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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 남도행전(삼례 봉동 완주 고산지역 계속)

 

 

오늘은 삼례교회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메커첸(마로덕) 선교사가 1901년 남장로교회 파송을 받아 서울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1902년 전주 선교부에 독신으로 부임하였습니다(1908년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화여교 교사였던 Hounshepp Joshephine과 결혼). 그가 전주 선교부에 내려와서 제일 처음으로 설립한 교회가 삼례제일 교회였습니다. 1903년 메커첸 선교사가 최대진 조사를 대동하고 삼례에 복음을 전하여 장경태, 김헌식, 정찬신, 김계홍 등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장경태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삼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신도수가 증가됨에 全州郡 昌德面(今 參禮面) 上后里(現 參禮里)에 초가 四間을 예배당으로 하여 3월 5일 완전한 교회로 예배케 되었으며 당시 평균 교인수가 장년 17명이였습니다.

 

1905년, 全州參禮敎會가 成立하다. 初에 宣敎師 馬路德과 助師 崔大珍의 傳道로 張敬泰 鄭昌信 等이 信敎後 熱心으로 傳道하며 上後里에 草家 四間을 禮拜堂으로 買入하야 17敎 友가 會集하다가 후에 禮拜堂을 西新里로 移轉하니라.(史記 137쪽 김수진 호남기독교 100 년사 195쪽)

 

1905년 9월 四新里(현 參禮里 139번지)에 초가 3間으로 이전하였고 1907년 봄 교인수가 100명이었으며, 가을에 장경태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아동들에 대한 교육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정창신과 함께 기독영흥학교를 설립하여 1909년 8월 31일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곧 학교 이름을 영신학교로 개칭하였는데 학생 수는 최동만 박석순 김판암 등 10명이였습니다. 영신학교는 1967년 3월 완주군교육청으로 이관되어 삼례중앙초등학교가 될 때 까지 제 49회 1,055명의 수많은 지역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1968년에 서창순 김성배가 입학을 하였는데 김성배는 신학을 공부하고 1948년 삼례교회 목사(1948.10.20.-1952.8)로 위임하게 됩니다. 첫 신자 이였던 김계홍은 1911년 4월 8일 삼례교회 첫 번째 장로가 됩니다.

 

삼례교회는 여러 한국교회역사에 크게 알려진 목사님들이 거쳐 갔는데, 1918년 8월 26일에는 김인전(1876-1923) 목사가 전주 서문밖교회와 함께 동사 목회를 하였습니다. 김인전목사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촌마을에서 태어나 1913년에 서문밖교회 장로로 1914년에 목사로 그리고 1916년에 전라노회장을 지내였으며 유불선도와 세상의 여러 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져 비 신자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그가 가르치는 성경공부시간에는 500-3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의 강해를 들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에베솔(Eversole Finley Monwell 한국명: 여부솔 1912-1930전주에서 활동. 신흥학교 교장으로 삼일운동 당시 감옥에 갇힌 학생들의 석방운동을 하였다.)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홍보 재정 외교 등의 요직을 맡아 많은 임정요인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았으니 마침내 의정원의장이 되어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처럼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김인전 목사가 당회장으로 있었던 반면에, 제 29회 총회장시에 신사참배 창씨개명을 결정함으로 한국교회에 큰 부끄러움을 남겼던 곽진근(1897-1941)목사도 1924-25년간 삼례교회를 담임한바 있습니다. 1939년-1942년간에는 목포 양동교회와 이기풍목사와 제주선교에 큰 업적을 남겼던 윤식명 목사가 교회를 섬기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삼례교회에서 꼭 기억할 이름은 김성배 목사의 가족사입니다. 김성배 목사의 아버지는 김창언으로 삼례교회 초대 신자로 온 가족이 삼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김창언은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 용정으로 이사를 가서 포목장사를 하였는데, 큰 아들 김성배는 앞에서 소개한바 신학을 공부한 후에 목사가 되어 고향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김성배 목사는 참으로 한국 초기 교회사에서 기억해야할 대단힌 인물 이였습니다. 독립군으로 목회자로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서울감리교 협성, 평양신학교(25회)를 졸업하였고, 삼례제일교회, 수원서둔교회, 목포양동교회, 전주중부교회, 전주성산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였고, 만주에서 신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중국 상해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훈춘성민의원, 장춘성산의원, 곽산성산의원, 논산순천의원, 영등포동양의원을 세워 의사로도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청산학원에 유학하여 27세 나이로 일본중앙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그 후에 의학박사, 신학박사 명예박사 등 학위가 7개나 되었습니다. 1979년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김성배 목사와 달리 동생 김춘배는 시종일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그 활략상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이승철(국사편찬위 사료(史料)조사위원)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김춘배는 1927년(당시 21살)2월 만주 돈화현(敦化縣)에서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정의부군(正義府軍)에 가담하여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니 간도지방을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일본 경찰의 협박에 못 견뎌 자수하여 결국 서울서대문 형무소에서 8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였습니다. 김춘배 의사는 1934년 4월 출감하자 다시 7개월 만에 함경남도 신창주재소 무기고를 털었는데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800발을 탈취하였고, 북청(北靑)어업조합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마련 만주 독립군과 합류하려고 가다 그만 열차 안에서 붙들렸습니다. 잡히기 전 19일 동안 동원된 일제 경찰병력이 2만 명 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문에 크게 소개가 되었는데, 『근래 희유(稀有)의 함남(咸南)권총사건』,『철옹성 경계망 돌파 경관에 발포』,『북청에 홀현(忽現) 순사 부장을 또 사격』,『신출귀목 19일간의 대단한 범적(犯跡) 극적장면』,『연 2만 경관동원, 총 경비 2만원(圓)』 등 신문제목만 보아도 그의 독립투쟁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또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길거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김춘배 의사 아들 김종수(金鍾洙)는 1947년 아버지를 찾아 단신 월남했고 장성하여 전주기전여중고등학교에서 일하였습니다. 아들 김종수가 13년 8개월간 각 신문사와 유관기관을 누벼 자료를 찾아 김춘배 의사는 56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습니다.

