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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 남도행전(전주지역)

전병호 by  조회 수:27 2019.07.06 15:46

초기선교사 남도행전(전주지역)

 

 

1893년 1월의 예양협정에 의해 호남선교를 맡은 남장로교 선교회는 호남에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는 것이 이르다고 판단하여, 2월 레이놀즈선교사의 어학 선생인 정해원을 전주로 보내 전주 선교지를 물색하게 하였습니다. 정해원은 전주에 내려와 적당한 곳을 찾다가 완산 은송리에 초가 1동을 마련합니다. 뒤 이어 9월 테이트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가 처음으로 전주에 와 2주간 머물렀고, 1894년 테이트와 누이동생 메티가 전주로 내려와 마련한 은송리 초가집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동학이 주도하는 농민혁명이 일어나 그들은 다시 서울로 철수하였습니다. 갑오농민 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 전봉준은 전라도 53개 집강소의 총 본부인 대도소를 전주에 두고 총 지휘를 하였습니다. 농민군과 싸운 정부군은 이를 진압할 수 없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청병 3,000명이 오고, 이에 질세라 뒤이어 일본군도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7,000명의 병력을 보내 왔습니다.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이 농민혁명군과 휴전 교섭을 하고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어 농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전주는 더 이상의 전란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청나라와 일본군은 1894년 7월이 청일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가 그 양국의 전쟁터가 되어버렸습니다. 전주가 농민군에 점령될 무렵인 5월30일 남 장로교 선교사들은 급히 서울로 올라가 전란을 피하였지만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고 극도로 국내의 치안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기도하며 선교의 재개의 때를 숨 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이트 선교사는 선교의 조바심을 금할 길 없어 1894년 가을 조심스럽게 전주에 들어갔습니다. 전주 안팍에 관군과 농민군의 싸움으로 마을들이 1/3은 파괴되고 불타 그 참담한 모습에 테이트 선교사는 더욱 빨리 선교 할 필요성을 가지고 서울로 오라가 선교사들에게 보고하니 선교사들은 매일 모여 전주의 선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895년 3월 18일 레이놀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조사 조씨와 강씨 어학선생 이씨 그리고 소년 요리사 칠성이와 함께 전주에 내려와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그 전의 초신자들은 흩어져 찾을 수 없었고 새롭게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전에 구입하려 했던 집 두 채와 앞으로 올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다섯 채의 작은 집들을 구입하였습니다. 레이놀즈는 큰 소나무들을 벌목해서 완산 지맥 중 한 편 등성이에 터를 닦고 두 채의 집을 지었습니다. 1896년 1월 5일 전주 은송리 교회에서 새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공식적으로 전주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테이트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리키고 동생 메티 선교사는 여자들에게 간단한 치료와 위생에 관한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1897년 3월 6일, 토요일 선교사들이 모여서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해리슨 의료선교사는 군산에서 말을 타고 전주로 완전히 이사를 왔습니다. 그는 전주에 도착하자 맨 처음 구입했던 은송리 집에 거처를 정하고 약방을 차려 환자들을 위한 간단한 의료시술을 하면서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다음날(3월 7일 주일)에는 전도를 받은 사람 중 8명이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선교사들은 먼저 인도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장터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3월 14일) 교회 예배에는 10명이 참석했습니다. 전주 선교는 매우 희망이 보였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선교의 방편으로 소년 교육에 관심을 두고 3월 28일 주일부터는 사내아이 네 명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도하였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 me)”이라는 찬송가를 가르쳤습니다. 어떤 때는 유교사상과 미신에 찌들은 부모들이 선교사들에게 욕설을 퍼 붓고 아이들을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해서 주일에 한명도 나오지 않은 때도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은 모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와 화평한 모습으로 장터 전도와 거리·축호 전도를 계속하였습니다. 때마침 레이널즈 내외와 그의 큰아들 볼링 등이 전주로 이사와 선교사들의 선교 운동에 가세하였습니다. 레이널즈는 유창한 우리말을 구사하며 장터와 거리 전도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6월 20일 주일에는 생각 밖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왔습니다. 물론 레이널즈가 설교를 담당하였습니다. 7월 4일 주일에는 아홉 사람이 참석했으며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여럿 되었습니다. 주일이 아닌 날에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믿음의 도리를 배웠습니다. 예수를 확실히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받기를 원하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문답한 결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예비 세례자가 되었습니다. 