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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초기선교사 남도행전(김제지역 계속)

전병호 by  조회 수:40 2019.07.06 14:04

초기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계속)

 

 

대창 교회는 1908년 3월 군산에서 전주로 옮긴 젼킨 목사와 김 필수 장로를 초빙하여 공동 회의를 열고 최학삼을 장로로 선출했으며 뒤를 이어 1910년 4월엔 이명순의 이들인 이 재언이 장로가 되고, 1915년에는 동시에 부자가 장로가 되었는데 최 윤중과 아들인 최 태진이 함께 장로가 되었고, 이어 최 경윤, 최 경택, 등 16명이 차례로 장로로 장립되었습니다.

 

번드리 일대는 드넓은 벌판으로 농산물의 집산지였습니다. 번드리 서북쪽은 만경 관내인데 구한말 매국노 이완용이 막대한 돈으로 이 동네 사람들을 동원해 바다를 둑으로 막아 거대한 농토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완용이 자기 농장을 보호하기 위해 기린봉에서 동진강과 수교천으로 흐르던 물을 보로 막아버리면서 비가 올 때마다 번드리 일대가 홍수 지대로 변해버렸지만 워낙 권력 있는 자라 아무도 이에 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분개한 대창교회 최 학삼 장로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여 함께 이완용이 막은 수교천 근방의 보를 터 버리니 그 후로는 비가 많이 와도 번드리에는 홍수가 나지 않았습니다. 최 학삼 장로는 키가 육척 거구로 언변이 좋고 성격은 대쪽 같아서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완용이 최 학삼 장로를 고발하여 2년에 걸친 재판이 이어져 마침내 대구고법에서 최 학삼 장로가 승소함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1911년에는 대창교회 최 학삼장로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어떤 경유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주 명준 교수는 신학교육을 재대로 밟지 않고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김세열 한국신교선교 백년사강의 1984, 269쪽. 주명준 전북의 기독교전래 220쪽)

 

1914년 9월 13일 함흥 신창리 예배당에서 장로회 제 13차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총회장이 이 자익 목사님 이였습니다. 이 총회 결의 사항 중 하나가 다음과 같습니다.

 

‘전북노회에서 문의한 신학구제 3년 급까지 공부한 최 학삼장로를 목사로 장립 하는것이 어떠하냐고 묻는데 대하여는 정치 제14장 6조와 11조를 의하여 해 노회가 처리할 것이오며’

 

당시 5년제 신학교를 3년만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총회의 허락으로 전북노회로부터 최 학삼 장로는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목사가 된 후 최 학삼 목사는 대창교회에서 분립해 죽동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명량교회 남포교회 선유도 교회를 개척 교회를 건립하였습니다. 그의 손자인 최 현식장로는 신흥건설이라는 큰 건설업체 사장으로 있으면서 1973년 노아의 방주 모양으로 아름답고 독특한 양식으로 죽동교회당을 새롭게 지었습니다. 최 학삼 목사가 소천한지 1년 뒤 1935년 6월 10일에 대창 죽동 명량 남포교회 공동명의로 죽동교회에다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 기념비 글귀가 다음과 같습니다.(주명준 위의 책 221쪽)

 

‘서양의 기독교를 이 지역에 전도한 것은 공이 처음입니다. 30년 동안 쉬지 않고 곳곳에 교회를 세우셨고 노령에 이르기 까지 계속 목회활동을 하시다가 생을 마친 뒤 이곳 죽동에서 영원히 반석이 되셨습니다.’

 

최 학삼 장로의 아들 최 용한이 임 선유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임 선유씨는 이 승만 초대 대통령의 최 측근이고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 영신씨의 친 언니가 됩니다. 최 학삼 장로의 둘째 딸 최 정순은 전주 동부교회를 비롯해 죽동교회 등 이 지역 여러 교회에서 활발한 목회활동을 한 정희수 목사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또 조카인 최 원선이 옥산교회 정공선과 결혼하였는데 정 공선은 옥산출신으로 군산 궁말병원 원장 패터슨(Jacob Bruce Patterson 1909-1929활동)의 조수로 의학공부를 하여 김제에 벽성의원을 개업하고 옥산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후에 김제에 신풍교회를 세우고 김제 읍 중앙교회를 세웠습니다. 의사로서 복음 전도에 힘을 쏟았던 정 공선 장로는 6명의 사위가 모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큰사위 장 태수는 신풍병원을 운영하면서 김제중앙교회 장로, 둘째 사위인 김 보라는 서울에서, 셋째 사위 김 형록은 부안읍교회 장로로, 넷째 사위 이 동신은 김제 백산병원 원장, 다섯째 사위 조 용근은 장항교회 장로, 여섯째 사위 민생은 전주 남문교회 장로로 각기 장인의 귀한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제지역에 많은 일본인들이 땅을 구입하여 경작을 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일본인이 다끼(多木)라는 사람과 이사가와(石川)한 사람이 넓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대창교회 교인들은 1922년 700원을 들여 132㎡ 규모의 예배당을 건립하는 한편 대창학당을 세워 교장으로 최 경택이, 교사로는 전주군 이동면 화산리의 김선애가 각각 취임하여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때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치다가 아이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안경석이라는 청년이 학생들에게 쌀 한줌씩만 가지고 오면 악기를 살수 있다고 하니 온 교회 교인들이 쌀을 모아 악기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안경석 김중화 최준식 이병욱 최태영 홍재일 그리고 후에 최 종수 장로도 참여 하여 6인조 악단을 경성하였습니다. 대창교회 종소리는 이 지역에 대단히 유명하였습니다. 번드리 넓은 논밭에 종소리가 퍼져 나감으로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시간을 알게 되고 비상사태를 아려 주기도 하고 결혼예식이나 장례예식도 알려주어 사람들이 오게 하고 심지어 깡패가 사람들을 괴롭히게 되니 종을 사람들이 몰려와 깡패들이 도망치기도 하였습니다.

