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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 남도행전(남원 임실 오수지역 계속)

 

 

만일 서울 사람이 호남 여행을 계획한다면 꼭 찾아가야할 곳이 바로 남원시입니다. 그야말로 산천이 수려하고 인심이 후덕하며 전설들이 다닥다닥 열려 있고 볼거리가 가득한 남원, 미인들의 도시요 국악의 도시요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요천 도심지를 관통하여 섬진강에 유입되는 대 분지의 생태도시가 바로 남원시입니다. 아마도 남원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춘향이와 이몽룡의 로맨스가 꽃피어 있는 광한루원을 제일 먼저 가 보게 될 것입니다. 광한루원 입구 청허부(淸虛府)란 멋진 현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옥한상제가 사는 달나라 옥경인 광한청허부에 들어가는 문이라 하여 청허부라 하였다고 합니다. 마당에 들어서면 450여년 이상된 팽나무가 그 수령을 자랑하듯 널직히 가지들을 뻣어 방문한 귀객들을 환양하듯 합니다. 광한루원은 1469년 유배되어 온 황희가 처음으로 광한루를 지었으며 충청 경상 전라 순찰사였던 정인지가 광한 청허부라 이름지었습니다. 또 선조 임금 때에 관찰사 허균이 광한루 앞 요천의 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반월경 교각으로 된 오작교를 놓으니 누구가 춘향전의 로맨스가 싹트는 이야기를 지었습니다.

초기 선교시대 이곳에서 전도하던 한 한국인 전도자에게 누가 묻기를 “예수쟁이들이 항상 할렐루야를 말하는데 그 할렐루야가 무슨 뜻이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직 그 뜻을 알지 못한 전도자가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말할 것 같으면 예수님은 신랑 같고 우리 교인들은 신부 같다고 하였드라요 남원의 광한루에서 춘향이와 이몽령이 만나듯, 우리 교인들이 죽어불어 천국에 올라가면 천국에 할렐루라는 정자가 있는데 거기서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되는 우리들이 만나게 될거라요. 거기서 영원히 사랑을 속살일 거라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천국 할렐루에서 신랑예수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 좋아 할렐루야라고 외친다 이거라요.”

누가 우스게 이야기를 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1904년 남원 사람들은 이 신랑예수를 광한루에서가 아니라 남원 장터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고창 흥덕에서 온 조원집이란 사람이 딸 둘과 아내와 더불어 남원 장날이면 장터 한복판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에 굶주렸던 남원 사람들이 조원집의 전도의 소리를 따라 예수를 믿기 시작하니 얼마 후 100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원집은 자신이 상놈이였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에 남원의 양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조원집의 전도를 훼방하고 남원에서 쫒아내었습니다. 조원집은 남원을 떠나 금지면 창산리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을 언 땅을 뚫고 나오듯 자라게 되었으니 남원제일교회 연역에, 1905년 최극제라는 청년을 중심으로 남원읍교회가 다시 형성이 되었습니다. 3월 10일 최극제는 여러 교인들과 함께 힘을 모아 동충리(144)에 초가 4칸을 250원에 매입하여 교회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두예방 주사를 처음으로 주사하니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을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해 8월엔 니스벳선교사가 원입 문답하여 40명을 원입 시키였습니다. 그러나 1952년 남원읍교회에서 분립된 동북교회의 남원읍교회 역사에는 좀 다르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1908년 테이트선교사와 윤식명 박창욱 전도자가 남원에 처음으로 전도하였으나 교인이 없었고 조원집이 광한루에서 전도하니 신도수가 10여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909년 3월 추재원씨 댁에서 첫 예배 처소를 마련하였고 동년 5월ㅇ[ 동충리 144번지 예배당을 창설하였는데 테이트선교사와 조원집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남원제일교회역사에서는 1905년 9월 박윤근 오덕홍 두 강사를 초빙하여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다고 하였는데(호남기독교100년사 361쪽), 그런데 동북교회 연표에 의하며 1909년 9월이라고 소개 하였으니 어떤 연대가 맞는지 알수 없습니다.

 

장로교 史記에 의하면(259쪽)

“1908년 南原郡邑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臨陂居 信者 趙元集이 同地에 移駐한 後 熱心傳道하야 信者가 稍進함으로 禮拜堂을 新築하니라.”

고 되어있어 역사의 사실을 더욱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남원제일교회 연표에 의하면 1906년 니스벳 선교사에 의해 30여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1908년엔 윤성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윤성만은 1888년 1월 5일 곡성에서 출생하여 1907년부터 남원읍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1907년 10월 이자익 목사로부터 학습을 받고 1908년 니스벳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여 1935년에 장로로 장립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단단한 신임을 받아 20년간 지리산 선교사 수련원의 관리 책임자로 근무를 하고 1975년 10월 30일 87세 소천하였습니다.

