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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남도행전(부안지역계속)

전병호 by  조회 수:81 2019.07.06 14:10

부안군 주산면에서 서해안고속도로 건너편에 영원면이 있습니다. 그 영원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km 지점에 앵성마을이 있습니다. 앵성마을은 백제 초기 시대부터 있어 온 오래된 마을입니다. 남쪽으로 고부 사이에 두승산이 있는데 풍수적으로 두승산 12혈지의 하나로 옛 부터 명당으로 손꼽히는 지역이며 꾀꼬리 노래하는 마을이라 앵성리라 하였습니다. 예전에 큰 과수원이 있었는데 봄이면 꾀꼬리들이 찾아와 노래를 부르면 과수원에서 일하는 처녀들이 덩달아 흥겨워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 앵성리에는 고종 29년에 세워진 정려문이 있습니다. 김복규의 아내인 밀양 박씨가 남편의 등창의 고름을 3년여 동안 빨아 고쳐 나라에서 정려문을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또 조금 떨어진 곳엔 백정기 의사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앵성리 출신 백 의사는 일제시대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요인 암살 실패로 무기징역으로 옥고를 치르는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 효창공원에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그의 유골이 묻혀 있는 삼의사 묘역이 있습니다.

 

 

 

이런 유서 깊은 앵성마을에 1907년 4월 5일 남녀 16명이 모여 앵성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초대 목사는 김 병엽 목사입니다. 그러나 오래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의 역사 자료들이 소실이 되어 그간의 교회역사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다만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교인들이 순교를 당하였던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앵성교회 이상열 집사는 정읍군 부량면 대창리에서 일제 말엽 신앙과 애국심이 강해 신사참배를 않는다는 이유로 왜경에게 끌려가 무참히 고문을 당하고 집에 귀가 했으나 상처로 몸 져 누어 회복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그의 4남 2년 중 3남으로 이마태 전도사가 있습니다. 그는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교회의 대성학교와 전주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25세에 큰 형님 이주일집사가 출석하는 부안군 동진면 오중리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 때 담임목사인 김수현목사는 이마태전도사를 국민촉성회에 가입하게 하고 동진면 위원장직을 맡겼습니다. 1949년 이전도사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고 앵성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여 시무하였습니다. 6.25전쟁시 이 지역을 장악한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이 전도사 집안은 반동으로 몰려 큰형과 함께 이전도사도 잡혀서 내무서로 끌려가 모진 매를 맞고 두 다리와 두 손목까지 부러졌습니다. “동생, 자네를 보냄이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 보는 것 같구먼, 죽더라도 비굴하지는 말게” 동생의 얼굴을 만지며 형 이주일 집사는 울었습니다. 결국 이마태 전도사는 전주 형무소에서 1950. 9. 26. 죽창에 찔려 순교하니 그 나이 갓 서른이었습니다.

 

앵성교회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나왔는데, 이상훈(은퇴) 정우근(화산제일은퇴) 이봉기(개혁측 증경총회장 전주쉼터) 이탕영(김제주평) 조경연(이리창대) 임기준(김제신덕중앙) 박상구(고창석남) 김영만(안양봉산제일) 이은호(광양임마누엘) 이제균(군산충진) 김향중(신갈지역) 이동선(의정부지역) 등입니다.

 

 

 

 

 

아마도 호남평야에서 가장 좋은 쌀이 산출되는 곳이 정읍군 이평면의 배들(梨坪)평야의 쌀이라 하겠습니다. 이 배들평야의 중심은 바로 예동마을 입니다. 이 마을은 신태인에서 이평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 마을로, 옆에는 원평천과 동진강 연안의 비옥한 농지인 기름진 배들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838년(헌종4년)에 지금의 정읍천 제방이 그때는 작은 둑 이였는데, 비만 오면 터져 제방이 흘러가고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합니다. 그때 예동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이웃마을 사람들과 함께 둑을 쌓았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더위에 옷을 벗고 일을 하는데 예동 주민들은 삼배 적삼 옷을 입은 채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때 고부 군수 안길수가 이 마을 시찰을 나와 그 광경을 보고 ‘저기 옷을 입고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마을 사람들이냐’하고 물어 ‘호동(狐洞)이란 마을 사람들입니다’하고 말하니, 예의 바른 사람들의 마을 이름이 호동이 무어냐면서 예의 예(禮)자를 넣어 예동(禮洞)이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마을이 우리나라 역사에 기억되는 사건이 1894년 1월 10에 일어났습니다. 바로 동학혁명의 발상지가 바로 여기 예동에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전봉준 중심으로 농민들이 이 말을 말목장터에 모여 봉기하여 고부군수 조병갑 관아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혁파하므로 동학형명의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만석보는 조병갑(趙秉甲)의 부당한 수세징수로 동학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된 보(洑)입니다. 현재는 하천으로 제방의 흔적은 없고 1973년 전봉준이 만석보를 허물고 보관 중이던 세곡을 굶주린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그 자리에 만석보혁파비가 세웠습니다.

