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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복음교회 신학 서설 2020년 8월 14일

jbhimr by  조회 수:8 2020.09.23 11:02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정체성 세미나 2020년 8월 14일

 

복음교회 신학 서설

전병호 목사

 

복음교회의 정체성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한국교회의 성장 정체성부터 말해 보고자 한다, 물론 여러 가지 분석과 대안들이 난무하고 있다. 한국의 교회수와 교인의 수에 대한 통계학적 허수가 너무 많아 실제적인 모습을 알 수 는 없다. 그러나 각 교파마다 이구동성 성장이 멈추어 졌다고 정체현상을 말하고 있음을 볼 때 확실히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한국 사회 일각에서 교회는 많지만 교회다운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들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가 저에서 혼란을 보게되고 특히 코로나바이러스19의 유행과 장기간의 홍수피해로 인해 유사이래 이런 혼란이 있었을까? 6.25때 난리는 나라도 아니라는 말까지 있다. 정치인들은 우왕좌왕하고 백성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교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간혹 들리는 교회의 목소리라 해야 들리는 꾕과리 소리로 인식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와 시급한 시대적 요구가 있는데 짐짓 교회는 들을 귀가 없는 것 같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들을 귀가 없음을 의미한다. 로마제국 시절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가던 때에, 주님께서는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일곱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었다.

80여 년 전 우리민족이 일본제국주의 핍박아래 신음하던 때에 최태용목사님이 전국을 순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였지만 당시 교회들은 최태용목사님을 통헤 전하신 성령의 말씀에 들을 귀가 없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여러 종교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발전하여 왔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시대이었다. 원효대사 의상대사 지눌법사 등은 세계불교사에 이름을 떨치었던 분들이다. 아마도 그 시대 이후 한국불교 역사에 원효대사만한 분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는 유교가 크게 융성하던 시대였다. 꼭 유교가 아니라도 우리 민족이 자랑 할 만 한 인물이 있었는데 이율곡 이퇴계 기대승 정약용 김정희 그 외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유명한 유학자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에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신학자나 목사님이 누구일까? 찾아보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종교사, 사상사에 나타났던 엄청난 인물들을 우리는 세계적으로 자랑해도 서구의 그 어떤 철학자 사상가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겠다. 그런데 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망했는가? 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종당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당시 세계에서 그 인문학적 수준이 최고조였는데 왜 그 사회를 변혁시키지 못하고 그 시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결국 고려는 불교의 타락으로 망하였고, 조선은 유교의 공리공론으로 운명을 마치었다.

 

19세기 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지 150년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종교의 심성들이 공동화되어진 한국 백성들의 심령하에 기독교는 마치 무혈입성하듯 들어와 자리를 잡아왔다. 한국사회는 새로운 근대문화로 세계 속에 자신을 서서히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항하는 민족정신의 근간을 기독교는 제공하였고, 오랜 봉건주의에 어두웠던 눈이 밝아지며, 타골이 말했듯이 동방의 찬란한 빛을 비추는 등불의 기름을 부었다. 교회가 세워지면서 동시에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다. 그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근대화의 맛을 한국인들은 맛보게 되었고 병든 몸과 마음들이 치유를 받았다.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그리고 해방 후 6.25한국전쟁으로 황폐화된 이 나라를 새롭게 건설하는데 기독교는 그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해도 광언이 아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나라를 새롭게 하고 변혁시키는 정신적 능력이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인들의 변화와 성장에대한 응집력도 시들어가며 다만 교회는 복을 팔고 사는 장터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2020년은 사는 오늘의 기독교의 모습만이 아니라, 94년 전 1926년 당시 최태용 젊은이도 똑같이 본 당시 조선 기독교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천래지성 14호(1926년)에서 “ 금일의 조선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세상에 화한, 그 본의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밟히는 무용의 것들이 되었다. 금일의 조선교회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고 사람의 영혼에 상관이 없는 것이니라. 그러면 가련하다. 조선 사람의 영혼은 어디에 가서 구원의 복음을 들으며 어떻게 구원을 얻는단 말인가? ....아, 내가 뭘 하오리까? 다만 구하옵나니, 하나님이여, 이 백성을 기억하시옵소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최태용은 조선기독교신앙혁명선언을 한 후 전라남도에서 함경북도까지 삼천리 각 지역을 다니며 생명신앙 진리지식을 외치며 ‘한국교회여 새로워지이다.’ 라고 외치었다. 그는 한국의 바울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들은 귀를 막았고 그를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국 최태용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거리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로 신앙동지들과 논의 한 후 1935년 12월22일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최태용 목사는 “우리가 복음교회를 세우는 것은 또 하나의 교단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사랑하시어 참 교회를 허락하신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민족을 사랑하신 은총의 선물로서 복음교회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를 변혁시키고 민족을 올바로 복음으로 구원하며 나라를 다시 회복하는 희망의 자리로서 복음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교회에는 두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복음이요 또 하나는 민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교회는 민족교회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복음 없는 민족은 망할 민족이요, 민족 없는 복음은 뿌리가 말라버려 죽어가는 고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하 조선 교회는 고목화 되었다고 최태용은 탄식하고 울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조선교회를 개혁할 것인가?

