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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 남도행전(예수병원 신흥학교 시전여학교 계속)

전주 예수병원의 시작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합니다.

1896년 해리슨(W.B.Harrison) 선교사가 전주 은송리에서 진료소를 차리고 환자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1년 정도 의료기술을 습득한 까닭에 전문적인 치료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료진료 보다는 복음전도에 몰두 하다 보니 진료소를 자연히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정식 의학을 전문한 잉골드 의료선교사를 전주에 보내 주셨습니다. 잉골드 의료선교사는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1896년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던 것입니다.

 

미국 남가주 록힐제일장로교회에서 파송식에 잉골드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갈 수 있다는 게 기쁩니다. 하나님이 이 특권을 제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과 말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면, 저는 그 땅에서 외롭게 살아갈 엄두를 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성경, 성경의 명령과 약속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똑똑히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보다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더 큰 자극은 없습니다.”

 

내과의사였던 잉골드는 오직 성경의 약속과 말씀을 품고 미지의 나라인 조선으로 출발하였습니다. 1897년 7월 미국을 떠나 오랜 바다 여행 끝에 9월 15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10월 18일 마티 테이트여선교사와 드류선교사부인과 아이들과 같이 군사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자전거 조랑말 가마로 구성된 선교사들의 여행은 대단한 구경거리 이였습니다. 1898년 11월 3일 잉골드에 의해서 전주 진료소가 다시 문을 열 개 되었습니다. 진료소 건물은 흙벽 초가지붕에 쪽 바가지로 뜨는 얕은 우물이 있는 좁은 마당, 낮은 문, 기름으로 밝히는 서유램프, 남자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낮은 담장의 보통 조선 초가집 이였습니다. 일상생활 중에 가장 불편한 것은 낮은 문턱에 자주 이마를 찧는 괴로움 이였다고 합니다. 진료 첫날에 6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첫 달에 100명이 치료받았습니다. 잉골드는 때때로 군산을 비롯하여 김제 송지동교회, 익산 남전교회 옥구 지경교회 등을 순방하여 진료를 하며 1903년 한 해 동안 1천 백 명을 진료하였습니다. 잉골드는 1905년 전주지역에서 혁혁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테이트 선교사와 결혼을 하여 부창부수의 선교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테이트 선교사는 심장병으로 미국으로 귀국하여 요양 중에도 미국 각처를 순회하며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하다가 1929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잉골드는 그대로 미국에 머물러 한국 선교를 후원하다가 1962년 10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작은 묘가 전주선교사 묘역에서 주님의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묘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아부도 기억하지 않는 그 묘지 앞에 매티 잉골드 테이트(Mattie Ingold Tate)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매티는 테이트와 잉골드 사이에서 태어난 딸 1910년 9월 15일 단 하루도 살지 못한 채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잉골드 선교사가 43살 때 몸이 극도로 쇠약할 때 출산을 이기지 못하고 사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낮 설은 땅에 단 하루도 살지 않고 하나님나라로 간 그 작은 매티는 아마도 지구상에 그들보다 더 굉장한 선교사는 없다고 할 만한 증거를 우리에게 남기고 간 엄마 아빠의 그 위대한 선교 역사를 보여 주는 산 증인이라 하겠습니다.

 

 

 

잉골드 선교사는 여성으로 전주의 부인환자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전주에서 이름을 날리는 백만의 할머니 무당이 진료소에 왔습니다. 발목에 독종이 나서 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섬기는 귀신에게 빌어 보았자 점점 더 발목이 썩어져 가고 있어 이러다가 발목을 자르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에 진료소를 찾아 온 것입니다. 잉골드 선교사는 깨끗하게 백만의 무당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백무당은 너무나 감격하여 잉골드 선교사를 집으로 초청하여 예배를 드린 후 자기가 평생 모시고 있던 신당을 불 질러 버렸습니다. 이 소문이 전주부내에 크게 소문이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진료소에 찾아 병을 고치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부인을 등에 업고 찾아 왔습니다. 잉골드 선교사가 보니 역시 발목에 종기가 곪아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 이 사람 병만 고쳐 주시면 예수를 믿겠습니다” 류경선씨 부인은 애걸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류경선씨는 매일 같이 부인을 업고와 치료를 받으니 한 달 만에 완쾌하였습니다. 류경선씨 부인이 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믿을 뿐 아니라 본래 성품이 착하고 똑똑하여 테이트 선교사가 그녀를 전도부인으로 채용하였습니다. 류경선씨 부인은 자신의 병에 대해서 간증하며 전주외각의 시골로 다니며 전도하였습니다.

잉골드 선교사는 여성으로 부인들만 아니라 남자들도 진료를 하는데 당시 남자의 몸을 여자가 만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일이지만 남자 환자들도 기꺼이 그녀에게 몸을 진찰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광목으로 전신을 덥고 진료 받을 부위만 구멍을 뚫어 진찰을 하였다고 합니다. 잉골드는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진료를 하니 그녀가 진료가방을 들고 나가면 많은 이들이 환영하고 길안내를 자처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전라감사 이완용이 듣게 되고 은송리에서 화산으로 선교사의 주택과 진료소가 옮길 때에 모든 비용을 전담하기도 하였습니다.

 

1902년에는 병원건물을 지어 환자를 돌보았는데 1903년 한해 동안 1,500명의 환자가 다녀 갔습니다.