이같은 김춘배의사를 소개하는 것은 삼례지역에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시절 삼례교회에서 신앙훈련을 받아 이지역의 자랑스런 훌륭한 독립투사가 배출되었음을 기억하고자 함입니다.

 

삼례교회에 걸출한 한국의 여성지도자가 배출되었습니다. 근대 한국 여성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임영신(1919-1977)여사가 바로 삼례교회 출신입니다. 본래 금산 출생이나 기전학교를 나와 삼례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임구환(任九桓 삼례교회 약사에는 임구식으로 나왔다)은 금산 상옥리 금산제일교회(충남 금산군 금산읍 1905년 3월 16일 메커첸 선교사와 최대진 조사에 의해서 이원필의 집에서 설립)를 다니다가 삼례로 이사와 1939년 5월 28일 삼례교회 장로(1915년 3월 금산제일교회에서 장로 장립한 바 있음)가 됩니다. 임영신은 기전학교 다닐 시에 같은 반 친구인 김연실의 집에 갔다가 김연실의 아버지 김인전 목사를 만나게 되고 한동안 그에게서 자신의 신앙과 애국사상을 듣게 되니 훗날 김인전 목사가 자기를 키워준 큰 스승으로 자신의 이력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운동당시 함태영(후에 부통령)으로부터 독립선언문을 받아 수백 장을 등사하고 전주 만세운동에 전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3년 선고를 받게 됩니다. 1924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만행 사건 기록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러 미국에 갔다가 미국 서던 켈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유학을 하고 로스앤젤스에서 독립운동협회를 조직하여 과일장사를 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의 자금을 대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후 독립된 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일과 특히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의 참전을 위해 미국에 건너가 그의 활략상은 익히 알려 졌습니다. 임영신은 4선 국회의원이 되고 최초의 여성 상공부장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임영신여사는 1947년 독립된 나라의 새 일꾼 양성을 위해 중앙대학교를 설립하여 중앙대학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재들로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임영신 여사가 금산초등학교 3회 졸업생이라 금산이 배출한 위인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만(2013년 12월 26일 금산의 인물로 임영신, 정치인 유진산, 극작가 임희재가 선정되어 금산역 앞에 흉상을 세웠습니다.) 이미 기전학교 다닐 때에 가족이 삼례로 이사와 삼례교회를 통해서 신앙이 자랐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도 계속 삼례 집에 올 때마다 아버지가 장로로 있는 삼례교회에 출석하였으니 삼례교회의 출신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1941년 5월 5일 노회로부터 삼례제일교회로 이름을 병경하여 불렀는데 전에는 삼례서신리교회로 불려지기도 하였습니다.