 

이는 최태용이란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이루어질 일이란 것이다, 영과 진리 제13호(1930.2.26.)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성령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나를 생명에 회복시켜주시옵소서

의지는 의를 따라 기운을 얻게 하옵소서

육신은 완전히 영의 다스림을받아 평강에 있게 합소서.

날카로운 진리의 깨달음

왕성한 생명운동,

오, 주여, 성령을 주시사,

나를 또한번 새로 나게 하소서.“

 

최태용은 신앙혁명을 위해서 새로운 신학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해온 신학은 말랐고 고목화되어 전혀 신앙을 새롭게 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새롭게 시작하는 조선복음교회는 올바른 신학적 토대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하나님께서 최태용을 통해서 이루시고자하는 ‘조선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신학을 그는 “신앙혁명에 이어 ‘신학혁명’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 신앙혁명을 최태용은 복음교회 3대 표어로 집약하여 발표하였던 것이다.

 

1. 신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2.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 이러라..

3. 교회는 한국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복음교회 교인이라면 이 3대표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복음교회 교인들은 이 3대 표어를 복음교회 창립의 당위성을 분명히 하는 표어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 표어는 한국교회의 신학 혁명을 선언하는 표어인 것이다. 표어의 세 번째 부터 살펴보려 한다.

 

첫째 교회는 한국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존재양식에 대한 분명한 자리를 명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150년 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짐으로 출발하였다. 초창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사가 미국으로부터 건너와 장로교회를 세우고 감리교회를 세웠다. 잠시 후에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북감리교회, 남감리교회, 호주장로교회, 카나다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한반도 지도를 놓고 선교지역을 활당 하였다. 마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민족이 12지역으로 땅을 분배하였듯이 선교사들이 각기 선교지역을 분배하여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1893년부터 1993년 까지 100년동안 1952명의 선교사가 한국(해방 후 남한)에 들어왔다. 그중 미국인이 1710명이었다. 그중 1945년 전에 637명 선교사들이 들어 왔다. 전 국토 71.2%가 미국선교부 지역이었고, 1910년 한국인 79.6%가 피선교 대상 이었다. 그들 외에 침례교회 구세군 성공회 성결교회 등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 땅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였지만 최태용목사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 아니라 각기 자신들의 교단 교회들을 전했다”고 말씀하였는데, 마치 조선 땅은 세계 각 교회 박람회장 같았고 참으로 아름다운 복음의 온갖 꽃들이 여기저기 피운 꽃동산 같아 보였지만 그 꽃들에서 사람들은 미국의 향기를 맡았을 뿐, 한국인의 향기로운 정신은 오히려 파묻혀 버렸다.

이렇게 피워진 꽃들은 외국에서 수입되어 이식하였기 때문에 우리 토양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과 기름처럼 복음이 한국의 문화위에 붕 떠서 흐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더욱이 신학의 사조와 교리가 당시 식민지 백성들에게 걸 맞지 않는 죽은 신경이 되었다고 최태용은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3부류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첫째 부류는 문화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선교사들(Superioty Missionary)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 입국하기 전부터 야만국가로 전제하고 마치 야만인을 대하듯 조선인을 천시하고 하대하였다. 특히 그들은 한국의 금광이나 철강등 각종 이권산업에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는 자본주의 첨병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최태용목사가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서울 선교사들의 어학선생을 하며 그들의 속샘을 살펴봄으로 후에 선교사 배척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뷰류는 조선의 아픔을 이해하고 조선의 어려움을 도우려는 친구같은 선교사들(Brethren Missionary)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을 알고 조선의 힘을 키워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고 근대문화를 전해주었다. 여기서 많은 민족의 선각자들과 지식인들이 양성되어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세번째는 섬기는 선교사들(Servant Missionary)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처럼 초가집에살면서 보리밥 배차국을 먹으며 짚신을 신고 한국의 가난한 농민들이 입는 그런 옷을 입고 한국인과 꼭같이 생활한 선교사들이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섬김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선교사들이던지 간에 문제는 그들의 교회가 각기 지도체계와 교리와 고백이 다른 특성 때문에 이들을 따르는 한국기독교 교인들도 자연히 다른 신앙체계를 답습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땅은 일본에게 빼앗기도 정신은 미국선교사들에게 빼앗겨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니 한국의 교회는 참으로 가련하다고 최태용목사는 슬퍼하였다.

