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원짜리 동전이나 500원짜리 동전을 보면 동전 둘레에 오돌토돌한 것을 봅니다. 그것은 주화 훼손을 방지하려고 주화 둘레를 오돌토돌한 톱니 모양으로 새기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주화 50원 짜리에는 109개, 100원 짜리에는 110개 그리고 500원짜리에는 120개가 새기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동전에 이런 새김을 한사람이 만류인력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1642∼1727)입니다. 그가 영국의 조폐국장을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동전 둘레에 오돌토돌하게 요철(凹凸)을 새기어 넣었다고 합니다. 뉴톤이 어머니가 경영하는 농장의 사과나무 아래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왜 사과열매가 아래로 떨어지는가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연구하여 마침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인 만류인력법칙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 중심으로부터 중력이란 힘이 있어 땅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 중 99퍼센트가 지상 30킬로미터 아래에 존재합니다. 이처럼 공기가 모여 대기권을 형성하는 것도 중력 때문입니다. 산소와 같은 무거운 공기분자들은 지구의 중력에 의해 더 큰 힘을 받아 지표면 근처에 몰려 사람이 살면서 쉽게 호흡할 수 있게 합니다. 왜 달이 떨어지지 않고 지구 주변을 돌고 있는가 그것은 지구가 달을 끌어당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중력이라고 합니다.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땅이 중력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잉태 후 태반 속에서 양수의 부력에 의해 무중력 상태로 있다가, 양수가 터지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절대적인 지구 중력의 지배권 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생활합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나 지상의 동물들도 중력장 속에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새는 나는 법을 배우며, 동물과 사람은 걷는 법을 배우는데 이 모두가 지구 위에서 중력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무도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을 스스로 감지하여 대처하며 성장합니다. 경사면에 심어진 나무라도 지상의 줄기와 땅속의 뿌리는 각각 중력 방향을 스스로 찾아 하늘과 지구중심점을 향해 곧게 성장합니다. 비뚤게 자라는 줄기와 뿌리는 중력을 심하게 받아 휘게 되고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의 모든 살아가는 환경은 이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네발가진 동물들은 사지보행을 합니다. 네발로 기어 다닙니다. 따라서 그만큼 중력을 땅으로 부터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두발로 직립보행을 합니다. 진화론자들(영국 욕크대 과학자들의 최근 발표)은 사람들도 원시시대 이전에는 네발로 기어 다니며 원숭이처럼 나무 열매를 따먹고 살다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땅에서 살아가면서 앞발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두발로 걷고 앞발은 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가설을 진화론이라고 연구비를 타먹으며 발표하다니 웃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면 어째서 원숭이는 여지껏 원숭이고 치팬지는 아직도 침팬지로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개를 두발로 걷도록 연습시키면 언젠가는 사람처럼 된다는 말인지 이런 진화론 가설은 한마디로 허위이론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사람을 직립보행 하도록 그리고 손을 사용해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창조하시였습니다. 직립 보행함으로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덜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동물 보다는 머리가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위를 쳐다 볼 수 있게 함으로 그만큼 중력의 영향을 덜 받게 하였습니다. 구부려서 일하는 분들이 대체로 허리가 굽어 있거나 디스크로 고생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땅으로부터 오는 중력의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엎드려서 일할 때에 땅으로부터 오는 중력으로 그 사람의 오장 육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건강을 상하게 된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다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엎드려 잠을 잔다면 중력이 제대로 흘러가지 못해 뇌에 영향을 주어 공부한 효과가 상실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람의 체중이 40kg라고 한다면 상체를 20kg라고 가정을 하고 (20kg의 쌀을 1시간 정도 들고 있을 때, 그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힘든 것인지 생각을 하십시오) 중력의 수직선에서 신체가 뒤틀리거나 구부러져 있으면 우리 몸의 연결된 전체 구조에 영향을 주어 신장이 발생하고 뒤틀림으로 인한 압력과 하체를 누르는 무게의 하중으로 인해 또 다른 변형을 가져 오게 됩니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이런 문제가 다른 어떤 영향들 못지않게 설령 좋은 음식을 먹고 보약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몸이 구조적으로 정렬이 바르지 않는 다면 중력이 바르게 우리 몸을 통과 하지 못해 우리 몸 안에 신진대사가 원활한 수행을 하지 못해 건강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허리를 고추 세우고 반듯하게 걸을 때에 지구의 중심과 하늘과 일직선을 이룸으로 중력이 관통해 흘러나감으로 중력의 영향을 덜 받게 되어 건강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사람이 바른 자세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머리를 들고 11자 걸음으로 걷기만 해도 건강걱정 안하고 살수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다른 말로 말하면 영성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거의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 자기 마음가는대로 살아가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하에서 살아감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영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늘 성령충만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함으로 그 신앙생활이 굽어지고 비뚤어지고 영적 질병을 앓게 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직립신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직립보행을 하듯 기독교인은 직립신행 즉 믿음을 똑바로 세우고 가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하여 직립신행하는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오츠 슈이츠라는 사람이 1000명의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다가 깨달은 <행복한 인생의 세가지 조건>이란 책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애쓰지도 말고 이기려 욕심내지도 말고 이기려 하지도 말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공간에 아름다운 수를 놓아라고 말합니다. 행복은 나만의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바라보고 나누고 가꾸어가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은행가가 어느날 아침 어촌 바닷가에 나갔다가 지금 막 들어온 어선을 보았습니다. 어부에게 말합니다. “왜 이렇게 벌써 들어옵니까 좀 더 많은 고기를 잡지 않고요.” “아니요 오늘 잡을 고기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고기로 무얼 하십니까?” “ 예 어판장에 갔다 팔지요 몇 마리는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과 즐운 시간을 가집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좀 더 많은 고기를 잡으면 돈도 많이 벌 것이고, 그러면 집도 큰 집을 사서 살고 공장도 세우고 할 것 아닙니까?” 어부가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엔 무얼 합니까? 아마 그때쯤 되면 난 무덤에 가 있겠지요”
