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터는 군산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100여 년 전 금강을 나룻배로 건너다니며 선교하던 충청남도 서천지역 교회에 대해 소개하려 합니다. 특히 서천지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먼저 그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1816년 9월 4일(음7월18일) 영국의 함선 알세스트호(Alceste 함장Murry Maxwell)와 리라호(Lyra 함장 Basil Hall)이 충청도 서해안 비인현 마량진 앞 갈곳에 도착 하였습니다. 이 배는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견하는 아머스트(J win Am-herst)를 태우고 와 중국 광동에 내려놓고 조선의 서해안 일대를 다니며 해도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양선(異樣船)을 본 마량진 첨사 조대복(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이승렬)이 이 두 배에 승선하여 검사를 하던 중 선실 서가에 꽂혀 있는 대영백과사전책을 보고 그 아름다운 장정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 한권을 주기를 청하였지만 전질 중의 한권이라 주지 못하고 대신 성경책을 조대복과 이승렬에게 각각 한권씩 주었습니다. 이 성경책은 1827년 간행된 영국 에딘버그판 대형 성경이였습니다.(Basil Hall’s Account, 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 40쪽. 옥스퍼드대 출판 1256쪽,가죽장정,모서리금박,최상급) 비록 서해안을 지나던 영국 함장으로부터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뿌려졌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바실 홀은 그가 저술한 ‘조선항해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해안에 가까이 가자 해변에 있는 사람들과 배에 있는 사람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법썩거렸다. 해변가에 사람들은 급히 나룻배에 뛰어 오르고 한편 큰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닻을 거두고 우리가 육지에 닿기 전에 재빠르게 우리를 만나러 나왔다. 배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수많은 깃발과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중 한 배는 푸른 빛을 띤 우산으로 특별하게 보였으므로 우리들은 그것이 상관의 표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배를 향해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양산 밑에 한 점잖은 노대관이 앉아 있었다. 그의 하얀 턱수염은 가슴을 거쳐 허리 밑까지 닿았고 푸른 명주로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든 옷은 위풍있게 펄럭였다. 이 사람이 그들 가운데 장이 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우리들은 가까이 다가서서 그의 배로 들어갔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맞아 주었다.”(10일간 조선 항해기, 바실홀 김석중역 삶과꿈 2003, 원제 :조선 서해안 및 류큐 제도 발견 항해기 :1818년 영국에서 발행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Hall, Basil )
배에서 내려 리라호 함상에 안내된 첨사 일행은 미리 준비해 가져온 돗자리를 갑판에 깔고 나서 참사가 먼저 정좌하자 시종무관이 첨사의 후면 좌우에 섰고, 붓과 종이를 가진 서기가 앞에 앉아 문정(외국 배가 처음으로 항구에 들어왔을 때 관리를 보내어 그 사정을 알아보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첨사 조대복은 “너희들은 어느 땅의 사람이냐? 어떤 국가의 사람들이냐? 어떤 목적으로 여기 왔느냐? 당신들의 배에서는 기록한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느냐?”고 한문으로 물었으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맥스웰과 바실 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다시 한글로 물었으나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함장인 맥스웰 일행의 친절에 안도감을 느낀 조대복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의 장정에 상당히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거절하였습니다. 아마도 조선의 예법으로 처음에는 사양하는 것이 예였으나 바실 홀은 미처 알지 못하고 막 떠나려 할 때 조대복은 그 책을 달라고 하여 다시 건네주자 감사를 표하며 성경을 받아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실 홀과 맥스웰의 서해안 항해 중 마량진에서 맥스웰 함장을 통해 영어 성경 한 권이 처음으로 조대복에게 건네진 것입니다. 훗날 조선 순조실록에 “배에서 내릴 때에 그 중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억지로 주는 것을 고사하여 받지 않았더니 필경 우리 배 가운데 던져 버렸다. 그러므로 소선호(리라호)에서 받은 2권이 있어 모두 3권인데 1권은 상사에게 주었고, 1권은 순영에 보내었고, 1권은 병영에 보내었다” 그 후 받은 물건들은 충청수사에게 모두 보내졌습니다. 영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서라도 성경을 처음으로 이 땅에 배달하셨던 것입니다.