1920년 7월 5일은 삼례제일교회에 또 한 가지 기억할 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배당이 남 여로 구분되어 예배하여 왔는데 칸막이 포장을 떼어 내고 通間禮拜를 드렸으니, 이는 전북에서 최초의 일이였습니다. 1935년 12월 16일 오후 2시 30분 교회 헌당식과 함께 메커첸 선교사의 선교 33주년과 회갑축하예배가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누군가 메커첸선교사 환갑연 축시를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이승철선생의 기록에서)

 

馬路德(마로덕) 宣敎師(선교사)

 

完山入鄕馬路德(완산입향마로덕)=마로덕 님 완산 땅 선뜻 들어서서

傳道行脚奧地域(전도행각오지역)=전도길 구석진 곳 여기저기 찾아

人逢勸勉耶蘇信(인봉권면야소신)=사람 만나 예수 믿자 권하지만

高鼻目睹不聽樂(고비목도불청락)=높은 코만 즐겨 볼뿐 들은 척 아니 하네.

福音浸透驚斯文(복음침투경사문)=스며드는 복음 앞에 깜짝 놀란 유생들

日增聖徒邪敎視(일증성도사교시)=날로 느는 성도 보고 사교라지만

參禮敎堂施甲祝(삼례교당시갑축)=삼례교회 회갑 축하 푸짐한 잔치

長流大川加活力(장류대천가활력)=한내 물 힘을 받아 멀리멀리 흐르누나.

 

메커첸 선교사가 전북 동북부지역에서 보여준 선교활동은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으니 한국 교회는 그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 누가 어느 교회가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삼례교회가 다시 그를 기억하고 그의 선교활동을 기념하는 일이 계속 있었으면 합니다.

 

 

 

익산 IC에서 왼쪽 완주 방향으로 나아가면 완주군 봉동읍이 있습니다. 봉동읍과 비봉면에 걸쳐있는 봉실산(372m)이라 일컫는 명산이 있는데 봉황이 알을 품는 형상이라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건국 초기 수도 송악을 옮기려고 무학대사가 수도 후보지로 한양과 계룡산, 이곳 봉실산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봉실산 주변은 한나라 중심지로도 지세가 조금 부족한 면이 있지만 앞으로 크게 창성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 완주 산업단지, 과학산업단지, 테크노벨리 등이 위치하고 있어 앞으로 통합 전주시가 100만 광역도시로 발돋움하는데 중추적인 중심 특화 거점도시로 발전할 잠재력이 많은 지역으로 선도적 역할이 매우 기대 됩니다. 바로 그 봉동의 관문처럼 제내교회가 있습니다.

 

장로회 총회에서 발간한 史記(138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5년 전주 가 하다. 에 , 이 을 듯고 밋은

하며 로 하며 하더니 에 한 들 있어 을

하니라.”

 

김성식과 정민혁은 50리 떨어진 전주 은송리 서문밖교회를 걸어 교회를 다니며 믿음생활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토요일 저녁에 교회에 가서 잠을 자고 다음날 주일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1900년 3월 5일, 28세 청년인 김성식은 자기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제내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05년 신기부락에 곱배집 초가를 교회로 신축하고 공식적으로 제내교회를 등록함으로 사기에는 1905년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제내교회 당회원들의 증언1994년 7월 24일 김수진 호남기독교 100년사 199-200쪽) 그리고 1915년 4월5일 3차로 전북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에 초가로 17평의 교회를 신축하여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1908년 1월 25일 김성식(1871-1941.7.7.)은 제내교회 첫 장로로 장립한 후, 1910년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4월 평양신학교 제 6회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일찌기 김성식목사는 충남 예산의 무관출신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여 사업관계로 멀리 중국 간도등지로 다니면서 신문화를 접촉하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제내리는 성씨 정씨 임씨의 씨족 사회로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제내리 김성식 목사의 사랑방 교회에는 산지기 하인들 머슴들 대체로 하층민들이 많았습니다. 김성식 키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하신분으로 건강하여 봉상교회 소룡교회등 인근 5개 교회를 맡아 바쁘게 시무를 하였습니다. 김성식 목사에게는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한 김현경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김 목사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 김현경은 일반 평신도로서 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평양의 숭실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대학 1년 과정을 간신히 마쳤으나 더 이상 공부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지금 제가 공부할 처지가 못 됩니다. 우리 교회에다 학교를 세웁시다. 그것만이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자식의 뜻을 전해들은 목사님은 사재를 털어 1925년 4월 15일 교회 내에 학원(4년제)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크게 공헌을 하는 등 아들 김현경은 평생을 제내리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섬기며 후학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영성학원은 당시 대한제국 학부대신으로부터 정식으로 학교 인가를 받았으며 제내리 관내 12개 마을에서 학생들이 다녔는데 30리 밖 비봉과 왕궁에서도 학생들이 왔습니다. 김성식목사는 매일 아침 30분씩 영성학원 학생들에게 채풀을 인도하며 모세이야기등 암암리에 민족의식을 심어중ㅆ습니다. 일본은 망한다는 성교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가기도 하였습니다. 1942년 영성학원은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를 하였는데 당시 교사로 김현경 정청원 강오식 교사등 학생들은 눈물로 학교문을 닫았스니다. 재학생들은 3km밖 왕궁소학교로 옮겨 갔습니다.

