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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는 정의이시다(야훼 치드케누)
군산나운복음교회 목사 전병호
예레미야 23:5.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2011년 2월 17일-22일간에 있었던 WCC 중앙위원회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어 2013년 부산에서 열리는 제10회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주제가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소서)’로 확정하였다. 이와 같은 주제는 세계교회가 지난 100년 동안 추구하여온 지구적 선교의 사명을 다짐하면서 21세기의 교회가 지향할 선교의 방향을 밝히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주제를 확정함에 있어서 한국교회가 역사적으로 당면하였던 그리고 지금도 계속 하여온 한반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교의 사역을 세계교회에 알리고 함께 협력하여 나가고자 하는 바람에 세계교회의 기꺼운 응답이라 할 것이다.
우리 기독교 복음교회는 제 50회 총회(2010.1.18)의 주제로 <하나님의 평화>로, 제 51회 총회(2011.1.17.)의 주제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리고 금번 <하나님의 정의>로 제 52회의 총회 주제로 삼은 것은 WCC 부산 총회를 앞둔 시점에서 매우 시의 적절하며 이 시대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려는 우리의 신앙고백적인 모습이라고도 하겠다.
세상에 가장 흔한 말 중의 하나가 사랑이란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정의란 말로 사람들은 쉽게 사용하는 말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정의를 찾는다는 것은 디오게네스처럼 대낮에 등불을 키고 찾아도 보기 힘들다.
1966년에 미국 대중음악 1위를 차지했던 노래로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의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가 있다.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 주연의 영화 '졸업(The Graduate)'의 주제곡이 되면서 미국에서 9주 동안 정상의 자리에 머물렀던 노래이다. 당시 통기타 그룹의 선두주자인 밥 딜런(Bob Dylan) 그룹이 연주를 한 이 노래는 두 사람의 완벽한 화음과 함께 대단히 의미심장한 가사로써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나는 학창시절 곧잘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하였다. 이 곡의 가사 내용은 ‘이 세상은 온통 소음이 가득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참된 의사소통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 옛 친구인 어두움에게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가사 중에 “People talking without speak-
king 사람들은 말하지만 말하지 아니하고,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듣지만 듣지 아니하였지”란 가사가 있다. 사람들이 입으로 말하고 귀로는 들어도 마음으로는 말하거나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침묵의 소리뿐이고 아무도 그것을 깨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고 노래한다. 사람들은 정의를 말한다고 하지만 정의가 아니고, 정의에 대해 듣고 있지만 아무도 정의를 듣고 있지 않는다. 정의는 있지만 정의는 침묵의 소리일 뿐이다.
5공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정의사회구현을 소리 높혀 외쳤다. 그러나 후세에 알려지기는 가장 정의사회가 안된 시절이 바로 5공 시절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누구를 위한 정의 인가? 무엇을 위한 정의 인가?
“닭을 훔친 족제비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족제비의 변호사는 여우이다. 여우는 재판장 원숭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 의뢰인이 닭을 훔치는 것을 봤다는 증인이 3명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증인을 12명이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원숭이 재판장은 한참 고민한 후 ‘3대12이니 피고는 무죄’라고 선고하였다.”
이 우화는 미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링컨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에 즐겨 인용하던 이야기이다.
법원의 상징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저울이다.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이다. 이상은 완전이지만 그 완전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정의가 불완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불완전한 정의라도 있어야, 때로 부패할 수도 있는 경찰, 검찰, 법원이 있어야 이 사회에 질서가 유지되고, 그럭저럭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자조해 본다. 일본 쓰나미로 바다에 쓸려간 사람들은 일본의 서민들이다. 중국 쓰찬성 지진에 죽은 사람들은 중국의 가난한 인민들이다. 어디든 원숭이 재판장은 있어 법망도 교묘히 빠져나가는 인사들은 하늘의 심판도 비켜나가는 듯하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노자는 “하늘의 그물은 넓고 높아 엉성한 듯 보이지만 인간의 죄는 결코 그 그물을 빠져 나가지 못 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정의라는 이름은 지상의 용어가 아니라 하늘의 용어이던가? 아무리 사람들이 정의를 말하지만 사람들에게 정의를 찾아 볼 수 없음을 한탄하게 된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수없이 정의로운 나라를 외쳤지만 결국 나라는 불의로 망하였다. 정의, 이 말은 하나님에게 속한 말일 때 비로소 정의가 된다. 그것은 예레미야의 말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논란이 많고 어려운 질문중의 하나이다. 정의라는 개념은 많은 논란을 통해 플라톤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 까지 분명하게 합의된 개념이 없다.
정의(正義)라는 말은 영어의 justice 또는 독일어의 Gerechtigkeit라는 말의 번역어이다. 정의라는 말이 통용되기 이전에 동양에서는 의(義) 또는 의리(義理)라는 말이 쓰였다. 전통 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던 덕목은 인(仁)과 의(義)로서 인은 인간들 사이의 사랑을 뜻하는 좀 더 보편적인 덕목이라면 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올바름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의는 좀 더 구체적이고 윤리적인 덕목으로서 영어로는 righteousne-ss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자어 義의 상형이 양(羊)과 나(我)의 합성어로서 방목하던 시대의 양떼들 가운데 나의 양과 너의 양을 구분하는 표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 속에 정의의 근거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도 정의라는 말은 우선 희랍의 dikaiosyne(영어의 righteouness에 해당), 즉 정의의 덕을 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다른 용어법으로서 정의란 또한 dike(justice)를 뜻하기도 하였다. 앞의 ‘디카이오쉬네’가 대체로 주체적인 정의 즉 윤리적 덕의 일종인 데 반해, 뒤의 ‘디케’는 객체적으로 성립하는 정의, 즉 정의라고 부르는 질서 또는 원리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희랍에서 정의관의 변천은, 전자가 갖는 좀 더 포괄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로부터 좀 더 엄밀하고 법적인 맥락을 뜻하는 후자 쪽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디케는 희랍신화에서 정의의 여신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여신은 오른손에 칼(sword)을, 왼손에 천평저울(balance)을 가진 눈먼(blind) 여신으로 묘사되고 있음도 지극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어쨌든 동과 서를 가릴 것 없이 정의는 좀 더 포괄적이고 주체적이며 윤리적인 덕목으로 부터 더욱 구체적이고 객체적인 질서, 원리로서의 정의로 이행해 가는 비슷한 설명을 한다,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도보다, 객체적인 질서나 원리로서의 의리(義理)쪽으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가게 되며 유학의 핵심 논의를 의리(義理之學)이라 함도 바로 그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의리지학은 중국 송(宋)대부터 명(名)대까자 성행한 유학으로서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 의 준말이며, 주자학(朱子學)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건국(建國)의 사상적 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은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지도이념’으로 정착되었으나,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지나치게 ‘의리’와 ‘도덕’을 중시하여 당파적 의리가 중시되는 등 원래의 뜻에서 크게 변질되었다. 명분의 옳고 그름보다는 우연적 연고관계를 고수하는 덕목으로서 명분을 위해 연고를 깨는 경우에도 의리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며 나아가 조폭들 사이의 의리까지도 문제되기에 이른다.
정의라는 말이 좀 더 자주 사용되는 서양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우선 정의(justice)의 개념은 권리(rights)의 개념과 다소 중첩되기는 하나 이들의 의미는 서로 다르며 이 두 개념은 공리
주의적 윤리설을 비판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의는 공정(fairness)과 대체로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정의로운 대우, 분배, 절차는 곧바로 공정한 대우, 분배, 절차라 할 수 있다. 또한 정의의 한 가지 의미는 응분(desert)의 몫을 갖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응분의 성적을 받을 경우 정의로운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둑들이 훔친 물건을 고루 나눌 경우 공정한 분배이기는 하나 응분의 몫을 갖는 것은 아닌 까닭에 정의와 응분이 완전히 같은 의미라 할 수는 없다.
