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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윌리엄 전킨선교사 족보 이야기 (3)

jbhimr by  조회 수:26 2024.09.19 10:51

 

미 남장로교 파송 메리 몬태규 레이번(Mary Montague Reyburn) 선교사 연구

최은수 교수의 교회사 논단

2021년 02월 01일 (월) 14:07:40 최은수 교수 webmaster@amennews.com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교회사 Ph.D. Berkeley GTU 객원교수, IME Foundation 이사장

 

미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는 개신교 최초로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두우) 선교사가 1891년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개최되었던 12회 전국 신학생 대회에서 한국 선교의 필요성에 대하여 연설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1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 선교부는 1892년 2월에 한국 선교를 결정하였고 7명의 선발대를 파송 하였다.2

 

지난 6주에 걸쳐서 연재하여 다룬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Selina Linnie Fulkerson Davis) 선교사를 필두로 또 다른 독신 여성인 매티 새뮤얼 테이트(Mattie Samuel Tate, 최마태) 등이 독신 선교사였고, 기혼 여성으로는 전위렴(William McCleery Junkin) 선교사의 부인인 메리(마리온) 몬태규 레이번 전킨(Mary or Marion Montague Reyburn Junkin) 선교사와 이눌서(William David Reynolds) 선교사의 부인인 팻시 볼링 레이놀즈(Patsy Bolling Reynolds) 선교사 등이 있었다.3

 

당시 독신 여성 선교사이든 기혼 여성 선교사이든 남성들 못지 않게 헌신과 열정으로 사역을 감당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거나 남편 선교사의 연구와 함께 잠시 언급되는 경향이

▲ 메리 레이번 선교사의 가문이 크게 기여한 버지니아 사관학교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4 그런 연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자신들의 삶과 사역을 기록으로 남겨 달라고 유지를 남긴 미 남장로교 파송 여성 선교사 제위의 염원에 부응하는 견지에서 셀리나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 선교사에 관한 연구를 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공개하였다.

 

데이비스 선교사를 이어 이제 두 번째로 레이번 선교사를 언급하고자 한다. 전위렴 선교사의 부인인 메리 몬테규 레이번 선교사는 버지니아주 전체와 특별히 렉싱턴(Lexington)이 속한 락브릿지 카운티를 대표하는 명문가에서 성장하였다.5 그녀의 친할아버지인 알프레드 레이번(Alfred Reyburn)은 렉싱턴 장로교회의 장로로서 버지아주 의회 의원을 역임하였고, 렉싱턴에 위치한 버지니아 사관 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역시 렉싱턴에 위치한 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Washington and Lee University)의 이사장으로 평생을 헌신하였다.6 그녀의 친조부인 알프레드 레이번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를 추모하는 글들이 넘쳐났던 사실만 보아도 상당한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7

▲ 메리 레이번 선교사의 친조카인 제임스 그래함 레이번 학장의 이름으로 명명된 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의 중앙도서관

 

메리 레이번 전킨 선교사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제너 레이번(Edward Jenner Leyburn) 역시 렉싱턴 장로교회의 장로로서 주로 건축 관련 사업을 하였으며, 건축과 연관된 특허권도 보유하였고, 버지니아주의 대표적인 건축물들과 더불어 주로 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의 기념비적인 건물들을 완성하였다. 부친이 1900년 12월 3일에 소천했을 때, 렉싱턴 장로교회와 더불어 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가 함께 추모할 정도로 학교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대단하였다.8 그녀의 형제 중 한 명인 에드워드 리들리 레이번은 목사로 봉직하였고, 그의 아들인 제임스 그래함 레이번(James Graham Leyburn)은 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 교수와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학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그 대학의 중앙 도서관의 이름을 ‘제임스 그래함 레이번 도서관’으로 명명하였다.9

 

▲ 메리 레이번 선교사의 가문이 섬겼던 렉싱턴 장로교회

 

메리 레이번 선교사의 가문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혁혁한 기여를 했던 버지니아 사관학교는 1839년에 설립된 군사 대학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특별히 주정부가 지원하는 주립대학 형태로서도 미국에서 최초다. 미국 북부에는 미 육군사관학교가 있고, 미 남부를 대표하는 버지니아 사관학교가 건재함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지니아 사관학교는 최초의 오성(Five Star) 장군인 조지 마샬을 비롯하여 300명에 육박하는 군 장성들을 배출한 명문이다.

