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역자세미나강연원고
11.09.28 (수)
제주기독교와 제주 문화선교에 관하여
전병호 목사(군산나운복음교회)
제주시에서 목회와 선교회고
1988년 여름 당시 나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사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제주복음교회 목사님이신 강경옥 목사님이 사무실을 찾아주셨습니다. 강경옥 목사님은 제주도에서 2대 3대 국회의원과 초대 참의원을 지내셨던 제주도의 큰 인물로 알려진 분입니다. 또 예수교장로회 전국장로회 회장도 역임하셨던 분입니다. 5.16이후 크게 깨달음 바 계시어 늦게 신학을 공부하시고 기독교대한복음교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아 제주복음교회를 개척 중에 있었습니다. 강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 제주도 복음화를 위해 꼭 제주도에 신학대학이 필요한데 제주도에 와서 신학대학을 세우는데 앞장서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저로서 처음 매우 망설였습니다. 특히 수학여행 때 제주도에 갔다가 큰 풍랑을 만나 곤욕을 치룬적이 있어 선 뜻 하겠다고 대답을 못하고 기도하겠다는 정도로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경옥 목사님을 아시는 분은 기억하시겠습니다만 참으로 집요하신 분입니다. 그 후 여러 차례 권면 편지를 보내 주시고 심지어 일부로 서울에 오시어 저와 단독 면담하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결국 제주도에 가기로 작정을 하고 1989년 1월에 제주복음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당시 제주복음교회는 강경옥 목사님과 만순녀 사모님의 전도를 받은 제주시내 구두닦이 청년들이 열 대 여섯 명 과 교인 30여명이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대학을 세우는 일은 당시 여러 정치적 사회적 정황 상 거의 불가능한 상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제주복음교회 내 2층 건물을 지어 제주신학교를 시작하게되었습니다. 30여명 신학생이 입학을 하였고 제주도내 여러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주도에 오면서 저 나름대로 3가지 선교적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제주도 선교는 제주인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제주의 문화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이에 대한 선교적 대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제주도 내의 모든 교회를 교단을 초월하여 오직 제주선교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무모하고 택도 없는 그런 꿈을 가지고 제주의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부교회 홍성봉복사님을 만나 첫 인사를 드렸는데 대뜸 하시는 말씀이 언제 떠나겠습니까?라고 물으시었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육지에서 건너와 잠시 머물다가 훌쩍 떠나는 일이 너무 많았던 터이지만 이제 막 제주에 온 저에게 홍 목사님의 질문은 저를 당황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과연 내가 언제까지 제주선교에 매진할 수 있을까? 혹 바람처럼 왔다가 겨우 갈대 잎이나 흔들어 놓고 떠나지는 않을까 늘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먼저 제주신학교를 세워 제주선교를 위한 지도자 양성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주의 문화 즉 제주의 말과 민속 신화를 알지 못하는 제주선교는 있을 수 없다 생각하여 진성기 박사님을 교수로 모시고 신학교에 와서 제주 민속을 강의하시게 되었습니다. 제주 복음교회 내에 진성기 박사님과 오성춘 선생님 강용택 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 모시고 제주 기독교 향토문화연구소를 차렸습니다. 교회 내에 진성기 박사님이 제공해 주신 제주 문물들을 진열을 하여 제주기독교민속박물관을 차렸습니다. 고등학생과 청년들을 모아 제주 방언회를 만들어 방언으로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방언으로만 쓴 정주먹이란 회지도 만들었습니다. 당시 제주방언을 무형문화제로 등록을 하려하였으나 방언은 사투리라 없어져야 할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당국자의 말을 듣고 제주 방언 보존과 제주 선교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방언으로 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진성기 박사님의 협조를 받아 우선 마가복음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오리 전택부 장로님이 제주도에 오셨을 때 말씀 드리니 매우 귀중한 일이라 하시면서 보이스사 권명달 목사님을 소개 해 주시어 1981년 제주방언성경 마가복음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66권 성경 전체를 번역하는 비전을 세웠습니다. 마가복음 다음에 구약 시편을 번역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가 제주를 떠남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YMCA강단을 빌려 제주문화에 대한 청년강좌를 매주 토요일마다 개최를 하였습니다. 