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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남도행전(순창지역)

전병호 by  조회 수:37 2019.07.06 14:12

노령산맥 말단부의 동쪽 사면에 위치하여 동남쪽으로는 500~600m의 구릉이 연속되어 있으며, 정읍시·임실군과 인접하는 북부지역에 장군봉(將軍峰:780m)·국사봉(國師峰:655m)·여분산(如紛山:774m)·용골산(鏞骨山:645m)·내장산(內藏山:763m) 등의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는 오지 내륙의 마을, 가남리 일대에서 합류한 경천천·양지천·사천 등과 오수천이 각각 섬진강으로 흘러들며, 그밖에 서부를 흐르는 추령천이 정읍시 산내면에서 갈담 저수지로 유입하고 구림천은 군의 북부를 지나 임실군으로 흘러드는 산천이 수려하고 인심이 후덕한 순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순창은 백제시대 도실군(道實郡)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순화군(淳化郡)으로 그리고 고려 초인 940년에 순창(淳昌:淳州)로 불려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순창군은 순창읍·인계면·동계면·적성면·유등면·풍산면·금과면·팔덕면·복흥면·쌍치면·구림면 등 1개읍 10개면 131개 동리로 되어 있는데, 1902년 복흥면 반월리에 유진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복음을 전파하므로 순창지역 최초의 교회 반월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기(99쪽)에 이렇게 기록을 하였습니다.

 

 

 

“ 1902년 순창군 반월리교회를 설립하다. 초에 선교사 裵裕社와 전도인 河昌洙등이 열심 전도 하야 신자 백여인을 엇고 예배당을 신축하얏스며 그후에 玎馬序 都大善 助師 邊昌淵 金基贊등이 시무하니라”

 

 

 

그러나 알고 보면 1902년은 배유지 선교사가 미국에 머물러 있었던 때이고1903년 초 한국에 나와 하창수 전도인으로부터 반월교회 설립을 보고 받았던 것입니다.(김수진.호난기독교100년사.375쪽) 1904년 배유지 선교사와 오웬의료 선교사가 화순, 고흥, 승주, 여천등지를 순회 선교사역을 하면서 순창에 들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얼마 후 텔미지(Talmegy, John Van Neste 1884-1964 한국명:타마자 1910년 내한하여 광주선교부 소속)선교사, 닫슨(Dodson, Samuel K 한국명 도대선. 1911년 내한 1929년 귀국, 화순군 원리교회설립)선교사가 반월교회를 돌보았습니다. 반월 교회는 일제 말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강제로 교회 문을 닫은 후 다시 열리지 못하였으니 교회의 역사를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순창지역은 전주 선교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가까운 광주 선교부의 영향 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광주 선교부에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세 사람의 선교사를 기억하게 됩니다. 바로 오웬 선교사, 유진 벨 선교사 그리고 탈미지 선교사입니다. 주로 광주 목포 순천 담양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지만 호남 선교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리고 대를 이어서 한국 선교활동을 한 세계 선교사역에 기리 기억되어야할 세 분의 선교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오웬 선교사를 소개합니다.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1867-1909 한국명: 오원 또는 오기원)선교사는 미국 버지니아 출신으로 유니온 신학교와 버지니아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1898년 11월 남 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목포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1900년 북 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활동 중인 휘팅(Georgiana Whiting .M.D 1869-1952.1.24. 1895년 4.6북장로교회의료선교사로 내한 제중원에서 활동)과 결혼을 하여 더욱 선교에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 남 장로회 동료 선교사 니스벳은 오웬 선교사의 역동적인 선교 활동을 소개하였는데, 광주 김 윤수 장로와의 인연입니다. 