 

최태용목사가 교회 신앙혁명운동을 하기 시작한 때가 1920년대 초였다. 그때는 1919년 3.1운동이후 총독부의 압력과 미국정부의 훈령으로 선교사들은 교회 안에서 독립운동 같은 정치적 행위를 못하게 하였던 때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반 기독운동이 전국을 휩쓸던 때였다. 더욱이 이때 근본주의 신학이 선교사들을 통해 주입되어 율법주의적 교리를 강조하던 때였다. 결국 1926년 최태용은 서울 YMCA강당에서 수백 명의 청중 앞에 신앙혁명을 선포하며 신앙혁명가를 불렀다. 신앙혁명을 위해 먼저 할 일은 선교사들을 의존하는 교회로가 아닌 민족자존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후로 선교사비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니 선교사들이 주도하고 있는 당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최태용목사를 곱게 볼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태용은 일찍이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에 심취하였다. 그는 김교신, 함석헌보다 무교회주의의 선배였다. 그러나 우찌무라 간조가 J.J를 주장하는데 반발하여 무교회주의를 탈퇴하였다. J.J란 Japan(일본)과 Jesus를 말한다. 즉 ‘일본을 위한 예수’ ‘일본의 예수’를 주장하는데 반하여, 최태용은 C.C를 강조하였다. 즉 Crist 와 Chosen(조선)을 말 하였다. 즉 ‘조선을 위한 그리스도’, ‘조선의 그리스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 조선의 교회는 고목화되고 사각화 되었다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는 無교회주의에서 非교회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무교회란 공허한 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의 기독교회는 율법화되고 근본주의로 교조화 되어 본래적인 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현재의 교회가 아닌 非교회로 부정하고 혁명적으로 바꿔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태용은 민족교회의 기본을 십자가위에 세우는 하나님의 은총의 교회를 말한다. 교회당 위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나 그 교회 안에는 십자가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자연히 마귀의 소굴이 된다.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되고 비로서 생명 있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태용목사는 ‘영과 진리’란 제목의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죽어가는 교회를 다시 살리는 방법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방법 외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태용은 철저히 바울의 교회를 따른다.

두 가지 교회가 있다 모세의 교회와 아브라함의 교회이다. 모세의 교회는 철저한 율법을 지켜 기독교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절대 타협을 불사하는 교회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제 3의 교회가 바로 바울의 교회이다. 모세의 교회와 아브라함의 교회를 합치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교회인 것이다. “마태의 선교론”을 쓴 H. R Weber는 ‘교회는 선교로 통계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관련되어 있다. 교회가 수적으로 어떻게 성장하느냐가 아니라 은혜 안에 성숙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러기 위해 최태용은 영적기독교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영적 기독교론에 대해서는 뒤에 디시 말하려고 한다,

 

최태용은 결코 교회의 성장을 비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켜나가는데 교회의 부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부흥성장만을 주장하다보면 마치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감자깡 봉지 같이 될 위험이 있다. 감자깡은 봉지의 반도 안 되고 나머지는 알곤가스로 채워 봉지가 크게 부풀어 있게 한 것처럼 껍데기만 부풀은 교회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그것은 속이는 시냇물이다. 그래서 최태용목사는 교회의 성장은 장감성에 맡기고 우리는 小하나 純한 교회로 진리지식이 가득하고 생명신앙이 충만한 영과 진리의 교회가 되자고 그래서 복음교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민족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이라고 최태용은 말하고 있다.

