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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남도행전(정읍지역 계속)

전병호 by  조회 수:43 2019.07.06 14:08

 

신태인. 정읍지역의 첫 교회는 1900년 3월9일 최 중진에 의해 세워진 매계교회 입니다. 그러나 매계교회 이전에 태인면을 찾아간 최 중진은 어느 사랑방을 빌려 이미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김 수진목사님은 <호남선교100년과 그 사역자들>의 기록을 보면, 최 중진이 태인 어느 양반집 사랑채에 하룻밤 신세를 지던 중 그 집의 머슴들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 집 주인이 사랑채 앞을 지나다가 이상 소리를 듣고 사랑방 문을 여니 최 중진이 머슴들과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호통에 머슴들은 다 물러갔지만 최 중진은 여전히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주인이 최 중진을 바라보니 그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어 그 기세가 꺽기게 되었습니다. 최 중진이 주인을 두고 전도하니 결국 주인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이 양반집 사랑방에서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는데 이 태인 현은 유학이 매우 성황 하던 곳이라 유생들이 최 중진을 강제로 몰아내고 아예 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박해를 받고 물러난 바울을 심정으로 최 중진은 인근 매계리 마을을 찾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매계리가 태인면 소속이지만 당시에는 함보면 소속이었습니다. 전주에서 태인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에 태인면이 있고 태인에서 정읍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동쪽으로 칠보산으로 가면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매계리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매계리가 아니고 매화리였으며 매화락지라하여 풍수지리상 명당자리라고도 합니다. 최 중진은 테이트선교사와 상의하여 매계리 전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매계리 전도도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이미 최 중진이 태인에서 예수를 전하다가 쫒겨 났다는 소식이 매계에도 전해져 최 중진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 중진은 변장을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 모습으로 매계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이씨 문중과 권씨 문중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기도하던 중 문중 중 약한 문중을 먼저 전도하리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마을의 유생들의 계속되는 훼방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매계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최중진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애국의식을 고취하고 학도가를 가르치며 한글과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치자 소문의 소문이 퍼지면서 점점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반대하던 유생들도 그리고 전에 쫒겨 났던 태인현 사람들도 매계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매계교회의 부흥의 소식을 들은 전주 선교부 선교사들은 크게 기뻐하고 직접 매계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매계교회에 3000명이 모였다는 놀라운 기록도 있습니다. 최 중진은 매계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인근 태인 정읍 부안 고창 등지로 선교의 영역을 점점 넓혀 갔습니다.

 

 

 

최 중진이 누구입니까? 최 중진은 정읍군 고부에서 최 석학의 장남으로 위로 두 누이와 아래로 최 광진 최 대진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최 광진은 서문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고, 최 대진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시베리아 선교사로 활동을 하다가 금산교회에 초대목사가 되었습니다.

 

 

 

 

 

(*최중진 최광진 최대진 삼형제 사진)

 

 

 

최 중진은 두 동생과 함께 동학 혁명에 동참하였다가 매부가 있는 순천에서 잠시 피신을 하였습니다. 다시 고부에 돌아와 테이트 선교사에게 전도 받아 기독교로 귀의하게 됩니다, 최 중진은 테이트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태인 정읍지방 전도에 매진하며 장로가 됩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9월 6일에는 평양 장대현예배당에서 열린 제3회 독 노회에서 김 필수, 윤 식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테이트 선교사로부터 태인 매계 고부 천원 등 여덟 곳 교회의 당회 권리를 맡아 열심히 교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목사가 된 지 4개월 만에 평소에 마음속에 싸여오던 문제들이 있었으니 군산 전주 등 직접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는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지원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여 왔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1910년 1월 5일 전주에서 열리는 북전라대리회에 자신의 회의 불참사유를 통보하며 5개항을 서면으로 제의하므로 소위 ‘최중진의 자유교회 사건’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출한 5개항의 서면청원서는 다소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였지만 그의 주장은 매우 당당하였습니다. 그 가 제시한 다섯 항목 중 어느 하나라도 채택이 안 된다면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그가 제출한 5개항의 서면청원서 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원입교인에게 지키라는 현교회의 규율이 너무 엄격하니 이를 버리고 학주인(學主人-오늘의 학습교인 격)제도를 세워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로 자유롭게 가벼운 멍에를 메고 예수를 믿고 배우도록 하라.

 

② 군산지방에 편입시킨 부안지방을 그곳과 인접한 내가 맡고 있는 지방에 합병하여 줄 것이며 이뿐 아니라 묵은 밭과 같은 고창 무장지방을 나에게 맡겨 기경(起耕)토록 하라. 1∼2년 내에 일으킬 것이다. 나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전도구역을 넓혀 달라.

