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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한국 초기 장로교 선교사 신학적 배경

jbhimr by  조회 수:35 2024.10.31 14:14

한국 초기 장로교 선교사 신학적 배경

전 병호 목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장

전킨선교사 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2024년 11월1일  강연원고

 

트리니티신학대학교의 선교학교수인 허버투 케인(J.Herbert Kane 1910-1988)의 '세계선교역사,1978)에서,“미국교회에 의한 한국선교는 ‘십자가’(cross) 보다 ‘국기’(flag)가 먼저 입국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1882년 5월 22일 조선이 구미(歐美) 제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 의해 미국은 1883년 5월 서울 정동에 미국 공사관을 개설하였고, 이 때 형성된 미국과의 외교채널을 통해 선교사가 입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84년 9월 20일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의 공식 신분은 ‘선교사’가 아니라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 소속의 ‘무급 관의’(官醫)로 합법적으로 거주하며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한국 도착 직후 뉴욕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Ellinwood)에게 보낸 1884년 10월 1일 선교보고에서 알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나라[조선]에서 선교사는 허락되지 않으나 공사관 의사로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일할 수 있으며, 본인은 얼마 있지 않아 열릴 선교사업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의 내한과 더불어 한국기독

교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늦게 시작된 한국 개신교 선교는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던 상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안수 받은 목사 선교사의 파송과 더불어 시작될 수 없었다. 한국선교의 특이한 면은 한국선교가 평신도 전문인 의료선교사의 의료시술과 봉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알렌 선교사가 한국에 온 후 얼마되지 않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식에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생하였고 그 와중에 치명적인 자상을 입은 민영익을 완치시키는 계기를 통해 1885년 4월 10일 광혜원(廣惠院, 같은 해 4월 26일 제중원(濟衆院)으로 개명)을 개원하게 되면서, 이를 통해 한국선교의 교두보가 마련되었다. (敎會와 神學 제80집. 변창욱 제중원 신앙공동체 형성과 그 선교적 함의, 1884-1904)

 

변창욱은 그의 글 초록에서, 제중원 신앙공동체가 한국교회 역사에서 차지하는 선교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 첫째, 알렌의 제중원은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제중원은 ‘선교제한 지역’이나 ‘창의적 접근지역’에서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셋째, 제중원은 복음전도에서 의료선교의 역할에 대한 많은 논의를 촉발시켰다.

넷째, 제중원 신앙공동체는 한국 개신교 전래의 두 경로가 서로 만나는 연대

(solidarity)의 장(場)을 제공해 주었다.

다섯째, 제중원 예배공동체는 장·감 선교사들이 교파주의의 장벽을 뛰어넘는 협력의 정신을 키우게 해주었다. 여섯째, 제중원 신앙공동체를 통해 형성된 연합정신은 한국교회에서 다양한 초교파 협력사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일곱째, 제중원 신앙공동체는 한국교회의 자생적 신앙공동체 형성의 모판 역할을 하였다.

여덟째, 제중원 신앙공동체는 초교파 협력(에큐메니즘)의 장을 제공했지만, 이와 동시에 한국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회의 교파교회와 교파주의 태동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에 온 초기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제중원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성공적인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는데, 미국 교회의 장. 감의 신학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므로 그 후 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 교파의 전람회장 역할을 보여주게 되었다.

 

"한국인의 심성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감성이 무디고 물질적인 중국인과도 다르고, 빈틈없고 호전적인 일본인과도 다르다. 한국인은 일본이나 중국인보다 민감하고 믿을 만하다. 한국인은 외부 충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종교적인 가르침에 쉽게 동화되며 믿음은 어린아이 같고, 영적인 환상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다. 자긍심 가득한 중국인이나 오만한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인은 깊은 애통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한국기독교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이 덕 주 목사)

 

1903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를 역임하면서 극동 아시아 선교 실무를 주관하였던 브라운(A. J. Brown)은 중국과 일본 및 한국의 선교 상황을 평가하면서 민족성에 대한 비교로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정치적으로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된 선교사업과 성격을 비교하면서 두 나라의 기독교는 "마치 서양에서 장로교 신앙과 모라비안 신앙이 다른 것처럼 판이하게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이 일본인과 다른 이유를 선교사와의 관계에서 풀이하였다.

 

"일본 기독교인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여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은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일본 기독교인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고 한국 기독교인은 보수적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적이나 영감(靈感)에 대해 전혀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선교사 선생들이 가르쳐 준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 받아들인다."

 

이덕주목사는 그의 글에서, 1870∼80년대 초기 기독교 복음 수용과 전파과정에서 나타났던 한국인들의 주체적 역할이 1884년 '선교사시대'가 열리면서 급격히 줄어들고, 대신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교파교회' 선교시대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 수립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한국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을 주목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덕주목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에 대해 다음 세 가지 질문을 한다.

첫째,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적 배경은 어떠한가?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받은 신학 교육의 성향과 내용이 무엇인가?

둘째, 교파에 따른 선교사들의 신학에 차이가 있는가?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교파교회' 형태로 정착하였다. 선교사들의 신학은 교파교회의 '교리'와 '신조'에 나타난 신앙 . 신학적 특징에다 선교사 개인의 성향은 무엇인가?

셋째,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 및 신앙 형성에 선교사들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이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특히 19세기 말 우리나라(조선)에 온 미국 장로교회 (남, 북)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의 배경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만 말하고자 한다,

 

 

1. 19세기 미국 신학의 흐름

 

미국의 종교 사학자 마티(M. E. Marty)는 19세기 미국 신학이 아직은 유럽 신학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 신학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미국에는 유럽처럼 거물 신학자는 없었다. 따라서 미국 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읽을 만한 신학적 저술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신학자들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해석하는 일이었다. 정신없이 일만 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2차 각성운동(*1790-1840) 이후 반세기 동안 진행된 놀라운 변화를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미국 상황을 히브리식으로(성서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역사의 의미를 단일 '백성'의 역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사적 연원을 따져 들어가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면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골몰하였다."

 

 

유럽의 다민족(多民族) 다언어(多言語) 배경을 갖고 '식민지 아메리카'에 정착한 이주민들에게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단일국가를 형성할 수 있겠느냐 이였다. 유럽은 종교개혁을 통해 카토릭국가이던 개신교 국가이던 각기 국가 종교(State-Religion)를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그들이 일치를 추구하는 데는 새로운 종교체제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1730년대와 1740년대에 영국과 신대륙에 기독교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른바 제1차 대 각성운동(First Geate Awakening) 또는 복음주의운동(Evangelical Revival) 이라한다.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조너선 에드워드 같은 이들이 교단의 벽을 넘어 복음주의적 공통성을 형성하며 회심과 경건을 그리고 새로운 개신교 도덕성을 불붙여 나갔다. 이 복음주의 설교자들은 그들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던 불문하고 신대륙 전 지역으로 나가 복음의 열정으로 구원의 확신을 전개하였다. 이같은 신앙부흥운동은 마치 옛 이스라엘이 가졌던 암픽티오니 선민(選民)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계약공동체를 이루어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런 의식이 새로운 나라의 일체감과 종교적 우월감과 해외 기독교선교의 동기가 되었다.

 

 

미국의 개신교, 특히 칼빈주의 신학의 원천으로 일컬어지는 '뉴잉글랜드 신학'에 변화가 일어났다.

(1) 하바드대학을 중심으로한 '교조적' 칼빈주의 원리를 벗어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 이르러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를 수용한 웨어(H. Ware)의 '초자연적 합리주의'(Supernatural Rationalism), 인간에 대한 낙관적 이해에 근거하여 전통 삼위일체론까지 비판한 하지(F. Hodge)와 채닝(W. Channing)의 '유니테리안주의'(Uniterianism)에 이르는 좌파 신학이 나왔다. .

(2) 소위 신파(New School 혹은 New Divivity)로 불리는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덜 진보적이나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인간의 전적 타락, 원죄의 유전성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역시 전통 칼빈주의 원리에서 벗어난 신학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 신학은 에드워즈(J. Edwards Jr.)·벨라니(J. Bellany)·드와이트(T. Dwight)·홉킨스(S. Hopkins)·테일러(N. Taylor)·비처(L. Beecher)·핀니(C. Finney) 등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제2차 종교각성운동의 주역들이었다. 회개와 갱신을 촉구하는 부흥운동의 메시지는 "해야만 한다!"(You must)와 "할 수 있다!"(You can)였다. 이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중예정론을 신앙 원리로 삼는 전통 칼빈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은총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핀니의 부흥운동은 다시 무디(D. T. Moody)·생키(I. D. Sankey)·토리(R. A. Torrey)·채프먼(C. M. Chapman) 등으로 대표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학생 중심의 '선교자원운동'(Students Volunteer Movement)과 주일학교 운동, 기독청년회(YMCA) 운동으로 연결되는데 이 운동의 신학적 배경은 체험 중심의 '뉴잉글랜드 신학'을 반영하면서도 성경의 절대성,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육적 부활 등을 강조하여 '보수화' 경향을 띠고 있었다.

