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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1937년 군산이 나은 소설가로 유명한 채만식씨가 조선일보에 <탁류>라는 소설을 연재 하였습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물은 조수까지 섭슬려 더욱 흐리나 가득하니 벅차고, 강 너비가 훨씬 퍼진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 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 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에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의 탁류에서 보여준대로 호남 선교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라고 하겠습니다. 군산 옆구리를 흩으면서 바다로 흘러가는 금강의 탁류를 거슬러 복음이 군산에 흘러들어 왔습니다. 1890년대 당시의 조선의 정치가 탁류요 백성들의 마음속에 온 통 탁류가 흐르는 그때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빛을 이 땅에 비추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미 1832년 7월 25일 귀츨라프목사가 군산을 지나 금강의 물을 타고 강경까지 이르르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지만 그때는 그저 돌작 밭에 불과한 때라 아무런 싹도 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귀츨라프 목사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조선에 파송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는 예정하신 때에 푸짐한 열매를 맺으리라”

 

주님께서 예정하신 그 때가 언제인가? 그러나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하바국2:3)고 하신 말씀대로 조금은 지체되었지만 때가 이르매 그 때가 이르렀던 것입니다. 귀츨라프목사가 지나 간지 62년 그리고 언더우드 아펜셀러 목사가 처음 한국선교를 시작한지 9년이 된 1894년 3월 30일 이였습니다. 군산의 봄눈 녹은 언더바지에서 나무 케던 아낙네들이 지금 막 배에서 내리는 이상한 양복차림의 두 서양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레이놀즈(W D Reinolds 한국인 이름 이눌서)선교사와 드류(A D Drew 한국인 이름 유대모)의료선교사 였습니다. 이들은 네 명의 선원이 움직이는 목선을 세내어 약과 책 그리고 몇 가지 생필품과 함께 인천을 출발하여 200 키로미터가 떨어진 군산 까지 열하루 만에 아직은 작은 어촌인 선창에 도착을 하였던 것입니다. 선창에서 군산 땅을 바라보며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구나”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그 첫 발을 내려 땅을 밟았습니다. 어째서 이들은 이처럼 탁류가 부딪치는 낯설고 물 설은 군산 땅까지 오게 되었는가? 성령께서 가라 하시지 않았다면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이 머나먼 땅까지 올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려는 그 일념만을 흔들거리는 그 작은 목선 배를 타고 인천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호남 선교는 육로보다는 바다를 통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더욱 편리하다고 싶어 먼저 답사를 하기 위해 군산 땅을 밟게 된 것입니다.

 

레이놀즈와 드류 선교사가 군산에서 아침 9시에서 밤 10시 반까지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전하는 전도지를 잘 받았고 전하는 복음 또한 귀담아 들었습니다. 물론 영어로 말하니 한마디도 알아듣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루에 5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볼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답례로 생선 굴 미역 달걀 같은 것을 가져와 감사를 표했습니다. 몇 일을 군산에서 보낸 그들은 임피로 향해 갈 때에 사람들은 매우 호의를 가지고 그들을 따랐습니다. 이분들의 선교 일지를 보면 임피에서 하룻밤을 묶었는데 빈대와 벼룩들이 어찌나 달려드는지 한 잠도 못 잤다고 합니다. 다음날 일찍이 전주로 향해 떠나 마침내 전주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은송리에 거처를 잡았습니다. 그곳에는 레이놀즈의 한국어 통역을 맡은 정해원이란 사람이 이미 2월 달에 내려와 작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주에는 서양인에 대한 반감이 드샌 곳이라 전주성내로는 서양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성 밖 은송리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4월 9일부터 두 선교사는 다시 김제 금구 태인 정읍 흥덕 줄포 곰소로 선교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다시 16일 부터는 영덕 함평 무안 목포까지 내려갔고 해남 우수영 진도 고흥 녹동 벌교를 지나 30일에는 순천으로 그리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대 선교 장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선을 타고 인천으로 서울로 돌아오니 5월 12일이였습니다. 드류선교사는 오랫동안 육로의 험한 길을 걷다보니 발에 물집이 생겨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전도를 하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물집 잡힌 발의 아픔은 느낄수 없을 전도로 기쁨이 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교 여행을 마치고 드류 선교사는 서울 선교회의에서 호남 선교부로 가장 합당한 장소는 군산으로, 군산에 호남 선교부를 세우자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땅 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되라 하셨는데 바야흐로 아시아의 끝 나라 우리나라에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 점찍어 두셨던 군산 땅에 호남 선교부가 세워져 바야흐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그 아름다운 성령의 계절이 이제야 막 시작되게 되었으니 여기에 기막힌 하나님의 섭리가 계획되고 있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다음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1893년 1월 28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빈톤(C C Vinton)의 서울 집에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회 미슌 공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며 보다 효과적으로 한국 선교를 잘 할 수 있을까 논의 한 이 회의에서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선교정책으로 공식 채택을 하였습니다. 네비우스(John Nevius)는 1890년부터 중국 지푸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서울에 와서 선교방법의 원칙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선교 방법가운데 다른 교회나 단체와 서로 선교의 협력과 일치의 노력은 하지만 서로 선교지역을 분할하여 서로 절대 간섭을 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하였습니다. 단 5000명 이상 되는 도시나 개항장은 공동으로 선교할 수 있지만 그 이하 되는 지역은 한 선교부가 맡아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라도 지방과 충청도 일부 지방은 미국 남 장로회가, 평안도 경상북도 황해도 충청북도 그리고 서울은 미국 북 장로회가, 함경도는 카나다 장로회가, 경상남도는 호주 장로회, 경기도와 강원도는 미국 남 감리회가, 충청남도와 서울 일부는 미국 북 감리회가 맡아 선교하도록 하였던 것 입니다. 이와 같은 선교지역을 각 선교회가 분할함으로서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고 각 선교회가 독립적으로 집중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함으로 보다 빠른 시일 내 선교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교정책은 교파의 난립과 지역 간의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도 제공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선교사들이 하나 되어 하나의 한국교회를 이루었다면 더욱 좋을 뻔하였다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사실 선교지역을 돌아 본 레이놀즈 선교사가 그런 주장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리해서 호남지역 선교는 미국의 남 장로회 선교사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남 장로회 선교사들이 남으로 남으로 어떤 선교사는 말을 타고 어떤이는 걸어서 그리고 어떤이는 배를 타고 전라도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1895년 6월에 서울을 위시하여 각 지역에 콜레라 병이 발생하였습니다. 서울에서만 하루에 60여 명 씩 죽었습니다. 이때 전국적으로는 5,000명 이상이 콜레라 병으로 죽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지만 평안도부터 발병하여 나라 전 지역으로 삽시간에 퍼져 갔습니다. 콜레라는 양반, 평민, 천민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하얀 쌀뜨물 같은 설사를 했고, 토하였습니다. 심하게는 하루에 20리터를 싸거나 토해냈습니다. 자연히 피부는 쪼그라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미이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환자 못지않게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을 괴질(怪疾)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어로는 코레라라고 발음한 한자가 호열랄(虎列剌)로 써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고, 호랑이가 살점을 뜯는 듯 심한 고통을 준다고 하여 호열자(虎列刺)로 사람들은 부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이 방역위원장으로 제중원 의사로 있는 에비슨을 임명하였습니다. 에비슨은 우선 전국에 콜레라 예방을 하도록 다음과 같은 방을 써서 붙였습니다.

 

"콜레라는 악귀에 의해서 발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서 발병됩니다. 만약 당신이 콜레라를 원치 않는다면 균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음식은 반드시 끓이고, 끓인 음식은 다시 감염되기 전에 먹기만 하면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신들이 준 병이라고 여기저기에서 무당을 불러 치병 굿을 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물을 끓여서 먹으라는 방을 본 사람들이 그렇게 실시함으로 병의 전염이 더 확산 되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방역 위원회는 격리 수용소를 설치하여 환자들을 격리하였고 방역 계몽활동을 벌였습니다. 이 콜레라로 최초로 우리나라에 체계적인 방역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급박하던 때에 가장 헌신적으로 활동한 의사가 드류 의료선교사였으니, 그와 함께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선교사가 협력하여 서대문밖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며 예방활동에 심혈을 다 기울였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환자들을 돌보며 한편으로 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는데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그 어떤 선교사들 보다 더 열성으로 활동한다는 정평을 받았습니다. 이런 드류와 전킨의 희생적인 수고와 헌신적인 활동이 조정에 알려져 고종임금님은 매우 고맙게 여겨 그들에게 은재 스탠드를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선교 콤비가 잘 맞아 그 이후에도 함께 선교활동을 하는 중에 이 나라 땅과 기후는 선교사들의 어린 자녀들에게는 매우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1893년 8월 4일 첫 아기를 낳았는데 그만 한국의 무더위가운데 태어난지 열흘 만에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전킨 선교사도 같은 해 봄에 첫 아기 '조지'가 태어났는데 태어 난지 18개월 만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신 선교적 사명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전킨과 드류 선교사는 한조가 되어 마침내 전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군산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레이놀즈 선교사와 함께 군산에서 잠시 선교활동을 하였던 드류선교사가 호남 선교의 교두보로 적극 군산을 추천하고 군산에 호남 선교부를 설치할 것을 주장한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선교회에서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드류선교사를 전킨선교사와 짝을 이루어 군산에 최초의 선교사로 내려 보내게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듯이.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복음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군산을 첫 선교지로 삼도록 하심은 군산과 호남 지역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였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어떻게 척박한 자갈밭 같은 복음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키워 나가도록 하실 것인지, 세계선교 역사상 그 유래가 매우 드믄 흥미로운 선교활동이 군산 땅에서 바야흐로 전개 될 것이라 하겠습니다.

 

어찌해서 전킨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고 낮 설고 물 설은 머나먼 이국 땅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당시 군산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1861년부터 일어난 미국 남북 전쟁 시에 남 장로교회가 조직이 되었습니다. 남 장로교회의 외지선교사업회가 이태리 중국 일본 브라질 멕시코 쿠바 그리스 등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습니다. 남 장로교회의 해외 선교사 출신 신학교는 두 주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카고의 멕코믹 신학교와 버지니아의 유니언 신학교 였습니다. 이미 1885년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 받은 북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가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하여서 그해 9월 멕코믹 신학교에서 조선 선교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이때에 이 학교 졸업생으로 루이스 데이트가 그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다시 10월에는 테네시주의 네스빌에서 전국신학교 해외선교연합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곳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벤더빌트 대학에 유학하여 와있던 윤치호가 초청되어 선교 강연을 하였습니다. 이때에 일곱 명의 남 여학생들의 가슴에 조선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타올랐습니다. 그들은 서로 알지 못하였던 사이였지만 그 후 조선 선교의 열렬한 동지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앞서 소개한 루이스 데이트 외에 유니온신학교의 전킨, 레이놀즈, 존슨, 그리고 데이트의 동생 메리 데이트, 버지니아주의 아빙돈 출신 린니 데이비스, 버지니아주 렉싱톤 출신 메리 레이번, 그리고 역시 버지니아주의 펠시 볼링 이렇게 여덟명 청년들 이였습니다.