 

윤성만 장로가 관리책임자로 있던 지리산 선교사 수련원에 대해 잠간 소개하려 합니다.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되어 온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에 매진하다 보니 몸이 허약해지고 각종 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온다습한 호남의 기후와 이질과 장티부스 등 풍토병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지며 사망하는 이들이 많아져 갔습니다. 이에 1921년 순천선교부의 유진 벨 선교사가 제안을 하고 크레인(Crane Janet 한국명 구자례1916년부터 1954년까지 활동. 동생 Crane John Curtis 한국면 구례인은 1913년에 내한하여 1956년까지 활동하였는데 특히 총회신학교 교수로 수많은 신학서적과 논문들을 발표하여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선교사와 프레스톤(J F Preston 한국명 변요한 1903년부터 1940년까지 활동 크레인과 순천 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선교사가 동경재국대학에 요청하여 매년 임대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지리산 노고단 정상 바로 밑 대피소 인근에 휴양소를 건립하였습니다. 건문 50여채 와 50여명의 직원들이 있는 수양관에 호남 선교사들 뿐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심지어 중국과 일본에서 까지 선교사들이 찾아와 선교활동으로 시달렸던 몸을 쉬면서 치료도 받고 영적으로 재충전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한글성경번역과 성경공부 교재를 지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이곳에 와서 한굴 교육도 받고 한국 선교에 대한 정보를 성로 나눔으로 그야말로 한국 선교의 정책의 산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신사참배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경찰은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수양관을 패쇠시켜 버렸습니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14연대 사건(일명여순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의 거점으로 활용하던 것을 국군토벌대가 점령하였고 6.25 전쟁 시에는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 노고단 밑의 수양관들을 모두 태워 버려 지금은 무너진 건물 몇 개의 벽과 굴뚝만이 우거진 숲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후1961년 왕시루봉 아래 휴 린튼 선교사가 12채의 선교사 수양관을 지었습니다. 수양관이라 하지만 오두막집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도 휴 린튼선교사가 1984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방치되어 지금은 가끔 등산객들이 들여다볼 정도입니다. 현재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이사장: 안금남목사)이 결성되어 선교사 수양관 보존 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만 지리산환경을 훼손하다는 이유로 여러 사회단체 환경단체가 반대하고 있어 보존운동이 지지부진한 상태로 있습니다.

 

남원읍교회에 새로운 지도자가 오게 되었으니 황인원이란 사람입니다. 황인원은 상업차 청주에 갔다가 복음을 듣고 청주교회에서 밀러선교사(Miller Frederik Scheiblin1866-1937 한국명 민로아 1892년 11월 15일 북장로교선교사로 내한하여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많은 성경주석책과 신앙서적을 번역 출간하였다. 특히 1925년 처음으로 만국쥬일공과창년부를 발간하였다)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을 떠난지 8년 만인 1909년 6월 남원에 돌아왔습니다. 황인원은 1910년 남원읍교회 영수가 되고 박관보 집사 김숙국 매서인의 열심히 교회가 더욱 부흥하였습니다.

 

1919년에 황인원 영수가 소천하게 되자 최극재가 영수가 되고 1921년 11월 26일 장로가 됩니다. 최극재 장로에 대해 좀더 살펴볼 것은 그는 참다운 애국자였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발간하는 황성신문의 애독자인 최극재는 서울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전주에 내려와 서문 교회 김인건 목사를 찾아가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소식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4월 3일 덕과면 신양리 뒷산 복숭아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날 마침내 1919년 4월 4일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사람들을 북시장에 집합시켰습니다. 한 2000여명이 모였습니다. 한길이 넘는 푸른 대나무에 계양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면 온 시가지를 행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날 이범기는 이날이 식목기념일이라 사방공사 한다고 면민 800여명을 모아 괭이와 삽을 든 채 시위에 참여 하였습니다. 온 남원에 만세와 시민들의 환호성으로 진동하였습니다. 일경은 무차별 사격을 하여 8명이 죽었는데 소금장수 일가의 죽음은 참으로 애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금장수 방진형(方鎭炯 당 57세)이 총격에 죽으니 그의 부인이 빨래 방망이를 들고 달려 나와 왜경을 나타하여 붙잡히니 작은 칼을 품에서 꺼내 가슴을 찔러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칠순 노모가 “하나님 이게 왠일입니까? 을; 동포여 어서 독립을 회복하여 내 아들 며느리의 원수를 갚아주오” 통곡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일경은 이 만세운동의 진원지인 북시장을 패쇠시켜 버렸습니다.(현재 북시장터는 도립병원 뒤뜰입니다. 1969년 3월 1일 동아일보 11면)

 

