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영성으로의 모성적 목회의 필요성에 대해서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정책세미나 주제발표
성경 마태복음 9장 35절 - 36절
1.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예레미야는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1:1)고 눈물을 흘리며 애가를 노래하였습니다. 참으로 당시의 참담함이란 말로다 다 말할 수 없고 그 비참함을 무엇이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약하였던 소수 민족인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백성으로 그렇게 자랑하고 엄청난 축복을 누렸는데 어찌하여 이제는 망하게 되었는가? 예레미야가 부끄럽고 가슴아픈 일은 "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들을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도다 하도다"(애2:15,16)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환상을 본 에스겔은 "끝이 왔도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겔7:6)고 이는 여호와가 내린 재앙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래서 바벨론을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여기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8,9) 유대인들은 다시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 가지 작업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천지만물에 오직 창조주 하나님 밖에 다른 신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선포합니다. 두 번째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것이고 세 번째는 율법을 확고히 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여러 율법의 자료들을 편집하고 확정지은 것이 오늘의 오경입니다. 이러한 바벨론 포로민들의 신앙 역사는 여호와 신앙을 확립하고 지속시켜나가는 놀라운 변혁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새롭고 보다 더 탁월한 방향으로 역사를 변혁시켜 나감으로 여호와 신앙을 한 단계 드높이고 있음을 성경역사에서나 기독교 역사에서 우리는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위기는 새로운 발전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생명의 흐름에서 생명의 매 순간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비약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생의 비약(Elan Vital)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에 새로운 생의 비약의 시기가 오게 하시는데 이 카이로스 때가 바로 역사의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2. 철학자 야스퍼스(Kahl Jaspers 1883-1969)가 차축시대(車軸時代)란 말은 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해서부터 3세가를 전후까지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시대에 중국에서는 노자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일어났으며, 인도에서는 서가모니와 그의 불제자들이 활약하였으며 그리스에서는 쏘크라테스 프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 밖의 수많은 쏘피스트들이 제 목소리들을 내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문서 예언자들이 활동을 하였던 시대입니다. 오늘 날 까지 이르는 이류 사상사의 맥락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로 이 차축시대로 부터 굴러 왔으며 아직도 그 엔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흥미로운 것은 이 차축시대로 부터 인간들은 사고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엄격한 구분이야 어렵습니다만, 굳이 비교한다면 차축시대 이전에 인간들은 일차원적 사고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일차원의 사고에서 2차원의 사고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일차원의 사고란 자연과 인간과 신을 한 세계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자연 속에 인간이 있고 또 그 안에 신도 함께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셋은 서로 나누어지면서 합해져 있고 구분되어 있으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차축시대는 일차원의 사고에 큰 전환기를 가져 왔습니다. 이차원 사고가 생겨난 것입니다. 엄청난 변혁입니다. 나누어지지 않던 것이 갈라지고 구분되지 않던 것이 나누어져 상극이 되었습니다. 감성이 이성으로부터 떨어져 그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성은 저 하늘 위로 올라가 거룩이 되고 세속은 땅에 떨어져 재 가운데 뒹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나 아들의 이가 시다하지 않게 되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렘31:29,30) 이스라엘 공동체 의식은 개인화로 바뀌어지고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었던 하나님의 옛 언약은 스스로의 믿는 자와 맺어지는 새 언약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이차원의 지배적 사고는 2500 여 년 동안 남 녀 노 소 빈 부 귀 천 유 무식 가릴 것 없이 온통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주장하여 왔습니다. 