7월 17일 주일에 레이놀즈의 집례로 김내윤(테이트의 사환), 김창국과 김제원의 부인 강씨(김창국의 모친), 함성칠의 부인 임씨, 유성안의 부인 김성희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8월 1일 주일에는 처음으로 성찬예식이 레이놀즈 집례로 거행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김내윤의 딸 보영(寶榮)이에게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의 집 인근에 김창국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김창국은 키는 컷으나 소심한 소년이었습니다. 김창국과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테이트 선교사의 성경가르침을 들었고 찬송가를 배워 불렀습니다. 김창국의 아버지는 한의사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해리슨 선교사를 찾아와 치료해 주기를 원해서 잠시 진정제를 놓아주고 약을 조제하는 도안 김창국 아버지가 큰 침을 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말렸다는 것입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침놓은 것을 처음 봐 귀신 쫒아내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김창국은 세례 받은 이후 소년들을 교회로 불러 모아 스스로 주일학교 교장 노릇을 하였고, 해리슨 선교사는 데이비스(Linnie Davis) 선교사와 결혼하고 새 가정에 김창국을 사환으로 채용하였습니다. 그 후 해리슨 선교사는 그를 평양숭실중학교로 보내 공부를 시키고 이어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여 1915년 평양신학교 3회 졸업생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군산 영명학교와 금산심광학교에서 근무하였으며(임영신의 선생), 1917년 제주도 선교사로 6년간 근무하며 제주도의 독립운동가인 조봉호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독립모금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2년 광주 남문밖교회(광주제일교회)에서, 1924년 광주 양림교회를 개척하여 25년간 봉직을 하였습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김현정 목사, 둘째아들 김현승은 유명한 시인(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옆들이 지는 때...) 셋째아들 김현택은 전북대 교수(미국에 거주), 넷째 아들 김현구는 전남여고교장을 역임하고 광주중앙교회 원로장로입니다. 은송리 한 떡거머리 소년이 예수를 믿음으로 한국교회의 유능한 지도자로 그리고 후손들이 한국의 그 이름을 떨치는 인물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급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사람 전주 서문밖 교회의 최초의 세례교인인 유성안의 부인 김성희는 가정은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두 딸만 낳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집안에 머리 둘 곳도 없이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김성희는 메티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남편에게는 서양사람 집에 신기한 물건을 보러 간다고 하면서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남편이 그녀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심한 구타를 하였습니다 만일 다시 교회를 나가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김성희는 계속 교회를 나갔고 그때마다 남편의 학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 처음 그녀가 하는 일은 어린 딸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였습니다. 당시에 여자들에게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개 엄마 ‘이뿌러진 여자’ ‘코에 사마귀있는 여자’ 등으로 불려졌습니다. 김성희도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세례를 받을 때에 선교사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김성희는 자신의 두 딸의 이름을 지었는데 예수님 보시기에 귀한 보배 같은 딸이라고 하여 큰 딸에게는 ‘큰 보배’, 작은 딸에게는 ‘작은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받은 지 얼마 후 그녀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습니까? 어느 날 김성희는 잉골드(Ingold, Mattie B 1867-1962. 1895년 내한 1897년 전주의료선교시작 1905년 테이트선교사와 결혼)선교사를 급히 불렀습니다. 가서 보니 어린 아기를 뒤뜰에 죽은 큰 돼지 배위에 올려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가 아프면 그렇게 해서 고쳐질 것이라는 전례미신 때문이었습니다. 잉골드 선교사는 그 아이를 급히 데려다가 고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편 유성희는 아이가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것은 제사에 참예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김성희는 엄청난 결단을 하였습니다. 제사 음식 장만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유성희는 부엌칼로 위협하면서 제사음식을 장만하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김성희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원한다면 나를 죽이시오 당신은 나의 몸을 죽일 수 있을는지 몰라도 나의 영혼은 죽이지 못할 것이요. 나는 결코 제사를 준비하지 않겠소” 유성희는 칼을 높이 들고 얼마간 서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의 모습에서 그 어떤 두려움도 찾아 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은 굳은 결의로 환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유성희는 칼을 집어 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 후 유성희 본인은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부인의 교회생활을 반대하지 않았고 딸들을 기독교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였으며 큰딸을 기독교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애너벨 니스벳 선교사는 그의 책에서 “이 동양여자는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라는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지음 한인수옮김 호남선교초기역사 도서출판 경건 1998. 28쪽-33쪽)

