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5일 익산 갈릴리교회 목회자세미나 개회설교
군산나운복음교회 전병호목사
예수 선생님 성경: 11:28-30
마태복음 4:23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는 말씀하셨고 또 9:35에서 똑같은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3대 사역을 말하게 됩니다. 즉 가르치심과 복음전파와 병 고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12사도를 택하시고 그들에게 이 3대 사역을 본받아 따르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15절에 보면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심을 보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과 '보내사 전도하게 하심'과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가 있게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교회를 세우시지는 않았지만 장차 이 사도들을 통해 이 3대 사역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마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절(26:20)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예수님이 머리되신 몸 된 교회라고 할 때 교회의 본질은 바로 예수님의 3대 사역의 실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목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이 세 가지를 감당해 나가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삼대 사역 중에 이 시간 함께 나누고 싶은 사역은 가르치는 사역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위 유랑전도활동을 하시면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을 에워싸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병 고침도 하시는 그 바쁘신 와중에 가장 주요시 여긴 사역은 12사도를 양육하시는 일이였습니다. 어떤 때는 사에 올라가셔서, 어떤 때는 길을 가시면서, 어떤 때는 배를 타고 갈릴리호수를 건너가시면서 어떤 때는 새벽에 어떤 때는 밤중에 어떤 때는 대낮에 어떤 때는 회당에서 가버나움 집에서 예루살렘성전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시간 닿는 데로 사도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무슨 가르치는 교실이 정해져 있지도 않았고 무슨 컬리큐럼을 정하여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겠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동거동락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면서 앞으로 사도들이 담당해야 할 각가지 사역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이 당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랍비였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예수님의 12 살 이후부터 30 세까지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어떤 시간들을 보내셨을까요? 요셉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열심히 목수일을 하면서 보내었을까요? 당시 유대의 주택들은 대부분 흙벽돌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목수'란 넓은 의미에서 건축 기술자 또는 목공 기술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A.D. 150년)은 예수가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고도 증언하므로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을 농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째든 마태복음 13:55에 예수님을 "그 목수의 아들(호 투 테크토노스 휘오스)"라고 하여 '목수'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투'가 사용됨으로써 나사렛 동네에는 오직 한 사람 또는 한 집안의 목수가 존재하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다만 예수님이 목공기술자로 청년시절을 바쁘게 보내기만 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유대교 학자들이 말하기는 당시 갈릴리 지방에는 라비교육 시스템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가버나움 이라고 하는 곳은 3000 여 명의 인구가 살았던 당시에는 꽤 도시규모가 짜여진 곳으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기원 후 1500년 대 까지의 회당 중 가장 큰 규모의 회당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이 가버나움이 유대교 전체의 종교 교육 센터 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닌까 가버나움은 교육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성지순례 중 가버나움에 가보신 분은 지금은 골격만 남았지만 제법 규모 크게 잘 지어졌으리라고 상상되는 회당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근에 베드로의 장모 집터가 있음도 보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에서 비록 목수생활을 직업 삼아 살으셨다고 하여도 랍비들의 교육도 받으셨으리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에 있었던 교육제도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첫 단계로 벧 세페르 (HOUSE OF THE BOOK)라는 곳에서 6세에서 12세까지의 소년 소녀들이 오늘날의 초등 교육을 받게 됩니다. 대부분은 토라 선생님들에 의해서 교육이 이루어 집니다. 그들은 신명기서 6장의 쉐마교육 부터 시작해서 모세 오경을 외웠으며 수학 역사 지리 등을 랍비들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특히 소녀들은 신명기의 많은 부분과 시편, 잠언 그리고 레위기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일년에 세번 정도는 (남편들 이 큰 세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될 때) 가정에서 여성들이 예배를 주관하게 되는데, 이때 사용할 수 있는 말씀들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께서 여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위에서 언급한 성경들 중에서 인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벧 미드라쉬 (HOUSE OF LEARNING)에서 공부를 하는데, 여기에서는 12세 에서 15세 까지의 청소년들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여성들의 대부분은 이 기간에 결혼을 하게 되었으므로 이들의 교육은 끝이 납니다. 남성들의 경우 (12세 이상은 이제 거의 성인이나 마찬가지 이지요) 벧 세페르 에서 모세 오경을 완전히 외울 수 있는 자들에게 이 교육의 혜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교육생들은 나머지 구약 성경을 공부하며 외우게 됩니다. 15세가 되면 대다수의 남성들은 교육을 끝마치게 되며, 각자 아버지의 생업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최고의 교육생들은 한가지 과정을 더 거치게 됩니다.