(3) 이같은 변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칼빈주의 근본 원리를 고수하려는 움직임이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복음주의자'(Evangelicals)로 불리기 시작한 이들 '보수적' 칼빈주의 신학은 16세기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원리를 고수하였다. 1808년 하버드 신학이 유니테리안주의로 흐르자 이에 반대한 보수적 회중교회 신학자들이 앤도버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였고, 1801년 회중교회와 장로교회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두 교회 연합으로 운영하는 뉴욕의 유니언신학교를 통해 테일러류의 '뉴잉글랜드 신학'이 장로교회 안에 유입되는 것을 우려한 보수적 장로교 신학자들이 1812년에 '총회 직영 신학교'로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했다.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와 찰스 하지(Charles Hodge)·알렉산더 하지(Alexander Hodge) 부자,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등으로 상징되는 19세기 프린스턴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근거한 16세기 칼빈주의 신학이었다.

 

 

 

2. 장로교회의 분열

 

(1) 북장로교 - The Northern Presbyterian Church (PCUSA) 1870-1903

 

소위 스윙 재판 (the Swing Trial) - 시카고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Westminster Presbyterian Church) 데이빋 스윙 (David Swing)목사가 1874년에 출간한 오늘의 진리 (Truths for Today) 라는 제목의 책이 이단적이라고 정죄 받았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기준서들에 요약되어 있는 기본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를 부인한다고 프린스턴 신학교 총장을 지낸 후랜시스 패튼 (Francis L. Patton)에 의하여 스윙의 이단 문제가 노회에 제기되었다. 스윙은 신조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을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그 후 세대의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였고 노회에서는 스윙에게서 어떤 이단적인 요소도 찾을 수 없다고 무죄 판결 하였다. 다시 패튼은 북부 일리노이 대회 (Northern Illinois Synod)에 항소를 시도하자 스윙은 장로교 교단을 떠나서 시카고의 독립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후 계속된 이단 재판이 일어나는데 유니온 신학교의 A.G. 맥기퍼트 (McGiffert), 헨리 프리저브드 스미스 (Henry Preserved Smith), 그리고 챨스 브릭스 (Charles Briggs)교수들에 대한 재판들이다.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은 웨스트민스터 기준서에 요약된 교리들을 올바로 반영하는 구 프린스턴 신학을 굳건히 수호하려고 일어났다. 챨스 핫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A.A.핫지 (Hodge)가 1878년에 신학 담당 교수가 되어 188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린스턴 신학을 지켰다. 아들 핫지 마저도 세상을 떠나자 신약을 가르치던 B.B. 와필드 (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가 조직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서 1921년까지 가르쳤다. 이 세 사람은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가 재편될 때까지 같은 신학 노선에서 수 십 년에 걸쳐 신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들이 가르친 학생의 수는 7천명이 넘었고, 이들의 대부분이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가 성경의 영감론과 정통 교리에 대하여 가장 진보주의적 신학 노선을 취하였는데, 프린스턴 신학은 이러한 새로운 진보주의 신학의 도전에 대항하는 굳건한 보루 역할을 감당하였다.

 

당시의 장로교 교단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수정하려 하였는데 이는 컴버랜드 장로교 (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와 다시 연합하려는데 있었다. 컴버랜드 장로교는 1801년에 있었던 케인 릿지 부흥회의 결과로 생성되었는데, 이들은 구원 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개인의 선택할 자유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1810년에 시작된 컴버랜드 장로교는 시골 지역에서 급속하게 번창되었고, 특히 서부 켄터키, 테네씨 지역에서 다른 교단 보다 폭 넓게 전파되었다. 1880년대 중반에 북부 장로교는 컴버랜드 장로교와의 재 연합을 시도하여서, 이들이 신앙고백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정 작업을 시작하였지만, 결과적으로 1893년에 개정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1903년에 이르기까지는 신앙고백서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와 “성령에 대하여”라는 두 장(chapter)을 추가하는 개정 작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정의 결과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하여”의 장(chapter)과 상충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선택하신 예정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역사적인 믿음과 충돌하게 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컴버랜드 장로교 교회들은 이러한 개정에 대단히 만족하였으며, 이 결과로 1906년에 두 교단이 병합됨으로써 약 1천 개 이상의 교회가 북부 장로교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컴버랜드 장로교의 모든 교회들이 이 개정된 신앙고백을 흡족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날도 아르미누스주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컴버랜드 장로교가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챨스 다윈 (Charles Darwin)이 1859년에 종의 기원 (The Origin of Species)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이 진화론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생한 논쟁거리 이였지만 A.A. 핫지와 B.B. 와필드는 성경의 계시와 진화론을 조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자신의 섭리의 역사를 통하여서 제 2원인인 진화를 통하여 역사하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2) 남 장로교 - The Southern Presbyterian Church (PCUS), 1865-1900

 

남군의 리 (Lee) 장군 부대가 아포마톡스 (Appomattox)에서 북군에게 항복을 하자, 남부 교회는 처음에 결성되었던 4년 전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남부 연방 장로교를 설립하는데 주축이 되었던 톤웰이 1862년에 사망하였고, 교회의 이름도 합중국 장로교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로 변경할 수 밖에 없었으며, 전쟁 중에 수 많은 목사와 교인들을 잃었다. 전후 복구 기간에 남부 교회는 북군 군정 통치의 새로운 국면을 감수하면서 점진적으로 정치적 권리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 이렇게 취약한 상태에 처한 남부 교회는 그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교회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교회의 영적 본질을 이전보다 더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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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교회들은 연방 정부에 충성하고, 전쟁 당시에 채택된 노예제도 반대에 동의하는 교인에게만 정 교인의 자격을 줄 수 있게 하였다. 로빈슨에게는 이렇게 연방 정부에 충성하는 것을 교인의 자격 요건으로 요구............

전쟁 당시에 켄터키주 루이빌 (Louisville)의 제2장로교회 (Second Presbyterian Church)에 시무하면서 참 장로교 (True Presbyterian)라는 신문을 발간하던 스투아트 로빈슨 (Stuart Robinson)목사 ...(본래 북부 교회 가담 그러나) 이렇게 연방 정부에 충성하는 것을 교인의 자격 요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교회의 영적 본질에 절대적으로 위반되는 것이며, 더 이상 북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그는 대회 의원의 대다수를 설득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켄터키 대회를 북부 교회로부터 탈퇴케 하여 한 동안은 독립적인 위치에 남아 있다가 1868년에 남부 교회로 들어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서 로빈슨은 1869년 총회에서 의장의 직을 맡았고, 1870년에는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전국적인 모임을 개최하였다. ..................