 

1913년에는 이 재언(1872.7.21.-1949.9.1.)장로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목사가 되어 1916년 대창교회 첫 번째 위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재언 목사는 대창교회 뿐 아니라 인근 여러 교회도 함께 돌봄으로 이 지역의 영적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 재언 목사는 대창교회 초기 신자인 이 명순의 아들로 전남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에 살다가 1894년 광주 무등산 아래로 이주하여 살다가 더 좋은 집터를 찾아 김제군 죽산면 명량리 우렁산 아래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좋은 집터를 마련하였으니 이 기선씨의 전도를 받아 앞서 소개한대로 대창리 교회 설립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명순씨는 처음부터 아들 이 재언을 목사로 하나님께 섬기기로 작정하고 기도하며 신앙으로 이끌어 마침내 목사가 되어 대창 모교회의 목사로 오게 되니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대창교회는 최 학삼, 이재언 목사를 비롯하여 정진철, 안경운, 안상영, 이병상 윤식명 목사 등 약 18명에 이르는 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었으며, 함 태영 부통령도 이 교회 출신이고 안 덕윤 목사는 6·25 때 순교하여 한국 기독교사에도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총회장을 지낸 바 있는 이리 신광교회의 고 안경운 목사까지 총회장을 4명이나 배출하였습니다.

 

대창교회 출신으로 이 상섭 목사가 있는데 그의 가계에서 목회자가 11명이나 됩니다. 처가를 제외하고 직계 쪽만 이 목사를 포함해 7명이 목회자입니다. 큰형 이 상운 목사는 서울 영등포 당일교회 담임하였으며 교경중앙협의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 상섭 목사는 현재 방파선교회 회장으로 이스람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상당수의 동학교도들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동학도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기독교의 교리가 자기들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인간 평등과 박애 사상을 말하는 기독교의 교리가 人是天 事人如天 人是平等 차별철폐 인상무인 인하무인 등과 무엇이 다른가 비록 완전한 개종은 아니더라도 관군의 추격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데 적어도 위장개종이라도 하는 다급한 처지였습니다. 갑오경장이후 동학교도들은 상투를 자르고 채색 옷이나 검정 옷을 입도록 하는 진보적인 개혁을 선도하였는데, 당국은 “상투 자른 자들은 동학교도들이니 무조건 잡아들이라”고 공포를 하였습니다. 이에 동학교도들이 기독교를 개종하므로 동학교도들을 잡아 조사하는 중에 상투를 잘랐다 하더라도 기독교인이라 하면 무조건 석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900년 동학 세력이 집단으로 개종하면서 이들이 중심이 되어 입석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처음에 입석리 교회는 작은 기도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으로 동학의 접주인 김 국현이 살아남기 위하여 기독교에 귀의를 하고 월천면 입석리 선돌 도로변에 있는 4칸짜리 자기 집을 기도처로 삼으라고 전킨 선교사에 요청을 하였습니다. 당시 전킨 선교사는 송지동 교회 개척을 위해 열심히 이 지역을 찾아 왔던 것입니다. 이래서 전킨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은 김국현 구덕삼 이기선 조원배 와 목수 일을 하면서 매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곽성국 등 몇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기선에게 전도를 받은 이순명 최학성 최학삼 최대삼 최윤증 등도 1903년 대창교회가 설립되기 전이라 입석리 교회를 출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 국현이 교인들의 밥을 지어준다는 명목으로 교회 헌금을 자의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구덕삼이 회계 일을 맡았는데 장부 기재를 몰라 회계장부에 수입만 적고 지출항목을 적지 않은 것이 사단이 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월봉리에서 오는 교인들이 김 국현이 내 놓은 기도처 집을 뜯어다 월봉리에 초가 18평 초가집터에 교회당을 짓고 1908년 10월 1일 봉월교회라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입석리교회 교인들이 봉월교회를 이곳에 세운 이유는 그들이 월봉리 사람 이였을 뿐만 아니라 실상 1905년 이곳에 정착한 일본인 마스도미 야스자이몽(升富 이하 승부) 때문입니다. 승부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세운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장로였습니다. 그는 농장의 농민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유하여 대부분 소작 농민들이 봉월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승부장로에 대해서는 정읍지역 교회를 소개할 때 더 자세하게 소개하겠습니다. 김국현씨도 월봉리로 이사와 봉월교회에 계속 출석하였습니다.

 

설립 이후 봉월교회는 신양교회, 유정교회, 농원교회(현 월촌중앙교회) 등을 개척하는 등 지역복음화에 주력해왔으며, 일제강점기 후반인 1940년 경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종이 없어졌습니다. 교회 종을 징발하러 가던 일본 순경들이 화를 내며 교회당 구석구석을 수색하다 찾지 못하자 종을 감췄다는 죄목으로 윤동석·구봉규 장로와 오해석 집사가 구속하여 핍박하였습니다.

 

현재 봉월교회는 지역 주민들과 더욱 친화력을 가진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독거노인을 위한 복지관 건축, 학생들 대상 독서실 및 피아노 교습소 운영, 결혼식 장소 무료 대여 등과 관련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봉월교회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면장을 지낸 백 봉석 장로의 아들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독일 에르랑게 대학에서 경제학박사를 취득하고 9대 10대 국회의원으로 지내면서 한국 경제발전에 초석을 다진 백영훈 박사가 있습니다. 현재 그는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으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제군 황산면 들판에 선인동 부락이 있습니다. 가을에 수확이 끝나면 부락민들이 여러 퇴폐적인 생활을 하므로 1년 농사를 한 번에 다 날려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테이트 선교사(Lewis Boyd Tate 최의덕)가 선인동을 찾아 왔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안 백선이란 사람을 만나자 쪽 복음을 건네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술 담배에 투전까지 좋아하던 안 백선은 단번에 손을 저으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골수를 쪼개기 까지 하시는 능력의 말씀인지라 어느 날 담배를 말아 피우려고 쪽 복음 한 장을 찢다가 이런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로마서 5:18-20 말씀 이였습니다.

