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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남도행전 (진안 무주 장수지역)

 

 

1902년 메커첸 선교사가 곰티제를 넘어 올라가 첫 번 이른 곳이 진안군 부귀면 원세동이였습니다.(여기 년수는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멕커첸 선교사가 곰티제를 넘어 오느라고 흘린 땀을 이 곳에 이르러 닥고 있을 때 생전 처음 본 서양 사람이라 마을 사람들이 선교사 앞에 모여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습니다. 이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것입니까? 멕커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황준곤 이원지 손치문 한선명 최사행 이 다섯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10월 3일 진안군 부귀면 부암리 샛터 초가 삼간에서 원세동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03년 장경태 전도인이 교회를 이끌었으며 1907년엔 최사행 전도인이 이어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1907년 9월 17일 최초로 설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 소속교회로 1908년 9월엔 전북노회에 소속이 되었습니다. 1921년 봄 교인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현 위치인 원세동리로 교회를 옮겨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세동교회는 군 생활 30년을 중령으로 마치시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의 길에 들어온 김형기 목사의 헌신으로 복음의 향기가 펼쳐 있습니다. 비록 시골 한적한 마을이지만 목사님과 장로 여섯분 그리고 80여 성도들이“작은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교회”(마25:40, 레19:18)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지역 주민들의 벗, 노약자들의 벗, 다음세대들의 벗, 불신자들의 벗이란 4벗 운동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안군 부귀면의 북부에 운장산(1,126m)이 위용을 자랑하며 솟아 있고 주변에 부귀산(806m), 옥녀봉(737m) 등의 700m 내외의 산들이 둘러싸여 있는 거석리를 찾아가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 산골 속에 복음이 들어와 백여 년 전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는가 놀라움과 이 나라 방방곡곡에 퍼져간 복음의 능력에 새삼 찬탄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거석리에 거석리 교회 지금의 부귀중앙교회로 시작되기는 1900년 부터였습니다. 그러닌까 정식으로 멕커첸 선교사가 진안지역에 선교의 발을 내 딛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 복음의 자리가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1900년, 18세 이원일이 어머니의 간질 병환을 고치기 위해 군산에 서양의사를 소문 듣고 궁말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병환 뿐 아니라 영혼의 치유까지 받아 거석리로 돌아가 자기 집에서 기도처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902년엔 대지 200평을 교회 부지로 헌납하여 초가 교회를 건립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거석리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 12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발간한 총회사진명감을 보면 부귀중앙교회의 창립일을 1900년 5월 1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기록은 이원일의 장남 이원태 장로(면장)와 교회의 첫번째 장로인 이원칠 장로의 장남 이삼암 장로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처 교회로서의 전도적 사명을 다하고 있었으리라고 부귀중앙교회사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27쪽).

 

비록 산곡 교회였지만 진안군에서 가장 활발하게 부흥하는 교회로 1911년 9월18일 대구 남문예배당에서 있었던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제 5회록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안 거석리 교회에서 4간을 새로 건축하였는데 그곳은 산중인고로 교인들이 심히 가난하야 재정이 군졸하오나 육신의 힘과 영혼의 믿음은 재정이 풍족한 것보다 나음으로 간략히 예배당을 건축하여 낙성까지 되었사오며....”

 

진안지역의 선교활동을 맡은 멕커첸선교사가 이곳을 말을 타고 다니며 교회를 돌보다가 1911년부터는 클라크선교사(Clark, William Monroe 1881-1940)가 교회를 지키었습니다. 클라크 선교사는 1907년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8월 28일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전주에 부임하여 왔습니다. 그는 1923년 기독교서회 이사로 서울로 가기 전까지 14년 동안 거석리교회를 돌보았던 것입니다.