 

③ 내가 맡은 지방에 고등학교 하나를 세워서 주님 은혜를 먼저 받은 자가 나라를 위하여 교육사업에 책임을 갖게 하라.

 

④ 교회마다 상구(常救)위원 두 사람씩 두어서 교회 이름으로 가난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하게 하라. 육신이 먼저 있으니 물질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 없이 말씀으로 함보다 사랑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사회로 하여금 알게 하여야 한다. 사회는 교회의 밑천이다.

 

⑤ 기왕에 나는 은혜받은 바 있으나 금번 은혜를 한번 더 받고자 하니 나에게 집 한 채를 사서 줌으로 내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라.

 

 

 

이러한 제의에 대리회에서는 특별위원으로 김 필수 레이놀즈 최 흥서로 정하고 최 중진의 청원은 ① 배은(背恩) ② 배약(背約) ③ 분쟁(紛爭) ④ 무지각(無知覺)함 ⑤ 불복(不伏) 하는 일임으로 거절하며 그가 맡고 있는 당회권리를 보류한다고 결정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에 최 중진은 불복하고 독립의 뜻을 나타내고 장로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대리회와 선교사들에게 반발하여 자주교회를 선언한 최 중진 목사에 대해 매우 깊은 유감을 가진 레이놀즈 목사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자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또 용서하여 좋은 해결책이 나오도록 권면하며 화목을 이루자.”라고 제의하고 다시한번 더 김 필수 마로덕 서 영선을 특별위원으로 뽑아 최 중진 목사에게 보내 위로와 화목을 권면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 목사가 마음을 이미 굳혔으므로 위원들의 방문은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기성(旣成) 장로교회와 결별을 선언한 최 중진 목사는 그동안 태인·정읍 지방의 각 교회를 돌보며 당회권리를 행사하였던 만큼 그의 활동 영향은 실로 컸습니다. 3천여 명을 헤아리는 많은 교인들이 자유교회 주장에 동조했고 여러 교회가 동요되었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분쟁에 휘말렸는데 오랫동안 최 중진 목사의 직접 지도를 받아온 담당지역 교회들은 대체로 자유교회 편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교회들은 찬반쟁론으로 예배당 쟁탈전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대리회는 최 목사 처리문제로 특별 임시노회를 소집할 것을 전보로 긴급 청원하고 산하 모든 교회들에게 “자유교회 운동에 미혹되지 말고 교회를 수호하라”는 목회 서신을 띄웠습니다. 더 이상 자유교회운동을 그냥 둘 수는 없으므로 대리회는 노회의 업무처리를 대행할 수 있다는 서울의 노회지도자들(당시 노회장은 언더우드와 게일 목사 등)의 유권해석을 재확인하고 1910년 2월 22일 전주에서 전북대리회를 열고 토의 끝에 “최 중진 씨가 목사직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 직분을 거두고 이 사건을 노회로 올려 보내자.”라는 안을 기립투표로 가결하였습니다. 이로써 다음 정기노회 때까지 최 목사는 휴직을 명하였습니다.

 

1910년 9월 18일부터 평북 선천 염수동예배당에서 열린 제4회 독 노회에서는 22일 정사위원회(定事委員會)의 보고에 따라 “전북대리회에서 최 중진 씨를 휴직시킨 사건에 대하여 조사하여 본 바 최 중진 씨가 청원한 일이 법 밖의 일이오며 또 자기가 스스로 퇴각(退却)하여 교회를 해롭게 하며 노회 앞에서 한 약조를 배반하였으므로 대리회가 노회 때까지 임시 휴직시킨 것이 가합(可合)한 일이 온바 지금까지 불복하니 회개하기를 바람으로 혁직(革職, 免職)함이 가한 일”이라 함을 채택하여 최 중진 목사의 신분 처리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최 중진 목사는 목사 된 지 6개월 만에 휴직되고 1년 만에 노회에서 면직되었습니다. 전북 교회사에서 목사면직 사건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선교사 테이트선교사와 오랫동안 동역자로서 사소한 일로 인격적 차별대우와 감정대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발단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목사가 된 이후 최 중진 목사의 자세와 주장을 통해 볼 때 자존심과 왕성한 사업 욕구에서 경제적 요망이 뚜렷했고 상대적으로 선교사에 대한 대우와의 격차에 불만을 느끼고 시정해 보려고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최 중진 목사는 일찍부터 동학농민운동이나 의병활동으로 민족자존의 정신이 뚜렷하였고 열정적이고 언변과 통솔력이 뛰어나 선교사들과 마찰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목사로서 선교사들과의 경제적 차별과 선교사들의 주도적인 교회 운영에 불만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그는 동생 최 대진 목사의 간곡한 설득과 권유에 다시 1914년 10월 12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강도사로 복구되었지만 하필이면 그간 갈등을 비져 온 테이트 선교사와 동사케 함으로 복구 1년도 못되어 일본 조합교회로 교직을 옮겨버렸습니다. 그러자 노회에서는 그를 제명 처리하였습니다.

