않던 것이 나누어져 상극이 되었습니다. 감성이 이성으로부터 떨어져 그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성은 저 하늘 위로 올라가 거룩이 되고 세속은 땅에 떨어져 재 가운데 뒹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나 아들의 이가 시다하지 않게 되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렘31:29,30) 이스라엘 공동체 의식은 개인화로 바뀌어지고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었던 하나님의 옛 언약은 스스로의 믿는 자와 맺어지는 새 언약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이차원의 지배적 사고는 2500 여 년 동안 남 녀 노 소 빈 부 귀 천 유 무식 가릴 것 없이 온통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주장하여 왔습니다. 나와 너 흑과 백 아군과 적군 음양쌍전의 다툼이 온 세계 역사를 죄악사로 물들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였습니다. 2차원적 사고의 종당은 분렬이요 전쟁이요 인류 파멸의 길을 걸어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2500 여 년 동안 줄기차게 인류사를 지배하던 이차원의 사고가 또다시 땅이 솟아오르는 것인지 아니 하늘이 깨져 쏟아져 내리는 것인지 엄청난 변혁이 바로 우리 시대 지난 20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철학 하는 이들은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라 하고 어떤 이들은 산업이후의 시대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기독교이후시대가 도래하였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는 전 세계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찬란한 기독교문화를 자랑해 오던 기독교 서구문명이 바야흐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듯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문턱 위에서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차원적 사고로 이어온 기독교 세계가 산사태에 묻혀지는지 영화 해운대 쓰나미에 휩쓸려 가게 되는지, 여기 저기서 교회를 파괴하는 도끼소리들이 작은 산에서 또 큰산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차원적 사고가 무너지니 기독교의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정말 기독교에 위기가 온 것입니까? 달리 말하면 기독교의 위기가 아니라 이차원 사고의 위기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새로운 차축시대가 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2500년 전에는 수많은 사상가들 종교가들에 의해서 출발 되었다하면, 이제 제 2의 차축시대는 디지털문화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한 대 혁명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적대적인 이념들이 서로 입맞추는 다 차원 사고가 요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구별이 없어집니다. 보수냐 진보냐란 논의가 진부하게됩니다. 이차원의 사고는 퇴물이 되고 다차원의 신진 젊은 사고가 세계 도처에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성아래 종노릇하던 감성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감성으로 무장된 새로운 인류가 21세기 역사 속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선녀가 나무꾼이 감추어 논 감성의 옷을 찾아 입고 승천하고 있습니다.
3. 성경 역사에서, 지금부터 4000년 전, 대략으로 말합니다, 그때를 아브라함 시대라 한다면 3500년 전을 모세 시대라 하고 3000년 전을 다윗 시대 즉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하는 시대이고, 2500년 전은 예레미야 시대요 바벨론 포로기 시대이고, 그리고 2000년 전은 예수님 시대 역사의 원년 시대이고, 기독교 탄생 시대이며, 1500년 전은 어거스틴 시대요 막 중세기가 시작 하던 때이고, 1000년 전은 카토릭 전성시대요 안셀름과 토마스마퀴나스 시대요 십자군 시대입니다. 500년 전은 루터 칼빈 종교개혁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시대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대략 500년을 주기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오늘 우리들의 시대는 새로운 기독교 신앙의 도약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 말로 엘랑 비딸의 시대입니다. 요시야왕은 힐기야 제상장이 가져온 신명기 두루마리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종교 개혁 신명기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나라를 새롭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야킴 왕은 예레미야의 서신을 받아보고 화로 불 쏘시게로 삼아 버렸습니다. 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만일 지금 달려오는 새로운 변혁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여전히 이차원 사고 속에 묻혀 있다면 이차원 시대와 더불어 여호야킴 처지가 될 것입니다.
