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3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제 62회 총회 서면 주제강연
다시 영과 진리로
증경총회장 전 병호 목사
코로나19바이러스가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뒤, 2021년 9월 19일 현재 까지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가 229,283,642명이고, 4,705,384명이 사망하였으며, 완치자는 205,903,685 명이라고 합니다. 소위 서구의 선진국이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그리고 이태리 경우만 보면, 도합 71,003,451명 확진자에 1,252,788명(1,76%)이 사망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경우는 현재 확진환자 287,536명이 발병하고, 259,011명이 격리해제 되었고, 현재 953,532명이 검사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환으로 사망자가 2,409명(0.84%)이라고 합니다. 세계 각 국은 백신 주사를 통해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오늘 현재 70% 이상 백신 예방 접종 통해 앞으로 감염확산을 제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해 주고 있지만 오늘도 2,000명 가까이 환자가 발생하였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1,000년 인류역사에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한 역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독교는 그 창궐하고 있는 질병의 현장에 있어 환자들의 아픔을 나누고 위로와 치료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여 왔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기회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바이로스(이하 판데믹)의 대 유행의 현장에 의료진들의 수고와 희생적인 봉사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국민들은 감사와 격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교회의 헌신과 봉사의 소식은 희미한 소리뿐, 오히려 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인 냥 비난과 조롱의 중심에 교회들이 있다는 소식만 크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일부 목사님들은 종교의 자유, 예배의 자유를 주장하며 방역지침을 무시하고 대면 예배를 강행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막히고 퇴보하는 요즈음의 추세가 정부 당국의 과도한 예배제한정책에 있다고 주장 하면서 당국을 비난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판데믹의 위기와 공포의 현장에 과연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그 현장에서 교회의 위로의 손길과 사랑의 봉사가 얼마나 펼쳐지고 있는가? 비대면 예배를 무시한 교회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와 전도 훈련을 받으며 교회의 부흥성장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던 중 감염 된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왜 이리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가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슬픈 현실에 깊은 아픔을 가지게 됩니다.
판데믹 창궐로 제대로 교회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해 많은 교인들이 떨어져 나가 교인 수가 줄게 되었다고 불만과 원망을 목사님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데믹이 원인 중 하나가 된다고 하겠지만, 실상 한국 교회는 이미 그 이전부터 침체와 정체의 현상이 시작 되었었고, 코로나는 그 속도를 빨라지게 하는 한 원인을 제공하였을 뿐입니다. 한국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한국개신교 교인은 1995년 876만 명에서 2005년 861만 6000명으로 14만 4000명이 감소하였습니다. 장로교 주요교단 통계에 따르면, 2013년 1년간 15만 8,000명이 감소하였습니다. 특히 교회학교 학생 수 감소를 보면, 통합측 장로교인 경우 2013년 경우 1년 동안 유치부 4,000여명, 중고등부 1만 4,000여명이 줄었다는 것입니다.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50%가 넘는다고 합니다. 2019년 통계에 의하면 예장합동이 255만 6182명에서 2020년 238만 2804명으로 감소하였고, 통합예장은 2020년 기준 교인은 모두 239만 2919명으로 2019년 기준 250만 5985명보다 11만 4066명이 감소했습니다. 예장통합 교인 수는 지난 2015년 280만 명으로 300만 명 교인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었지만 이후 오히려 교인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어 지난 5년 동안 도합 40만 명 정도 감소해 하락 추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기장도 예외 없이 총 교인 수가 2020년 기준 21만 5617명으로 2019년 22만 3571명보다 7954명 감소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대한복음교회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교인 수 감소는 마치 박리 현상(剝離現狀)을 일으키며, 점점 침체의 속도를 높여 가고 있는 이유가 나변에 있는 것이 아닌가?
2020년 10월 6일자 기독타임즈에 이상화목사님의 “코로나19와 한국교회의 미래”의 글을 읽었습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데 필요한 변화를 소개하였습니다. 잠시 이 목사님의 대안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1) 교회 내적 과제로 온라인예배가 일상이 된 현 시대에 맞는 신학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코로나19가 계속 진행되면서 지금은 ‘스튜디오 예배당’의 개념까지 나온 상황이다. 결국 예배 신학 재정립의 현실적 요청은 재난의 신학적 정립과 함께 교회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교회와 국가의 관계, 재난 속에서의 선교론, 생태와 환경 등 신학적 제반 영역을 다시 논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첫째, 신학교 교육의 새로운 접근이다. 코로나 19 이후 목회 현장의 급격한 변화는 결국 신학교육의 새로운 접근과 교과과정의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다.