 

레이놀즈는 중국 선교를 볼링은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선교의 뜻을 모으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레이번은 전킨을 만나 “당신이 가는 것이면 나도 가겠다”고 하여 마음 뿐 아니라몸도 하나 되어 부부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강연을 들은 존슨은 아저씨 댁에서 조선에 대한 희귀본 역사책을 발견하여 이 책을 가져와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책을 돌려 일은 이 젊은이들은 매우 흥분하였고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에 달려가고픈 열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앞서 데이트는 남 장로교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선교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란 나라가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로 선교사를 보낼 의도가 전혀 없다는 통고를 받게 됩니다. 당시 선교회는 그리스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고를 받고 주저 않은 그들은 아니 였습니다. 레이놀즈 존슨 전킨은 다시 조선 선교 신청서를 제출하였지만 역시 돌아온 통고는 여전히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할 계획이 없다”는 것 이였습니다. 이제 포기 할 것인가. 아닙니다.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들이 찾은 길이 무엇이였겠습니까? 바로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들은 조선 선교를 위한 뜨거운 합심 기도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하였을까요. 그들은 2년을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각 선교부를 찾아다니며 조선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선교의 열망을 가지고 여기저기 선교부를 찾아다니던 이 젊은이들의 당시의 열정과 수고가 결코 그들만의 의지만 가지고 된 일이 아니요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지 아니하고는 어찌 모두가 반대하는 조선 선교를 마치 골리앗 앞을 달려 나가던 다윗처럼 그처럼 무모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당시 그처럼 조선 선교를 열망하며 기도하던 그 젊은이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그들은 언더우드 목사를 모시고 버지니아주 노스케롤이나주 테네시주등 미국의 각 주의 여러 도시들의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여성을 역설하고 그들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기독교 잡지들을 통하여 논문을 투고하여 선교를 상기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1892년 2월에 <선교 The Mission>이란 잡지에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지금 조선 왕실은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입니다. 현재 조선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대할만한 조직화된 종교도 없습니다. 현지의 선교사들만 가지고는 빠른 성장을 하고 있는 선교역량을 감당하기에 부적절합니다. 조선 선교는 우리와 쉽게 협동할 수 있는 북 장로교회에 의해 시작 되었습니다”라는 글을 발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각 방면에 호소한지 2개월여 지났을까?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로부터 “9월에 항해할 준비를 하시오” 이런 전보를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마태복음 18:19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조선 선교에 대한 회의적인 미 남장로교회 외지선교회는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하여 조선 선교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선 선교에 열망을 가진 청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섭리하신 뜻이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 장로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파송국의 하나인 그리스 정부가 선교활동을 방해 하므로 부득이 그리스 선교를 중단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에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북 장로회 소속인 언더우드 목사의 형인 존 언더우드가 2망 5천 달러를 기부하였고 언더우드 목사도 500달러를 조선 선교를 위해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 장로교회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는 7명을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데이트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트, 리니 데이비스 레이놀즈 부부 그리고 전킨 부부였습니다. 존슨이 일곱명 선교단에 들지 못하게 된 것은 이미 그는 한 달 전 조선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조선의 선교사 후원을 위한 활동을 벌리게 되었습니다.

 

1892년 9월 7일 데이트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양 레이놀즈와 전킨 부부 등 7인의 선발대가 서부로 가는 관문인 데이트 남매의 고향인 세인트루이스에 모였습니다, 마 장로교회 외지선교 실행위원회가 주관하는 파송예배를 드리고자 함이였습니다. 센트럴 장로교회와 에비뉴장로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마친 그들은 힘차게 조선을 향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선교의 장도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하시기를, 이들이 이후에 조선 선교를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생명을 다바쳐 뿌린 복음의 씨앗이 오늘날 우리 호남지방에 엄청난 열매로 나타났으니 그들에 대한 호남의 모든 교회들은 그들의 미래인 오늘날의 우리들 또한 박수를 치며 그들의 장도를 환영하고 그들에게 진 선교의 빚을 어찌 다 갚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에 이들은 마침 주미 워싱톤 초대 주미 한국공사관 이채연()서기관이 부인과 함께 귀국하는 일행과 만나게 됩니다. 특히 데이비스는 이 부인과 사귀게 되어 함께 동행하니 1892년 10월 18일 다른 이들 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인과의 사귐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낮 설은 땅에서의 선교 활동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그 부부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채연은 귀국후 전우국방판()이 되었다가 1894년(고종31년) 참의교섭통상사무()를 거쳐 이해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농상공부협판()이되어 개화정책 수해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후 독립협회 창립에도 참가하게 됩니다. 이 처럼 그는 조선의 개화에 앞장섰던 인물이였습니다.

 

데이비스는 버지니아주 아빙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따라 자주 가난한자, 병든 자들을 돌보는 봉사 일을 하면서 해외 선교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데이비스는 처음엔 아프리카 선교를 생각하였지만 앞서 소개한 바처럼 조선 선교의 강연을 듣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조선으로 떠날 무렵에 어머니는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지체 말고 조선으로 떠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서울에 도착한지 9일 만에 어머니의 소천소식을 듣게 되어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오열하였지만 지금 막 시작한 나날이 바쁜 조선 전도에 어머니 장레식에 참석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에 들어와 1년 동안 1,885명을 전도하였고 80여 가정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특히 멕시코 선교보다는 더욱 힘든 조선 선교를 자청하여 온 데이비스는 메티 데이트와 함께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서양여인들을 처음 본 조선의 여인들이 흥미를 가지고 그 녀들을 찾아오면 서양 사람들의 살림을 소개해 주고 성경과 찬송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들의 입에서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찬송이 힘차게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데이비스는 군산에 내려와서도 부녀들과 아이들에게 찬송을 가르쳐 아이들이 돌아다니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예수 사랑하심은>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한 북장로교회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의 부인 애니 로리 아담스(Annie Laurie Adams Baird 안애리1864-1916.6.9)가 번역한 찬송입니다. 본래 애니는 언어학자로서 한국어와 한국음악에 조예가 깊어 많은 찬송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을 하였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머리멀리 갔더니” 이 찬송도 애니의 번역 찬송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이 찬송에 대해 잠간 소개하면, 1860년에 발표된 찬송으로 본래 안나 바틀렛 워너와 그녀의 여동생 수잔이 함께 쓴 “넓고 넓은 세상”이란 소설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이 소설에서 병약한 조니가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에 주일학교 교사인 린덴에게 조니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린덴은 요 15:9을 바탕으로 “주님이 날 사랑하십니다. 성경 말씀이 네게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어리고 약한 이들 주님께 속하였으니 이들은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라는 노래를 불러 줍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조니는 세상을 떠난 다는 내용입니다.

데이비스가 가르쳐 당시 우리 아이들이 부르고 다닌 <예수사랑하심은>은 이런 가사였습니다.

쥬님날 사랑함을 셩경으로 내가 아오

보배 피 흘님으로 두려온 마음 업시하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 셩경으로 내가 아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라고 힘차게 찬송을 불렀을 그 때 모습을 상상하면 싱긋이 웃음과 콧등이 시큰 거리는 감동이 송글송글 솟아오릅니다.

 

데이비스 여 선교사가 먼저 조선으로 떠난 이후 6명의 선교사들은 일본 요꼬하마에 머물면서 주일 북 장로교 선교사로 은퇴한 헾번 목사로부터 언더우드목사가 쓴 조선어 문법책과 사전을 받아 조선에 관한 기초 지식을 습득을 하였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조선인을 만나면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이런 인사말은 할 수 있게 되자 조선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1892년 11월 3일에 그들은 마침내 그처럼 간절히 기도하던 코리아 인천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그들은 서울에서 마펫 선교사, 그래햄 리 선교사, 빈튼 선교사 그야말로 조선 선교의 고참 선교사들을 방문하고 신고를 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로 선하심과 구원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선으로 인도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명예를 감사합니다”란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서대문 인근에 있는 전 독일 대사의 집이였던 기와집을 1,500불을 주고 구입하여 실내를 서양식으로 개조한 다음 레이놀즈 부부, 전킨 부부 그리고 데이비스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데이트 남매도 함께 기거하며 숙식을 공동으로 해결하니 사람들은 미국 남부 인들이 모여 산다고 하여 이곳을 딕시(Dixie 미 남부 전쟁시 남부 연합국을 통칭)라고 불렀습니다.

 

1895년 서울에서 조선어를 익히고 조선의 문화와 생활을 체험한 전킨 선교사 부부와 앞에서 소개한 드류 의료선교사는 4명의 선원들을 태운 목조선()을 전세 내어 여러 가지 약품, 책 그리고 다른 선교 용품들을 잔뜩 실은 다음 인천을 출발하여 450리 바닷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앞서 드류가 일차 방문 하였던 군산이였습니다. 보통 4일이면 도착할 바닷길을 무려 11일이 지나 도착하였으니 어찌나 바다가 흉흉한지 파도가 드높아 배안으로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들어와 물 퍼내기에 정신없을 정도였고, 안개가 자욱하여 앞을 바라보아도 알 길이 없어 사공은 이리저리 노를 저으니 한참 헤메다가 마침내 군산에 도착하게 되자 모든 사람들이 녹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베실만이라하는 군산에 도착하니 다시금 선교의 열정이 솟아올라 그들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군산에 첫 발을 디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3월, 군산에 살고 있는 분들은 아십니다만, 3월 군산은 아직도 한 겨울 처럼 춥고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는 되는 그런 날씨입니다. 당시 군산은 아직 개항 이전이라 여기 저기 100여 호의 초가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전형적인 어촌 이였습니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더럽고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길가 집들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술에 취하고 여기 저기 도박판을 벌려 소리를 지르다가 도박판이 싸움판으로 바뀌곤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 있어 딩그덩 댕그랭 굿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습니다. 당시 서양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돌팔매질로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호감을 가지 사람들이 많이 있어 이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전키과 드류 의료선교사는 선창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배처소와 진료소를 차리기 위해 찾던 중 당시 군산 진영이 있던 수덕산 기슭에 있는 초가집 두 채를 50 달라에 구입을 하였습니다. 당시 환률 시세로는 상당히 비싸게 샀다고 하겠습니다. 드류 선교사의 집은 1917년 당시의 우체국 있던 앞에 언덕의 기슭에 있었고 전킨의 집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전킨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고 드류 선교사들은 환자를 돌보고, 사람들은 두 선교사를 찾아와 말씀도 듣고 치료도 받으니 찾아오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산에서 한 달 여 동안 생활하면서 집도 구하고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안면도 익힌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는 가족들을 데리러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조선의 역사적 상황은 매우 어려운 시절 이였습니다. 동학혁명의 영향으로 시국이 어수선 하던 차에 1894년 고종은 김홍집 박영효들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역사 이래 이어오던 산분제도를 철폐하고 신분차별 없이 관리를 뽑도록 하였습니다. 고종이 먼저 머리를 깍고 전국적으로 단발령을 실시하였습니다. 근대식 학교를 세우고 도량형을 통일시켰습니다. 새로운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려는 여러 가지 제도들을 새롭게 단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개혁은 많은 백성들의 거부감으로 사회가 어수선하였고 더욱이 일본의 적극적인 사주와 지도에 의한 일이기에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차에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1년 가까이 우리나라는 청국과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청일 강화조약이 성립됨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지위가 확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수백 년 동안 이어오던 청나라의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가 실질적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노골적인 간섭과 침략의 야욕은 더욱 악랄해 졌으니 마침내 1895년 8월 20일 경복궁 옥호루에 있는 민비의 처소에까지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들어와 무참히 민비를 살해한 천인공로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일본 공사 미후라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소행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민심은 흉융하다 못해 살벌한 상태로 서울에 와 있던 외국인들은 매우 당황스럽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도 쉽사리 군산으로 내려올 수 없어 차일피일 날자를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1896년 4월 두 선교사 가족들은 인천에서 씨 드래곤이라는 증기선을 세를 내어 타고 내려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증기선은 갑자기 고장이 나 수선소에 들어가 버리니 할 수 없이 한 작은 일본식 배를 전세 내었습니다. 그 배는 매우 작았습니다. 이사 짐들은 작은 화물칸에 쑤셔 넣고 겨우 네 명의 어른들이 앉을 정도의 작은 방안에 쭈구리고 앉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드디어 1896년 4월 5일 안전하게 군산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전킨은 이때의 여행을 “닭장 속의 4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거슬러 11년 전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아펜셀러 두 선교사가 4월 5일 조선 선교를 위해 인천항에 도착을 하였는데 전킨과 두류선교사 부부 역시 4월 5일 군산에 도착을 하였으니 날자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많은 교회사가들이 군산에 교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이야기 할 때 약간의 이견들이 있습니다. 1892년 미 남 장로교회의 칠인의 선교사들이 입국한 1892년부터 보아야한다는 주장이 있고, 레이놀즈와 드류선교사가 1894년 호남선교 답사를 하기 위해 군산에 와서 전도를 하였으니 이때를 군산 교회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전킨과 드류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군산의 선교사로 선정되어 온 1895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현재 군산 개복교회는 1894년을 구암교회는 1892년을 교회의 출발로 교회의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산교회라고 공식적으로 불려 진 때는 1896년으로 교회의 시작을 복음을 전할 때부터이냐 아니면 교회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릴 때부터냐 하는 문제는 좀 더 교회사적인 검토와 합의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1896년, 드디어 군산 땅에 여호와 닛시의 깃발이 휘날리는 교회가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군산진 교회 또는 군창교회로 불려 지기도하고 후에 군산교회라 불려 진 교회가 세워짐을 시작으로 바야흐로 복음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낮 설고 물 설은 이국 한 어촌 마을에서 젊은 선교사 부부들이 생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라 할 것입니다. 집 주변에는 그늘이 될 만한 나무 한그루도 없고 삭막하기까지 하였으며, 사리 때가 되면 바닷물이 범람하여 마당이고 길이고 질퍽하여 걸어다니기가 힘들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선교부에서 보낸 배가 온다고 하지만 말이 정기선이지 선장 마음대로이니 서울 선교부에서 보내는 생활 용품이나 선교용품들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불편하기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민들이 쌀, 계란, 채소, 생선 등을 선물로 가져다주어 주민들과의 친밀함은 오히려 더 깊어만 갔습니다.