 

인민군이 이곳을 점령한 후 같은 마을의 우익진영 모든 사람들에게 미제국주의자에게 아부한 죄과의 자백서를 제출할 것을 강요하며 핍박을 하는 중 인민군은 9월 중순 유엔군의 인천 상륙 이후 긴급 철수를 계획하고 우익진영 인사들 약 50명을 내무서로 긴급 소환하여 소방서 창고에 감금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김상천(金相天)·김현경(金顯慶)·황해주(黃海周) 세 장로와 김은석·김현주·소금영·김수배·김흥섭·이봉고 집사들이 있었습니다. 인민군은 퇴각 시간이 박두하자 창고 문을 열고 닥치는 대로 총격을 난사하였습니다. 이때 창고 안에서는 큰 비명 소리와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는 울부짖음의 기도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총격을 받은 50여 명 중 29명이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대부분이 교회 직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상천·김현경 두 장로는 이때 순교하였습니다.

 

김상천 장로의 외증손자가 되는 한일장신대학교 차정식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1921년 3월 15일 제내교회 2대 장로가 된 김재식 장로의 아들인 김상천 장로는 1930년 5월18일 제내교회의 3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1950년 9월27일 순교한 김상천 장로가 2000년 12월9일 제내교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리는 예배에 김상천 장로의 순교가 인정되어 순교자명단에 오르고 김재식 장로의 공이 인정되어 김상천 장로의 아들인 김수봉 장로가 공로패를 받았습니다. 제내교회의 3대에 걸쳐 장로로 교회를 섬기는 순교자의 가정에 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색각하게 됩니다.

 

향토사학자겸 시인이 이승철(李 承 喆)선생이 2011년 8월 22 일 제내교회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솔티[松峙]재’ 솔바람

‘능지울’ 양반 바람

‘용남(龍南)’이 물바람

‘금마 팔봉’ 아득한 길목 찬바람

하룻길이었는데…

 

나른 듯 벌써 조반 먹고 금방이었다.

 

'학고개[鶴峴]' 성문처럼

제내교회 철탑 우뚝하구나.

천주교 박해로 잘린 목이 지났고

 

서릿발 아전(衙前) 금부도사가 누비던 길목에

제내교회 철옹성 예배당이 자랑이구나.

 

건너 편 고속도로 지나는 길손 마다

'우주(紆州)땅 '태고의 ‘방죽’을 둘러보면

위아래 전후좌우가

스승이더라.

역사 앞에 우린 모두 문하생

행동으로 복 받는 피조물이 되어보자.

 

스무이틀 팔월 둥둥

얼씨구절씨구 ‘통샘[桶井]’ 물맛처럼

섬기는 하나님 앞에 말-글-마음 하나 되어 보자구나.

 

 

 

 

봉동읍내에 봉상교회가 있습니다. 봉상교회(장기리교회라기도 하고 보상리교회라고도 불렸다) 연혁에 보면 1904년 4월에 김성원 유명수 서옥전 박공선 등이 본래 전주 서문밖 교회를 다녔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 봉상면 장기리 윗 장터 187번지에 초가를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 봉상교회가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뿌리에 세교회가 있으니 봉상교회와 1960년 9월 4일 통합과 합동의 분열로 분립된 봉동중앙교회 그리고 서두교회가 있습니다. 서두교회는 1902년 김희서 박공선 이 서문밖 교회를 다니다가 처음 우산(현 은하리) 서두부락으로 옮겨 서두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서두교회는 본래 윗 장터에서 봉상교회 설립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현 봉동초등학교 자리로 예배 처소를 옮겨가기로 하였다가 각기 다른 처소로 갈라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서두교회 김희서 장로가 영수로 교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봉상교회 연역을 보면 1906년 4월에, 봉동중앙교회 연혁에는 1908년 우산교회(현 서두교회)가 분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자료의 미비로 알 수 없지만 봉상교회 봉동중앙교회 서두교회의 교회의 시작은 장기리 윗 장터교회이니 한 뿌리 세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서두교회에 도태구 장로의 조 부모는 신앙이 투철하고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여 봉동면 일대에 이 댁의 밥을 밥 안먹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6.25 전쟁 때 서두교회와 교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도태구 장로의 조 부모때부터 내려온 구제활동에 공산당들도 고맙게 여겨 서두교회를 보존시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60년 봉동중앙교회와 분리되기 전 봉상교회와는 같은 교회역사임으로 편의상 봉상교회 역사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봉상교회의 첫 당회록을 보면, “본 교회 설립된지가 8년인데 즉 주후1904년 이라. 주후1911년 10월에 대리회로 작정한 위원들이 모여서 장로를 장립하였으니 이 직분 받은 이는 씨라 이후부터 당회록을 기록하여 교회정치에 의론하고 작정하는 일을 기재하노라. 1911년 11월 17일 회장 마로덕 서기 이영원”라고 하였습니다.