정의라는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 이상과 같은 구분들 이외에도 이 개념의 특성은 여러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정의는 사람에 대한 대우가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인종차별이 정의롭지 못한 것은 바로 특정 인종을 다른 인종이 부당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겨난 불구나 질병은 인간적 처우라기보다는 자연적 사실(natural fact)인 까닭에 정의롭지 못하다기보다는 불운하다는 말이 더욱 적합하다.
정의의 개념이 사전적, 형식적 의미로서 좀 더 단순한 데 반해, 관점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다종다양하다. 우선 시대별로는 서양에서 고대 희랍적 정의관, 중세 기독교적 정의관, 로크를 비롯한 근세 사회철학의 정의관, 이를 비판하고 나온 마르크스(K. Marx)의 정의관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문화권과 관련해서는 기독교적 정의관, 유교적 정의관, 불교적 정의관, 이슬람적 정의관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대나 문화권에 따른 분류와 다소 중복되기는 하나 여러 방면의 정의관의 분류는 정의관의 차이를 이해하는 가장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큰 영향력을 지닌 정의관과 관련된 분류이다. 이념적인 정의관은 대체로 가장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며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정의관이 생겨난다. 흔히들 우리가 좌파, 중도파, 우파로 분류하는 것도 이 같은 이념적 관점에 바탕을 둔 이해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평등보다 자유에 우위를 두는 이념을 자유주의적(liberal)정의관, 평등을 우선 하는 이념을 평등주의적(egalitarian)정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근세 이후 번성하게 된 자유주의는 마르크스 이래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자유의 절대적 우위를 고수하는 전통적 자유주의를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라 한다면 자유나 평등의 조정을 시도하는 좀 더 진보적인 입장을 자유주의(liberalism) 또는 자유주의적 평등(liberal equality)의 이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자를 우파라 한다면 후자는 중도파라 부를 수 있다.
반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을 내세우는 이들은 대체로 평등주의적 입장에 서며, 따라서 좌파로 분류된다. 이들 가운데도 평등에 절대적 비중을 부여하는 극좌파도 있기는 하나 자유주의적 입장을 다소 수용하는 중도좌파나 좌파 자유주의(left liberal)의 노선을 따르는 이도 있다. 사실 마르크스는 분배보다는 생산에 더욱 관심을 가짐으로서 그의 사회철학에서 정의는 좀 더 부차적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기는 하나 그에게도 나름의 정의관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를 사회주의 단계와 공산주의 단계로 나누어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체계적인 정의론은 소크라테스로 부터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진리를 이야기 하고 빚진 것을 갚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발전하여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였다. 선에는 선으로 갚고 악에는 악으로 갚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의 정의와 사회의 정의라는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에게 정의란 포괄적인 덕이고 사회의 정의는 사회의 각 계층이 각각에게 적합한 역할을 수행하는 조화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엘리트주의자 이었는데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개념을 특수정의(particular justice) 보편정의( universal justice.) 로 나눈다. 그는 또한 특수정의를 분배정의(distributive justice)와 교정정의 (corrective justice)로 나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재화를 배분하는 것은 비율적 평등에 따라야 정의롭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동등한 것에는 동등하게 같이 않은 것에는 같지 않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정의의 개념은 단순한 평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정의와 관습적 정의를 구분하는데 그는 어느 정도 인간이 고안해 낸 것으로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도 이야기하고 있다. 단순히 응분이었던 정의의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중세시대에 와서, 로마에서는 각 사람에게 합당한 것이라는 개념이 정의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유스티니안 법률에서는 바르게 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각 사람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함. 그러나 유대교나 기독교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침. 어거스틴은 곤경에 처한 자를 돕는 것이 정의라고 명시적으로 가르침.
아퀴나스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정의를 따랐는데 그는 특히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정의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세에는 기독교 신학이 지배적이었는데 이 땅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간 공통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개인적 소유권을 제한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근대에 와서, 홉스는 자연적인 조건에서 모든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한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배타적 소유권을 부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홉스는 정의는 자연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해 낸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서구 정치사상은 무엇이 공평성인가에 대하여 항상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의 대립이었는데 하나는 평등주의이고 하나는 응분주의이다. 평등주의 사상의 주장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홉스는 평등주의적인 길을 갔지만 그러나 평등주의를 정의의 개념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이러한 평등주의적인 개념이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자유롭고 동등하다는 자연법 이론을 규범적인 이론이 되게 해 주었다.
라이프니츠는 정의를 지혜와 선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나서 정의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지인데 누구도 우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도록 행동하게 하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라이프니츠는 정의란 현명한 사람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자비와 정의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흄은 정의란 약속을 지키는 것이고 재산권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흄은 평등이라는 개념은 실제적이지도 못하고 사회에 해가 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흄은 사법정의나 응분의 개념을 따르지 않고 그는 정의는 인공적인 개념이라고 하며 사회계약론을 신화라고 비판했다. 흄은 사유재산권은 신체의 일부로서 보장되는 것으로 자신의 노동을 섞음으로써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로크는 소유권의 자연적인 권리를 주장하는데 흄은 이러한 것을 부정하고 소유권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한다.
토마스 레이드(1710-1796 스코틀랜드 철학자) 는 정의는 마땅히 그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단지 고통으로부터 자유뿐만 아니라 남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난하고 장애자들은 필수품에 대하여 자연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하면 정의는 인위적이라고 주장하는 흄을 비판한다.
아담 스미스도 정의와 평등은 비례적 평등으로 간주한다. 관계되는 요소에 이익이나 부담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관계되는 요소는 수단들, 장점들, 자원의 사용등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필요가 정의와 관계되는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는 사법적 정의에 집중한다. 하지만 효용주의 윤리의 문제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밀(J. S. Mill)은 여섯 가지 정의의 기준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법률적 권리(legal rights), 도덕적 권리(moral rights), 응분의 보상(requital of desert), 믿음을 지키는 일(keeping faith), 공정(impartiality) 과 평등 (equality)이다. 밀에게 정의는 개인이 그의 도덕적 권리로써 요구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필수적인 요소는 사람을 처벌하고자 하는 욕망과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효용과 정의는 서로 갈등하는 도덕적 딜레마이다. 아담 스미스는 정의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였고 밀도 여기에 동의한다. 따라서 정의는 개인적인 권리에 관한 것이고 효용은 일반적인 사회에 관한 것이다.