 

1911년 10월 15일 전주서문밖 예배당에서 있었던 전라노회 1회록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강운림(클라크)씨에게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각 교회 당회 일을 맡김

2. 강운림씨는 방언(한국말)이 아직 부족하오니 마로덕씨와 동사 목사 될 일

 

그리고 1912년 궁말교회에서 있었던 전라노회 2회 회록을 보면 클라크 선교사의 요청으로 조사 김응규 김성식 장경태에게 첫번째 학습문답을 허락한다고 하였습니다.

 

거석리 교회는 나날이 부흥하여 1918년 통계표를 보면 주일학생이 48명이고 세례교인이 40이요, 예배인원수가 85명이었으면 1932년엔 교인수가 127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원일과 함께 궁말 교회에 가서 병 치료를 받은 이원칠이 열심히 교회를 섬기었습니다. 이원칠은 1920년 교회 장로로 장립되며 거석리교회의 기둥 역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로 이정상목사와 증손 이한진 장로가 전주 중부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 가운데 이관익 집사가 있습니다. 그는 부모형제들 앞에서 당당하게 조상대대로 믿어 온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만 믿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후손들이 거석리교회를 커다란 바위처럼 든든히 서서 섬기고 있는데 차남 이정환집사 자부 김기옥 권사가 있습니다.

 

이원일 집사는 한마을에 살고 있던 이관익 집사와 교회예배를 마치고 돌아 올 때면 항상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새벽에 나가 밭일을 하고 돌아 올 때‘새벽부터 우리’찬송을 즐겨 부르곤 하였습니다. 이원일의 직계 후손 중 목사로 전주 노회장을 지낸 증손자 이주백 목사(배월교회)등 11명이 배출되었고 사위로 신흥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장평화장로와 효자로 소문난 부귀면장을 지낸 이영태 장로 등 여러분이 있습니다.

 

 