 

봉상교회의 초대교회이야기에서 봉상교회의 초대 장로인 이영원장로의 어머니 유씨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봉상교회100년사론(2004년)에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전주군 봉상면 신성리에 전주 씨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회안대군(懷安大君, 1364년 ~ 1421년 4월10일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로 이름 방간(芳幹))의 15대손인 이익신(1850.5.18.-1896.3.28.)씨와 결혼하여 지금의 신성리 288번제지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위 송직강이 동학혁명에 연루되어 관직에 삭탈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다가 병고로 죽었습니다. 유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전주 친정집을 오고가며 전주에서 선교사들을 만나고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유씨는 키도 크고 한학에도 조에가 깊으며 지혜가 출중하여 선교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물질적으로 예수교병원을 크게 도왔다고 합니다. 멕커첸선교사와 함께 장기리 윗 장터교회를 세우는데 크게 협력을 합니다. 바로 그의 아들 이영원(본래 우형 1873.8.12.-1923.11.27.)이 교회 설립 7년 만에 봉상교회 첫 번째 장로가 된 것입니다. 이영원장로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것도 큰 은혜가 됩니다.

이영원장로의 장남 년교(철환)장로(1894.7.10.-1942.3.3.)로 예수교 병원의사로 완산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부인은 최연순권사 입니다. 이철환장로의 딸이 이안례 권사로 그의 아들이 송무섭장로 입니다. 이영원장로의 차남 진교(천만)의 손자가 이선구장로입니다. 3남 환교(화평)의 부인이 진오덕권사로 18세 때부터 전도사로 활동하였었습니다. 4남 훈교(일평)는 봉상교회 장로가 되었고 부인은 전순선권사이며 아들 이전식 역시 현재 봉상교회 장로로 시무하고 있으니 봉상 교회를 3대에 걸쳐 장로로 섬기고 있으니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업을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봉상교회에 또한 가문을 소개합니다. 오창수 장로의 가문입니다. 봉상은 옛날부터 생강의 주산지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봉상주민들이 생강을 짊어지고 전국 각질 다니면서 팔았습니다. 1915년 황해도 장연지방 어는 마을에서 그곳 주민들이 생강을 팔러온 봉상 사람들을 집단으로 폭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의협심이 남다른 오창수가 그곳 사람들을 제압하고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가”하며 일장 연설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선교활동 하던 선교사가 일한 오창수를 만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끝에 오창수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오창수는 기독교를 통하여 민족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봉동으로 내려와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서 오기영 오준영 오영 세 아들 중 두 분이 목사가 되고 전주성암교회 장로로 봉직하였으며 5명의 딸들도 목사 부인이나 장로의 부인으로 권사로 봉사함으로 믿음의 기업을 이어갔습니다. 아마도 3대 장로의 가문으로, 1931년 3월 13일 장로가 된 오창수장로의 장남 오기영장로, 오기영장로의 장남 오정식장로로 장로가 장남으로 계속 이어지는 예는 한국교회역사에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습니다. 오창수 장로는 민족의식이 뚜렷하여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하였지만 오장로는 반대하여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오기영장로는 1914년 5월20일 태어나 1926년 멕커첸 선교사로부터 학습과 세례를 받고 1941년 7월30일 장로로 피택이 됩니다.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의 지역간부로 활동한 사실로 6.25전쟁 시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공산군들이 철수하며 전주형무소를 불태워 많은 수감자들이 세상을 떠났으나 오기영장로가 있던 방은 불에 타지를 않아 살아나올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 살아나가면 목사가 되어 교회를 죽도록 섬기게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53세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1965년 5월 18일 고향교회인 봉상교회 목사가 됩니다. 그러나 1966년 11월 5일 병환으로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1908년 고산면 소룡리 소룡교회가 영흥학교를 세웠습니다. 이는 이곳에 오경수란 분이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주 예수병원을 방문한 이후 기독교를 영접한 후 메케첸 선교사와 함께 서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이곳에 기독교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 여건이 좋지 않아 1910년 봉강교회로 영흥학교를 이전하였습니다.(봉상교회100년사론341-342) 메커첸선교사와 김성식목사 이영원장로 한경문장로 등에 의해 학교는 크게 발전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히 김성식목사의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학생들 중 정희일 학생은 상해로 건너가 광복군이 되었고, 김병학 정동찬 노순석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3.1운동 때에 봉동 장터 만세 운동의 부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후 신사참배를 반대하므로 일제는 1942년 학교를 패교 시켰습니다.