4.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그래서 중도를 표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수와도 함께 진보와도 함께 하자는 통합을 표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차원 사고아래에서 중도는 허울 좋은 말 뿐이요 통합은 자기 합리화 변명일 뿐입니다. 왜 이차세계대전 전 수백건의 평화 조약이 있었지만 결국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입니까? 왜 중도실용을 한다면서 자기주장을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로 이차원적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재까지 있어 온 철학적 명제나 이념의 표방이나 종교적 언표들이 이차원 사고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코 21세기 역사의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됩니다. 최근에 우울증 자폐증 각가지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자살자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들이 많아지고 상담사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역사는 이미 이차원을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 기술 과학이 빠르게 2차원의 한계를 넘어 발전하고 있습니다. 나로호가 우주로 날아가는 시대입니다. 우주에는 상하좌우가 없습니다. 어제의 오랑케가 지금은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나라가 되었습니다. 적대적인 기업들이 제휴하고 있습니다. 이러 엄청난 변화를 이차원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도 판단도 해석더 할 수 없습니다. 오늘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이제 다 차원 사고로만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 차원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인간들의 사고는 아직 2차원 사고에서 벗어 나 있지 않음으로 인해 여기에 깊은 사고의 갭을 가지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혼돈을 일으킵니다. 인간의 뇌 속에 불협화음 현상이 일어납니다. 스넵시스들이 꼬여 틀어지고 과부화현상이 일어납니다. 과학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치가들은 이런 점에서 20세기 사고틀 가지고 21세기를 이끌어 가려하니 오늘의 정치의 난맥상을 풀어 낼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당하게 됩니다. 결국 다 차원의 사고는 이 차원이 아닌 이차원의 도약을 통한 새로운 차원의 사고를 가지게 됩니다. 그 사고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21세기의 인류를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새로운 사고를 한 사람이 있으며, 그 새로운 사고 방법을 찾아내었는가? 아직 까지 그 답은 '아니요 없습니다'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리고 그 결론을 말하기 위해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기에 바로 답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21세기 다차원 사고의 해답입니다.
5. 다차원적 사고(multidimentional thinking)는 물론 일차원을 뛰어 넘고 이차원을 넘어서는 사고여야 합니다. 좌우를 하나로 보는 것도 아니고 좌우를 따로 나누어 보는 것도 아니고 좌우를 한꺼번에 보는 것입니다. 위아래를 한꺼번에 보는 것입니다. 밖과 속을 한꺼번에 보는 것입니다. 상 하 좌 우 안 밖을 한 눈 아래 보는 것입니다. 개미가 지나갑니다. 개미는 자기가 보고 있는 그것만 볼 것입니다. 아니 더듬는다고 할까요. 그러나 개미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개미 전체를 다 보고 있습니다. 그 개미가 구멍에서 나와 가고 있는 개미의 길을 환히 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미는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그 개미의 눈에는 사람이 너무나 커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출생 전부터 사는 동안 그리고 출생이후까지 한꺼번에 속속들이 뼈 속 깊이 머리카락 하나하나 까지 한꺼번에 보십니다. 하나님은 다차원의 눈으로 우리를 보고 게십니다. 다차원적 사고를 하기 위해서 먼전 소위 현상타파사고(breakingthrough thinking)가 필요 합니다. 일본 도꾜대 교수인 쇼조하비노이론으로서 변화를 파악하고 변화를 대응하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수록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차원사고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지금 21세기는 그 모든 측면에서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사고의 틀의 대 전환을 이루지 못한다면 21세기는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21세기의 사람들이 다차원 사고를 한다는 것이 이차원적 사고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신의 경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홀론적 사고(holonic thinking)라고 합니다. 이미 21세기 많은 기업의 경영자들은 소의 홀론경영(holonic management)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영국의 작가 아더 케스트러(A. Koestler)가 생물 세포가 자주적으로 활동하며 동시 전체를 구성하여 활동한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물리학자 프리조프 카프라는 "모든 객체는 통합된 시스템이라는 뜻에서 전체로 간주 될 수 있으며 그 복잡성이 더 높은 수준의 전체에 대해서는 부분이 된다. 사실 절대적 의미에서는 부분과 전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전체이면서 부분인 兒조직체를 홀론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산을 보면 숲을 못 보고 숲을 보면 산을 못 보지만 산과 숲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 홀론입니다. 봉지와 봉지 안에 들어 있는 사과를 한꺼번에 보는 것이 홀론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한꺼번에 보고 좌익과 우익을 한꺼번에 보니 다 차원적 사고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습니다. 좌익도 우익도 없습니다. 새로운 사고입니다. 원효대사는 금강삼매경에서 "통합해서 보면 일관이요 열어서 말한다면 열 개의 문이다(合論一觀 開說十門)"라고 하였지만 일관과 열 문을 동시에 보는 홀론적 사고와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최재천교수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1998)를 번역하면서 "통섭(consillience)"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2005). 통섭은 지식의 대 통합을 의미합니다. 그는 21세기의 모든 학문에 거의 통합의 바람이 불고있다고 하면서 통섭의 노력은 모든 것을 꾀뚫는 보편적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홀론적 사고로 볼 때 통합해서 하나로가 아닌 개체와 전체를 같이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고 할 수 있는가? 