진안군 주천면에 가면 명덕봉(846m)과 명도봉(863m)에 의해 형성된 기나긴 협곡 운일암반일암(雲日岩半日岩)에 이르게 됩니다.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들이 부쩍 거리는 국민 관광지입니다. 예로부터 깍아지른 절벽 밑으로 길이 없어 하늘과 바위, 나무만 있을 뿐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다하여 운일암으로 불렸고, 하루 중 햇빛을 반나절밖에 볼 수 없다 하여 반일암이라 불렸다 합니다. 100여년까지 만 해도 이 험한 길을 가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 이곳을 대불리라 하는데 이곳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대불리라 함은 운일암 반일암 28경 중 제12경으로 바위 위에 바위를 포갠 모습이 마치 부처 같다고 해서 붙여진 대불바위(大佛岩)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이 대불리에 문도순 김병섭이 전주에 나갔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여 멕커첸 선교사와 함께 1903년 5월24일 대불리 처사동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대불리 교회가 출발되었습니다. 그 후 이름을 대광교회로 교회이름을 바꾼 것은 아무래도 대불이란 이름이 교회이름으로는 석연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궁벽한 산속 마을 까지 찾아와 복음을 전한 멕커첸 선교사에게 다시금 숙연함과 고마운 마음을 가져 멕커첸 선교사를 기리는 마음으로 앞서 소개하였지만 다시금 소개하려 합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유니온 신학교 출신인 레이놀즈, 전킨, 해리슨, 오웬, 불 이런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사로 활발하게 선교 활동한 소식에 영향을 받아 나도 조선에 가선 복음을 전하리라는 사명감으로 기도하던 중 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자 한국선교사로 지원하여 1902년 11월 7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1904년 전주 선교지부로 전주를 중심으로 동북부지역을 맡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호남의 사도바울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나름대로 농부 선교법을 개발하였습니다. 먼저 씨뿌리기입니다. 길거리 서당 장터 사랑채등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단계입니다. 다음은 잡초제거와 물주기입니다. 처음 방문한 곳을 다시 방문하여 성경을 더 가르치고 교회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교정해 줍니다. 다음은 수확하기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얼마간의 이해를 하는 삶들은 정식 교회 구성원이 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지치기입니다. 지역교회를 맡을 지도자를 양성하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농부선교법이 대 성공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멕커첸 선교사의 선교사역이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에 의해서 1905년까지 4교회가 세워지고 14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1906년엔 17교회가 세워지고 50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1907년엔 21교회가 세워지고 201명이 세례를 받았고, 1908년엔 37 교회가 세워지고 273명 세례를 바았으며, 1909년엔 56개 교회가 세워지고 451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에서 오래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전주남자성경학교의 교장으로 30년간 봉직하였습니다. 그의 지도하에 수많은 교회지도자가 배출되어 호남지역 교회사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가 홀로 이룩한 수많은 교회들을 돌볼 수 없음으로 여러 한국인 조사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원필 이경필 최대진 김응규 김선식 장경태 등이였습니다. 태평양전쟁으로 송환된 뒤에도 한국인을 위한 그의 선교활동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부목사로 재직하면서 한인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동시에 일본군 포로들 중에 한인 전쟁포로를 위한 포로선교사역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호남신학대학교 이진구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그는 결코 강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님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고를 여러 번 당하였고 때로는 과도한 선교활동으로 인해 심각할 정도로 건강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안식년이 되어 귀국하여서는 혈압강장제를 복용하고 식이요법과 수혈까지 받아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선교 열정을 펼치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지만 수많은 ‘신앙의 자녀들’을 두었습니다. 1946년 71세 나이로 선교사로서 활동을 끝내었지만 계속 한국의 교인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1960년 85세 나이로 소천하므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Sumter)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가 멕커첸 선교사의 그 선교의 열정과 한국인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운일암 반일암 골자기를 타고 흐른 그의 간절한 기도가 오늘도 대광교회 안에 여전히 들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안군은 전라북도의 동부권에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폭 10∼20km의 서남방향으로 아주 가까이 평행하며 고원을 이루는 해발 200∼400m의 산간 구릉지로서 약 82.4%의 산악지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한복판에 진안읍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가 곰티재를 넘어 부귀면 주천면 정천면을 거쳐 드디어 진앙읍에 교회를 세운 때가 1908년 10월 1일이였습니다. 당시 웃새골 백남인 성도의 집에서 설립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읍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1909년에는 백남인 성도가 목조 새 예배당을 건축 헌납을 하였고, 1928년 백남인 집사를 초대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상임고문인 5선 의원 정세균 의원이 읍교회의 집사로 충성을 하고 있는 이야기 또한 이 교회의 자랑입니다. 이 읍교회를 지나 멕커첸 선교사는 계속 무주로 금산으로 장수로 복음의 여정을 이어갔습니다.

 