맥스웰과 바실 홀이 작성한 서해도는 훗날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기록한 조선 항해기와 서해안 해도, 그리고 한 권의 성경이 조선인들에게 건네졌다는 사실을 알고 적지 않은 도전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칼 귀츨라프 선교사였습니다. ( 모퉁이돌 선교회 1985년 설립 ‘카타콤소식’2015년 8월 특집1 최초로 건네진 성경역사 02 796 8846)
Karl F A Gutslaff 옥스퍼드대 출판 1256쪽,가죽장정,모서리금박,최상급
영국 동인도회사의 용선에 아머스트(Lord Amherst)호에 그동안 중국 해안을 따라 선교활동을 하던 귀쯔라프(Karl F A Gutslaff 郭實獵 1803-1851)목사는 의사 겸 통역사로 타고 있었습니다, 아머스트는 호는 1832년 2월 26일 마카오를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서 황해도 백령도 부근에 상륙하여 도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고 조선정부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조선은 아직 개항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당시 황해 감사 김난순(金蘭淳)은 수사 윤우현(尹禹鉉)과 장연 현감 김성익(金星翼)이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보직을 해임시키고 징계하였습니다.) 아머스트호는 장산곳을 지나 남으로 남하하면서 6월 26일 홍주(홍성군) 고대도(현재 보령시 오천면 소속) 안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귀쯔라프목사는 이곳에서 한문성경을 다량 반포 하므로 이는 1836년 1월 12일 압록강을 건너 입국한 천주교의 최초의 신부인 모방신부(Pierre Philibert Maubant, 한국명: 나백다록羅伯多祿1803.9.20.-1839.9.21. 1839년 9월21일 한강새남터에서 순교함. 1984년 5월6일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중에 103위 시성식에서 시성되었다)보다 4년 앞선 일입니다. 다시 군산만으로 내려와 금강을 타고 강경에까지 이르러 계속 성경을 반포하며 선교를 하였습니다. 귀쯔라프목사는 7월 4일 홍주목사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 김영수(金瑩綬)를 통하여 공충도 관찰사 홍희근(公忠道觀察使 洪羲瑾)에게 전하니 홍관찰사는 순조에게 서양옷감과 시진표 만원경과 성경책을 오려 보내며 이 사실을 보고한 내용이 순조 실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순조 032 32/07/21(을축) / 홍희근이 홍주의 고대도 뒷 바다에 정박한 영길리국의 배에 대해 보고하다)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아무런 회답을 받지 못하자 귀쯔라프목사는 한달 간 머물면서 주변 주민들에게 감자종자를 나눠주며 감자 심는법과 저장법 을 가르쳐 줌으로 우리나라에 감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습니다. 특히 특기할 사실은 귀쯔자프목사는 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 양씨(梁氏 Yang Chih)의 도움을 받아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함으로 최초의 성경 말씀이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김양선 전계서 43쪽)
서해안 유일의 해돋이와 해짐이를 볼 수 있는 마량포구는 주변에 마량리 동백나무 숲과 해양박물관등이 위치하고 있는 서해안의 정동진에 아펜셀러 목사의 순교비와 함께 한국 최초의 성경전래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방송용 원고)
오늘 부터는 군산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100여 년 전 금강을 나룻배로 건너다니며 선교하던 충청남도 서천지역 교회에 대해 소개하려 합니다. 특히 서천지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먼저 그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1816년 9월 4일(음7월18일) 바실 홀 함장이 이끄는 영국의 함선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충청도 서해안 비인현 마량진 앞 갈곳에 도착 하였습니다. 