 

 

 

이같은 농민혁명의 발상지인 예동마을에 1907년 김보경 이화중이 예수를 믿고 예배당을 신축하여 예동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전라남도와 선을 긋는 노령산맥 아래 복분자재배로 유명한 고창군이 있습니다. 고창군 죽림리의 고인돌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우리나라의 고대문화의 큰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고창군을 상징한 말로, 고창군이 삼한시대에는 모로비리국이었다는 데에서 착안해 ‘모로모로’라고 하여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고창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를 누가 세웠는가에 대해 논난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른 전북의선교지와는 다르게 광주선교부에서 장성 영광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1900년 덕암교회를 설립한 것이 이지역의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명준 교수는 1900년대에는 목포에서 유잔 벨(Eugene Bell)과 오웬(C C Owen)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던 시기이였고,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선교사는 다음 기회에 소개 하겠습니다. 광주에 선교부가 세워진 때는 1904년임으로 덕암교회가 광주선교부에서 설립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바로 이웃인 흥덕에 까지 전주선교부의 테이트 선교사가 활동하였던 지역이라 고창 선교는 테이트선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 입니다. 그 후 세워진 광주 선교부가 세워져 그 관할권이 이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는 것입니다. 1921년에 우리나라 선교사로 와서 광주에서 선교 활동을 한 페슬리(Paisley, James I 한국명으로 이아곡 1948년부터는 군산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귀국하였다가 1952년 사망하였고 프로렌스부인은 54년에 재 입국하여 59년까지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선교사가 덕암교회를 자주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1900년 공음면 덕암리 지음 마을에 세워진 덕암교회는 1915년 3월 1일에 오창언 오병언 오윤팔 오동근 등 오씨 집안이 중심으로 18명이 고창 땅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에 교회를 신축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덕암리는 외국인에 대한 배타심이 심하였지만 덕암리 오씨 집안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이 대단하여 열심히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런 오씨 집안이 망할 것이라는 험담과 비난을 하였지만 점차 그들도 교회를 찾아 나와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덕암교회는 6.25 전쟁 시 순교자가 많았습니다. 덕암교회 출입구 좌측에 오계환 장로1912.10.7.-1950.10.7.)와 김영해 집사 외 24명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당시 중 2학년 학생이었던 오 장로의 아들 오균열이 목사가 되어 예장보수개혁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순교자들 중에 오병길 전도사의 순교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덕암교회 창설자 중의 한사람인 오윤팔의 네째 아들 오병길(1897년 3월29일)소년은 남달리 머리가 총명하여 얼(Earle A.M) 선교사가 가르쳐 준 성경 말씀을 그 날로 암기를 하곤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을 한번 듣고 암송하는 것을 지켜본 페슬리 선교사는 그를 광주 숭일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광주 숭일학교 입학식 날 입학식장에서 교장선생님이 누가복음 2:32절을 읽으며 베드로의 순교에 대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약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수만 증거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오병길 소년은 '그래, 나도 베드로와 같이 핍박 속에서 목숨을 요구하면 기꺼이 베드로처럼 순교의 길을 가야지...' 그러나 이때의 결단이 그를 마침내 베드로처럼 순교의 장으로 이어지리라고는 당시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첫 부임한 교회는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교회였습니다. 야월리교회는 1908년 4월 5일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서 야월도에 세워진 섬 교회였습니다. 섬이란 예부터 무속이 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전도사의 헌신적인 전도로 마을에는 새바람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배가 들어 올 때마다 지내던 풍어제도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배가 출어할 때마다 오전도사가 기도해준 후에 떠났습니다. 2년 만에 온 동네가 복음화되고 오전도사에게 감명을 받고 그의 신앙지도를 따르면서 성장해 왔던 최재섭 등 전 교인 65명이 결연히 신앙의 순결을 지키다가 6.25동란에 65명의 순교자를 낸 야월리교회가 바로 이 교회였습니다. 야월리 교회에 가면 2006년 6월에 세워진 순교기념관을 통해서 당시의 증언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오 전도사는 고향인 고창군 부안면 용산교회, 홍덕면 홍덕교회. 해담면 동호교회 등 미자립 교회를 자립교회로 만들고 떠나곤 하였습니다. 6.25전쟁 전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부임하자 집안 살림은 부인에게 맡기고 전도밖에 모르는 전도사로 어려운 교인들에게 신세질까봐 항상 미싯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시장하면 우물가에 앉아 시원한 냉수에 타서 마시며 시장기를 면하곤 다시 전도를 하였습니다. 1950년 7월 하순께 부안군 백산들녘에도 물밀듯이 인민군들이 들어 왔습니다. 이 고장에 들어서자마자 인민군은 교회부터 점령하니 오전도사는 큰 아들 오주환의 집 부엌에 지하실을 파놓고 주일이면 온 가족이 모여 벽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예배드리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것만이라도 너무 감격하여 "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지하실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9월 하순 퇴각하는 인민군들에게 발각이 되어 소위 인민재판에서 오전도사와 그의 아들들이 옆구리에 와 가슴에 아랫배 등 수없이 죽창으로 찔려 그야말로 형언키 어려운 참상을 당하고 일가족 삼부자는 장한 순교하였습니다. 오병길 전도사의 소년시절 베드로의 길을 가리라는 다짐이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장로회 사기(p.103)에 “1903년 고창군 신촌교회가 설립하다 초에 몇몇 신자의 전도로 교회가 설립되야 송복렴(宋福廉)이 인도자가 되니라”는 기록을 보면, 문헌상으로는 신촌교회가 고창군내 최초의 교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기에 송복렴이 인도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송복겸(宋福謙)이 옳은 이름입니다. 당시 이 지역에 미야자끼(宮崎圭太郞), 아베(阿部), 호소까와(細川많), 사또(佐藤) 오오모리(大森五吉郞) 등 일본인들이 들어와 농토를 차지하였는데 그중에 不二회사가 있습니다. 송복겸은 불이회사의 농감(農監)으로 일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조건으로 주민들에게 소작을 주었습니다. 송복겸은 자포리 신촌에 있는 사돈 임승유의 집이 비교적 넓은 것을 보고 교회로 사용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임승유의 집 머리방에서 유하며 예배를 인도하곤 하였습니다. 비록 일본인 농장에서 농감으로 일하였지만 송복겸은 신촌학당을 세워 소학교 교육을 시켜 고창에서 가장 개화된 마을이 되니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교사와 전도사로 활동하던 시미석(柴美錫)은 정읍출신으로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자포리에 와 농촌계몽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송복겸은 그의 애국심에 감동을 하여 막내딸 송경애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송경애는 고창지역에서 최초로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삼일운동에 동참하여 구속되어 대구복심 법원에 까지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송경애는 남편을 도와 농촌의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점점 일제의 신사참배의 압력이 심해지자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인근에 있는 흥덕 소학교에 학생들을 인계하였습니다. 그 후 시미석은 고창 중앙교회에 출석하며 1948년 장로로 교회를 섬기다가 6.25 전쟁시 공산군들에 의해 같은 교회 임종헌 목사님과 함께 순교를 하였습니다.