일경에 체포된 최극재는 감옥에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간수에게 수없이 많은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최극재는 남원읍 교회 내에 야학을 설립하여 10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공부도 하고 시국에 대한 토론도 하며 신앙애국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일생동안 하루 두 끼만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잔치 집에 초대받아도 점식은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여수지방에서 노동을 하며 자식들의 끼니를 생각하여 점슴을 먹지 않고 노동을 하였는데 최극재도 아버지의 이런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굶으며 일을 하시는데 자식이 어찌 점심을 먹겠느냐하면서 점심을 건너 띠었는데 후에는 가난한 동족들을 생각하며 평생 하루 두 끼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의 인격을 존경한 남원 사람들이 더욱 교회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가 105세가 되어 신문기자가 와서 인터부하기를 어떻게 일허게 장수가게 되셨습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일평생 주가지 약만 먹었습니다. 하나는 구약이고 또 하나는 신약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신사참배의 문재로 평양신학교가 휴학에 들어가자 한국인의 손으로 운영되는 신학교의 설립과 교역자 양성중단을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1940년 조선 신학교가 개교를 하게 됩니다. 이는 선교사 중심의 근본주의 보수주의 신학이 물러감으로 진보적인 신학으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신진 신학자들인 김재준 송찬근 윤인구등이 중심으로 세워진 신학교 였습니다. 그리고 이러서 한국교회에 보수와 진보의 대립 갈등이 시작되었고 한국교회 분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국토가 분단됨으로 평양신학교가 사라짐으로 조선 신학교는 장로교 총회가 인준한 유일한 신학교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교수들이 진보적 신학관을 가진 만큼 장로교 정통을 고수하는 목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47년 조선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51명이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일동” 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장로교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이들은 정규오, 한남석, 이노수, 손치호 등이었습니다. 총회는 8인의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조사하게 했고, 김재준 교수에게는 진술서를 제출하도록 하여 그의 성경관과 교리문제에 대한 진술서를 제출토록 하였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김재준의 성경관은 파괴적 고등비평의 성경관이고, 교리문제에 대한 그의 변명은 진보적 신학의 교리관이라 비판하였습니다. 1950년에 제36회 총회에서 새로운 총회직영 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조선신학교의 인준을 취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신학교 측은 강하게 반대하였고, 1952년 4월 제 37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제명하고 조선신학교 학생은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결의하였습니다. 1953년 6월 제 38회 총회에서 다시 확정을 하자 결국 조선신학교지지 교역자와 교회들은 그해에 교회 분립을 결정하고 1954년 6월 새로운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후에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바뀜)“로 정였습니다. 결국 조선신학교는 1953년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별도의 총회를 조직하였다. 기독교장로회를 출발하였습니다.

 

남원읍교회 당시 장도원 목사와 최극재 장로가 기독교 장로회 노선을 따르게 되자 이에 반대한 윤성만 장로는 63명의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1952년 9월 7일 하퍼(Hopper Joseph Barron 한국명 조요섭 1948년 내한하여 1983년까지 선교활동. 아버지 Hopper Joseph 선교사도 1919년 내한하여 1957년 까지 활동한 우리가 꼭 기억할 선교사 가족입니다.)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남원 제재소를 임대 받아 동북교회를 설립하여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1954년 4월 동북교회 학생회가 발간한 “좁은문”이란 신앙책자에 교회가 나누어지는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런 글을 발표하였습니다.(5쪽) “1952년 7월 7일 산탄이 시험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알수 없는 예수교 장로회가 가진 교리가 있는데 생각조차 하지 않은 신학사조로 성경관이 문제가 되어 예수교 장로교가 대 혼란기에 이르게 되매 따라서 남원읍 교회도 교인이 이대 사상으로 분열이 생기자 윤성만 장로를 위시하여 정통신앙을 가진 보수파는 남원읍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서”...

그리고 1953년 9월에는 유현식과 여선교회 회장 등이 나와 현재 남원중앙교회(순복음)를 설립하여 남원읍교회는 1978년 남원제일교회로 개명함으로 세 교회로 분립하게 되었습니다.

 

 