호주의 몰링대학 교수인 프로스트(Michael Frost)교수는 오늘의 사람들이 바벨론포로 처럼 세속적 문화와 보수적 기독교에 포로 되어 있다고 말한 바처럼 여기에 인간적이 그 어떤 방법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떤 작업을 한다해도 이차원적 사고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그물 안에 이미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로부터 오는 방법 곧 영을 통한 사고로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사고를 하기에 영을 통하는 방법으로, 일, 이차원적 인간의 사고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70년 전 최태용 목사님이 로마서 8장에서 발견한 방법-영으로 사는 영적기독교적 사고 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태용 목사님도 이차원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기에 방법은 알았지만 그 방법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 복음교회적 사명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흔히 영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영성론자들은 마이오피아(myopia)로서 일차원으로의 회귀하거나 이차원적 사고로 영육을 논하므로 예수의 영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6.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기에 이미 그의 사고는 태생적으로 다차원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화육(incanation)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경영의 혁명적인 섭리의 역사였습니다(다차원적 사고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차원적 인간 역사에 계시는 예수님으로서 부단히 성령과의 교통하심을 통해 다차원적 사고를 유지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내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셨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 사십일 기도가 있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시니 사방에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며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단히 성령과 교통하시며 말씀을 전하시니 그 가르침이 당시 그 어느 율법사하고도 달랐고 그 행동하시는 일들이 여늬 사람과 전혀 다르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가시어 함께 식사를 나누기도 하시고 죄인의 집에도 들어가시어 식사를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 깃는 한 여인과 대화하시고 나무위로 올라간 세리 삭게오의 집에 가시기도 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음행 한 여인을 구하시고 가이사가 그려진 동전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말씀도 하십니다. 유대인의 적이라 하는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시고 스로보니게 여인을 모욕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노점상을 뒤엎으시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로비 하는 제자들에게 마땅히 크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차원적 사고로 예수님의 언행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도 율법사도 빌라도도 베드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차원적 사고하는 사람들이 다 차원의 사고를 하는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심도 다차원의 사고로 다시 해석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후 2000년이 지난 오늘날 다차원 사고의 시대에 다 차원 사고를 하시는 예수님이-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그리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 내시는 예수님의 치유와 돌보심의 사역이-예수님이 내게 와서 배우라 하심대로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다 차원의 사고를 배우지 않으면 21세기는 정말 기독교의 위기, 교회의 위기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가 기독교 후기시대로 교회의 위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차원적 사고의 기독교의 위기일 뿐이요 오히려 유일한 구원의 종교로 기독교는 21세기 더욱 비약할 것입니다.
7. 21세기를 맞이하여 이구동성으로 기독교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앞서 말 한대로 이차원적 사고로 이어온 교회가 다 차원의 세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전혀 옷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성적 논리로 2000년을 이어온 교회가 갑자기 감성화 무대에서 춤을 추려 하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선교가 힘을 잃을 때 새로운 교회 운동이 언제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거나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지난 8월 6일자 국민일보의 미션라이프 기사에 세계적인 교회 미래학자 레너드 스위트 미국 두르대학교 석좌교수와 '교회가 없다'의 저자 프랭크 바이올라가 최근 '21세기 교회를 위한 예수 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선언에서 " 오늘날 교회가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질병은 '예수 결핍 장애(JDD-Jesus Deficit Disdoeder) "라고 지적한 뒤 "오직 예수만이 교회의 중심이고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결코 나눌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기독교가 아닌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자신들이 아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십자가를 가르쳐야한다." 며 "예수께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선언의 전문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레너드 스위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레너드 스위트교수는 현재 미국의 기독교 성직자 교수들 가운데 가장 존경 받는 인물 중 8번째에 해당되는 명성이 높으신 분입니다. 2007년에 우리나라에도 방문하여 미래의 교회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강연하여 많은 호응을 받아 한국교회의 이름 있는 교회와 목사님들도 상당히 그의 이론을 접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이론들이 미국의 새로운 교회운동을 하는 분들의 이론의 밑바탕을 이루거나 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미국에는“빌 하이벨스와 릭 워렌으로 대표되는 ‘마케팅 교회’가 있는데 1970년대 출현했고, 고객중심의 교회, 대형교회성장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또 1990년대 이후 등장하여 전통적인 복음주의와 대형교회 운동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이머징 교회는 브라이언 맥클라렌, 동 피기트, 피러롤린스, 스펜스 버커, 데이빗 톰린슨, 레오나드 스위트, 랍 벨, 토니 존스 등의 인물이 대표적입니다. 또 피터 와그너와 빌 해몬, 폴 케인, 존 에카르트, 마이크 비클, 릭 조이너, 신디제이콥스 등으로 대표되는 ‘신사도 교회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스위트교수는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운동에 깊은 영향을 주고 관계되고 있음을 봅니다. 현재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이머징 처치는 새로운 교회라는 형태로 몇가지 특징을 보면:
1) 모든 형태의 교리를 버리라 - 신학적으로 복음주의,나 진보주의나 교리를 철저하게 배척합니다.