니스벳은 그의 책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습니다. “ 잉골드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은 여인 중 한 사람이 그 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남편이 술을 더 이상 먹지 못하도록 치료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아이들과 저를 때리기 때문에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잉골드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요 나는 당신 남편에게 치료약 곧 복음을 전해 주기위해 한국에 왔답니다. 그가 이 복음을 먹는다면 아이들과 당신을 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위로를 받고 갔는데 자신의 남편을 설득하여 한 조그마한 예배에 참석하여 위대한 의사에 관해 배울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의료 선교는 다만 병원 진료만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위생 관념은 아주 바닥이었습니다. 의사가 전염병 예방에 관한 소개 책자들을 나누어 주고 “파리를 잡으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염려 마십시오 파리가 하루에 10전어치 이상은 먹지 못 한답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1904년에 예수병원에 포사이드의료선교사가 부임하였고 1912년에 병상 30개의 현대식 병원건물을 신축하여 다니엘(T.H.Daniel 한국명:단의열 1879-1964)의사가 병원장에 취임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전주 예수 병원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펼치는 본격적인 복음병원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병원의학박물관에 가면 병원의 지난 역사와 수많은 선교사들의 발자취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전주 신흥학교의 처음 역사를 소개 하려고 합니다.

남장교회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지만 또한 그 방법으로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를 병행하여 선교하므로 선교 효과가 크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치고 치유하고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그 선교 방법을 따라 시행하는 가장 확실한 선교역사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복음 선교사 뿐 아니라 의료선교사가 함께 사역하고 또 교육선교사가 따라 들어와 복음을 전하니 삼위일체식 선교 방법이라 호남 선교는 다른 지역 보다 월등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1902년 군산에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가 세워졌고 목포에 정명여학교 1903년에 목포에 영흥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1908년에는 광주에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가 설립되었고 1912녀에는 순천에 매산 남녀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이때까지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10개 학교였습니다. 그 밖에 농촌 산간의 각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소학교가 1908년 통계에 의하면 38개 학교로학생수가 987명으로 남학생이 867명 여학새이 120명이나 되었습니다.

전주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레이놀즈 선교사와 테이트 선교사는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성경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899년 14명의 남자들이 들어와 성경학교가 시작하였습니다. 1900년 9월 9일에는 서문밖 완산 북림 기슭에 있는 레이놀즈 선교사의 집 사랑채에서 한 소년을 대상으로 근대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신흥학교의 출발 이였습니다. 이 최초의 근대식 교육을 받은 학생은 인근에 살고 있는 떡거머리 총각 16세의 김창국이였습니다. 후에 목사가 된 김창국에 대해서 이미 소개한바 있습니다. 1901년 7월 1일 해리슨 선교사와 그의 어학선생이 8명의 남학생을 대산으로 정규 주간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해리슨이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학생수는 16명인데 평균 출석수는 11명이며 평균나이는 11세이다. 9시에서 10시 30분 까지 해리슨여사(데이비스)가 그들과 gkaRpnrleh한 뒤 성경과 지리를 가르치고 10시 30분부터 12시 까지는 내가 산수 역사 성경을 가르치고 12시부터 1시 까지 한국어를 배우고 2시에서 4시까지는 중국어를 배운다. 그들은 대부분이 너무 가난하여 3년이나 4년 이상을 학교에 다니지 못할 것이다.”(전북의 기독교 전래 주명준 274쪽)

 

1903년 6월 20일 7일의 선발대의 한사람이었던 데이비스 여 선교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별세하였습니따. 지금까지 부녀자 와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특히 문맹퇴치를 위해 열심을 ᄃᆞ며 남편 해리슨 선교사를 도와 성경학교를 이끌어 왔습니다. 더욱이 해리슨 선교사가 세운 진료소 일을 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니 전북지방 선교사 중에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1904년 가을에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 서완재로 학교를 이전하니 학생이 10명이였습니다. 당시 교사는 해리슨 선교사, 해리슨부인, 최중진, 김필수 김명식등 5명이였습니다. 1906년 봄에 호현당 옛터에 기와집 한 채를 지오 이전하니 학생이 증가하여 55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때 교수 과목은 국문 한문 성경 역사 습자 체조 창가 산술 도화 등이였습니다. 1908년에 서문안 당성동에 있는 해리슨 선교사의 기와집을 수리하여 학교로 삼으니 처음학교 이름이 “예수교 학교”로 하였다가 니스벳선교사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신흥학교”아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9월에는 미국 남장로교회 총회 선교부의 지원하에 한국 교육선교에 관심이 많은 그레이엄(C.E.Graham)이 1만불을 기부하여 회현당 북림록하에 80평 2층 양옥집 건물을 안공하였습니다.

 

회현당은 태조 6년(1406년) 성균관을 설치하였고 문묘에 있는 명륜당에서 유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숙종 26년 (1700년)에 당시 김시걸 관찰사가 지방 유지인 진사 오명기와 더불어 황학대 기슭인 옛 사마제(생원과 진사가 모이는 곳)터에 학당을 세우고 회현당이라 하였습니다. 영조 14년(1738년) 이주진 관찰사가 희현당을 넓게 중수하여 학생들이 유학을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1701년 5월 15일에 세운 희현당 사적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습니다. 봉령대부 전 군수 유백승이란 분이 지었다고 합니다.

 

“... 선비들이 뜻을 희현에 두고 공부하며 마음을 부모의 현창에 둔다면 지향하는 바가 바르고 학습하는 태도가 아름답지 않겠는가! 또한 근본을 찾아내어 공부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무릇 책을 옆에 끼고 배우러 오는 사람이 모두 바른 학문에 젖어들어 큰 과업에 분발한다면 위로는 성현이 될 것이요, 아래로는 부모와 더불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니 이른바 희현의 공과 현친의 일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희현당에 세워진 신흥학교, 200년 전 유백승 군수가 지은 사적비가 200년 후 신흥학도들에게 주는 말과 같아 하나님이 지정해 준 학교 터라고 하겠습니다.