 

이 순간 마음의 찔림을 받은 안 백선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말아 피우려던 입담배를 다 태워버리고 전주 서문밖 교회로 테이트 선교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이여 어찌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된 심정으로 테이트 선교사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50리나 되는 전주까지의 길을 다니며 교회를 출석하였습니다. 마침 당시 전킨 선교사가 월성교회를 설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보다 가까운 15리 길 월성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1905년3월 15일 같은 마을에 사는 박순경과 함께 초가 3칸을 매입하여 선인동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전주 선교부에서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한 달 성경학교에 안 백선을 입학을 시켜 공부를 시키니 마침내 1908년 레이놀즈 선교사의 위임을 받고 선인동 교회 영수가 되고 박순경은 집사로 충성하기 시작하여 날로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박 순경집사는 장로로 임직하게 됩니다.

 

김제 감옥에 옥리 일을 보는 김 여일이라는 사람이 선인동 교회 소식을 듣고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니 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1921년부터는 스위코드(Swicord. Donald A 한국명:서국태 1921년-1949년까지 전주에서 활동)선교사가 교회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안 백선 영수가 남의 보증서를 써준 관계로 농토를 다 일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주로 이사를 하게 되니 김 영일이 영수 일을 인계받게 되었습니다. 김제 읍내에서 선인동을 오가면서 신앙생활 하던 김 여일은 1910년 옥산리에 옥산교회(김제제일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몰려오자 1917년엔 김 여일은 하목마을에 임 성용을 중심으로 하목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선인동 교회에 김 익두목사가 와서 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한 상용이 은혜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1920년 김제군 용지면에 임상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농촌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는 믿음을 가진 선인동 교회 교인들은 보이어(Boyer Elmer Timothy 1893-1976 보이열 1921-1966활동)선교사가 당회장으로 있을 당시 1925년 선인동 학원을 설립하여 야학교육을 활발하게 공부 시켰습니다. 그 후 진관리로 교회를 옮겨 진괸리 교회라 부르다가 1970년 4월 7일 황산 들녘의 수문장처럼 높다란 십자가를 세운 동부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현재 1997년 부임한 김 철안 목사가 삶의 안식과 기쁨을 주는 교회로 청소년 신앙운동과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한 지역 봉사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하여 더욱 교회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선인동교회를 설립한 안 백선은 전주로 이주하여 서문밖 교회에서 장로가 됩니다. 그의 세 아들이 머리가 영특하고 민족애 의식이 투철하여 전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신흥학교를 다녔으며 둘째 아들 안 삼용은 의사가 되어 태인 읍에서 개업을 하고 태인교회를 섬겼으며 셋째아들 안 상용은 대구의학전문 학교(현 경북대학교의과대학)를 졸업하고 군산에서 의원을 개업하고 지금까지 세광교회장로, 부인 김 혜경장로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큰 딸 안 영신장로는 서울 수도교회에서, 아들 안 영진 장로는 분당한신교회에서 둘 째달 안영인은 일산에서 권사로 셋째달 안 영미는 서울에서 넷째달 안 영란은 전주에서 권사로 각기 열심을 다하여 교회로 섬기고 있습니다.

 

 

선인동 교회의 안 백선장로가 있다면 임상교회에는 한 상용(1889-1963) 장로가 있습니다.(김수진목사 호남기독교 100년사 259쪽 이하 참고) 한상용은 김제군 용지면 임상리에서 천석꾼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경남 기장의 현감이었는데 은퇴 후 김제로 이주하였습니다. 한상용은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나라의 어지러움이 그에게도 미쳐 술집을 드나들며 허랑방탕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제 읍내에 나갔다가 선인동 교회에서 김 익두라는 목사가 와서 사경회를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유명한 평양 불량배가 목사가 되었다는 소문에 호기심으로 예배에 참석합니다. 설교가 끝난 후 당돌하게 한상용은 김 익두 목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는 누가 믿는 것입니까?” “죄인이면 누구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한상용은 자기의 죗 된 모습을 생각하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날부터 그는 선인동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 용지면 임상리에서 선인동 교회까지 가려면 자기가 늘 다니던 주막집을 지나가야 합니다. 주일날 그 주막 앞을 지나가려면 기생들이 돈 많은 그를 그냥 놓아 둘리 없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끌려 들어가 억지로 술을 마시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믿음라면 철저히 믿자 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1920년 9월 1일 자기 동리 잠실 한 채를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임상교회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토지 1500평을 교회 앞으로 등기 이전하고 1926년 22평의 임상교회를 신축하였는데 십자가 모양으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임상교회에는 한 상용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소작인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제 한상용은 지체 높은 양반 주지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고넬료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1924년 장로가 되어 자기가 중생함을 받았다는 의미로 중생학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하니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와 1941년 폐교할 때까지 공부를 시켰습니다. 이 학교에 전주신흥학교 출신 오 기준이란 젊은이가 교사로 있었습니다. 그는 스위코드 선교사가 중생학교에서 열심히 학생을 가르치면 신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오 기준 선생은 성경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우리나라 역사를 함께 가르쳤습니다. 한 상용 장로는 학교건물 옆에 연못을 팠는데 태극기 모양을 파고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 괘를 만들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학교가 폐쇄되었으니 그때까지 졸업생이 500명도 넘었다고 합니다. 교회의 장학금으로 오 기준 선생은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임상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 상용 장로 부인 함 연춘은 전주태생으로 기전여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기전여학교 영어선생으로 재직 중 한상용과 결혼하여 임상리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함 연춘은 1919년 3원 전주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에 옥고를 치루기도한 애국여성으로서 임상리 야학교에서 부녀자들을 가리키고 농촌 여성계몽 운동에 앞장을 서 일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 동리에 문맹자가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한 상용 장로는 교회 내에 농우회를 조직하고 자작농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예를 들면 부락민들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서 암소로 키우게 합니다. 암소가 자라면 팔아서 송아지 값만 받고 나머지는 키운 농부가 가지게 합니다. 또 받은 송아지 값으로 송아지를 사도록 돈을 줍니다. 이렇게 계속 불려나가 마침내 농토를 소유하게 하여 소작인들이 모두 지주가 되게 하였습니다. 1939년에 임상리 농민들이 임상리 교회 뜰에 <한장로 상룡씨 영원 기념비>를 세웠고, 1941년에는 용지면 반교리 원임상리 농무들이 뜻을 모아 임상리교회 뜰에 <士人 韓相龍 施惠不忘碑>를 세웠습니다. 이 자작농운동 성공으로 임상리 지역뿐 아니라 그 외의 지역에도 전해져 모두 지주가 되니 소작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게 되었고 흉년이나 보릿고개가 와도 여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상룡장로는 헐벗고 가난한 병든 가정이 있으면 아무도 몰래 그 집 문 앞에 쌀가마를 놓아주곤 하였습니다. 1926년 길거리에서 오 갈 데 없는 강정리 노인을 만나 집으로 데려와 사랑채에 모시고 그 노인을 천사가 보내 준 사람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그의 사랑채를 한국기독교역사상 두 번째 양로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애린양로원이 존속이 되어 있으며 양로원에서 매입한 공동묘지에 300기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한 사용 장로의 맏손자인 한 규택 장로가 애린양로원 원장으로 대를 이어 섬기고 있으며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김 수진 목사는 그의 책 호남기독교 100년사에서 “한 상용장로는 이웃사람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다고 늘 말하였으며 물질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시로 자기에게 맡겨 주신 것이며 자신은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렇게 많은 땅을 이웃을 위해 썼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성경대로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그는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헐벗고 병든자를 돌보는 일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말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현재 담임목사는 박경철목사인데 그는 한신대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구약학을 공부하여 귀국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베델 지역의 디아코니아 생태공동체 마을에 영향을 받아 온 터이라 들녘교회 이세우 목사의 권면을 흔쾌히 받아 농촌마을 2004년 임상교회로 내려와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가고 있습니다. (이후 박 경철목사는 한신대 교수로 , 2014년 8월 현재 남성수목사 담임)