 

 

 

전주시 서 완산동에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이 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때에 전주부의 서쪽 용머리 고개 동쪽에 군자정을 만들었는데 기령당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경로당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령당 안에는 이상만 이건호 송성용 등이 30여개의 풍광을 적은 현판들이 있었습니다. 기령당 뒤쪽에 송림사이로 송석정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송석정은 완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전주천 맑은 물이 흐르고, 좌우에는 다가산과 곤지산이 감싸고 있습니다. 송석정 바로 밑은 서천교를 넘어 정읍 가는 행인들이 지나가는 중요 도로이며, 주변에 기와집으로 된 청학루와 백학루가 있었으며, 소나무가 많아 은송리라고 불렀습니다 하니 과히 옛 풍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송석정 편액은 효산 이광열이 쓴 여러 작품 중에서 필획과 포치가 뛰어난 작품에 속합니다. 비록 편액 주변이 장식이 없고 단청이 되지는 않았지만 글씨만큼은 어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이 송석정은 멋진 정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곳에 오르면 도심 속에서 속세를 떠난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정자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 은송리는 북두칠성의 모양을 닮은 완산칠봉에 의해 조성된 명당 가운데서도 핵심을 이루는 곳이라고 말들 하였습니다.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은송리야말로 전주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조선 왕조의 시조인 신라 사공(新羅 司空) 한(翰)의 발상지요 중시조 목조 안사(穆祖 安社)의 본향으로서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은송리는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최씨, 이씨, 유씨의 시조들이 일찍이 개창의 터전으로 삼아 오늘날 한국의 명문 성씨를 일구어낸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워낙 텃세가 심한 곳이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섣불리 범접을 못하였습니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은송리와 남부시장은 서로 마주보는 형세라서 남북을 연결하는 전주천의 다리들을 중심으로 각종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일찌감치 부민들의 생활전선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은송리는 동학혁명 당시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전주에 입성한 농민군과 성을 탈환하려는 관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와같이 유서깊고 풍광이 좋으며 장터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쉽게 마날 수 있는 은송리에 레이놀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의 첫 선교를 시작하려 하였습니다. 1893년 6월 전주 선교를 위해 선교지를 물색하기 위해 온 정해원이 은송리에 초가 1동을 예배처소로 마련하였고 9월 테이트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가 처음으로 전주에 와 2주간 머물렀으며 마침내 1894년 3월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누이동생 테이트가 전주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894년 5월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그들은 서울로 철수했다가 동학운동이 끝난 1895년 2월 레이놀즈 목사와 테이트 목사가 전주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1897년 레이놀즈 목사와 테이트 목사는 완산동 언덕에 1천5백 달러를 들여 두 채의 집을 마련하여 살았습니다. 1897년 3월 6일, 토요일에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군산에서 말을 타고 전주로 완전히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주에 도착하자 맨 처음 구입했던 은송리 집에 거처를 정하고 약방을 차려 환자들을 위한 간단한 의료시술을 하면서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국인이 은송리에 터를 잡고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본 지역 양반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1900년 그들의 항의에 전주 감영이 나서게 되었습니다. 전주 감영에서는 은송리 그 지대는 태조의 조부가 태어난 성역이기 때문에 거주를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타협 끝에 그에 상당한 땅을 다른 곳에 주고 일체 건축 비용을 변상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완산동 은송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화산(현 중화산동)으로 옮겨 그 일대가 선교사 촌을 이루었습니다. 이로서 서문밖교회(西門外敎會) 시대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고 뿐만 아니라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기전학교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은송리 전주교회는 설립 초기에 테이트 선교사와 해리슨 선교사가 이 교회를 이끌면서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1900년 가을에는 113명이나 되었고 한번은 54명의 세례지원자를 교육시킨 후 문답고시에 6명만이 합격하여 세례를 준 일도 있었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전주 장날에는 장터선교에 열을 올렸고 평일에는 전주성 밖으로 나가 인근 동리에도 전도를 하였습니다. 특히 전주 성내의 양반들 선교에 열의를 보였습니다. 나라의 형편이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는 모습에 슬퍼하고 있던 전주의 양반들은 점점 선교사들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고 한문으로 된 성경을 구입하여 읽고 새로운 진리를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서문박교회에는 양반과 상민들이 함께 어울려 예배를 드리니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할 것입니다.