 

레이번 선교사의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하나의 교육기관은 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로 1749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리버럴 아츠 대학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대학은 건국의 아버지인 워싱턴 대통령이 직접 설립 기금을 출원함으로 개교하였다. 그래서 한동안 워싱턴 대학으로 불리다가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총사령관을 지냈던 로버트 리 장군이 학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현재의 학교명이 되었다. 이 대학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각 분야를 대표할만한 인재를 수다하게 배출하였다.

 

레이번 선교사의 가문이 미국 남부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 두 학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그녀의 가문이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적으로도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남자였다면 이 두 학교 중 한 곳을 졸업하고 군인이든 전문직이든 나름대로 가문의 영광을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메리 레이번 선교사가 졸업한 어거스타 여자 신학교. 후에 메리 볼드윈 대학교로 변경

 

▲ 메리 레이번 선교사와 두 명의 방한 선교사를 기록한 학교 역사 기록

 

하지만 메리 몬태규 레이번 선교사는 그녀가 대학교육을 받을 시점이 되었을 때 집 근처에 있고 친조부와 부친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섬겼던, 버지니아 사관학교나 워싱턴 앤드 리 대학교에 입학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전통 있는 여타의 대학들처럼 여성들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남학생들만을 위한 교육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웃 도시인 스타운턴(Staunton)에 위치한 어거스타 여성 신학교(Augusta Female Seminary, 후에 Mary Baldwin University)를 졸업하였다.10

 

1842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당시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여성 신학교 운동의 흐름 속에서 여성들의 고등교육을 위해 미국 장로교 소속의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이 학교도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을 꼽으라면, 애나 마리아 자비스(Anna Maria Jarvis)를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된다. 애나 자비스가 바로 ‘마더스

데이’(Mother’s Day)를 만들어 미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어머니 날’ 또는 ‘어버이 날’을 기

 

▲ 메리 볼드윈 대학교의 현재 모습. 졸업생인 자비스에 의해 어머니 날이 제정 되었고, 미국에서 유일한 버지니아 여자 사관학교로 유명

 

념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타 여자 신학교가 메리 볼드윈 대학교로 이름을 개명한 이후로 ‘마더스 데이’의 애나 자비스와 함께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명물이 있는데, 바로

대학 부설로 운영되는 ‘버지니아 여성 사관학교’(Virginia Women’s Institute for Leadership, VWIL)가 그것이다. 미국 전체에서 여성만으로 형성된 사관학교는 여기가 유일하다. 최근에는 ‘버지니아 여성 사관학교’의 경쟁률이 더욱 치열해져서 입학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현실이다.

 

▲ 메리 레이번 선교사의 공식 사망 기록

 

이 학교를 졸업한 로티 잉그램 위더스푼(Lottie Ingram Witherspoon)은 배유지(Eugene Bell) 선교사의 부인이 되어 한국에 와서 선교사로 섬겼고,11 역시 같은 학교 졸업생인 엘리자벳 알비(Elizabeth A. Alby)도 부위렴(William Ford Bull) 선교사의 부인이 되어 한국 선교사로 헌신하였다.12 특히 로티 위더스푼 벨의 딸인 샬럿 벨이 윌리엄 린튼과 결혼함으로 린튼가(인씨)의 대를 이은 한국 사역이 시작되었다.13 이 학교와 연관된 후원자들이 모금을 하여 변경된 학교 이름을 따서 군산에 멜본딘(Mary Baldwin) 여학교가 문을 열었다.

▲ 버지니아 주 렉싱턴에 위치한 오크 그로브 묘지에 세워진 메리 레이번 선교사의 묘비

 

레이번 선교사는 1892년 6월 27일에 전위렴 선교사와 결혼한 후 한국으로 출국하여 섬김의 열정을 불태웠다.14 전위렴 선교사의 죽음 이후 미국의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87세인 1952년 11월 2일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15 그녀는 고향인 렉싱턴의 오크 그로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묘비에는 ‘한국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군산에 묻힌 전위렴 선교사의 아내, 메리 레이번 전킨’이라고 쓰여 있다.

 

주(註)

 

1. Horace G. Underwood, “Address,” Report of the Twelfth Annual Convention of the American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Pittsburgh: Murdoch, Kerr & Co., 1892), 53-54.

2. Thomas Cary Johnson, The History of the Southern Presbyterian Church (The Log Press 1894), 369-370.

3. ‘A New Mission Field: The First Generation of Presbyterian Missionaries in Korea, The Journal of Presbyterian History, Vol. 93, No. 1 (Spring/Summer 2015), pp. 24-31.

4. Martha Huntley, ‘Presbyterian Women’s Works and Rights in the Korean Mission, American Presbyterians, Vol. 65. No. 1, 44-47

5. The Reyburn Family Papers, Virginia Military Institute Archives, Washington and Lee University Archives, The Rockbridge County Historical Society.