헨리 시지위크(Henry Sidgwick 1850-1900영국윤리학자)는 정의를 광의의 정의와 협의의 정의로 나누었다. 광의의 정의는 법률시스템을 이야기하고, 협의의 정의는 보호하고 증진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각하기를 정의는 공정하게 법이 운용되도록 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시지위크는 평등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계약이나 구속력 있는 약속에 의하여 정당화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또한 정의를 보수적 정의와 이상적 정의로 구분하고 보수적 정의는 정의의 요구와 일상적인 기대를 보호하는 것이고 이상적 정의는 법률이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로크의 자연적 권리는 죽지 않을 권리로부터 시작하여 재산권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데 이것은 자유가 침해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재산의 취득을 정당화한다. 시지위크는 이러한 로크의 개념이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로크는 이상적인 정의는 응분에 따른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시지위크는 재능에 따른 이익과 책임의 분배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얼마큼이 공정한 보답인가? 시장가치인가? 가격은 참가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가치가 서비스에 대한 가치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시지위크는 결론을 내리기를 이상적인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효용이 아마도 대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갈등이 있을 경우 효용이 결정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크로포킨(표트르 Kropotkin 1842-1921 러시아 무정부주의자:그의 책‘상호부조론’이 ‘만물은 서로 돕는다’란 이름으로 번역발간 2005)은 정의를 공정(equity) 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공정의 핵심은 황금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하는 것에 따라 분배하는 것은 비실제적이라고 생각하고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한다. 크로포킨은 진정한 도덕성은 어떤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것은 정의일 뿐만 아니라 바로 진정한 도덕성이다. 이 사회의 모든 일은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에 따라 분배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크로포킨은 이러한 필요의 원칙을 예를 들어 보여주고 있는데 아이들에게는 그들이 요구하지 않아도 응급처치가 행하여져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필요는 정의의 원칙이 아니라 하나의 덕 즉 자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크로포킨은 필요가 자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인류의 엄격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정의는 법률의 개념으로부터 시작한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는 처벌과 관계있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처벌의 개념이 보상과 연결되게 되었고 이것이 응분의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응분이 정의의 개념이 되었다 이것으로 부터 공정의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공정의 개념이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평등의 강조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적인 정의의 개념은 참 평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권으로 인하여 정의의 개념은 인간의 평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처음에 정의의 개념은 응분에 따른 보상과 공정성이었는데 나중에 필요가 어떤 사상가들에 의하여 추가되었는데 다른 학자들은 필요가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들이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강력한 도덕적 의무라는 데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필요가 정의의 원칙이라는데 에는 이견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정의론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이는 21세기를 지향하며 대두된 새로운 정의론이 대두되었다. 1971년에 존 롤스(John Rawls 1921년 2월 21일 - 2002년 11월 24일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 철학 교수) 는 그의 기념비적 저작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 을 출간하였고 여기에 대응하여 1974년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1.23 하바드대 교수)은 1974년에 발간된 유명한 첫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Anarchy, State, and Utopia》에서 무정부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해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권력이 더 이상의 자유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주의 국가론을 주장하였다. 1983년에 마이클 월쩌(Michael Walzer 프린스턴의 사회과학 고등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수십 권의 저술을 낸 다작가이다. 하버드대학에서 받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혁명’The Revolution of the Saints은 청교도의 역사를 소개한 논문이다. 그는 거의 평생을 구약성경, 유대적 전통과 정의와 평등, 급진적인 사상가들에 대하여 연구하여 왔다.)는 노직에 대한 반박으로 ‘정의의 영역들(Spheres of Justice)을 출간하였다. 1976에 데이빗 밀러(, David Miller)는 사회정의론을 출간하였고 1999년에 정의의 원칙들(Principles of Justice) 을 출간하였다. 밀러의 경우에는 사실상 독창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기존의 이론들을 좀 더 상세히 정립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롤스와 노직과 월쩌의 이론을 좀 더 상세히 다룸으로써 현재 정의론의 요체를 알 수 있다.
존 롤스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는 정의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정의의 의미를 공정(fairness)으로 파악하고,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그 실질적 내용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그의 정의론은 현대적 정의론의 활황(活況)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롤스는 ‘원초적 상태’(origianl position)라는 가설적 상황에 있어 자유 평등한 도덕적 인격자들 공정한 논의과정을 거쳐 전원일치로 합의할 것으로 확신하는 사회 구성원리로서의 정의원칙을 설명하였다.
롤스가 제시한 정의는 두 개의 원칙을 내용으로 한다. 제1원칙은 ‘평등적 자유의 원리’로서, 각자는 서로 양립하는 자유를 최대한으로 평등하게 가질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제2원칙은 두 원칙으로 다시 이루어지며, 첫째는 ‘차등의 원칙’으로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가장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목적에 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으로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그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정의원칙은 적용에서 사전적우선순위를 가지며, 두 개의 규칙이 다시 제시되고 있다. 제1규칙은 정의의 제1원칙이 제2원칙에 적용순서에 있어 항상 우선한다는 것이다. 제2규칙은 정의의 제2원칙이 공리주의적 원리(효율효용원리 및 이익최대화원리)에 우선하며, 제 2원칙 내에서는 기회균등원칙이 차등원칙에 대해 적용순서에 있어 우선한다는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의 특징은 자유와 평등의 두 이념을 조정하는 방향에서 자유의 가치적 우선성을 인정하고 차등원칙의 도입에 의한 사회경제적 약자의 복지향상을 배려한 데에 있다. 그는 개인의 자유권리를 존중하고 효율복지 등의 사회적 목표와 조정을 꾀함으로써 종래의 지배원리였던 새로운 정의모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 이론의 핵심은 정의로운 사회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원칙을 만족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첫째 모든 사람의 자유가 동등하게 존중되고,
둘째 각 사람에게 기회의 균등이 보장되며,
그 사회의 가장 못사는 사람의 복지가 개선되는 사회가 바로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정의의 기준이 아니라 그 사회의 최소수혜자의 복지를 고려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롤즈의 정의론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를 기초로 하는 미국의 자유주의의 전형이다. 사회는 개인으로 이루어지며 개인은 이해를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복지주의 또는 수정자본주의와 같은 전향적인 자유주의 질서를 모색하는 새로운 사회관계에 대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정의란 각 사람들에게 그의 권리를 귀속시키려는 항상적이고, 끊임없는 의지이다(justitia est constans et perpetua voluntas jus suum tribuendi).
존 롤스에 반대 논쟁의 불을 붙인 사람이 로버트 노직이다. 존 롤스나 로버트 노직 모두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던 사람들이나 '사회정의', 그것도 정치와 경제를 모두 포함한 '사회정의'를 위한 방법론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말하자면 사회의 최소수혜자라고 할 극빈층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적은 같지만 그 방법은 달랐던 셈이다. 그리고 그 차이점은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즉 존 롤스는 '없는 자'들을 위해 '가진 자'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말하자면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가진 자들에 대한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현재 이런 인식은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수용하고 있다. 다만 국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개인의 자발적 행동에 의존하는가 하는 방법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반면 로버트 노직의 경우는 가진 자들에 대한 불평등은 사실상의 자신을 위한 노동이 아닌 강제 노동과 다를 바 없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존 롤스의 방법론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식 역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파이를 늘리면 다수가 행복해진다'는 논리가 바로 이런 것에 해당한다. 왕년에 신자유주의자 영국의 대처수상이 노직의 이론을 따라 대처주의를 표방한바 있다.
노직의 이론은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자연권의 절대성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개인의 권리와 이에 대한 윤리 외에 어떤 정의의 원칙도 부정하며 어떠한 개인적 권리의 침해도 용납할 수 없다. 노직에 의하면 자연 상태에서 불안을 느낀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맺는 것이(로크의 사회계약론)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세 가지 단계를 거쳐 국가를 형성한다.
먼저 자연 상태에서 몇몇이 모여 보호기관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한다 (첫 번째 단계). 이 가운데 지배적 보호단체가 극단적 최소국가의 특징을 지닌다 (두 번째 단계). 지배적 보호단체와 이에 무소속 된 자들 간에 갈등이 생긴다. 무소속자들은 임의의절차를 사용해 공포를 자아낸다. 이에 대해 지배적 보호단체는 무소속자들의 자기 보호와 보복을 금지 시키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준다. 결국 어떤 이의 자연권도 침해하지 않고 정당하게 최소국가가 만들어 진다 (세 번째 단계).
노직은 무정부주의적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국가의 정당화 가능성, 국가의 기능, 이상국가의 이념 등을 철학적으로 논증하였다. 그는 무정부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해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권력이 더 이상의 자유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주의 국가론을 주장하였다. 즉 공공선이나 평등 지상주의 같은 복지국가론에 맞서 개인·시민의 소유권과 자유시장·자유기업 등을 인정하는 최소 형태의 국가를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로 보던 것이다.