남부 장로교회의 루이빌 총회 (Louisville General Assembly)...총회 의장은 로버트 루이스 대브니....총회 의장은 로버트 루이스 대브니...그는 이 총회가 북부 교회와의 재 연합을 생각하는 것 조차도 혐오하였다. 그는 전 대의원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구성토록 하고 다른 사람이 회의를 주재 "​나는 여러 형제들이 지금은 용서할 때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의장, 그러나, 나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나는 용서하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누가 우리 나라를 침략했고, 누가 우리의 도시를 불 태웠으며, 누가 우리의 집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젊은이들을 죽였으며, 누가 우리의 땅을 황폐시키고 절망을 뿌렸습니까? 이들을 용서하라고요? 아닙니다.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들이 우리에 대한 감정이 변하여 친절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게 하도록 어떤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친절하고 화평하다고요? 정말 그렇습니까? 배불리 먹은 호랑이가 친절하고 평화스러워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호랑이가 송아지를 잡아 먹은 후에 누어 있으면 편안해 보이지만, 먹은 것이 다 내려가고 나면 다시 무섭게 돌변할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약탈해 가서 배를 불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정복하고 우리를 파멸시켰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고 화평스럽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늙은 호랑이의 본성이 그들 안에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우리에게서 약탈해 간 것을 어떤 것이나 한 번 다시 빼앗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대브니는 남북전쟁 발발 전부터 떠오르는 별과 같은 지도자로서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36년 간 교회사와 교회 정치 형태를 가르치다가, 후에는 교의학(didactics)과 논증 신학 (polemic theology)을 가르쳤다. 그는 남북전쟁 당시인 1862년에 5개월 간 스톤월 잭슨 (Stonewall Jackson)남부군 장군의 막료장(chief of staff)을 지냈으며, 전쟁 후에는 남부 지역의 교회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 타협할지 모르는 보수주의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남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북부 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을 승인하여 1882년에는 그 결의안이 비준되었지만, 대브니는 북부 교회의 형제들과 결코 화해하지 않았다. (이 재 연합은 1983년에 와서야 정식으로 재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의 이러한 반대 노선은 자신이 속하여 있는 신학교 안에서도 그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가 되었고, 드디어는 교회의 치리회에서 마저 그러한 결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1883년에 유니온 신학교를 떠나서 오스틴 (Austin) 에 새로 설립되는 택사스 대학교 (University of Texas)의 창립 교수가 되었고, 또한, 나중에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 (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가 되어지는 신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을 통하여 남 장로교는 교리적인 순수성과 단결을 드높이 천명(闡明)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천명의 그늘 에는 대브니와 파머 사이의 신학적 차이가 존재했으며, 신학교 내에서의 다양성이 증가되고, 1880년 대와, 특히 1890년대에 세워진 중요한 교회의 강단들에서 서로 다른 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교회가 점점 시골 지방으로부터 범세계성 (cosmopolitan character)을 띤 도시 근교로 옮겨지기 시작하자 이에 따라 신학의 관심에도 역시 변화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테네씨주 내쉬빌에 있는 제일 장로교회 (First Presbyterian Church)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제임스 밴스 (James I. Vance)목사가 1898년에 장로교 교리인 예정론에 대한 설교가 소동을 일으킨 것을 볼 수 있다. 나중에 장로교단 출판 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출간된 그의 설교는 웨스트민스터 기준서들에 있는 전통적인 칼빈주의를 수정하여서 예정론을 현대인의 구미에 맞도록 수정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작정을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분리시킨 신학자들과는 달리, 밴스는 예정을 하나님의 사랑에 그 뿌리를 깊게 두었다. 하나님의 예정의 근본적인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예정의 근본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편의와 예지의 표출이 아니고, 영원 불변한 사랑의 표출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초월해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을 피조물에게 베푸실 의무가 있으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셔서 부서진 진흙 그릇들을 “주인께서 쓰실 만한 소멸되지 않는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는” 그릇으로 다시 만드시도록 묶여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밴스의 예정론은 만인구원설 (universalism)로 흐르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정죄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신의 선하심과 은혜이므로,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다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면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그는 선포했다. 밴스의 이러한 설교가 현대인의 생각에는 우호적이었지만, 교단 출판위원회에 의하여 이러한 설교가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사상에 대한 신빙성과 권위를 부여하게 된 것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것이 남부 교회 내에서도 진보주의 사상의 세력이 증대되었다는 신호가 된 것이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죄와 구원을 사회적인 구조와 공동체적인 입장에서 보는 사회복음 (Social Gospel) 에 주력하면서도, 교단 자체는 관료적 중앙집권적 (centralized bureaucratic control)이 되어 갔다. 실로, 교단이 추진하는 사업과 행사들이 교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미합중국 장로교 (PCUSA) 지도자들은 교회의 단결과 통일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교단적인 공동 사업과 행사에 중점을 두었지, 공통적인 신앙고백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이들은 교단적 차원의 노력과 영향력을 통하여 사회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미국 사회를 개조하려고 한 것이었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실제로 미국을 그리스도의 왕국 (the kingdom of Chirist)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미합중국 장로교는 소속 목사들의 다양한 신앙관을 수용하는 대신 교단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비록 세 명의 저명한 유니온 신학교 교수들을 징계했지만, 진보주의 신학을 좇는 목사들의 유입을 막지 않았다. 보수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신학적 자유주의의 극치를 이룬 것이 1924년에 150 명이 발의하고, 나중에 1,300여 명의 목사와 장로들이 서명한 어번 확인서 (Auburn Affirmation)였다. [어번 확인서는 뉴욕주 어번(Auburn)에 설립되었던 어번 신학교(Auburn Theological Seminary)의 교회사 교수인 로버트 헤이스팅스 니콜스 (Robert Hastings Nichols)교수가 작성한 자유주의 신학의 선언문임.오번 신학교는 재정이 어려워지자 1950년에 뉴욕시의 유니온 신학교 건물로 들어와서 함께 존속하고 있음.] 이 확인서에서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비록 교회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속죄, 부활, 기적, 성경의 권위 등을 고백하더라도, 이러한 성경의 내용에 대하여 다양한 이론이 있어 왔으므로, 보수주의자들이 목사들에게 정통적인 교리와 성경의 무오성에 동의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렇기 때문에, 교회 법에 의해 자격이 부여된 목사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수용함으로써 “연합됨”을 나타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하였다. 미합중국 장로교의 보수주의자들은 대부분이 이 어번 확인서가 교회를 정복하려는 현대주의 (modernism)의 적극적인 공세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신학적 입장에 대항하기 위하여 미합중국 장로교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개신교 교단들 안에서도 북부 미국의 보수주의 교회들은 나중에 근본주의자 (fundamentalists)들로 알려지게된 사람들과도 손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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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 배경

 

(1) 선교사들의 신앙 양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교파에 따라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다 개인적 신앙적 특징까지 감안한다면 선교사들의 '일치된' 신앙 양태를 정리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백낙준은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 양태에 대해, "미국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열심(Puritanic zeal)과 웨슬리적 열성(Weselyan fever)을 지닌 자들이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의 청교도적 신앙과 감리교 선교사들의 경건주의적 신앙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신앙 양태를 청교도신앙, 경건주의 신앙, 복음주의 신앙 등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청교도 신앙

청교도 신앙(Puritanism)은 내한 선교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 계통 선교사들의 신학 배경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브라운의 지적이다.

 

"나라(한국)의 문이 열리고 첫 4반세기를 이끈 선교사 유형은 전형적인 청교도 유형(puritan type)이었다. 그들은 한 세기 전 우리 뉴 잉글랜드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을 엄수했으며 춤과 담배, 카드놀이 같은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빠져들어서는 안 될 죄로 보았다. 신학이나 성서비평학에 대해서는 완고한 보수적 입장을 취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을 고수하였다. 고등비평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보았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같은 복음주의(evangelical) 교회로 공존하며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근대적 시각'(modern view)을 지닌 사람의 행로는 거칠기 그지없다. 이런 현상은 장로교 선교사들 사이에 더욱 그러하다."

 

이는 19세기 계몽적 근대 진보주의 신학 도전에 대해 16세기 칼빈주의 원리를 고수하려는 '보수 우파' 장로교 신학의 보루였던 프린스턴신학과 매코믹신학 출신 선교사들이 주도권을 행사한 때문이기도 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청교도 신앙이 갖고 있는 폐쇄적 방어 기능으로 인해 한국 장로교 신학은 교파 교리 중심의 신학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진보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단절과 방어로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 중심 신학으로 정착하여 교회의 사회 개혁적 기능이 약화되었다. 브라운(F.L Brown 주일핚운동 창시)은 이 점을 지적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또 다른 특징은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의 관심은 내세에만 고정되어 있다. 현세는 완전히 타락하여 다가올 세대에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될 수 없다고 믿는다.……어떤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이 있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는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지금 복음을 전하기도 바쁘다'고 하였다."

《천로역정》으로 대변되는 청교도 신앙은 개인의 신앙과 생활개혁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지만, 염세적 내세신앙으로 현실 도피적 신앙 양태를 만들었고, 그 결과 교회의 사회 개혁적 기능을 포기함으로 "사회적이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인 교회"로 전락하였다.

 

2) 경건주의 신앙

경건주의(pietism) 신앙은 웨슬리를 통해 경건주의에 맥이 닿아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뿐 아니라 장로교 선교사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경건주의 색채가 강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중생의 체험과 기도와 성경공부를 중심한 신앙훈련, 그리고 선교와 사회구제로 연결되는 윤리적 실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경건주의 신앙 요소는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된 초기 부흥운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신학'이 감리교 운동과 연결된 종교각성운동이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었듯 한국의 초기 부흥운동도 종교각성운동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초기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1903년의 원산 부흥운동이 하디(R. A. Hardie) 선교사의 개인적 회개와 중생의 체험에서 시작되어 집단적인 회개운동으로 발전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때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임재와 윤리적 갱신이라는 경건주의 신앙 분위기 속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의 계기가 된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도 그런 성격을 띠고 있었다.

 

부흥운동의 결과에 대한 존스(G. H. Jones 1967-1919 1997년 감리교회선교사로 내한)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부흥운동은 기독교인들의 기도생활을 더욱 심화시켰다.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기도에 있었음은 이미 밝힌 바이다. 부흥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도생활의 비밀을 경험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 선교사의 증언을 듣는 것이 확실할 것이다. 이 선교사는 전에도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동료 선교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뚜렷한 목적을 갖고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남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느라 자신을 잊을 정도였으며 그 때마다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에 사로잡힘을 체험하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기도생활에 붉은 피를 쏟았다."