물론 돈도 많으면 좋겠지요 사회적으로 출세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지난번 문창국 국무총리 후보가 박대통령으로 지목받을 때에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마하는 아픔에 그는 엄청난 불행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행복은 지금 누리는 기쁨입니다.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일입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어두움이 있다면 여러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혹 여러분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속에 그를 떠 올려 보세요. 그리고 마음이 그늘이 지게 된다면 여러분은 지금 심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 우리의 마음에 행복이 넘치지 못하고 어두운 그늘진 곳이 있는 것입니까?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교회에 덕을 끼치기 위해 아름다운 봉사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가를 알고 계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4)...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라(빌 2:21)”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전혀 기쁨이 없고 원망과 시비가 가득 채 주님의 일을 한다면 주님은 전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일로 행복함도 없는 것입니다. 왜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까?
오늘의 4장 1절에서 ‘주안에 서라’(스테케테 엔 큐리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주안에 굳건히 서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력은 땅으로부터 올라오지만 영력은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서서가다 흔들리면 손잡이 끈을 잡습니다. 인생이 흔들리면 성령의 능력의 끈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의 끈을 붙잡지 않으니 믿음이 흔들리고 인생이 휘청거립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과 경험과 능력으로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사람들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도 휘청거리는 인생인데 어찌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주안에 바로 서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내가 주안에 바로 서있는지를 점검하여야 합니다. 고후 13:5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 묻겠습니다.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까? 분명히 믿습니다. 혹 아직도 믿지 못하신 분이 있다면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분명히 믿습니다. 혹 아직도 긴가 민가 믿음이 없으신 분은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지금 나는 주님 안에 살고 있다고 확증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믿는 다는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 안에 있다고 확증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 없다면 확증 못합니다. 여러분의 말이 주님 안에 있다고 확증할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입술로 누구를 미워하거나 험담하는 말을 하였다면 확증할 수 없습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하셨습니까? 만일 안 하였다면 여러분의 발걸음이 주안에 있다고 확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안에 있는지 아니면 주님 밖에 있는지를 알고 게십니다.
주님께서 천국 문 앞에서 나를 만나시어 물으시기를 “왜 내가 너를 천국으로 들여보내어야 하는가 대답해 보라”고 하시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입니까?
빌 3: 2절에서 바울선생님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개들을 삼가고(블레페테)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라는 말씀을 세 번 강조하십니다. 이 말은 주의 깊게 살펴서 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개들을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하여 부른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말은 이단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제멋대로 하나 됨을 깨트리고 당 짓고 분열하는 사람들도 이단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갈5:20) 이들을 주의 깊게 살펴 이들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문자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악한 마음을 가지고 악한 생각을 꾀하고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에 개역성경엔 할례당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은 유대교 율법자들을 삼가라는 말씀입니다. 즉 외식하는 사람들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척하는 거짓 신앙인들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사람들은 주안에 서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결코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주님이 싫어 버림받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빌립보 교회에 유오디아라는 여인과 순두게라는 여인이 있어 바울선생님이 주안에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권면하여 이르기를 이 두 여인들을 도우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로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말다툼을 합니다. 좀 심하게 싸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 본래 사랑하던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합니다. 형제간에도 서로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받는 형제간의 사랑이란 곧 아물게 됩니다. 성도 간에 다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투어도 주안에서 다투라는 것입니다. 함께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또 함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함께 천국에 들어 갈 터인데 천국에 가서도 다툴 것입니까? 주안에 서지 못하면 결국 그는 믿음의 길에서 낙오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시험일 것입니다. 이 주안에 서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느냐 서로 다투고 미워해서 천국 문에서 미끄러져 낙방을 하느냐 입니다.