 

1911년 니스벳 선교사가 목포로 이동하고 잠시 레이놀즈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다가 1913년 엘버솔이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학교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12년 3월 25일에 4년제 공등과 졸업생을 4명 배출하였습니다. 당시 졸업생으로 송휘규(후에 송철로 부름) 가 있는데 1914년에는 모교의 물리와 수학 교사가 되었습니다. 근 1916년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25년 Polytec High school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Berkley 대학에서 수력발전학을 공부하여 1930년 봄 졸업을 하고 귀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식민통치하에서 그의 꿈을 실현할 수 없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이승만 박사와 함께 <대한인동지회>를 창설하고 미주 한인 광복운동의 재정총책을 맡았습니다. 6.25사면 후에는 조국에 구호품을 보내는 일을 주도하였으며 대미 외교활동의 막후 주역을 맡아하였습니다. 1956년 귀국하여 대한민국 애국장을 받고 중앙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하고 대한민국 동백장 훈장을 받았습니다. 신흥학교 학생 시절 송철박사와 이승만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 그의 일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11년 여름 이승만 박사가 신흥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이승만박사는 감동적인 강연을 하였습니다. <배움에는 노예가 없다>, <밤 낮으로 노력하여 새로운 민족의 역사를 창조하자>는 내용의 강연은 송철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후에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 강연은 나를 또다시 새로운 삶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그 결과 나는 나도 내 분야의 공부를 저 이 박사처럼 민족을 위해서 달성하리라는 결심이 용솟음 쳤다.”

 

1919년 3월 13일 전주의 장날이었습니다. 이날은 다른 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장으로 몰려 왔습니다. 12시아 1시 사이 기독교와 천도교의 지도자들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학생들 그 밖에 수많은 시민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신위를 하였습니다. 3시와 4시 그리고 밤 11시까지 크고 작은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다음날 14일에도 신흥학교 기전학교 학생들 서문밖교회 교인들 등이 주동이 되어 다시 만세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서문밖교회 목사인 김인전 목사는 그 시위의 배후인물로 지목이 되었습니다. 이 시위의 신흥학교 학생 주동자로 고형진 남궁현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 등이 체포 구속되었습니다.

3.1만세 운동이후에도 신흥학생들의 배일 민족사상은 투철하여 항상 일경의 주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29년에 있던 광주학생운동때에도 전주 신흥학생들이 같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주동학생 35명이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신흥학교는 독립운동가들의 산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신흥학교 출신들이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신흥학교 교가를 부르니 이것이 빌미로 만주신흥무관학교의 교가가 되었습니다. 5회 졸업생 유 엽님(불교 수련을 하여 영남일보사 주필 불교신문주필역임)의 회고에 의하면 김진상선생님이 작사하고 최남식 선생님이 선곡해서 불렀다고 합니다.

 

신흥학교 출신으로 우리가 기억할 한 분은 바로 서남동교수입니다. 서남동 교수는 1918년 7월 9일 목포앞 무안군 자은도에서 출생하여 목포 의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소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 19세 나이로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지사대 신학부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서남동 교수는 한국의 현대 신학자로 최고의 학문적 위치에 올라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장, 연합신학대학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두 가지입니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몸을 부닥치며 반독재 민주투쟁을 하였고 한국 민중신학을 세계적인 신학으로 발 돋음 시킨 분이라는 것입니다. 1984년 7월 19일 췌장암과 간암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처음 묘소는 광주 파주군 금촌면 탄현 기독교공원묘지였으나 1999년 3월 26일에그광주 망월동 5.18민중항쟁희생자 묘역에 안장 되었습니다.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폐교했다가 1946년 11월 신흥초급중학교(3년제)로 인가받았고, 1950년 4월 신흥중학교와 신흥고등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2000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전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하여 호남 지역 선교부들은 병원 설립, 의료 선교 사업 전개 및 학원을 통한 교육 선교 사업에 힘을 쏟아 군산 구암 병원, 전주 병원, 목포 병원, 광주 병원, 순천 병원, 광주 나병원 등 현대식 병원들을 세워 환자 선교와 신흥 학교, 기전 여학교, 정명(貞明) 여학교, 영흥(永興) 학교, 숭일(崇一) 학교, 수피아(須彼亞) 여학교, 영명(永明) 학교, 메리 볼딘 여학교 등의 학교 설립을 통하여 교육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1904년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주·군산·목포 등 세 선교부 내에 각기 남·여 중학교가 하나 씩 설립되었고 그 학생 수는 126명이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 경과한 1907년에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가 44개교였고, 학생 수는 497명이며, 3년이 경과한 1910년에는 64개교에 1,740명으로 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 하였습니다. 이는 선교사들의 교육선교의 열의와 새로운 문명을 배우려는 청소년들의 열정이 합하여 선을 이룬 결과라 하겠습니다. 이때 세워진 학교들이 오늘 날까지 이어져 수많은 호남의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

 

기전여학교는 1900년 4월 24일 테이트(Mattie S. Tate) 여선교사에 의해 최초 6명의 여학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1902년 9월 1일 W. 전킨 여선교사(결혼전 이름은 Marry Reburn. 전킨선교사 부인, 한국명:전마리아)가 신교육을 통한 여성 인재양성과 기독교 보급을 목적으로 화산동에 한옥 1동을 구입하고 학생 10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언제부터 기전여학교가 시작되었느냐에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니스벳선교사에 의하면, 테이트 여선교사가 1901년부터 일주일 중 사흘(월. 화.수)을 가르쳤고 한국 선생 한사람을 채용하였다(139쪽)고 하였습니다. 기전 90년사에서는 1902년 테이트 여선교사의 개인집에서 한글과 숫자 성경공부등 기초적인 교육을 2년간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127쪽) 안영로목사는 1900년 자신의 방에서 3-4명의 여학생들을 불러 모아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전라도가 고향이지요.69쪽) 주명준 교수는 “全羅道宣敎 四十周年略歷”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테이트 여선교사가)1894년 1월에 조선 서울서 조선가마를 타고 전주로 내려와서 선교사 업에 착수하였다. 1898년 여학교와 주일학교를 세워서 교수하시 시작하였다.....”(전북의 기독교전래 275쪽)

이 내용을 보면 이미 1898년부터 여성교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신흥학교가 1901년에 시작되었으니 호남에서 현대식교육은 여성교육부터 시작되었다고 주명준교수는 말하고 있습니다.