나와 너 흑과 백 아군과 적군 음양쌍전의 다툼이 온 세계 역사를 죄악사로 물들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였습니다. 2500 여 년 동안 줄기차게 인류사를 지배하던 이차원의 사고가 또다시 땅이 솟아오르는 것인지 아니 하늘이 깨져 쏟아져 내리는 것인지 엄청난 변혁이 바로 우리 시대 지난 20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철학 하는 이들은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라 하고 어떤 이들은 산업이후의 시대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기독교이후시대가 도래하였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는 전 세계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찬란한 기독교문화를 자랑해 오던 기독교 서구문명이 바야흐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듯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문턱 위에서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차원적 사고로 이어온 기독교 세계가 산사태에 묻혀 지는지 영화 해운대 쓰나미에 휩쓸려 가게 되는지, 여기 저기서 교회를 파괴하는 도끼소리들이 작은 산에서 또 큰 산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차원적 사고가 무너지니 기독교의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정말 기독교에 위기가 온 것입니까? 달리 말하면 기독교의 위기가 아니라 이차원 사고의 위기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새로운 차축시대가 열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2500년 전에는 수많은 사상가들 종교가들에 의해서 출발 되었다하면, 이제 제 2의 차축시대는 디지털문화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한 정조의 대 혁명을 통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적대적인 이념들이 서로 입 맞추는 다 차원 사고가 요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구별이 없어집니다. 보수냐 진보냐란 논의가 진부하게 됩니다. 이차원의 사고는 퇴물이 되고 다차원의 신진 젊은 사고가 세계 도처에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성아래 종노릇하던 감성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감성으로 무장된 새로운 인류가 21세기 역사 속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선녀가 나무꾼이 감추어 논 감성의 옷을 찾아 입고 승천하고 있습니다.
3. 성경 역사에서, 지금부터 4000년 전, 대략으로 말합니다, 그때를 아브라함 시대라 한다면 3500년 전을 모세 시대라 하고 3000년 전을 다윗 시대 즉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하는 시대이고, 2500년 전은 예레미야 시대요 바벨론 포로기 시대이고, 그리고 2000년 전은 예수님 시대 역사의 원년 시대이고, 기독교 탄생 시대이며, 1500년 전은 어거스틴 시대요 막 중세기가 시작 하던 때이고, 1000년 전은 카토릭 전성시대요 안셀름과 토마스마퀴나스 시대요 500년 전은 루터 칼빈 종교개혁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시대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대략 500년을 주기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오늘 우리들의 시대는 새로운 기독교 신앙의 도약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 말로 엘랑 비딸의 시대입니다. 요시야왕은 힐기야 제상장이 가져온 신명기 두루마리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종교 개혁 신명기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나라를 새롭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야킴 왕은 예레미야의 서신을 받아보고 화의 불 쏘시게로 삼아 버렸습니다. 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만일 지금 달려오는 새로운 변혁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여전히 이차원 사고 속에 묻혀 있다면 이차원 시대와 더불어 여호야킴 처지가 될 것입니다.
4.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그래서 중도를 표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수와도 함께 진보와도 함께 하자는 통합을 표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차원 사고아래에서 중도는 허울 좋은 말 뿐이요 통합은 자기 합리화 변명일 뿐입니다. 결국 현재까지 있어 온 철학적 명제나 종교적 언표들이 이차원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21세기 인류의 변화의 속도를 다라갈 수 없게 됩니다. 최근에 우울증 자폐증 각가지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자살자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들이 많아지고 상담사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역사는 이미 이차원을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 기술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오랑케가 지금은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나라가 되었습니다. 적대적인 기업들이 제휴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일어나고 잇는 모든 현상들은 다 차원 사고로만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다 차원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인간들의 사고는 아직 2차원 사고에서 벗어 나 있지 않음으로 인해 여기에 깊은 사고의 갭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에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혼돈을 일으킵니다. 인간의 뇌 속에 불협화음 현상이 일어납니다. 스넵시스들이 꼬여 틀어지고 과부화현상이 일어납니다. 과학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치가들은 이런 점에서 21세기를 이끌어 갈 사람들이 아니기에 오늘의 정치의 난맥상을 풀어 낼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당하게 됩니다. 결국 다 차원의 사고는 이 차원이 아닌 이차원의 도약을 통한 새로운 차원의 사고를 가지게 됩니다. 그 사고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21세기의 인류를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새로운 사고를 한 사람이 있으며, 그 새로운 사고 방법을 찾아내었는가? 아직 까지 그 답은 '아니요 없습니다'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리고 그 결론을 말하기 위해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기에 바로 답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21세기 다차원 사고의 해 답입니다.