멕커첸 선교사가 본격적으로 전북 동부지역에 선교활동을 하기 이전 해리슨 선교사(B.Harrison)는 무주에 거주하는 이경문이라는 사람을 통해 무주에 들려 풍남면(지금의 무풍면) 마을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무주 지역 첫 번째 교회 돌메기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멕커첸 선교사가 1904년 10월 횡천면(지금 설천면) 두길리에 들어와 김재순 청년과 7,8인 마을 사람들이 함께 예배드림으로 덕유산 아래 두길리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주 일찍이 1896년 적상산(1034m) 아래 누구에 의해서 인지 알 수 없지만 괴목리에 교회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늘갓에 한윤성 전찬중 그리고 적상면 새내의 이상종이란 젊은이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돌메기 교회와 괴목리 교회를 다녔습니다. 1903년 3월 5일 이상종이 살고 있는 새내마을 적상산 자락에다 기도처를 마련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3년 여 만에 교인이 10여명으로 늘었습니다. 교인이 많아지자 기도처가 비좁아 나이 40이 넘도록 자녀가 없는 전찬중 집으로 옮겨 가니 1906년 봄 마침 적상면 새내마을을 찾아 와 김성교 이명준씨와 복음을 전하던 멕커첸 선교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늘갓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1910년 4월에 늘갓교회는 마을 뒷동산에 15평 새 예배당을 지어 전찬중 집에서 옮겨오니 교인들의 감개가 너무 컷습니다. 멕커첸 선교사가 한동안 교회를 돌보다가 그후 클락(William Monroe Clark 강운림) 선교사, 불(William F Bull)선교사 그리고 이자익 목사 등이 무주를 찾아와 읍내 북리에 천막을 치고 일주일간 부흥회를 열자 수많은 마을 청년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 후 이 청년들이 무주 삼일운동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늘갓 교회에 전일봉이란 청년이 두길리 교회의 김재순을 만나 복음을 받은 후 함께 전주로 나가 성경학교를 다녔습니다. 앞서 부흥회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삼례교회의 손희중과 함께 무주장로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전일봉은 김재순과 함께 손희중을 만나 나라의 독립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주민들에게 애국정신을 깨우칠 학교가 필요하다는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16년 마을에 삼숭학교를 설립하고 전이삼씨가 교장으로 그의 조카 전일봉이 교사로 학교운영을 맡아하게 되었습니다. 진안 장수 금산에서 까지 학생들이 몰려와 80여 학생들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소식이 이곳 무주에까지 전해왔습니다. 손희중, 김재순, 전일봉 그리고 전주 신흥학교를 다니던 전일봉의 동생 전기봉, 그는 3월 13일 전주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잠시 귀향하였습니다. 그리고 한태선 ,서재순, 그림솜씨가 뛰어나 태극기를 그린 한판익, 학생 신재희 ,박찬수 등이 거사를 논의 하여 1919년 무주장날로 정하였습니다. 이들은 새벽부터 일찍이 서둘러 나뭇짐이나 달구지 장짐에 태극기를 숨겨 음내 장터에 도착하였습니다. 오후 2시경 전일봉이 장터 중심에 서서 일본놈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자고 외치자 사람들이 ‘옳소’하며 크게 박수들을 쳤습니다. 손희중과 김재순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장터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신재희 박찬수가 무주 보통하교 학생 수 십 명을 데리고 나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장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헌병 분견대 무장 헌병들이 출동하자 송희중 김제순 전일봉 서재순 등은 읍내 주변 산으로 주민들을 모아 횃불 시위를 벌리니 이산 저산에서 봉화와 함께 불야성을 이루며 밤새도록 대한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7회에 걸쳐 참여한 사람들이 3,500여명이었고 21명이 부상을 당하고 19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일본 당국은 무주읍교회와 늘갓교회를 강제로 문을 닫게 하였습니다. 1920년 1월 전일봉은 옥고를 치루고 나와 교회를 이끌다가 1936년 장로로 장립을 하게 됩니다.

 

전일봉 장로와 함께 우리가 꼭 기억할 이름이 바로 그분의 아들 전영창 선생입니다. 전영창선생은 미국의 크리스탈교회로 유명한 로버트 슐러목사와 동기동창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의 모 대학에서 총장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거창에 들어가 폐교직전인 거창고등학교를 인수하고 한국의 사학의 명문학교로 성장시켰습니다.

 