1915년 10월 5일 남원읍교회를 다니던 윤정현이 운봉읍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윤종현은 남원읍교회 조사로 있으면서 윤봉길의사의 독립운동에 후원금을 보낸 기록이 김구선생의 서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운봉은 신라시대 모산성이라 불렸는데 757년경덕왕 16년 운봉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구름이 드려진 모습이 장관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동쪽에는 덕두산(1150m) 비대봉(1165m) 세걸산(1207m) 서쪽에는 고남산(846m) 여원치(410m)가 둘러쳐저 있어 많은 백두대간 등반객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는 마을입니다.운봉은 곡성을 지나 광주로 가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려 우왕6년(1380년)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성계 장군이 운봉 고남산에 석탑제단을 쌓고 필승 산신재를 지내 지금도 그 흔적을 볼수 있는데 운정현은 이곳에 민족의 독립을 위한 기도의 제단으로 운봉교회와 매요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1916년 윈(Winn Samuel Dwight 한국명 위인사 1911년부터 51년까지 선교활동)선교사의 집례로 운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대리회에서는 1910년 전후하여 고부 서북 흥덕 부안남편 태인북편 금구남편 임실 남원 운봉등교회가 서게 되었고 니스벳선교사에게 맡겼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윤정현장로에 대해 좀 더 소개하겠습니다. 윤종현 장로는 1890년 3월 15일 아버지 윤상은 어머니 김성녀의 2남 2녀중 장남으로 운봉읍 학수리 421-2번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6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부친도 병으로 고생하고 있던중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동생 윤지현과 함께 고무총을 만들어 매일 같이 까마귀 잡으로 산으로 들로 다녔습니다. 어느 날 세걸산 자락에 기거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선교사는 예수를 믿으면 까마귀를 잡아주겠다고 하니 너무 기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 때가 25세 때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자 술과 담배를 끊고 제사 때는 문중의 장손인데도 불구하고 추도식으로 거행하니 문중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문중 어른들은 멍석말이로 징계해야 한다고 하며 분노가 들끓었습니다. 그러나 유농현은 개의치 않고 술 대신 식혜로 집안의 대소사를 거행하는 등 독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1915년 운봉교회 영수로 그리고 1942년엔 운봉교회 초대 장로로 교회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앞에서도 잠시 소개한바 대로 정기적으로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하고 일본 형사들에게 쫒겨 다니는 독립군들을 은밀히 숨겨 주고 의복과 음식 그리고 여비를 제공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삼일만세 운동에도 참가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1년 6개월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신사참배도 거부하여 그때마다 2.3일씩 구치소에 구금되거나, 가을 수확의 공출을 거부하여 일본 경찰의 핍박이 극심하였습니다. 윤정현 장로는 일본경찰을 피하여 지리산 중턱 운봉읍 화수리 외딴 곳에 마치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였던 펠라 같이 이곳에 숨어 있으면서, 계속해서 독립군 군자금을 비밀히 조달하였습니다. 6.25전쟁으로 남원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이 되면서 윤종현 장로는 반동분자 살생부에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됩니다. 본래 윤종현 장로는 앞서 부산에 있었는데 3남 윤세정이 오수 지서에 근무하던 중 순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운봉집으로 돌아옵니다. 같은 마을의 한 사람이 그를 고발하니 곧 공산군에 검거되어 8월 17일 남원 농고 뒷산 공동묘지에서 총살을 당하여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순교 전날 그를 면회 온 5남 윤정우에게 유언하기를 “나를 해친 이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용서해 주고 그들이 잘 살수 있도로 도와주고 보살펴 주고 그리고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서림정과 광한루원의 애국지사 충혼탑에 윤종현장로와 윤지현 윤세정 세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임실 지방 첫 교회는 신덕면에 세워진 삼길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수교회 100년사’(2013년 발행인 권종호목사)의 기록을 보면, 임실군 신덕면에 거주하던 외량리 마을 백운기와 방길리 마을 신성언이 사금이 많이 나오는 구사발(아홉뜸)에 살다가 사금이 많이 나온다는 금산에 갔다가 조덕삼 장로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되어 삼기리 554번지 외량리에 임실군 최초의 교회가 당시 13칸 짜리 ㄱ자 교회로 삼길리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삼길교회의 후신인 명광성결교회 연혁을 보면 금산교회를 다니던 신성언 백운기 왕순칠 집사에 의하여 그리고 왕순칠 집사가 오수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100여명 신도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물길이 오원(현 관촌)으로 흘러가다가 멈추어 버린바 되었습니다. 그후 삼길교회 역사는 알 길이 없는데 1974년 삼길교회 집사였던 최지식 임복순 경정숙 이강순 김경순 천하옥 정정숙 제씨가 서울신학대학생인 김인구 전도사와 더불어 삼길리 566번지에 교회를 건축하고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명광교회로 새 출발하였습니다.

 

남원시에서 북서쪽으로 15km지점에 덕과면이 있습니다. 덕과는 국도 17호선(여수-청주)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국도 14호선이오수와 이어져 있는 남원시의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지역에서 나는 맞좋고 질좋은 황금배가 남원시장의 70%를 점하고 있습니다.

 

덕과면 수천마을 가끔 선교사들이 말을 타고와 복음을 전하곤 하였습니다. 이때 7인이 복음을 받아 들여 첫 세례교인이 되고 그뒤 고정마을 뒷 동네에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1906년 4월 5일이였습니다. 임실군 신평면에 살던 김석조가 선교사의 조사가되어 덕과 고정교회의 전도가역을 담당하였습니다. 1934년 12월에는 고정교회를 다니던 덕과 옆 동리인 보절면 황벌리교인들과 함께 도룡리 용동에 황벌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의 영수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석조는 고정교회의 영수로 활동하다가 초대 장로가 됩니다. 현재 김석조장로의 막내 아들 김명수(77세)씨가 덕과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오수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덕과교회에 고개를 넘어 참여하던 성도들 10여명이 주일 밤과 삼일밤에는 금암리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1913년 5월 21일 금암리 367번지 김경추 성도의 사랑방에서 주일 낮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날의 오수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인으로 김경추 내외, 김홍식 내외, 김종인 부모, 박응원, 김대현 등입니다. 교회의 교인들은 당시 금암리와 하신촌(남산동) 마을 주민들이 중심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전주 선교부에서는 윈 선교사를 보내어 교회를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909년 임실군 응암리교회 남원군 신풍리교회 임실군 고하리교회가 설립되었고 1910년에 임실군 선거리교회가 세워졌다고 하였는데 지금 그 자취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제주선교 기록에 의하면 선거리 교회의 이춘교(31세)라는 성도가 기독신보를 읽고 감동이 되어 지금까지 땀 흘려 일해서 마련한 논 2마지기와 밭 1마지기 그리고 가재도구를 팔아 46원을 마련하여 20원은 중국선교를 위하여 남은 20원은 제주 선교 헌금으로 그리고 6원은 선교 진흥회로 송금하고 자기 자신은 아무 재산 없이 셋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초대 교회 신실한 성도들의 헌신이 오늘 우리들에게 엄청난 믿음의 유산으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려시대 김개인이란 사람이 개 한 마리를 애지중지 하며 마치 아들같이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어느 해 봄날 김개인이 잔뜩 술에 취해 집으로 오다가 그만 산길 가 풀밭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산불이 일어나 김개인이 자고 있는 곳 까지 번져오자 주인의 위험을 알게 된 개는 가까운 냇가에 달려가 몸을 적신 후 주인이 자고 있는 주변 풀밭에 뒹굴어 물을 적시었습니다. 수없이 몸을 물로 적시어 풀밭에 뒹굴다가 지쳐 죽었습니다. 불은 결국 물에 적셔진 풀을 태우지 못하고 꺼졌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김개인은 전후 사정을 알게 되자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 개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습니다. 얼마 후 이 지팡이에 싹이 돋아나더니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개오 獒자에 나무 수樹자를 써서 오수라 부르니 마을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인에게 충성된 개의 전설이 있는 이 마음에 하나님께 진실한 성도들이 모여 교회를 세우니 바로 오수 교회입니다.