 

기전여학교 설립 당시는 4년제였으나 그 뒤 6년제로 개편되었으며, 초기의 교육내용은 한글.성경.여자독본.수신.산.·지리.윤리 등을 가르쳤습니다. 1908년 1월 2일 전킨선교사가 소천하자 그해 9월 교명을 전주기전여학교로 개칭하였습니다. 당시 교명은 우리말로 ‘전목사 기렴여중학교’, 영어로는 Junkin Memorial School for Girls 였습니다. ‘기전’이라는 학교 이름은 전킨선교사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09년 9월에는 화산동에 벽돌 2층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고 4년제 고등과와 1년제 예비과를 설치하였습니다. 이곳을 1956년 중화산동 1가 187에 교사를 새로 짓고 이전할 때 까지 학교로 사용하였습니다.

1913년에 고등과 제1회 졸업생 6명이 배출되었으며, 1919년에 보통과 와 고등과의 수업연한을 각각 4년으로 개편하였습니다. 1920년대에 이르러 학생 수가 점차 증가되면서 성장기에 접어들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불응하여 1937년 10월 폐교되었습니다. 이때까지 고등과 21회에 120여 명, 보통과 11회에 208명을 배출하였습니다.

 

기전여학교는 부산진일신여학교(1895년 10월15일 멘지스Isabella B Menzies 호주 여 선교사에 의해 개교)와 더불어 한강 이남에 민족정신이 투철한 수많은 애국여성들을 길러낸 학교로 역사를 빛내고 있습니다. 특히 1919년 3월 13일 전주만세 운동에 가담, 13명의 학생이 구속 기소되었고. 1930년 1월 24일에는 광주학생 운동과 관련 가담학생 39명이 구속되는 등, 1937년 폐교될 때까지 자주독립의 정신을 굳건히 지켜나갔던 학교입니다.

 

기전 80년사에 기전학교 여학생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한 가지 소개하면 쓰개치마 벗기 투쟁사입니다.(137쪽) 지금도 여학생들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머리모양입니다만 1900년 초기 그 시대 역시 여학생들에게 머리모양새는 구시대를 탈피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저항의 한 상징 이였다고 하겠습니다. 나이가 비교적 어리거나 아랫반 학생들은 귀밑머리를 탐스럽게 땋아서 검은 머리채를 치렁치렁 드리우고 끝에 금박 물린 다홍댕기를 살포시 매었습니다. 댕기의 종류도 다양해서 그냥 다홍댕기 말고도 검은 공단을 드리우고 오복수를 놓은 학단도 있었고 명주실로 예쁘게 댕기를 드리우기도 하였습니다. 상급반이 되면 머리맵시가 한결 그럴듯해집니다. 당시 기전 여학교에는 김유혜와 같은 결혼한 학생들도 다녔던 터라 올린 머리의 학생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결혼은 안했을지라도 어느덧 상급학생이요 성장했다는 빙거로 상급학생들은 머리를 올렸습니다. 머리를 따서 둘레를 치고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뒤를 틀어 돌려서 핀을 찔렀습니다. 이름하여 트레머리라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는 그렇지 않았으나 외출을 할 때면 어떤 양반집 여학생은 외출 시에 가마를 타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어김없이 쓰게치마를 머리에 쓰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전주도성에서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기전여학생들은 이 쓰개치마는 구시대의 유물이요 여성의 남성에 대한 예속화를 여전히 상징적으로 규정짓는 저항의 요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전학생들은 일편단심 이 쓰개치마를 벗고 당당하게 전주 시가를 활보하는 그 날을 위해 마음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기전학교 여학생들의 쓰게치마로 부터 자유를 외친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요즘은 '내외한다'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100년 전만해도 남녀 사이에 엄격한 유별의 법이 존재하였습니다. 흔히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남녀 간의 접촉을 규제 하여 여자아이는 10살이 넘으면 밖 갓 출입을 자제하고 집안에 있도록 단속하였습니다. 불가불 외출 시에는 가마를 타거나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규제는 여자에게만 국한되어 차별하는 법이 내외법이라고 합니다. 쓰개란 머리에 쓰는 물건의 총칭으로 영어의 「HEAD-DRESS」에 해당하며 따라서 패면용 쓰개란 얼굴을 가리는 기능을 하고 있는 모든 쓸 것을 뜻하며 우리나라의 너울, 장옷, 삿갓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쓰개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상하존비의 구별은 없었으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서민층이 사용하기에는 사치스러운 쓰개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유교가 생활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침에 따라 내외 하게 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습니다. 쓰개는 노동을 하지 않는 계층, 즉 도시여인이나 상류층 여인에 의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착용하였으나 외부 남자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마치 벌거벗은 듯한 매우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여자들은 교육받아 자랐났던 것입니다.