이 배는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견하는 아머스트를 태우고 와 중국 광동에 내려놓고 조선의 서해안 일대를 다니며 해도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양선(異樣船)을 본 마량진 첨사 조대복(조대복)과 비인 현감 이승렬(이승렬)이 이 두 배에 승선하여 검사를 하던 중 선실 서가에 꽂혀 있는 대영백과사전책을 보고 그 아름다운 장정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 한권을 주기를 청하였지만 전질 중의 한권이라 주지 못하고 대신 성경책을 조대복과 이승렬에게 각각 한권씩 주었습니다. 이 성경책은 1827년 간행된 영국 에딘버그판 대형 성경이였습니다. 비록 서해안을 지나던 영국 함장으로부터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뿌려졌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바실 홀은 그가 저술한 ‘조선항해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해안에 가까이 가자 해변에 있는 사람들과 배에 있는 사람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법썩거렸다. 해변가에 사람들은 급히 나룻배에 뛰어 오르고 한편 큰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닻을 거두고 우리가 육지에 닿기 전에 재빠르게 우리를 만나러 나왔다. 배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수많은 깃발과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중 한 배는 푸른 빛을 띤 우산으로 특별하게 보였으므로 우리들은 그것이 상관의 표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배를 향해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양산 밑에 한 점잖은 노대관이 앉아 있었다. 그의 하얀 턱수염은 가슴을 거쳐 허리 밑까지 닿았고 푸른 명주로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든 옷은 위풍있게 펄럭였다. 이 사람이 그들 가운데 장이 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우리들은 가까이 다가서서 그의 배로 들어갔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맞아 주었다.”
배에서 내려 리라호 함상에 안내된 첨사 일행은 미리 준비해 가져온 돗자리를 갑판에 깔고 나서 참사가 먼저 정좌하자 시종무관이 첨사의 후면 좌우에 섰고, 붓과 종이를 가진 서기가 앞에 앉아 문정(외국 배가 처음으로 항구에 들어왔을 때 관리를 보내어 그 사정을 알아보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첨사 조대복은 바실 홀 함자에게 “너희들은 어느 땅의 사람이냐? 어떤 국가의 사람들이냐? 어떤 목적으로 여기 왔느냐? 당신들의 배에서는 기록한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느냐?”고 한문으로 물었으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맥스웰과 바실 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다시 한글로 물었으나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함장인 맥스웰 일행의 친절에 안도감을 느낀 조대복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의 장정에 상당히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거절하였습니다. 아마도 조선의 예법으로 처음에는 사양하는 것이 예였으나 바실 홀은 미처 알지 못하고 막 떠나려 할 때 조대복은 그 책을 달라고 하여 다시 건네주자 감사를 표하며 성경을 받아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실 홀과 맥스웰의 서해안 항해 중 마량진에서 맥스웰 함장을 통해 영어 성경 한 권이 처음으로 조대복에게 건네진 것입니다. 훗날 조선 순조실록에 “배에서 내릴 때에 그 중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억지로 주는 것을 고사하여 받지 않았더니 필경 우리 배 가운데 던져 버렸다. 그러므로 소선호(리라호)에서 받은 2권이 있어 모두 3권인데 1권은 상사에게 주었고, 1권은 순영에 보내었고, 1권은 병영에 보내었다” 그 후 받은 물건들은 충청수사에게 모두 보내졌습니다. 영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서라도 성경을 처음으로 이 땅에 배달하셨던 것입니다.