1917년 금암리 김경추의 사랑방에서 오수 소재지인 동후리 432번지(구 오수의원 뒷터)에 위치한 잠실을 매입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김성도 조사가 주로 예배를 인도하고 남원읍교회 영수인 최극재와 덕과교회 영수인 윤성만의 협조로 교회가 점점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25년 오수 교회 첫 장로로 장립된 왕순칠 장로와 동생 왕창순이 금산교회를 다니다 오수로 이사와 처음에는 신덕면 삼길교회를 섬기다가 오수교회를 나옴으로 교회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1932년 12월 오수리 390번지 90평 대지위에 38평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왕순칠 장로의 헌신적인 기도와 상당한 헌금으로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33년 11월 2일 44세로 왕순칠 장로는 하늘나라로 가시었습니다. 교인들은 그를 기리어 교회당 앞에 <고 왕순칠장로 기념비>를 세우고 그분의 신앙과 섬김의 믿음을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오수교회의 초기 역사를 살펴볼 때 꼭 오수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윤의(1890-1949) 장로입니다. 이윤의는 남원군 둔덕방 대정리에서 이형우의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이곳 둔덕은 전주 이씨 집성촌입니다.

둔덕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소개 하려 합니다. 이윤의는 전래의 왕가의 후손으로서 일찍이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남다르게 컸던 분입니다. 1919년 3월 10일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이 이광수 선생의 지도로 만세시위를 벌리자 이에 자극을 받은 오수 주민들과 임실 장수 순창의 일부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3월 23일 오수 장날에 원동산에 모여 만세를 부른 것이 오수면 만세 운동입니다. 이때에 이윤의는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 등과 같이 만세운동에 앞장을 섰습니다. 이때 이기송이 단상에 올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연설을 한 뒤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돌면서 만세를 하니 수천 명의 만세소리가 오수읍내에 가득하였습니다. 일본 헌병이 이기송을 압송하니 성난 군중들이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기송과 구속된 사람들을 구출하고 주재소 순사들을 무장해제 시키며 일본의 상점들을 파괴하였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남원과 임실의 헌병들이 달려와 무차별총격을 가하여 허 박 외 여러 명이 죽고 부상자들이 발생하였으며 이기송 이윤의 오병용 등이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아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감옥소에 대구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이만집 목사와 여러 교인들이 수감되었습니다. 아직 이윤의는 예수를 모르던 때였지만 이만집 목사가 들려주는 설교 말씀에 큰 깨달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애국애족 동지들이여, 지금 우리에게 놓인 이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 지금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기 성경책이 있으니 같이 읽어봅시다.” 이만집 목사가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위로하고 기도로 용기를 주며 때때로 찬송을 불러주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에 이윤의도 감동을 받고 성경을 빌려보며 믿음을 키우게 되었으니 고통의 수감생활 3년이 끝날 때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고향 둔덕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 온 이윤의가 밥상 앞에 앉아 입으로 중얼중얼하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이상히 여기며 오랜 감옥 생활에 정신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걱정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윤의는 자기가 감옥에 있을 때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고 하나님 앞에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라 말하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윤의는 오수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을 듣고 교회로 달려 나가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려 하자 손구락을 잘라 피를 아버지 입에 흐르게 하니 잠시 숨을 쉬는 가 하시다가 다시 멈추어 다른 손구락을 비어 아버지 입속에 흘러 넣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 소문이 동리에 퍼지자 이윤의가 예수를 믿더니 효자가 되었다고 칭찬들을 하며 그동안 예수 믿는 일을 못 마땅히 여겼던 마을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되어 오수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둔덕 마을 이씨 종가에 종가집 종부인 김학정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유명하다는 의원들을 찾아다니고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였지만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입원치료도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김학정은 하나님을 믿어야 병이 고쳐진다는 말을 듣고 오수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이때에 김학정을 부축해 간 둘째 동서 최삼순과 셋째 동서 허나열도 함께 예수를 영접하니 이 때다 싶어 이윤의는 이씨 문중을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윈 선교사는 이윤의 가족들에게 학습문답을 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윤의는 1928년 오수교회 장로가 됩니다.