내외법에 의해 조선시대 남녀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구분되어 키워졌습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상 위에 눕히고 옥을 주어 놀게 한 방면, 여자아이는 바닥에 눕히고 기와를 가지고 놀게 했습니다. 자랄 때도 남자아이는 어른의 부름에 빨리 대답하게 하고, 여자아이는 느리게 대답하게 했습니다. 교육내용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남자아이는 5살이 되면 숫자와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르치고 9살에는 날짜 헤아리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10살이 되면 밖으로 내보내 스승에게 배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10살이 되면 집에서 방적, 양잠, 의복 짓기, 제사 차리기 등을 배웠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분명했습니다. 집의 구조 자체가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되었습니다. 안채는 여자 중심의 생활공간이었고 바깥채는 남자가 거처하도록 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중문이 있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방문해서는 안되었습니다. 남녀는 길을 달리해서 남자는 우측으로 여자는 좌측으로 걸어야 했습니다. 부부간에도 옷홰나 시렁을 구분하여 옷이 섞이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남녀가 대화를 할 때는 직접 말을 주고받아서도 안됩니다. 조선 시대 남녀는 직접 면대해서 말을 주고받아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노비와 같은 매개인을 두고 대화를 하였습니다. 가난해서 노비가 없는 경우에도 마치 노비가 있는 양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둘이 대화하면서 셋이 대화하는 양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대화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남자 손님 : " 이리 오너라, 이생원 계시냐고 여쭈어라."

안주인 : "아니 계시다고 여쭈어라."

남자 손님 : "어디 가셨냐고 여쭈어라."

안주인 : "안골 김주사댁에 가셨다고 여쭈어라. 그런데 어디서 오셨냐고 여쭈어라."(출처 : '조선 여성의 족쇄-내외법' - 네이버 지식iN)

이런 내외법이 아직 완고한 전주 지역에 존재하였기에 콜턴교장은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1911년 서울 배화여학당에서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학생들에게 쓰개치마 착용을 금지시켰더니 다수의 양반집 여학생들이 자퇴들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문 밖을 다닐 때는 검정우산으로 얼굴을 가리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쓰개치마는 여성인권차별의 상징이였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기전 여학교 학생들이 당당하게 도전하여 났섰던 것입니다.

 

1915년 10월 어느 주일에 학생들은 기숙사를 나와 교회로 가던 중 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쓰개치마를 입고 가는 일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비에 흠뻑 젖은 학생들이 감기에 거리게 되었습니다. 학생 임영신과 오자현이 콜턴(MissSusanne Avery Colton 1913년 9월1일 제 4대교장으로 취임 후 24년간 봉직) 교장을 만나 이 낡은 풍습인 쓰개치마를 벗개 해 달라고 사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콜튼 교장은 완강하게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아직 전주사회가 보수적이라 학교가 비난을 받을 것이라 두려워서 였습니다. 학교 측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학측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쓰개치마 반대에 앞장선 다섯학생을 퇴학처분을 하였습니다. 몇 주일 후 어느 주일날 전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퇴학학생들이 복학하지 않으면 전 학생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의를 하였습니다. 콜튼 교장은 만일 해산하지 않으면 학생들 역시 퇴학시키겠다고 강압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모든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이 시골인 임영신 등 7,8명이 동급생인 김인애 집으로 갔는데 그 곳이 바로 서문교회 김인전 목사댁이였습니다. 학생들은 김인전 목사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도와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님과 학부형들이 학교로 와서 콜톤교장에게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 줄 것을 청했습니다. 장시간 회의 끝에 퇴학당한 학생들이 복학을 하고 구시대 여성의 속박의 상징물인 쓰개치마를 다시는 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기전학생들의 이 선구자적인 작은 항거가 우리나라의 명실상부 여성인권해방 운동의 효시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 “에스 언니”삼기가 유행하였습니다. 에스(S)가 무슨 영어 약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secret이간요? 우리말로 “의자매義姉妹”라 하겠습니다. 당시 기전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였습니다. 1909년 화산동 300번지에 붉은 벽돌로 2층교사를 짓고 그 옆에 기숙사가 있었습니다. 초기에 기숙사생이 30명 정도로 한방에 4명씩 배당이 되었습니다.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던 여학생들이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고 돈독한 정을 나누기 위해 이런 에스언니가 등장하였습니다. 상급생은 마음이 드는 하급생을 골라 예쁜 선물을 주고 동생이 돼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상급생은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설래는 마음으로 그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의자매는 졸업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학창생활을 즐겁게 보내게 됩니다.

 

지금까진 초등학교 과정 이였는데 1909년에 고등과를 설치하였습니다. 초등과 6년을 졸업한 여 학생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함입니다. 1908년 매리 전킨 선교사가 귀국하여 그 후임으로 랭킹(Miss Nelie Beckwith Rankin) 교육여선교사가 2대 교장이 되었습니다. 랭킨 교장은 미국 캐롤라이나주의 사반나에서 1879년 12월 25일에 출생하였습니다. 1907년에 전주에 왔음으로 당시 랭킨의 나이는 28세로 미혼 이였습니다. 랭킨 교장은 얼굴이 아름답고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때로는 쾌활하여 학생들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 그러나 가르칠 때는 매우 엄격한 선생님서이였습니다. 만일 학생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입 주위에 붓으로 둥굴게 검은 먹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랭킨교장으로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발전하려는 그 시기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911년 8월 13일 맹장수술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랭킨교장은 한국에 온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나 전주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니 그 옆에는 앞선 간 전킨 선교사의 묘가 있습니다.

 

기전 80년사에 의하면, 미국 남장로교회의 외지 선교부에 데이비드 C 랭킨목사가 한국선교 상황을 보기위해 한국에 와서 1902년 12월 28일 북장로교회의 선교지역인 평안도를 시찰하던 중 평양에서 풍토병에 걸려 향년 61세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랭킨목사의 딸이 랭킨 교장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한국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자원하여 왔다가 불연 듯 천국으로 갔던 것입니다.