당시 아직은 제주 문화 특히 신화와 무속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때라 많은 청년들이 이 강좌에 와서 들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인 김한구 박사님이 저를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김 박사님은 여러 차례 제 강좌에 참석하시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제안하기를 제주대학교에 와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문화인류학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학문 이였습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 그리고 대학원 시절에 고 김정준 박사님 밑에서 부족하나마 문화인류학에 관한 수업을 받은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문화인류학 그리고 여러 사회학 계통의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전에 강경옥 목사님이 실업전문대학 학장으로 계시어 그 대학에 가서 강의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학문적으로 제주 문화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접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한편 각 마을에 있는 민속 보유자들을 위시한 제주 문화 관계자들을 모아 제주민속연합회를 거 도적으로 조직을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와서 퍽 아쉽게 생각한 것은 당시 계속 제주에 머물지 못하고 왜 제주를 떠나게 되었는가? 제주를 떠남으로 제주에 대한 저의 관심이 한꺼번에 사라졌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훌륭한 선생님들이 제주의 문화 방언 신화 무속 등을 연구하고 있음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제주교계가 하나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아직은 30대의 젊은 목사인 저를 제주 기독교연합회 총무로 뽑아 주셔서 연합운동에도 제나름대로 열심을 하였습니다. 특히 성탄절 제주시내 모든 교회가 가장행렬을 꾸며 제주 시내를 한바퀴 도는 행사를 하였고 제주 문화회관에서 성탄절 축하 음악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제주의 선교를 위해선 제주 나름대로의 선교적 특색이 있어야 하는데 교단의 지도 하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니 제주도에 있는 모든 교회는 교단을 떠나 제주도 한 교단을 만들어 보자는 것 이였습니다. 몇 몇 목사님의 호응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벽에 부딪힌 것은 아무래도 큰 교단인 통합 측 장로교가 협조를 하여야 하는데 당시 장로교회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한 증경 노회장님의 강력한 반대 그러닌까 하나가 되려면 모두 통합측 우산 밑으로 들어오면 된다는 주장 하에 유보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제주 문화 선교를 위해선 불교나 무속종교인들과도 교제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불교의 주지 스님들과 무속인들 특히 당시 무형 문화제 71호인 안사인씨 와도 교분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와이즈맨 크럽이 없었습니다. 제가 제주로 떠나는 인사를 드리러 기독교서회 총무이신 조선출 목사님을 찾아뵈니까 저에게 말씀하기를 제주에 가면 꼭 와이즈맨 크럽을 조직하라는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1981년 제주YMCA 총무이신 강도아 총무님을 만나 의논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조직하자고 주장하여 마침내 제주 와이즈맨을 조직하게 되어 세계 와이즈맨 챠터 1000번째로 조직하게 되니 지금 제주 외이즈맨이 크게 발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당시 저는 기독교인들만 아니라 타 종교인도 함께 참여케 하자 하여 제주 불교신도회 회장을 와이즈맨에 가입케 한 바 있습니다.
제가 그때 세 가지를 내가 할 테니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송당에 무속박물관을 세우는 일이었고, 이 말을 하니 여러 목사님들이 돌아이라고 말렸습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나라 끝 섬인 마라도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고 지금은 교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세 번째는 제주대학교에 제주민속학과를 두어 제주문화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저의 꿈들이 저의 바람이 제가 1984년 10월 제주를 떠남으로 다 사라졌으니 사실 여기에 설 자격도 없는 자임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제주 기독교의 현실과 문화 선교적 과제
인터넷에 올라온 1908년 이기풍목사님의 선교활동을 장황하지만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 제주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가 가진 것이라곤 지칠대로 지친 몸뿐이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미신을 숭배하는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이기풍이 전하는 복음이 오히려 미신이었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말이라도 붙여 볼라치면 도망가기 일쑤고, 어쩌다 친절한 사람을 만나서 예수 이름을 꺼내기라도 하면 크게 겁을 먹고 "설러부러 설러부러 야개기 끊어지겐!" 하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내 목이 달아난다!" 라는 뜻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정책으로 '예수' 라는 단어가 금기 시 되었는데 그것이 멀리 있는 제주도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당연히 잠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산기슭에서, 때로는 바닷가에서, 때로는 마굿간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이래 뵈도 제대로 공부를 마쳤고, 평양에 있을 때는 먹고사는데 불편함이 없었는데, 제주도에서 삶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신이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삶에 회의가 느껴지고, 왜 자신이 제주도에 오겠다고 했는지 후회되었습니다.
'꼭 이곳에서 복음을 전할 필요는 없잖아. 평양으로 돌아가자. 그곳에서 열심히 전하면 되지 뭐.'