 

 

 

1938년 6월7일 정기 전북노회록을 보면 1937년도 각 교회 상회비 내역이 있는데 남원읍교회가 25원, 전주 서문밖교회가 60원, 진안읍교회가 13원인데 반해 오수교회가 45원을 상납하였으며, 1938년도에는 남원읍교회가 40원, 전주서문밖교회가 60원 인데 오수교회가 60원을 상납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오수교회가 시골의 교회로는 상당한 부흥을 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종교행위가 아니라며 신사참배를 결의 하자 이윤의 장로는 교회에서 신사참배는 하나님 앞에 우상을 섬기는 죄악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일제는 오수 신포산에 신사 사당을 세우고 주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윤의는 신사참배를 거절하니 임실경찰서에 여러번 구금되었습니다.

특히 처가의 친족인 산정현 교회 주기철목사의 순교와 처가의 숙부가 되는 주남선 목사가 평양의 형무소에 복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떨리는 음성으로 항복 선언을 라듸오를 통해 들은 이윤의 장로는 원동산으로 맨발로 뛰어나가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큰 환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감옥 생활을 통하여 생겨난 신경 골수염으로 고생을 하다가 1949년 5월 26일에 소천을 하니 평소 신 불신을 떠나 그를 존경하던 오수 주민들이 모두 그의 가심을 슬퍼하였습니다. 1963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정부에서는 애국지사로 대통령 표창을 수여 하였습니다, 1990년 그의 묘역에 김동길 김찬국교수님이 현대문으로 번역한 독립선언비를 건립하여 생전의 그의 애국 충정심을 후세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윤의 장로는 소병례씨와 1908년 혼인을 하였습니다. 소병례씨도 믿음이 돈독하여 교회를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1937년에는 교회 총각을 세워 오수지역에 복음의 종을 울리게 하였습니다. 그해 6월 26일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소천하였습니다. 주경선 권사는 이윤의 장로의 두 번째 부인 이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바대로 주남선 권사의 친척 가운데 주기철 목사와 삼촌인 거창교회 주남선 목사가 있습니다. 김수진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수진 목사 호남기독교 100년사 349쪽) 주경선은 190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4세 때에 거창에서 스코트(Scott Stella May 한국면:서오성 1916년부터 1939년까지 호주선교사로 주로 마산 거창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음)선교사가 “나는 지금 50세가 되었지만 섬김을 받으려고 오지 않고 남을 섬기기 위해서 왔습니다.”는 말씀을 듣고 남을 위해 사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생각하다가 혼자 몸으로 동대문 부인과병원 부속 간호양성소에 입학하게 됩니다. 거창지역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있던 아버지는 딸이 홀로 서울 가서 간호사 공부를 한다는 것에 반대를 하였지만 결국 딸의 의지를 꺽을 수 없었습니다. 3년간 간호양성소의 공부를 마치고 간호사로 일하고자 하였지만 뜻밖에 왼쪽 눈이 아파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안과수술로 완치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수술을 받았지만 오히려 의사의 실수로 실명을 하게 됩니다. 주병선은 딸의 상태에 분노하여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면서 의사를 용서해 주시라고 합니다. 주경선은 간호사 자격을 받자 함흥에 있는 지혜기독병원엣 4년간 간호사 활동을 하다가 호주 선교사로 거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딕슨(Dixon Ethel V 1913년 에서 1941년까지 활동)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거창에 내려와 그와 함께 탁아소를 운영하였습니다. 이미 혼기를 노친 주경선은 오직 이웃을 위한 봉사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중 이자익 목사가 중매를 서서 1937년 10월 16일 오수의 이윤의 장로와 혼인을 하게 되니 둔덕으로 출가하여 오게 되었습니다. 주경선이 오수교회를 나가니 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윤의 장로는 찬성하는 오수교회 목사인 박성준 목사와 갈등을 빚게 되어 둔덕교회로 옮겨 교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남편인 이윤의 장로가 소천하자 1954년 남원동북교회 전도사로 그리고 1957년에는 남원시 향교동에 김창호 집사가 설립한 양로원에서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59년에는 남원 성일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76년에는 남원 향교 동쪽에 남원영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특히 이윤의 장로가 추서 받은 애국지사 표창으로 받게 된 연금을 가난한 신학생을 돕는 장학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여러 사람들이 뜻이 모아져서 많은 신학생들이 그 도움으로 무사히 신학을 공부할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이윤의와 김학정이 살고 있는 둔덕마을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수에서 남서방향으로 해삼모양의 낮은 산이 길게 십여리 정도 독립된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지네처럼 길게 성을 만든 것같다하여 장성산(長城山)이라 부르고 장성산과 나란히 큰 시냇물이(섬진강 상류) 흐르고 냇물 양편으로는 비옥한 들녘이 있어 농경사회에서 자급자족하기에 적합한 마을입니다. 고려시대 때부터 진주하씨 남원양씨 흥성장씨 순천김씨 삭령최씨 등이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다가 조선 초기에는 효령대군의 증손인 이담손(춘성정 1490-?)이 이곳에 자리를 잠아 전주 이씨의 후손들이 번창하는 마을이 되었으니 소위 둔덕이씨라고 말합니다. 이담손은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 어머니의 폐비사건으로 사림파인 문신과 나라의 공훈이 많은 훈신간의 다툼으로 종친인 척신들이 많은 화를 입게 되자 사화를 피하여 순창으로 피신하였다가 당시 권문세가의 한사람인 김만보의 사위가 되어 처가인 둔덕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현재 종가집인 춘성정 저택이 남아 있어 지난 1977년 지방민속자료 1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담손은 둔덕팔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天皇觀月(천황관월:천황봉에 뜬 달이 한 폭의 그림 같고) 方丈需雲(방장수운:아득히 보이는 지리산 반야봉 위에 뭉게구름이 드리워졌도다) 道淵魚躍(도연어약:마을 앞 도석금 하천 패 여진 못에 고기들이 놀고 있고) 警亭鶯川(경정앵천:서도역 부근 아름드리 정자나무에는 꾀꼬리들이 날아와 노래를 부르네) 雲橋踏靑(운교답청:청명일이면 운교리 구름다리에서 다리 밟기를 하고) 楓岳落紅(풍악락홍:가을에는 단풍이 꽃잎 지듯 떨어지는데) 龍寺梵鍾(용사범종:남원 교룡산 선국사에서 새벽 종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도다)