 

 

 

봉동에서 화산으로 넘어가 운산리 밀파마을에 가면 운산교회가 있습니다. 1896년에 세워졌으니 전락북도에서는 군산교회 전주 은송리교회 다음으로 세워진 오랜된 교회입니다. 1896년 4월 10일 운산 병암에서 4명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20년 5월 10일 밀파리로 교회를 이전하여 기도식과 함께 김운식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밀파교회로 불려 졌습니다. 김운식은 후에 운산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6.25전쟁당시 교회가 전소되어 교회 역사자료들이 소실되어 자세한 교회 초기 역사를 알길이 없습니다. 1980년 3월 8일 미파교회를 운산교회로 개칭을 하고 누하로 이전하여 이호성씨의 임야에 32평 교회 건축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이영설 김경철 원로장로

와 이영휘 공병철 시무장로와 함께 송기정목사에 의해 아름답게 교회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1904년 5월 멕커첸선교사는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 강원겨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원암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06년 4월에 초가 4칸 예배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930년 강민석이 장로로 임직을 하며 교회가 크게 발전을 하였습니다. 1932년 3월 15일 해월면 38-2 18평 교회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습니다. 1950년 12월 22일 정동호영수와 성찬수씨가 순교를 하고 인민군의 방화로 교회가 반이나 소실을 하였습니다.

 

소농마을의 한자 표기는 ‘소룡리(巢龍里)’이나 지금은 쉬운 발음 ‘소농’이라 합니다. 또 수원이 좋고 수렁이 많아 “수렁골”이라고도 합니다. 마을 앞 고목 나무가 일품이며 곁에 정자까지 세워 풍치를 더해 주고있습니다. 이 소농마을에 들어서면서 어떻게 이 골짜기까지 메커첸 선교사가 오게 되었는가 의아할 정도로 숨겨진 마을 같았습니다.

1905년 멕커첸선교사는 삼례제일교회와 제내교회를 설립하고 고산면 소룡리로 들어와 소룡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36)에 보면 마로덕 선교사의 전도로 (또는 오경묵 1867.8.7.-1946.2.5.)가 믿게 되었고 그 후 10여인이 동시에 믿어 8간 예배당을 신축하여 교회가 계속 부흥하게 되자 고산읍과 율곡리에 두 교회를 분리하였고 후에 을 장로로 장립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오경수는 1874년 무과에 합격하여 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장 자헌대부 지충주보사를 지낸 오도연(1824-1888)의 3형제죽 셋째아들로 당당한 양반집 아들이 외국인 선교사와 어울리고 소농교회를 나가니 주변사람들의 야유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 고산 화산의 유학자들은 위세가 대단하였습니다. “양이 보았는가?” “양이가 무엇인디?” “색목인(色目人) 양코백이 말이야” “양코배기가 뭐어지?” “아, 서양 놈도 몰라아?” “서양놈? 어디에 있간디..” “오야소(吳耶蘇) 집에 가 보랑께.” “오야소는 또 누구디여?” “오야소! 예수도 몰러? 상구정(삼기정) 오경목이네 말이여!”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오경수는 메커첸선교사의 도움으로 소룡학원을 설립하였는데 고산 6개면에서는 최초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이리하여 김규동 정승진은 신흥학교를 졸업했고 고산지역 신교육 제1세대입니다.