5. 다차원적 사고(multidimentional thinking)은 물론 일차원을 뛰어 넘고 이차원을 넘어서는 사고여야 합니다. 좌우를 하나로 보는 것도 아니고 좌우를 따로 나누어 보는 것도 아니고 좌우를 한꺼번에 보는 것입니다. 위아래를 한꺼번에 보는 것입니다. 밖과 속을 한꺼번에 보는 것입니다. 상 하 좌 우 안 밖을 한 눈 아래 보는 것입니다. 개미가 지나갑니다. 개미는 자기가 보고 있는 그것만 볼 곳입니다. 아니 더듬는다고 할까요. 그러나 개미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개미 전체를 다 보고 있습니다. 그 개미가 구멍에서 나와 가고 있는 개미의 길을 환히 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미는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그 개미의 눈에는 사람이 너무나 커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출생 전부터 사는 동안 그리고 출생이후까지 한꺼번에 속속들이 뼈 속 깊이 머리카락 하나하나 까지 한꺼번에 보십니다. 하나님은 다차원의 눈으로 우리를 보고 게십니다. 다차원적 사고를 하기 위해서 먼전 소위 현상타파사고(breakongthrough thinking)가 필요 합니다. 일본 도꾜대 교수인 쇼조하비노이론으로서 변화를 파악하고 변화를 대응하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수록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차원사고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지금 21세기는 그 모든 측면에서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사고의 틀의 대 전환을 이루지 못한다면 21세기는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21세기의 사람들이 다차원 사고를 한다는 것이 이차원적 사고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신의 경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홀론적 사고(holonic thinking)라고 합니다. 이미 21세기 경영으로 홀론경영(holonic management)이 도입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영국의 작가 아더 케스트러(A. Koestler)가 생물 세포가 자주적으로 활동하며 동시 전체를 구성하여 활동한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물리학자 프리조프 카프라는 "모든 객체는 통합된 시스템이라는 뜻에서 전체로 간주 될 수 있으며 그 복잡성이 더 높은 수준의 전체에 대해서는 부분이 된다. 사실 절대적 의미에서는 부분과 전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전체이면서 부분이 兒조직체를 홀론이라 한다"고 하였다. 산을 보면 숲을 못 보고 숲을 보면 산을 못 보지만 사과 숲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 홀론입니다. 봉지와 봉지 안에 들어 있는 사과를 한꺼번에 보는 것이 홀론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한꺼번에 보고 좌익과 우익을 한꺼번에 보니 다 차원적 사고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습니다. 좌익도 우익도 없습니다. 새로운 사고입니다. 원효대사는 금강삼매경에서 "통합해서 보면 일관이요 열어서 말한다면 열 개의 문이다(合論一觀 開說十門)"라고 하였지만 일관과 열 문을 동시에 보는 홀론적 사고와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최재천교수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1998)를 번역하면서 "통섭(consillience)"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2005). 통섭은 지식의 대 통합을 의미합니다. 그는 21세기의 모든 학문에 거의 통합의 바람이 불고있다고 하면서 통섭의 노력은 모든 것을 꾀뚫는 보편적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홀론적 사고로 볼 때 통합해서 하나로가 아닌 개체와 전체를 같이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고 할 수 있는가? 호주의 몰링대학 교수인 프로스트(Michael Frost)교수는 오늘의 사람들이 바벨론포로 처럼 세속적 문화와 보수적 기독교에 포로 되어 있다고 말한 바처럼 여기에 인간적이 그 어떤 방법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떤 작업을 한다해도 이차원적 사고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그물 안에 이미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로부터 오는 방법 곧 영을 통한 사고로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사고를 하기에 영을 통하는 방법으로, 일, 이차원적 인간의 사고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70년 전 최태용 목사님이 로마서 8장에서 발견한 방법-영으로 사는 영적기독교적 사고 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태용 목사님도 이차원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기에 방법은 알았지만 그 방법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 복음교회적 사명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흔히 영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영성론자들은 마이오피아(myopia)로서 일차원으로의 회귀하거나 이차원적 사고로 영육을 논하므로 예수의 영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6.