노직의 한계는 인간의 조작적인 이성을 불신하고 일관되게 재산보호에만 급급하며 자연법의 윤리를 맹목적으로 지킨다고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민주적인 부분은 발견되지 않고 자연권의 절대주의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롤즈와 노직은 모두 개인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 노직은 시종일관 신성한 개인의 자연권을 떠난 적이 없고, 그에게 개인은 불가침의 성역이다. 그에게 공동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롤즈의 인간들은 이성에 근거하며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지만 정의의 모든 기준은 물질적 재화의 분배에 집중된다. 자유주의는 미국 정치사상의 가장 핵심에 존재한다.
노직의 자연 상태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보호단체들의 활동과 무법자 같은 무소속자들의 자기방어는 서부개척 시기의 촌락모습을 연상케 한다. 반면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서 정의에 대한 추상적 순간은 고향을 떠난 고독한 이민자들이 이민선의 갑판에서 희망의 땅을 그리며 이상향을 고대하는 순간들을 연상시킨다. 이 두 장면은 상호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기억이면서 미국인들의 두 마음, 두 정치 이념의 연원이다. 미국인들에게 자유주의는 역사적 경험 속에서 토착화된 정치 신화이다.
롤즈와 노직의 논쟁은 흔히 사회적 정의에 대한 강조와 극단적이며 보수적인 자유주의의 대결로 이해되어왔다. 이 차이는 미국의 현실 정치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결국 두 사상의 근원이 자유주의(개인의 생명과 재산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서 차이보다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마이클 센더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얼마 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사실 읽어내려 가기가 쉽지 않은 책이고 정의에 대한 여러 이론에 대한 전 이해가 없이 읽는다는 것은 혼란만 가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를 찾아 볼수 없는 세상에서 책에서 나마 찾아보고자 하는 관심과 열망이 베스트 샐러가 되게 한 이유가 아닐까? 최근에 출판된 몰트만의 60년 신학연구를 마감하는 마지막 조직신학 저서인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곽혜원역 2011 본 강연의 주제를 이 책 이름에서 인용하였다)란 책은 반드시 읽어볼 필독서인데 아직은 별로 찾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앞서 소개한 존 롤스가 하바드 강단에서 1971년 정의론을 강의 하였는데 30년 후 센달이 같은 하바드 강단에 서서 정의론을 다시 들쳐 냈다는 것은 다시금 정의 문제가 21세기의 화두가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센달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그리고 롤스를 소개하면서 “사상 체계의 제1 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 덕목이라 한다. 이론이 아무리 정치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배척되거나 수정돼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센달은 롤스의 논지를 나름대로 요약발췌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봐 대로 롤스는 정의에 관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제1 원칙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 자유를 누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기본적 자유란 정치적 자유, 언론과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을 가리킨다. 제2 원칙은 사회의 재화는 어떻게 분배되어야 공정한 것일까에 대한 원칙이다. 제2 원칙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차등의 원칙’이다. 롤스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하는 차등한 분배를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차등이 용인되는 조건이 제시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최소 수혜자’의 개념이다. 차등한 분배가 용인되려면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 즉 최소 수혜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유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2 원칙의 두 번 째 부분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의 균등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의 선택 같은 기계적 기회균등뿐 아니라 삶의 기회들까지 균등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쉽게 말해 부모 잘 만나면 영원히 잘사는 체제는 정의의 원칙에 반한다. 이렇게 롤스가 제시한 정의의 원칙은 세상을 훨씬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제시한다. 제1 원칙은 인간의 기본적 자유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설정하고, 제2 원칙은 차등의 원칙과 기회균등의 원칙을 통해 각종 복지 정책들의 정당성이 부여된다.
이렇게 롤스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마이클 센더는 자유주의가가 옹호하는 개인의 선택, 자연적 의무와 합의가 현대 사회의 시민이 책임져야 할 모든 의무를 포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개인의 선택과 합의가 아닌 연대의 의무가 필요하다 것이다.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자를 도우려는 일부 철학자들은 공리라는 이름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부자에게 100달러를 가져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부자의 행복은 아주 조금 줄지만 가난한 자의 행복은 훨씬 더 커진다고 존 롤스도 재분배를 옹호하지만 그 근거는 가언합의다.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가언적 사회계약을 생각해본다면, 누구라도 재분배 원칙에 동의하리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인의 삶에서 불평등 심화를 걱정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결국 불평등은 공리나 합의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시민의 미덕을 좀 먹는다. 시장에 매료된 보수주의자들과 재분배를 주목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손실을 간과한다. 불평들이 시민에게 미치는 결과와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슷한 소득 재분배 주장으로는 불가능한 바람직한 정책을 찾아내 사람들의 호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분배정의와 공동선의 연관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것과 '나쁜' 것,'올바른' 것과 '그른' 것에 대한 구분을 하여야 인간의 보편적인 선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에게 어떠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정치와 법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근거를 두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일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관이 존재하지 않으며 선이 무엇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래서 센달은 자유주의자는 국가가 선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지지 하
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정치가 윤리에 근거를 두는 만큼 권리와 정의에 대한 논의에 앞서 선을 논하여야 한다고 공동체주의자로서 센달은 주장한다. 그래서 공동체 주의자로서 센달의 정의관은 자유주의자인 존 롤스의 정의관과 다르다. 센달의 정의라는 것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도덕적 분쟁을 인정하라”는 지극히 의사소통적인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통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것, 이 과정이 바로 정의의 첫 단계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이 책속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질문에 무슨 모범답안을 찾으려 이 책을 읽는다면 실망할 것은 결국 센달은 수많은 사례를 들어 정의가 무엇인지의 결론은 역설적이게도 “정의란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정체성, 수많은 이해관계들로 얽혀 있는 사회 안에서 도대체 무엇이 정의인지를 과연 단일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처럼 정의 문제가 현대 사회의 하나의 ‘딜레마’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센달의 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은 바로 한국사회의 ‘정의 없음(justiceless-ness)’을 보여주는 일이다.
지구화시대의 정의는 무엇인가?
21세기의 지구화 문제에서 대두되는 세 가지가 바로 폭력과 환경과 가난이다. 폭력은 평화
로, 환경은 생명으로 가난은 정의의 문제로 논의가 되고 있는데 본 논제에 따라 21세기에 가장 큰 지구적 정의 문제는 가난이다.