마지막 단계가 벧 탈무드 (HOUSE OF EDUCATION)인데 이곳에 입학한 청년들은 모두 15세부터 30세까지 엄격한 과정을 통해서 나머지 구약 성경을 외우며, 위대한 랍비들 과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들 또한 위대한 랍비가되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위대한 랍비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30세 이전에 이곳에서 요구하는 교육과정을 마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30세가 되었을 때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가르칠 수 있는 재능과 능력이 보이게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를 랍비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측도 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나이 30세가 되어서야 공생애를 시작하셨을까? 아마도 랍비 교육을 다 마치시고 랍비라 칭함을 받으셨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부르거나 좀더 존경하는 말로 랍오니여라고 불렀다는 데서 가능한 생각이라고 주장하는 성경학자도 있습니다.
알려진바에 의하면 당시에 제자들 특히 랍비 교육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스승을 선택하게 됩니다. 먼저,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토라에 대한 이해 와 해석이 훌륭한 랍비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랍비에게 “ 제가 당신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또는 “제가 당신과 같은 랍비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랍비는 자신에게 찾아온 제자에게 여러 가지 토라와 구약 전반에 걸친 어려운 질문들을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그들이 이제껏 배웠던 모든 토라에 대한 지식과 해석을 랍비에게 보이게 되는 어려운 관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랍비가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찾아온 제자가 자신과 같은 랍비가 될 자질이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면 그제서야 랍비는 “ 나를 따라 오너라(듀테 오피소 무 마4:19)” 라고 제자에게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랍비가 생각하기에 그의 배움의 짐 (yoke) 이 너무 무겁고, 그가 자신의 삶 (yoke) 을 실천하고 따라올 만한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이 되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나의 아들아 축복을 받아라, 너는 가서 너의 아버지의 일을 배우고 익히거라,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라”이런 식으로 해서 그 당시에 제자와 랍비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도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어부로 일하던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는(yoke)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마 11:30)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예수님이 랍비 교육을 받으셨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리고 공생에 기간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모습들에서 우리는 당시 랍비들의 제자 교육방법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너희가 전에는 이렇게 배웠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여러 번 등장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가르침에 놀라며, 도대체 이러한 권위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권위 있는 랍비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진정한 랍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직접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랍비 중의 랍비 가장 위대한 랍비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시고 그 가르침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에 누가 들어갈 것인가 그 길을 가르쳐 온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여 인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로 세우는 일이였습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하나님 백성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 원대한 비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12 사도들을 제대로 가르치시는 일이였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나라의 목회 현장을 바라봅니다. 최근에 교회가 전에 비해서 성자의 속도 가 느려지거나 정체되어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사실입니다. 작년(2008)10월 13일부터 16일 까지 대구시민 1000명을 무작위로 뽑아 종교조사를 한바 있습니다. 대구 시민의 17.3%가 개신교기독교인이고 불교인이 30.6% 천주교인이 11.4% 였습니다. 무 종교인들에게 믿고 싶은 종교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에 기독교가 16.1% 불교가 39.8% 천주교가 32.3%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고싶은 사람들의 41.2%가 족이 믿어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개신교 이미지가 좋아서라고 대답한 사람은 5.9%에 불과하였습니다.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를 묻는 말에 배타적이다가 25.2% 이기적이다가 24.1% 위선적이다가 19.9%% 옹졸하다가 10.9% 였습니다. 교회가 부흥 못하는 이유 중 가장 많은 것이 교회가 세속적이고 도덕적으로 해이해 졌다가 27.5% 였습니다. 역시 비슷한 기간에 기독교윤리실천협의회에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조사하였는데 신뢰하지 않는다가 48.3%로 특히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동에 신뢰하지 않는다가 50.8%요 신뢰한다는 경우는 14.4%에 불과 하였습니다. 종교별로 신뢰하는 종교를 물어보니 천주교가 35.2% 불교가 31.1% 그리고 개신교가 18% 였습니다. 결국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비쳐지는 우리 교회의 모습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교회가 점점 정체되어 가고 선교의 어려움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원인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 주제에 따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교회가 말씀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설교도 많고 사회적 봉사도 크며 선교의 열정도 있는데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교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 인구가 1000 만 명인데 1000 만 명의 기독교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 달란트의 역할을 감당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과연 교회가 얼마나 충실하게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 말씀은 교회의 핵심이요 그 전부요 능력이요 성령의 검인데 말씀의 역사없이 교회 성장과 선교 사명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작년(2008) 6월 2일에 한국신학자 140인이 성경을 통한 재 정향이란 주제로 2008 서울 선언을 하였습니다. 