김 윤수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의 손가락에 가시가 박혀 곪기 시작하였습니다. 목포에 오웬 의료선교사의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그를 모셔오라고 하였습니다. 오웬 선교사는 손가락의 가시뿐 아니라 심령의 가시를 뽑는 일까지 하였습니다. 김 윤수는 선뜻 예수를 영접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오웬 선교사로부터 계속적으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는 술집을 닫아버리고 학습과 세례를 이어 받았습니다. 자기만 아니라 온 가족을 다 구원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는 열성적으로 교회 일을 돌보며 선교사들의 매니저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그는 교회 영수가 되고 마침내 광주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김 윤수 장로는 광주교회 교인이 무에서 300명이 되도록 그의 전도 열정이 식지를 않았습니다. 1919년 3월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웬 선교사는 지칠 줄 모르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13개 군내에 있는 선교지를 한 달에 한번 이상 순회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의 딸이 질문하기를 “아빠는 왜 우리와 같이 집에 안 계셔요?”라고 물었습니다. 가족들 얼굴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바삐 다녔습니다. 1909년 3월 어느 주일에 그는 2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고, 430명의 학습교인을 세웠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오웬 선교사의 선교활동으로 예배처를 4개소에서 77개로 늘렸고 세례교인이 72명에서 1,5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 엄청난 성장속도는 오웬의 육신을 너무나 지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3월 22일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부터 뜻하지 않게 고열로 격렬한 오한이 일어나 떨기 시작했습니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장흥의 교인들은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향했습니다. 오한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가마꾼들은 빠른 걸음을 재촉하였으나 광주까지 이송하는 기간이 3일이나 걸려 수요일 새벽 2시에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윌슨(Wilson, R. M., 禹越淳) 의사가 치료를 맡았고 , 목포 포사이드(Forsythe, W. H., 保衛廉) 의사가 전보(電報) 받고 급히 달려 왔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4월 3일 밤 10시 45분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웬과 함께 광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레스톤(Preston, John Fairman 1875-1975.4.30. 한국명:邊約翰. 미국 조지아주 데카터축신 프린스톤신학교졸업 1903년 남장로교회선교사로 목포선교부에서 활동 1908년 숭일학교초대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약도 없고 적절한 영양공급도 없이 가마의 의자에 쭈구려 앉아 매서운 북풍을 맞으며 그의 옆구리의 참을 수 없는 통증을 견뎌야하는 이 극심한 여행은 그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목요일과 금요일, 그는 아직 꺽이지 않은 것 같았다. 토요일 그를 돌보던 의사 윌슨선교사는 위급함을 알고 목포의 포사이드 의사를 불러 상의했다. 그날밤 갑자기 끝이 왔다. 그의 마지막 말 중 하나는 ‘아, 그들이 나에게 조금만 안식을 주었더라면...’하는 것이었다. 지친 병사에게 지금 안식이, 다른 세상에서의 감미로운 안식이다.”(조지 톰슨 브라운:한국선교이야기,94쪽. J F Preston 1909년 6월 The Missionary “Korea” P.320)