너무 힘들어 자기합리화를 시킨 이기풍은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곧 제주도를 떠날 것이라는 내용을 소상히 적어 평양에 있는 모펫 선교사에게 알렸습니다. 삶이 찌들대로 찌들고, 사람 대접도 못 받는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 평양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기풍에게 모펫의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 이기풍 목사,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제주도 선교가 그렇게 어렵다니 참으로 안타까 운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 혹시 기억하고 있소? 당신이 예전에 내가 전도하고 있을 때 던진 돌로 인한 상처가 아직도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고 있소. 이것을 생각하고 이 상처가 없어질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이 편지를 받은 이기풍은 그 자리에 엎드려 대성통곡했습니다. 제주도를 떠날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바로 이전에 저질렀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향해 욕하고 저주한 그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뜨거운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의 괴수' 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영광스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비록 몸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기쁨이 넘쳤고, 마음 깊은 곳으로 감사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드디어 제대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며칠 째 음식을 하나 먹지 못하고, 간신히 비바람만 피해 잠을 자던 이기풍은 그만 해변 가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한 해녀가 다 죽어 가는 이기풍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자리에 눕혔습니다. 그녀는 없는 살림이었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고자 이것 저것 먹이고, 정성스레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기풍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필사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기풍은 처음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해녀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이제 그가 의지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어려움을 통해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모두 당연하게 생각하는 조건들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방법을 이기풍은 점차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00년 전 이기풍 목사님의 전도의 어려움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선교적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제주도에서 목회 하는 목사님들이 힘들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여전히 제주도의 선교는 마치 전혀 낮 설은 외국 선교도 이보다 힘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2006년 9월 15일 제주도의 기독교의 통계를 보닌까 북제주군에 교회가 82개 교회요 교인이 5931명으로 전체인구의 7.4%이고 남제주군이 51개 교회에 3867면 6.3%요,, 서귀포시가 60개 교회에 5778명으로 7.4%이고 제주시가 147개 교회 2만 2609명 7.3%로서 제주도 전체 인구 53만 명의 7,2% 340교회 38183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통계는 1999년에 비해 교회 수는 67개가 늘었는데 교인 수는 1,2% 감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치에 이단교회 수도 들어갔기 때문에 실제로는 5-6%일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제주도의 자연 부락 215개 가운데 개신 교회가 없는 곳이 103개 마을이며 그 중에는 주민 1.000명 이상 되는 마을이 30여 개나 있습니다. 교회의 도시화현상이 제주지역 도시화의 자연스런 결과로는 볼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많은 경우 농어촌 교회의 지도자들이 마을 공동체에서 소외 받고 있으며 교회가 마을 공동체로부터 거부 받고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참고로 내가 살고 있는 군산은 27만 명에 교회가 600개 그리고 기독교인이 10만 명이 넘어 32%로서 전국에서 인구 비례 가장 많은 기독교인 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기독교인구가 가장 많은 자치단체는 옹진군으로 35.5%이고 가장 작은 곳은 경상남도 합천 4.4%입니다.
제주기독신문(발행인 김정서 목사, 제주영락교회)은 제주 도내 30여명의 목회자와 장로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제주 복음화율이 낮은 이유", "제주 복음화율을 높이는 방법" 등 제주지역만의 독특한 선교적 과제와 대안을 묻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제주기독신문은 2007년 11월 24일자에 목회자들의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1면 머릿기사에 "기독교 적대감 청산 못하면 복음화 한계", "제사·주초문제 적정선 신학적 수용 필요"라는 재목을 뽑았습니다. 제주 도민들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도 물론이거니와 개신교에서 금기시하고 있는 제사문제와 술과 담배문제를 적정선에서 수용하자고 제안했다는 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제주 중부교회 이동준목사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닌까
< 제주 기독교가 토착화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제주는 제주 나름대로 풍습이 있어요. 샤머니즘문화가 강하고요. 정말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으로 해야하는데 거기서 실패한 거죠. 예를 들어 제사문제나 주초문제 등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그것을 수용했어요. 제주 개신교도 이 문제를 적정한 선에서 신학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인이죠>
1980년대 초에 제가 느꼈던 어려움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 선교에 대하여 여전히 제주교회와 많은 목사님들이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에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100년 전 이기풍 목사님, 30년 전 제주교회, 그리고 오늘날 현재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똑 같고 그 상황도 똑 같다고 하겠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문제는 하나이고 단순합니다. 과연 교회가 제주를 아느냐? 이 것입니다. 만일 안다면 거기에 대한 새로운 선교적 방안을 가지고 있는냐 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교회가 제주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교회가 제주에서 퇴출 될 외래 종교로밖에 인식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지적해 봅니다.
그것은 사실 제주도에서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나라 모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요 전국적으로 기독교 교인 수가 감소되고 있는 차제에 새롭게 기독교 선교의 페러다임을 바꿔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의 종교하면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무속종교를 말하면서 기독교를 말할 때는 외래종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외래 종교인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 문화 충격을 주었는데 호(好) 기능보다는 역(逆) 기능이 더 많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무엇이 역기능입니까? 기독교가 들어와 한국의 전통 문화와 생활 패턴을 배격하고 말살시켜 왔다는 것입니다. 