 

만일 둔덕리를 찾아간다면 반드시 다녀 갈 곳이 있는데, 인근 서도역 부근 풍악산의 노적봉아래 소설 "혼불" 최명희(1947-1998) 작가의 종가이며 작품의 무대인 노봉마을과 혼불문학관을 가 볼 것입니다. 혼불은 작가가 17년 동안 집필한 이 지역을 배경으로 몰락해 가는 양반가의 며느리 3대 이야기를 다룬 대하소설입니다. 그런데 둔덕리 양반가의 종부인 김학정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온 이야기를 우리는 둔덕 교회에서 들을 수 있으니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양반 중의 양반인 이씨 문중의 한 사람인 이윤의가 예수를 믿고, 종가집 종부인 김학정이 예수를 믿는 일도 놀라운 일인데 그 들로 말미암 이 둔덕리에 많은 일가친족들이 오수교회를 다니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역사는 기적과 같이 이 지역에 일어난 것입니다.

 

김학정은 둔덕마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하리라는 믿음이 생겨 1933년 기도처를 마련하고 기도하던 중에 전주 서문교회의 재정 지원과 교인 20여명으로 교회를 설립하였으니 1939년 5월 8일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있었던 노회에서 정식 허락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윤의 장로의 가족도 1939년 둔덕교회로 정식 이명하여 섬기니 둔덕교회역시 크게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둔덕 교회당 앞에 <김학정집사복음선교기념비>가 세워져 김학정의 생전의 믿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호남지역교회사를 방송하는 목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라북도에서 창립 된지 백년 이상된 교회를 찾아 널리 소개하고자하는데 있으며 또 하나는 초기 선교시대에 선교사들의 선교 열정과 초창기 평신도들의 뜨거운 믿음의 섬김과 사랑의 수고가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되새기며 오늘의 교회들이 본받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비록 백년의 역사는 안 되지만 오랜 믿음의 뿌리를 가진 교회들을 지나치게 되고 자료의 미비로 초기 선교사들과 초창기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면모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임실지역의 교회들을 소개하다보니 정작 임실읍 교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소개하려고 합니다.

 

임실읍에 복음이 주변의 지역보다 다소간 늦게 전하여 진 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워낙 임실읍에 유학을 숭상하는 양반들이 많이 있을 뿐 아니라 “남원 사후 임실”이란 말이 있듯이 임실 주변에 많은 명당자리가 있어 풍수지리설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일장신대학교 배경식교수의‘임실읍과 기독교접촉’이란 글에 의하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자태를 가진 봉황산이 임실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 것이 임실고장의 상류층의 의식이었다. 이 봉황을 지키기 이하여 예부터 양반들이 두 개의 정자를 세웠는데 조양정과 운양정이다. 조양정은 봉황의 등을 눌러주고 운양정은 날개를 형상화 하였다고 한다. 동양에서 상상의 동물인 영물로 여기는 봉황을 믿는 임실 사람들은 봉황산을 바라보며 봉황산의 정기를 받는다는 신앙 속에 살아 온 것이다.”고 하여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을 꺼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환난과 핍박과 훼방이 있다하여도 복음의 물길을 막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임실읍 교회 사략에 의하면 1920년 8월 윈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였지만 정작 복음의 물길은 장현팔이란 외지인에 의해서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1920년 10월 5일 임실군 재무과에 근무하던 장현팔이 자기의 집을 기도처로 삼고 1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임실읍교회가 시작 되었습니다. 장현팔(1898-1987)은 충북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에서 출생하고 배재중학교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급 기술원 양성소를 졸업하고 전북도청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임실과 정읍등지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1949년에는 충북적십자사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1921년 3월 5일 전주 선교부는 임실읍교회의 당회장에 윈 선교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교인들은 남자 10명 여자 13명 합계 23명에 달하였습니다. 방승준 조사가 부임하여 임실읍 이도리 717번지에 초가 6칸을 예배당으로 건립하였고 1924년 6월4일에는 이태우 조사가 부임하면서 교회가 발전하여 갔습니다.