맥스웰과 바실 홀이 작성한 서해도는 훗날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기록한 조선 항해기와 서해안 해도, 그리고 한 권의 성경이 조선인들에게 건네졌다는 사실을 알고 적지 않은 도전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칼 귀츨라프 선교사였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용선에 아머스트호에 그동안 중국 해안을 따라 선교활동을 하던 귀쯔라프목사는 의사 겸 통역사로 타고 있었습니다, 아머스트는 호는 1832년 2월 26일 마카오를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서 황해도 백령도 부근에 상륙하여 도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고 조선정부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조선은 아직 개항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당시 황해 감사 김난순(金蘭淳)은 수사 윤우현(尹禹鉉)과 장연 현감 김성익(金星翼)이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보직을 해임시키고 징계하였습니다.) 아머스트호는 장산곳을 지나 남으로 남하하면서 6월 26일 홍주(홍성군) 고대도(현재 보령시 오천면 소속) 안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귀쯔라프목사는 이곳에서 한문성경을 다량 반포 하므로 이는 1836년 1월 12일 압록강을 건너 입국한 천주교의 최초의 신부인 모방신부보다 4년 앞선 일입니다. 다시 군산만으로 내려와 금강을 타고 강경에까지 이르러 계속 성경을 반포하며 선교를 하였습니다. 귀쯔라프목사는 7월 4일 홍주목사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 김영수(金瑩綬)를 통하여 공충도 관찰사 홍희근에게 전하니 홍관찰사는 순조에게 서양옷감과 시진표 만원경과 성경책을 오려 보내며 이 사실을 보고한 내용이 순조 실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아무런 회답을 받지 못하자 귀쯔라프목사는 한달 간 머물면서 주변 주민들에게 감자종자를 나눠주며 감자 심는법과 저장법 을 가르쳐 줌으로 우리나라에 감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습니다. 특히 특기할 사실은 귀쯔자프목사는 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 양씨(梁氏 Yang Chih)의 도움을 받아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함으로 최초의 성경 말씀이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
서해안 유일의 해돋이와 해짐이를 볼 수 있는 마량포구는 주변에 마량리 동백나무 숲과 해양박물관등이 위치하고 있는 서해안의 정동진에 아펜셀러 목사의 순교비와 함께 한국 최초의 성경전래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최초의 성경이 전래지인 충청남도에 초기 선교활동은 다른 지역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습니다. 1893년 1월 28잏 서울에서 개최된 장로교 공의회에서 북 장로교, 남 장로교 그리고 호주 장로교간에 선교지역을 분할 합의 할 때에 남 장로교가 충청지역과 정라지역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때 드류 선교사가 청주에서 선교활동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도 하고 전킨 선교사가 1894년 4월 두 주간 충청도 지역을 선교답사하기도 하였습니다.(송형강:충남대전교회사연구. 38쪽 주참고) 1895년 전킨. 드류 선교사가 신검리 낭평부락 송동네에서 민가를 얻어 예배당을 마련하고 첫 번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정행업목사 충청지역선교역사 한국기독공보기고문) 그러나 전킨과 드류 선교사는 군산에서 그리고 레이놀즈와 테이트선교사는 전주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므로 충청선교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선교의 무주공산 같았던 충청남도에 하나님은 침례교 계통의 선교사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1892년 북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온 밀러목사(Miller, Frederick Scheiblin 한국명 밀러. 1867-1937. 미국 펜실베니어 피츠버그 출생 유니온신학교졸업. 청주지역선교활동)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침례교와 장로교간의협정에 따라 충청도는 침례교로 배정되었다. 우리는 침례교가 그들의 선교 활동을 포기할 때까지는 그곳에 들어 갈 수 없었다. 이는 다른 장로교 지역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지 십년이나 지나도록 우리의 진입을 지연시켰다”(충남노회사. 56쪽)