둘째, 비대면(Untact)과 초연결 일상 속에서 모바일 이용의 폭발적 증가는 기존 교회사역의 새로운 방향성 재고를 요청하고 있다. 공중위생과 안전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낯선 말이 코로나 19를 대표하는 말이 되면서 동시에 떠오른 말은 접촉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 ‘비대면(Untact)’이라는 용어다. 지금 비대면은 사회 전반(종교, 문화, 교육, 비즈니스, 직장생활, 여행, 의료 등)에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몰고 왔다.
‘언택트 즉 비대면’은 4차산업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술혁명으로 발전해온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초연결’의 상황을 동시에 견인했다. 비대면 속의 초연결은 하나의 트렌드로 이미 은행이나 음식점에 설치된 키오스크나 VR(가상현실) 쇼핑, 무인 택배함 ‘스마일박스’ 등을 통해서 실시되고 있었다. 결국 코로나 19가 가져온 불가피한 비대면 상황은 4차 산업으로 발전된 초연결과 모바일 산업에 기초한 유튜브라는 새로운 플랫폼의 급신장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이 새로운 문명 속에서 그 동안 교회가 진행해 왔던 사역의 미래 방향성을 전면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요청받고 있다.
셋째, 교회 운영과 사역의 우선순위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코로나 19 재난이 가져온 경기침체는 모든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그동안 지나치게 키운 하드웨어 운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넷째, 이단 및 사이비와 다름을 보여 주고 돌아오는 신앙적 난민들의 돌봄 모색이 필요하다. 상식과 균형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도덕성과 이웃사랑의 모범, 그리고 합리적이고도 따뜻한 기준이 공(公) 교회적으로 시급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다섯째, 공동체 사이 양극화 현상의 극복이 필요하다. 코로나 이후 생존 자체를 염려해야 하는 작은 공동체가 대다수인 한국교회의 형편을 고려할 때 적어도 각 교단이 물적 인적 자원들이 효과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역으로 대두되었다.
여섯째, 전 사회적 위기와 재난에 대비한 한국교회의 위기관리 매뉴얼과 매뉴얼 적용을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전 사회적 위기상황 속에서 세상은 교회라면 어떤 교회이든지 ‘한국교회’는 하나의 틀 걸이 속에서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한국교회’라는 전체성 속에 있는 교회라면 이 정도의 기준은 지켜야 한다는 매뉴얼을 제시할 만한 연합기관의 활동 시스템과 교계 언론의 동시적 움직임은 반드시 모색되어야 할 요소다.
2) 교회 외적 과제이다.
첫째, 교회는 정부 행정당국과 소통할 수 있는 소통 창구 마련이 필요하다. 전 사회가 당면한 위기상황 속에서 정부의 정책 방향과 교회가 움직여 가고자 하는 방향을 초기부터 소통하며 협력을 기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
둘째, 지역사회의 대응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코로나 19 재난은 한 사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 내 상호 협력을 통한 면역체계 형성이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와 개인 간 서로 협력해야 하며, 나아가 민과 관이 협력해야 한다
셋째, 사회적 공감 감수성이 풍부한 사랑을 실천하는 크리스천 시민을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인 교회는 존재 자체가 공공성을 띤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적 위기와 아픔에 그 어느 공동체보다도 공감대를 움직여야 한다. 재난과 위기가 닥쳤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되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나누어야 할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난의 현장에 필요한 의료봉사나 물질적 필요를 사랑으로 채우는 일에 적극 참여하거나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야만 한다.