 

1897년 5월 전킨 선교사는 군산에서의 감격스런 예배를 아래와 같이 편지에 썼습니다.

 

“주말 예배 등록인인 40명입니다. 이중의 반은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방은 종이 문 막이에 의하여 두 개의 방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여자들이 한 방을, 남자들이 다른 방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닥은 볏짚으로 짜서 만든 자리를 깔았습니다....출석을 부르고 결석자를 점검하여 그들을 아는 사람들에게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예배자들은 큰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평상시 큰 목소리로 책을 읽던 습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좀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 성경공부를 한 시간 하였는데 ‘크리스찬 준수자’란 책을 번역하여 한 장씩 공부를 시켰습니다. ...주일학교가 끝나면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정기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제목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후에 헌금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의 남자가 헌금을 세니 1불 6센트, 엽전이 무려 530전이였습니다. 이 헌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며 돈이 남으면 교회의 장래를 위해 비축해 쓰여 질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놀라운 것은 군산의 첫 교인들이 헌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달러는 선교사들이 낸 헌금일 것이고 당시 아직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피선교지 40명 정도 되는 교인들이 530전 헌금을 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도 해외에 나가 처음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말을 들으면 헌금은 고사하고 주민들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차비까지 준다는 것입니다. 군산의 첫 번 교인들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는 것이 더욱 하나님이 이 땅에 풍요로운 축복으로 내려 주시리라는 아브라함의 제단을 쌓았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는 군산에서 복음전도와 의료선교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주님들의 인심을 얻는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두 선교사는 매일 아침 9시부터 10시 반까지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였고 그 외 시간에는 환자들을 정성껏 치료하였습니다. 어떤 날은 50여명의 환자들이 몰려와 진료를 하였습니다. 비록 서툰 조선어 이지만 한사람씩 붙잡고 기도하며 친절하게 치료해주는 두 선교사의 정성에 감동하여 주민들은 답례로 생선, 김, 달걀 같은 식료품등을 가져와 고마운 마음을 표하였습니다.

 

이때에 이들의 따뜻한 마음에 김 봉래라는 분과 송 영도라는 분 그리고 차 일선이라는 분이 최초의 원입교인이 되어 군산 선교의 첫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다. 1866년 6월에 기록한 전킨 선교사의 편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 교회에 핵심이 되는 몇몇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중 세 사람이 세례를 받고 싶다고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비 신자 반에서 교육을 시키었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일 오후에 그들을 만나서 회개에 관하여, 믿음에 관하여, 기도에 관하여, 안식일에 관하여, 세례에 관하여, 성만찬에 관하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또 십계명과 교회법에 대해서도 가르쳐 공부를 끝냈습니다.... 오랜 시간 진흙바닥을 수리한 후 드류 박사는 다시 금주부터 일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환자들을 살피는 평일에는 적십자 깃대를 그리고 병원을 열지 않는 주일에는 성조기 깃대를 세우려 하였습니다.” 이렇게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을 하였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매 주일 오후 세 사람에게 세례 예비교육을 시킨 다음 1896년 7월 20일 세례식을 거행하니 이들은 호남에서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날에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성찬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10월 4일에는 송 영도의 딸 송 성장이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이 역시 호남 최초의 일입니다. 계속해서 차 인원 주 원선 문 화숙 이 자유 박 시길 등 20여명의 학습교인을 세웠으니 옥토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놀랍게 자라 이제 바야흐로 수많은 열매를 맺을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1896년 10월에 서울에서 열린 제15차 선교연례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서 호남선교부를 군산보다는 나주로 옮기는 것이 유리하다는 안이 채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는 이 안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두 선교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군산을 포기할 수 없다고 완강히 반대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1년간 유예기간을 두고 다시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주 지방은 유잔 벨 선교사와 헤리슨 선교사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나주지방 유생들이 강한 반대로 나주 선교부는 철수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군산선교부의 문제가 일단락되자 두 선교사와 군산의 교인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어떤 이는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토요일에 군산에 와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주일 오후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주일 예배와 성경공부에 결석자가 있는가 확인하고 만일 병으로 결석하였으면 드류 선교사가 곧바로 가정방문하여 환자를 돌보니 군산교회는 그 수가 날마다 더하여졌습니다. 이처럼 군산교회가 활발히 일어나 전주 보다 앞지르게 되자 군산 선교부 폐지론이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전킨 선교사의 선교 반경은 점점 넓어져 군산 인근 주변의 촌락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므로 만지산 남차문 송지도 등에 정기적인 처소가 만들어 졌습니다. 만지산은 오늘의 지경이고 남차문은 남전리를 말하며 송지도는 김제지역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3차 전도 여행을 통해 수많은 지역을 다니고 각 처에 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던 일에는 그가 동역자라고 부른 많은 분들의 협력이 있었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서신에 40여명의 이름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중에 동역자라고 불려 진 사람들이 16명 이상이 됩니다. 그중에 마가 실라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누가 등이 있습니다. 그밖에 각 지역에서 복음을 듣고 믿어 이들이 자기 집을 내 놓아 교회로 사용하게 하거나 바울사도를 머물게 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편의를 제공한 수많은 지역 교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초창기 선교사들은 이런 바울 선교의 뒤를 이어 어디를 가던지 그들을 돕고 따르는 복음의 협력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선교사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은 그들은 그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키우는데 선교사들의 동역자로서의 일을 사명으로 알고 열심히 도왔습니다.

 

먼저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인 송영도씨와 그의 가계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송영도씨는 이조 통영대부 예조 참의를 지낸 송진호씨의 5남매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96년 7월 20일 호남지역의 첫 번째 세례교인이란 빛나는 영에를 안고 그의 남은 평생은 오직 주님의 나라 확장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전킨 선교사를 도와서 구암교회의 설립위원으로 7년간 헌신을 하다가 그 후에 거주지를 군산 조촌동 메두에서 완주 이서 두현리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그 곳의 부락민 50여명을 전도하여 사오리 길을 걸어 전주 서문 밖 교회 현재 서문교회입니다. 그 서문밖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 후 그 부락에 단독으로 두현리 교회 지금 만성교회입니다 교회를 설립하여 당시 200여명의 교회로 부흥 시켰습니다. 그는 다시 군산옥구군 남내리로 이사를 와서 나문절 교회 지금의 옥구중앙교회를 설립하며 헌신하던 중에 1916년 2월 1일 향년 60세로 소천하시였습니다. 그는 마치 바울에게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같은 분으로 헌신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송영도의 딸 송성장은 1896년 10월 4일 호남지역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장남 송만남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을 따라 교회를 섬기다가 22세때 나문절 교회를 떠나 군산개복교회를 출석하였습니다. 그리고 1934년 5월 6일에 37세 때 장로로 장립되었습니다. 송만남 장로는 23년간 시무하면서 주일 청년 공과를 홀로 지도하였고 신사참배 거부로 십여차례 군산경찰서에 끄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송만남 장로는 1957년 1월 조촌교회 지금의 동광교회를 설립하여 21년간 장로로 시무하다가 1985년 7월 23일 89세에 소천하였습니다. 송만남 장로의 슬하에 9남매가 있는데 군산 중동교회의 송기권 장로 군산 개복교회의 송기수 장로등 모든 자녀가 교회의 중진 교인으로 헌신하였으며 그중 장손 송관석 목사등 목사 3명에 장로 3명 전도사 3명 집사 20여명 등 군산 최초의 자손이 번창하여 120여명이나 되니 모두 주님의 나라의 학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현재 군산 토성산 기슭에 송씨 가문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마치 아브라함의 막벨라 상수리나무 아래 무덤처럼 송영도씨의 후손들의 묘가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기업의 축복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듯하여 보는 이들이 숙연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100여 년 전 호남 초기 선교사들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혀 생소한 땅에 와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심히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선교의 동역자들이 있듯이 선교사들에게도 있었으니 조사라고 불려지는 분들이였습니다. 당시 레이놀즈 선교사에게는 정해원이라는 조사가 있었으며, 미스 테이트 선교사에겐 남씨 부인이, 테이트 선교사에게는 최중진 윤식명 이자익 신경운 오덕홍 잉골드선교사에게는 오씨부인이, 멕커첸 선교사에게는 이원필 이경필 최대진 김응규 김성식 장경태가 있었으며 해리슨 선교사에게는 김창국 양웅칠 김옥여가 있었으며, 얼 선교사에게는 김치만이, 미세스 얼 선교사에게는 윤씨부인이, 전킨선교사 부인에게는 최씨부인이, 특히 전킨 선교사에게는 김필수 장인택 오인묵 등 여러 조사들이 협력하여 놀라운 선교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한국 선교에 수많은 선교사들의 선교적 열정과 노력이 한국 선교의 초석을 이루었다고 말한다면 이들 선교사 뒤에는 역시 많은 한국인 조사들의 헌신과 인내와 충성이 한국 선교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전킨선교사의 조사중 장인택 이란 분의 믿음의 수고는 꼭 기억해야 할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명준 교수님과 김수진 목사님이 장인택 조사에대한 자세한 연구를 하셔서 그분의 면모를 오늘날 다시 조명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장인택 조사는 경기도 평택 출신입니다. 그는 일찍이 한문을 깨우치고 지식인으로 행세를 하면서 서울을 드나들며 새로운 서구문화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선교사들을 만나 신 지식을 들으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남 장로교 선교사들의 어학교사로서 있으면서 조사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어로만 회의를 하는 미국 남 장로교회 미션공의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한 것을 보면 그의 영어 실력과 신앙의 정도가 뛰어났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1896년 전킨 선교사를 따라 군산에 내려와 군산교회와 궁멀구암교회를 설립하는데 그의 수고는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평택의 부자였는데 궁멀에서도 많은 땅을 구입하여 대 농이 되었습니다. 농사철에는 농사일을 돌보고 농한기에는 선교사를 도와 조사로서 활동하였으니 전킨선교사가 가는 곳에는 항상 장인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산 부두에 나가 전도를 하고 전킨 선교사의 집을 건축하며 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키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교회 일에 열심을 다하니 초기 구암교회의 성장에 그의 공로를 첫 번째로 꼽을 수 있습니다.

 

몇 년전 구암교회가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을 하였는데 교회 전면에 8개의 큰 기둥을 새웠습니다. 일곱 기둥은 미 남 장로교회 일곱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둥이고 나머지 하나는 장인택 조사를 기념하는 기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는 장로가 못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그의 이름이 초대교회 역사에서 자취가 희미해져 갔습니다. 1916년 구암교회가 교회당을 신축할 때에 건축위원으로 회계를 담당하였습니다. 그의 외아들 장재서, 딸 장한나, 둘째딸 장은숙, 셋째딸 장태인 이렇게 1남 3녀의 자녀들이 구암교회에서 믿음이 자라고 영명과 멜본딘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앞서 소개한 바대로 장한나는 다음에 소개할 만지산 지경교회의 최흥서장로의 맏며느리가 되었고 그 남편 최주현은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지경리에서 삼성병원을 운영하였습니다. 최주현의 큰 아들 최영태는 역시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후에 세브란스대학 학장을 지내며 우리나라 세균학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최주헌의 동생 영환도 형과 같은 학업을 마치고 경기도 파주에서 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장인택이 구암교회의 초창기 기둥역할을 하였다면 최흥서는 개복교회의 기둥이였습니다. 최흥서는 1860년 7월에 김제군 만경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873년 가족을 따라 임피 만지산 현 지경리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조달현이라는 보부상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복음을 믿었는지 아려진바 없습니다만, 조달현은 보부상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물건을 팔면서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최흥서가 이 조달현을 만나 복음을 듣고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산 전킨을 찾아가서 기독교 교리를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잠시 뒤에 다시 전하겠습니다.