 

 

`1906년 소농교회를 다니던 장덕선이 어수리에 율곡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68)에 기록하기를 장덕수 외 여러 사람이 소룡리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리던 중 선교사 마로덕이 소룡에 와서 전도하니 수가 많아지니 신자들이 400원을 출연하여 예배당을 신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김영서 박원섭 김경보 등이 교회에 출석하여 전도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특히 김영서는 장터에서 장사를 하면서 전도를 하였고 배우면 잘 살수 있다는 확신으로 메커첸 선교사와 함께 계성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일ㅈ 말 이 학원의 고영호교사는 신사참배를 겁 함ㄴ서 학교를 이끌었습니다. 고영호교사는 기장목사가 되었습니다. 계성학원원장으로 있던 윤춘경 장로는 전주로 이전하여 전주 남문교회 장로로 시무하였습니다.

 

장인완 목사가 2006년 4월1일(토) 율곡교회 100년 기념식에서 율곡교회 백년을 축하하며 품바타령을 하였습니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율곡교회 성도님들 하늘 문으로 들어간다 부활영생 천국복음 예수 천당 믿음으로 빛과 소금을 감당터니 백년 역사가 은혜로다 우리 선열들 지킨 교회 지킨 교회 구석 구석이 눈물이요 하는 일마다 예수 흔적 고산 땅이라 율곡리 하늘 백성들 사는 곳 가난한자를 돌보고 사람 세우는 학교요 은혜위에 진리로다 얼씨구 씨 구 들어간다.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정신 실천하여 천국길로 들어간다. 품바허고 잘이헌다 ”

 

1907년 9월 18일 멕커첸선교사와 오경수에 의해서 화산에 종리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종리교회에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주에 사는 이거두리(李普漢; 족보 기록 聖漢, 1872-1931)라는 사람이 서문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종리에 살고 있는 아버지 친구 이돈수 진사를 전도할 목적으로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를 하였습니다. 이돈수는 처음엔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나가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이거두리가 이돈수를 모시러 집에 갔더니, 고산군 운동하면(지금의 경천면) 화암사에 놀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거두리는 전주에서 80리 길을 달려 화암사로 찾아갔습니다. 이 진사는 약속을 잊은 채 태연히 쉬고 있었습니다. 이돈수는 놀라는 한편 찾아 온 뜻을 이야기 하는 이거두리에게 '눈이 많이 쌓여 가기 어렵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거두리는 ‘제가 눈을 쓸겠으니 거기까지 만이라도 갑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돈수는 '그러자'고 해 놓고 속으로 '니가 어디가지 쓸겠나?' 하며 이 진사는 이미 약속한 일인지라 체면상 몸을 일으켰습니다. 절 마당을 나서자마자 이거두리가 앞을 쓸고 이돈수는 뒤를 따르는데, 10미터, 50미터, 100미터를 내려와 결국 산 아랫마을 싱그랭이에서 가천, 경천, 길마재, 아래용동리, 용수마을, 굴앞들을 거쳐 종리교회(기록에는 화산)에 닿았습니다. 이돈수는 이거두리의 적극적인 권유를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이리하여 이돈수 진사는 '종리교회'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서문교회에 열심히 나갔고 장로가 되었으며, 927년 1월 10일 완산교회가 분립했을 때는 그곳으로 따라갔습니다.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발원하여 16km를 흘러온 소양천이 만경강과 만나는 곳에 회포대교가 놓여 있고 그 아래 강태공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대붕의 꿈을 꾸며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소양천을 옆으로 끼고 논밭을 뒤로 길게 자리 잡은 송전리 신기마을이 있습니다.

 

100년 전 이 마을에 멕커첸 선교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복음의 낚시대로 수많은 영혼들을 망국의 설음에 빠져 있는 영혼들을 건저 올리니 1912년 12월 5일 초포면 상운리 699번지(신기마을) 초가삼간 집에서 송전교회가 설립됩니다.

당시 송순자 신복수 정영임 유성녀 이종록이 첫 세례교인이 됩니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11월 5일 교회당을 강제 철거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철거 후에도 10여명이 삼례면 수계리 모래거리 현 덕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 오다가 해방 후 18평의 교회를 재건축하고 송전교회의 복음의 문이 다시 열려 마을 복음화에 힘을 쓰니 “예수마을”로 불려지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대 초 신앙 로선의 문제로 송전교회는 호성교회와 호성제일교회로 나누어져 오늘날 까지 서로 부흥 성장하여 왔습니다. 지난 2012년 12월 1일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호성제일교회에서는 최초의 성도 신복수 유성녀의 후손인 이선근목사와 송순자 이종록 정영임의 후손인 이광주 집사등에게 기념패와 추념패가 주어졌습니다.