전주에서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904년 전주에 와서 활동한 포사이드(Forsythe, Wiley H ?-1918. 한국명:보위렴. 구바에서 활동하다 1904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전주, 목포, 광주에서 활동 사람들에게 선한사마리아 사라이라고 불려짐 1912년 몸이 쇠약해져 귀국)의료 선교사가 1905년 3월 전주의 어느 양반의 병을 치료하던 중 의병들이 찾아 왔다가 그를 일본 경찰이라고 보고 칼로 여러 군데를 찔러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집의 안주인이 죽어가는 그를 막아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도둑들이 물러간후 급히 전주 예수병원에 치료를 받았지만 그의 귀와 머리에 난 상처가 더 이상 났지를 않아 잠시 일본 요코하마에 이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전주의 양반 계층에 소문이 나서 양반들이 교회를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선교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해의 도시 선교는 앞선 해와 비교할 때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05년 2월 까지 교회에 모인 남자들은 완전히 중상층 상인이거나 농부가 아니면 하층 짐꾼들이었다....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무관심했었다...포사이드박사가 상처를 입은 한 달 뒤 상당수의 고위층과 부유층의 이씨 문중사람들과 집안의 가장들이 큰 길에서 가마를 내려서 예배드리는 외국사람 집에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이 그 도시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이 사건이 본이 되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체면이 깍이는 일이 아니었다.”( 니스벳 호남선교초기역사 p.69, 조지 톰슨 브라운 지음 천사무엘 김균태 오승재 옮김. 동연 1910. p96-97) 포사이드 선교사는 치료후 다시 전주로 왔으나 목포로 가서 병원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온갖 어려움 중에 환자들을 돌보아 사람들로부터 선한사마리아 인이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열병에 걸려 1911년 미국 자신의 고향인 루이빌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18년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한 가지 슬픔 소식은 해리슨 선교사아 함께 전도활동을 하던 부인 데이비스선교사가 장티브스에 걸려 치료를 받다가 1903년 6월 20일 별세를 하였습니다.