그러면 주안에 굳건히 서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4-7절 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직립신행 주안에서 똑바로 서서 믿음 생활하는 사람의 생활은 이러합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모습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관용하며 살아가는 모습이고 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기도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직립신행 세가지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고.. 항상 관용하며.. 항상 기도하며 살아가는 믿음생활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인이 있다고 생각합시다. 교회는 열심히 다닙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항상 그늘이 져있고 인생의 슬픔을 혼자 다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항상 얼굴은 짜증이 가득하고 화나있는 모습이고 그의 입에서는 언제나 툴툴툴 불평과 비난과 원망하는 말을 쏟아 냅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관연 주안에 굳건히 서 있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주님께서 천국 문 앞에서 나를 만나시어 물으시기를 “왜 내가 너를 천국으로 들여보내어야 하는가 대답해 보라”고 하시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가 주안에 바로 서서 항상 기뻐하며 살았고... 항상 관용하며 살았고... 항상 기도하며 살았음을 이미 아시기에 시험이고 무엇이고 없이 어서 오너라 천국 문 활짝 여시고 무시험 통과 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무 시험 통과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란 분들을 보면 잘 알면서 직립신행 주안에 온전히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오래 서있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지겹기도하고 그만 주저앉고시픈 생각도 굴뚝같고 하다보니 몸이 비틀 거립니다. 옛날 군대 시절 26사단에서 졸병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우리 사단에 육군참모총장님이 방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일어나 부대 안팍을 깨끗이 청소를 하였습니다. 참모총장님이 12시에 우리 부대를 시찰하러 오시는데 9시부터 운동장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자니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에 맨 총이 무거워 아프고 그래 군인들이 다리를 비비 꼬고 허리를 좌우로 흔들고 어떤 약한 병사들은 주저 앉아버리고 그런데 갑자기 나팔소리가 났습니다. 참모총장님이 곧 도착한다는 신호나팔소리 였습니다. 이제까지 흐느적거리던 군인들이 다시 기가 바짝 서 부동자세로 서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 움직이는 병사가 없었습니다. 눈알마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팔에 힘이 들어가 어깨총을 바짝 당기었습니다. 참모총장님이 단위에 서서 말하는 동안 계속 그런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잘 아고 있으면서도 왜 주안에 바로 서 있지 못합니까? 5절 마지막에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생각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기도하고, 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 뵐 날이 가
깝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세상에서 살 것입니까? 끝 날이 가깝습니다.
흔히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오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안개 낀
새벽에 나는 떠나갈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 가
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천국에 못 들어간다면 얼마나 억울할 것입니까? 같이 가던 아
무게 집사님은 천국에 무사 통과하는데 당신은 저 아래로 가라하시면서 지옥에 떨어진다면
무엇때문입니까? 바로 지금 주안에 굳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시기 위해서는 주안에 바로 서서 항상 기뻐하며 항상 관용하며 항상 기도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무시험 통과 시켜 주시는데 다시 묻는다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는데 과연 그렇게 살았는가? 천국이 멀지않은 우리 눈앞에 있는데 우리가 직립신행 똑바로 서 믿음생활 하고 있느냐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주안에 바로 서라고 바울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8절에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 말씀에서 "무엇에든지"라는 단어가 6번 나오는데 그것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란 것입니다. 꼭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4절에서는 항상(판토테)이란 말씀으로 강조하였고 8절에서는 무엇에든지(호사: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로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함이 많아야 하며,
기독교인 어떤 경우에라도 경건함이 더하면 더할수록 좋으며,
기독교인은 어떤 경우에라도 올곧음이 더하여 져야 하며,
기독교인은 어떤 경우에라도 깨끗한 마음이 가득가득해야 하며
기독교인은 어떤 경우에라도 사랑받음이 부족하지 않아야 하며
기독교인은 어떤 경우에라도 칭찬 받을 일이 넘쳐나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주안에 바로 선 그 믿음이 굽어지지 않고 신앙생활이 비뚤어지지 않은 직립신앙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중에 단 하나라도 제대로 지킬 수 있는지요.
마지막으로 바울선생님은 말씀하기를 9절에 “너희가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포기하지 말고 잘 안된다고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 계속 실시하라 계속 실천하라 계속 직립신행 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우리의 신체의 자세를 바로 세워 걷는 것을 포기 하지 말고 계속 실시하듯 우리의 믿음생활도 비뚤어진 상태 그대로 놔두지 말고 지금 고쳐 펴 주안에 바로 서서 계속 걸어가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관용하며 항상 기도하는 직립신행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앞에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한 인생이 펼쳐지며 천국 문이 우리 앞에 활짝 열려 져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온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