한편 기독교의 한국적 문화를 창달하는데 실패하였으며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문화와는 적대시하면서 그렇다고 대안 문화도 세우지 못함으로 기독교인들 자체로도 이중적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안티 기독교가 여기저기 설치고 있는 데는 이런 원인도 크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불교 유교 무속종교 등 여러 종교가 혼재되어 있는 문화의 틀을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어 기독교 교인으로서도 신앙을 고백하면서 유교적 가치관으로 세상사를 판단하고 내면에서는 무속적 충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순을 해결하지 아니하고서는 심화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정체를 극복할 방도가 없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문화가 무엇입니까? '문화'라는 말은 '경작하다' '개간하다'('to till' or 'cultivate')라는 뜻의 라틴어 'colore'에서 온 말로써 '개화된다'(having culture) 또는 '문명인이 된다'는 말과 같이 협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뉴 브리태니카 백과사전(The New Encycolpaedia Britannica)] (1977)의 '문화'항목으로 "문화란 행위의 일부인 물질적 객체들과 아울러 특별히 인간에게 행해진 행위(begavior)이다. 문화는 언어, 이상, 신념, 습관, 규범, 제도, 도구, 예술 작품 등등으로 구성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적(Cultural Anthropology) 정의로는 "문화는 모든 역사적으로 창조된 인간의 삶과 경험의 형태와 시나리오의 통전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사회나 집단의 구성원이 이 체계를 공유한다"이라고 말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문화에 대한 정의가 18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주 간단한 정의를 내린다면 인간의 삶 전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와 종교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며 종교는 문화를 통해 그 외연을 확대시키고 문화는 종교를 통해 더욱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 그 어느 나라 종족이라 할 지라도 문화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만일 문화가 없다면 동물 세계일 뿐입니다. 아주 원시시대에도 인간에게는 문화가 존재하고 오늘 우리는 각종 옛 유물을 통해 그 시대의 문화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문화를 창조하시었다고.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의 문화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창조 된 그 직후부터 인간에게는 문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문화는 결코 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과 문화를 말할 때에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타난 여러 입장을 설명 듣게 됩니다. 첫째는,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의 유형입니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권위를 갖으며 문화적인 모든 주장은 거부됩니다. 그리스도냐 문화냐 어느 것이냐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유형에는 터툴리안, 톨스토이, 요한 일서 기자가 포함됩니다. 두번째는, 문화의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와 문화의 가치체계가 같다고 보며 그 정점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리츨, 아벨라르드, 영지주의가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문화적 열망을 성취시키고 문화의 연속성과 도약을 있게 합니다. 2세기의 변증학자들 특히 순교자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아퀴나스가 이 유형에 해당됩니다. 네번째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역설적 관계입니다. 서로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상반된 긴장을 가집니다. 루터가 이 유형의 대표자이고, 바울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번째로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입니다. 대립이나 분리가 아닌 문화의 변혁을 요구합니다. 어거스틴, 존 칼뱅, 그리고 요한 복음의 기자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Hiebert는 『선교와 문화인류학』이라는 그의 책에서 복음과 문화의 세 가지 관계를 기독교 신앙 전통의 계시관 안에서 잘 정립하였습니다. 그것은 "복음과 문화의 대립," "문화 속의 복음," 그리고 "문화에 대한 복음"이라는 관계들입니다. "복음과 문화의 대립"이라 함은 복음은 문화의 산물이 아닌 분명히 문화로부터 구별된 것이고 문화를 평가하는 규범으로서 문화의 죄 된 부분을 심판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문화 속의 복음"의 관계는 복음이 문화와는 구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은 반드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 형태 안에서 표현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마지막 "문화에 대한 복음"의 의미는 복음이 문화를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 문화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변화를 요구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합니다.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를 말할 때 지금까지 교회는 복음이 주체요 문화는 객체로 문화는 복음의 말에 순종하고 그 뜻에 따르거나 아니면 제거되고 교체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아왔습니다.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라 함에도 문화는 그리스도에 의해 바꿔져야할 운명 앞에 있는 한 마리의 생선토막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문화가 버려야 옛 유물단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화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유기체 같이 수 천년동안 인간의 삶 속에 숨쉬어 왔습니다. 즉 문화가 죽으면 인간의 삶도 사망선고를 받게 됩니다. 왜 일제시대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창씨개명을 죽어 라고 반대하였으며 한글을 철폐하고 일본어 사용을 목숨걸고 반대하였습니까? 문화가 죽으면 민족도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영어학습을 유치원부터 시키고 심지어 전용 영어 유치원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인이란 이름을 바꾸고 미국의 한 부속주가 된다면 모를까 영어의 중요성은 국제적 공용어로 그 쓰임을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문화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체험하는 창조적 삶의 과정이요 그 체험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그 표현된 것을 이해하는 과정으로서 인간을 역사적 존재요 실존적 존재임을 증언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문화의 해석학적인 이해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확대하며 삶의 이해의 확대를 심화시켜 나가는 것을 가다머는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s)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 복음을 통하여 한국사람들은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고 새로운 지평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 다만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이상으로 넓고 큰 세계를 바라보며 깊은 역사를 통찰하며 드높은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가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박영효 선생님은 당시 일본에 와 있는 선교사들에게 우리나라에 기독교선교사를 보내 주어 국민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초창기 한국의 선각자들이 기독교로 달려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도래한 기독교는 한국인들의 지평융합적인 요구를 묵살하며 기독교냐 아니면 문화냐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근시안적이고 배타적인 선교 활동을 통해 스스로 한국에서의 문화 선교의 문을 닫아 버릴 때에 이광수 선생님은 기독교를 버리고 다시 불교로 귀의 해버렸습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에 한국교회의 그동안 발전의 모습은 한국 자신의 교회로서의 성장이라기 보다는 미국교회의 이식된 나무의 성장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아 나무를 베겠다고 도끼 날을 갈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기독교 대한복음교회에서 지난 1977년에 발표한 77선언문에서 교회는 한국인 자신의 교회로서 우리의 신앙고백과 찬양이 우리자신의 짓과 음과 선과 멋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이제 문화란 인간의 몸 위에 걸친 의상 같은 것이 아니라, 한 문화 공동체의 몸을 이루는 살이요 피요 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살아 숨쉬는 문화를 부정하고 말살하면서 기독교를 서양의 문화이식 (文化移植)을 시키는 방식으로 선교한다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전근대적인 일차원적인 생각이라 할 것입니다.
