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킨의 딸 메리의 회상
19.08.13 (화) 17:21
아래의 글은 어제 최집사님을 통해 미국 장로교 자료보관소에서 보내온 전킨선교사의 딸 메리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쓴 글을 번역하였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또 다른 기억이 있고, 새로운 자료도 듣게 됩니다.
윌리엄 메클레이 전킨 목사에 대하여
메리 L 전킨
1892 년 내쉬빌에서 해외 선교 사업 자원 봉사자 회의가 열렸는데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 (University Theological Seminary)에 다니는 W.D. 레이놀즈 와 카메론 존스턴 (Kerman Johnston)이 참석하였다. 전킨 (Wm.M Junkin)은 이 두 학생의 동급생 친구로 이들이 듣고 돌아와 들려준 언더우드 박사의 한국에 대한 호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Washington&Lee 대학의 학생이었던 Junkin의 영혼에는 이미 선교의 정신이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Forman과 Wilder가 학생 자원 봉사 운동(SVM)을 위해 여러 학교들을 방문하였을 때 선교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감동에 빠져 이었었던 터였다.
당시 우리의 남부 장로교 교회는 이 새로운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정당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타자기 회사 책임자 인 언더우드 박사의 형제가 기업에 2 천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까지 그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젊은 자원 봉사자들의 열정을 약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잔킨은 1865 년 12 월 15 일 버지니아 크리스천 스 버그에서 조지 준킨 판사와 베티 몬테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892 년 11 월 4 일 서울에 도착한 7 명의 선교사들의 선교개척단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동학혁명과 중일 전쟁으로 도착하자마자 3 년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시간은 헛되게 보내지는 않았다.
장로교 협의회는 한국에서 일하는 모든 장로교 단체로 구성되었으며, 전킨은 94 년에 서기 및 95 년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위원회는 한반도의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 선교부를 설치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들은 그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전킨은 소서문(Little West Gate) 밖에 있는 개인 주택을 개인 자금으로 구입하고 가족과 함께 이사하였고 드루 의사와 함께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의료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드루 의사와 전킨은 한 작은 범선으로 가족을 옮겨와 Kunsan Station을 개설하였다, 그 집은 밀물썰물이 오고가는 인근 지역에 있는 작은 초가집으로 그곳에서 4 년간 살았다. 전킨은 드루의사와 함께 군산의 섬들 시골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설교를 하였다.
1904 년에 힘에 부쳐 건강에 위기가 왔다. 소년 학교를 책임지고 학교 건물을 짓고 선교 훈련 수업을 가르치고, 평양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특히 순회 전도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임무를 전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전주 교회와 그의 선교활동을 반경 6 마일로 제한하였다. 그가 그의 선교지를 옮기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선교지역의 사람들이 군산으로 몰려와 그가 떠나는 것에 항의를 항의들을 하였다. 그들은 사랑하는 목사님을 지키기 위해 서울과 미국으로 전보를 보내려 하였다.
전주에서는 많은 어려움과 낙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로 우리의 가장 큰 교회 건물을 세웠고 인근 지역 열두 곳에서 예배모임 장소를 세웠다. 레이놀즈 박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는 부지런한 성서 연구, 충실한 준비, 주민들이 알기쉽게 설교를 함으로 그를 인기있는 설교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길에서, 여관에서, 증기선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수천 명 사람들에게 '계절과 계절에 관계없이'라는 말대로 말씀을 전했다.” 15 년 이상의 선교사 생활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때는 많은 위험에 처해 있었고 또 다른 때는 즐거운 일도 있었다. 여러 번 그는 해안가에서 거의 배가 난파되는 것을 경험하였고, 폭우로 물이 넘치는 개울을 건너면서 미끌어 떨어졌지만 한 한국인이 그의 익사하는 것을 막았다. 그는 1895 년 간호사 한사람과 콜레라 걸린 사람들의 집들을 방문을 하였다. 장마철 어느 안식일 아침에 그는 집에서 16 마일 떨어진 곳에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갔다. 도중에 그는 어린 소년을 태웠는데, 그는 종종 어머니 등 뒤에 업혀 있어서 짐을 덜어주기 위해 그와 함께 탔었던 것이다. 논 사이의 길은 좁고 미끄러웠으며, 그런데 당나귀와 짐이 진흙바닥인 논바닥에 빠져버리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다 치지 않았지만, 전킨의 하얀 여름옷과 모자는 설교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더럽혀졌고, 어린 소년은 마음이 심히 상하게 되고 당나귀에 대한 그의 믿음이 너무 흔들려 전목사와 함께 다시는 타지 않게다고 하였다. 전킨은 예배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가서 예배를 인도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들었다. 그는 전자 코스를 선택했고, 한 마음씨 좋은 여인이 그녀의 남편 흰 두루마기와 헐렁한 한복바지를 제공했지만 양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신발이나 양말 없이 일어서서 말씀을 전하였다. 그가 설교하는 동안 마음씨 좋은 부인은 근처 냇가에서 전킨의 옷을 빨고 있었다. 그녀가 이것을 남편이나 목사에게 좋은 일을 하였는지 여부는 여러분이 판단 할 것이다.
전킨은 1907 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장티푸스 폐렴으로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고통은 처음부터 매우 컸으며, 세 명의 의사와 숙련 된 간호사가 질병의 진행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 떠나기 전에 그가 하였던 일들에 대해서 침착하게 지시 내리고, 한국인들에게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는 주위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것이 좋은 것이요”라고 말한 다음에 “나는-지금-갑니다.-너무-행복합니다”고 말하였다. 그는 1908 년 1 월 2 일에 안식에 들어갔다.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었으며, 군산 선교부에서 3 명의 어린 아들과 랭킨 박사의 무덤 인근에 안장하였다.
우리 교회의 두 장로가 전킨을 기억하는 기념비를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간단하지만 그의 무덤 위에 비가 놓여 졌음을 알게게 되어, 그의 이름이 새겨진 교회 종을 보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죽음 이후 몇 년 동안, 주일날 전킨의 이름으로 정겨운 종소리가 사람들에게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땅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를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