지난해 7월15-30일 한국보건사회 연구원에서 발간한 “공정사회를 위한 친서민정책 개선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16개 시도 20세 이상 남녀 2000명과 전화통화로 가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58.2%가 빈곤문제의 원인을 사회구조로 뽑았다. 나머지 41.8
%가 노력부족 태만 재능부족 불운 등 특히 대졸이상 응답자중에서 67.7%가 사회구조를 지목하였다.(2012.1.13. 국민일보) 한국에서의 빈곤현상은 신 빈곤이론으로 워킹 푸어, 하우스 푸어로 말해진다. 학력이 낮을수록 워킹푸어(근로빈곤층)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다. 학력이 낮을수록 미 수련노동을 하게 되어 노동시장에서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예외적인 집단도 있다. 앞의 앙케이트 조사에서 보듯이 학력이 높은 층이 사회적 구조로 빈곤층에 머무르는 일이 있게 되었다. 흔히 가방끈
이 길어 워킹 푸어가 된 것이다. 노숙인들에게서 물어보면 학력이 높은 노숙인들도 많이 있다. 심지어 외국의 유학 다녀 온 사람도 있다. 대학 다닐 때 학력우수상을 받은 사람도 있다. 이제 한국의 가난은 더 이상 개천에 용나지 아니하고 대를 이어 가난한 가정의 아이는 가난한 어른이 되어 가난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이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마치 미끄럼 틀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불안 해 하고 있다. “나 혼자서 어찌한들 무슨 용빼는 재주 있겠는가?” 이런 불안이 사회전체에 퍼져가고 있다. 결국 가난의 문제는 국가 존망의 문제로 까지 비약되어나가고 있지만 현재로서 그 어떤 획기적인 구적의 변화를 바라볼 수 없으며 정부로서도 뾰쪽한 대책이 없다. 사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은 작년 65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공정한 사회’를 들고 나왔다. 휴가 끝에 내놓은 이명박 정부의 획기적인 국정방향을 설정한 셈이다. 그라나 사람들은 이 경축사를 들으면서 5공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밤낮없이 주장한 정의사회 구현이란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공정한 사회’.란 최근에 주창되는 이론으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사회, 승자독식사회에서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균등한 사회를 이룬다는 것이지만 어쩐지 이명박 대통령의 선언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사회가 공정한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 시급한 일은 계층 간 양극화된 격차를 줄이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아마도 공정이란 말이 좋아서 빌려 쓴 것인지 공정한 사회란 이론과는 전혀 맞지 않은 정책을 펴는 현 정부로서 듣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난 20세기는 미래에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20세기는 유례없는 폭력과 위협적인 인종절멸로 얼룩진 시대이면서 한편으로 부분적이긴 하나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한 평화와 안정이 구가되던 시대였다. 그것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국제적인 맥락에서 인권에 대한 요구가 진전된 시대이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이 극심하게 위반된 시대이기도 하다. 20세기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부를 창출한 반면,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금세기의 지배적인 특징은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의 상호연관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동시에 점차 정치적 분열·해체과정에 종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20세기는 지구화(globalization) 시대이자 파편화(fragmentation) 시대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양권석신부(성공회대부총장)의 설명에 의하면, 지구화 시대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전기는 시장 자본주의 지구화가 가져온 비극적인 결과들을 그 어떤 이론적 설명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구조조정과 대량해고의 열풍 속에서 실직당하고, 파산 당하고, 가족이 흩어지는 절망적인 경험을 겪으며, 거리로 밀려 나온 노숙자들의 이야기, 가난한 삶을 참다못해 인신 매매자들과 중개인(브로커)들의 손길을 통해서 머나먼 이국땅으로 생명을 건 모험을 떠나는 불법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겪고 있는 인종적, 문화적, 법적, 경제적 차별과 억압의 이야기, 에이즈의 고통과 공포 속에서 죽어가는 아프리카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분리정책으로 땅과 생존의 터전을 잃고 유폐되어 가고 있는 팔레스틴 사람들의 이야기. 이 시대 가난한 자들이 들려주는 이런 이야기들이야 말로 지구화의 실상에 관한 가장 생생한 증언들이다. 그 뿐만 아니다. 우리 시대를 뒤덮고 있는 전쟁과 테러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 자연재해로 그나마 누렸던 가정의 평화와 일터를 잃어버리고 도시를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 경제적 풍요 속에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가난으로 도시지하도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인들의 이야기, 저 북쪽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전해주고 있는 처절한 굶주림 이야기들 속에서 정의는 사치스러운 단어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지구화 시대에 세계는 지금처럼 부유한 적도 없었지만 지금처럼 가난한 적도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남부 사하라의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채무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나라들은 환금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목초지를 개간해서 밭으로 일구도록 하였고, 초지를 잃어버린 가축을 기르던 사람들은 더 깊숙이 숲으로가 나무를 베고 초지를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다 이것이 서로 한계에 달하자 목축하는 사람들과 농사짓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 전쟁으로 번지게 되었고, 물을 가두어 둘 초지와 숲을 잃어버린 자연은 가뭄이라는 대 재앙으로 응수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래 바람 휘날리는 황량한 대지 위에 사람과 짐승의 해골이 나뒹구는 처참한 광경으로 남겨진다는 이야기다. 이래서 위도 10도 경에 있는 남부 사하라는 가뭄과 기근과 전쟁으로 수많은 가난한 난민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
시장의 자유가 한 지역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황폐화하는지 이보다 더 선명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공동체 안에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조화가 깨어지고, 끝내 가뭄과 기근과 전쟁으로 마지막 남은 생명들마저 위태롭게 하는 오늘 세계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돈과 효율과 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섬기는 지구화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파국에 관한 전조가 아닐까?
최근 전북 순창의 한 축산농가에서 올 들어 소 열대여섯 마리가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어떻게든 소를 살려보려고 논밭도 팔고 소도 팔고 노후 대책으로 들어뒀던 2500만원 짜리 보험도 깼는데, 결국 빚만 1억5000만원 넘게 남았다." 이 농가의 주인인 문모(56)씨는 지난해 4월부터 자신이 기르던 80여마리의 소를 먹이지 못해 굶기고 있는 상황. 절반 가량인 40여마리가 이미 상당 기간 사료를 먹지 못해 집단 아사했고, 남은 소들도 곧 굶어죽을 운명에 내몰리고 있다. 동영상에 담긴 축사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지친 소들은 더러운 축사 바닥을 연신 핥아대고 있고, 그럴 기운조차 없는 앙상한 몸집의 소들은 초점을 잃은 눈을 껌뻑이며 바닥에 축 늘어졌다. 아직 살아 있는 소들 뒤로는 매장되지도 못한 소들의 사체가 무덤처럼 쌓여 방치되고 있었다.문씨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수입 쇠고기가 들어오면서 한 마리에 400만원이 넘던 소 가격이 지금은 200만원으로 뚝 떨어졌다"며 "이 문제는 일회성 사료 지원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레오나르드 보프는(Leonard Boff)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자본주의 논리가 마찬가지로 자연을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 그 자체가 거대한 가난한 자”라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택은 거대한 가난한자 지구를 위한 선택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시장의 경쟁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보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인간과 모든 생명을 주체가 아니라 시장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는 거짓된 보편주의(Catholicism)다. 그리고 인간과 생명을 위해서 경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생명의 소중한 가치들을 시장의 경쟁에 굴복시키도록 요구하는 파괴적인 체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구위의 모든 생명들이 시장의 확대를 위해서 착취당하고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가난을 지속시키는 힘은 전례가 없을 만큼 강력할 뿐만 아니라, 넓이의 면에서 뿐만 아니라 깊이의 차원에서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때문에 가난한자들을 위한 우리의 선택은 지역적, 문화적, 인종적 한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 한계마저도 넘어서 가려는 지구적 선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내세우는 거짓된 보편주의에 맞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리의 선택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지구적 새로운 대안의 모색이 있어야 한다.
공정사회란 무엇인가?
피터 코닝(Peter Corning 미국의 생물학자, 컨설턴트, 복잡계 과학자이다.〈뉴스위크〉에 과학 관련 글을 기고했으며, 스탠퍼드 대학교 인간생물학 교수를 지냈다. 현재 워싱턴 주 프라이데이 하버Friday Harbor에 소재한 복잡계연구소Institute for the Study of Complex Systems의 소장이다. 생명과학과 사회과학에 관한 폭넓은 저술을 해온 그는 특히 진화에서 시너지의 원인적 역할causal role 연구로 유명하다.)은 그의 탁월한 최신 저서 “공정사회란 무엇인가 The Fair Society (2011)에서 이제 대대적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너무나도 명백해 졌다고 주장한다. 자유시장과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는 ‘현장검증’이 완전히 끝났으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약속은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더더구나 사회주의적 모델도 이미 답이 아니란 것이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또 아직 불분명한 제3의 길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미래를 위해 지속 가능한 대안은 공정사회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제한 없는 자기 이익 추구나 인류 평등적인 이타주의 에만 의존해서는 안정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코닝은 생물사회적 계약을 지행하여야 하는데 이는 공정성의 세가지 계율-불가피한 기본 욕구와 관련한 평등성, 공로에 대한 완전한 공정성, 비례적인 상호주의-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 즉 동등한 분배는 사회주의적 요소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고 생명의 무게에 차이가 없다. 이러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기본욕구가 있다. 이 욕구가 부인되거나 결핍되면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이른바 해악이 발생한다. 코닝은 이러한 인간의 기본욕구를 14개 영역으로 설명한다. 체온조절, 폐기물 제거, 영양, 식수, 이동기능, 수면, 호흡, 신체안전, 신체건강, 정신건강, 소통(정보), 사회관계, 생식, 자녀양육 등이다. 사회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는 모든 구성원의 기본욕구 충족을 위해 우선적으로 배분되어야 한다. 이것이 공정성의 첫 번째 계율 평등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승자독식과 극단적 빈부격차로 인해 한줌의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가 이러한 기본욕구 충족에 위협을 받는 이른바 해악이 발생하고 있다. 코닝은 이를 문제 삼으며 사회주의적 요소라 할 수 있는 평등이라는 개념을 공정사회의 첫 번째 계율로 정하였다.