이제 문화를 문화 되게 하고 문화를 삶의 핵심주체로 받아들여 기독교와 만나게 하는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말고 솔직하고 담대하게 직시하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흔히 문화와 기독교를 이야기 할 때 요즈음 상황화(Contextualization) 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전에는 토착화라는 말을 하였는데 토착화(Indignization) 라는 말은 너무 국지적이고 문화의 피상적 실체에 관심을 가짐으로 내면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보고 이제 상황화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상황화란 말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회의 에서 뱡 캬토(Byang Kato)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그 후에 문화와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아주 유용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Context 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인 Contextus 로서 함께 짜맞다 라는 뜻으로 Con'은 라틴어의 'Cum'(-과 함께)과 관련이 있고, 'text'는 라틴어 동사 textere'(짜맞추다)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Context"는 본문과 수반되는 혹은 본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Context라는 단어가 어떤 관념만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과정적인 현실을 포함한다고 했을 때, 상황화는 독자와 수신자의 과거와 현재에 비추어 본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묻는 것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그것의 미칠 변혁적 효과에 대해 묻는 작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버트는 상황화에 대해서 3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로 옛 것의 부인: 지금까지 상황화의 거부로서, 전통적 관습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거부한다면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조건적 거부로 문화적 진공상태를 만들어 내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많은 경우 선교사의 관습을 받아들이곤 하였습니다. 둘째는, 이교적인 관습이 지하로 숨어 들어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가르침과 혼합되어 기독교적 신념과 비 기독교적 신념의 혼합주의적 결합인 기독교적 이교주의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전통적 관습들을 모두 거부함으로 선교사와 교회가 옛 관습을 억압하는 경찰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옛 것의 수용: 무비판적 상황화로서, 전통적인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교회에 수용한다면, 옛 관습을 선한 것으로 보고 그 습관을 유지해도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첫째는, 죄는 개인적인 것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며 문화적인 죄도 있습니다. 세속주의의 형태로 제도와 사회의 관습들 속에서도 발견되며, 사람들의 문화적 신념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집단적 우월감, 차별대우와 우상 숭배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온갖 종류의 혼합주의로 나가는 첩경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적대적인 신념과 관습을 유지한다면 새로 도입된 신앙과 혼합되어 신 이교주의 (Neopaganism)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로 옛 것에 선별적으로 대응함: 비판적 상황화로서, 옛 신념과 관습들을 거부하거나 수용하기에 앞서 잘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문화적 상황에서 전통적인 신념과 관습이 차지하는 의미와 위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성경의 기준에 평가하게 됩니다. 첫째, 개인이나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을 성경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둘째, 교회의 지도자는 전통적 관습을 신자들이 편견 없이 문제의식을 갖고 분석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셋째, 담임목사는 문제가 있는 사안과 관련해서 성경을 통하여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합니다. 넷째, 신자들이 스스로 새롭게 깨달은 성경적 진리에 비추어 과거의 관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결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부한 관습을 몰래 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옛것을 선별적으로 대응함에는 옛것을 검토하고, 옛것을 파악하고, 어떤 관습에 대한 성경적 교훈에 대해 연구하고, 성경적 교훈에 비추어 옛것을 평가하고, 새롭게 상황화된 기독교적 방식이 창출되어 상황화 시키는 것입니다. 비판적 상황화의 신학적 근거로는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확인시켜 주며, 이러한 상황화에서 지도자들이 결정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스스로 결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황화를 촉진시킨 요인은 제 3세계에 대두된 민족주의 타종교의 부흥, 정체성, 사회, 정치, 경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화'라는 용어의 문제에 있어서, 과거에는 전통과 민족주의와 성격, 비평학이 성경의 진리를 훼손하였고, 지금은 비기독교적 문화주의(culturism)와 일종의 실존주의가 신적인 계시를 침식하고 있으며 복음을 상대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조지 피터스(George W. Peters)는 현실적으로 상황화는 복음의 적이 되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시도된 상황화 작업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화의 문제점은 특정문화와 세계관을 왕국의 복음에 적용시키기보다 복음을 지나치게 문화에 적용시키려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 계시도 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상황화에 대한 문제점이 많이 있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거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서 인간과 접촉을 가진다고 볼 때, 말씀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here and now'의 복음의 메시지를 간과해서는 안되며 역사 상황간의 접촉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허공 속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 문화적 상황 속에 심어졌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의 말을 기억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문화적 장벽을 넘어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로서 성육신은 문화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접촉점의 모본이 되며 그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즉, 복음이 구체적인 문화적 삶과 정신 속에 육화(肉化)되는 과정 없이는 진정으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떡과 생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문화의 언어, 예술, 전통 속으로 화육 되어 들어가면서 복음은 문화를 창조적으로 변혁하고 심판하고 조명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해석학적 순환 원리에 따라서, 복음 또한 다양한 색갈로 조명되고 문화적 상황 속에서 재해석되면서 더 풍요로워 진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기자는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요1:14 로고스 사륵스 에게네토)고 하였습니다. 