 

호남기독교100년사(김수진 353쪽)에 의하면 임실읍교회는 추은명(1878년 12월4일-1943년4월2일)의 가족이 임실로 이사 오면서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추은명의 사위인 임춘성이 임실군 군수로 오게 되자 강원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계몽운동을 하며 전도자 생활하다가 임실로 이사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위가 군수라면 상당한 친일인사인데 추은명은 독립정신이 철두철미한 애국자로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습니다. 추은명은 강원도 홍천(洪川) 사람입니다. 그는 1919년 4월 1일 강원도 홍천군 홍천면(洪川面)에서 차봉철(車奉哲)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중심적으로 참가하였습니다. 홍천 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처음부터 만세시위를 함께 계획해 갔으며, 광무황제의 인산을 다녀온 인사들에 의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게 되면서 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들은 홍천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정하고, 기독교 측에서 장일규를 비롯하여 차봉환(車奉煥) 등의 인사들이 태극기를 만들고 기독교인들을 규합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천도교측에서는 김영옥(金永玉)·노동근(盧東根) 등이 중심이 되어 북방면(北方面)의 천도교도를 동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4월 1일에 이들은 천도교측 에서 제작한 커다란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기독교 측에서 준비한 소형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5백여 명의 시위행진은 군청과 홍천면사무소를 점거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켜 갔습니다. 그런데 춘천에서 출동한 일본 수비대의 탄압에 의해 주동자 33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 때 추은명은 만세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1919년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과 12월 2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하니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결국 엄청난 매를 맞은 추은명은 거의 사경을 래매다가 1년 6개월 간의 치료 끝에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일로 인하여 추은명의 믿음은 더욱 돈독해져 갔습니다. 임실읍교회를 섬기며 오수의 이윤의 장로와 더불어 임실지역 기독교계를 지도해 나갔습니다. 1940년 3월 24일 임실읍교회 초대장로가 됩니다, 현 임실 교회당 건물이 있는 대지도 추은명 장로가 과자공장을 운영하여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일경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하곤 하였는데 정작 그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43년 4월 2일 소천하였습니다.

 

강진면 갈담리를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신라시대 왕족 박씨가 이곳에 정착함으로 왕박골 이라고도 하였는데 강진면 갈담리는 광주와 전주간의 중간 역촌 마을로 조선조에 번창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윈 선교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머물면서 오고 가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마침내 1924년 12월 15일 강선진의 집에서 윈 선교사는 강선진 남궁선 이봉의와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갈담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32년 4월에 갈담리 300번지 대지를 구입하여 예배당을 신축하며 교회가 부흥 일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9년 9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하여 일제는 윈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를 폐쇄 시켜 버렸습니다. 1949년 가을, 일부 교인들이 산업조합을 빌려 교회를 복구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1950년 봄 옛 교회 터에 새로이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특히 지나칠 수 없어 갈담교회를 소개하는 것은 고 고영근(1933년 평북 의주출생-2009년 9월6일) 목사의 기도가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고 고영근 목사의 첫 사역지로 젊은 시절의 뜨거운 신앙심이 심겨진 갈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고영근 전도사는 1958년 4월부터 1959년 10월까지 갈담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여기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고영근전도사의 첫 사역지였던 이 갈담교회는 절집을 개조하여 만든 교회당으로 사방에 뱀이 우굴 거리고 당시 교인 수는 20명도 채 안된 상황 이였습니다. 고영근 전도사는 이 갈담교회에 부임하면서 갈담리 지역사회를 바꾸는데 혼신의 힘을 다 하였습니다. 여기 저기 화투 도박판이 있어 젊은 고영근은 그 도박판을 뒤집어엎고 술에 흥청대는 사람들을 꾸짖고 마을 사람들의 생활 상태를 송두리째 뒤바꾸는 일을 목회의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생활 윤리를 강조하면서 교회와 지역사회의 일치된 사역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를 6개월이 지나자 교인수가 80명이 넘어섰고 아이들도 80명이 넘어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습니다. 당시 고영근전도사가 쓴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구사일생 살아난 몸, 주 앞에 바치려 하였더니 이제 주님이 허락하사 이 교회와 지방으로 이끌어 주시니 진실로 감사하옵니다. 주님이 내 영혼 건지시기 위하여 도성인신하사 강생하시고 수고하신 것을 기억하며, 마지막 부탁이 말씀을 전하고 내 양을 먹이라 부탁하셨으니 내 어찌 주님의 부탁을 잊어버릴 수 있사오리이까? 이제 천한 이 몸 바쳐 주의 교회를 먹이려 하옵난데 너무나 힘이 없나이다. 미약하고 추악하고 가증된 놈이 어찌 이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오리이까. 그러나 주님이시여, 내 힘을 의지하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사옵고 내 주님께서 힘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온 것 뿐 이옵니다. 힘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성신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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