 

해리슨 선교사가 그에 대한 성품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최흥서는 중산층에 속한 독농가입니다. 그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수줍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전킨선교사도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어떠한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성실한 사람으로 좋은 집사 한사람과 좋은 장로 한 사람을 결합시켜 놓을 정도의 인물입니다. 그는 초신자들을 가르치고 거의 모든 집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흥서의 신앙과 성품은 당시 군산 교회의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어 교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86년 그가 처음 군산교회에 나오던 때에 소송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시대는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라 선교사들이 교인들의 일상생활 또한 요긴하게 도움을 주곤 하였던 터라 최흥서의 소송문제도 전킨 선교사에 의해 원만히 해결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흥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최흥서는 1897년 4월 10일에 전킨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한 후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서 10km나 떨어진 군산 교회를 걸어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만지산에서 최흥서를 비롯하여 김채오 정치선 최관보 정백현 이양화 등 많은 교인들이 1900년 최흥서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곳이 만지산 교회 즉 오늘의 지경교회의 시작이였습니다. 그후 중만자에 초가삼간을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삼았으니 2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최흥서는 앞에서 소개한 대로 1902년 9월 조선 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 군산교회 대표로 찬석하였습니다. 또 군산 선교부가 궁말로 이전하자 군산교회의 맥을 이어 개복동에 교회를 재건하는데 앞장 선 일도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습니다. 1903년 만지산 교회의 최초의 장로로 피택되었으나 지체하다가 1905년 말에 장로로 장립하게 됩니다. 1907년 교회의 부속 2년제 소학교를 불 선교사의 도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 졸업생으로 이요한 최주일 김준실 양해성 고란섭등이였는데 그 중에 이요한은 1947년 제헌국회의원이었고 전북도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었을때 최흥서장로는 교인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철야기도회를 가졌고 3 ․ 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만세를 부르다 교인들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최흥서 장로는 군산 선교부가 설립한 복음서원의 매서인으로 활략함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과 기독교 신앙서적들을 읽히게 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이 보다 큰 사역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윌리엄 B. 해리슨(William Butler Harrison, 하위염;河緯廉1866-1952)선교사를 소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1866년 미국 캔터키에서 출생하여 캔터키 센트럴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또 루이스빌 의대에서 1년간 의학 공부를 한 다음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894년 남 장로교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고 제 3진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잠시 서울에서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와 풍속을 익힌 다음 1896년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선교사와 함께 나주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주의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유진 벨 선교사는 오웬(C C Owen 오원)선교사와 함께 목포로 내려갔고 해리슨 선교사는 전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1897년 전주 서문 밖 은송리에서 약간의 배운 의술로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전주에서 매 5일 마다 열리는 장날 인근 장터마다 헛간 2곳을 마련하여 복음을 전하니 장터에 몰려온 사람들은 장터의 독특한 들뜬 분위기와 아울러 서양사람 구경을 하고 싶은 호기심과 그가 어눌하게 전하는 복음을 듣고 즐거워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리슨 선교사는 장터 선교사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군산에서 활동하던 전킨 선교사가 건강상 문제로 전주로 옮겨오게 되자 대신 해리슨 선교사가 군산 선교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1903년 부인 데이비스가 별세한 후에는, 선교지역을 군산으로 옮겼습니다. 전킨 후임으로 군산 영명학교 책임자, 남전교회(1904-1908 및 1916-1917), 개복교회(1905-1911),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웅포교회, 동연교회, 무주읍교회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해리슨 선교사는 군산지역뿐 아니라 익산지역까지 선교활동을 하면서 익산 고현교회 설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현 교회를 소개하기 앞서 먼저 군산 대야에 있는 지경교회부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해가 좋을 것 같습니다.

 

지경 교회가 설립된 공식 지명은 임피군 남산면 만자산리 입니다. 이 지역은 김해 김씨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전주 최씨들이 중심으로 그 밖의 여러 성씨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뒷산의 모습이 말 형태라 백마산이라고 부르고 그 산 아래에 살면 아들을 많이 낳는다고 하여 만자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최흥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1896년 4월 초 어느 날 전남 신안사람 보부상인 조달현이 만자산에 와서 사람들에게 군산엘 갔더니 서양 사람이 와서 예수 이야기를 하는데 재미있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만자산의 강채오 이양화 최관보 최흥서 이들이 조달현을 따라 군산에 가서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를 만나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서양 사람과 그들이 전하는 말씀과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이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왔습니다. 조사 장인택으로부터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더욱 흥미를 더욱 가지게 되면서, 그들은 여러번 군산을 찾아와 기독교에 관한 말씀들을 듣곤 하였습니다. 마침내 군산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로 하고 1896년 6월 13일 토요일 최관보 정치선 강채오 정백현 이양화와 그의 부인 삭녕최씨(후에 최매리로 불리움) 최흥서 그리고 삭녕최씨의 4살 난 딸 순길이 이렇게 군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순길이가 돌이 지나 눈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눈에서 고름이 나오곤 하였습니다. 드류 선교사가 순길이 눈을 수술하여 고름도 제거하고 치료해 주니 상태가 매우 좋아 졌습니다. 이때 크게 은혜를 체험한 순길이 엄마는 그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이름도 최매리라 하고 지경교회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후에 지경교회를 창립할 때 이 일곱 사람이 만자산 교회 창립 칠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이 군산교회에 방문하여 그 다음날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날이 마침 미 국 장로교회 어린이 꽃 주일이였습니다. 전킨 선교사가 눅 19:16.17말씀을 가지고 ‘주님이 사랑하신 어린이들’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만자산에서 30리길을 걸으며 군산교회를 다니던 일곱 사람이 최흥서의 집 사랑방에서 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인수가 점점 많아지자 중만자의 최찬일씨 댁 근처에 초가삼간을 20원에 구입하여 1900년 10월 9일 공식적으로 만자산 교회를 세워 첫 예배를 감격 속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장인택 조사가 사회를 보고 예수사랑하심을 찬송하며 최흥서씨가 기도하고 불 선교사가 마16:13-20의 말씀으로 ‘만세반석 위에 세운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말씀대로 오늘날 지경교회는 군산의 유서 깊은 교회로 크게 부흥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첫 예배 참석자는 성인이 35명 어린이가 40명 이였습니다.

 

당시 이 만자산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오원집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오원집은 임피 공창리 출신으로 친척인 완산의 오 할머니 댁에 왔다가 아직 군산교회를 다니고 있던 만자산 교인들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만자산 사람들과 군산교회를 다니다가 만자산 기도처에서 본격적으로 신앙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책임성이 강하여 한번 맡은 일은 열심히 감당하는 젊은이였습니다. 따라서 한번 복음을 듣고 난 후는 한번도 빠짐없이 만자산 기도처와 교회를 출석하였습니다. 그는 익산 고현리 처녀와 결혼하여 그곳으로 이사를 한 후에도 만자산까지 수십리 길을 걸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이때 그를 유심히 살펴 본 선교사가 바로 해리슨 목사님이였습니다. 오원집은 해리슨 선교사에게 학습과 세례를 받고 선교사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노방전도 하는데 참가하여 전도지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쪽 복음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오원집은 친구 오덕근과 김자윤 고선경 김경장 오덕순등 과 더불어 만자산까지 가지 말고 고현리에 아주 교회를 세우자는 뜻을 가지고 고현리의 곽도일의 사랑방을 기도처로 삼고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해리슨 선교사와 양응칠 조사의 도움을 받아 1906년 고현리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양응칠(1855.7.27-1932.7.17 묘비에 적힌대로) 조사가 1903년 제3회 예수교장로회합동공의회가 모일 때 전라대리회 총대로 참석한 것을 보면 당시 선교사와 교회의 상당한 신임을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가 1896년 3월 16일 군산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궁멀교회를 설립할 때부터 전킨 선교사와 열심히 교회를 섬기었던 것입니다.

 

양응칠 장로의 신앙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지곡교회 100년사에 소개된 그분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1905년 불 선교사와 양응칠 장로의 권유로 백토리에 살고 있는 고형일 고익순 고창여 전학천 김이주 고준석 여러분이 궁말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 고형일씨 댁에서 기도처를 마련하여 양응칠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지곡교회(남성교회로 후에 나누임)가 창립되었습니다. 당시 양응칠 장로는 백마를 타고 다니였습니다. 본래 유교를 믿고 있는 부모의 배척으로 집에서 쫒겨 나 자주성가하여 전주 서학동에 정미소를 설립 운영하였습니다. 또 한의학도 공부하여 침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하였습니다. 외손녀 되는 이정은 권사(안산제일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양응칠 장로의 집은 부유하여 머슴들을 여럿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에는 일체 머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양 장로님 댁에선 주일마다 거지들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 급식을 하였습니다. 양 장로의 부인과 자녀들 가족들이 이들을 대접하다보니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하였습니다. 어느 주일날 너무 일손이 부족하여 양 장로 부인은 머슴들에게 물 깃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양 장로는 온 가족과 머슴들을 마당에 불러놓고 어떻게 머슴들에게 일을 시키게 되었는가 부인을 문책을 하였습니다. 그 책임을 물어 부인의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로 부인의 장단지를 사장 없이 때렸습니다. 참으로 주일성수를 어겼다고 부인에게 회초리를 때린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사람들 앞에 종아리를 걷고 남편에게 회초리를 맞은 그 부인의 순종의 도가 더욱 놀라움을 가지게 합니다. 철저한 성수주일을 고집한 양 장로는 주일에 옷고름이 떨어져도 꿰매지 못하게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추수하기 전에 미리 십일조를 헌금하기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의 식량도 담당하고 주일이면 곳간을 열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임피 선산에 양장로의 묘소가 있는데 그 묘비명에 “믿음의 횃불 되어 길이 빛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매서인들이 한국 초기 선교사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합니다. 매서인을 권서인 (勸書人; Colporteur)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인 로스역 성경이 번역 출판이 되자 번역에 종사한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 등여러 사람들이 성경을 한 짐씩 짊어지고 도시와 시골을 다니면서 약간의 돈을 받고 성경을 전해 주면서 매서인들이 한국 초기선교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전해 온 유교와 또 다른 종교와 다른 특별한 책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너도 나도 성경을 사서 읽다가 그만 기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초기한국교회는 메서인들을 통해 성경이 널리 보급됨으로 보다 튼튼한 기초를 쌓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안양대학교 이은선 교수의 자료 논문에 의하면, 1907년 미국 북 장로교회 한국선교부가 부산에서 연차회의를 개최했을 때, 성서공회의 역할에 대해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했으며, “복음 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밀러는 한국 기독교인의 첫 번째 특징을 “성경을 사랑하는 기독교인”(Bible-loving Christian)이라고 지적하였다는 것입니다.

 

매서인들의 사역을 통해 한국 사람들의 의식이 새롭게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영국성서공회의 한국지부 총무로 활동했던 캔 뮤어는 한국에서의 성서보급의 결과에 대해 “말씀이 읽혀지고 암송되고 있다. 말씀은 이 생기 없고 영감 없는 백성들의 피와 뼈와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가고 있으며, 그들은 반드시 새로운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전망하였습니다. 권서들을 통한 성경 보급은 성경연구모임인 사경회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는 한국기독교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바로 매서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부산지방에서 크게 활동하였던 호주선교사 엥겔(George O. Engel 1964-1939)은 “메서인들이 먼저 가서 지역을 넓히고 관심을 일깨운 후에 선교사들에게 영구적인 결과가 있을 곳을 알려주면 선교사가 가서 모임을 만들고 교회를 조직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선교 100년 만에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제는 세계선교에 2만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한국 선교와 교회개척의 최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성경보급에 힘쓴 사람들이 바로 매서인들이였습니다. 매서인들은 초기한국교회에 몰려온 온갖 시련과 모진 풍상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황무지를 개척한 믿음의 용사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민족수난기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성경봇짐’을 메고 다니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한 매서인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개척 선구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교회설립의 모태이자 그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 중에 군산의 최흥서 장로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에 충실하고 교회에 충성한 최흥서 장로는 1935년 소천하였습니다.