 

최태용목사가 민족교회를 말할 때 혹자는 비웃으며 말하길, 복음교회가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복음교인 중에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투쟁한 사랑이라도 있는가?라고 말한다. 최태용이 말하는 민족교회는 그런 독립투쟁하는 교회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는 말씀처럼 영적투쟁을 말한다. 최태용은 땅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되었고 민족의 영혼은 미국기독교의 근본주의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태용은 슬퍼하며 말하길 영혼이 제대로 서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데 영혼이 외세의 지배 하 있으니 언제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조선 기독교인들이 먼저 할 일은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세워 조선인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조선인 자신의 신앙을 가질 때에 하나님이 보우하시는 우리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교회는 수백 년 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서(1648년 영국의회에 공인)에 입각한 근본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지배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교회는 미국교회의 아류에 불과하였다. 그들이 100여 년 전 부른 찬송가를 지금까지 우리는 부르고 있다. 찬송은 그 시대 신앙인들의 곡조 있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00여 년 전 미국의 신앙인들의 신앙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알게 되고 함께 부름으로 그들의 신앙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곡조 있는 신앙고백도 있어야 하는데 찾아보기 힘들다. 3.1운동은 당시 조선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민족의 구원이란 고백 하에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믿음의 고백이 찬송으로 불러지지 않았고 전해지지도 않았다. 울밑에 봉숭아 노래는 잘 부르고 사해찬미란 유행가는 잘 불려졌지만 우리가 목이 터지라 외친 독립만세와 피의 수난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찬송은 찾아보기 힘들다. 6.25한국전쟁은 너무나 참담한, 5000년 한국역사의 비극이었다. 그 와중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불러진 찬송은 100여 년 전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찬송가였을 뿐이다. 6.25 수난의 노래가 홍수같이 쏟아져 나왔지만 하나님께 호소하는 우리의 고백과 기도의 찬송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설날과 추석에 부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의 찬송이 없다. 왜 없는가? 그것은 우리의 교회가 한국인 자신의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말씀들이란 미국인들에게 설교된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에 내려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왜 없는가?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문화란 야만적이고 반 기독교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5000년 한국역사에 흐르고 있는 정신과 문화에 아무런 흥미도 없었고 다만 관광지 구경꾼처럼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미국인들에게 주신 말씀처럼 순종해야 한국도 개화되고 미국처럼 문명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부지런히 선교사들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지켰다. 지금도 목사님들의 서재에 가보면 미국인 목사님들이 쓴 성경 주석책들을 엄청나게 많이 진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 한국교회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그 믿음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이미 80여 년 전 최태용 목사는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한국인들이여 독립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조선인은 서양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신앙에 길들여졌다. 다른 신앙 다른 신학에는 귀를 막게 하고 고개도 못 돌리게 하였다. 오로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들의 가르침만 따르게 하였다. 한국인은 머리가 좋고 배우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는 일은 선교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레이놀즈선교사는 말하였다.

그래서 최태용목사는 한국교회는 신앙혁명만 아니라 신학혁명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복음교회의 창립 두 번째 선언이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최태용은 수원농림학교(현 서울농과대학)를 졸업하고 1년간 서울에 있는 선교사 어학선생으로 있던 중 언더우드 목사가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본래 언더우드목사는 신학대학을 세우려 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반대로 일반 전문학교를 세우고 슬그머니 신학과를 끼어 넣었던 것이다. 후에 복음교회 목사가 된 한국의 프란치스코라고 말 듣는 김성실 목사가 1회로 입학하고 최태용이 1년 뒤 1918년 2회에 입학하였다.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1년 3학기제로 3년간 수업을 하였다. 2년 뒤 연희전문학교에 농과가 개설되면서 최태용은 농과 실습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신학과를 휴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에 대한 열의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무수한 신학 책들을 섭렵하였고 수시로 연희전문학교 뒷산에 올라가 기도와 사색을 이어 갔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영어학교에 다니며 평소에 존경하던 우찌무라간조의 문하로 들어갔다. 물론 기성교회를 비판한 무교회주의 주장에 동조하였지만 무엇보다 무조건 선교사들의 신학을 맹종하게 하는 조선교회의 분위기가 아니라, 자유로이 신학을 공부하며 특히 유럽의 역사비평성서신학에 흥미를 가지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교회주의의 공허한 논리에 벗어나 다시 1927년 명치학원 신학부에 입합을 하여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하게 되었다 후에 명치학원 신학부는 일본신학교가 되었다.