공정성은 공로에 따른 보상 및 처벌을 의미한다. 인간의 노력과 성취를 존중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요소이다. 여기서 작가는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한다. 프롤리히와 오펜하이머의 실험이 그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들은 가상사회에서 소득을 분배하는 방법에 대해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실험결과 피 실험자의 77.8%는 모든 사람에게 최저소득이 보장되고 그 위에 노동의 결실에 대해 유인수단과 보상이 제공되는 소득의 최대화를 택했다. 실험이 말해주듯 사람들은 인간의 기본욕구가 충족되는 사회안전망과 공로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을 원했다. 공로에 따른 보상은 자본주의 적 요소다. 사람에게는 개인차가 있다. 각자의 능력이 다르고 노력의 집중도가 다르다. 작가는 그 차이를 인정하고 공로에 따른 보상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이것을 부정했기에 실패했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개혁성이나 기업가 정신, 리스크감수, 창조적 기업경영에 요구되는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을 격려하고 보상한다는 것이다. 당사자 자신의 노력에 따른 정당한 부의 창출은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기본욕구를 충족하고 남은 생산량은 공로에 따라 분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평성이라는 공정사회의 두번째 계율이다. 공평성은 보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처벌과도 관련 있다. 즉 죄를 지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주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하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독교적 황금률이다. 이는 공동체로부터 받는 이익의 대가로 집단적 생존조직을 위해 공정한 분배에 기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즉 혜택과 의무는 함께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율은 복지국가론이 설명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복지국가론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사회안전망을 주장하고 개인의 공로에 따른 보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자신의 삶에 무책임하고 혜택만 받으려는 무임승차자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공정사회는 무임승차를 거부한다.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도덕적 해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혜택의 대가로 공동체에 기여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근로복지, 일하는 복지가 그것이다.(상호주의를 적용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비참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14세기 이슬람의 철학자 이븐 칼둔이 ”사회에서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고 사회에서 가져가기만 하는 사람은 도둑이나 다름 없다“란 말을 인용하면서 코닝은 새로운 생물사회적 계약을 실현할 때 공정한 사회가 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바야흐로 ”전투에 돌입“하자고 말한다.
인간이라면 생존과 존엄을 보장받기 위해 충족되야 할 기본욕구를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분배한다. 그 위에 각자의 공로에 따른 보상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가로 각자 능력에 따라 공동체에 기여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평등, 공평성, 상호주의의 원칙을 갖는 공정사회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이것이 아닐까
이러한 생물사회적 계약을 실천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코닝은 말하면서 아음의 책 6권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추천한다. 즉 겔브레이스의 <약탈국가> 라인하르트와 로고프의 <이번엔 다르다> 에커로프와 쉴러의<야성적 충동>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 라이히의 <초 자본주의> 스티글리츠의 <끝나지 않은 추락>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
구약성경의 정의와 공의
충청도, 조그마한 산골 마을에 환경이 서로 비슷한 두 집이 위 아래로 나란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 윗집에서는 항상 웃음과 행복의 향기가 넘쳐흐르는 가하면, 아랫집에서는 이틀이 멀다 하고 서로 싸우며 쪽박 깨지는 소리가 담 너머로 울려 퍼지곤 하였다. 두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얼마 전에 장가든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데, 어느날 양 쪽 집에 똑같은 일이 일어 났다. 시어머니가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일렀다. 갓 시집온 며느리는 밥 짓는 경험이 없는 터라 밥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밥은 타고 솥은 금이 가고 말았다. 놀란 며느리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던 시어머니는 "아가, 미안하다. 내가 그만 깜박 잊고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됐구나"하면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어깨를 감싸고 위로하였다. 그러자, 세수하러 나오시다가 그 광경을 보신 시아버지는 "아니다. 아니다. 내가 어제 밤, 부엌에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 놓아서 그랬구나!" 라고 말하며 며느리 잘못이 아니라하신다. 그때 마침 일거리를 마치고 논에서 돌아온 아들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침에 제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 와서 그렇게 됐습니다."라고 말한다. 밥은 타고 솥은 금이 갔지만 온 식구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이 참으로 흐뭇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바로 똑같은 상황이 아랫집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도 시어머니가 밥을 앉히고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하였다. 이 며느리 역시 밥은 타고 솥은 깨지고 말았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욕설을 퍼붓고 구박을 하면서 하는 말이 "밥 하나 못하는 것이 시집와서 남의 솥단지까지 깨먹었으니, 이 집은 너 때문에 망했다 망했어!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면서 가슴을 치며 한탄한다. 그러자 며느리는 "아니, 내가 일부러 그랬어요?" 하며 시어머니한테 대들었고, 이 광경을 보시던 시아버지는 "요것이, 시방 어디다 대고 말대꾸하느냐!" 하며 며느리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신랑은 드디어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게 되었고 며느리는 "야, 죽여라! 죽여!" 고래 고래 고함을 치자 아랫집은 그 날도 아침부터 난리가 나서 온통 동네 구경거리가 되었다.
똑같은 사건이 두 집에서 발생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오늘 우리사회, 교회, 가정은 어떠한가? 무엇이 문제인가?
창세기 1장의 제목을 정한다면 사람들은 천지창조라 한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만물’이 주제이기도 하다. ‘좋았더라’는 말의 히브리어 어는 ‘토브’이다. 이 말은 ‘선하다. 아름답다. 바르게 행하다’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어느 하나도 차별하여 어떤 것은 좋게 창조하시고 또 어떤 것은 추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두 똑 같이 하나님의 정성과 사랑으로 창조하셨으니 이는 곧 하나님의 정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이고 불의가 그곳에 없기에 불의한 아담과 이브는 에덴에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 추방당한다. 그러므로 에덴으로 부터의 추방도 곧 하나님의 정의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며 광야에서의 돌보심과 십계명 율법을 선포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일련의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정의의 대 장정이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세우려는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였다. 하나님이 이방 우상을 향한 분노와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잔혹할 정도의 진멸(케렘)명령은 불의에 대한 하나님 정의의 의지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정의에 도전하였으며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추방하듯 불의한 이스라엘을 바벨론을 들어 응징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정의로 돌아서기를 거의 사정하다시피 학수고대하시며 선지자들을 보내어 정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거절하였던 것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정의 사도들이였다. 특히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시편 등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정의의 외침을 듣게 된다.
창세기 18장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게임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키시겠다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악인을 멸망시키시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만 악인들 가운데 의인들이 섞여 있어도 한꺼번에 같이 멸하시는 것은 부당하지 않습니까’라고 항의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 게임을 요청한다. 아브라함이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이 성을 사하시겠습니까’하자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신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오십 명이 있기가 어려워서 다신 제안한다. 그래서 의인 50에서 45, 45에서 40, 40에서 30, 30에서 20, 20에서 10으로 여섯 번 게임을 한 결과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있으면 불과 유황으로 멸망치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게임에서 지게 되고 소돔과 고모라성은 결국 유황과 불비를 맞고 멸망당하였다.