 

그가 어찌 일본화 운동의 앞잡이 역할을 한 조합교회에 가입하였는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를 따르던 많은 교인들이 더 이상 최 중진 목사를 따르지 않게 되었고 그의 지도력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전도운동으로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매계교회를 떠나 정읍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적 천민계급의 신분해방을 주장하는 형평사(衡平社)를 중심으로 한 형평운동(衡平運動)에 열심을 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형평운동에 대해 뒤에 소개 할 것입니다. 최 중진 목사가 매계교회를 떠나니 1923년에 이르기 까지 교회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최 중진 목사는 사회운동에서도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남은 생애를 보내다가 1940년 정읍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불같이 피어올랐던 믿음의 열정이 스러지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청원을 들어주고 그의 전도 열정에 대한 관심과 협력이 좀 더 있었다면 태인 정읍지역 뿐 아니라 호남 선교에 엄청난 부흥의 바람이 불었을 터인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민족의식은 당당하였지만 그는 극한 감정에 사로잡혀 뜻밖의 일본 조합교회에 동참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의 자치교회 운동에 동조하는 여파가 여기저기 나타나 1911년 평북 의주군 노북교회의 영수 김 원유(金元瑜)와 강계의 차 학연(車學淵)장로 역시 최 중진 목사의 주장과 운동에 공감하여 자유교회 운동은 이북까지 파급해 갔었습니다.

 

 

 

최 중진목사의 면직으로 인해 문을 닫은 매계교회는 박 봉래((朴琫來, 1880-1950)장로에 의해 1926년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박 봉래 장로는 부모를 따라 전주 서문교회를 다니던 중 한일병탄이라는 나라의 비극적 역사에 고민하던 중에 북간도 용저에 머물면서 독립군 소대장을 하며 독립군 신참훈련병들을 교육을 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일본군 무기고를 털어 용정으로 이송하던 중에 체포되어 1921년 6월 18일 재판을 받고 5년 형을 받아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출소한 뒤에 전주로 내려오고 최 중진 모사를 따라 매계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매계교회가 문을 닫자 다시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매개교회를 재건하고 그 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1950년 6.25전쟁중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에 체포되어 그해 8월 5일 71세 나이로 태인 돌미산 언덕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박 봉래 장로뿐 아니라 박 도춘 집사 박 봉래장로의 아들 김제 난산교회의 박 종헌 장로 그리고 천원교회의 박 영기장로 강 태주전도사 매계교회로부터 분립한 두암교회 임 윤례 집사등 22명이 순교하였습니다. 국가에서는 1977년 박 봉래 장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수진목사 한국장로신문 2009년 12월 12일 장로열전에서 발췌)

 

 

 