넷째, 일반 언론과의 소통창구 마련이 필요하다. 교회와 관련한 사안이 언론에 보도될 때 한 언론에 최초로 보도되는 용어는 이후 모든 언론에 그대로 채용되어 보도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 관련 기사가 작성될 때 불필요한 오해와 시간 낭비를 막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인지하여 정확한 용어와 맥락설명을 가지고 언론과 소통할 수 있는 전문적인 창구는 시급하고도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다섯째, 국가권력의 확대로 개인의 삶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코로나19이후 사적인 공간은 더 이상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개개인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행정당국과 국가는 파악하고 있다. 전 사회적인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사회학자들은 국가 권력의 지나친 확대를 늘 염려한다.
교회는 성경과 신학, 그리고 독특한 신앙의 문법을 사용하는 특별한 영성 공동체다. 국가 역시 자신만의 문법과 해석학적 틀이 있다. 각 공동체가 자신의 문법만을 고집할 때 의사소통은 불가능하고 권력을 가진 국가는 자신의 언어로 이해되지 않는 교회의 여러 사역과 활동에 간섭과 제재를 가할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 예배의 신앙적,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채 집합 예배를 무모하게 강행하는 집단으로 매도된 것은 좋은 예이다. 생명의 안전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보다 공공의 이익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백번 양보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지만, 영적 공동체의 모든 움직임에 대해 몰이해한 국가권력은 말 그대로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국가권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빠르게 중지를 모아야 할 상황이다. >
이상의 이상화목사님의 분석과 이해에 동의를 먼저 하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한국교회가 침체되어 왔는가에 대한 깊은 숙고와 반성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너에 있다기 보다 먼저 내 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교회를 새롭게 변화와 혁신하여 나가는 세상과의 대립 또는 迎合의 상대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등 저는 이상화 목사님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이 언론을 통해서 당신의 해법을 제시한 것에 존경과 관심을 가지며 그러나 문제의 변죽을 울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편 이제 저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최태용 목사님의 복음교회 창립 정신에 맞추어서 말씀을 전한다는 제한이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제 62회 정기총회의 주제가 “다시 영과 진리로”입니다. 그리고 주제에 대한 말씀으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4의 말씀을 택하였습니다. 이 성경말씀에 대한 해석학적인 분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 비대면으로 書面 주제 강연을 하는 짧은 시간에서는 감당할 수 없고, 다음 기회에 충분히 말씀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복음논단 창간호, 박찬웅;<최태용의 ‘영과 진리’의 바울 해석>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제에 따라 다만 두 가지 점, 하나는 ‘다시 영과 진리로’라는 주제로 보아 오늘날 우리는 영과 진리를 상실하였거나 훼손하였기 때문에, ‘다시 영과 진리로 돌아가자’, ‘다시 영과 진리를 회복하자’라는 의미로 들려집니다. 일반적으로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예수에게로 돌아가자” 또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말합니다만, 우리 총회에서 “다시 영과 진리로”라고 정한 것은 여기에 특별히 이 시대에 선포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씀이고, 그 의미는 창립자 최태용 목사님께서 펴내신 잡지인 “영과 진리”에서 강조한 그 “영과 진리” 곧 최 목사님의 “영적기독교론”에서 설파하신 “영과 진리”의 영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을 다시 찾아 보자라는 의미로 이해하게 됩니다.
최목사님이 말씀하고 있는 “영과 진리”는 상식적인 이해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간단히 설명 드리면 “영”이란 “영원히 변치 않는 삼위일체의 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리”란 상황에 따라 해석이 가능한 영의 言表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 말씀에 대한 주석적 이해가 시대와 나라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 고정적으로 정해 논 교리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면 古木化 되고 死殼化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항상 새로워지는 것이고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Protestant로서 改新敎는 언제나 Prtest한 교회이어야 하며, 改新이 요구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교회는 세속화되고 물량적인 탐욕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영적기독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영적기독교로 변화되고 변혁되지 않는 교회는 이미 율법화 된 교회로 개신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태용 목사님은 그러한 영과 진리의 모범적인 영적기독교 교회의 사례로서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1935년에 창립하였던 것입니다.
복음교회는 항상 영으로 영에 의해서 변화되고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뜻을 펼치는, 이 시대를 밝히어 앞장서 나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 교단 창립의 의의 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의 복음교회는 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립자께서 그처럼 베어버리려 하였던 고목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복음인들의 각성으로 “다시 영과 진리로”라는 총회 주제를 정하였다면 이는 매우 놀랍고 시의 적절한 주제라고 사료됩니다.