 

이같은 기도 모임과 성경공부를 위한 사경회(査經會)는 한국 초기 부흥운동을 촉발시킨 요인이었으며 이후 한국 교회의 경건주의 성격 형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같은 경건주의 신앙운동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적 신앙 체험과 윤리적 갱신에 기여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이 운동이 점차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체험 중심의 반이성적(反理性的) 경험주의로 흘러 신학의 자리를 더욱 좁혔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면도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내한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발행하던 The Korea Mission Field가 1915년 선교문제 특집을 다루면서 "영적 무장"(spiritual gymnasia)이란 제목으로 선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선교의식과 공유할 신앙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예수는 메시야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인간으로 보내신 유일하신 분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으며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메시아 혹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되었다. 예수가 자기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셨으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그리스도인들도 메시야직에 충실해야 한다. 주님의 위대한 명령에 복종하고 모든 피조물에 주님을 증거해야 하며, 그들로 하여금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고 말함으로 주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꾸준하고도 진실되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선교사직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메시아직 수여로부터 그리스도의 심판에 이르는 그리스도 중심 신앙고백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성경의 전거(典據)들을 갖고 있다. 이같은 성경 중심의 그리스도론이야말로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을 체험한 선교사들은 초교파 연합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장로교의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와 호주장로회 등 4개 선교부, 감리교의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등 2개 선교부가 1905년에 '한국복음주의 연합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여 초교파 선교 협력을 모색하였는데, 그 신학적 연합 배경이 '복음주의'였던 것이다. 그들은 '복음주의' 이름으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간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복음주의'에 대한 보편적 이해가 1920년대 이후에 접어들면서 교파교회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했다. 즉, '보수적' 장로교회에서는 '근본주의 신학' 원리로 점점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반면에 감리교회에서는 사회복음주의까지 수용하는 적극적인 개방 개념으로 해석하여 궤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들이 공유하였던 '복음주의' 개념은 '보수 방어적' 장로교회의 전유물이 되었다. 1934년 장로교 선교 50주년을 맞아 장로교회의 '복음주의 '신앙 전통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1세 선교사 마펫의 호소에서 이러한 '방어적' 복음주의 신앙을 읽을 수 있다.

 

"조선 모든 선교사가 다 죽고 다 가고 모든 것을 축소한다 할지라도 형제여! 조선교회 형제여! 四十년전에 전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파합시다. 나와 한석진 목사가 十三도에 전한 그것이오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 전한 그 복음 량전백 씨가 선천에 전한 그 복음은 자기들의 지혜로 전한 것이 아니오 그들이 성신에 감동을 받아 전한 복음이니 변경치 말고 그대로 전파하십시요. 바울이 청년 목사 듸모데에게 부탁함과 같이 나도 조선에 있는 원로 선교사와 로인 목사를 대표하야 조선 청년 교역자에게 말합니다. 원로 선교사와 원로 목사의 전한 그대로 전하시요. 이 복음은 우리가 내인 것이 아니요 옛적부터 전한 복음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신성하고 권능있는 교회를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십자가에 도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바랍니다. 형제여! 원로 선교사 원로 목사들이 四十년동안 힘쓴 것인대는 우리의 지혜 아니오 바울에게 받았고 하느님의 말슴을 전한 것인대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오 말할 기회 많지 안는대는 딴 복음을 전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성경과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이해가 한국 기독교를 '성경적 기독교',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 전통 위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과 그리스도를 강조하다보니 자연 계시의 가능성 및 타종교와의 대화마저 단절하는 폐쇄적인 신학 풍토가 조성된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 한국 교회와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폭을 넓혀 가는 세계 신학의 흐름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복음주의'란 용어가 갖고 있는 '폐쇄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4. 초기 장로교선교사들 신학교 배경

 

미국 장로교의 경우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학교가 프린스턴신학교이고 그 다음이 매코믹과 파크대학, 리치몬드 유니언신학교 순서였다. 프린스턴신학교에 진보적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이 들어오게 되자 메첸을 비롯한 '전통'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프린스턴을 떠나므로 1929년 이후 졸업생들은 2세 선교사 클라크(A. D. Clark) 뿐이다. 따라서 초기 프린스턴 출신 선교사들은 보수적 전통을 고수하였던 '구 프린스턴' 출신들이라 할 수 있으며,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로버츠(S. L. Roberts 1881-1946. 1907 프린스톤졸업)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을 역임한 마펫(S. A. Moffett)이나 오랫동안 이 학교 교수를 역임한 베어드(W. M. Baird)·리(G. Lee)·스왈른(W. Swallen)·아담스(J. E. Adams)·클라크(C. A. Clark) 등을 배출한 매코믹신학교의 영향은 오히려 프린스턴의 영향보다 컸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인디애너주 개척민들이 설립한 하노버대학의 신학부로 출발한 매코믹대학의 분위기는 "매일같이 수업이 시작할 때마다 찬송가를 부르고, 성서를 읽고 기도로 시작하고, 또한 주일날 아침에는 주일학교에 교수들이 나가 가르치고, 오후 예배에는 학장이 인도하는" 전형적인 '기독교학교'였다. 목회자와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이 신학교는 "철저한 보수주의에다 청교도적인 엄격성, 그리고 불굴의 기상을 불어넣어주는 동시에 경건성을 위주하였다."

캐나다 출신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신학도 보수적이었다. 게일(J. S. Gale)·하디(R. A. Hardie)·펜윅(M. C. Fenwick)·에비슨(O. R. Avison) 등을 파송한 기독청년회(YMCA)와 이들의 선교 동기를 부여한 학생자원운동이 있다. 게일을 비롯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성경의 영감(靈感)과 절대성, 인간의 전적 타락, 신앙의인(信仰義認), 영혼의 불멸과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의 심판 등 보수적 '복음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했다. 그리고 1897년에 교회 단위로 그리어슨(R. Grierson)·맥레(D. M. McRae)·푸트(W. R. Foote) 등을 파송하여 한국 선교를 개척한 캐나다장로회의 메리타임 대회(Maritime Synod)는 전통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한 스코틀랜드 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1925년 캐나다장로회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던 캐나다 회중교회 및 캐나다 감리교회와 합동하여 '캐나다 연합교회'(United Church in Canada)를 조직하기까지는 칼빈주의 전통, 특히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전통에 충실한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리치몬드의 유니언신학교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이나 호주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한 장로교 전통을 갖고 들어왔다. 따라서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16세기 칼빈주의 근본원리와 17세기 청교도신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 신학을 호흡하였던 인물들이었고 유럽과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계몽주의'와 '근대주의' 신학 흐름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1) 미국 북장로교

 

1884년 최초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북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PCUSA) 선교부는 순수 복음 선교사, 의료선교사, 여성 선교사 그리고 선교사 부인들로 1884년부터 1910년까지 25년간 총 166명을 파송했다. 이 가운데 목사는 모두 52명이었다.

 

미북장로교 선교부가 해외에 선교사들을 파송할 무렵 미국은 신학적으로 그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진보적인 면을 보이고 있었다.

 

첫째, 미국 장로교 내에 보수파인 구학파(Old School)와 진보파인 신학파(New School)가 서로 대립(對立) 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양파의 대립 양상은 미국 장로교회 분열기인 1837년에서 1870년의 분열과 재연합의 역사 가운데 극명하게 드러났다.

 

양파는 서로 상이(相異)한 신학 사상을 가졌기에 계속 논쟁을 거듭한 결과 교회 분열을 초래했다. 그것은 교리와 정치제도에 관한 문제였다. 보즈만(Theodore D. Bozeman)은 구학파의 장로교 신학을 “강한 신조주의 지만 확고한 복음주의이다. 자신들이 죽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호전적이다.”라고 평했다. 구학파와 신학파의 중요한 차이점은 칼빈주의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충성도이다. 양파 간에는 이 문제를 놓고 항상 긴장 관계에 있었다.

 

1828년 예일신학교(Yale Divinity School)서 테일러(Nathaniel William Taylor , 1786-1858)의 졸업식 설교는 정통신학을 벗어난 신신학(New Divinity)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인간 구원에 있어 칼빈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강조하며 원죄(原罪)를 달리 해석했다. 그것은 아담의 후손에게 전가(轉嫁)되는 죄(罪)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통 칼빈주의 신학 사상으로 무장된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핫지와 데일러의 신학 논쟁이었다. 이로 인해서 양파(兩派)의 분명한 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구학파는 교리(敎理)에 더 강조점을 두었으나 신학파는 도덕적(道德的) 사회적(社會的)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둘째, 부흥운동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논쟁의 핵심은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의 새로운 수단(New Measures)에 관한 문제였다. 피니는 인간 의지(意志)로 얼마든지 회심(悔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진보적인 신학파들은 동의했지만 구학파인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학파들이 교회 부흥에 성공함으로 미국에 새로운 피니신학이 형성되게 되었다.(그 부흥이 성경적이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 편집자)

 

셋째, 성경관 논쟁이다. 그 후 양파(兩派)의 상이(相異)한 신학적 논쟁의 대표적 사건은 뉴욕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 1841-1913)의 학설이었다. 그는 독일 성경 고등비평(高等批評) 신학의 영향을 받아 1880년대의 논문과 1881년의 강연을 통해 정통신학과 성경관에 정면으로 도전 장로교 안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미북장로교는 이 사건을 좌시할 수 없었으며 1892년과 1893년 총회는 성경 원문의 무오성을 선언하고 동년에 브릭스 교수를 장로교에서 정직(停職)시켰다. 한편 1887년 총회는 신앙고백과 교회기구에 있어서 개정위원회를 설립했다. 1887년과 1888년 총회에서 이 안건이 다루어졌고 1889년 총회에서는 이를 좀 더 확대하여 15개 노회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개정(改定)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받아 결국 1903년 총회는 그 개정안을 채택하였다.

 

이는 정통 보수주의 신학이 조금씩 변질(變質)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 장로교회의 정통신학은 독일의 비평신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 의해 계속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중심으로 한 교수들은 소위 프린스톤 신학 체계를 형성해 진보적인 비평신학을 방어했다.