 

콜튼(Colton Susanne Avery 1878-1972 한국명 공정순) 교장이 기전의 4대 교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콜튼교장은 1911년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농촌 부녀자 교육을 수행 하던 중에 1913년 기전여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던 것입니다. 콜튼 교장은 기전여학교의 초창기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독립정신으로 인한 각종 사건들 사이에 기전을 지키기 위해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굳굳하게 자신의 정열을 다 쏟았습니다. 1941년 학교가 폐쇄를 당해 귀국하여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본부에서 활동하다가 은퇴 후 1972년 12월 20일 내쉬빌 은퇴선교사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콜튼은 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쇄를 당하자 운동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기전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오늘의 기전학교는 결코 콜튼교장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1913년 제 1회 졸업생 6명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1회 졸업생은 이봉이 신자영 조함라 임자희 김연순 김선애였습니다. 초기 기전여학교의 한국인 교사로는 김보원 이자경 김나혈 이묘남 김성배 김나혈선생의 남편인 김성식목사(1913년 8월15일임직) 등이 있었습니다. 김한순 선생과 김진상선생은 시간 나는대로 일본의 침략 경위와 우리나라 역사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들려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1915년 4월 숭의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현숙(1896-1980)선생이 기전학교로 부임하였습니다. 박현숙 선생은 아버지 박정규 어머니 최광명의 딸로 평양에서 출생 하였습니다. 1913년 평양숭의학교(새뮤얼 A 마펫 한국명:마포삼열 선교사가 1903년 평양에 세운 여학교)를 다니던 중에 황애덕 김경애 선생님과 함께 애국여성결사대로 송죽회(1913년 김경희교사가 주동)를 결성하였습니다. 박현숙은 학교를 졸업하고 기전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송죽회의 지방조직으로 공주회를 결성하였습니다. 박현숙선생은 학생 중에 임영신 오순애 오자현 송귀내 유채봉 등과 공주회를 결성하여 새벽마다 송림 속에서 구국기도회를 가져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 투쟁할 것을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박현숙 선생은 1952년 무임소장관과 1953년에 자유당 민의원을 하였고 서울 숭의 여중고를 설립하였습니다.

기전 공주회는 비밀리에 모금을 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보내곤 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도 이 소식을 듣고 암암리에 공주회와 함께 기도하다가 삼일운동 이후 교회를 사임하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부의장이 되었습니다. 1915년 공주회 오자현 학생이 제안하기를 매일 아침 조회 때 마다 부르는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기로 하니 학생들이 찬성을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강당에 모이고 일본인 하세가와 선생의 제창으로 일본 국가를 부르는데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또 동방요배를 하는데 학생들은 뻣뻣이 서 있었습니다. 분노한 하세가와가 경찰에게 알리니 일본 경찰이 달려와 주동자를 찾으나 모두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콜튼 교장이 일을 잘 마무리하여 다음부터는 일본국가나 동방요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교실마다 천황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공주회 결사대는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교실마다 걸려있는 천황 사진의 눈을 꼬챙이로 뚫어놨습니다. 다음날 이를 알게 된 콜튼 교장은 이일이 학교 존립의 문제라 생각하고 주모자를 찾으나 모든 학생들이 자기가 하였다고 나섰습니다. 그 일로인하여 다시는 교실에서 천황의 사진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18년 3월 20일 임영신이 기전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천안군 양대리의 양대국민학교의 선생으로 부임하였습니다. 1919년 2월 27일 함태영이 거지복색을 하고 임영신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재빨리 임영신선생에게 종이 뭉치를 주고 떠났습니다. 임영신은 곧바로 당시 결사대의 반장격인 서용란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500장을 등사하였습니다. 다음날 황은숙 한도숙 민원식 등을 통해 시골 여러 곳에 배부를 하였습니다. 임영신이 천안에서 기차를 타고 전주로 오는 중 경찰에 쫒기게 되었습니다 마침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말하고 아기에게 자기의 젖을 물리였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지만 상황은 급박하였습니다. 전주에 내려온 임영신은 김인전 목사님과 상의하고 신흥학교 출신인 최종삼, 김목사의 동생 김가전, 신흥학교 출신인 김종곤을 만나 자세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기전학교 졸업반 김신희 최금주 송순이, 교사로 있는 함의선 김한순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진행시켰습니다. 마침내 기독교 측과 천도교 그리고 신간회의 박태련씨와 절충해서 3월 13일 장날 남문 밖에서 집결 인경소리를 신호로 만세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기전의 결사대가 앞장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날 임영신(10회졸업), 김공순(3회졸업), 김신희(졸업반), 송순이(졸업반), 최금주(졸업반), 최애경, 최요한나(2학년), 정복수(2학년) 함연춘, 함연순(2학년)등이 붙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기전여학교의 만세운동돠 옥중에서 연약한 여학생으로서의 담대한 투쟁의 역사는 상해 임시정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의 역사가이며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1859-1925)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다음과 같이 특기하고 있습니다.(제18장 부녀 및 아동의 애국열, 서울신문사,1946,p.169 기전90년사 192-193)

 