 

 

 

장례예배는 1909년 4월 6일 광주 선교부 묘지에서 프레스톤 선교사 집례로 거행되었으며 광주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부인 휘팅 선교사는 남편의 선교활동을 이어받아 계속 활동하다가 1923년 네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1952년 1월 24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Denver)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하였습니다. 양림동 67-1번지에는 현재 광주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어있는 오웬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 기념관은 그 가족과 친지들이 낸 성금으로 예배당 및 집회실 형태로 1914년 지은 건물입니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2층 건물로 당시에는 광주 숭일학교 예배당 겸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기독간호대학 강당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소개할 선교사는 유진 벨(Eugene Bell, 미국 켄터키주 출산 1894년 켄터키신학대학 졸업)선교사입니다. 유진 벨 선교사는 남 장로교회 소속으로 1895년 2월 12일 오세아닉 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두 달 만에 4월 9일 아내 로티 위더스픈(Lottie Witherspoon Bell, 1867-1901)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 호남 선교부를 나주에 두고자 1896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주에서 전도하였으나 지역 유생들과 주민들의 반대로 결국 어학선생에게 맡기고 철수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로 옮겨가 목포 선교부를 설립하고, 열정적인 교회개척과 교육활동 중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1901년 4월 12일 군산에서 부인 로티선교사가 임신 7개월에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남 장로교회 선교사로 최초로 묻히게 되었습니다. 로티는 남편을 도와 선교활동에 최선을 다하였던 순교적인 삶을 살다가 한국에 온지 6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당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유진 벨은 순회선교 여행 중에 부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로 돌아 왔으나 이미 부인이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그의 상심은 너무나 컸고 그 충격에서 잠시 헤어 나오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들 헨리와 샤롯을 데리고 미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2년 동안 미국에 머물던 유진 벨은 로티의 못 다한 선교열정을 다시 꽃피우고자 심기일전하여, 마가렛(Magaret.W)을 만나 재혼하고 함께 목포로 돌아옵니다. 1902년(혹은 1903년) 목포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를 로티 위더스픈 벨 기념교회라 명명하였습니다. 건축비용의 대부분은 한국 교인들의 모금에 의해서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돌로 된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백락준 박사에 의하면 목포에 물이 좋지 않고 교인들이 내륙에 흩어져 있어 선교 활동하기가 불편하여 1904년 9월 년례회의에서 선교부를 광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고 합니다.(백락준.한국개신교사.1973. 300쪽) 1904년 12월 19일 유진 벨은 오웬 선교사와 더불어 광주 선교부를 세웠습니다. 그해 12월 25일 눈 내리는 성탄절이였습니다. 유진 벨과 오웬 가족, 변창연 등이 유진 벨의 임시 거처에 예배를 드리고자 준비하였습니다. 과연 누가 올 것인가? 몇 번이고 눈 내리는 문 밖을 몇 번이고 내다보았습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긴 줄을 지어 들어왔습니다. 선교사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양 사람들이 무엇을 가져왔는가에 호기심으로 찾아 온 것이지만 유진 벨은 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당시 40여명이 광주지방 최초의 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당시 양림리는 광주의 중앙통이라 할 수 있는 남문에서도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묘지가 많았고 인가도 드문드문 후미진 곳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좋은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을 중심으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펼쳤고, 광주 최초의 종합병원인 광주기독병원(현 제중병원)을 중심으로는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9년 천안 제암리 교회 참상을 취재 후 자동차로 돌아오는 도중에 병점 근처의 건널목에서 기차와 충돌하여 불행하게도 재혼한 부인 마가렛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씩이나 선교 동역자인 아내를 먼저 하는 나라로 떠나보냈으니 그의 아픔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나 절망할 시간도 없이 유진 벨의 선교는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외지에서 선교하기 위해 아내의 협력은 절대적 이였습니다. 1921년 9월 15일 줄리아 디저트(Julia Dysart 1872-1952 한국명:배쥬니아 미국 성조셉 출생. 키르키실사범학교 졸업) 선교사와 혼인한 유진 벨은 언제나처럼 다시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줄리아선교사는 1907년 9월 평신도 선교사로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사역하다가, 쉐핑(Miss Elisabeth J.Shepping 한국명:서서평 1912년 내한하여 1934년 5월26일 소천)선교사가 1922년에 이일성경학교를 설립하자 광주로 와서 유진 벨을 만나 협력하였습니다. 줄리아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가 유진 벨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직 한국에서 해야 할 선교적 사명이 두 사람을 하나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새로운 고향은 광주였습니다. 그러나 줄리아와의 동역선교는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4년 뒤인 1925년 9월 28일 갑작스럽게 두 부인을 따라 하늘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유진 벨은 양림동산 오웬의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리라 예견하였듯이 1923년에 이미 유언장을 써 놓았습니다. 마치 바울이 옥중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처럼 그의 믿음과 그가 못 다할 선교적 소망과 한국민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 진하게 묻어 있습니다. 유언장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내 죄를 인하여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오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할 것을 믿사옵고 내 육신과 몸을 사랑하는 하나님께 부탁하옵니다. 아멘. 내 사랑하는 자에게 부탁하옵는 것은 나의 믿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도 온전히 믿고 또 내가 순복한 하나님의 말에 저희도 순복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조선 형제 자매들에게 알게 하옵는 것은 부족한 저로 하여금 이 조선에 나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을 감사하오며 꼭 믿고 바라는 것은 천당에서 저희를 많이 만나볼 때에 빌립보4장 1절 말씀과 같이 그 중 더러는 내 즐거움도 되고 나의 면류관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할 때에 여러 형제들도 즐거움으로 서로 만나기를 원하나이다. 주후 1923년 11월 14일”(‘전라도가 고향이지요. 안영로 쿰란출판사 1998. 220쪽)

 

 

 