 

1890년 필립 샤프는 “개정은 진행되고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성경 번역을 개정하더니 이제는 신조를 개정하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의 진보신학의 무차별 공격을 표현한 말이다. 구(舊) 신조의 방어자는 워필드(B.B. Warfield, 1851-1921)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로서의 중요성을 역사적, 과학책 그리고 신앙적, 영적인 종교의 금자탑으로 표현하며 옹호했다. 그가 신조(信條)의 개정을 반대한 이유는 첫째, 개정하려는 시도는 또 다른 개정의 시도를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이런 상태는 결국 장로교회를 파괴(破壞)로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개정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여전히 일부 보수적 신학교가 현대주의(現代主義, Modernism) 사상에 대해 매우 방어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워필드의 프린스턴 신학체계를 이어간 사람은 메이첸(John G. Machen, 1881-1937)이었다. 그는 전투적 자세로 현대주의에 저항했다. 이로써 당시 북장로교는 밀려오는 현대주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와 프린스턴신학교 학생들은 보수신학으로 무장된 건재한 교수들에 의해 현대주의 신학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요람이었다.

 

 

①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1924년까지 한국의 평양 장로회신학교 초기 교수진 대부분은 그 출신 신학교가 맥코믹신학교였다. 따라서 한국장로교 신학의 뿌리 이해를 위해 맥코믹신학교를 연구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사진, 맥코믹신학교, 1900년경)

 

1827년 맥코믹신학교 설립 목사는 크로우(John Finley Crowe, 1787-1860)였다. 물론 설립 당시 학교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학교가 발전 해 인디애나주 하노버대학(Hanover College) 안에 신학부(神學部)가 되었다. 후에 이 학교의 이름이 여러 번 변경되었으나 맥코믹 장로회신학교로 확정된 해는 1886년이다. 따라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모두 맥코믹신학교 이름으로 졸업한 이들이라 하겠다.

 

한국선교 초기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로 1888년부터 1902년에 한국에 입국한 숫자는 14명이다. 이들 중 평양신학교 교수진은 신학과 교회 정치를 담당한 마포삼열(S. A. Moffett, 1864-1939), 기독교 윤리, 신구약 주해를 담당한 소안론(W. L. Swallen, 1865-1954), 설교학을 담당한 곽안련(C. A. Clark, 1878-1961) 그리고 후에 합류한 편하설(C. F. Bernheisel, 1874-1958), 배위량(William M. Baird, 1861-1931) 등이었다. 이들이 졸업한 해는 각기 다르나 본국에서 이들을 가르친 교수들의 학풍은 거의 같았다.

 

위의 선교사들 재학 당시 1888년 맥코믹신학교 교수는 대부분 보수주의 신학을 견지한 학자들이었다. 1859년 부임한 역사신학, 목회신학, 교회정치를 담당한 할세이(LeRoy J. Halsey), 변증학, 험증학을 담당한 스킨너(Thomas H. Snner), 성경역사와 교회사 담당 그레이그(Willis G. Craig), 신약문헌, 주해를 담당한 말쿼스(Dav C. Marquis), 교회를 담임하면서 수사학, 목회신학을 담당한 존슨(Herrick Johnson)이 있었고 뉴욕의 유니온신학교 출신으로 구약문헌과 주해를 담당한 커터스(Edward L. Curtis) 그 밖에 캐리어(Augustus S. Carrier)등 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교수진이 동일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교수진들의 신학은 1910년 맥코믹신학교 시카고 이주 50주년 개교기념 행사에서 피셔(Daniel W. Fisher, 1838-1913)가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1881년 이사장으로 있을 때 이사들과 교수진 안에 보수적인 사람도 있었고 좀 더 온건한 자유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능한 사람들을 영입했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교수진의 신학(神學)이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호우 교수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당시 교수진을 진보그룹과 보수그룹 두 부류로 구분하고 있다. 진보그룹으로 존슨(Herrick Johnson, 1832–1913, 수사학과 목회신학), 스티븐슨(J. Ross Stevenson, 교회사), 제노스(Andrew C. Zenos,교회사), 로빈슨(George L. Robinson, 구약학)이 있었다. 보수적인 그룹으로는 스킨너(Thomas H. Skinner, 조직신학), 그레이그(Willis G. Craig, 성경역사, 교회사), 말쿼스(Dav C. Marquis, 신약문헌)으로 나뉘었다. 이중 존슨(Herrick Johnson)은 맥코믹신학교 교수 중 가장 진보적이었다. 그는 190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개정 운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적극 구학파에 대항한 인물로 1889년에 ‘프레스비터리안’(The Presbyterian) 지(誌)에 실렸다.

 

물론 1888년 교수진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교수진에 참여한 스티븐슨(J. Ross Stevenson)과 제노스(Andrew C. Zenos) 역시 비평신학을 견지한 신학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이 두 교수는 1888년 이후 맥코믹신학교에서 교수했다. 특히 제노스는 학생들에게 신구약의 비평신학을 가르쳤고 이사야서 문제를 독일 고등비평 관점에서 소개하였다. 스티븐슨은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제노스는 1895년부터 교수했다.

 

따라서 한국장로교 선교 초기에 입국한 그리고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한 마포삼열, 소안론, 배위량 등은 이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외 평양신학교 교수들은 대부분 구학파 전통에 우뚝 서 있었다. 우선 이들의 신학은 매우 성경적이면서 구학파 전통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또 목회의 실제적인 면을 강조했다.

 

할세이(Leroy J. Halsey, 1812-1896)는 그의 저서 ‘살아있는 기독교인’(Living Christian)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성경적이며 실제적인 답을 주고자 했다. 특별히 영적인 삶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성경은 교리보다는 삶에 관심을 가지고 구원에 대한 본질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장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임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그는 역사신학, 목회신학, 교회정치 교수를 담당했으나 성경 중심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으로서 학생들에게 전했고 실제적인 문제를 가지고 도전했으며 목회에 적용할 수 있도록 교수했다.

 

스킨너(Thomas Harvey Skinner, Jr. 1820-1892)는 1881년부터 1892년까지 조직신학 교수로 구학파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책 ‘Questions in Theological Course of the Seminary of the Northwest’에서 그는 1,102개의 문제를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기초 위에서 전부 다루고 있다. 그는 구학파 칼빈주의 신학의 철저한 수용자였다. 따라서 스킨너 만큼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도 없었다. 그는 1892년 1월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에 대한 조사(弔辭)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신학자로서 스킨너는 폭넓고 정확하고 특별한 신학 문화를 가진 인물이었다. (중략) 그는 유능하고 학식 있고 분명하며 영적이며 존경할만한 그리고 열정을 소유한 교수이며,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조직적으로 주석과 변호를 하며 신앙과 실제의 무오한 규율로서 성경을 믿었다.” 또 그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법칙으로 하나님 말씀을 극진히 사랑하고 믿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는 그를 존경한 학생들에게 그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레이그(Willis G. Craig, 1834-1911) 역시 스킨너의 뒤를 이어 1911년까지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또 모세오경의 저작권이 모세임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개정을 강하게 반대했다. 한편 신약문헌을 가르친 말쿼스(David C. Marquis, 1835-1912)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7단계로 구분하고 분석하여 연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성경을 학문적 접근 보다 실제적이고 실천적으로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학교 학풍(學風)은 학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아카데믹(academic)한 교과과정보다는 삶을 강조하고 주님께 헌신(獻身)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교수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주의적인 입장에서 비평신학을 방어하며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맥코믹신학교는 이같이 성경 중심의 정통 보수신학에 투철한 학자들과 실천신학적인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학생들을 배출했다. 특히 신학교의 신앙생활과 영적 분위기는 교수들에 의해 고무되었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주었다.

 

첫째, 매일 교수와 학생들의 교제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유지했다.

 

예배는 모든 학생이 정기적으로 어떤 교회든 참석하도록 독려했다. 또 학생들 스스로 기도와 찬양 그리고 성경 읽기 국내외 선교 연구모임을 갖고 학생과 교수들은 영적 헌신을 위한 모임들을 가졌다. 학교 분위기는 학자 배출보다는 복음적, 실천적인 지도자를 배출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신학교 교과과정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앙적인 삶과 관련하여 시카고를 방문하는 유능한 설교자 나 부흥사가 있으면 그들을 초청해 듣게 함으로 학생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특히 1876년과 1877년에 가졌던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와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의 부흥 집회를 통해 많은 학생이 영혼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국내외 사역자로 크게 활동하게 되었다고 할세이(Le RoyJ. Halsey)는 회고했다.

 

맥코믹신학교에서 선교 활동을 장려하는 창구(窓口) 역할을 한 단체는 그레이그 박사가 조직하여 지도한 ‘도시선교회’(The City Mission Committee of the Seminary)였다. 이 선교회는 1888년 가을 시카고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어두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레이그 박사와 32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그레이그 박사는 매일 저녁 도시 거리에서 기도회와 함께 예배드렸다. 이게 이웃에게 각성(覺性) 되어 주일에는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확장되어 갔다. 신학교의 각반에서 2명씩 파송되어 선교회를 조직했고 나중에는 시카고에 있는 다른 신학생들도 동참했다.