6. George W. Howard, The Monumental City: Its Past and Present Resources (Baltimore 1873), 595.

7. The Reyburn Family Papers.

8. Ibid.

9. Ibid.

10. U.S., College Student Lists, 1763-1924, Augusta Female Seminary for Mary M. Leyburn.

11. S.M.Crane, A Legacy Remembered (Franklin 1998), 90-132; R.B.Dietrick, Kwangju Christian Hospital: The Missionary Years, 1905-1976, 13-38.

12. Ibid.

13. 인애자 선교사와의 대담, 블랙 마운틴, 2012년 10월 18일, IME Foundation.

14. Virginia, Select Marriages, 1785-1940.

15. Virginia, Death Records, 1912-2014.

 

 

 

1898년 6월 15일 전킨의 편지

 

윌리엄 전킨의 편지

(1898년 6월 15일)

한글명칭 윌리엄 전킨의 편지 (1898년 6월 15일)

영문명칭 William Junkin's Letter (June 15, 1898)

발신자 Junkin, William McCleery(전위렴)

수신자 미셔너리 지

작성연도 1898년 작성월일 6월 15일

작성공간 전라북도 군산

자료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머리글

군산에서 윌리엄 전킨이 현황 보고 형식으로 미셔너리 지에 보낸 편지 요약

 

문서 편집자

조재혁(Frank Jae Hyuk Jo)

 

기고지

The Missionary Published by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 Executive Committee of Foreign Missions

 

본문

Kunsan 군산

June 15, 1898 1898년 6월 15일

 

Since writing of my plans many things have happened to change them. I then thought of waiting till fall to build, but the carpenter returned and insisted on going on with the work, so I began May 27th, and have been making good progress. But two weeks ago something hinted at in my former letter took definite shape--Kunsan is to become a treaty port within six months (from May 31st).Mr. Bell인물-유진 벨 so telegraphed me, and last week I had a telegram from Dr.Allen[1]인물-앨런 saying: “Do not begin to build at Kunsan.”

저의 계획을 쓴 이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을까지 건축을 기다릴까 했는데, 목수가 돌아와서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해 5월 27일부터 건축을 시작해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2주 전에 제가 보낸 편지에서 암시했던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군산은 6개월 이내에 개항장이 될 것입니다(5월 31일부터). 벨 선생님이 저에게 전보를 보냈고 지난주에 알렌 박사님으로부터 “군산에서 건축을 시작하지 마십시오”라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This means that we may have to give up all the land we own(?) there, and that we may have to buy other mission premises at anywhere from $100 to %200 gold. If our property comes within the foreign settlement, we will have to give it up, or, at most, receive a small compensation.

이 말은 우리가 그곳에서 소유한 모든 땅(?)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다른 선교부 건물을 금 100달러에서 200달러까지를 내고 사야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건물이 외국인 거주지 내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거나 기껏해야 작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If our land out on “Good Hill” is not included in the settlement, we can hold it, and as it is the healthiest location, we had doubtless best built there, even if our work is a considerable distance away. The Korean settlement will most probably be along the Chunju road: We will want to secure a site for church property at once; or, as at Mokpo, the Catholics will be where we want to be; or we’ll have to buy near them, and be called trespassers. The settlement must, of course, begin at the river from the anchorage, and will include the village of Kunsan.

“굿힐”에 위치한 우리 땅이 외국인 정착지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유지할 수 있고 또 그곳이 가장 좋은 위치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역지가 꽤 멀리 떨어지더라도 의심의 여지 없이 그곳에 지어져야 합니다. 한국인 정착지는 아마도 전주길을 따라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부지를 즉시 확보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또는 목포에서처럼 천주교 신자들이 우리가 원하는 곳에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그들 근처에 부지를 사고, 무단 침입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정착지는 물론 정박지로부터 강에서 시작해야 하며 군산마을이 포함될 것입니다.

 

How much farther north and south it is to be extended is not yet known. Hence I shall have to prepare all my building material, and then sit down on it and wait till the settlements are definitely located. Having to carry my building material to our place for storage, instead of the carpenters taking it directly to the site, will add still more to the cost of the house.

남북으로 얼마나 더 뻗게 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건축 자재를 준비하고 정착지가 확실히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목수들이 건축자재를 직접 부지로 가져가는 대신 우리 집에서 보관해야 하므로 비용이 더 많이 추가될 것입니다.

 

편지내 언급된 장소 밎 좌표

Chunju 35.8242, 127.1480

Kunsan 35.95133, 126.951141

Mokpo 34.8118, 126.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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