남편이 세상을 떠났지만 남편의 선교적 유지를 받아 쥴리아 선교사는 1940년 일제에 의한 강제 출국까지 선교활동을 하다가 1952년 8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나라로 갔습니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광주 수피아여고 교정에는 커티스 메모리얼홀이 있습니다. 바로 '유진 벨 선교사의 기념예배당'으로 유진 벨이 남겨준 사랑과 은혜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합니다. 1921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기증자였던 커티스의 이름을 따 '커티스 메모리얼 홀'이라고 했지만 1955년 회의를 열어 호남 선교의 선구자인 유진 벨을 기리는 뜻에서 건물명을 '배유지 기념예배당'으로 해서 다시 지었습니다. 2005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곳은 1층은 살림집이었고, 2층은 강당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져서 당시 선교사들이 매 주일 오후 4시가 되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진벨 선교사의 선교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였습니다. 딸 샤롯 벨(1899-1974)이 미국에서 자라서 1912년 군산으로 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22년 윌리암 린튼(William A Linton 1891.2.8-1960.10.13 한국명은 인던. 21세 때 최연소 선교사로 왔습니다.)을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이 혼인은 한국선교사의 기념될만한 혼례였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선교의

 

두 위대한 선교가문인 유진가와 린튼가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두 부부는 전주 이리 군산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린튼은 기전여학교 신흥학교 교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3.1운동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두 부부는 추방당했다가 해방 후 다시 돌아와 6.25전쟁 중에 구호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56년 대전대학(한남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2010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린튼과 샤롯 사이에 네째 아들인 토마스(Thomas Dwight Linton 1927- 한국명:인도아)는 전주에서 태어나 콜럼비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목사 안수를 받자 광주지역 선교사로 돌아 왔습니다. 그는 농촌선교와 호남신학교에서 활동하다가 1978년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셋째 아들 휴 린튼(Hugh M Linton 1926-1984 한국명 인휴)은 군산에서 출생하였으며 해군 장교로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하였습니다. 귀국 후 콜럼비아 신학교와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전라남도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면 한국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세 자녀들을 결핵으로 잃게 되자 순천에 결핵지료소아 요양원을 세웠고 은퇴할 때 까지 35년간 결핵퇴치를 위해 일하였습니다. 항상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닌다하여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라고 사람들은 불렀습니다, 1984년 교통사고로 하나님나라에 갔습니다.

 

 

 

유진벨 선교사의 외 증손자로 즉 휴 린튼의 둘째 아들인 스티브 린튼(Steve Linton 1950- 인세반 현재 유진벨 제단 이사장)은 유진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사역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1995년은 북한지역이 가뭄과 수해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 보건성으로부터 북한의 결핵퇴치를 위해 지원을 요청받았습니다. 그 후 유진벨 재단은 북한의 결핵퇴치 사업뿐 아니라 곡물 지원 사업 의료 약품 및 장비 지원 등 현재까지 400억 원 이상의 구호품과 장비 등을 북한에 지원하였습니다.

 

스티브 회장은 말하기를 “나는 끝까지 손님일 뿐이오. 북한 체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습니다. 식탁에 초청 받은 손님이 ‘왜 밥은 이렇게 하느냐’고 할 수는 없어요. 그건 손님의 자세를 저버린 사람이오.” 그는 북한에 결핵약을 지원해온 ‘유진벨’ 재단의 회장인 그는 지금껏 60여차례 북한을 다녀왔습니다.

 

스트브 회장은 교인들로 부터 북한은 돕는 일은 정부가 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어 북한 돕기에 한국 교회가 나서길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에 어려운 이 돕는 일을 먼저 정부에 맡겨야 한다는 구절이 어디 있나요. 정치 상황이 어려울수록 민간의 힘으로 도와야지요. 한국 교회가 한 발짝 더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들에게 제일 무서운 병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결해 줬다는 걸 알게 되면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극을 받을까 생각해 봐요. 한국 교회는 세계 역사상 가장 활발하고 부유한 교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왜 같은 동포가 필요한 약을 구할 수 없게 살도록 내버려두죠? 우리 선조들도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정치권 눈치 보지 않고 조선 사람들에게 의료 지원했는데….”