 

1904년 3월 1일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에 사는 주 원선이 예수를 믿게 되어 전주의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가 됩니다. 그가 대송리에 와서 전도하면서 대송교회가 세우고 영수가 됩니다. 레이놀즈선교사가 대송교회를 맡아 말씀을 전하다가 1921년부터는 스위코드 선교사가 뒤를 이어 농촌 선교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봉남면은 본래 금구 남쪽에 있다하여 남면이라 부르다가 1914년에는 하지면으로 193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봉남면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송리가 봉남면 중심에 있게 되었습니다.

 

김제의 동남쪽 지역을 맡아 선교 활동을 하던 테이트 선교사가 1905년부터 금산면 두정리의 큰 유지였던 조 덕삼(1867-1919)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의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보았습니다. 금산교회가 출발하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두정리 일명 팟정이(赤豆)라고 하는데 금산면의 남쪽 정읍이나 태인에서 전주나 서울을 가려면 금산면으로 들어와 팟정이를 거쳐야 했습니다. 팟정이를 지나 청도리와 재를 넘어 전주의 중인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팟정이를 지나는 사람들이 항상 많았고 선교사들이 남쪽으로 갈 때도 이곳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도 조랑말을 타고 남쪽 지역 전도를 하러 이곳을 지나면서 이곳에서 하루 밤을 묶게 되는데 하루는 조 덕삼이 찾아와 자기 집에 와서 머물라고 초청을 합니다. 본래 조 덕삼은 항상 문을 열어 놓고 나그네들을 잘 대접하곤 하였는데 그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보아 오다가 오늘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조 덕삼의 할아버지 조 정문은 평양에 살면서 중국 동북부지방으로 홍삼무역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아버지 조 정인은 전라도 김제에 금산이란 곳이 있는데 글자 그대로 금이 많이 나오는 산이다 라는 소문을 듣고 가솔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군산 앞바다를 거쳐 만경포구에 내리게 됩니다. 그는 금산 팟정이에 자리를 잡고 사금 광산업을 하면서 역시 장사 솜씨가 대단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자인 조 덕삼이 테이트 선교사를 청하니 테이트 선교사는 뛸 뜻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지역이 금산사의 부채 살처럼 펼쳐진 불교의 영역이고 온갖 신흥종교가 들끓는 지역이라 감히 전도할 생각조차 못 가졌었는데 그야말로 하나님이 호박을 넝쿨 채 주시니 이 어찌 감사할 일이 아니겠니까? 이 만남으로 하나님의 놀랍고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 이 종교심이 많은 이 지역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일 뿐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함으로 한국 교회 전체에 큰 빛을 비추게 하는 일이 되었음을 아직 테이트 선교사는 알지 못 하였습니다.

 

조 덕삼이 테이트에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네 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인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 때문입니다”라고 선교사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조 덕삼은 선교사의 희생적인 정신과 용기에 감동을 받아 1905년 봄부터 자기 사랑채에서 조 덕삼 부부, 마부 이 자익, 같은 마을의 박 화서 등이 모여서 예배를 드림으로 팟종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팟종이 교회는 후에 금산교회로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금산교회는 1905년 조 덕삼의 과수원이 있는 두정리에 초가삼간을 예배당으로, 10월 10일 조 덕삼과 이 자익이 학습 받은 날을 교회 설립일로 정하였습니다. 다음해 5월 30일 테이트 선교사 집례로 조 덕삼, 이 자익, 박 화서가 세례를 받고 처음으로 성찬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주 명준교수가 쓴 연정교회 100년 사에는 예수를 먼저 영접하여 팟종이 교회를 시작한 이는 이 자익이라고 합니다. 이 자익이 처(김선경)와 함께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독교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 할머니가 금산사의 여승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친구 김 종규 등 몇 사람들과 함께 “팟종이 모임”을 2년간 지속하며 신앙생활 하여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자익(1882-1959)이 누구입니까? 이 장익은 경남 남해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을 하였습니다. 3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6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어린 이 자익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17살 때에 배를 타고 무작정 섬을 탈출하였습니다. 배를 타고 경남 하동 근처에 도착하여 다시 남원 전주를 거처 금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굶주린 이 자익을 조 덕삼이 발견하고 자기 집 마부로 일하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조 덕삼의 아들 조 영호가 서당훈장으로부터 한문교육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귀동냥으로 공부를 하는 것을 조 덕삼이 보고 자기 아들과 함께 정식으로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이 자익이 주인 조 덕삼과 함께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니 마치 백조가 날개를 펄럭거리며 창공을 날듯이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펴 교회에 열심을 다하니 주인 조 덕삼과 함께 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주인과 하인 마부가 함께 교회의 영수가 된다는 것은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봄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1907년 조 덕삼을 제치고 이 자익이 먼저 장로로 피택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당시 선교사들에게는 매우 쇼킹한 일이였고 또 염려스런 일이였습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승동교회에 많은 하층민들이 출석을 하였는데 박성춘이란 백정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양반 교인들이 반발하여 교회를 떠나 안국동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또 연동교회에서도 갓바치들이 교회에 많이 나와 고 찬익이란 갓바치가 장로가 되니 역시 양반 교인들이 반발하여 종묘 인근에 묘동교회를 설립하였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전주 선교부에서도 마부가 주인보다 먼저 장로가 되니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 덕삼 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의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 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 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 자익 영수는 저 보다 신앙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도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 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자익장로를 섬기겠습니다.” 이 조 덕삼 영수의 말을 들은 교인들은 힘찬 박수를 보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때때로 선교사가 오지 않았을 경우엔 이 자익장로가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조용히 말씀을 들었습니다. 비록 집에서는 주인과 하인 관계이지만 교회에서는 장로와 영수로 각각 자기의 책임을 다함으로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었습니다.