미국 보스톤의 클라렌돈 스트리트 침례교회(고든목사A J Gordon 담임)가 그 교회의 신(S B thing)집사의 딸을 기념하여 “엘라 싱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조직하고 한국에 7명의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이렇게해서 1895년 폴링(E C Pauling)부부와 가들라인(Amanda Gadeline)이 공주를 거처 강경에서 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테드맨(F W Steadman 1895년 내한 부산 공주 강경선교활동 1900년 귀국후 일본선교)이 오게 되었습니다. 강경 선교활동은 다음기회에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나 폴링, 가들라인 그리고 스테드맨 선교사는 강경선교를 하던 중 1900년 미국의 고든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재정난에 선교를 접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회의 사업은 1889년부터 독립선교사로 활동하던 캐나다 출신 평신도 선교사 펜윅(Malcolm C Fenwick 1963-1935.12.6한국명:편위익 고든의 보스톤선교학교졸업-지금의 고든 콘웰신학교)에게 이양되었고, 펜윅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라는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갖추고 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후일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로 개칭되었고, 해방 후 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미 감리교회 선교부는 1892년부터 수원 공주를 선교지역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27일 <조선그리스도인회보>에 당시 충남 덕산에 교회공동체가 자생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쌀장사를 하던 유제라는 사람이 면천군수로 있으면서 수십만냥에 해당되는 쌀을 내포 십여 고을의 기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기독교에 관한 책들을 나누어 주고 기독교 이치를 묻는 이들에게 설명을 하는 등 나름대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1897년 최병헌 박덕환을 보내어 신앙지도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입교인 수십명과 학습인 수십면을 얻게 되었습니다. 덕산 인근 수촌에는 조원식이 교회를 설립하고 전ㄷ를 하고 있어 역시 최병헌이 지도하였습니다.(대전 충남지역 교회사 연구 55-56쪽) 한편 감리교 선교부는 1892년부터 수원 공주를 선교지역으로 점찍어 두었다가 1896년에 스크렌톤(W C Scranton)을 1898년에는 (Wibur C Swearer 한국명 서원보 드루 신학교 졸업 1898년 4월 내한 1906년 결혼 1912년 건강상 귀국하여 1916.9.16.소천)을 충남지역 선교 책임자로 활동하게 하던 중 1903년 공주에 선교부를 설치하였습니다. 북 장로교회 밀러선교사는 자신의 선교활동을 충남의 홍주(홍성)와 조치원에까지 선교지를 확대하였습니다. 1904년 남장교회 선교부는 침례교회 스테드맨 선교사의 철수하기 전 그와 협상하여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을 인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미 불(W F Bull 부위렴)선교사는 1903년부터 금강을 건너 충남의 서천과 한산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터라 계속 충청남도 남도지역을 남 장로교회 선교회 선교부 관할로 두게 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불 선교사는 하나달간 군산에서 당진까지 충남 서해안을 순회 선교를 떠났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그를 찾아 와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늦은 밤에도 찾아와 말씀을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중에 양반 관료들까지 있었습니다.(대전 충남 지역 교회사 연구 111쪽) 1907년 부터는 얼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구하게 되자 얼(Alexander M Earle 한국명 어아력)선교사가 충남지역 선교를 맡게 됩니다. 따라서 1905년 북 장로교회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은 미 감리교회는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된 남 장로교회와도 1907년 선교지 분활 협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주 아래 오천 보령 남포 홍산 비인 서천 한산 임천 그리고 안면도를 남 장로교회가 그 이북지역은 미 감리교회가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조금 더 남장로교회 선교부 활동을 소개하면, 1911년 얼 선교사가 귀국하자 충남 대부분 지역을 존 멕예천선교사(McEachern john 한국명 매요한. 1911년 내한 군산선교부 소속 Cooper N S와 결혼 부부가 함께 영명학교 멜볼딘 여학교에서 성경교육. 1929년 신병으로 귀국) 맡게 되니 매요한지방이라는 호칭으로 불려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왕 청포 지석 오덕 옥곡교회등 부여지방이 해리슨 선교사가 관할하고 있었는데 청포교회 최상섭목사가 멕예천선교사의 군산 서북시찰로 소속 변경을 청원하여 충남의 장로교회들은 모두 멕예천 선교사의 선교지역이 되었습니다.(대전 충남 지역교회사 연구 113쪽)