 

매일 매일이 기적 아닌 날이 없었다는 인 회장은 재단에서 하는 모든 일이 헛되지 않도록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90편을 보면 모세 같은 사람도 일이 헛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죠. 저도 ‘부디 유진벨 의 모든 일이 헛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악조건에서도 맡겨진 치료를 정확하게 해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쿠키뉴스 양민경기자 2012년 11월30일)

 

 

 

스티브 회장을 도와 함께 유진벨 제단을 이끌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동생인 존 린턴(1959- 한국명 인요한)입니다. 그는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있으면서 북한은 21차례 방북하여 북한 주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북한이 변해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오. 하지만 우리도 좀 변해야 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고 자존심만 있는데, 그걸 세련되게 다뤄야 해요. 우리 사회는 이런 여유가 없어요."

 

지난 1915년 1월 11일 법무부로부터 데이비드 린튼(윌리암리튼의 증손자 한국명 인대위)을 비롯한 16명의 윌리암 린튼의 후손들이 한국 국적을 받았습니다.

 

유진벨 선교사와 윌리암 린튼 선교의 후손들 50여 명이 대를 이어 지그까지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하였으니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과 함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더욱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텔미지 선교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텔미지(Talmegy, John Van Neste 1884-1964 한국명:타마자) 선교사는 1884년 12월 30일 미국 뉴저지주 뉴왁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존 산드라 텔미지와 메라일라 크레인의 아들로 출생을 하였습니다. 그는 전기 기계공학을 전공하였지만 곧 사우스웨스턴 장로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10년 7월 15일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국 선교사로 향한 그의 행보는 너무나 급하게 진행 되었습니다. 안수 받은지 3일 만에 결혼을 하고 일주일 후 배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였던 것입니다. 8월 26일에 목포에 도착하였으니 신혼여행을 한국선교지 목포로 왔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그는 아내 엘리자 에머슨(Eliza)과 장모 에머슨 여사와 함께 선교지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에머슨 여사는 딸 엘리자를 홀로 키워 왔는데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간다하니 홀로 미국에 남아 있기 보다는 선교지에서 딸 내외의 선교활동을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텔미지 선교사를 설득하여 마침내 함께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머슨 여사는 선교활동으로 바쁜 딸의 가정을 돌보았으니 마치 디모데의 외할머니 로이스처럼 외손자 손녀들을 신앙으로 훌륭하게 키웠을 뿐 아니라 여 선교사로서의 몫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1926년 세상을 떠나자 광주 선교사 묘역에 안장하였습니다.

 

 

 

텔미지 선교사는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고 담양 화순 순창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가 광주 숭일학교 교장을 맡고 있을 때에 1923년 야구부를 신설하여 호남지역 야구발전의 초석을 놓은 일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오늘날 걸출한 야구 선수들인 이상윤, 선동열을 필두로 문희수, 김기태, 이종범,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을 배출한 광주야구의 명문학교인 광주일고 야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듯이 한국도 해방시키실 것이라고 독립정신을 아이들에게 고취시킴으로 일본의 억압을 받았습니다. 텔미지 선교사는 담양에 교회를 세우고 거주하면서 담양성경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영어를 곧잘 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원하였으나 텔미지는 오히려 평양신학교를 추천하였습니다. 이때 평양신학교를 간 학생은 박동완 김용선 조용택 김재택등 이였습니다. 담양 사람들이 그의 별명을 ‘탈깍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선교사로서 펑펑 선교비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절제와 내핍 생활에 솔선수범하니 깍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홍수가 져 강을 건너가려면 돈을 받고 사람을 업어서 건너다 주는 업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일반 주민들도 그렇게 강을 건너는데 텔미지 선교사는 돈을 아끼기 위해 옷을 벗어 머리에 이고 건너갔다고 합니다. 일제 말 선교사들이 출국을 하는데 텔미지 선교사가 나가지 않자 일본 경찰은 미국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그를 7개월 동안 옥에 가두었다가 강제 추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48년 다시 광주로 돌아와 선교 사역을 하였으며 6.25전쟁 때는 잠시 일본에 머물다가 휴전 후 광주에서 계속 선교와 교육사역을 계속하였습니다. 1955년 65세로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1964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최근에 담양기독교연합회에서는 ‘탈미지선교사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그를 기리는 사업을 다방면으로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텔미지 선교사는 7남매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중 삼남 에드워드(John Edward 1912년- 한국명:타요한)는 광주양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36년 콜럼비아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37년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군산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일제에 의해 1939년 추방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군산으로 돌아와 재정적으로 어려운 영명학교 재건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린튼 선교사가 세운 대전대학에 2대 학장으로, 초대 숭전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었고 특히 한국교도소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미국 남 장로교회 한국 선교부 유지재단 이사장으로 주한 장로교 선교부 연합기구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1977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텔미지 선교사의 딸 자넷 크레인(Janet Crane 한국명:타적藉애)은 1947년 남 장로교회 간호선교사로 내한하여 할동 하다가 1956년 켈러(Keller, Frank Goulding 1912-1967)의료선교사와 결혼하여 전주 예수 병원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1967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전주와 목포에서 계속 간호선교 황동을 하다가 1976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텔미지 선교사의 막내 딸 마리엘라(Mariella 한국명: 타마리아)선교사가 있습니다. 마리엘라 선교사는 광주에서 51년간 선교 횔동을 한 플로렌스(Florence E Root 한국명:유화례)선교사와 함께 한국 선교의 어머니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마리엘라 선교사는 탈미지 선교사의 7남매 중 막내로 퀸즈대학에서 간호학을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47년부터 군산 전주 목포 순천 광주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북 장로교의 프로브스트(Provst Raymond 한국명:부례몬)와 결혼을 하여 남편의 사역지인 대구 경주지역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특히 남편과 함께 경주문화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플브스트가 세상을 떠나자 1997년 학교 담 옆에 그의 묘를 만들어 안장을 하였습니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모란장을 수여 하였습니다.