 

 

군산 개복동 교회에 새로운 일군이 생겼습니다. 진사 홍종익의 사촌동생인 홍종필이란 분입니다. 본래 이분들은 강원도 평해가 고향입니다. 홍종익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구한말 서울에서 관리 생활을 하였습니다. 1905년 사촌인 홍종필과 함께 선조의 500지기 농토가 있는 익산군 웅포리 제석리로 낙향하여 마을 한가운데 서울식 곰배집 두채를 지었습니다. 윗집은 홍종익이 살고 아랫집은 홍종필이 살았습니다. 비록 낙향을 하였지만 돈이 많안 가문인지라 밤만 되면 도둑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쌀이며 물건들을 훔쳐갔고 아주 대낮에는 불량배들이 몰려와 강압적으로 재물을 빼앗아 가곤 하였습니다. 이같은 행패에 참지 못하여 이들은 군산이 개항을 하자 군산으로 이사를 나옵니다. 여기서 최흥서를 만나 전도를 받고 개복동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구복동에서 개복동으로 교회를 새로 지어 이사를 할 때에 홍종익은 상당한 건축헌금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홍종익 진사와 홍종필은 본래 양방으로 학문에 깊이가 대단하였던 터라 성경을 이해하는데 남들 보다 빨리 이해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이르게 되고 교히의 장년부를 신설하여 성경 교육과 나라 사랑하는 교육에 열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1911년 홍종익이 1912년에는 홍종필이 장로로 장립이 되었습니다. 더욱 특이한 일은 홍종익과 홍종필이 군산으로 옮겨와 독실한 교인이 되자 제석리의 빈집을 교회당으로 만들어 제석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홍종익이 군산으로 이사를 나와 1906년 생일날에 제석에 있을 때에 그를 도와 주던 마을 사람인 송원규 강진희 엄주환 강두희 강문희를 군산에 ccjd을 하였습니다. 홍종익은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일본 사람들이 함부로 무시를 못한다”고 말 하면서 예수 믿기를 권하니 이들이 제석교회의 첫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제석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한 박수명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하였습니다. “처음 군산에서 예수를 믿고 돌아왔던 엄주환과 강진희는 본래 들녘에서 농토를 일구면서 사는 소시민이었으며, 송원규, 강두희, 강문희는 홍종필 홍종익의 집에서 일꾼으로 살았던 천민들었지만 예수 안에서 천민, 진사 구별 없이 형제처럼 지내면서 살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었고, 강문희는 후에 조사 및 전도인이 되어 제석을 떠나게 되었다.” 는 것입니다.

 

또 웅포 소재지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이십리 길을 아이들이 걸어야 하므로 제석리의 홍종익 홍종필의 집에서 부용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곳을 졸업하면 군산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군산 영명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으며, 여자들은 멜본딘여학교에 진학하여 신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홍종필 장로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하고, 1923년 오후4시 목사 안수 받고 개복교회의 청빙으로 모 교회의 목사로서 사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목회에 전염하니 출석교인 수가 420명으로 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4년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3회 총회 부 회의록 서기로 1927, 1928, 1929년 3년간 총회 서기로. 이외에도 장감연합공의회 이사,'基督申報' 이사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편집위원,금강산기독교수양관건축위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부총회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1930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19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호남출신으로 김필수 이기풍 이자익 목사에 이어 네 번째로 장로교 총회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1930년 9월 12일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 19화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 되을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니 그가 얼마나 교회와 총회에 충성을 다하여 섬기었던 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홍종필 목사는 더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었지만 1935년 5월 29일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시던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북노회에서는 그의 죽음이 너무 애석하여 전북노회록 제 30회 회록에 그의 약력을 소개를 하며 이렇게 기록을 하였습니다.

 

"先生은 天性이 沈眞하시고 言少遠念하사 眞理를 敬愛함으로 一般信者에 模本이 되시었다."

 

홍종익장로 홍종필 목사 이 두 사촌 형제는 군산교회의 발전은 물론 전라 노회와 나아가 총회적으로 상당한 업적을 남기었던 분들로 특히 군산 교계가 기억하며 따를 귀한 신앙의 선배들이라고 하겠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은 열방의 외세 앞에 마치 풍전등화인냥 그 사직의 명맥이 가물거리고 있었으니 특히 일본의 똑각 거리는 게다 소리가 삼천리 여기저기에서 들려 왔습니다. 군산은 바로 저들의 코앞에 펼쳐 논 진수성찬 잔치 상 같았습니다. 군산을 돌아 본 일본인들은 코를 벌렁거리며 드넓은 황금 논밭을 바라보며 침을 삼키었습니다. 군산에 처음 정착한 일본인은 사도도미지로란 자로 군산 옥구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미곡상인 이였습니다. 처음엔 구영리 작은 일본식 판자 집을 짓고 살며 군산 옥구의 쌀을 긇어 모아 일본으로 가져가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어찌 그것으로 만족할 종족입니까? 일본은 군산의 개항을 계속적으로 고종에게 요구하여 마침내 1899년 5월 1일 군산을 개항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다만 상업적인 목적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개항을 통해 일본이 조선과 대륙을 통한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속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은 군산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일본인 거주지가 조성되었습니다. 개항 전에는 20여 호의 77명이었던 일본인이 1900년에는 131호에 422명으로, 1904년에는 1260명으로 1909년에는 819호 3229명, 1910년엔 957호 3649며으로 증가하니 지금부터 100년 전 군산에 일본인들이 4000여명 살고 있었습니다. 개항당시 군산의 조선인 주민이 150호에 511명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일본의 세력은 급격히 확장되어 나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목포영사관 군산 분관을 설치하고 바야흐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본격적인 침탈행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거류민들이 군산 땅에 자리 잡으며 선교본부로 삼고 있는 초가 인근까지 일본인들이 점유해 들어오자 자연히 군산의 주민들이 군산교회를 찾아오기가 거북스럽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는 더 이상 이곳에서 군산의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 새로운 선교지를 물색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선박선교하기가 용이한 당시 옥구군 임피면 구암리 일명 궁멀이라 부르는 곳으로 선교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해로의 교통도 편리할 뿐 아니라 내륙교통도 유리한 지역을 알아보던 중에 드류선교사의 의견을 따라 1898년 12월 21일 궁멀에 호남 최초의 서양식 집을 준공하고 호남선교부로 그리고 구암 교회당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928년 간행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1899년 옥구군 구암리 교회가 설립되다. 앞서 선교사 전킨, 의사 드류, 전도인 장인택이 이곳을 왕래하여 열심히 전도함으로 신자가 점점 많아져 예배당을 신축하고 그 후에 오인묵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사기에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1905년 군산부 개복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전위렴과 의사 유대모가 본처에 주택을 정하고 복음으로 선전하며 의약으로 시제하야 신자를 득함으로 전위렴 사저에서 집회하난 중 김봉래 송영도 이인이 호남에 최선 수세자가 되니라. 기후에 선교사 스테슨회 위취를 옥구 구암으로 이전케 됨으로 약간의 신도는 구암으로 래왕하며 예배하고 혹은 타처로 이거하니라. 기후에 선교사 어아력(A.M.Earle)이 조사 최흥서로 군산에 전도케 함으로 신자를 얻어 구복동에 처소를 설립하고 회집하는 중 최흥서는 전도 매서가 되어 전무하얏고 개복동 남편산에 12간 예배당을 신축하고 수십 신자가 예배함으로 교회가 완성되야 점차 발전되난 중 배경원 홍종익 이춘선 양석주 이호성 남 필 김명후 김두현 진운옥 홍인원등이 열성 협동하야 다대한 효과를 있었고 진운옥이 조사로 시무하니라”(史記 pp.138-139)

 

이와같이 선교부가 궁멀로 옮겨 감으로 일부 교인들은 궁멀로 따라갔고 일부는 흩어졌으며 또 일부는 군산에 남아있어 최흥서 조사와 홍조익등이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던 중에 1904년 3월 20일 군산시 구복동 77번지에 예배당을 건립하였고 1906년 현재 개복교회 자리인 개복동 13-1번지로 이전하였습니다.

 

다른 기록을 보면 1899년 12월 21일자로 군산교회는 궁멀로 이전하여 궁멀교회가 되었지만 그후 해리슨 선교사가 구복동 집한 채를 구입하여 복음서적의 매서인인 최흥서에게 군산모임을 책임지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노력으로 1907년 1월에는 18명이 학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최흥서 조사는 교회당이 건축될 때까지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하였고 1902년 9월 조선예수교 장로회 공의회가 제 2회로 서울에서 열렸을 때에 그는 군산 선교부의 유일한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1904년 예수교장로회 연감을 보면 1899년 12월 21일 궁멀교회가 창립되었다고 하였으나 개복동교회 창립은 미상이라 하였습니다. 당시 궁멀은 옥구에 소속되어 옥구군 구암리에 세워진 교회이었습니다. 전라 노회록을 보면 1915년 까지 개복교회를 군산 교회로 부르다가 개복동 교회로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개복동교회가 군산의 교회로 명맥을 이어 받았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옥구군 구암리가 군산에 편입되므로 구암교회가 선교부 이전의 군산교회로서 법통을 이어 받았으니 더 이상 지역을 구분하여 선후를 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혹자는 구암리 교회가 먼저다 아니다 개복동 교회가 먼저다라는 논쟁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한 나무에서 자란 두 가지이기에 어느 교회가 먼저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국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외세 배척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일찍이 산둥 지역에서는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민간 결사가 생겨나 반외세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1897년 독일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자 의화권의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되었습니다. 의화권은 다른 민간 자위 조직에 침투해 통합을 이루고는 스스로 의화단이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건 본격적인 의화단 운동은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이 왕성했던 산둥 성의 북부 지역에서 1898년 4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해 여름부터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어 가뭄 피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유민이 발생했는데 이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입하여 의화단 난은 점점 더 기세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1899년 12월에 새로 부임한 산둥 순무(巡撫) 위안스카이는 열강의 요구에 따라 의화단을 강력히 탄압했는데 이것이 의화단 세력이 허베이 성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면서 의화단은 철도, 교회, 전선 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학살하였습니다.

 

이 같은 의화단 난의 영향이 우리나라 서북부지방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어 서북부지방의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학살하려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1900년 겨울 미국인들이 전차를 부설하자 반대하던 군부대신 이근택과 내장원경 이용익이 기독교와 선교사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고종은 전국에 알리기를 외국인과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보냄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위기를 벗어난 교회는 1901년 9월 서울 정도 예배당에서 선교사 25인, 조선인 장로 3인 그리고 조사 6인으로 구성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정교분리 원칙과 전라도와 경상도에 대리위원부를 설치하는 등을 결의 하였습니다. 이로인해 레이노즈선교사가 회장으로 있던 1902년부터 전라도 총대들이 정기적으로 공의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레이놀즈(한국명:이눌서,William David Reynolds,1867.12.11~1951) 선교사에 대해서 잠간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초로 호남 선교를 시작한 선교사가 레이놀즈선교사임을 말씀드린바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번 그에대한 소개가 있겠습니다만 레이놀즈 선교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갑자기 제 마음속에 요동치게 되어 이참에 잠시 한아름 닉네임을 가진 선생님이 소개한 내용을 알려드립니다.

 

레이놀즈선교사는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었던 레이놀즈는 어린 시절의 꿈처럼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등을 익히게 되는데 그의 재능은 훗날 우리나라 한극 성서번역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햄펀시드니 대학을 최우등을 졸업한 후 레이놀즈는 남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고, 1891년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 해 레이놀즈가 재학 중인 신학교에서 선교보고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 때 레이놀즈는 조선 행을 기도하며 전킨이라는 귀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는데 레이놀즈와 전킨은 매일 3시에 기숙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온 마음을 쏟아, 조선 선교의 길을 열어줄 것을 끈질기게 간구했습니다.