서천군 최초의 교회는 종촌면 신검리 신검교회로 일려져 있습니다. 1894년 강규형이 “예숙성경전서”를 어디서 구입하여 숙독을 하던중에 스스로 예스를 믿고 강주희와 더불어 1896년에 군산으로 건너가 전킨 선교사에게 받습니다. 남평리의 솟동네에 민가를 얻어 예배를 드리다가 1901년에는 신검리 조종록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신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산면에 화산 교회(현재 기산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화산리 문화골에 살고 있는 박난수씨는 아들 형제를 낳아 키우던 중 큰 아들은 중병으로 죽고 작은 아들 박종무가 나이 13세 때 큰 아들과 같은 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박난수씨는 구산의 서양 사람이 운영하고 있는 구암 병원에 가보라는 이웃 사람의 말에 1900년 4월 급히 강을 건너 와 입원을 하였습니다. 드류 선교사의 치료를 받은 아들 박종무의 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컷었는가 박난수는 바로 예수를 믿기로 하였습니다. 1901년 10월 불 선교사 일행이 박난수 마을로 와서 나팔을 불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이때 박난수와 함께 김창건 박태윤 양지삼등이 예수를 영접하니 1902년 3월 1일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 163번지에 화산교회를 설립하였던 것입니다. 1904년에는 5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1915년에는 목조건물 3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병 고침을 받은 소년 박종무는 1925년 12월 12일 화산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고 슬하에 5남 3녀를 낳아 그중 3남 박은출 장로는 교육자로 종직하며 화산교회를 섬겨오고 있습니다. 2002년 100주년 기념 예배 시 3대를 섬겨 온 박은출 장로와 이종만 장로에 대한 공로 시상이 있었습니다.
연봉교회는 한국교회역사상 잊을 수 없는 한 훌륭한 신앙의 가문과 목사님 장로님들을 배출하였습니다.
바로 김규배장로의 가문과 김인전 목사님 이창규 목사님입니다.
연봉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화산교회에 연봉리 용산리 구동리 등지에서 십여명의 주민들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 중 최천일 김경림 박명심 임원실 등은 이미 화산교회에서 학습교인이였는데 불 선교사가 한산 동면에도 교회가 설립하겠다 하니 이들이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동면 신도들은 하계동에 사는 이계문씨의 주선으로 그 동리의 전씨 댁 사랑방을 당분간 빌려 마침내 1904년(1906년) 2월 4일 불 선교사, 럽 선교사(Robb, Alexander F 한국명: 업아력鄴雅力 1901년-1935년 동안 캐나다선교사 주로 함경도에서 활동. 2004년 오이곤 담임목사가 약술한 연봉교회 100년사에 원산 함흥 등에서 활동한 럽 선교사가 남 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연봉교회를 방문하였다하였는데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럽선교사는 평양신학교 교수를 하였으며, 1907년 대부흥운동을 이끈 선교사중의 한 사람으로 1908년 함경도 하고읍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교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조사 박화성과 함께 동면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연봉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회 이름이 다리목 교회라 불렀습니다. 전씨 댁 사랑방에서 두 주일 예배를 드리고 다음 주일부터 후포 박영술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인도는 화산 교회의 김성찬 방우경이 다니며 수고하였습니다. 1906년 2월 구동에 있는 초가 5칸을 사서 연봉리 현 위치에 대지를 구입하여 예배당 건축공사를 시작하여 교인들의 헌신으로 3월 13일에 완공을 보았습니다. 1906년 4월 20일 김경림 최천일 박명심 임원실이 북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창규 박영술 강필주 강공선 이원익이 학습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학습교인 중에 장로교회 총회장을 지낸 이창규(1886.7.17.-1982)목사가 있습니다. 