그런데 예레미야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의인 한 사람으로 제안을 하셨다. 그러므로 창세기 18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열 명 보다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예레미야 5장은 하나님의 제안대로 예루살렘 성에서 예레미야가 의인 한 사람을 찾는다. 예레미야는 먼저 일반 백성들 중에서 의인을 찾아보았다. 5장4절 이하에서 ‘이 무리는 비천하고(달) 어리석은(야알) 것 뿐이라’ 여호와의 길, 하나님의 법 곧 하나님의 정의를 모르고 이었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찾아갔더니 그들 역시 여호와의 길 하나님의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인은 고사하고 악인들만 있어 예레미야 5장 26절에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라고 하였다. 악인들은 속임수 번창하고 거부가 되고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 22:3절 이하에서 말씀하시기를 “ 너희가 정의(미스파트)와 공의(츠다카, 체덱)를 행하여 탈취 당한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가 나를 두고 맹세 하노니 이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정의가 사라진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정의와 공의”가 있다. 개역성경은 “공평과 정의”라고 하였다. 미스파트와 츠다카와 체덱이 각각 32번(구약전체 422번), 8번(구약전체 157번), 6번(구약전체 119번)이 나오고 ‘미스파트 츠다카’가 함께 예레미야서에 6번(4:2, 9:24. 22:3,15 23:5 33:1) 나온다.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미쉬팟은 법적인 정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체다카는 자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모세 와인필드는 이것이 원문의 정확한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미쉬파트 우 체다카’의 개념은 정의의 동어반복이 아니라 사회정의의 개념임을 보여주고 있다.( Moshe Weinfeld, "Justice and Righteousness," in Justice and Righteousness, ed. Henning Graf Reventlow and Yair Hoffman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2, 237.)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언서와 시편에 나타나는 ‘미쉬팟 우 체다카’의 개념은 법적인 정의의 개념이 아니라 왕과 관리들에 의해 가난한 자들의 상태를 개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미쉬파트 우 체다카’의 개념은 사회정의의 개념인 것이다. 이사야서에는 정의의 개념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데 1-39장에서는 장로나 제사장, 왕들, 특히 종말론적 왕이 가져야 하는 특성으로 정의가 강조되고 있고 40-56 장 까지 에서는 야훼의 종의 특성으로 정의가 묘사되고 있으며 57장 이후에서는 여호와가 바로 정의를 보장해 주는 주체로 나타난다.
이사야 5장 7~8절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있을진저”
하나님의 포도나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품고 살아야 할 삶의 기준은 바로 ‘미스파트 우 체데카’이다. 정의와 공의는. 포학(폭력)과 부르짖음의 반대 의미이다. 그러면, 공평과 정의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슨 추상적인 모호한 원론적인 정의론이 아니다. 성경에는 너무도 명확하게 공평과 정의를 설명하고 있다.
예레미야 5장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게임을 하신다. 예루살렘성에서 의인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이다.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용서하리라“ 흔히 게임은 흥미를 유발하지만 지금 하나님의 게임은 예루살렘의 생사가 달려 있으니 과연 예루살렘 대로를 지나다니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정의를 행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에스겔서 18:5-8 에 보면 이러한 사회정의를 행하는 일은 개인의 과제이기도 하다. 노예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이웃에게 확대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예레미야 7:5-6과 스가랴 7:9-10 에 나와 있는 것 같이 궁핍한 자, 고아, 과부,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
시72:1-4, 12-14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꺽으리라.....그는 궁핍한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자와 궁핍한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시편 72에서 공의는 하나님이 왕에게 부과한 개념이며, 시편 33:5 에 보면 이 사회정의의 개념은 신적인 이상의 개념이다. 하나님은 이 사회정의를 사랑하신다고 말하여 지고 있는 것이다. 시편 99:4 절에 보면 이 사회정의의 개념과 평등의 개념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본다.
이사야 16:5, 잠언 20:28, 25?:5, 시편 89:15 편은 모두 정의로 왕권을 세우는 것이 자비와 친절로 세우는 것과 동의어임을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8:19a에서 보면 야훼의 길은 ‘미쉬파트 우 체다카’를 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카디아어 용법에 의하면 새로운 왕의 등극은 ‘미쉬파트 우 체다카’의 내용을 선포하는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와인필드에 의하면 ‘미쉬파트 우 체다카’의 내용은 사회적인 평등을 이룩하라는 것이며 그것은 압제를 막는 여러 가지 규칙들을 통해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를 보호하라는 것이다. 즉 정의를 행하는 것은 약자와 억압받는 자 편에 서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쉬파트 우 체다카’에 대한 이해로 선지자들은 법률적인 제도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부자와 지배자들에 의한 억압에도 반대한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공평과 정의를 세 지로 말한다면:
1. 가난한 자를 변호(억울함을 풀어주어라)
2. 궁핍한 자들을 도움(가난의 대물림이 사라지도록)
3.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벌하라(막도록 노력)
이러한 정의의 개념은 부채의 탕감, 노예의 해방, 땅을 돌려주는 것 등과 폭리를 취하는 것, 저울을 속이는 것과 같은 다른 경제적 불의도 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정의
예수님은 바로 구약성경의 선지자 전통위에 서 있었다. 스타센(Glen H Stassen 핵물리학을 전공하고 유니온에서 신학윽을 공부 현 풀러신대원에서 기독교윤리학교수로 기독교 정의에 대한 깊은 관심.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따름의 윤리’ ‘평화의 일꾼’출판 필독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즐겨 읽으셨는데 그것은 탈굼 버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이 탈굼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바로 정의의 나라라는 것을 무려 16번이나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성서학자 부루스 칠톤(Bruce D Chilton성공회 ‘랍비예수’)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전의 지도층과 40회 정도 충돌하시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성전체제의 불의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성전체제의 불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가난하고 굶주린 자에 대한 탐욕과 지배의 불의, 폭력의 불의,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는 불의이다. 신약성경에는 의(디카이오스)라는 용어보다 상대적으로 불의(아카디아)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있음은 불의를 척결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리라고 여겨진다.
가난한 사람들을 힘이 있는 자들로부터 착취당하는 것을 구제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세례요한의 주된 주제중의 하나였다. 누가복음 3장14절에 보면 세례요한은 군인들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 알라’‘고 말한다.
세례요한은 그의 인생의 많은 부분을 광야에서 살면서 도시에서 호화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을 비판하였다. 마태 11:7-11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검소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소개하시면서 부드러운 옷이라는 것이 바로 왕궁의 삶을 상징하므로서 부와 권력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탐욕을 비판한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씨가 뿌려진 자가 바로 그러한 자이다.(막 4:18-19 눅 8:14 마 13:22) 특별히 누가 복음을 보면 누가는 마가복음의 부자에 대한 미움과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에 관한 구절을 모두 보전하고 있다. 마태도 또한 마가의 부자에 대한 경고를 보전하고 있다. ‘재리의 유혹-헤 아파테 투 풀루투’을 속이는 부자들로 번역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 23절에서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부(富)가 하나님의 은총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막 10:17-22, 마 19:21, 눅 18:18-25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9:1-10에서 삭개오는 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인 사람에게 배상을 한다.