 

레이놀즈는 선교의 뜻을 같이하는 볼링 양과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하고, 결혼하여 ,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어학실력이 뛰어났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 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 한국말로 전도 강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적응 훈련과 언어 훈련을 마친 레이놀즈 부부는 1894년 3월 27일 군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임피 , 전주 ,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기 직전이어서 민심이 흉흉한데도 , 각 고을을 돌며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 강연을 하면서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갔던 것입니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조선어와 씨름하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조선말이 입에 붙게 되자 언더우드 선교사와 게일선교사와 함께 본격적인 성서번역을 시작하였습니다. 1897년 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습니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놀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인 예배는 전주서문교회의 설립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레이놀즈는 1895년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성경번역은 외국인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가 한글성경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 장로의 공이 컸습니다. 김필수 장로에 대해서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끈기 있게 성경번역을 진행하던 레이놀즈는 마침내 그 열매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권씩 개인역이나 수정역으로 나오던 신약 전체를 묶어서 1900년 단권 신약성경을 출판한 것입니다. 출판된 성경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되자 레이놀즈와 언더우드, 게일은 아예 성경번역에만 매달렸습니다. 이들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무려 555회의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친 후에 로스역 성경이 번역된 이후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판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전라 대리 위원부에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라대리위원부의 총대로서 군산 출신으로 활동한 이는 1902년 군산교회의 최흥서 이었고, 1903년에는 군산 교회의 조사 양응철 이었으며, 1906엔 다시 최흥서가 군산을 대표하여 참석하였습니다. 1907년 미국 남 북 장로회와 카나다 장로회 호주장로회가 <대한 에수교장로회 독로회>를 9월 7일 조직하였습니다. 선교사 38명 조선인 장로 40명 합 78명으로 회장은 마펫선교사, 부회장에 한국인 방기창, 서기 한석진, 부서기 송인서, 회계 그래함 리 선교사를 선출하였습니다. 당시 독노회는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 7명 즉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그리고 송인서에게 최초의 목사 안수를 하였습니다. 독노회 창립당시 전국적인 장로교 교세는 조선인 목사 7명 장로 53명 989교회에 1만 9천 여 명의 세례교인과 7만 여명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괄목할만한 부흥의 역사였습니다. 이 역사적 회의에 군산교회 대표로 최흥서가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1911년 10월 15일 전주 서문 밖 예배당에서 목사 20명 장로 25명으로 성찬식을 거행하고 전라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회장으로 김필수 목사, 부회장으로 유진 벨 선교사, 서기에 이승두 장로, 회계에 최의덕 목사 , 최국현 장로를 선출하였습니다. 공천위원으로 최흥서 장로가 활동하였으며 김필수 목사에게 군산교회와 궁멀교회를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서 추강(秋岡) 김필수 목사님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인물로 본 Y 100년 2009.1월 30일 고 전택부선생님의 글 인용)

 

김필수 목사님은 1872년 7월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죽산의 부유한 연안(延安)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문이 본래 선비 가문이고 독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귀동자로서 한학 수학에도 남다른 대우를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일찍이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고자 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과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당 지도자들과의 교분관계로 일본 고베(神戶)로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관계로 역적의 혐의는 받지 않고 귀국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머리를 깎고 기독교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었습니다.

 

귀국하자 김필수목사님은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의 추천으로 레이놀즈 목사의 어학선생이 되었습니다. 레이놀즈 목사의 한국어 선생으로 일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레이놀즈 목사가 성서번역 때문에 서울에 와있었을 때에 한국 YMCA 창설이사로 발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YMCA운동을 통해 식민지 치하에 기독청년들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심어주는 등 한국 YMCA 운동 발전에 앞장섰습니다.

 

그 뒤 김필수 목사님은 전주에 내려가 완산교회의 장로로 피택이 되었고, 다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제 2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 그는 진안․무주․장수 지방과 군산 지방을 순회 전전하면서 개척 선교에 헌신했으며, 1915년 장․감 두 교파가 연합으로 ‘기독신보’를 창간할 때에는 상경하여 그 편집인이 되는 한편 YMCA의 일로는 강화 및 사경회 강연회 등의 명강사로 활약하였습니다. 특히 1918년 11월에는, YMCA가 세계 기도주간을 맞이하여 대강연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목사는 ‘사회개량의 요소’란 제목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무단정치의 종식을 암암리에 주장한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김필수 목사님은 3.1독립운동 직후 YMCA의 회보인 ‘청년(靑年)’을 창간할 때 그 권두언을 썼으며, 1920년 7월 1일부터 12일까지 전국 순회 전도단을 조직하여 활동할 때에는 그 단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김필수 목사님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심하여 기도하라…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라는 베드로전서 4장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으로 전도대 발족 설교를 한 뒤 제 1대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제 2대는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제 3대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나누어져 전도와 계몽강연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그밖에도 목사님은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에 앞장서서 YMCA 계몽사업을 주도했으며, 특히 이상재, 윤치호와 함께 소위 3거두의 지도체제를 이루어 실무담당인 신흥우 총무의 배후인물이 되어주었습니다.

 

한편 1907년에 조직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동노회 때부터 1914년까지는 선교사들이 회장직을 독점했으나 1915년 제 4회 총회에서는 김필수 목사님이 최초로 한국인 목사로 총회장으로 선출 되셨습니다.

 

그리고 목사는 한국 교회연합 운동에도 앞장을 섰습니다. 물론 YMCA운동 자체가 연합운동이어서 이미 교회연합운동에 선봉을 섰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1918년 3월 26일 YMCA회관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서 조선예수교 장감(長監)연합협의회가 창설될 때에는 목사님이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국인만 아니라 선교사들도 참석했으며, 이 총회는 남북감리파와 남북 장로파, 캐나다 및 호주 장로파 등의 정식총대 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에 김필수 회장은 취임설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파를 나누는 일은 다만 때와 장소에 의한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따라서 오늘날 장로교 감리교 두 교파가 이를 생각하여 하나의 연합기관을 조직하게 됩니다.

 

”일 천부(天父)의 뭇들, 일 구주(救主)의 지톄(支體)로써 교파를 분립(分立)은 다만 시긔(時期)와 쟝소(場所)에 의야 형식에 불과거늘 라서 정신세계에 지 영향이 혹 잇슨 즉…현금에 쟝로 감리 량교파가 이를 고념(顧念)야 일톄적(一体的) 련합긔관을 조직다“라고 선언하므로 일찍이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참으로 김필수 목사님은 한국의 사도바울의 역할을 하면서 한국교회 특히 군산과 전주의 초기 교회 역사의 초석을 단단히 다지는데 큰 족적을 남기신 한국 교계에 꼭 기억할 어른 이시라고 하겠습니다. 김필수 목사님은 그처럼 꿈꾸고 기도하던 조국의 해방을 보시면서 1948년 10월 30일 76세로 하나님 나라로 가시였습니다. 오늘에 추강 김필수 목사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분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기념하지 못한다면 오늘의 한국교회의 부채로 남을 겄입니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오자 곧 미국 공사 푸우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교육사업을 시작하고 어학을 연구하러 왔습니다....우리는 서울에서 한국어 연구생으로서 또는 교육사업가로서 미국의 국기아래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 지금은 선교사업이 아니라 교육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같은 언더우드의 입장은 종교로서 보다는 교육을 강조함으로 한국인들에게 저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선교적 입장을 피력한 것 이였습니다. 1885년 8월에 아펜셀라에 의해 최초로 서구식 학교인 배재학당이 세워 졌습니다. 1887년6월 8일 고종께서 친히 “배재”란 이름을 지어 당대의 명필인 정학교 선생에 의해 간판을 써 붙이게 하였습니다. 1886년 5월 30일 스클랜튼 선교사가 여성 교육을 위하여 여학교를 세우니 이번에는 명성왕비 민비께서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후 속속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이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1886년 서울에 경신학교가 1887년엔 정신여학교, 광성학교, 1894년엔 평양에 숭덕학교와 정의 학교 그리고 1895년에 동래에 일신 여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1909년 까지 장로교가 605학교 학생수가 14708명이고 감리교가 200학교로 학생수가 6420명이나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교파들도 곳곳에 학교를 세워 한국 근대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수많은 한국근대화의 인재들이 양성되고 독립인사들 그리고 해방후 건국의 지도자들이 무수히 배출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2011년 10월 27일 연세대학교법인아사회가 정관개악으로 연세대학교 법인이사회의 교단추천 이사제도를 폐지함으로 NCC가맹교단과 비가맹교단의 포함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16개 교단이 연합하여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강력하게 정관개정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법인 이사회측에서 “학교 설립단시 한국교회는 존재하지 ᅟᅡᆭ았다”는 허무맹랑한 주자으로 “연세대학교 이사회 결의 확인 소송”을 하였습니다. NCCK 총무 김영주 목사는 “연세대학교의 설립정신에는 교육과 의료를 통해 사회와 민초들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온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수행하는 연합과 공공성이라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다”라는 등 사실 확인서를 이사회 측에 발송한바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시작은 광혜원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1885년(고종22년) 미국인 선교의사인 H.N 알렌이 세운 광혜원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1884년 의료선교사로 1884년 우리나라에 와있던 알렌이 우정국사건으로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하게 되고 그 후 청나라 병사들을 치료하다가 궁중의 전의(典醫)로 발탁이 됩니다. 알렌은 고종에게 건의 하여 1885년 2월 광혜원을 설립하였다가, 3월 의학교육을 위해 최초의 의학생을 선발하면서 12일에는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897년 운영권이 선교부로 이관되었고 1900년 미국 클리브랜드의 사업가 L.H 세브란스가 거액의 기부금을 보내어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 골에 한국최초의 병원이 준공되고 이름도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로 교명을 제정합니다.

 

한편 1915년 3월 미국 뉴욕의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적극적인 협조와 재한 남 북 감리교 선교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협력을 얻어 서울 YMCA에서 Chosun Christian College(문과 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대학이 생겨납니다. 현지의 교지는 1917년 존 티 언더우드씨의 기부금으로 구입하였고 찰스 시팀슨씨의 기부금으로 스팀슨 홀을 건립하여 1820년 이전하였습니다. 1923년 3월에는 신 교육령에 의해 교명이 연희전문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대학교는 설립당시부터 서로 밀접한 선교적 동조를 통해 한구교회의 교육 및 선교기관으로 발전하여 왔습니다. 마침내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전문대학이 통합되어 연세대학교가 되고 그 학교 설립연도를 관혜원의 설립날자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30년간 건학 이념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기독교 정신으로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한 한국 사회의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온 연세대학교를 한국교회에서 뺏어가려는 현 연세대학교의 법인 이사회가 “연세대학교는 한국 교회와 관련이 없다”는 식의 망발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저의를 의심하게 되며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법인이사회로부터 하나님의 학교인 연세대학교를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앞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처럼 선교사들은 전도의 목적을 당성하기 위해서는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일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확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회당에서 산에서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무엇보다 제자들을 말씀으로 양성하시면서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으니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일이 복음 전파에 효과적인 방법임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선교지에서 다만 학교세우는 일에 치중하다가 자칫 본말이 전도되는 선교의 목적보다는 교육에 치중하다 보니 본래 복음 전도를 소홀히 하는 일이 많다고 부정적이 시각으로 말하는 선교사들도 있었습니다.

 

1878년 미국 남 감리교회 선교사로 첫 번째인 리드(C F Reid 1849-1915)선교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봉사 활동보다는 차라리 복음전도 사업을 우리 선교부의 주된 특징으로 삼고자 한다. 중국에 이어서 여러 기관 학교 병원 등이 가장 유능한 사람들과 많은 돈을 소모하였었다. 좋은 학교와 병원은 물론 훌륭한 기관 사업이다. 그런 나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업가운데 지극히 적은 비율만이 교회 안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아 왔으며 또 복음 전도 사업에 치중하는 선교부가 수천에 달하는 성도들을 헤아리는 데 반하여 그러한 기관 사업에 치중하는 선교부는 겨우 수백의 신도들을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

 

이 같은 입장은 신학교육정책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레이놀즈 선교사가 규정한 신학 교육 정책을 보면 첫째로 목사는 영적인 경험을 가진 영적인 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둘째로 성경 말씀을 핵심적으로 가르치되 기독교 중심의 역사와 지리를 철저히 교육시킬 것이며. 세 번째로 목사의 교육정도는 한국 교인의 지적 수준에 상응하게 할 것이지 지나치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거나 서로 어울리지 아니할 정도로 높은 교육을 시킬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원칙 하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이 교육에 관한 입장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낯 설은 한국 땅에 와서 해야 할 사명은 교육을 시켜 문명인을 만드는 일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해서 구원시켜 천국가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직 복음전도에 합당한 교육만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니스켓 선교사는 “그들의 사역자는 항상 그들에게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외쳐 되고 있다 그래서 학교 사역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차적인 고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교회의 공식입장은 ‘불신자는 전도하고 신자는 교육시키다“였습니다. 비록 형평상 불신자의 입학이 허용된다 해도 전체 학생수의 60%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한국에서 기독교 전도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신학과 신앙성숙이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선교사의 입장은 우리나라가 옛 부터 얼마나 교육열이 심하였었는지를 간과한 일로서 그 후 김구 이광수 이동휘 등 많은 지식인들과 애국인사들이 교회를 떠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열정으로 한국인들을 가르쳐 수많은 인재들을 기러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1901년부터 전주 선교부에서는 학교 설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교부는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교육사업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 우리는 선교사들이 선교회가 책정한 계획에 따라 남녀 학교를 각각 하나씩 새우기를 권하는 바이다”라고 학교설립의 뜻을 밝히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훈련된 남녀 사역자들을 확보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학교 설립에 동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02년부터 전킨 선교사는 군산의 그의 서재에서 소년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여 영명학교라하고 그의 부인은 안방에서 소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멜본딘 여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멜본딘이라 함은 미국 버지니아주 랙싱톤 장로교회의 부인들이 불 선교사부인의 소식을 듣고 학교 신축기금을 모아 보내왔는데 이들 부인들이 멜본딘 학교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군산에 근대 교육의 산실이 탄생되었고 오늘에 까지 학교 교명은 각기 제일고등학교 영광여자고등학교라고 바뀌었지만 수많은 군산 인재들이 해마다 알알이 영근 열매로 한국 사회에 배출되고 있습니다.