 

 

 

1912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는 하오산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하오산교회는 특이하게도 일본인 마스도미 야스자이몬(升富安左衛門) 즉 한국 이름으로 승부장로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호남평야는 위에서 소개한 일본인들을 위시하여 그야말로 일본인들의 약탈의 현장이였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리대금을 빌미로 농토를 빼앗고,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은 남부여대하여 멀리 만주로 떠나가던 때 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수탈과는 다르게 승부는 전혀 그 궤를 달리한 일본인이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진정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인이 그러한 약탈을 당하지 않도록 계몽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하고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조선을 향한 일본의 침략은 날로 더해 가던 시절 진정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승부장로 외에 오다 나라찌(織田楢次1908-1980 한국면 전영복)목사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간사이(關西)성서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조선인 유학생으로부터 일본의 조선침략과 만행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인이 지은 죄를 사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1928년 21세 때 목포로 와서 노방 전도와 주로 벽촌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노리마쯔 마자야스(乘松雅休1863-1921)목사는 1896년 명성황후의 살해사실을 알게 되자 기독교인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사죄하는 마음과 조선인에게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메이지신학원을 중퇴하고 그해 12월 23일 인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서울로 가던 중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면서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하나님”하고 외치자 마부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첫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1897년 1월부터 조선인 조덕성과 함께 노방전도를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인에게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에게 돌팔매질을 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선교범위를 넓혀가며 장호원까지 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재워주는 집이 없어 어떤 때는 시골집 굴뚝을 껴안고 잠을 자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조선인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일념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평소에 한복을 즐겨 입고 한옥에서 한국음식을 먹으며 한국인처럼 생활을 하였습니다. 1898년 영국 플리머드 형제단 소속으로 일본에서 그에게 한국선교의 영향을 준 브랜드(H G Brand 1965.6.11-1942)선교사가 한국에 오자 노리마츠는 그와 함께 더욱 열심히 선교활동을 벌렸습니다. 1900년 8월 9일 수원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집에 ‘성서강론소’를 개설하였고, 그 후 1909년 8월에 김태정이란 분이 수원천변에 토지를 기부하자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로 한옥집회소를 세워 성교강론과 전도에 열의다 하니 후에 수원 동신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한번은 한 청년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점심을 먹었습니까?”라고 하니 아직 먹지 못하였다는 말을 들은 노리마츠 목사는 부인에게 얼른 점심을 차려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인이 밥을 하려하니 쌀독에 쌀 한 톨도 없었습니다. 부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시장에 나가 팔아 밥을 지어왔다고 합니다. 남편과 함께 조선선교에 열정을 다 바쳤던 부인은 33세 나이로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리마츠목사는 1919년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위해 기도해주곤 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병이 악화되어 고향 오다하라에가서 요양 중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들은 수원 동신교회 교인들이 그의 유골을 가져다가 교회 뜰에 그의 부인과 함께 합장을 하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일본인 가운데는 한국을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던 이들이 있었으니 우리가 이제 소개하고자 하는 승부장로는 더욱 기억하여야 할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1880년 일본 구주 북부 모지라는 작은 도시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는 부모의 4남 1녀 중 4남으로 출생한 마스도미‘마스도미 야스사애몽’(枡富安左衛門,1880-1934, 우리말로 승부라고 부릅니다)는 시모노세끼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早稻田) 대학 상과에 진학하였지만 부친 