늘갓교회는 다섯 번째로 1970년 12월 신축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이름을 오늘의 여올교회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명소인 무주구천동의 입구에 두길 교회가 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가 돌메기교회(석항교회) 이경문 조사와 함께 두길리 마을에서 전도함으로 1904년 10월 10일 두길 교회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당시 두길 교회에는 김도순 김재순이 김만희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이경문조사가 신앙을 지도하였습니다. 이석하 무풍교회 원로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1908년 교인들이 초가 한 채를 매수하여 교회당 건물(두길리1181번지)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두길 교회에 순회하여 올 때마다 1, 2주간을 머물면서 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켜 학습과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1909년부터는 멕커첸 선교사 다음으로 클락(강운림)선교사가 순회하면서 성경공부를 시켰고 1912년부터는 최대진 전도사가 순회하면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교인수가 3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두길 교회 평신도로서 김재순 김화순 정춘화 김도순 손성찬 이상열 등이 교회를 섬기었는데 김재순씨가 더욱 열심을 다해 섬기었음을 지난 여울교회를 소개할 때 이미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무주장로교회는 1907년 멕커첸 선교사에 의해 설립이 되어 앞서 소개한 손희중씨가 교회를 지도하였습니다. 1914년 봄 클라선교사 불선교사 이자익목사가 한 주간동안 천막전도 집회를 하여 많은 무주 청년들이 예수를 믿었음을 앞서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무주장로교회는 심태형 원로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71년 무주지역에 최초로 스라브교회를 건축하였고 오늘날 무주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무주에 가면 관광객들이 꼭 한번은 가보는 나제 통문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으로 이 통문을 통해 양국의 사람들이 왕래를 하였습니다. 이 나제 통문을 지나면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입니다. 이 증산리에 무주의 최초의 교회인 돌메기 교회라고도 하고 교회라고도 부르는 증산교회가 있습니다. 무주지역의 최초로 1900년 4월 3일을 증산교회는 창립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본래 예부터 한양에서 귀양살이 온 사람들이 살던 터전으로 금평이란 곳에 숯 굽는 숯 터가 있어 이곳에 이경문 오택근 등 몇 주민들이 일찍이 복음을 듣고, 이경문의 집을 기도처로 삼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증산마을 건너편에 철목마을에서 무풍장이 설 때면 교인들이 장에 나가 전도를 하였습니다. 무풍면 대덕산재를 넘으면 경북 금릉군 나면 송곡1리에 살던 김창서씨와 부인 서마은씨의 가정이 증산으로 이사와 망근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교회를 도우니 교회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가 이 산골까지 찾아와 이경문씨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이경문씨를 앞세워 두길교회 여올교회 안성 이목교회 무주읍교회 등을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증산교회가 날로 확장되어 1905년 대덕사라는 사당을 매수하여 수리해서 교회당으로 삼았습니다. 1913년 증산교회의 세례교인이 70명이요 학습인이 20명으로 100여명이 넘는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경문 집사를 중심으로 김중현 집사와 각 20환씩 헌금을 하고 과부 장씨가 황소 한 마리 그 외 교인들이 30환을 모금하여 1913년 “보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크라크 선교사가 교사 이사행의 월급 절반을 부담하니 14명의 학생이 이 학교에서 신 학문을 배우며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1918년 이경문 집사는 장로로 장립하고 교회로 충성하다가 1936년 3월 13일 소천 하였습니다. 이석하 무풍교회 원로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이경문 장로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베드로처럼 과격하여 호랑이라는 별명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고 의리와 정의감이 강한 분으로 지역 주민들이 신뢰하여 소나 집을 매매할 때면 의레히 이 장로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증산교회 출신으로 전 국무총리 황인성 씨와 김광수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황인성씨는 2010년 10월 소천 하였는데 그의 유언대로 증산교회 앞 큰 고목나무 아래 수목장을 지냈습니다. 증산교회는 무주지역의 첩첩산중에 있으면서도 그 지역의 어머니교회 역할을 하였으며 수백 명의 신자와 16명의 장로 17명의 목사를 배출하였습니다. 오늘날 증산지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전국에서 가장 당도가 높은 최고의 사과출산 지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현재 위암말기였으나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로 건강을 다시 찾은 김명환 목사님이 증산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소백산맥이 남으로 힘차게 뻗어 내리고 무룡궁재를 분기점으로 하여 노령산맥의 종산인 장안산(1237m)이 서쪽으로 높이 솟고 여기서 다시 뻗어 관둔산과 남산이 대호의 자웅처럼 마주 보는 자리에 장수읍이 있습니다. 특히 수분마을 뒷산 신무산을 따라 2.5km 올라가면 금강의 발원천인 뜬봉샘(비봉천)이 있습니다. 그 옛날 이성계가 이곳에 와서 단을 쌓고 백일 기도를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성계가 제단을 쌓고 기도한지 백일 째 되는 날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타고 봉황새가 하늘로 올라가는데 소리가 있어 “새 나라를 열라”라고 하여 조선을 세우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성계는 단 옆에 을 짓고 옹담 샘물을 받아 천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 뜬봉샘이 발원이 되어 금강과 섬진강이 나눠 흘러내립니다. 이처럼 산세가 수려하고 또 지역이 깊어 복음의 첫 발걸음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장수군은 전라북도 여러 군 가운데 인구도 가장 적으니 1970년에는 7만 6천명 이였으나 매년 감소하여 지금은 23,000여명에 불과 합니다. 기독교 인구도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적고 교회수가 48개 처 정도입니다. 그래서 인지 인근 지역보다 복음이 들어오는 일도 7,8년이나 늦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그 어느 지역보다 넘치고 있으니 뜬봉샘 같은 축복이 수많은 지역 주민들에게 풍성히 내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계남에서 4km정도 장계 쪽으로 가면 540m의 싸리재가 있습니다. 이 재를 넘으면 마치 다른 고장으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장수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데 계남은 눈이 내리지 않은 때가 많습니다. 그곳에 1237m 장안산 아래 백화산과 법화산을 양옆에 낀 금계포란의 형국인 동리가 있습니다. 신전리는 음신마을과 양신마을로 나뉘어 양신마을에는 소위 양반 지주들이 사는 부자 동리였고 음신 마을은 그들의 소작농들이 살던 가난한 마을 이였습니다. 이 가난한 마을에 1907년 11월 29일 클락 선교사가 찾아와 복음을 전하고 박래문, 문귀선, 김사일, 박승기, 정세갑이 함께 신전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박래문은 서당에서 글을 배워 그 동리에서 유식한 사람으로 알려져 클락 선교사가 성경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잘 풀어 설명을 하곤 하였습니다. 박래문은 나무하러 갈 때도 성경을 읽으면서 다녔고 논과 밭에서 일할 때는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곤 하였습니다. 전주 서문 교회에서 사경회가 있을 때에는 먼 길을 기름과 소금을 짊어지고 찾아와 말씀을 배웠습니다.