 

군산영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전킨 선교사는 미국 여러 교회에 학교 건물 신축과 교육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호소를 하였습니다. 미국의 교회들에게서 모금이 속속 오게 되자 중등부를 신설하고 3층 건물과 기숙사를 지었습니다. 새로운 서양식 3층 건물은 군산 지방에 명물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오기도 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 식민지 교육이 실시되자 교회가 운영하는 대부분의 학교들이 폐교되는 일이 있게 됨으로 이런 학교들의 학생과 선생님들이 군산 영명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충남 한산에 있는 한영서원 중등부 학생들 전원이 영명학교로 옮겨 왔습니다. 이로서 영명학교는 활기를 띠고 학생들의 수업 받는 소리가 교실 밖 널리 군산 지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학제는 보통 6년과 그리고 고등부 4년으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매 학년 모든 과에 공통으로 교육을 시켰으며 세계사 수학 자연과학 기독문학 작문 음악 체육 및 율동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영명학교에는 투철한 민족주의로 무장한 애국애족의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910년대부터 박연세, 김인전, 문용기, 문정관,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등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어 1919년 3월 5일 호남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전킨 선교사 부인은 남편을 따라 전주로 옮겨 감으로 얼 선교사 부인이 멜본딘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바대로, 불 선교사 부인인 엘비 선교사는 자기의 모교인 멜본딘 대학에 군산 여학교의 건축을 호소하였습니다. 엘비 선교사의 호소를 들은 멜본딘 대학의 졸업생들이 모금운동에 나섰고 심지어 멜본딘 대학의 여학생들은 아침식사를 금식하여 모은 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빵 장사를 하여서 얻어진 이익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내진 돈으로 구암에 아담한 신식 3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군산 여학교라고 부르던 학교명을 앞에서 소개 하였듯이 멜본딘 여학교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멜본딘 여학교의 교사로 성경과목을 전킨 선교사 부인의 조사였던 김부인이 담당하였는데, 김 부인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당시 학생들이 존경하던 선생님 중 한 사람 이였습니다. 그 외 안락 소학교 및 군산 진료소 소장으로 있던 오긍선 박사의 두 여동생이 서울에서 고등과 교육을 이수하고 군산에 내려와 선생님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학교사정이 어려울 때에 엘비 교장의 초청으로 멜본딘 여학교의 학감으로 김영배 영수가 취임을 하였는데, 김영배 영수는 일찍이 서울에서 예수를 믿고 고향에 내려온 큰 형님 되는 김규배의 명령에 못 이겨 교회를 다니며 영명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생활 중에 믿음이 크게 성장하여 군산지역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피신생활 한동안 하던 중 멜본딘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충남 서천 출신인 윤석구는 만주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군산에 와서 멜본딘 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1937년 신사참재를 반대하다가 학교가 폐교가 되고 선교사들이 강제로 귀국하게 되자 윤석구는 한약 종사업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후 건국준비위원과 독립촉성회 군산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제헌국회의원이 되고 초대 체신부장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전북 서부 지방에 3,200명의신자와 50여개의 교회당이 있어 교회 내에서 운영하는 사립보통학교가 21개소였고, 학생수가 436명이였는데 비록 학생수가 51명이었지만 여학교는 멜본딘 밖에 없었습니다. 디샤트 여선교사가 풍금을 치며 노래를 가르치자 여학생들은 신기하게 여겼고 이웃사람들도 구경을 왔습니다. 케슬러 간호선교사는 위생을 담당하였는데 여성의 생리변화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여학생들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던 일이라 신기하고 놀라워하였습니다. 엘비선교사는 가사를 담당하여 재봉틀을 가르치고 얼 선교사 부인은 자수 놓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멜본디에서 배운 여 학생들이 졸업 후에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 개 교회에서 지역의 복음화와 신문화 운동 야학운동을 이르킴으로 당시 침체된 민족의 활기를 북돋아 나가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부 여학생들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 부설 간호학교로 진학하여 간호사로 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여성이 장인택 조사의 큰 딸인 장한나를 들 수 있는데 멜본딘 보통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 고등과를 거쳐 멜본딘에서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최주현과 결혼하여 옥구지경에서 살았는데 자녀들을 잘 키워 모두 한국 의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군산 전주 지역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온 선교사들은 보다 원활한 선교 활동을 위해 선교사들 간에 일정한 선교지를 나누어 활동하기로 하였습니다. 군산 서북부지역인 옥구 익산 그리고 김제 부안을 불(부위렴)선교사가, 군산 동북부 지역인 부안 부여 서천 옥구 익산은 헤리슨(하위렴) 선교사가 담당하고, 데이트 선교사는 전주의 서남부 지역인 임실 남원 금구 정읍 고부 태인 부안 등을 선교지로 하였으며, 레이놀드선교사는 전주 서북부지역인 김제 고부 흥덕 조촌 이서 등을 선교지로 삼았습니다. 전주 동남부지역은 윈(Winn,Samuel Dwight 위인사. 1880-1954 1911년 전주선교부에 부임)선교사가 남원 인실 진안 장수, 클락(Clark, William Monroe 강운림 1881-1940 1909년 전주에 부임)선교사는 무주 상관면 장수 진안등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멕커첸(마로덕)선교사는 전주 동북부 지역과 군산 서북부 지역을 맡아 익산 보령 서천 진안 무주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소개 할 멕커첸(McCutchen 1973-1960) 선교사는 호남 초기 선교사에서 가장 혁혁한 선교활동을 한분 중에 한분이라 할 것입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미국 사우드 케롤라이나주의 비숖빌리라는 곳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콜럼비아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 후 1902년 미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전주지역 선교사로 부임하여 왔습니다. 연례 모임의 결정에 따라 멕커첸선교사는 헤리슨과 1년 동안 함께 선교지를 돌며 견습 과정을 거친 후 1904년 9월부터 전주 동북부지역 선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위로는 무주에서 아래로는 목포 제주에 까지 그의 활동 범위는 참으로 크고 넒어 그만큼 그의 선교역사는 괄목 할 만 하였습니다.

 

장로회 서기에 그가 선교 활동하여 세운 교회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1902년 이경문씨와 함께 무주군 석정리 교회, 1903년 정정보씨를 구원하여 시작된 익산군 삼기면 서두리 교회, 오경수씨와 10여인을 구원시켜 1905년 전주 소룡리 교회를 세웠으며, 같은 해 최재순 씨를 입교시켜 익산 선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조사 최대진씨의 전도로 장경태 정찬씨와 함께 초가 4간을 매입하여 시작한 삼례교회가 있습니다. 1906년에는 이춘경씨를 구원시켜 시작한 전주 신리교회, 같은 해 유기택 박태호씨와 함께 금산 지방도 교회를 세웠으며, 장덕선씨를 전도하여 세운 전주 율곡리 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1907년엔 전의 심은택씨를 구원하여 전주 구개리 교회와 김원중씨를 믿게 하여 익산 황화정교회를 세웠으며 금산 읍내교회를 최대진 조사와 함께 학습인 7명을 세우며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해 문호순 김병섭씨를 믿게 하여 진앙 대불리교를 시작하였고, 미 감리회 전도대에 의해 복음을 믿은 이기황씨와 금산 하가리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같은 해 황준권 이원지씨를 전도하여 진안 세동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본 교회에서는 1902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새로 짓고 이사하였지만 1902년에 세워진 옛 교회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1908년에는 김찬중 한윤성을 전도하여 조사 김성원씨와 함께 무주삼가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조사 방승섭씨와 함께 진안 읍내교회를 김성두를 구원하여 무주 이목리 교회를, 이찬경 박정숙을 구원하여 조사 정찬신씨와 함께 전주 구정리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09년 멕커첸 선교사는 오경수, 오경목씨를 구원하여 소룡리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교인수가 많아지자 교회를 건축하여 전주 종리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같은 해 최국현씨를 구원하여 전주 남문외 교회가 시작되었고 1913년에는 이덕봉씨를 구원하여 금산 역평리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교회뿐만 아니라 하교도 여러 곳에 설립을 하였습니다. 전주 봉동면 낙평리에 영흥학교를 세웠고, 금산 읍내에 금산 신광학교를 세웠으며 역시 금산군 진산면에 육영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전주 선교부 대지 내에 전주 성경학원을 개설하여 농촌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이처럼 장로회 사기에는 멕커첸에 세운 교회로 21곳으로 소개 하였지만 실제로는 더 많았다고 하겠습니다. 실상 멕커첸 선교사가 맡은 구역은 전북 26개 군 가운데 11개 군을 맡아 1년 중 4개월을 순회전도를 하였습니다. 멕커첸 선교사의 선교 표어는 “항상 준비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자! Make ready and get down among them."이였습니다.

 

1905년 9월 선교보고서에 이런 보고 기록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멕커첸과 최대진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2-3개월씩 머물면서 복음사역을 하였다. 이 지역은 7개 군으로 나뉘어 있다. 여기서 우리의 사역은 열매를 맺고 안정되어 가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소규모의 그룹들이 주일날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잦는 곳이 다섯 군데나 된다. 이들 중 두 곳에서는 몇 사람이 초신자 반에 들어갔고 한곳에서는 두 명의 세례교인이 나왔다”

 

“다섯 개 군으로 구성된 이 지역에서 멕커첸과 그의 조사 최가 활동하였다. 그들은 두 달 가량 함께 활동하였는데 조사 최는 이 지역의 개척을 위해 한 달 간 더 일했다. 많은 복음서적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사역을 맡은 다른 복음 전도자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지방 사마리아지방 유대지방 때로는 두로와 시돈 베레아 지방에 까지 복음 전파 하시느라 바쁘게 다니셨던 것처럼, 멕커첸 선교사 역시 예수님의 제자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전라도 각 읍면리 마을마다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니 전도북도 어느 곳이든 그의 발자국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남전교회와 동련교회의 처음 역사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익산시의 교회가운데 가장 오랜 교회로 함라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고, 대체로 1897년에 설립된 남전교회가 가장 오랜 교회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전킨 선교사에 의해 전도 받은 7명의 신자가 50리길 군산에 와서 예배를 드리다가 마침내 1897년 10월 15일 오산면 남전리에 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처음 예배 장소는 이윤국씨 집에서 남차문 교회라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899년 3월 15일 전킨 선교사의 집례로 김정현 이성일 부부가 익산지역 최초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남전교회를 말할 때에 1919년 4월4일 익산 솜리 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를 비롯하여 김만순 김필례 장경춘, 군산영명학교 교사 문용기(문정관으로도 불린다)와 학생 박영문 박도현 등 교인 150여명이 하얀 한복들을 입고 솜리 장날에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받아 허리춤과 바지가랭이에 감추었다가 솜리 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제 헌병대가 긴급 출동하여 시위를 강제 진압을 하였습니다. 당시 문용기는 일본 경찰이 칼로 오른 팔을 내려치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들어 계속 만세를 불렀고 다시 왼손까지 내려치자 땅에 뒹굴면서 마지막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군산 구암교회의 삼일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당시 문용기 열사가 입었던 피묻은 두루마기를 보면서, 삼일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열사들의 피뿌 림이 민족의 제단에 뿌려졌지만 상대적으로 문용기 열사의 순국의 역사가 덜 알려져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 옵니다. 이 때 박영문 장경춘 등도 함께 현장에서 희생되었습니다. 한편 솜리 장터에 참여하지 못한 30여면 남전교회 교인들이 별도의 만세 시위를 벌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남전교회 교인들의 4. 4 만세운동은 후에 이승만대통령이 높이 평가하여 친필로 순국선열비문을 하사하였는데, 6.25 전쟁 중 북한군이 이 비석을 넘어뜨리고 “李承晩書”(이승만서)라고 새긴 부분을 깨뜨려 없애려 한 흔적이 현재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 총회는 전북 익산 남전교회를 4·4 솜리 만세운동 기념 기독교사적지로 웅포 제석교회와 함께 지정하였습니다. 역사위원장 정재훈 목사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국가와 민족, 사회에 큰 공헌을 했던 교회”라며 지정 이유를 설명을 하였습니다. 이런 애국 애족의 전통을 이은 남전교회는 6.25 전쟁의 시련도 고스란히 겪은 교회였고, 1970년대 기독교 인권운동의 중심에 섰었으며, 80년대 반부패 운동에도 당당하게 나섰던 교회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해방, 6.25한국전쟁의 참화 그리고 민주화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현대사란 수례를 직접 이끌어 간 교회이기도합니다.