로마서 8:13,14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욕구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 안에 영이 거하시고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영이요, 말하는 것이 영이요 모든 행위가 영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말은 옳으나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지만 기독교 역사상 이 말씀을 실천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될 것입니까? 이 차원적 세계관에서는 도무지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영은 이차원 세계관으로 충분히 이해 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자면, 문제는 어떻게 영으로 살 수 있느냐? 그것은 사람들이 에덴에서 추방된 이래로 육으로만 살아 왔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영으로 사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으로 사는 방법을 몸으로 보여 주시었고, 바울 사도께서 그 길을 알려 주시었습니다. 이 길을 발견한 최태용 목사님은 육을 죽이고(우 사릌스) 영으로 사는(엔 프뉴마) 영적기독교를 외치신 것입니다. 기왕에도 수많은 목사님들이 육을 죽이자고 외치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 이래 교회가 영으로 사는 기독교로 있어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예수님을 믿고 바울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지만 실은 플라톤의 사상으로 말씀을 윤색하고, 아리스토틀의 철학으로 포장한 기독교를 말해왔습니다. 前 近 現代 철학에 의존해온 신학입니다. 고대로부터 이어 온 이원론에 의지하여 온 그들의 사상으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영원한 말씀을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석가의 禪이나 공자의 敎, 노장의 道로 미루어 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어찌 샤마니즘으로 각색된 이단들이 판을 벌리지 않겠습니까? 왜 그럴까요? 교회가 육을 죽이지 못하였고 육을 죽이는 방법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최태용 목사님이 주창하신 영적기독교, 즉 육을 죽이고 영으로 사는 길을 분명히 예수님이 보여 주셨는데 바울 사도가 그 길을 알려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길을 지난 2000년 동안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언제나 육에 머물러 죄를 만지작거리고 타락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육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이성을 말해왔습니다. 모든 윤리, 도덕, 종교적 율법과 교리 그리고 세상의 법 등이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수 천 년 인간의 삶을 통제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21세기 4차산업혁명과 별안간 판데믹 현상이 전 지구를 뒤덮으면서 이성은 어디론가 도망가고 사람들의 정신적 일탈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성이 너울을 쓰고 춤추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일찍이 시인 이상이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라고 시를 썼듯이, 사람들이 21세기의 대로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저들을 붙들 것인가? 교회가 이성적인 율법주의로 이들을 붙잡으려 하지만 교회의 자리는 점점 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성적인 프로그램과 비상한 진행으로 이들을 붙잡으려 하지만, 아니오, TV에 소개되고 있는, 세계적인 유행을 가져오는 K팝 아이돌, 현란한 밴드의 연주와 다채로운 예능이 더 사람들에게 흥미롭습니다.
지금 신학대학교에서의 컬리큐럼이 50년 전과 무엇이 다릅니까? 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교수직에 계신 분들의 강의가 21세기 교회와 목회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가? 모든 과목을 다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목 ‘육을 죽이는 방법’과 ‘영으로 사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강의를 맡을 교수님이 있을까 몰라요.