사륵스가 무엇입니까? 구체적인 육체-살을 의미합니다. 살덩이는 문화의 산물입니다. 로고스가 문화 속에 들어와 살덩어리가 되어야 비로서 우리가운데 거한다(요1:14에스케노센)고 할 수 있습니다. 거한다-스케노오라는 말은 장막을 치다 처소를 가지다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문화 속으로 들어와 문화 속에 거 하셨다란 말입니다. 문화 속에 태어나고 문화 속에서 자란 복음을 문화가 보듬어 안고 있으며 복음은 문화의 주머니 안에서 생명의 진리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안에서 그리고 초대교회의 전통 속에서 얼마든지 이와 같은 예를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어쩌면 근본주의 신앙이 생겨난 이래부터인지 복음에 철가면을 씌우고 세계 방방곡곡을 그렇게 다니라고 하니 복음이 숨이 막혀 기진하여 죽게 될 지경에 이르른 것이 아닌가? 그래서 최태용 목사님은 이를 고목화되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복음에 철가면을 벗기고 해방시켜 인간의 문화 속에 그 생명이 꽃을 피어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제주어와 선교적 관심
우선 제주의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큰 화두는 제주 방언입니다. 저는 방언이라 하지 아니하고 제주어라고 부릅니다. 제주어는 단순히 표준어를 기준으로 방언 사투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주어는 독자적인 제주 사회의 특이한 습관 전통 문화적 특징을 품은 살아있는 언어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제주어를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는 먼저 제주민들이 처하여 살아 온 시공간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지리적 조건입니다. 망망대해 속에서 우뚝 솟아있는 한라산 둘레 400여 리 제주도는 바람 많고 돌 많고 그리고 바다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인들이 많은 가난과 질고의 공포가 싸여 있는 섬이었습니다. 조선 인조 때 제주도에 유배된 이건(李健)이란 분이 "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요 가장 두려운 것은 사갈이요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다""라고 탄식한바 있습니다.
둘째로 예부터 육지에 조공을 바쳐야 겨우 생존권이 보장되던 탐라국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인 지배 하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지배적 영향이 언어에도 미치게 되어 제주어 중에는 신라 백제 가라 고구려 예맥 그리고 몽고와 왜 나라의 언어까지 들어와 함께 혼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20세기 초엽까지 제주도는 나라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유배되어 온 귀양지였습니다. 제주도 앞 바다에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관탈도라 부릅니다. 이곳으로 귀양살이 오는 관리들이 이곳에 이르러 쓰고 온 관을 벗고 제주도에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제주에 귀양 온 많은 관리들 사대부가들 그들의 억울함과 눈물이 떨어져 제주의 고급 문화로 승화되어 그 아름다운 자취가 지금까지 남겨지고 있습니다.
넷째로 제주도는 중국과 일본 나가서는 세계 여러 나라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수많은 인종들이 제주도를 거쳐가면 서 떨어트린 말들이 있게 됩니다. 그 중에도 고려시대 원나라의 총관부가 설치되어 말을 양육하던 곳이라 몽고의 풍속과 언어에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수 천년간 겪어 온 각 가지 피맺힌 사연들을 오직 천지신명께 하소연할 길 밖에 없어 일찍부터 발달된 무속의 영향이 제주어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습니다. 제주 무가는 그야말로 제주어의 백과사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우리나라 고대의 문화를 그 언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제주어를 다만 사투리라고 소멸시킨다는 엄청난 문화적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를 지킨다는 것은 문화와 정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점점 제주어가 사라져 가는 현실에 다시 제주어를 지키고 더욱 회복시키는 일이 무엇 보다 선교적 차원에서 꼭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제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진성기 박사님의 협조로 처음 마가복음을 펴냈습니다만 앞으로 계속해서 성경 전체를 펴내는 일이 제주문화 선교에 우선되는 일이라 고 하겠습니다.
제주 무속과 선교적 관심
1936년 5월 <중앙>에 발표된 김동리의 『무녀도』는 1947년 단편집 <무녀도>에 실리면서 많은 부분이 개작(改作)되었으며, 또한 1978년에는 『을화』라는 장편소설로 확장, 개작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의 재래적 토속 신앙인 무속(巫俗)의 세계가 변화의 충격 앞에서 쓰러져 가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무녀도'라는 그림에 담긴 한 무녀의 삶과 죽음을 중심 제재로 한 이 작품은 소멸해 가는 것의 마지막 남은 빛에 매달려 이를 지키려는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의 대립으로 인해 혈육관계(어머니와 아들)가 파탄에 이르는 스토리를 보여줌으로써, 무속이라는 전통 문화와 기독교라는 외래 문화가 겪게 되는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1936년에 발표된 이 무녀도를 보면서 제주도안에서 지난 100년 간 갈등과 알력으로 점철되어온 기독교와 무속과의 관계가 과연 언제 까지 이 같은 대립관계를 지속 시켜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는 제주의 무속 굿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굿을 종교적 차원으로 보지말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는 그 제주의 신화와 굿에서 제주인의 문화와 그 정서를 알게 됩니다. 이 정서를 읽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려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지난 100년 간 있어 온 것이라고 봅니다. 신앙심은 에토스 적인 면보다는 파토스 적인 면이 더 강하다고 할 것입니다. 제주인의 파토스를 우리는 무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는 에토스적으로 선교적 접근을 하려니 부조화와 갈등만 점점 커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주는 가히 거대한 무속의 나라라고 할만합니다. 흔히 18.000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만큼 제주인의 문화적 삶 속에 온통 무속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주 역사 이래에 제주인들의 모든 문화생활은 무속에 통전적으로 얽혀 있었고 따라서 무당의 절대적 지도 하에 생활해 나오고 있었습니다. 제주무속의 대부분은 송당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습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소천국과 백주또 이야기인 송당과 관계없는 무속설화도 많이 있습니다.