 

남전교회에는 귀한 보물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한 교회에 있던 종을 당시 남전교회 출신을 미국에 유학중에 이 교회를 다니던 분이 요청을 하여 옮겨 오던 중 전쟁으로 일본에 잠시 머물었다가 1951년 남전교회에 오게 되었는데 이 종은 1884년에 제작된 종이였던 것입니다. 이 종 표면에 그 제작년도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데 남전교회에서는 매년 성탄절에 이 종을 탄일종으로 울린다고 합니다.

 

다음엔 황등 동련교회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1901년 옥구군 서수면 신기리 장평마을에서 송군선 장휘서 정문주 백락규 장치오 여러분들이 지성록씨 집에 모여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다가 1902년 황등면 동련리로 옮겨 옴으로 동련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동련교회를 시작할 때 백낙규(1876-1943)씨의 도움이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백낙규씨는 전남 승주군 송광사 옆 뱃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낫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송광사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다가 동학에 귀의하여 송광군 이음리에서 동학접주로 1893년 동학혁명군에 참여하여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머리카락 판돈으로 소쿠리 장사를 하며 장터마다 찾아다니다가 황등 장에서 해리슨(하위렴)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장평교회를 다니다가 동련리에 자리 잡고 살면서 동련교회 설립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교회당을 신축하였습니다. 그리고 1904년 세례를 받으니 동련교회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1909년부터 불(부위렴)선교사와 함께 학교를 세워 운영하던 중 정식으로 사립학교인가를 받아 1910년 8월 15일 학교를 시작하여 예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구원의 원동력이라 하며 농민들을 깨우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계동학교는 1935년까지 4년제로 운영되어 오면서 105명이 졸업을 하고 1936년 부터는 6년제로 1947년까지 운영되어 121명이 졸업을 하여 수많은 우국충정의 인사들이 이 학교에서 배출이 되었습니다.

 

백낙규씨는 1915년 12월 15일 동련교회 장로로 장립을 하였습니다. 자녀로 6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백흥길씨는 19세때 동학의 접주로 동학농민항재에 참여 한 후에 주유천하하며 지내다가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기전여학교 출신 전점순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늦게 1959년 장로가 되었으며 그의 장남 백인선 권사이고 백인선 권사의 장남 백종근는 한국산업연구원(kiet)에서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미국엣 텍사스오스틴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오레곤주 포트랜드의 비버튼 한인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백낙규 장로의 차남 백기선씨는 역시 1986년 8월 장로로 장립하였으며, 삼남 백형남씨는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6.25 한국전쟁 때 순교를 당합니다. 그의 부인 강복식씨가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백운선씨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 후 호남대학 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광주가나안교회 장로로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백운선 장로의 두 딸 중 큰 딸은 목사에게 작은 딸은 의사와 결혼을 하여 교회를 섬기는 등 충성된 가문에 천대에 이르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백낙규 장로님의 가정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015.8.28. 보내온 백종근목사의 이메일 참조)

 

 

다음은 서두교회를 소개 하려고 합니다. 먼저 서두교회의 시작은 이러하였습니다.

1898년 11월 삼기면 서두리에 정정보씨가 기도처를 마련하므로 교회의 첫발걸음을 내 디디었습니다. 그 후 멕커첸선교사의 지도하에 강화철씨등에 의해 1903년 10월 10일 원서두 546번지에 초가 3간을 빌어 정식 교회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서두교회에는 애국지사 박병렬 장로(1881.3.5-1940.9.22)님이 있으십니다. 박병렬은 전북 익산군 삼기면 간촌리에서 한의사 박영호와 방씨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박병렬은 일찍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도마리교회, 방주간교회, 와리교회, 부송교회 등의 매서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익산 4.4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비록 적은 수이지만 서두교회 교인들은 박병렬을 따라 참여하였습니다. 박병렬은 곧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옥중에서 밤낮없이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눈물의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멕커첸 선교사가 이리경찰서에 박병렬을 면회하여 위로하고 일걍에 박별렬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일경은 매우 고깝게 여겼지만 다른 도리 없이 석방하였습니다. 박병렬은 1935년 5월 7일 서두교회 장로로 장립을 합니다. 그 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다시 심기주재소에 체포 감금되어 있으면서도 그는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면 그만큼 일본제국주의 생명이 단축된다.”면서 고함을 지르자 일경은 모진 고문을 하였습니다. 깊은 상처를 입고 출소하였지만 고문의 후유증이 심해 1940년 9월 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박병렬장로의 후손으로 박요셉 장로, 온누리교회 박수웅장로, 전주 박인출 이비인후과 의사가 있습니다. 1986년 7월 17일 후손들과 교인들이 힘을 모아 엘리사기도원에 박병렬장로 순교비가 세워져 그의 아름다운 신앙의 빛을 후대에까지 전해 주고 있습니다.

 

제석교회는 지난 달 소개한바가 있지만 좀 더 부언하여 소개합니다. 1899년 궁말교회(구암교회)에서 불(부위렴)선교사의 달성경학교에 참석했던 엄주환, 강진회, 송원규, 강두희, 강문회 등이 복음을 받아들여 군산선교부 전위렴 선교사에게 교회설립을 허락받고 1906. 12. 25 엄주환의 사랑채에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08년 4월 8일 군산으로 이주한 홍종필씨가 14칸 곱패집을 희사하므로 십자가를 설치하고 교회당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곰배집이라고도 하는데 곱은자집이란 뜻입니다. 집모양이 ㄱ자집으로 경기지방 말로서, 평안도 지방은 꺽음집, 충청도 지방에서는 곱패집이라 부릅니다. 곱패집은 평면의 모양이 ㄱ자를 이룰 뿐만 아니라 용마루도 ㄱ자로 꺽인 형태입니다. (표면상 외양간이나 부엌을 덧댄 ㄱ자 모양이어도 용마루가 하나인 것과는 구별이 됩니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등지에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제석교회는 꺽인 부분에 강대상이 놓이고 남녀가 서로를 볼 수 없는 ㄱ자 구조의 예배당이다. 해리슨(하위렴)선교사가 파송당회장으로 교회를 지도하여 1909. 4. 30 사립부용학교를 세우고 100여명의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몇 주전에 소개 드린바대로 홍종필씨는 군산개복교회 장로가 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1923. 1. 22 개복교회 3대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1930. 9 제19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임기도 하였습니다.

 

ㄱ자집은 20세기 중반에 쓰인 말로서 처음부터 ㄱ자집으로 불린 것은 건축 시기가 20세기 중반 이후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엄칠중씨는 강경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제석교회 교인인 이형오는 함라 웅포장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엄주환씨는 6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엄창섭씨는 강경장날 독립선언서를 일고 태극기를 흔들었다하여 2년 징역을 살기도 하였습니다. 1980년 8월 14일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습니다.

또 둘째 종석씨는 4남4녀 4년 터울로 낳았는데 엄기택 장로와 엄기순 장로 그의 아들이 엄법용장로 그리고 엄기묵목사님이 있습니다. 엄기순장로는 1950년 6.25한국전쟁시 고등학생으로 전투에 참석하여 낙동강 전투로부터 압록강에까지 이르러 혁혁한 공훈을 세움으로 금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현재 제석교회의 은퇴 장로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제석교회는 남전교회와 함께 익산지역 삼일운동 사적지로 인정되어 있어 후대들에게 나라사랑 민족구원의 신앙의 본을 깊게 새겨주고 있습니다.

 

 

윌리엄 B. 해리슨(William Butler Harrison, 하위염;河緯廉1866-1952)선교사에 대해 소개하려 합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1866년 미국 캔터키에서 출생하여 캔터키 센트럴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또 루이스빌 의대에서 1년간 의학 공부를 한 다음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894년 남장로교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고 제 3진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잠시 서울에서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와 풍속을 익힌 다음 1896년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선교사와 함께 나주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주의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유진 벨선교사는 오웬(C C Owen 오원)선교사와 함께 목포로 내려갔고 해리슨 선교사는 전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1897년 전주 서문 밖 은송리에서 약간의 배운 의술로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전주에서 매 5일 마다 열리는 장날 인근 장터마다 헛간 2곳을 마련하여 복음을 전하니 장터에 몰려온 사람들은 장터의 독특한 들뜬 분위기와 아울러 서양사람 구경을 하고 싶은 호기심과 그가 어눌하게 전하는 복음을 듣고 즐거워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리슨 선교사는 장터 선교사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군산에서 활동하던 전킨 선교사가 건강상 문제로 전주로 옮겨오게 되자 대신 해리슨 선교사가 군산 선교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1903년 부인 데이비스가 별세한 후에는, 선교지역을 아주 군산으로 옮겼습니다. 전킨 후임으로 군산 영명학교 책임자, 남전교회(1904-1908 및 1916-1917), 개복교회(1905-1911),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웅포교회, 동연교회, 무주읍교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해리슨 선교사는 군산지역뿐 아니라 익산지역까지 선교활동을 하면서 익산 고현교회 설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06년 6월 12일 당회장 해리슨 선교사와 서기 양응칠 조사의 집례 하에 고현 교회 첫 번 학습문답이 있었습니다. 고현교회 당시 첫번째 당회에서 학습문답을 하였는데 당시 당회록(제1권 3쪽)에,

 

“1906년 6월 12일 온 교우가 회집하고 하위렴목사와 양응칠조사가 참석하야 기도하고 학습문답을 하였는데 그 중에 정사옥 김경장 김문선 삼씨를 시행의 가합한 결과를 좇아 학습을 세우다”

라고 하였고

 

다시 12월 2일에 두 번째 당회가 회집하여, 당회록(제1권 4-5쪽)을 보면

 

“하위렴목사와 양응칠 조사가 회집하야 기도하고 문답을 한 중에 김분순 김순녀 박순서댁 오원집댁을 합당한 결과를 좇아 학습을 세우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학습교인들은 양응칠 조사를 통해 6개월간 열심히 성격과 요리문답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등을 공부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1907년엔 박분순을 비롯하여 5명이, 1908년에는 김자윤을 비롯하여 4명이 1909년에는 오덕근을 비롯하여 3명이 1910년에는 정대식을 비롯하여 6명이 학습을 받는 등 해마다 그 수가 점점 많아져 받았습니다.

 

그리고 1907년 12월 9일 처음 세례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세레자는 정사옥 김경장 김문선 김분순 김순녀 박순서댁이였습니다. 또 이날에 첫 번 유아세례가 있었는데 바로 오원집의 아들이 그 은혜를 받았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군산과 익산 특히 고현 교회의 성장을 위해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인근 지역을 쉴 새 없이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며 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체력이 쇠진하여 요양 차 1928년 귀국한 후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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