2) 타종교나 이단종파에 대해서까지도 포용적이고 열린 체계로 서로 관계를 맺고 교류를 합니다,
3) 새로운 형태로 예배의식을 만듭니다- 촛불, 성상. 아이콘 등 고대예배의식을 회복하고 전통적 형태의 예배가 아닌 락 음악이나, 까폐 형태의 지루하지 않는 콘써트와 타종교 의식의 도구를 받아들입니다,
4) 불신자들에게 성경이나 교리를 가르치거나 전하는 것 보다는 그냥 그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마음과 의식을 같이 나누자고 합니다. 교회를 크게 하려거나 교인을 모을려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모임을 만듭니다.,
5) 어떤 형태든지 기독교에 대한 변증적인 자세와 학습을 포기합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기성 교회와는 차별화 된 그래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오히려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줌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게 됩니다. 라스베가스에 위치한 아펙스(Apex-joe Boyd목사)교회, 피닉스의 더 브리지(The Bridge-Aaron Norwood목사)교회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드린 입장에서 볼 때 이머징교회나 신사도교회 마케팅 교회들이 21세기의 다양한 새로운 시도로서의 의도를 인정한다할지라도 과도적인 교회의 모습 이상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또는 예수에게로 돌아가자라고 하지만 바로 예수님의 홀론적 사고로서 다 차원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지 못 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교회의 반동이거나 또 세속화 교회의 또 하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합니다.
8. 21세기를 감성시대라 함은 전통적인 이성적인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성적인 표현들이 온통 거리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의식주 생활은 물론이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감성은 깊숙이 우리 인생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감성을 모르고는 기업도 할 수 없고 대통령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힐러리가 민주당 후보로 그 지명도가 오바마 보다 앞서 있었는데 정작 오바마가 지명된 것은 힐러리가 감성 면에서 뒤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성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감성에는 통제기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럭비 공 같아 어디로 튈는지 모릅니다. 변덕이 죽 끓듯한다는 말처럼 아침에는 좋아하다가 저녁에는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범죄의 양상이 감성화 됨으로 더 많은 범법자가 교도소를 채우고 있습니다. 전에는 가난한 고학생이 보고싶은 책을 슬쩍 훔쳤다면 지금은 어떤 작가가 책 모으는 취미로 책을 훔쳤다는 것입니다. 마음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감정 생기는 대로 제 멋대로 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더더욱 시끄럽고 분쟁이 많고 다툼이 심하다가 사람을 죽이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성시대의 윤리와 도덕은 이미 재가 되어 날아가고 감성화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질서는 잡혀 있지 않은 이것이 문제입니다. 감성은 아름답고 부드럽고 마냥 즐거운 것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안겨다 주며 가장 더럽고 썩은 냄새를 풍기기도 합니다. 다 차원적 사고 시대에 통제기제 없이 감성의 자유를 만끽하다 보니 감성의 탈선이 일어나게 됩니다. 누가 무엇이 21세기의 감성문화를 향기롭게 새로운 감성적 윤리와 질서를 그리고 다 차원적 사고로서의 감성사고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 교회의 새로운 목회의 페러다임(paradigm)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 차원적 사고로 예수 영성 목회야말로 21세기 감성적인 신 인류를 그 감성적 죄 가운데서 구원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9. 목사(牧師)는 목자와 교사의 준말로, 구약적 어원에서는 통치자, 왕, 하나님의 보필자, 대신(代身), 종의 뜻으로 보여집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선지자, 전도자, 교사 등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주님의 목회원리와 원칙을 추종하는 본분을 나타납니다. 목사를 의미하는 Pastor는 헬라어 포이맨을 라틴어로 번역한 말인데 ‘먹이다’, ‘보호하다’라는 어원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이 말은 신약에서 ‘목자’로 18회, ‘예수’로 7회 사용되었습니다. 목사를 Pastor로 말할 때는 한 지역 교회에서 목회를 할 경우에 사용되는데 양떼를 먹이거나 치는 목자로서 나온 말이다. 