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기에 이미 그의 사고는 태생적으로 다차원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화육(incanation)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경영의 혁명적인 섭리의 역사였습니다(다차원적 사고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차원적 인간 역사에 계시는 예수님으로서 부단히 성령과의 교통하심을 통해 다차원적 사고를 유지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내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셨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 사십일 기도가 있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시니 사방에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며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단히 성령과 교통하시며 말씀을 전하시니 그 가르침이 당시 그 어느 율법사하고도 달랐고 그 행동하시는 일들이 여늬 사람과 전혀 다르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가시어 함께 식사를 나누기도 하시고 죙인의 집에도 들어가시어 식사를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 깃는 한 여인과 대화하시고 나무위로 올라간 세리 삭게오의 집에 가시기도 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음행 한 여인을 구하시고 가이사가 그려진 동전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말씀도 하십니다. 유대인의 적이라 하는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시고 스로보니게 여인을 모욕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노점상을 뒤엎으시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로비 하는 제자들에게 마땅히 크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차원적 사고로 예수님의 언행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도 율법사도 빌라도도 베드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차원적 사고하는 사람들이 다 차원의 사고를 하는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심도 다차원의 사고로 다시 해석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후 2000년이 지난 오늘날 다차원 사고의 시대에 다 차원 사고를 하시는 예수님이-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그리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 내시는 예수님의 치유와 돌보심의 사역이-예수님이 내게 와서 배우라 하심대로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다 차원의 사고를 배우지 않으면 21세기는 정말 기독교의 위기 교회의 위기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가 기독교 후기시대로 교회의 위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차원적 사고의 기도교의 위기일 뿐이요 오히려 유일한 구원의 종교로 기독교는 21세기 더욱 비약할 것입니다.
7. 21세기를 맞이하여 이구동성으로 기독교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앞서 말 한대로 이차원적 사고로 이어온 교회가 다 차원의 세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전혀 옷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성적 논리로 2000년을 이어온 교회가 갑자기 감성화 무대에서 춤을 추려 하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선교가 힘을 잃을 때 새로운 교회 운동이 언제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거나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지난 8월 6일자 국민일보의 미션라이프 기사에 세계적인 교회 미래학자 레너드 스위트 미국 두르대학교 석좌교수와 '교회가 없다'의 저자 프랭크 바이올라가 최근 '21세기 교회를 위한 예수 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선언에서 " 오늘날 교회가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질병은 '예수 결핍 장애(JDD-Jesus Deficit Disdoeder) "라고 지적한 뒤 "오직 예수만이 교회의 중심이고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결코 나눌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기독교가 아닌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자신들이 아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십자가를 가르쳐야한다." 며 "예수께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선언의 전문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레너드 스위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잇습니다. 왜냐하면 레너드 스위트교수는 현재 미국의 기독교 성직자 교수들 가운데 가장 존경 받는 인물 중 8번째에 해당되는 명성이 높으신 분입니다. 2007년에 우리나라에도 방문하여 미래의 교회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강연하여 많은 호응을 받아 한국교회의 이름 있는 교회와 목사님들도 상당히 그의 이론을 접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이론들이 미국의 새로운 교회운동을 하는 분들의 이론의 밑바탕을 이루거나 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미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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