 

 

 

 

 

전라북도 북쪽 경계선에 무주 구천동이 있다면 남쪽 경계선에 순창 쌍치읍이 있습니다. 이 쌍치의 교회의 시작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순창군에서도 오지로 통하는 밤재 방산재 구절재 추월산으로 둘러싸인 가장 깊은 분지 마을로 쌍치면이 있습니다. 1907년 유진 벨 선교사가 당나귀를 타고 광주에서 추월산을 넘어 오면서 처음으로 복음이 쌍치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기에 기록하기를

 

“1907년 淳昌郡 雙溪里 敎會가 設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裵裕社 助師 邊昌淵 趙碩逸의 傳道로 因하야 信者가 30餘인에 달함으로 禮拜堂을 新建하고 其後에 宣敎師 打馬子 萬越淳 都大善 助師 金順敬 高麗偉 許華埈盧秉憲等이 相繼親務하니라.”(256쪽)

 

 

 

유진 벨 선교사가 쌍계교회를 순방하며 성경을 가리키며 점차 교회가 부흥되면서 텔미지 선교사가 광주 선교회에 오자 그에게 쌍계교회를 맡기었습니다. 김순경 고려위 노병헌등이 차례로 복음을 전하였고 1922년부터는 김세열 조사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특히 6.25 전쟁 시에는 이곳에 북한 빨치산들의 은거지가 되어 6개월 동안 인민공화국이 선포되기도 하였습니다. 1951년 8월 15일 인근 용추산(523m) 깊은 가마골 골짜기에서 정강대령이 이끄는 8산단 10연대와 경찰 합동대는 빨치산간의 치열한 접전이 있었는데 적 사살 249명 생포 106명 과 아군 경찰관 16명 전사 부상 17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패배한 빨치산들은 회문산으로 도주하여 회문산이 또한 빨치산 은거지가 되었습니다. 다시금 국군2개 사단 경찰병력 2개 연대 주변 경찰서 의용대한청년단원 특공대등이 이들과 싸웠습니다. 1952년을 고비로 회문산 빨치산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1954년 10월에 가서야 쌍치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5년여 간의 이러한 빨치산의 준동이 쌍치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수많은 남자들이 희생을 당하여 지금까지도 그 아픔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 현재는 양민학살위령탑과 비목공원(빨치산 사령부)과 회문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돼 있습니다.