 

이는 맥코믹신학교가 복음적 연합정신(聯合精神)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선교회가 1891년 가을에는 서부로 확장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더 발전되어 실제로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1892년 졸업생 가운데 20명이 외국선교사로 헌신했고 1886년 이래 1893년까지 졸업생 가운데 42명이 해외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마포삼열이 해외선교사로 헌신했던 신학생 시절에 이 단체의 영향이 매우 큰듯하다.

 

이같이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이 그들의 재학시절 명예교수였던 할세이를 비롯 조직신학 교수였던 스킨너, 그레이그는 학생들에게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경에 기초한 보수신학을 가르쳤다. 물론 개중에는 간혹 진보적 사상을 지닌 교수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그들이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은 미약했음을 볼 수 있다.

 

교수진 가운데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구학파에 속한 이들이었다. 교회정치와 성례를 담당한 할세이, 조직신학을 담당한 스킨너 그리고 당시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담당한 그레이그, 신학문헌을 담당한 말퀴스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한 칼빈주의 신학을 지지하였다.

 

학생들의 영적생활은 당시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무디의 영향이 컸다. 신학교 안에는 경건생활을 실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그레이그 교수가 지도하는 ‘도시선교회’를 통해 실제적인 전도와 가르침의 사역들을 실천했다.

 

따라서 맥코믹신학교는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보수적이며 경건한 칼빈주의 신학이었으며 동시에 부흥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쳐났다. 전도와 사회봉사를 신학생 시절부터 실천하는 훈련을 했고 신학교의 주된 목적은 목회에 필요한 일꾼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②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프린스턴신학교는 맥코믹신학교 보다 당시 미국에서 더욱 명성 있는 신학교였다. 하지만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 가운데는 맥코믹신학교 출신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1911년부터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즉 어도만(Walter C. Erdman)이 구약주해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3년부터 라부열(Stacy L. Roberts)이 구약 및 신약주해를 가르쳤고 후에 함일돈(F. E. Hamihon)이 1920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왔다.(그림, 프린스턴신학교, 1900년경)

 

구(舊) 프린스턴신학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3인, 알렉산더(좌), 찰스 핫지(중), 워필드(우)

박용규 교수에 의하면 1925년 라부열이 제2대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맥코믹신학교 출신들 일색이었던 평양신학교 교수가 서서히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으로 전환되었고 신학적 입장은 오히려 더욱 보주주의 방향으로 흘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을 가르쳤던 프린스턴신학교의 신학은 어떠한 입장이었는가?

 

뉴저지 프린스턴신학교는 1812년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를 변증학(辨證學, Christian Apologetics)과 험증학(驗證學, Christian Evidences) 교수로 임명하면서 세워졌다. 그 후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로 이어지는 프린스턴 신학을 구축함으로 신학교는 점차 발전해 미국의 보수신학을 대변했고 도전하는 현대사상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 초기 선교사를 파송할 무렵인 1901년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진은 그린(William Henry Green, 1824–1900, 동양, 구약문헌), 패튼(William Miller Paxton, 1824-1904, 설교학, 목회신학),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 험증학, 변증학), 데비스(John D. Davis, 1854-1926, 구약사), 위트(John De Witt, 1842-1923, 교회사),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1949, 성경신학) 등이 있었다.

 

마크 놀(Mark Allan Noll, 1946- )은 1812년부터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신학교가 다시 개편되기까지 프린스턴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로 알렉산더, 핫지, 워필드를 꼽았다. 그는 알렉산더는 개혁파 신학에 입각한 고백주의와 보편주의 철학에 입각한 성경관으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존중했다고 평가했다.

 

핫지는 도전하는 현대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변증신학이라 했으며, 워필드는 당시 고등비평 신학에 정면으로 방어하는 논증신학을 전개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의 신학을 소위 ’프런스턴신학‘(The Princeton Theology)이라고 부른다. 프린스턴 신학은 약 100년 동안 변함없는 단일성(單一性)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한국에 입국한 초기 장로교선교사로서 프린스턴신학교 출신들이 신학교에서 수업할 그 당시 교수진들의 신학 사상은 어떠했는지 그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시 구약문헌 교수 그린(William H. Green)은 구약총론 가운데 정경(正經, The Canon)에서 비평신학에 대항해 성경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그는 ‘구약의 정경’이라는 항목에서 구약을 정경으로 기록된 책으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성경의 정경은 신앙과 실제의 영감 된 규칙으로 구성된 글 묶음의 용인된 명시이다.” 나아가 ‘정경형성의 비판적 이론’ 조항에서 고등비평의 대부인 아히혼(Johann Gottfried Eichhorn, 1752–1827)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또 다른 저작인 모세오경의 고등비평에서도 철저하게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임을 논증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6장에서 그린은 고등비평 주장자들의 가설(假說)이 철저하게 비성경적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의 성경관은 철저한 정확무오한 성경관과 유기적(有機的) 영감론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 당시 프린스턴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철저하게 주장하는 신학의 입장을 고수(固守)하고 있었다.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핫지에 이어 프린스턴신학의 계승자였다. 그의 임무는 선배들처럼 개혁주의 신학을 철저하게 교육받아 선포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정통 칼빈주의를 공격하는 온갖 비평을 논박(論駁)할 수 있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워필드 시대는 그의 선배들보다도 신학적으로 상황이 더 악화(惡化)된 때였다. 그는 수많은 미국 교수가 독일의 비평신학(批評神學)을 배우고 거기에 빠져 돌아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상황에서 성경 무오(無誤)를 방어하는 변증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철저한 방어자였다. 핫지에 이어 성경 영감설을 후학들에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성경 축자영감((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을 강조했다. 또 “신약 기록자(記錄者)들은 철저하게 성경을 하나님의 책으로 믿었다.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되는데 사람으로서의 본성에 위배가 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성경 모든 부분이 인간 저자의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하나님의 책이지만 또한 사람의 책으로 주어졌다.”라고 했다. 그리고 성경의 영감에 대해 “성령에 의해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영향이 성경 기자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한 것으로 무오하다.”라고 했다.

 

보스(Geerhardus Vos) 역시 성경신학 교수로서 고등비평(高等批評) 신학을 대항하여 ‘모세오경 코드의 모세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임을 조목조목 논증했다. 이같이 프린스턴신학교의 모든 교수는 철저하게 비평신학에 도전하여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프린스턴 신학은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1851)에 의해 시작되고 찰스 핫지에 의해 체계가 세워졌다. 그리고 벤자민 워필드에 의해 강화되고 유지되었다. 프린스턴 신학의 특징은 이렇다.

 

첫째, 철저한 성경 영감론에 기초해서 당시에 도전해 오고 있는 유럽의 비평신학에 변호하고 있었다. 이때 프린스턴 신학을 변호하는 이들 가운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워필드였다.

 

둘째, 구(舊) 학파 신학으로 대표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견고하게 붙들고 있었다. 이것이 성경을 지킬 수 있는 신조(信條)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프린스턴 신학은 맥코믹보다 더욱 철저하게 당시 도전하는 비평신학의 방어자였다. 이런 입장은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진들의 일관된 사상과 태도였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은 철저한 성경적 성경관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이며 경건한 칼빈주의 신학 입장에 서 있었다. 적어도 이런 사상은 프린스턴 신학의 교과과정이 개편되는 1929년까지 계속 구(舊) 프린스턴 신학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900년대에 한국에 입국한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은 다 철저하게 성경무오 사상으로 무장된 구(舊) 학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분위기는 단지 학구적인 면만 강조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회를 통해 학생들이 영성을 유지하게 했다. 특히 주일 아침 신학교 채플에는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통해 학생들에 도전하도록 격려했다. 주일 오후에는 주어진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통해 경건한 삶을 끌어내게 했다. 그리고 주일 저녁에는 선교회 모임으로 모였고 또 한 달에 한 번은 교수들의 지도하에 연합기도회로 모였다. 그 밖에도 사회를 위한 다양한 사역에 봉사하도록 지도했다.

 

이런 신앙과 삶의 균형을 갖춘 지도자 훈련을 신학교 재학 중에 학교에서 마련했다. 특히 워필드는 학생들에게 깊은 영적 통찰력을 주었다. 신입생을 위한 강연에서 그는 월버포스(Wilberforce) 감독의 말을 인용하여 마음의 훈련, 손의 훈련, 머리의 훈련을 통해 헌신과 실제(實際) 그리고 지적훈련을 강조했다. 따라서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신학 공부를 하면서 철저한 성경의 영감교리, 말씀을 통한 경건 생활 그리고 세계선교에 헌신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역자로 훈련을 받았다.