 

조 덕삼 영수도 1908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해 4월 4일 부활절 예배 후에 조 덕삼 장로가 헌금하여 세운 ㄱ자 교회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당 모습은 대체로 ㄱ자 형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분리 되어 앉아 예배를 드렸고 강대상은 꺽어진 가운데 놓았습니다. 일자 교회라 하더라도 남 녀 좌석 가운데 포장을 쳤습니다. 조 덕삼 장로의 의견을 따라 남자석 상량문에 <一千九百八年 戊申陽四月四日陰三月三日>이라 쓰고 이어 한문으로 고후 5:1-6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자 석의 상량문에는 고전 3:15,16의 말씀을 한글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강대상 뒤 쪽으로 목사님이 드나드는 쪽문이 있었는데 이 문을 겸손의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테이트 선교사가 이 작은 문을 들어 올 때 “주께서 나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신다”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모든 집들이 타버렸지만 금산교회는 불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비록 죄익계 사람들이라도 금산교회는 우리교회라 하며 우리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금산교회당은 전북유형문화재 13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07년 예수교회보(11월27일자)에 이 자익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경계자 이곳은 금산사가 가까우므로 우상만 섬기고 패속만 숭상하여 전도인을 보면 핍박이 자심하더니 삼년 전에 조 덕삼 씨께서 회개하고 주를 믿은 후 열심 전도하여 사람을 주의 앞으로 많이 인도할 뿐 아니라 먼저 신화 십오환을 내어 초가삼간을 사서 예배당을 삼으니 형제들이 열심 연보하여 그 돈을 갚은 후에 예배당이 또 좁아서 십이 간을 더 늘이옵고 매 주일에 모여 예배 보는 현제자매가 이백 여명이 되오니 감사하오며 세례인이 칠십 오인이요 원입교인이 삼십 구인이 되오니 하나님 은혜 감사하오며 각처 형제자매는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하였더라”

 

이 기록에 의하면 조 덕삼씨가 테이트 선교사를 만난 해가 1905년이 나니라 1904년이 된다고 보겠습니다.

 

조 덕삼 장로는 이 자익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어 공부하게 합니다.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된 이 자익은 초대 최 대진 목사 뒤를 이어 2대 금산교회 목사가 됩니다. 그후 이 자익목사는 1925년부터 전국에 20여개의 교회를 설립하고 1927년에는 경남노회장으로 그 후는 거창선교부 순회목사로 있으면서 남은 한 번도 하늘에 별 따기인 총회장을 1924년 1947년 1948년 세 번이나 장로회 총회 총회장을 하였습니다. 1954년에는 대전신학대학을 설하며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다가 1958년 김제 원평에 살고 있는 셋째 아들의 집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이보다 먼저 조 덕삼 장로는 유광학교(동광학교)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 삼나무 심기 운동도 벌리며 농촌 경제를 독려 하다가 1919년 12월 17일 52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마지막 유언으로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말라. 제사를 지내지 말라. 예수를 잘 믿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 잘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서 이 자익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찬송가 221장 “주 믿는 형제들”찬송을 4절까지 다 부른 후 소천 하였습니다.

 

조 덕삼 장로의 손자인 조 세형 장로는 금산교회를 섬기면 국회의원을 10대로 부터 4번이나 역임하였으며, 이 자익목사의 손자 이 규완장로는 대전 제일교회를 섬기며 우리나라 고분자학의 1인자로 카이스트대학교수로 있습니다.

 