제주 무속 중에 제가 매우 관심을 가졌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청비 세경본풀이이고 또 하나는 가믄장아기 삼공본풀이입니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시간 관계상 다 소개 할 수 없습니다.
옛날옛적 강이영성이서불이라는 남자거지와 홍은소천구부인이라는 여자거지가 있었는데 딸이 셋 있었습니다. 하루는 누구 덕에 살았느냐고 딸들에게 물어보니 첫째 딸과 둘째 딸은 하늘님 덕 지하님 덕이지만 무엇보다 부모님 덕으로 먹고삽니다 라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셋째 딸인 가믄장아기는 하는 말이 내 배꼽아래 선그믓 덕이라고 대답하여 부모가 노발대발하여 가믄장이를 쫒아 냅니다. 집을 떠난 가믄장아기는 굴미굴산의 초막에 사는 세 아들 중 막내아들과 결혼합니다. 남편이 마를 캐던 곳에 갔다가 그곳에서 금을 발견해 부자가 됩니다. 이후 가믄장아기는 장님이 된 부모를 찾고 눈을 뜨게 합니다. 가믄장아기는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독립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돌이라고 하여 버린 마 뿌리가 모두 금덩이로 변해 부자가 됐다는 것은 복이 여성에게 있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삼공본풀이」의 가믄장아기에서는 여성으로서 자아에 눈을 뜨게 되면서 새로운 삶의 세계를 독립적으로 실현해 나가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원형성은 오늘날의 여인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청비 이야기는 제주의 최고 문학이라고 가히 말할만합니다. 비견한다면 그리스 로마의 신화나 또는 섹스피어의 작품을 능가하는 그런 문학적 작품으로 훌륭한 설화입니다. 자청비는 참으로 매력적인 멋진 여성입니다. 순박하고 진실할 뿐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진취적인 정신, 뭇 남성들을 능가하는 지혜와 기지, 불행을 행복으로 바꾼 열정적인 사랑, 고난을 극복하는 불굴의 의지-이 모든 것을 갖춘 여성이 자청비였습니다. 그녀는 모든 불행을 이겨 마침내 사랑을 쟁취하며 그리고 제주의 농사신으로 좌정 하는데 특히 제주도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섬기기 시작한 농경, 오곡의 여신으로 '세경할망'이라 부릅니다. 자청비 이야기는 일반신본풀이 중 '세경본풀이'에 자세히 전해져 오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길며 서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경본풀이'는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백중이나 마불림제, 요왕맞이 굿 등에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밖에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무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가들을 보면서 두 가지 특징을 찾아보게 됩니다.
하나는 배타적 분리주의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제주 사람들은 육지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육지 것'이라 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 원인으로 이재수 난 그리고 4.3사건으로 외부인에 대한 극심한 저항의식이 제주인들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러나 무엇 보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무가에서 그 원류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여신들은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여신들은 남신들에 의해서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당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끝내면서 결국은 여신들의 해피앤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송당 본향당단의 금백주와 소천국의 이야기에서 금백주가 소천국을 알송당으로 보내고 자신이 웃송당에 좌정하며 일곱 아들을 낳아 그 후손들이 전 제주도에 퍼져 나가 일만팔천신을 이루게 됩니다. 제주의 무속에서 보이는 여성성에서 우리는 배타적 분리주의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육지에서 떨어진 채 이처럼 무속의 신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온 제주인들의 심성 속에는 자연히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여성성의 분리주의가 싹터왔다고 하겠습니다.