 

왜 최태용은 많은 일본의 신학교 중에 명치학원 신학부에 들어갔는가? 1920년대 말부터 일본의 신앙인들 가운데 유럽에서 서구의 현대 신학을 접하여 일본으로 전하기 시작하였다. 동경의 시나노마찌교회, 교토의 동지사대학교 신학부를 중심으로 서구의 역사비평적 성경연구가 전해지고 특히 변증법적 신학의 책들이 해설판과 함께 출판되었다. 시나노미찌교회는 장로교회로 다까쿠라(高倉德太郞)와 그의 우수한 제자들이 바르트를 연구하고 있었다. 이 다까쿠라가 명치신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다까쿠라는 “복음적 기독교”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사람들은 최태용목사가 복음교회를 창립할 때에 다까쿠라의 영향을 받아 교회이름을 복음교회라고 하지 않았는가하는 말을 하지만, 최태목사 본인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다. 당시 일본 신학계는 바르트연구가 왕성하던 때였다. 따라서 최태용은 역사비평적 성경연구를 공부하였고 바르트신학에 심취하였다. 아마도 한국 사람으로 바르트연구의 효시라고 할만하다, 후에 최태용목사는 제자인 지동식을 일본 신학교에 보내 철저하게 칼 바르트를 연구하도록 하여 후에 지동식박사는 한국의 칼바르트 신학의 대부소리를 들었다. ‘영과 진리’지에 리츌, 슈라이에르마허를 비롯하여 칼바르트의 연구논문과 번역이 상당히 많이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복음교회의 신학을 말할 때에 칼 바르트의 신학을 함께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최태용목사의 순교 후 오랫동안 지동식목사가 복음교회의 총회장으로 복음교회를 이끌어왔기 때문이며, 그 후 장성환목사, 오충일목사 그리고 전병호목사가 지동식목사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오충일목사는 일찍이 칼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을 소개하는 소 책자를 발간하였으며, 전병호목사는 지동식 목사로부터 4학기동안 오로지 바르트신학만 배웠으며, 지동식목사의 애제자가 되어 복음교회로 끌려 오늘에 이르렀다. 전병호목사는 1975년 기독교 사상 11월호에 “쉬라이에르마하에서 바르트까지” 10페지에 걸쳐 현대신학 계보를 소개하며 칼 바르트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고 조용술 목사도 한신출신으로 당시 한신은 온통 칼바르트로 도배된 신학대학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교회의 신학의 줄기를 말하자면 신정통신학의 범주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최태용은 다만 바르트에 머물지 않았다. 바르트가 아직 보지 못한 생명신앙에 대한 논조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신학으로는 새로운 신학혁명의 기조가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바르트의 말년에 이점을 바르트는 보안 하였는데 촤태용은 이 기록을 보지 못하고 순교하였던 것이다,

 

잎서 말한 다까쿠라가 ‘복음적 기독교’를 말할 때 복음교회라는 이름은 실상 카토릭교회에 대해 개신교회를 일컬어 말할 때에 쓰인 보편적인 용어였다. 종교개혁가들도Evangelicaldlfk 불렀다. 독일국교회도 복음교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ian이라 불렀다. 칼 바르트도 자신의 신학을 복음적 신학(die evangelische theoloie)라 하였다. 미국에 청교도가 들어와 기독교가 신대륙에 퍼져나갈 때 복음주의 기독교라 하였다. 무디를 비롯한 미국의 대부흥운동도 복음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복음주의는 상당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대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인 프린스톤 신학대학교가 진보주의로 변하면서 극보수적인 신학자들이 나가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을 설치하면서부터 근본주의 신학이 발현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창기 한국에 들어온 초대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신앙이지만 근본주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1920년 이후에 들어온 선교사와 그들의 지도를 받은 박형룡박사등이 근본주의 신학으로 한국교회를 덧칠하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미국교회에서 근본주의의 율법주의와 문자주의 폐쇄주의 반교육 비 문화주의에 반기를 들은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신 복음주의가 시작되었다, 빌리그래함 오켄가등 풀러신학교를 통해 신복음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1980년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 개신교 교인들 가운데 복음주의자들이 5천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하였다. 현재 근본주의 신학은 아마도 한국이 가장 강세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비록 신학적 입장은 조금씩 다르지만 연합운동에 있어서는 상당히 일치를 이루며 활동하고 있다. 제가 NCC회장으로 있을 때에 한기총하고 1910년 한일병탄 100주년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는 대성회를 개최하였고, 부활절 연합예배도 함께 하였다. 물줄기는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한곳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우리 한국 교회가 이것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모든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고 하나의 교회가 될 때 갈라진 두 나라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이 될 것이라고 이것이 하나님의 통전적 섭리라고 본다.