김제군 월천면 연정리에 냉정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앞 야산에 냉정이라는 우물이 있어 마을 이름을 냉정이라 하였습니다. 냉정에서는 여름에는 물이 맑고 시원하였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더욱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을 크게 자랑하였습니다. 후에 이야기입니다만 냉정교회를 세운 후 교회 이름이 냉정하다 라는 의미로 사람들의 구설수를 들었지만 교인들은 계속 냉정교회를 고집하다 결국 1936년에 가서야 보다 따뜻한 정감 있는 연정(蓮井)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1906년부터 박사일 박지홍 박중집 김기선 김경집 김병룡 등 여러분이 입석리 교회를 다녔습니다. 입석리 교회가 봉월리 교회로 옮겨지자 대창교회로 출석하였습니다. 주 명준 교수가 저술한 연정교회100년사에 연정교회 설립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주교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사일은 연정리 월봉마을에 살면서 두레박을 만들어 등에 지고 다니던 중 입석리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마을에 부자로 알려진 박 중집의 농토를 사촌동생인 박 지홍이 소작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촌형제는 본래 동학도로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동학도들을 색출하려는 정부군과 일본군으로 부터 피신할 목적으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점차 신앙의 깊이가 더해져 입석리 교회와 대창리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냉정마을에 살고 있는 3 형제 김 기선, 김 경집, 김 영선이 역시 동학도 였습니다만 예수를 믿고 입석리 교회를 출석하였습니다. 김 기선의 아내 지변화가 군산에서 전도하러 온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여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여 동학도로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 변화는 시동생 김 경집과 김 영선을 전도 하여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더욱 연정교회 역사에 지 변화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잠시 후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20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산 대창리 교회를 다니던 1908년 박 중집과 박지홍은 냉정리에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가장 재산이 많은 박 중집이 자기 땅과 재목과 물자까지 다 내 놓아 교회당을 건립하였습니다, 본래 김 경집은 목수로 여러 교인들과 함께 드디어 1908년 11월 8일(음9월19일) 10평 정도의 초가삼간을 건립하여 냉정리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냉정리 교회가 창립할 당시 얼(A.M. Earle 어아력)선교사가 당회장을 맡았다가 건강상 문제로 귀국하고 1910년부터 1914년 6월 까지 불(부위렴) 선교사가 당회장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신자가 적고 넉넉한 재정이 아니라 멍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다가 1917년에 가서야 마루를 깔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뜻밖에 일이 냉정리교회에 벌어졌습니다. 냉정리 교회의 영수로 봉사하던 박 중집이 큰 아들이 죽자 그만 배도를 하고 교회와 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박 지홍과 김 기선 그의 아내 지 변화 이렇게 교회에 남게 되었습니다. 본래 교회 터는 박 중집의 활터 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건너편에 과녁을 세우고 뭇 사람들을 데리고 활을 쏘며 술마시고 즐기니 교회는 사람들의 비방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박 중집이 활을 쏘려 활터에 오르니 지변화가 웃 저고리를 벗어 재치고 과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 변화는 활을 쏘려면 나를 쏘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저고리를 벗은 여자를 함부로 끌어 내리지도 못하고 박 중집은 활 쏘는 것을 포기하여 마침내 지 변화는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인들이 다 떠나 버려 어려운 가운데 있어 이 소식을 들은 최 학삼 장로가 전 가족과 죽동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교회재건에 힘써 주었습니다. 지 변화는 키도 크고 얼굴도 아름답고 말도 잘해서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아 양 채선과 함께 군산선교부의 그린(Willie Burnice Greene구리인188.5.5 조지아주 뉴에틀란타 커크우드 출생 1919년 내한하여 1960년까지 군산선교부에 소속하여 활동하였으며 영명학교 멜본디여학교와 여자달성경학교를 운영하였다 ) 선교사가 설립한 당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그린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군산 옥구 김제 부안 등을 다니며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최 학삼 장로가 무너진 주춧돌을 다시 새우듯 냉정리교회를 인도하며 흩어진 교인들을 다시 불러 모은 중에 죽산면 홍산리 내촌부락에 샬고 있는 오 봉순 가족이 나와 교회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오봉순은 일본인 농장에서 일을 하며 자신의 많은 농사일을 하여 사람들이 무시 못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오 봉순이 교회 올 때마다 조랑말을 타고 왔다고 합니다. 오 봉순이 교회 출석하자 교회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그는 후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하다가 교회 나온 이 명수는 당시 9천 평의 논농사를 지으며 일대 큰소리치며 살았는데 그가 열심히 교회 일을 하니 박 지홍 다음 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이 명수 영수는 교인들이 아프면 한 달이고 보름이고 병이 나을 때 까지 교인 집을 찾아가 기도해 주곤 하였습니다. 1928년 김 기선 집사가 소천 하였고, 1929년 7월 29일에는 박 지홍 영수가 소천 하였으니 그의 연세가 61세였습니다. 최 학삼장로는 박 지홍과 입석리 교회 때부터 함께 신앙생활 하여 온 연고로 비록 가난하지만 굳은 신앙심으로 교회를 지키는 모습에 감동하여 냉정리 교회를 돕기로 하였고 막내딸 최 영안을 박 지홍의 큰아들 박 영현에게 시집을 보내었습니다. 박 지홍의 아들 박 영현과 최 영안 부부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냉정교회를 평생토록 헌신 봉사하며 섬기었습니다.

 

장로회 사기(上 p.176) 에 “1909년 김제군 구봉리교회가 성립되다. 先是에 정창화 김기환 김영국 등이 믿고 전도하야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新建하니라”

 

금구현 수류면(금산면)구월리는 구암리라고도 하고 구봉리라고 불렀습니다. 구월리 앞에 얕으막한 산이 있는데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초승달처럼 펄쳐져 있다고 구월리라고 하고, 아홉 개 산에 아홉 개의 바위가 박혀 있다고 구암리 또는 구봉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구봉리에 테이트 선교사가 와서 교회를 세우니 구봉리 교회입니다.

 

조선 시대 조선 팔도를 지나가는 9대 간선도로가 있었는데 그중에 한양 숭례문에서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항에 이르는 천리 길(950리)에 이르는 대로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지난다 하여 삼남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주 명진 교수가 기록한 원평교회 100년사에 이 삼남대로를 다음과 같이 소개에 의하여 말씀드리면, 한양에서 출발하여 공주를 거쳐 삼례에 이르고 여기서 방향을 틀어 부산을 향한 대로가 영남대로이고, 삼남대로는 여기서 발길을 오른편으로 틀어 이서면 원동을 지나 앵성역과 남계리 초남을 지나 은교리를 지나서 모악산 오른 쪽 아래로 나있는 길을 따라 산 중턱을 거쳐 청도원에 다다르고, 여기서 3리를 더 가서 금산면 팟정이에 이르고 다시 십리를 남행하여 금산면 소재지인 원평리에 닿습니다. 원평에서 태인을 지나 정읍을 거쳐 입암면 처원 역에 이르고 노령산맥의 갈재를 넘어 장성에 닿고 영암을 지나 해남 이진항에 닿게 됩니다. 여기서 배를 타고 제주도 제주시 관덕정에 이르게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거리인 삼남 대로입니다. 이 삼남대로를 따라 남하하며 전도하던 테이트(최의덕)선교사가 팟정이에 와서 조 덕삼, 이 자익을 구원시켜 금산교회가 설립된 이야기는 앞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 창화, 김 기환, 김영국이 원평 장에서 쪽 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전도를 받고 구봉리에서 십여리 떨어진 팟정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팟정이 교회에서는 구봉리 교인들을 위해서 구봉리에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임실 심덕면 삼길리 교인들이 모악산을 넘어 50리길을 걸어 나오는 일로 삼길리에 교회를 세우기로 하였던 때입니다. 테이트 선교사와 교인들이 함께 돈을 내어 초가삼간을 구입하고 구봉리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자 다시 열네 간 초가집으로 등축을 하였습니다. 팟정이 교회에서 구봉리 교회를 분립할 때 한국인 책임자는 이 자익 장로 였습니다. 이 자익 장로는 테이트 선교사와 함께 구봉리에 와서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을 지도하곤 하였습니다.