 

 

1902년 9월 레이놀즈선교사는 서울 구리개(아현)교회(서울 중앙교회)로 옮겨감으로 1904년 전킨 선교사가 군산에서 서문밖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실은 전킨 선교사가 군산선교에 너무 지쳐 있어 휴식한다는 의미로 서문밖교회로 오게 되었지만 어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선교사가 아니였습니다. 오히려 더 일을 만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었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20리 밖으로 순회전도를 하지 말라는 선교회의 엄명에 오히려 전주를 중심으로 장터선교 노방전도 축호전도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이로인해 교인수가 날로 늘어갔습니다 1905년 9월 완산에서 화산으로 이제 전주의 4대문중의 하나인 서문 아주 가까우며 전주 천을 건너 전주 부중으로 들어가는 문턱 서문밖 현 위치로 옮겨 780평 기지를 구입하고 건평 50평의 벽돌 기와지붕 한양절충식 예배당을 건축하여 서문밖교회가 되었습니다. 전킨 선교사의 진두지휘로 새로 지은 예배당 안에는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좌석을 구분하고 가운데에 휘장을 전후로 길게 쳐서 남녀반이 서로 마주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이는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낡은 유교의 관습이라 하여 젊은이들 중심으로 철거를 주장하니 1921년 6월 12일 교인전체의 의견을 물어 휘장을 철거하였습니다.) 총 공사비는 3,500냥이 들었는데 2,300냥을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고 완산의 선교사 사택 한 채를 헐어 자재를 보충하여 소요경비를 충당하였습니다. 은송리에 있을 때 은송리 예배당으로 부르다가, 1905년 전주부내로 교회를 지어 옮기니 전주교회로 불렀습니다. 전주서문밖교회로 통칭 불려지다가 1955년 12월 14일 전주서문교회로 개칭되었습니다.

 

고종황제는 1907년 6월 25일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을 파기 하고자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제국과 대영제국 등의 방해와 같은 제국들인 서구의 방관으로 대한제국 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습니다.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 대표들은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이위종이 유창한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실력으로 대한제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는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조선을 위해 호소한다'는 제목의 연설 내용은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어, 이 연설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같이 한국의 사정을 논해서 '억일부한'(抑日扶韓)의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은 좌절되었습니다.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행된 잔인한 재앙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 근심이 분통이 되어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일본은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맺어 행정권을 빼앗고 조선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한국백성은 나라의 성쇠존망(盛衰存亡)의 혼탁지세(渾濁之世)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 나라를 보존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백성들의 죄 값이니 하나님께 돌아가야만이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나라를 지켜나갈 수 있다는 예레미야의 통곡의 마음들이 모여 모여 1907년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회개와 부흥의 불길은 전국교회로 번져 나갔습니다. 전주 서문밖교회에서는 500명이 자진해서 나와 전도대원이 되었고 5,000권이 넘는 단편복음서를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교인들이 “날연보”를 바치기로 서약한 총 날 수가 3,349일이나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 부흥 전도운동에 전킨 선교사가 앞장을 서 열정을 쏟아 부어 그의 육신은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1908년 1월 15일 “예수교신보” 교회 통신란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났습니다.

 

“ 전라도 전주 전 목사가 세상을 떠남

본월 2일에 전주 전목사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 목사를 아시는 형제자매는 육신의 섭섭한 정회를 금하기 어렵도다. 이 목사는 교중 사무 보는 중 제일이더니 불행히 세상을 떠났으니 장차 그 자리에 대신 사무 보실 이가 그와 같이 잘 보리라고 하기가 어렵겠도다. 이목사가 우리나라에 오신지 16년에 전라도에서만 교중사무를 주관하셨으나 사경할 때에는 항상 다른 곳으로 다니며 많이 인도하셨고 어디가든지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으며 그 집안 식구는 부인과 아들 3형제와 딸 하나이더라. 슬프다. 이 목사가 육신의 고락을 다 버리고 세상을 떠나서 낙원으로 간 것을 생각하면 가쁘다고도 할 수 있지마는 그 외로운 부인과 어린 자매들의 정경을 생각하면 눈이 어둡고 기운이 막혀서 기도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돌아보사 잘 보호하실 줄로 믿삽나이다.“(전주서문교회100년사 177쪽)

 