 

 

(2) 미국 남장로교

 

미국 남장로교(PCUS,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의 교리적 기초는 철저한 칼빈주의(Calvinism) 신학이었다. 칼빈주의는 칼빈주의 표준문서인 예정론(Supralapsarian type)에 기초하고 있다. 미남장로교 지도자들은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역시 결코 어떤 변화를 원하지 않았으나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불어 닥친 신학적 도전 앞에 직면해야만 했다. 즉 전통적 성경의 연대, 성경의 권위, 성경의 역사성을 비판하는 자유주의 비평신학과 싸워야 했고 신앙고백의 개정(改定)을 경계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들은 장로회(長老會) 주의를 더욱 분명하고도 정확한 진술로 표현하며 더욱 교회의 철저한 조직 형태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 교회사 교수 존슨(Thomas Cray Johnson, 1859-1936)은 미남장로교의 6가지 구별된 특징 가운데 세 번째 조항으로 죄인을 구원하는 것 가운데 본질적 부분을 진정한 칼빈주의라고 하며 이것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했다. 네 번째로는 장로회주의의 완전한 형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라고 했다. 이는 미남장로교가 대단히 보수적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 하겠다.

 

미남장로교가 교리적으로 칼빈주의이며 교회적으로는 철저한 장로회주의를 표방했으나 선교는 미북장로교보다 좀 늦은 감이 있다. 미국 장로교 구(舊) 학파와 신(新) 학파 간 연합 후 1856년부터 미남장로교는 해외 선교에 힘쓰기 시작했다. 교회 해외 선교사역은 월슨(John Leighton Wilson, 1809-1886)이 총회에 헌의(獻議)하고 그의 지도하에 시행되었다.

 

물론 북미 원주민 인디언 선교는 이미 시작했으나 해외 선교는 인슬리(Elias B. Inslee) 목사 가족이 1857년 중국 상하이 지역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미남장로교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한 효시였다. 같은 해에 이탈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했고 1868년에는 브라질, 1874년에는 멕시코, 그리이스, 1886년에는 일본, 1890년에는 아프리카, 한국은 1892년에 이눌서(Reynolds) 부부, 전위렴(Junkin) 부부, 데이트(Tate) 남매, 데이비스(Linnie Davis)를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이 같은 미남장로교 해외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70년 남부의 구학파와 신학파가 연합한 이후 총회에서 해외 선교를 위한 조직을 구축(構築)하면서 시작되었다.

 

① 유니온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

미남장로교는 1799년부터 1804년까지 부흥운동 이후 교인의 급증으로 인해 목회자를 양성할 신학교가 절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1806년 하노버(Hanover) 노회는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류 그리고 행동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편 1812년 버지니아(Virginia) 노회는 노회 안에 신학교 설립을 결의하고 신학교 건립 모금을 위해 호지(Moses Hoge)를 교수로 임명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책임을 감당하다가 1820년 소천했다.

 

대회는 다시 알렉산더(Archld Alexander) 교수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거절하여 2년 동안 후임자가 없어 신학교 건립문제를 하노버 노회로 넘겼다. 그러자 동부 버지니아의 모든 노회는 대회전에 신학교 건립 프로젝트를 세워 단순하게 한 개의 학과로 신학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1822년 11월 16일 리치몬드 제일장로교회 라이스(John Holt Rice, 1777-1831) 목사를 교수로 임명했다. 그는 열심히 여러 곳에 다니며 모금하여 드디어 1824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이것이 유니온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 in the city of Richmond, Virginia) 설립배경이다.

 

신학교는 1826년 총회로 귀속되었지만 1827년 하노버노회는 버지니아대회와 북캐롤라이나대회가 공동운영하도록 양도했다. 이때 유니온신학교(뉴욕 유니온신학교와 다름 – 편집자)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신학생들의 숫자가 계속 증가했다. 라이스는 도서관, 강의실, 기숙사, 저택을 마련하는 놀라운 성과를 남기고 1831년 소천했다. 그 뒤를 이어 1831년 11월 백스터(George A. Baxter, 1771-1841)가 조직신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1953년 미국 남부 개혁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답네(Robert L. Dabney, 1820-1898)가 교회사와 교회정치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후에는 조직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스미스(Benjamin M. Smith, 1811-1893)가 동양문헌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학생은 계속 증가하다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 기간에는 신학교가 쇠퇴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1865년부터 10년은 회복과 성장 기간이었다. 1870년 알렉산더(Henry C. Alexander, 1878-1975)가 성경문헌과 신약해석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83년 밀러스버그교회 모어(Walter William Moore, 1857-1926)가 동양문헌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비평신학적으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애플비(James Appleby)는 “1883년 모어가 가르치기 시작할 때 그의 신학 사상은 그의 연대기 작가가 표현한 것과는 달리 보수적 입장과 거리가 멀었다.”라고 말했다. 즉 그는 당시의 성경 문자주의와 영감론에 있어 진보적이었다.

 

같은 해 1883년 여름 조직신학 교수 답네가 은퇴한 후 이어 펙(Thomas Ephraim Peck, 1822–1893)이 임명되었으며, 멤피스 제2교회 목사 라티머(ames Fair Latimer, 1845-1892)는 펙의 이동으로 교회사 및 정치를 가르쳤다. 라티머는 교수와 설교자로 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자신의 전공을 폭넓게 연구했으며 통찰력을 가지고 학생들을 교수했다. 그는 학자로서 모든 학생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1891년 알렉산더가 은퇴하고 이어 사우스웨스턴 장로교대학교 명예총장 히스만(Charles. C. Hersman)이 성경문헌과 신약해석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철저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인정하는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으로(1863년 졸업) 1887년 가을 컬럼비아신학교에서 성경문헌 책임교수로 봉직했다. 1888년 사우스웨스턴대학교에서 히브리어, 신약문헌을 담당했고 1891년에 유니온신학교로 이적했다.

 

1892년 라터머가 소천하고 이어 존슨(Thomas C. Johnson)이 교회사와 교회정치를 담당했고, 욕크빌교회 목사 잉글리쉬(Thomas R. English)가 영어성경과 목회신학 가르쳤다. 잉글리쉬는 전통적 성경연구 틀을 깨고 귀납법적인 성경연구로 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런 가운데 유니온신학교에서 40년 이상 교수한 스미스가 1893년 소천했고 그해 여름에 펙(T.E. Pect)이 소천했다. 그리하여 바우한(C.R. Vaughan)이 조직신학과 험증학 교수로 임명되어 1896년까지 가르쳤다.

 

이처럼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교수들 신학은 철저한 칼빈주의 보수신학을 견지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유니온신학교 교회사 교수 존슨의 미남장로교의 구별된 특징의 지적은 이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당시 학생들은 신학의 모든 분야에 있어 탁월한 교수들로부터 보수적이며 경건한 신학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유니온신학교의 영적 분위기는 학생들이 말씀, 기도, 봉사,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었다. 매일 아침 채플이 열렸으며 모든 학생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왔다. 주중에는 반별 기도 모임이 있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를 위한 기도 시간을 갖고 서로 우정을 나누었다.

 

수요일 밤 모임에는 학생들이 교수와 교인들 앞에 설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편 월요일 아침에는 선교연구를 통해 선교의 열정을 유지했으며 주일에는 자신이 원하는 교회에 가서 교육과 설교를 통해 지역교회를 섬겼다. 이 같은 유니온신학교의 영적 분위기는 학생들에게 영적 영향과 교회 봉사, 선교의 열정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한국에 입국한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이 본국에서 신학훈련을 받을 당시 호주나 캐나다는 이미 자유주의적 비평주의 신학이 침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구(舊) 프린스턴신학 체계의 영향 아래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인정한 보수적 경건주의적 칼빈주의 신학이 우세하였다.

 

프린스턴신학교는 물론이지만 맥코믹신학교 교수진 역시 성경의 유기적 영감과 칼빈주의 표준 교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옹호하고 있었다. 이때는 세계적인 선교의 영향을 미쳤던 무디 부흥운동의 말기에 해당했다. 맥코믹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은 무디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그레이그(W.Craig)가 이끄는 ‘도선선교회’ 영향을 통해 선교의 비전(vision)을 세웠다.

 

그들이 어떤 신학과 사상적 배경 가운데서 신학과 신앙의 훈련을 받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임이 틀림없다. 왜냐면 선교지에 와서 사역을 펼쳐 나갈 때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본국에서 교육을 통해 영향받은 신학과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사역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역과 신학교에서의 가르침은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처럼 그들은 본국서 배우고 경험한 기초위에 사역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미북장로교를 중심으로 호주장로교 미남장로교 그리고 캐나다장로교 선교사들의 본국 배경을 살펴보았다. 주로 미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수로 사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타(餘他) 장로교 선교부의 본국 배경을 다룬 것은 미북장로교 출신의 선교사들은 그들과 협력했기 때문이며 이런 사실을 몇 가지로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이 수학(修學)한 신학교의 학풍은 당시 유럽 비평신학(批評神學)의 도전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하고 보수적인 신학을 교수한 신학자들이 포진한 신학교 출신이라는 점이다.

 

당시 자유주의적 비평신학에 대항하여 성경관을 변호하는 구(舊) 프린스턴신학의 체계에서 프린스턴신학교는 학생들에게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전투적으로 변증하는 신학을 전수해 주었다. 맥코믹신학교 역시 프린스턴신학교와 긴밀한 관계 속에 성경을 중심으로 한 보수신학을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하지만 호주 오르몬드대학과 캐나다 핼리텍스장로교대학은 비록 비평신학이 유입되는 과도기였으나 그들이 직접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영향을 줄 만한 기회가 없었다. 이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학풍이 건전한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搖籃)이 될 수 있었던 중요 단서가 된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진에 등용된 선교사들은 대부분 보수주의 신학 배경을 가졌고 동시에 철저한 성경 중심의 신앙으로 무장된 이들이었다.