마태복음 18장 23절에서 25절 까지 나오는 용서하지 않는 노예에 관한 구절도 빚에 관한 것이다. 27절에 나오는 빚이라는 용어는 돈을 빌려주는 것을 의미하고 놓아준다는 것은 희년에 대하여 쓰는 단어이다. 그래서 이 비유도 또한 빚을 탕감해주지 않는 채권자에 대한 비판이고 희년의 개념에 부합하는 말씀이다.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신다. 누가복음 16:14-15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또한 마태복음 23:16-19에서 보면 “화 있을찐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면서 25절에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라고 예수님은 그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계신다.
마15:3-9 막7:9-13 cf 사29:13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했다. 왜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너희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였다.
마태복음 21:1-8 /마가 2:23-28 / 누가 6:1-5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배고픈 자를 먹이신 것을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시면서 옹호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강조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이사야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Is 25:4; Is 1:23).
가장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역할을 소개하는 압권의 말씀은 마리아의 찬가에서 보게 된다.
누가복음 2장 46-55절의 마리아 찬가에서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 치셨으며 비천한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51-53)”
마리아는 당시 가난하고 아직은 어린 소녀였다고 한다. 이 가난한 소녀의 입을 통해서 불의한 세상을 고발하며 구약의 선지자들의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 이 고발은 누가의 고발이며 초대교회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그의 팔'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신 26:8;시 89:13;118:15)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능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교만하게 당신을 반대했던 권세가들을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셨던 사실들을 상기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과 무관하게 천상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며, 또한 모든 불의하고 왜곡된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로 잡히게 되리라는 사상이 이 노래 속에 강렬하게 함축되어 있다. 물론 성경은 권세나 부(부) 자체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권력과 부의 행사를 말한다. 교만하고 강한 자는 낮아지고 비천한 자가 높아지며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리라는 이 사상은 예수의 산상 수훈 가운데 표출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마5:3-6 ).
누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었으며(15:2-32), 당시의 특권층과 기득권자들에로의 부의 집중으로 인해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다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예컨대, 가난한 자에게 임할 축복과 부자들에게 미칠 화에 관한 설교(6:20-26),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등이다. 6:21의가난한 자가 받을 복이 있으니,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여‘'에 해당하는 '에네플레센'의 원형은 ’엠피플레미‘로서 '가득 채우다', '만족케 하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폭 넒은 용어이며 그릇에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웠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나 화를 받게 될 부자는 자기중심적이며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된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사리사욕에만 급급 하는 자들에게는 켤코 은혜를 내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랑하는 부를 많이 가질수록 그들의 속은 그만큼 텅 비게 된다. 더욱이 그들의 부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부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편, 이 모든 공의의 실현이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실현되리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에 마리아는 이 찬송시에서 계속 과거 시상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 18-19)”는 말씀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파하시다가 골고다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죽으심은 불의에 죽고 정의에 다시 사는 하나님 정의를 완성하시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일구어 나가기 위해 예수님이 세우신 새로운 정의 공동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정의 그 자체이다.
정의는 그 관계적인 성격 때문에 공동체적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인간의 내면적인 것에만 국한시킨다면 이웃이나 사회와는 별 관련이 없는 이기적인 신앙이 될 것이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오늘날 “복음화 한다”(evangelize)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프리카 수단 에치오피아 나이지리아 북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매일 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오늘날 복음은 어떤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가?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종족을 침략하고 사람들을 압제하는 사람들에게 전할 복음이 무엇인가? 오늘의 교회는 이 시대에 살아계신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음을 결단하여야 한다. 정치 경제 교육 이념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은 형이하학적 하위구조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렘1:10)”처럼 불의한 세상을 하나님의 정의로 새롭게 바꿔야할 대상인 것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안정되어 간다고 하였을 때에 교회는 그 발전에 부응하고 안정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아모스 호세아가 예언 활동할 당시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는 북 이스라엘은 어느 시대 보다 부와 평안을 누리던 시대 였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남 유다도 그 어느 시대보다 사치 방종이 가득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선지들을 보내어 정의를 외치게 하였는가? 부와 평안 사치와 방종의 그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가난과 착취와 억압 역시 컸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자신의 할 바를 망각하고 같이 불의에 도착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급기야 우상숭배가 온 땅에 성행하게 되었다.
교회는 세상에 정의를 밝히는 등대이다. 빛을 잃으면 세상은 온갖 불법과 부정과 불의로 하나님의 진멸(케렘)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먼저 이 세상에서 향락을 누리고 안정을 찾고 물질적인 욕망을 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정의를 타고 가난하고 억압을 받는 자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데 세상에 묶여 있고 세속에 취해 있다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가장 가난한 집안에 가장 가난한 자리에 태어나셨으며 자기 자신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즉 “작은 자들”과 동일시하시였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이요, 목마른 사람들이요, 병든 사람들이요, 옥에 갇힌 자들을 대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 하시였다.
세상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을 쫒아가다 하나님의 정의를 잃어버리고 베벨론 포로로 전략해 가는 한국교회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내가 굶주렸을 때 헐벗을 때에 목말랐을 때 나를 모른 척하고 아무것도 나에게 주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언제 주님이 굶주리시고 헐벗으시고 목말라 하셨을 때가 있으셨습니까? 수백억짜리 집을 지어드렸으며 아름다운 휘장으로 치장하였고 주일마다 잔치를 벌렸는데 아무것도 안 주셨다고 하십니까? 억울합니다.” 그 때에 주님이 “내가 탈북자와 함께 있었고 이주민들과 함께 있었으며 노숙인들과 함께 있었다. 그때에 너희가 정의를 필요로 하는 그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육을 따르고 영으로 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관심도 그럴 능력도 상실해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각가지 불미스런 일들이 있는 것은 이 정의의 결손 때문이다.
작년 KNCC 내에 홈리스 대책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설치하고 앞으로 노숙자에 대한 범 교회적인 지원사업을 전개하려는 일은 매우 정의로운 일이다. 지난 1월9일 이 영훈 홈리스대책위원장은 “노숙인 문제야 말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면서 “소외된 이웃을 돌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강도만난 이웃인 노숙인을 한국교회가 반드시 보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나서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야 한다”면서 “한국교회는 현장의 노하우를 나누고 문제해결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란 말이 있다. 그러나 가난은 교회가 구해야 한다, 고후 9장 13절 14에서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평균 이소테스)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정의는 함께 가난해 지자는 것이 아니라 하께 넉넉해지자는 것이다, 부의 나눔은 함께 부를 이루는 일이다. 하도 아니 나누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하였다. 예수 앞에 나와 실망하고 돌아가 부자청년이 아닌 삭개오 같은 마음으로 나누듯이,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하지만, G 20나라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교회가 가난을 해결해 줄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교회에 주신 명령이다.
교수들이 2012년의 희망을 담아 선정한 사자성어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파사현정`은 원래 불교 삼론종(三論宗)의 중요한 근본 교리에서 나온 용어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수신문은 전국 대학교수 28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새해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로 `파사현정`가 가장 많이 뽑혔다고 지난 1월 2일 밝혔다. `파사현정`을 추천한 김교빈 호서대 교수는 불교의 교리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파사현정“에는 거짓과 탐욕,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강한 실천이 담겨 있다고 말하였다.
다리가 셋인 의자가 있다. 2013년 WCC의 주제에 대해 그동안 생태환경에 관한 생명문제와 폭력과 남북문제에 관한 평화문제가 그 의자의 두 다리이다. 이 두 다리에 관해서 상당히 많은 논의를 그동안 하여왔다. 그러나 아직 하나의 다리 정의에 대한 논의는 거의 전무하다. 센달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보여준 폭발적 관심 그리고 금년의 사자성어로 택한 파사현정이란 말로 나타낸 교수들의 분명한 관심을 교회는 이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전투에 돌입’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 주제 원고를 마치며 인순이의 <거위 꿈>이란 노래를 들으며 과연 정의 우리 기독교인에게 무엇인가를 다시 묵상하였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