한편 Minister는 직분적인 의미로 언제 어디서고 주의 일을 할 때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 Minister란 ‘인부, 종, 집사(diskonos)와 일꾼(oeitourgos)’,‘조수(huperetes)’란 세 개의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투르마이젠(Edward Thurneysen)은 목사가 교인을 돌보는 목회가 있기 전에 인간을 돌보는 하나님의 목회가 있음을 전제로 하면서 그는 “목사란 양을 돌보는(pastoral care) 사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영성 목회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쉬임 없이 전도와 심방을 하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돌보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시는 목회를 하셨습니다. 14세기 영국의 신비주의자요 베네딕트수도회의 수녀인 노르위치의 율리안(Julian of Norwich 1334-1416)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 예수는 우리의 참 어머니로서 그 자궁 안에 끊임없이 우리를 담아 나른다. 우리는 결코 그 자궁 밖에서 태어나지 못한다." 또 " 예수 안에서 우리는 복권되고 해방되며 육체의 욕망도 기술적으로 현명하게 보증한다. 그는 우리의 어머니이며 형제이고 해방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영성은 모성적 영성이며 예수님의 영성 목회는 모성적 목회였습니다. 항상 예수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 마치 어머니의 사랑을 필요로 하듯이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위로 받고 고침 받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영성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하신 그대로 목회 하는 것이 진정한 목회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목회를 하셨습니다. 돌봄의 목회를 하셨습니다. 나눔의 목회를 하셨습니다. 이 세 목회를 하나로 합하여 모성목회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마치 어머니처럼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사랑은 하나님의 세상 사랑의 샘에서 이어져 오는 모성적 사랑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곧 모성적 사랑을 말합니다. 김은녀씨는 미국 벤더빌트대학의 교수인 샐리 맥페그( Sallie McFague(1933- )의 생태-여성신학을 위한 하나님 이해(Understanding of God for Ecofeminism)이란 논문에서 "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이해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강력하고 매력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21세기에 모성적 예수 영성 목회가 요구되는 것입니까? 감성적 21세기의 사회는 다분히 신 모계사회를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미래학자 자크 시겔라는 "미래는 밝다"라는 책에서 21세기의 특징을 모계사회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은 신 모계사회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인기 TV드라마가운데 "솔약국"이 있습니다. 그 솔약국 집엔 장성한 아들 4형제가 있습니다. 매일 같이 이 4형제를 향한 과도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솔약국 집엔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이 집에 아버지와 시아버지는 이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간간히 너무하다고 간섭하지만 어머니의 카리스마 앞에 더 이상 말하지 못합니다. 솔약국 집은 신 모계사회시대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여 선생님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여성비율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새로운 5만원 지폐가 나왔는데 그 지폐에 그려진 얼굴이 이율곡 선생의 어머니 신삼임당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관광 온 노부부들을 안내해서 그랜드케뇬 관광을 하게 됩니다. 안내원이 묻습니다. 딸 내 집에 왔다가 관광 온 사람들 손들어 보라고 하닌까 2/3가 손을 들었습니다. 아들네 집에 왔다가 관광 온 분 손 들으라닌까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친척집에 왔다가 관광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3아들이 있는데 모두들 처갓집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들들 볼 때는 일년에 서 너 차례입니다. 옛말에 변소와 처가는 멀수록 좋다는 말이 있지만 그야말로 옛말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는 김종래씨는 '우마드'란 신조어를 사용합니다. 아나로그 사회는 디지털 사회로 바뀌고 있고, 정착민 사회는 '도시유목민 사회'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동적이고 변화 무쌍한 사회는 남성 중심을 여성 중심으로 '신 모계사회'로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여성들의 포용력과 모성애에 기반한 '수평적 리더십', 아즘마들의 수다에서 나타나는 왕성한 정보 욕구등이 디지털 유목민 사회에 우마드(woman + nomad) 등장이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여기 저기서 양성평등을 주장하고 여권 신장을 부르짖는 여성들이 있습니다만 얼마 지나면 남권신장을 주장하는 시대가 올런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300년 후가 되면 어쩌면 아주 남자란 이름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옵니다. 