 

1912년 최대진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본래 목포교회에 시무하는 윤 식명 목사를 초빙하였으나 목포교회의 위임목사가 됨으로 인해 포기를 하였습니다. 윤 식명목사는 본래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구원을 받아 유진벨 목사의 조사가 되어 정읍에서 사역하다가 1904년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09년 9월 최 중진, 김 필수, 김 창국과 함께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이 되어 목포교회로 부임하였던 것입니다. 최 대진 목사가 부임할 당시 70여 명 교인이 있었는데 부임 석 달 만에 150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최 대진목사는 최 중진목사와 최 광진 장로의 동생으로 1879년 10월 15일 정읍군 덕천면 상학리에서 최 석학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3형제는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가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서문밖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형 최 중진 목사는 김 필수, 윤 석명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정읍 부안 고부 고창지역의 교회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자유교회 사건이 일어나는 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정읍교회를 소개 할 때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형 최 광진은 목수로 서문밖 교회를 건축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ㄱ자 교회를 지어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후에 서문밖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최 대진 목사는 1899년에 교회를 다니다가 1901년 3월 해리슨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멕커첸 선교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동북부 지역을 순회선교 할 때 조사로 활동하였습니다.

 

1908년 1월 15일자 예수교신보에 최 대진 조사는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습니다.

“마(마로덕)목사와 같이 도 북동지방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금산 진산 연산 고산 익산으로 다닐 새, 4년 전으로 말하면 10군중에 주의 말씀을 듣고 알고자 하는 이가 없어 재미없이 다니 옵더니 그 믿지 아니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각각 주의 말씀 듣기는 스스로 원하오며 또 교회가 수 십 처이며 각 교회로 모이는 수효는 십 인으로 부터 팔구십 명씩 되옵고 예배당은 새로 짓는 곳도 많고 지금 시작하는 곳도 있으며 사서 꾸미는 곳도 있사오며 또 형제자매들께서 열심 연보하와 제직회를 열고 두 사람을 택정하여 전도 하옵더니 금년 가을에 한 사람을 더 택하였사오니 더욱 감사하오며 또 금년에 旱災가 있는 듯하더니 팔백리 지방을 관찰하는 목사와 같이 다니며 본 즉 백곡이 풍성하여 인민들이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을 보오니 하나님의 은혜 더욱 감사하오며 또 수년 전부터 금년 가을 까지 원입교인과 세례를 받는 이를 통합하여 불과 삼백 명 이옵더니 지난번 문답할 때 원입교인이 160명이요 세례 받는 이가 98인이오며 명년 정월부터 몇 교회에서 소학교를 설립키로 작정되었사오니 하나님의 은혜 더욱 감사하오며 각처 교회 형제는 이교회를 위해 기도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멕커첸 선교사의 조사로 열심히 선교활동 하던 최 대진이 1908년 전라대리회의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 5회로 졸업하고 구봉리 교회에 초대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봉리 교회는 초대 신자 정 창화, 김 기환, 김 영국과 팟종이교회에서 이사 온 강 평국이 최 대진 목사에 적극 협력하여 나날이 교회가 부흥되어 마침내 팟종이 교회의 왕 순칠과 함께 구봉리교회의 강 평국이 1913년 첫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 명준교수가 저술한 원평교회 100년사에서 강 평국 장로에 대해 소개한 바를 소개하려 합니다. 아버지 강 지업 어머니 이 성녀의 둘째 아들로 1875년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강 평국 장로의 첫째 아들은 강덕천으로 군산 백화양조를 창업한 강 정준 장로의 아버지입니다. 1900년 7월 15일 강평국은 금산 팟정이로 이사 와서 1904년 금산교회에 출석을 하여 1906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10년에 구봉리로 이사를 왔는데 그는 미곡상을 하는 당대의 큰 부자 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여 원평 삼일운동을 배후 지도를 하였으니 그의 영향을 받은 이종희가 삼일운동이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독립군 장군으로 활략을 합니다(1947년 귀국후 사망). 1977년 정부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87년 원평에 그의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그의 부인 김 신경은 전주 서문밖 교회 전도사인 박 연원의 딸로서 서울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으로 갑자기 아내가 죽자 강 평국은 군산으로 이사를 와서 개복동교회를 출석하다 1947년 소천 하였습니다. 강 정준 장로는 백화양조 공장 부지로 마련한 땅을 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신학교 부지로 경기도 용인군 양지면 29만평을 싯가의 절반도 안 되는 대금으로 선뜻 내어 놓았습니다. 강 정준 장로는 가훈으로 보라있는 인생을 살자. 교회 열심히 다니자.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 검소하게 살자 라고 정하였습니다. 강 정준 장로의 6남 5녀의 막내아들인 강 희성 장로가 호원대학교의 총장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대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강 평국 장로의 후손들이 돈독한 신앙으로 각처에서 교회를 섬기며 축복을 받으니 의인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최 대진 목사는 1914년 구봉리 교회를 사임하고 강진의 병영교회와 백양교회를 거쳐 제주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가 1919년 당시에는 남전교회 목사로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서울 묘동교회와 북간도교회를 거쳐 군산 동부교회에서 목회다가가 1942년 6월 3일 38년간의 교역자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구봉리 교회는 금산면의 변두리로 발전의 한계가 있어 기왕이면 면 소재지로 이전하는 것이 좋다하여 교회의 중심인물인 김준기 장로가 자신이 살고 있는 원평리로 옮길 것을 설득하므로 1930년 7월16일 신축 이전하여 원평 교회로 이름을 개칭하였습니다.