1908년 1월 2일 급성 장티부스 폐렴으로 전킨 선교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알고 있는 선교사들과 서문밖교회 교인들 그리고 군산 익산 김제등 그를 통해 전도 받고 시작된 교회 교인들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김에 사킨바 되었습니다. 에너벨 니스벳은 그녀의 회고록에서 전킨 선교사의 장례식 때의 에피소드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전킨선교사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전킨의 얼굴을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존경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볼수도 있다는 말에 어느 선교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위렴 목사는 살아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 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에너벨은 슬픔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 전킨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의 뜻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전킨은 선교사의 삶이 희생의 삶이라고 하는데에 격렬하게 반대를 하면서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고한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호남선교초기역사 58-59쪽)

전칸 선교사가 전라도 땅에 뿌린 복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씨앗들이 크게 자라 120년이 지난 오늘 전국적으로 가장 복음화율(30%이상)이 높은 지역이 되었습니다.

 

 

7인의 선발대로 전킨과 함께 한국에 온 매리 레이번 전킨(Mary Leyburn,Junckin) 부인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교우들에게 전킨 선교사가 생전에 서문밖교회를 새로 건축하였지만 종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고 말하니, 서로 연보들을 하여 직경 90cm나 되는 큰 종을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의 해외선교신문의 편집장 윌리엄(H F William)목사는 직접 이 종을 큰 기선에 실어 한국으로 왔습니다. 제물포에 도착한 이 종은 다시 범선 편으로 만경강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전주에서 40리 거리인 김제의 회포면 쌍강포에 내렸습니다. 다시 인근에 난산교회와 쇠평리교회 성도들이 이 종을 쇠달구지에 실어 서문밖교회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종각을 세우리 위해 교인들이 헌금을 하고 인근 교회들도 협력하였으니 김제 번드리 교회에서는 5원을 보내 왔습니다. 종각 건축위원으로 김필수 장로, 전영칠 집사 그리고 목수 김학수에게 맡겨 종각을 세우니 1908년 12월 10일 오후 4시 헌종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 후에 윌리엄 레이놀즈 니스벳 선교사와 전영칠 집사 그리고 앞으로 종을 관리하며 타종 책임을 맡은 안경오가 차례로 타종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감격을 김필수 장로가 12월 30일자 “예수교 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습니다.(전주서문교회100년사 179쪽)

 

“....한번 씩 종을 쳐 보는데 뗑 뗑 뗑 사랑하는 전 목사의 기념종소리로다. 예수께서는 천당에 오르신 후 보혜사를 우리를 외로운 자식같이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심 같이 전 목사는 종을 보내게 하여 이곳 교우와 다른 친구들을 경성하게 하셨도다.”

 

비록 전킨 선교사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셨지만 그 후 그 종소리가 울릴 때 마다 그의 신앙과 선교정신도 함께 서문밖교회와 호남 모든 교회들에게 울려 퍼졌습니다.

 