앞서 소개한 최 중진 목사가 참여하였던 형평운동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형평운동은 한국판 노예해방운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로부터 조선 500년 거의 천년 여 동안 우리나라에는 엄격한 신분차별제도가 있었습니다. 한번 종이 되면 대대로 종살이를 해야 하고 어쩌다 중인으로 태어나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대대로 신분의 차별로 불이익을 당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신분 차별의 적폐를 하려는 일도 있었지만 이것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대역 죄인으로 다스리니 감히 이에 대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고려시대 1198년(신종 1) 5월 당시 집권자인 최 충헌의 노비인 만적이 수백 명의 노비들과 신분해방운동으로 봉기를 일으켰지만 내부자 고발로 실패한바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간간이 신분제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학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일회성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나 만인 평들을 주창하는 기독교가 들어옴으로 본격적으로 신분제도가 부당하다는 의식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사회적 신분으로 가장 낮은 급을 천민이라 하는데 8천이라 하는 천민이 있었습니다. 노비, 백정, 재인, 기생, 공장, 승려, 무당, 상여꾼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조선 8천이라 하는데, 그중 천민 중에 가장 멸시받는 사람들이 백정이었습니다. 고려시대 이들을 화척(禾尺:楊水尺)이라 불렀는데 아마도 고려시대 북방서 들어온 유목민 타타르인(韃靼人) 계통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백정은 도살업과 육류판매를 하며 천민으로 국가에 세금이나 부역도 하지 않음으로 몰락한 빈민들이 백정으로 전락하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 백정의 수가 40만에 이르기도 하였고, 1923년경 형평운동에 참여한 백정의 수가 3만4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김수진 목사의 <호남선교100년과 그 사역자들>86쪽 이하에 형평운동에 대한 설명을 잘 하여 주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글에서 발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정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와집에 살수 없고 명주옷을 입지도 못하고 망건도 쓰지 못하였습니다. 외출 시에 상투도 틀지 않고 평량자(平凉子패랭이)를 써서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백정이 죽으면 상여를 사용할 수 없고 묘를 쓸 때도 떼를 입히지 못하였습니다. 혼인 때 여자들이 가마를 사용할 수 없고 비녀를 꼽지 못하고 트레머리를 하여야 했습니다 이름도 仁義禮智忠孝가 들어간 글자를 사용할 수 없었고 물론 족보도 없으니 항렬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자신을 소인이라 칭하여야 하고 일반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함께 길을 갈 때도 몇 걸음 뒤쳐져서 가야했습니다. 만일 이런 규례를 어기면 가차 없이 감금을 당하거나 사형(私刑)으로 태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 메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무어(S F Moore 1846-1906 모삼율)선교사가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아 한국선교사로 1892년 9월 21일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한국에 1893년 곤당골교회(승동교회)를 설립하고 특히 백정들의 실상을 보고 백정전도에 열정을 기울였습니다. 9웧 어느 날 관자골 백정 박가의 아들 봉출이가 무어선교사를 찾아와 아버지의 병을 고쳐 달라고 말합니다. 무어선교사가 가서 보니 장티브스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고종임금의 주치의로 있는 에비슨 (O.R. Avison, 한국이름 어비신魚丕信)선교사에게 부탁하여 마침내 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박가는 임금의 주치의가 자기 병을 고쳐 준 것에 너무나 감동해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박가는 세례를 받고 무어로부터 성춘이란 이름도 얻게 됩니다. 그 후 1911년 박 성춘이 장로가 되자 교회내의 양반들이 반발하여 홍문수골교회(안동교회)를 세우고 분리해 나갑니다. 그 후 1914년 왕손인 이 재형이 이 교회에서 장로가 되니 그리스도 안에 신분의 차별이 없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박 성춘의 아들 박 서양(朴瑞陽, 1885년 9월 30일 ~ 1940년 12월 15일)은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이 되어 그 후 10년간 이 학교의 교수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어선교사는 뜻밖에 장티브스로 인하여 1906년 12월 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 이전 박 성춘과 많은 백정들의 소원을 들은 무어선교사는 에비슨의사와 협력하여 1895년 고종에게 백정인권탄원서를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그 탄원서의 내용을 김수진목사님 책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소개 합니다.(89쪽)

 

 

 

<당신의 비천한 우리 백정들은 과거 500년 이상 짐승을 도살하는 생업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나라에서 하라는 대로 모든 일에 무조건 순종하고 삵도 안 받고 섬겨 왔지만 우리는 천민 중에도 제일 바닥사람으로 천대받아 왔습니다. 다른 천민들은 그래도 긴 소매 옷과 망건 따위를 쓰고 다니지만 유독 우리 백정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삽니다. 심지어는 관가에서 심부름하는 하치들까지 우리를 업수히 여기고 가끔 우리의 재산을 노략질해 갑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는 날이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네들은 우리 뺨을 갈기고 옷을 찢고 온갖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그자들은 우리를 잡아다가 강제로 일을 부려먹으며 엽전 한 푼 안 주면서 천대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제일 참기 어려운 일은 삼척동자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대말을 쓰는 일이옵니다.>

 

 

 

이 같은 탄원서는 1896년 갑오경장 때 윤허를 받아 마침내 백정을 비롯한 신분차별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는 링컨의 노예해방과 버금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쓰고 긴소매 옷도 입고 족보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백정은 너무 기뻐서 갓이나 망건을 잘 때도 벗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무어 선교사는 자비를 들여 백정해방 선언문을 360여장 만들어 전국적으로 배포하였습니다. 백정들이 교회로 몰려오니 수원 지방에서는 50여명이 한꺼번에 교회로 나왔고, 서울에서만도 132명의 백정들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는 아직도 신분의 차별의 풍속이 여전하므로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 지필과 같은 백정 출신 지식인, 이 학찬과 같은 경제력을 갖고 있던 백정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목적 하에 형평사를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이같은 형평운동이 점점 사회운동화 되고 일본 총독부는 이들을 이용하여 민족 분렬을 획책하는 정책에 넘어가 1935년엔 이름을 대동사로 바꾸면서 친일을 하게 되니 점점 형평운동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형평운동에 최 중진 목사가 처음으로 호남에서 그 운동을 시작하여 정읍 지역의 천민 인권운동의 효시를 이루었고 이 같은 운동은 천민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점차 신분의 차별의식이 호남지역 내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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