사망으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 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승부는 징집되어 경리장교로 조선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가 노일전쟁에서 참전하여 눈여겨보았던 김제평야에 와서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가 1906년 27세의 나이로 김제군 월촌면 월봉리에 농장을 마련하고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는 군산에서 하가시노 아키코(東野昭子)와 결혼을 하였는데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남편으로 인도하여 승부는 후미쪼교회(富士見町敎會)의 신학자이며 목사인 우에무라(植村正久1858-1925)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신농정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승부는 단지 다른 일본인처럼 조선 땅에서 큰 농장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기독교를 믿은 이후 그의 생각은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조선인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조선사람들을 교육시켜 조선인으로서의 자각과 독립의 의지를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부안면 오산리에 11정보의 땅을 매입하여 사과 과수원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는 1912년 10월 5일 농장에서 일하는 남자 10명과 여자 12명을 모아 황반연전도사와 함께 자신의 농장에 하오산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승부는 아침 일찍 교회의 종을 울려 마을 사람들이 농장으로 일 하러 나가게 하였고 저녁에도 종을 울려 하루의 일과를 끝나게 하였습니다. 한국인을 착취하는 다른 일본 농장주와는 전혀 다른 승부는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알게 된 주민들이 감동을 받아 하오산교회는 날로 부흥하였습니다. 월산면에 봉월교회를 설립하고 봉월 학원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잡지인 ‘성서의 강의’ 후에 성서의 연찬을 발행하였고 주민들에게 기독교 강연을 실시하였습니다. 승부는 농장 안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오산교회에 교실을 마련하여 1912년 흥덕학당을 열어 새로운 교육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좀 더 훌륭한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서 훌륭한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승부는 서울로 올라가 당시 기호학당(현재 중앙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양태승 윤치병과 신명학교 교사로 있는 김영구를 초청합니다. 그리고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에 입학을 시킵니다. 본인 자신도 본과에 입학하여 졸업을 합니다. 양태승 윤치병 김영구는 예과 2년 본과 3년 수업을 마치게 한 다음 고창 오산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1916년 9월 신학교를 졸업한 양태승에게는 학교를 맡겼고, 김영구는 학교 사감을 그리고 윤치병은 하오산교회를 담임케 하였습니다. 윤치병은 후에 최태용 목사와 함께 복음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비로소 오산교회와 흥덕학교는 새로운 면모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4월 14일 흥덕학교를 졸업한 학생을 위해 오산학교를 설립한 승부는 학생 8명을 모아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가 있다면 고창에는 하오산 학교가 있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만큼 크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학생 수가 많아지자 승부는 1921년 말 고창군민과 상의 하여 고창군민들의 학교로 새 출발 하였습니다. 승부는 당시로 1만 5천원 거금을 내고 5,500여명의 군민들의 협조로 2층 벽돌 학교를 세우고 1922년 고창고등보통학교(현 고창고등학교)로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게 하였습니다. 승부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들을 고창고등보통학교로 오게 해서 공부시켰습니다. 당시의 역사가 새겨진 비석과 문헌이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1934년 11월 6일 55세의 짧은 나이로 생애를 마치자 장례식이 열렸던 고창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엔 그의 유덕을 기리며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학생과 군민들이 가득 찼었습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복음화와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그에게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사실은 오래 동안 승부장로의 헌신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오지를 못하였습니다. 1966년 부안초등학교로 부임한 정성택 교장은 부안초등학교 설립역사를 알기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중 학교 근처의 한 노인으로부터 승부안좌위문추상록<枡富安左衛門追想錄>이라 써진 책을 찾았습니다. 그 추상록은 승부장로 사후, 그의 아내인 데루코(照子) 여사가 1935년에 편집한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정성택 교장은 승부장로가 기독교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을 읽고 감동하였습니다. “조선반도에 대한 우리들의 정신적 측면의 빚은 매우 위급한 것입니다. 무력과 경제력만으로 그들을 압박하고 아무런 정신적 측면의 대책이 없는 것은 완전히 난폭한 짓입니다. (중략). 1930년 8월 13일”