제주도에는 삼다 중의 하나 바람이 많이 붑니다. 그래서 제주의 초가집을 보면 육지와 달리 높은 돌담을 쌓고 초가지붕은 전역에서 자생하는 연한 갈대처럼 생긴 띠풀로 지붕을 덮은 후 직경 5cm의 굵은 밧줄로 바둑판처럼 얽어 놓습니다. 제주의 마을로 들어가면서 외부와 절연하고 배척하는 듯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높은 돌담과 밧줄로 엮은 지붕아래 좌정하여 있는 여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육지처럼 대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긴 나무대로 걸친 정낭이 있을 뿐입니다. 그 정낭은 외부를 향한 그리움이요 애틋한 손짓이요 행주치마 입에 물고 생긋 웃는 아낙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또 하나는 풀이 문화입니다. 제주 무가를 본 풀이라고 말합니다. 풀다란 말은 매이거나 묶인 것을 끄르거나 흐트러뜨리다, 자유롭게 하다를 뜻합니다. 더구나 풀다 의 한자의 대응은 해(解) 입니다. 그것은, 결자해지(結者解之) 라는 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묶음과 결박을 뜻하는 결(結) 의 반의어이기 때문에, 풀이는 곧 문자적으로 풀고 놓는다 는 뜻의 해방(解放) 을 의미합니다. 제주의 굿마당에서 제주도 사람들을 묶어 왔던 온갖 한을 풀어 자유 함을 얻는 구원의 기쁨을 보게 됩니다. 얼어붙었던 강물이 따뜻한 봄기운에 녹아 풀리듯이 제주인들의 얼어붙었던 마음들이 굿을 통해 풀어져 마침내 새로운 신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풀이의식으로서의 제주의 굿은 하나의 실질적인 구원관 으로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제주의 역사의 면면한 흐름동안 절망적인 포기와 위기에 직면하였어도, 이를 거슬러 난관을 타개하고 새 삶과 새 땅에의 희망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풀이에의 기대, 풀이의 경험, 풀이의 동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박혁순). 굿 하면 미신이나 신앙으로만 아는 오도된 지식으로 교육받아온 사람들에게 제주의 사람들은 매우 정확하게 답해줍니다. 굿은 다만 종교 이상의 제주인의 노래와 춤과 장단이 어울려진 한판의 축제입니다.
칠머리당굿은 음력 2월 1일에 영등환영제와 2월 14일에 영등송별제로 이어지는데 굿 날이 되면 건입동 주민 뿐 아니라 제주시내의 어부와 해녀들도 참가합니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 제사에 쓰일 음식을 차려서 당으로 가져옵니다. 매인심방이 징과 북, 설쇠 등의 악기 장단에 맞추어 노래와 춤으로 굿을 진행하게 됩니다. 굿의 순서는 모든 신을 불러 굿에 참가한 집안의 행운을 비는 초감제, 본향당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해신부인을 불러 마을의 평안을 비는 본향듦, 용왕신과 영등신이 오시는 길을 닦아 맞이하고 어부와 해녀의 안전을 비는 요왕맞이, 마을전체의 액을 막는 도액막음, 해녀가 바다에서 잡은 것들의 씨를 다시 바다에 뿌리는 씨드림, 영등신을 배에 태워 본국으로 보내는 배방송, 처음 불러들인 모든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이 때에 제주도에 있는 해녀들이 모여들고 함께 굿의 즐거움과 풍성함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그동안 수없이 자맥질하며 바다 밑을 헤엄쳐 다니던 해녀들의 그 맺혔던 한이 한꺼번에 씻어 버리고 다시금 새 기운으로 바다에 들어갑니다. 이처럼 제주인에게 있어서 굿은 종교 이전에 한마당 풀이 문화요 놀이라고 할 것입니다.
결어
이제 우리는 과연 기독교 복음과 제주 문화와의 관계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가하는 고민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기를 제주인들이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두니 도저히 r 틈새를 파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발상의 전환을 해보게 됩니다. 저들의 꽁꽁 닫아둔 마음 문을 열기보다는 저들을 향한 교회의 꽁꽁 닫아둔 문은 열어 져 칠 수 없는 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문은 닫아두고 저기 문만 열라고 하면 피차 일반입니다. 교회의 문이 닫혀 있는데 무슨 수로 저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 올 것입니까? 제주의 문화를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제주인의 자아정체성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응답자들의 대다수가 제주도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느끼고 있으며(84.9%), 육지에 가서도 제주도 사람인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83.9%)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자의 62%정도는 자녀들도 제주도에 살기를 바라고 있으며, 2/3정도는 본인들도 제주도에 살기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제주인들의 자아정체성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육지에서 제주에 처음 이사 온 사람들이 처음 가지는 어려움이 있다면 대부분의 제주 사람들은 다른 때는 이사하지 아니하고 신구간 때 이사를 하기 때문에 다른 때 집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 신구간 이사풍속은 좀처럼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이 신구간 풍속은 할로영산 궤네깃도 설화에서 비롯됩니다. 이 신구간 때 천지신이 할로영산에서 대한 후 닷새째 부터 입춘 전 사흘까지 약 칠일간 제주 일만팔천신을 불러모아 인간사의 모든 것을 의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를 정해준 까닭이 제주인의 최고 신 답 습니다. 그것은 이 때가 새로운 일년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이고 농한기에 해당되는데 바쁜 농사철에 일손을 뺏기지 아니하고 집수리나 이사를 하려면 이때가 가장 알맞다고 보아 때 맞춰 신들이 자리를 비워준다는 것입니다. 제주의 무가에 나오는 신들은 모두 제주인들의 삶을 위해주는 신들입니다.
세경본풀이를 대신할 만한, 그리고 해녀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영등굿을 대신할 만한, 신구간 때 교회가 관여할 만한, 제주의 문화와 교회가 함께 갈 수 있는 그래서 제주인의 정체성을 훼손하기보다는 제주인과 함께 그들의 삶 속에 기쁨과 보람과 평안함을 줄 수 있는 교회의 문화 선교정책이 더욱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