그러면 이쯤해서 누가 질문을 하십니다. “전목사, 그러면 전목사는 무슨 비상한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요?” 제가 대답한다면 “저도 모르죠, 그리고 저는 이미 은퇴한 목사이니 알바아니죠” 은퇴란 참 좋은 제도입니다. 책임회피를 위해 이보다 좋은 제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 까지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대답은 “기도 할 뿐입니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답하실 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4차산업혁명시대에 교회가 나아갈 길 그리고 더욱 인류를 파괴적인 세기말현상에서 구원할 방법을 알려 주십사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있습니까? 물론 기도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복음교회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함께 단합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상한 시대입니다. 판데믹시대라 비상한 시대이기 때문만 아니라, 이 나라 기독교와 교회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인도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꺼져 갈 것인가?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대로 꺼지라고 말씀하신다면 교회는 사라져 갈 것입니다. 지금 서구의 교회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영국의 주일 예배 교인수가 1%도 안 된다고 합니다, 어떤 유명목사님은 매일 8시간을 기도한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하루에 5시간을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시간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성경은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아디알레잎토스 프로슈ㅎ케스데)고 말씀하십니다. 정한 시간에 기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의 모든 시간이 기도하는 하루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정한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가, 운전을 하는 중에, 밭에서 고추를 따다가 불연 듯 하나님의 응답이 빛의 속도같이 임하실 때가 있습니다. 빛은 입자냐? 파동이냐?로 오랫동안 싸우다가 결론 맺기를 둘 다 맞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는 신비적 체험을 기도의 현장 속에서 가지게 됩니다. 이차원의 세계에서 기적을 체험한다면 다 신비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4차원혁명시대에 우리가 신비라고 말하는 그것을 경험할 뿐 아니라 실현시킨 일들이 특히 양자론적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이미 2,000년 전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 사건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지 못한 이상한 마술적인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실제적 사건 이였던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지금도 4차산업혁명의 시대의 과학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이차원적 사고를 크게 높게 깊게 추월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수도사들이 요구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인공지능, 인공감성의 로봇, 메타버스(metaverse)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로 세계가 시공간의 간격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초복잡계(supra-complexity system)로의 이행으로 융합문명진입(the coming of convergence civilization)을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매일 같이 기적을 현실화 시키는 소리들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새로운 진리의 창발(emerging)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4차 5차 7차 사업혁명이 있게 되어도 이를 이루시는 분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으로 인도하시는 삼위일체 영이십니다. 영이시야 말로 우주 다차원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다만 육에 경도된 기독교로는 인류의 새 진리의 걸림돌이 될 뿐이요, 영의 기독교만이 이 새로운 진리를 일으키고 이끌어가고 돌보아야할 책임이 이미 창조 시대부터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시대 새 진리 새 질서로 확대 비약시키는 백신은 삼위일체 영이시기 때문에 영안에서, 영으로 말미암아, 영에 의해서 영적 기독교만이 상보(concept of complementarity)의 개념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진리를 創出하며 시대를 이끌어 앞장 서 나가게 됩니다. 4차산업혁명시대는 영적기독교가 성공적으로 이끌어가 진리의 세상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 (* 보다 세밀하고 다양한 4차산업혁명에 관한 명확한 이해와 복음교회의 역할에 대한 지식이 요구됩니다, 또한 인구문제, 기후문제, 통일문제와 관련한 영적기독교에 대해서는 차후에 의견을 나누기 바랍니다.)
영적기독교론에서 육이 죽는 다는 말은 지금까지의 이원론적 사고와 삶의 자리에서 별세(눅9:31 엑소돈. 죽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어떤 思考나 사상, 철학, 개념, 주장들을 배설물(스쿠발론. 쓰레기)처럼 여기고 새로운 진리를 습득하기위한 대 장정이 곧 懸命的으로 영과 진리를 찾아 나가는 순례의 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하신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목화 되고 세속화된 교회로부터 떠나 사랑과 정의와 공의(렘 9:24)가 약동하는 영적기독교를 향하여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새 진리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오고 있는 시대에 아직도 구습에 얽매인 옛 사람이 죽지 아니하고는 과거의 무덤에서 부활할 수 없게 됩니다. 바야흐로 제4차혁명시대는 영과 진리의 시대가 열리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통전적인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세기말적인 부패의 온상 예루살렘을 보고 예레미야는 통곡을 하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말씀하시며 통곡하시었습니다. 변화를 모르면 부패되고 혁신하지 않으면 망하기 마련입니다. 바벨탑이 허물어졌고 예루살렘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데 영을 보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은가? 이러면 사랑하는 우리 후손들 시대에 기독교 모르는 시대가 올 터인데 어찌 밤낮으로 기도하지 않을 것인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울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으니 새로워지려는 발버둥치는 일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 복음교회는 말로 흘리지 말고 영적기독교를 이루기 위한 懸命적인 몸부림치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우리는 “다시 영과 진리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총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옛사람의 옷을 벗고 새 사람의 옷을 입지 아니하고는, 육이 죽고 영으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우리 교단은 물론이요 한국교회의 미래는 절망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눈물로 내 교회와 한국교회 그리고 이 나라와 세계를 바라보며 8시간만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육을 죽이고 영으로 사는 복음교회로 영과 진리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