 

 

 

1953년 김판기 집사가 중심으로 쌍치 교회를 재건하여 이런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송상규목사 신삼석 목사등에 의해 교회가 계속 안정과 발전을 하여 왔습니다. 오늘도 담임목사 이용식 목사의 인도 하에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주민들에 전해 주고 있습니다. 현재 쌍치 지역은 복분자 단지와 순창고추장으로 유명한 고추를 생산 하는 지역으로 마을 사람들이 크게 활기를 띠고 잘 살아가고 있음은 이 지역의 아픔을 아시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쌍치교회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인 금성리에 금성교회가 있습니다,

 

사기에 기록하기를

 

“1908년 淳昌郡 金城里敎會가 成立하다. 先示에 宣敎師 裵裕社가 派送한 傳道人 趙碩逸의 傳導로 百餘人이 歸主하얏스되 禮拜處가 無하더니 不信者 劉某가 所有餘間 互家를 1年間 無賃 貸與함으로 會集 禮拜하니라.”(264쪽)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된 금성교회는 설립되니 얼마 안 되어 100명이 넘는 교인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타마자 선교사가 이어 교회를 돌보니 더욱 전도의 기세는 그 일대에 가장 우세하였습니다. 처음 1년간 불신자 유씨의 집 10여 간이나 되는 기와집을 빌려 썼지만 곧 김창식 김우근의 처 서기화등이 격려하여 십시일반 헌금함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텔미지 선교사와 닫드선교사 그리고 조사인 변창연 하창수가 금성교회를 계속 돌보았습니다.(사기 272)

 

금성교회는 궁벽한 산골에 제대로 학교 공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기독영흥학교를 세워 박대권 손책남 이영휴 등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1938년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제는 교회와 학교를 패쇠하여 버렸습니다. 1953년 칠보교회에서 수요일 밤 예배를 인도하던 이승길 전도사에게 한 여인이 찾아와 일제에 의해서 고향의 금성교회가 페쇠 되어 아직도 회복되고 있지 않으니 교회를 다시 재건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이제 쌍치 지역의 치안도 안정되자 이승길 전도사는 전주 선교부에 건의하여 전에 신앙생활 하던 여덟 가정을 찾아 금성교회를 재건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점차 모여들게 되자 1954년 김원길 전도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새로히 신축하고 옛 면모를 다시금 회복 시키였습니다. 몇 년 전 젊은 박상식 목사가 부임하여 서로 사랑하며 교회를 자랑하자는 목회 일념으로 열심히 교회를 성장시키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순창읍에 살던 이사라 부인이 함경북도 삼수갑산에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남편 박성희를 찾아 10살 아들 박삼수를 데리고 찾아갑니다. 이사라 부인은 삼수갑산에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성희가 러시아 연해주로 독립운동 하러 떠나자 아들을 데리고 다시 고행 순창으로 돌아옵니다. 이때가 1913년입니다. 이사라 부인은 광주병원에서 전도 받은 백병태와 함께 쌍치읍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에 텔미지 선교사와 조사 고려위 김세열 이영희 등이 교회를 시무하면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사기 311쪽)박삼수는 성장해 가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었지만 한동안 회의에 잠겨 일본등지로 떠돌아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신앙심을 회복하여 순창읍교회 장로가 되고 순창지역에 불어 닥쳤던 6.25 전쟁으로 고아가 된 수많은 아이들을 모아 애육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특히 박삼수 장로의 부인 이봉순은 광주 수피아 여학교를 졸업한 신교육 여성으로 순창에서 야학운동을 벌려 부녀자들을 계몽시키며 텔미지 선교사 부인과 함께 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봉순은 ‘예수각시’라는 별명을 들었는데 이는 당시 마마 병이 창궐하자 직접 우두면역 주사를 사람들에게 놓아 줌으로 마마에 걸리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옛 무가에서는 마마신을 손님 신이라 하였는데 그 마마신중에 하나가 각시 손님이라 하였습니다. 그 각시 손님을 쫒아 냈으니 이봉순을 예수 각시라 불렀던 것입니다. 1988년 박삼수 장로가 소천하니 장남 박석은 장로가 고아원을 이어 받아 더욱 확장시켜 이 고아원을 거쳐 간 아이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현재는 박석은 장로의 아들 박승순 장로가 아동의 수가 줄어들음으로 대신 순창 노인 요양원을 개설하여 60여명의 노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박석은 장로의 큰 딸은 광주에서 요양원을 운영하고 둘째 딸 박경숙은 군산 흥남교회 사모로 셋째 딸 박진숙은 통합 장로교회 여 목사 1호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순창읍교회는 순창군내에 큰 교회로 지역 복음화에 더욱 박차를 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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