한국의 내노라하는 신학자 140명이 모여서 선언하기를 " 먼저 우리 한국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상대화라는 결정적인 과오를 반성하는 가운데 성경을 진실하게 전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우리는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을 하지 못했으며 사회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소홀히 했던 것을 반성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 신학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신학이 새로워지려면 옛것이지만 가장 새것이기도 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것은 그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우리는 우리의 신학의 길을 성경을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재 정향 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선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다시금 성경교육을 철저하게 하여야 합니다. 다시금 예수님에게로 확실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선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선생님께서 우리를 올바르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요시아 종교개혁이래로 항상 교회가 정체되거나 타락되거나 어지러울 때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그래서 새로워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세기 개신교 역사에 두 탁월한 주님의 일꾼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챨스 핟돈 스펄전 목사님이시고, 또 한 분은 드와이트 무디 목사님이십니다. 스펄전은 영국에서 그리고 무디는 미국에서 각각 활동하였습니다. 스펄전은 당대의 치고의 설교가였습니다. 이분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영국은 물론 세계 여러나라에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래 최대의 인파가 스펄전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에 50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세계 최대의 교회당 메트로폴리탄터버너클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영국의 자랑이요 부흥의 상징이였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 그 교회에 100명도 안 되는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디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분입니다, 그가 부흥회 할 때 문장이 엉망이였습니다. 어떤 비판자가 말하기를 "당신 오늘 엉터리 설교를 하였다. 오늘 당신은 단어 17개를 실수하였단 말이야"라고 말하였습니다. 무디는 미국의 대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큰 교회당보다는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성경학교에서 수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목사 50%와 수 만명의 선교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스펄전과 무디 두분은 당대 가장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이루신 치고의 사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스펄전은 건물에 투자하였고 무디는 다음세대를 위해 사역자 양성에 투자 하였습니다. 스펄전의 설교는 지금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지만 무디의 역사는 보다 예수님의 사역에 가까이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교회에 대하여 들어보니 인구의 0.6%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대부분 교회의 성도수가 30-50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우리나라 보다 먼저 들어 간 곳은 일본이였습니다. 특히 일본의 신학은 세계적 수준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본에는 역사적으로 세 번 기독교가 부흥할 놀라운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번째가 430년 여 년전 로마카톨릭 선교의 초창기의 부흥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130 여 년 전 개신교 선교 시작 때의 대 부흥기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2차 대전 이후 7년 대 부흥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선교사가 이런 보고를 하였습니다. "일본은 머지 않아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 곧 선교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잘못 집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이유 하나는 교인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사역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호세아 4:1이하에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 대임이라"
그래서 6절에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서 다시금 철저하게 확실하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그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거자가 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것은 배우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여기에 분명히 응답하여야합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이 예수님의 초청을 들음이요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을 가르칩니까?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경건성 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그치심은 경건훈련이었습니다. 몸소 기도로 본을 보여 주셨고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고 마침내 희생의 경건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디 쉬운 교육이 어디에 있습니까? 배움은 항상 피 교육자에게는 어려움입니다. 그것은 짐을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누구나 배울 수 있습니다. 유치부 유아로부터 100살 넘은 노인까지 아프리카 원시족에서 부터 나사의 우주과학자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가르치심입니다. 그 가르침을 받을 때 점점 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엔 어려운 것 같은데 점점 쉬워져 갑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엉덩이가 뜨거워집니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 없이 심령이 뜨거워집니다. 말씀에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처럼 밖으로 나갑니다. 말씀을 전합니다. 멀리 남의 나라까지 건너가서 말씀을 전하고 거기서 또 제자를 삼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과 선교라는 주제로 개최하는 목회자 세미나는 이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목회자들부터 먼저 말씀에 대한 철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각성과 부흥의 길을 제시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울리 예수님으로부터 큰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그럼으로 박기 위해 우리는 여기 모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 선생님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가르침을 바는 시간이라 믿고 이 자리에 있다면 지금 이 자리는 한국교회의 희망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교회는 이제 예수 선생님 앞에 사람들을 모아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첫 사명이요 성공적인 선교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 잠시 정체된 시간이 오히려 도약의 시간으로 삼기 위해 다시금 성경교육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선생님으로부터 이 시대에 필요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