< 전주 독립만세 운동으로 여학생 임영신, 정복수 김공순, 최애경, 김인섭, 최요한나, 강정순, 최금주, 김신희 등 14인이 옥에 갇혀 사흘간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검사는 위압하여 심문하였으나 여학생들은 담대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찌 너희의 판결에 복종하랴. 너희들은 우리 강토를 강탈하고 우리 부모를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삼천리 주인이 되려는 우리를 비법이라 하니 이는 불법한 판결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검사가 대노하여 칼을 빼어 한 학생의 왼쪽 귀를 베며 여학생들의 의복을 다 벗겨 나체로 세워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학생들을 조롱하였습니다. 이때 임영신은 일본 검사의 따귀를 때리며, “섬 오랑케의 만습을 감히 예의인에게 행하느냐?”하였더니, 일본 검사가 “너희 조선은 군함과 대포와 병정이 없는데 어떻게 완전 독립을 하겠느냐? ”하니, 학생들의 대답은 “금후의 시대는 군함, 병정, 대포가 사태가 날 터인데 네가 그런 소견으로 질문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일본 검사가 “누가 너희를 시켜 이런 일을 하였느냐?” 학생들의 대답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국이 의를 지팡이 삼아 일어난 만세를 일제히 호창한 것이어늘 시켰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너희는 진실로 세계적 정세에 어두운 섬사람이로다.”>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박은식선생에게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기전의 위대한 대일 항쟁운동에 감격함을 금할 길이 없어 그의 책에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전주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전여학교의 여학생들 중에 주동자로서 마지막까지 옥고를 치른 몇 사람을 기억하고자합니다. 주동자로 지목된 기전의 자랑스런 애국 여 청년 13명, 김인애 최애경 최요한나 김공순 최금주 함연춘 정복수 송순희 김신희 강정순 임영신 김순실 김나현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3년을 받았습니다. 최요한나의 아버지는 남문교회 최국현 장로입니다. 본래 서문교회 장로였으나 남문교회가 분립되었던 것입니다. 최장로는 남문시장에서 기름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신앙이 돈독하여 8남매 중 아래 두 사람만 빼고 모두 성경에 나온 인물로 자녀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무엘, 요한나 수산나 이(엘)리야. 마리아 이(엘)리사 등입니다. 기전의 여학생들이 최국현 장로의 집에서 태국기를 만들고 다음날 정오 남문의 인경소리가 울릴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요한나의 어머니는 빈 시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오락가락 하며 망을 서 주었습니다. 최요한나의 큰 딸이 전주 성암교회를 시무하였던 송봉규목사의 부인인 김은옥여사입니다. 김인애는 공소장에 최기물로 나와 있는데 김인애는 서문교회 김인전목사의 여동생으로 이름을 속였던 것입니다. 김인애의 아버지 김규배씨는 충남 한산에서 살다가 전주로 이사와서 살아는데 대단한 부자였다고 합니다. 김인애의 큰 오빠가 김인전 목사이고 둘째 오빠가 전주삼일운동을 주도한 김가전으로 독립운동가로 후에 서문교회목사 전북도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동생으로 김희원 김미완이 있습니다. 김인애는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역시 신흥학교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한 후 상해로 망명하였던 김종곤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김인애는 후에 “전라북도 전주기전여학교 기미년 대한독립마세운동”이란 당시 옥에 갇혔던 13인의 여학생들의 서명을 한 피맺힌 투쟁기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기록물은 장남 김진화씨가 가보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1929년 10월30일 광주-나주행 한일기차 통학생 충돌사건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사건이 발발하였습니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임성금자 이광준의 댕기머리를 일가와시마 나가자와 등 5명의 일본인 학생들이 잡아 다니며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벅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하자 일본인 학생 50여명과 한국인 학생 30여명 간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 싸움은 한국인 학생들이 유리하게 끝났습니다. 이에 분개하여 11월1일 일본중학교의 교직원 및 학생 300여명이 군사교원의 지휘 밑에 조선인기차통학생들을 불의에 습격하였습니다. 조선인학생 200여명은 격투 끝에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11월 3일(일요일)은 일본에게는 메이지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明治節)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월 3일 즉,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시조를 기념하는 날에 일본 천황의 생일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서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인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교길에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에 몰려 들어가서 항의할 정도로 그들의 반일감정은 폭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학생 항일 만세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되어 350개교가 참여하였습니다.

이런 학생운동에 기전여학교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고등과 2학년 오원애 신애덕 전순덕 신태순 이 순 등과 보통학교 5학년 이준례 김순길 등이 주동이 되어 비밀 회합을 가졌습니다. 기숙사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만세” ‘동감만세“ “일본은 물러가라”는 등의 플래카드도 만들었습니다. 안례아 사감은 모른척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1월 24일 콜튼 교장이 눈치를 채고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을 시킨 후 “오늘부터 임시 방학으로 들어가겠소. 모두 집으로 가 있다가 등교하라는 통지가 있을 때 나오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애덕 오원애는 본래 1월 26일을 거사일로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노심초사 준비하던 항일운동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아 오늘 바로 시작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감추어 두었든 태극기와 프래카드를 들고 나와 “기전학생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닙니다. 광주학생들의 만세 사건에 대해 우리도 따르지 않을수 없습니다. 다같이 시내로 나갑시다. 대한독립만세! 동감만세!” 신애덕의 외침에 급장 문유덕이 앞장서 학생들은 시내로 만세를 외치며 나갔습니다. 신흥학교를 지나며 신흥학생들을 불러냈습니다. 신흥학교에서도 박철웅(전 조선대학교총장)의 주도하에 준비하던 중이라 다음날 만세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50여명 기전여학생들이 잡혀와 그중 신애덕 오원애 신태순 문유덕 김준례 김순길이 정식 구속이 되었습니다.