 

한일 장신대학교가 있는 완주군 상관면 신리에 1906년 12월 7일 메커첸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이 춘경씨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신리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묵묵히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여 오늘도 신리의 등대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완주군 상관면 의암리 저주지 옆으로 749번 도로를 따라 가면 계월교회에 오게 됩니다. 1907년 7월 28일 메커첸 선교사와 김병언(1884.6.18.-1974.7.11.음), 정창열, 조성국 등에 의하여 시작되어 그 후 17명의 교인이 28원을 모아 초가4칸을 지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계월교회 원로장로이고 원관대학명예교수(행정학전공)인 김귀곤 박사에 의하면, 김병언 장로가 예수를 영접하게 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해 주었습니다.

호남정맥상의 만덕산(761.8m)에서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산줄기가 정치를 지나 솟구쳐 올린 산이 있는데 묵방산(538m)이 있습니다. 1906년 여름 22세 청년 김봉언은 친구 정창열, 조성국과 함께 묵방산 자락 숯재 기슭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피곤도 하고 잠시 간식을 나누고자 할 때 한 외국인을 만나게 됩니다. 매커첸 선교사였습니다. 그도 사냥하러 이곳에 온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떠듬거리는 한국말이지만 김봉언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맥커첸 선교사는 빵을, 김봉언은 인절미 찹쌀떡을 서로 나누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헤어질 때 김병언은 맥커첸 선교사에게 자기가 잡은 꿩 한 마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김병언의 아버지가 더위로 고생하여 40리 떨어진 전주 장날에 약전거리에서 한약 한재를 사가지고 장날 기분도 좋아 주변에서 막거리를 마시니 잔뜩 취한 채 비틀거리며 노두랑 길을 걸어오다가 그만 논두락 밑으로 떨어져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날 밤 메커첸 선교사가 밤 예배를 마치고 등불을 켜 들고 그 논두랑 길을 오다가 논바닥에서 무엇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가까이 가서 보니 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데 그의 두루마기 사이로 담뱃대 곰방대 놋쇠가 불빛에 반작거렸던 것입니다. 급히 그를 예수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난 김병원이 자기를 데려온 사람이 얼마 전 묵방산에서 만난 그 서양 선교사인줄 알아보고 또 메커첸 선교사도 그를 보고 한편으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김병원은 자기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메커첸 선교사를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하여 큰 대접을 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멕커첸 선교사는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요청을 하여 사랑방으로 건너가 다른 사람들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계월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 번 김병언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사랑방에 술과 담배의 찌든 냄새가 너무 나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정창열 집으로 옮겨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산에서 소나무 잦 나무를 베워 와서 초가 4칸을 지어 예배당으로 삼았습니다. 김병언은 술은 끊었으나 담배를 못 끊고 있다가 담뱃대 3개를 부러뜨리고야 완전히 담배를 끊었습니다. 김병언은 세례를 받고 교회영수가 되고 계월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김봉언장로는 지역 삼일운동에 앞장을 서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교회 내에 영신학원을 운영하여 문맹퇴치에 힘썼습니다. 슬하의 1남 8년 모두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그리고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한예정성경학교(1923년9월 4일 설립)를 졸업시켰습니다. 자손들 모두 목사와 목사사모 장로 권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김병언 장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영혼과 그 가정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한 치의 예외도 없이 꼭 들어맞게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계월교회에 유독 눈에 띄는 종이 있습니다. 1925년에 제작이 되었습니다. 1936년 8월 초순경부터 비가 내리다가 8월 14일 밤 11시부터 새벽 3시경까지 187mm의 집중홍우가 내리니 종각이 무너지고 종이 유실되었습니다. 그후 종을 찾지를 못하다가 1944년 김봉언 장로가 전주천 상류 수원지 근원인 상관천 내 바닥을 후벼가면서 도랑을 치다가 내 바닥 모래에 묻혀있는 종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밥그릇 숟가락 등 모든 쇠붙이를 다 공출해 가는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해 그대로 개울에 묻어 두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종각을 지어 종을 울렸다고 합니다. 1967년 9월 5일 제53회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전주 완산교회에서 있었는데 개회 기념으로 계월교회 종을 빌려다가 타종을 하였다고 합니다.

고 김봉언 장로의 화강석 십자가 비문에 “한 가정의 선도자 지역사회의 선각자 인류문화 발전의 선구자 그 밝은 빛으로 비취리라”라 하였습니다. 이는 김봉언장로의 아호가 일광(一光)이기도 하지만 그의 일평생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복음의 길을 걸었던 그에게 합당한 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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