 

 

 

정성택 교장은 1968년 10월 승부장로의 추도식을 거행하였고 교정에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학부모나 교직원들의 반대는 없었으나 일본인을 기리는 비를 세우는 자금은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 교장은 포기하지 않고 학교 농장의 수확물을 팔아 그 수입금과 자신이 돈을 내었습니다. 그래도 부족하게 되자 동경의 데루꼬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자 5만원을 보내 왔습니다. 처음에 스부선생교육공로비라고 비석의 표제를 쓰려 하였지만 역시 반대로 <學校設立記念碑>라 기록하라고 하였고, 뒤에는 다음과 같이 학교 설립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부안국민학교는 1912년 마스토미 야스자에몽(枡富安左衛門)이 설립한 흥덕학당에서 비롯한다. 마스토미 씨는 이 지방의 문화발전을 위해1917년 오산교회와 1918년 오산고등학당을 세우니 이것이 곧 고창중고등학교의 시초이다. 흥덕학당은 1919년 사립 오산보통학교로, 1923년에는 공립학교로 이관되고, 1945년 조국 광복 이후 더욱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승부장로의 기일인 1970년 11월 6일 부안국민학교 교정에서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식전 조 상항(趙尙亢)씨가 축사하였습니다. 1915년 그는 항일독립투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한 후, 조선으로 돌아와 마스도미 씨의 농장에서 기독교 전도와 교육 사업을 이어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제막식은 무사히 마쳤으나, 그 후 학교 직원의 일부가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 교장은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일본에 대한 적대감정을 계속 갖고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가지고 있어봤자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국제친선과 인류의 공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이상적인 교육목표가 아닙니까? 적대적 감정의 불은 이제 꺼도 됩니다. 아니 이제는 꺼야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몇 해 후 그는 교직을 떠났습니다. 아직도 부안국민학교에는 개교할 때 심은 아카시아가 거목이 되어 아이들의 그늘이 되었습니다. 부안초등학교 교정의 비에는 마스도미씨의 말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의 사명은 한국민의 정신계발이요 나의 모든 것은 오직 이를 위해 있을 뿐이다.”

 

승부장로가 세운 오산교회는 ‘100년을 새롭게 전도로 준비하자’라는 표어로 전 홍업 목사의 지도록 계속 부흥하여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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