 

 

기전여학교를 소개할 때 꼭 기억할 여 선생님이 있습니다. 바로 방인애 선생입니다. 방인애 선생은 1909년 황해도 황주읍에서 방주일씨의 장녀로 출생하였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방인애는 평양 숭의학교를 다니다가 개성 호수돈여자학교(1899년 12월 19일 Carroll Arrena 감리회선교사가 설립)로 옮겨와 졸업하였습니다. 1926년 3월 23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동창생 김정임과 함께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전주에 온 방인애 선생은 서문밖 교회에 출석하며 배은희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았습니다. 1926년 4월부터 3년간은 평범한 교사로 있다가 황주 양성학교로 옮겨갔습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황제가 승하하였습니다. 학생들은 가슴에 붉은 리본을 달고 머리에 하얀댕기를 하였습니다. 당시 음악을 가르친 방인애 선생은 “융희황제 융희황제 승하하셨다. 만백성아 애가 불러 혼령 위로해.” 라는 자작곡을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황주 양성학교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부흥회 새벽 기도회 때에 거듭나는 변화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1931년 9월부터 다시 전주 기전학교 교사로 온 이후 방인애 선생은 거리의 거지들의 친구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방 선생은 길거리를 방황하는 정신환자의 손을 붙들고 기도하고 병자들을 돌보며 심지어 문등병환자의 고름이 나는 손을 만지며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로 많은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여러 이적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졸업식 날 비가 내리자 방인애 선생이 기도하니 비가 멈추고 일기가 좋아졌습니다. 전주여자기독교청년회(전주YWCA)에서 중진으로 활동하면서 방 선생은 생활과 행동 및 신앙 태도에서 뭇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며 청순한 자태로 봉사하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문교회에는 전주YWCA 총무로 내려와 있던 이효덕이 시작한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말이 공아원이지 교회 지하실 방 한 칸을 빌려 운영되는 열악한 수준이었습니다. 방 선생은 제대로 시설을 갖춘 정식 고아원 설립을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1927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앞두고 고아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방선생은 오래동안 기도한 후 고 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 전주 시내를 다니며 모금운동을 버렸습니다. 전주 시내 8000호를 모두 심방하였고 결국 기도로 성공하였습니다. 배은희 목사도 교회를 통하여 협력하고 기전학교 신흥학교 학생들이 동참하여 고아원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동정 매달”이란 사랑의 뱃지를 만들어 판매하여 고아원 운영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방인애 선생 본인은 두벌 옷을 입지 않고 걸인과 병자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단 벌의 옷으로 살고 있는 초라한 딸의 모습을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할머니가 입으시셨던 저고리 한 개와 바지에 솜을 넣어 옷을 만들어 보냈는데 그 것 마저 어려운 이웃에게 주었습니다. 구제의 삶을 실천하는 그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젊은 미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깍듯이 ‘방애인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2년 홍수가 나 수재민들이 많아지자 수재민 구휼에 힘쓰며 자신의 시계와 만년필을 팔아 몇몇 수재민의 셋방을 얻어주었고, 그 바쁜 중에도 그는 전도에도 열성을 보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노방 전도를 하였고 완고한 노인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을 걱정하는 어머니께 쓴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 (전략) 어머님께서 혼자서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이 딸은 잘 아나이다. 어머님도 딸의 뜻을 잘 아시거니와 저는 주님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저의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말아주세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소서. .....(중략) 잠깐 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일 외에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저를 원하시와 염려마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깨달으실 줄 압니다. 저는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933년 여름방학 때 고향 황주에서 장티브스 병에 걸려 전주 예수병원에 입원한지 6일 만에 9월 16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나니 당시 나이가 24세 였습니다. 장례식 날 수십 명의 여인들이 소복을 하고 운구를 하였으며 수백 명의 학생들과 고아들의 통곡 속에 뒤를 따랐습니다. 화산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67년 5월에 효자공원으로 이장하였다가 전주시 도시계획에 따라 1999년 9월 16일 전주서문교회에서 완주군 비봉면 원소농마을 뒷산 중턱 서문교회 안식원으로 이장하였습니다.

당시에 전주 서문밖 교회의 배 은희 목사님은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쌓이고 쌓인 일거리를 두고 어떻게 차마 가셨는가, 그대의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던 전주를 그렇게도 쉬이 떠나시었는가, 고아를 업어주던 그대의 등에 짐이 무거워 가셨는가, 정신병자를 쓸어안고 울던 그대의 가슴의 심장이 터져 가셨는가, 문둥병자를 어루만지며 울던 그대의 눈에 눈물이 다하여 가셨는가, 옷 벗어 걸인주고 추위를 못 견디어 가셨는가, 남의 짐을 들고 가다가 팔이 아파 잠깐 쉬려고 가셨는가, 쌓이고 또 샇인 일을 누구에게 맡기고 가셨는가,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오오 ! 조선의 청년들이여, 그대들이 하는 일이 그 무엇인가?”

 

전주YWCA는 2002년 7월 29일 전 회장단과 임원진이 모여 ‘방애인 선생 기념사업 특별위원회’(위원장 홍기자)를 발족하였습니다. 1934년 전주 서문교회 제3대 목사로 시무하던 고 배은희 목사가 펴낸 ‘방애인 소전’을 현대어로 옮겨 ‘조선성자 방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하였습니다. 11월에는 ‘방애인 소전 출판기념회’를 열고 그의 삶을 재조명한 바 있습니다. 2003년 4월 29일 전주 YWCA회원들을 중심으로 ‘방애인봉사단’을 창단하였으며, 지금까지 방 선생의 삶을 본받은 많은 이들이 봉사의 불꽃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주YWCA는 방 선생의 숭고한 사랑과 나눔의 삶을 알리기 위해 2011년 11월 17일 전주연세교회에서 ‘조선성자 방애인 뮤지컬’을 공연하기도 하였습니다.

 

방 선생은 일제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을 위로한 사랑의 화신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고아와 걸인들을 돌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간 성녀였습니다. 전주YWCA는 현재 ‘방애인 봉사의 날’을 정해 YWCA틴 청소년부터 일반 회원들에 이르기까지 상처 속에서, 어려운 곳에서 소금이 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6일 방 선생 추모 80주년을 맞아 안식원을 찾고 추모예배를 드리며 방 선생의 고귀한 삶을 다시금 기렸습니다.(2013년 9월 25일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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