감성시대의 도래는 남성 보다 상대적으로 감성이 발달 된 여성들의 역할과 기능이 더 필요로 하는 시대인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최근에 투루나이젠(Thurneysen)의 목회론에 대비하여 힐트너(Hiltner)의 목회론이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흔히 투르나이젠의 목회론은 수직적이고 배타적인 부성목회인 반면에 힐트너는 수평적이고 포용적인 모성목회를 논하고 있습니다. 부성목회는 설교 예배인도 교회운영 교육 심방이 주로 목회의 내용이라 한다면, 모성 목회는 치유(healing), 지탱(sustaining) 인도(guiding)이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투루나이젠은 구속사와 일반사를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라면 힐트너는 구속사와 일반사를 함께 보는 일원론적 사고지향이라 할 것입니다. 이보관 교수는 그의 책 "예수가 권하는 이 시대의 목회"라는 책에서 모성적 사역의 특징을 10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목회 받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의 심령을 일으켜 준다. 그들도 할 수 있음을 말해 줌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2) 편견과 선입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그들을 본다. 새로운 눈이란 하나님의 눈 주님의 눈으로 그들을 보는 것을 말한다. 3)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봐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4) 그들의 눈높이로 봐 주는 것이 모성적 목회다. 5) 원칙과 융통성을 적절히 적용할 줄 아는 것이다. 6) 언제나 상대방에게 고귀한 인생인 것을 알려 준다. 7) 본을 보여 준다. 8) 상대방이 성장할 때 까지 성숙을 기다려 준다. 9) 최선을 다한다. 10) 상대방을 끝까지 믿어준다
그러나 힐트너의 목회론이 일원론적 입장으로 21세기 다차원적인 홀론목회로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21세기의 자유 발랄하고 약동하는 감성에 대한 영성적 기재로서의 모성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성적 목회에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전제가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감성화 시대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둘째는 감성화 시대의 거룩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셋째는 감성화 시대의 구원의 의미에 대한 재 해석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화육은 다만 육신만 아니라 그리고 이성으로 뿐 아니라 감성에서도 화육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인 분이시고 그분의 치유사역은 홀론 목회로서 감성적 치유라 하겠습니다. '네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깊은 감성적 문제에 대한 치유사역의 일환이라고 하겠습니다. 죄는 이성적인 문제보다는 대부분 오염되었거나 비틀어진 감성을 치유함으로서 깨끗한 감성의 회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 감성을 치유하라 " 감성치유가 21세기 예수님의 영성목회의 주제가 되며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이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감성의 화육을 통해 모성적 사랑으로 오염된 감성들을 위로하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성의 새로운 탄생이 하나님의 감성적 화해로 인한 감성의, 레너드 스위트 교수의 말은 빌리면, 스피제링툼(spizzerinctum) 거룩한 담대함으로 나타나게 되고, 스프레자투라(sprezzatura) 반대되는 모든 것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홀론적 영성을 가지게 됩니다. 21세기의 거룩함은 감성의 화육과 홀론적 영성으로 바른 이해가 가능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처럼 감성의 화육-모성적 감성의 사죄-감성의 거룩한 담대함-홀론적 영성과정이 21세기 감성적 사람들의 구원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회의 갱생 운동을 위해서는 포싸이스(P T Forsyth)가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거룩에 있다" 라는 말을 하였는데 감성의 거룩의 신학을 다시 재구성하는 데서부터 21세기 감성시대의 목회가 시작돼야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으로 교회가 충전돼 있었듯이 앞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미래에는 하나님의 거룩의 개념으로 철저하게 사람들을 [교회를] 충전시켜야 할 것이다"라 포싸이스의 권고에 귀를 기우려 보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모성적 예수 영성 목회를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