 

1910년 신전리 509-1의 한옥 한 채를 교인들이 구입하여 새 예배당으로 삼았습니다. 이 신전교회 출신으로 목사가 11명이었고 수많은 장로님이 있었는데, 그중에 1936년 장립을 받은 박진서 장로님은 전주로 이주하여 1946년 전주 금암교회를 그리고 1953년엔 전주 북문교회를 1980년에는 전주 영광 교회를 설립을 하였습니다. 신전교회는 처음 교회가 시작되던 때부터 아름다운 신앙이 전승되고 있으니 전교인이 철저하게 성수주일을 지키는 일입니다. 대체로 농촌교회는 농사일에 바쁠 때는 주일 성수하는 교인들이 많지 않거나 주일 예배를 드린 후에 다시 밭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전교회 교인들은 오로지 성수주일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 평소에 밤이 늦도록 일을 해서 주일을 온전히 지켜도 영농에 지장이 없도록 합니다. 현재 음신 마을의 주민 70여 가구의 백퍼센트가 교회에 출석하고, 심지어 밭에 일을 하다가 매일 정오시간에 교회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현재는 차임벨)에 맞추어 기도를 하니 마치 밀레의 그림에서 보는듯합니다. 1960년 교인들이 마을의 서낭당을 부서 버리고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우리나라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멋진 종탑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또 하나 신전교회 교인들에게 특기할 일은 지난 2005년 5월 19일 마을 한복판에 정자를 멋들어지게 세웠는데 그 상량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 말씀을 한글로 써 올렸습니다. 이처럼 음신 마을에 신전교회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마을 사람들의 삶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장수군에는 군 소재 중심에 장수교회가 있습니다. 장수 교회는 1911년 4월 23일 멕커첸 선교사가 여기까지 찾아와 복음을 전하니 설립된 교회입니다. 지금 600여명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장수군의 중심적인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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