 

우리 한국교회는 교파수가 200교회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장로교회가 분열되어 나누어진 것은 교파적 이해관계로 인해서이지 무슨 교리와 이념이 달라서 갈라진 것은 아니다. 교파마다 중심적인 신학적 입장이 있다. 구지 말하자면 장로교는 예정론을 강조하고, 감리교회는 자유의지론을 강조한다. 몇 십 년 전 장로교회에서 나온 어린이 교육공과를 통일공과라하여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한 교육을 시켰으며, 감리교회는 계단공과라하여 믿음 없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까지 점진적으로 신앙이 자라는 교육을 시켜왔던 것이다. 침례교회의 특징은 침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고, 성결교회는 4중 복음이라하여 중생,성결,신유,재림을 교리로 삼고 있다. 오순절교회는 성령세례를 받아 방언하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 우리 복음교회의 믿음의 지표는 무엇인가? 즉 복음교회의 어떤 신학적 입장에서 생명신앙 진리지식에 이르러 신앙혁명을 완수할 것인가?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복음교회에서 배척하는 신학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보수신학도 진보신학도 좌파신학도 우파 신학도 그 어떤 신학도 복음교회 안에서 다 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용하는 기준이 있다. 그 신학이 복음적이고 생명적이냐 아니냐 인 것이다.

 

 

그러므로 최태용 목사는 복음교회의 창립의 세가지 선언 중 첫 번 쩨 선언으로 ‘신앙은 복음적이요 생명적이어라’고 하였던 것이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최태용목사로 부터 시작된 복음교회의 두 축을 복음과 민족이라고 하였다. 즉 복음교회는 그 어떤 선교사들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순수한 한국인 자신들의 신앙고백 하에 세워진 한국교회의 유일한 토박이교회인 것이다(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그렇다고 그 어떤 신학사조에 연관되어 그 신학의 한계 안에서 세워진 교회도 아니다. 최근 세계적인 상황신학에 맞추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나 여성신학이나 등등을 따르는 상황교회도 아니다. 흔히 토착신학을 말하는 데 한국적인 무속이나 철학이나 전통에 역어져 설명된 윤성범 유동식 이정배 교수의 토착교회도 아니다. 우리가 민족교회라 함은 민족가운데 예수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시므로 민족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영적 교회를 말한다. 민족가운데라 함은 민족의 역사 한복판 즉 민족의 정신사가운데, 민족의 문화사 가운데, 민족의 정치사가운데, 민중들 가운데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시어 새롭게 변혁을 이루어 세계를 향한 그리고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목적하신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가는 교회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영적기독교로 변혁되는 새 시대를 열어가는 교회가 바로 복음교회이다.

 

이제 영과 진리를 말할 때에 최태용목사가 이해하는 언어의 해석을 이해해야 한다. 최태용목사가 말하는 영은 불변하신 하나님의 영(푸뉴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 영을 풀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항상 변한다. 예를 들어 중세기 이전에 지구는 평평하다 이것을 진리로 사람들은 알았다. 그러나 갈릴레오 이래로 그렇게 알던 진리는 거짓임이 밣혀 졌다. 그러나 거짓이 아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하던 그 옛날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들의 진리였고, 지구가 둥굴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진리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성령충만이란 말과 치유나 명상을 지향하는 영성신학이란 말로 해석되는 영이 아니다. 최태용의 영은 성령이요 곧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진리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요 생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사릌스)이 죽고 영(프뉴마)로 살아야 한다. 우 사릌스 엔 푸뉴마 (-X=TinS)이것이 영적기독교론의 간단한 수식이다.

저는 이 영적기독교론은 부정의 신학(theologia negativa,apophatic theology) 이라고 부르고 싶다. 초대교회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때 에바그로스(Evagrius Ponticus, 345-399)라는 분에 의해서 시작된 신학사조이다. 동방기독교에 큰 영행을 주었고 토마스아퀴나스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최태용목사는 그를 알지 못했고 또 전혀 다른 신학체계이다. 그러나 육을 죽이고,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한 신비이며 한국교회의 갱신의 영성이란 점에서 에바그로스의 신앙을 참고 할 만 하다. 에바브로스의 부정의 신학에 대해서 다른 시간에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최태용목사님의 영적기독교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딜 것 같다.

 

오늘 강연에서 이 영적 기독교론을 말씀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 신학교 대학원과정에서 한 학기 공부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하였다. 다만 이 시간 최태용목사님의 영적 기독교론이 왜 이 시대에 앞서가는 신학이요, 이 시대를 혁파하는 새로운 종교혁명의 원류로 삼아야 하는가하는 이유에 대해서만 잠시 소개하고 다음 기회가 있으면 3박 4일 동안 깊이이게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론을 함께 공부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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