 

둘째, 1880년대부터 1890년대는 무디를 중심 한 부흥운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후보생들에게 전도와 선교의 비전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결정케 하는 중요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면 맥코믹신학교의 마포삼열 박사를 위시한 소안론, 곽안련 등은 무디의 영향으로 신학교 내에 조직된 ‘도시선교회’(그레이그 교수 지도)에서 활동하면서 해외 선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뿐만이 아니라 원두우 역시 무디의 영향으로 설립된 ‘전국 신학교연맹대회’를 통해 선교사로 헌신했다. 미남장로교의 존슨, 이눌서, 전위렴 역시 ‘전국 신학교연맹대회’에서 원두우의 영향을 받고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이었으며 그들도 무디의 영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곧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하는 중요한 동인(動因)이 되었다.

 

셋째,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본국에서 목회와 선교에 철저한 훈련을 받은 경력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모든 교인에게 먼저 전도와 선교 정신(spirit, mind)을 심어 주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당시 부흥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부흥을 열망한 이들이었고 사회봉사를 통한 교회의 연합사역을 중요시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복음주의 정신이 투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학교에서 철저하게 성경 중심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맥코믹신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사역 중심의 실제적인 사역을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교 안에서 매일 그리고 매주 진행되는 경건 훈련 및 세미나와 주일에 진행되는 교회 봉사였다. 그리고 그레이그(W. Craig) 교수가 이끈 ‘도시선교회’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정현 박사, 한국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겸임교수, ‘초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 그리심, 2011. pp.40-96.)

 

 

 

5. 학생 자원자운동(SVM: Student Volunteers Movement)

 

건초더미 기도운동(Haystack Prayer Meeting)

17세기 이후 세계의 영적 흐름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사건이 있다. 바로 1806년에 뉴잉글랜드 윌리암스 칼리지에서 일어난 “건초더미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이다. 이 기도회 사건을 계기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위대한 미국의 학생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806년 당시 미국은 지금의 New England 지방을 중심으로 정착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청교도들의 선교정신을 이어받아 복음전파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였지만, 아직 다른 나라에 대한 선교적 관심은 없었다. 그러던 중 뉴잉글랜드의 커네티컷 주 리치필드(Litchfield) 지방을 중심으로 제 2차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신학교가 생기고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고조되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 리치필드(Litchfield)의 부흥운동은 메싸추세츠의 윌리암스 타운(Williamstown)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 이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월리암스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 증 제임스 리차드(James Richards),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 하비 루미스(Harvey Loomis), 바이람 그린(Byram Green), 프랜시스 로빈스(Francis Robbins), 다섯 학생은 윌리암스 마을과 대학 안에 영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기도하다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만나게 되고 함께 정기적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그러다가 1806년 8월 초 어느 토요일, 사무엘 밀즈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학생들은 Hoosic River 강변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급히 소나기를 피해 근처에 있는 건초더미(Haystack) 속으로로 몸을 피했고, 이들은 그 곳에서 세계선교의 대한 비전을 품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이 때 기도회를 인도하던 밀즈는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을 받아 “우리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We can do this if we will)” 고 하면서 해외 선교를 위해 기도했다. 이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검은 구름은 지나가고 파란 하늘이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이들은 여름 내내 그 숲 속에서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했고, 이 기도회는 1807년 이듬 해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미국 청년들 사이에서 일어난 해외선교를 위한 첫 기도모임이었던 셈이다.

 

학생선교동원운동(SVM)

사무엘 밀즈를 비롯한 다섯 명의 청년들은 1808년 9월 7일 캠퍼스의 한 강의실에 모여서 해외선교를 위해 만든 “형제단 헌약(The Constitution of the Brother)”에 서명한다. 그 후 그들은 이 형제단 모임(The Society of Brethren)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 나갔고, 사무엘 밀즈를 비롯한 첫 기도모임의 다섯 명은 윌리암스 대학을 졸업한 후 주변의 신학교와 예일, 프린스턴, 하버드 대학으로 재입학 해서 세계선교에 동참할 학생 헌신자들을 확보해 나갔다. 첫 기도 모임의 다섯 명 중 네 명은 1810년 6월 28일 당시 브레드훠드(Bradford)에서 열리고 있던 교단 총회를 찾아가 자신들을 해외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한 교회선교위원회를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 결과 최초로 미국교회선교위원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가 만들어지고, 2년 후에는 그들 중 세 명과 또 다른 두 명이 선교사로 파송받아 인도로 떠난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이 선교 형제단을 통해 많은 대학생들이 선교에 동원되어 선교 불모지였던 아시아로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역사한다. “건초더미 기도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속속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건초더미 기도회”가 있은 지 무려 71년 후인 1877년, 대학생 복음 역사와 세계선교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던 YMCA학생 총무 루터 위샤드(Luther Wishard)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무엘 밀즈의 선교정신을 잇고자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윌리엄스 대학을 방문하여 건초더미 기념비(Haystack Monument) 앞에 엎드려 서원을 드린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의 이 기도는 1806년 사무엘 밀즈가 건초더미 속에서 “We can do this if we will” 하고 드렸던 바로 그 기도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6년 후에 인도에서 오랜 선교활동으로 건강이 나빠져 1883년경 미국으로 돌아온 로열 와일더(Royal Wilder)라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의 아들인 로버트 와일더(Robert Wilder)는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사무엘 밀즈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 학생 100명을 선교에 동원하기 위한 모임을 만든다. 그리고, 때마침 루터 위샤드는 영국 선교에서 큰 성과를 얻고 고향 메싸추세츠 노스필드(Northfiled)에 머물고 있는 38세의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에게 한 달 간의 성경사경회를 열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집회가 1886년 7월 1일-31일에 열렸던 역사적인 헐몬산(Mt. Hermon) 수양회이다. 로버트 와일더는 프린스턴 학생들과 함께 이 집회에 참석한다.

 

이 수양회에 모두 89 대학으로부터25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무디의 초청으로 선교에 대해 설교하기로 했던 피어슨 박사(Dr. A.T. Pierson)는 "모든 사람이 모든 곳으로 가라(All should go, and go to all)"고 외치며 이 세대에 세계복음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헐몬산 수양회가 무디가 인도하였던 성경사경회였던 만큼, 무디가 참석했던 청년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수양회에서 로버트 와일더와 존 모트(John Mott)라는 대학 2년생(로버트는 당시 대학 4학년생)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해외 선교가 되는 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이다(It is my purpose, if God permit, to become a foreign missionary)”라는 서약을 골자로 한 “프린스톤 서약’(Princeton Pledge)”을 만들고 참석한 청년들에게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헐몬산 수양회에 참석했던 250명의 참석자 중 100명이 “프린스톤 서약”에 서명하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서약은 “학생 자원자운동(SVM: Student Volunteers Movement)”이라는, 미국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생 선교운동을 태동시킨다. 존 모트를 회장으로, 로버트 와일더를 순회 총무로 선출하여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는 슬로건을 걸고 1888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1930년 때까지 20만 명의 선교 헌신자와 2만 5백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생 선교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건초더미 아래에서 시작된 다섯 명의 기도모임이 19세기 초의 미국선교역사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부흥의 물결이 한반도까지, 그리고 다시 뉴잉글랜드로,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된 부흥의 물결이 건초더미 기도회를 통해, 청년선교운동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뉴잉글랜드의 부흥의 물결은 당시 땅끝이었던 한반도에 까지 밀려오게 된다. 1885년에 우리나라에 왔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와 아펠셀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는 1883년, SVM가 창설된 첫 해, 커네티컷(Connecticut) 주(州))의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전국 신학생대회(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에 언더우드는 뉴브룬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 대표로, 아펜셀러는 드류(Drew) 신학교 대표로 대회에 참석했다. 그 대회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된 두 사람은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 항구에 첫 발을 딛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청년대학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그 결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민족의 장래를 책임지는 선구자들로 변화된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원동력이었던 토마스 하디(Thomas A. Hardie, 1865-1949) 역시 학생자원운동을 통해서 조선에 온 선교사였다.

 

ReNEW 집회는 뉴잉글랜드의 부흥의 물결로 인해 놀라운 부흥과 축복을 경험한 한국 청년들이, 복음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200년전 부흥의 진원지였던 뉴잉글랜드 땅에서 그 부흥의 물결(Wave)을 다시 일으키기(Revive)자 라는 취지로 세워진 집회이다. “Revive the New England Wave!” 이것이 우리들의 슬로건이다. 바라기는 2010년에 시작하는 ReNEW 청년연합집회가 청년선교운동의 새 물결을 일으켜, 보스턴과, 뉴잉글랜드와 미국 전역에,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 열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민족과 세계를 위해 새 역사를 쓰자는(ReNEW), 물결의 진원지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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