 

이제 신태인 정읍의 교회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를 소개하려 합니다. 김제 부안 완주 고부 정읍 고창에 이르는 평야를 김만경(金萬頃)평야라고 합니다. 동진강(東津江)과 만경강(萬頃江) 유역의 충적평야와 주변의 낮은 구릉성 침식평야로 이루어진 한국 최대의 곡창지대입니다. 이미 백제시대(비류왕 27년 서기 330년)에 축조된 저수지 둑인 벽골제(碧骨堤) 등이 있을 정도로 일찍이 벼농사의 중심지였으며, 사질양토가 많아 벼농사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로운 땅에 살고 있던 호남의 농민들은 결코 풍요롭지 못하고 늘 가난에 시달려 왔습니다. 지리학자인 최 영준 선생은 “국토와 민족 생활사”(1997 한길사)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평야의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좁았으며, 바닷가의 들은 장기(獐氣)가 많고 관개시설의 혜택을 고르게 받지 못하여 한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들판보다는 약간 내륙 쪽의 고라실(구릉지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지역)에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바닷가의 들(갯땅)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거주하였다.(중략) 기계화의 수준이 낮은 농경사회에서는 홍수의 피해가 크고 관개가 어려운 대하천보다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가 용이한 계거(溪居)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살피지 못한 조선 시대 관리들의 탐욕과 학정으로 지역 주민들의 삶은 항상 피폐한 상태 였습니다. 따라서 옛 부터 이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저항”이란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 저항이 내면화 되고 종교적으로 승화되어 미륵불교가 성행하고 동학과 증산교 보천교 그리고 원불교에 이르기 까지 신흥종교가 시작되고 활성화를 이루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특히 정읍은 분명 '혁명의 땅'입니다. 반외세 반봉건의 깃발을 높이든 혁명, 우리나라 근대사의 시작을 알린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었기 때문입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학정과 부패에 이기지 못한 이들은 항상 가슴 한켠에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제 아비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천냥의 돈을 거두었고 황무지에도 세를 매겼고 사람을 잡아다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가둔 다음에 돈을 받고서 풀어 주는 등 그 행패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게다가 1893년에는 이평면에 있는 저수지인 만석보를 다시 쌓는다고 돈을 걷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을 시켰습니다. 가을이 되어 만석보가 완성되고 농민들이 추수를 하자 처음에 걷지 않겠다던 '보세'를 칠백 섬이나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자 가장 피해가 심했던 이평면 부근의 주민들이 이듬해인 1894년에 이평면 조소리에서 훈장을 하던 전 봉준을 앞세워 진정서를 냈지만 돌아온 건 감옥신세뿐이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여 관청을 습격, 조 병갑을 쫓아내고 만석보를 부숴버렸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들불이 타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읍 사람들에게 갑오년의 역사는 “동학비도”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으며, 이런 역사의 울분을 마음 깊숙이 되새기어야 하는 비통한 아픔이 넓은 황금벌판에 질퍽하니 젖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정읍의 사람들은 늘 미륵을 기다려 왔고 새로운 개혁을 바라보았지만 그런 그들의 기대는 번번히 부서져 버리고 대신 그들에게 찾아 온 또 하나의 아픔은 일본의 침탈이였습니다.

 

일본에서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란 자가 나타나 아주 치밀한 농장 운영체계를 세워 악랄한 착취에 내세우니 농장의 총면적은 군산을 비롯한 익산, 김제, 부안, 정읍 등 5개 지역에 4000여㏊(1200여만 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고 합니다. 그가 부렸던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농 수만 해도 무려 3000여 세대 2만여 명이었고, 모두가 우리의 농민들이었습니다. 구마모토는 소유한 농장에서 소작인들에게 7:3이란 고리의 소작료 등을 착취하며 군산을 비롯한 호남평야의 쌀 수탈하여 매년 800만석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흉년이 오면 농민들은 소작료를 내고 나면 먹을 식량이 없어, 소작료를 줄여달라고 사정하면, 일본 지주들은 여지없이 주재소에 끌려가 얻어맞고, 주모자는 감옥에 가, 이듬해 소작지를 뺏기고, 따라서 살아가기 어려워, 男負女戴로 (남자는 등에 짐을지고 여자는 머리에 짐을 이고), 소작쟁이를 한 한 많은 우리민족 우리농민이 살지 못하여 남부여대하여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정처 없이 떠났습니다.

 

백제시대 정읍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로 “정읍사”라는 노래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달하 노파곰 도다샤 어리야 머리 곰 비취오시라 아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다리 져재 너러신고요 어긔야 즌듸를 드듸 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전주 장에 간 남편을 기다리는 노래입니다. 여기서 달이 상징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순박하고 지순한 사랑의 마음이 달에 의탁되어 나타난 이 노래는 '달'을 절대자 혹은 천지신명에 가까운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그 점은 바로 민속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속 신앙에서 ‘달’은 우리의 소원 성취를 기원하던 전통적인 수호신적 성격을 갖고 있는 달로, 이 노래에서는 아내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도와주는 절대자의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달입니다. 이러한 달이기에 남편의 귀가 길과 아내의 마중 길, 나아가 그들의 인생행로의 어둠을 물리치는 광명의 상징으로 보게 됩니다.

 

이제 정읍 사람들에게 달보다 더 환하게 해처럼 다가온, 그리고 언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인가 끝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낮 설은 서양 선교사로부터 듣게 되었으니, 그들 앞에 복음이 달려 온 것입니다.

 

그 낮 설은 외국 선교사는 바로 테이트 목사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전라북도 만경강 남쪽 거의 전 지역을 선교지로 순회 전도하면서 거의 9년간 35개 지역의 1,500명 이상의 입교인을 벋었으니 아마도 한국 초기 가장 큰 선교의 금자탑을 세웠다고 할 만 합니다. 테이트 선교사의 선교 활동을 그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정읍지역의 선교활동에 그를 도와 그 이상의 역할을 한 조사가 있었으니 바로 최중지이란 사람입니다. 후에 그는 제2회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 지역에 내려와 교회를 세우는데 결정적이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역사에 처음으로 선교사에 반발하여 선교사로부터 교회를 독립시켜 자유기독교를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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