남 장로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성경 교육에 필요한 책을 직접 쓰거나 번역 출판하여 사람들에게 읽게 하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 부인인 잉골드 선교사는 어린이 성경교육을 위해 “예수교 초학 문답”을 저술하였고, 메티여선교사는 “인모귀도(인모귀도Leading the mother in the right way)라는 책을 썼는데 여자 매서인 과부 이씨가 예수를 믿게된 일과 믿은 후 친정 어머니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이야기립니다. 레이놀즈선교사는 마훗(Mahooe)이 쓴 “Art of Soul Winning)이란 책을 번역하여 ”개인전도“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어 1년도 못되어 2,000부가 팔려나가 매진되었습니다. 의료선교사 윌슨(Wilson,Patterson). 의학에 관한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초기 우리말 성경은 로스선교사에 의해 만주에서 발간된 “예수셩교젼서”는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것으로 주로 의주사람들에 의한 번역이되어 평안도 방언이 많이 섞여 있어 남쪽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한글 번역성경이 필요하였습니다. 번역위원이 선정되었는데 북장로교의 언더우드목사 게일목사 그리고 남장로교회의 레이놀즈목사네게 성경번역을 맡기었습니다. 1902년 6월 목포에서 성경번역회의에 참석차 인천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던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인 안펜젤러 목사가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해에서 그가 탄 배가 다른 배와 충돌 좌초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살아난 미국 광산 업자인 보올비( J.F.Bowby)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에 아펜젤러목사는 충분히 살아나올 수 있었는데 배 아래층 3층칸에 있던 조수인 조한규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고 본인은 살아나오지를 못하였습니다. 이때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 그리고 아펜젤러 목사 23명이 실종 사망하였습니다. 하여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선교사인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군산 내초도(내초동 109-16 063.457-0397 내초도감리교회)에 순교관을 건립하여 그의 아름다운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에 도 불구하고 성경번역 사업은 계속 되었습니다. 1904년 신약성경이 번역을 끝내고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곧이어 구약전서의 번역에 착수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언더우드 목사는 병환으로 그리고 게일목사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전킨 선교사 별세 후 전주 서문밖교회를 맡게 돤 레이놀즈목사가 주도적으로 노력한 결과 19010년 4월 2일 구약전서의 번역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글 성경은 레이놀즈선교사의 노고의 결과요 또한 서문밖교회 교인들이 그를 도와 번역사업에 동참하였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특히 두 사람의 이름이 기억됩니다. 한사람은 서문밖교회의 이승두이고 또한사람은 서울에서부터 번역사업에 종사한 김정삼이다. 이들은 우리말 교정하는 일에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승두는 1911년 1월 1일 장로가 되었습니다. 본래 이승두는 1909년 7월 11일 피택되었으나 성경번역일로 늦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912년 레이놀즈 목사가 서문밖교회를 사임하고 최초로 한국인 목사를 청빙하게 되었습니다. 청빙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지방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병룡목사였습니다. 김병룡목사는 1897년부터 평북 의주군 읍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평북선천읍교회 남자중학교(신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0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 최대진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ㄷ사가 되어 의주군 남재 낙원 농상등지에서 목회하다가 1912년 9월 전주 서문밖교회 목사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주 소음리 정거장에 도착한던 날 밤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인들이 나가 열열하게 환영을 하였습니다. 1913년 4월 15일자 예수교회보(15호)에 김병룡목사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였습니다.

“ ...이 때는 밤이라 수 십리나 행하여는 사랑하시는 각 학교 선생 여러분이 자행거로 수십여리를 나와 인사하는 중 어린학도들이 기쁜 소리로 부르고 오리 상거에는 여중학교 선ㅅㅇ 누님들이 수다한 학생들 인도하고 여러 직분과 여러 사랑하는 형제는 반가히 부르는 말씀과 사랑에 손으로 붓잡고 영접함을 다 말할 수 없사와 주은을 감사할 뿐이옵고 집에 들어와 보온즉 수백여환 가격으로 수리해 거처에 편케하며 가용물품은 서양 부인들과 여러분들이 부족한 것 없이 다 마련하여 둔고로 풍족한 은혜를 받은 중....”

 

지금까지 선교사들에 의해 이끌어 온 서문밖교회 교인들은 오래 동안 우리나라 목사님이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해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왔었는데 비로소 우리나라 목사님이 오니 얼마나 큰 기쁨인지 김병룡목사가 오는날 60리 밖까지 교인들이 나가 영접하였던 것입니다.(전주서문교회100년사 216-217쪽)

 

*** 이상으로 초기선교사 남도행전은 극동방송국에서 방소한 내용과 기독교사상에 연재한 내용을 요약 발췌하였습니다. 바삐 원고를 치다보니 오자가 많이 보입니다. 양해바랍니다. 남장로교 호남선교 역사와 전킨선교사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면 전킨선교사기념사업회발간 전병호저 “이야기 전킨”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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