이창규는 농업에 종사하는 이경식과 우주 황씨의 장남으로 충남 한산국 동하면 용두리(현 용산리)67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웃에 살고 있는 김규배 선생이 훌륭한 한학자이지만 서울을 자주 왕래하며 이상재 선생등 개화인사들과 교제를 나누어 새로운 세계와 학문에 깊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리 젊은이들은 그가 시국담화를 즐겨 말씀 할 때에 늘 존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며 따랐습니다. 어느 날 김규배 선생은 내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으니 너희도 믿으라는 말에 그대로 순종하여 젊은이들은 한산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였던 것입니다. 김규배 선생의 권면으로 이창규는 김영배 김경림 최천일과 함께 광주에 있는 성경 사경회에 참석하니 그에게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창규는 문중의 핍박이 심해져 매우 고통스런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모친이 나도 예수를 믿을 테니 너무 괴로워 말라 하며 함께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점차 종중의 핍박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1907년 5월 27일 세례를 받고 금산읍교회 쇠실교회 진산읍교회 수영교회 역돌교회 경당리 교회 등에서 조사로 활동하며 교회들을 부흥 시켰습니다. 노회 추천으로 1913년 3월 10일 평양 신학교에 들어가 1918년 5월 13일 졸업하고 동년 8월 28일 제 3회 전북노회(구암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금산지방과 서두교회, 봉동교회 (1918.8.29 –1922.4), 삼례 교회(1922.4.4.-1922. 남
녀반 가림 막을 제거하고 예배하니 이런 일은 전라북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와 1922년 제주 동부교회를 거처 익산 후리교회 위임목사가 되었습니다. 1925년 구암교회에 부임하였고 1948년 군산영명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1959년 9월 통합과 합동이 분열 되는 첫 총회로 서울 연동교회에서 개최된 장로교회 제 44총회에서 통합측 총회장이 되었습니다.(합동은 대전중앙교회 양화석목사가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1907년 봄 신축 예배당 헌당식을 거행 할 때 불 선교사 럭 선교사 미국선교부에서 시찰차 나온 선교부 총무와 함께 참석하고 인근 마을 주민들과 웅포 동연교회 대표들도 와서 성황리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는 나날이 부흥하여 연봉을 위시하여 주변 구동 화춘 지호 등지에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매 주마다 증가하여 100여명이 되었으며 한영학교 학생들이 30여명이 참석 하였습니다. 1909년 2월 7일 김규배가 장로로 장립이 되었는데 이는 충청남도에서 첫 번째 장로장립이라 하겠습니다.(1913년 2월 16일 서울 새문안교회로 이명 하였습니다.)
(극동방송 녹음 용)
최초의 성경이 전래지인 충청남도에 초기 선교활동은 다른 지역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습니다. 1893년 1월 28잏 서울에서 개최된 장로교 공의회에서 북 장로교, 남 장로교 그리고 호주 장로교간에 선교지역을 분할 합의 할 때에 남 장로교가 충청지역과 정라지역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때 드류 선교사가 청주에서 선교활동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도 하고 전킨 선교사가 1894년 4월 두 주간 충청도 지역을 선교답사하기도 하였습니다. 1895년 전킨. 드류 선교사가 신검리 낭평부락 송동네에서 민가를 얻어 예배당을 마련하고 첫 번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정행업목사 충청지역선교역사 한국기독공보기고문) 그러나 전킨과 드류 선교사는 군산에서 그리고 레이놀즈와 테이트선교사는 전주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므로 충청선교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선교의 무주공산 같았던 충청남도에 하나님은 침례교 계통의 선교사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1892년 북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온 밀러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침례교와 장로교간의협정에 따라 충청도는 침례교로 배정되었다. 우리는 침례교가 그들의 선교 활동을 포기할 때까지는 그곳에 들어 갈 수 없었다. 이는 다른 장로교 지역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지 십년이나 지나도록 우리의 진입을 지연시켰다”(충남노회사. 56쪽)
미국 보스톤의 클라렌돈 스트리트 침례교회가 그 교회의 신(S B thing)집사의 딸을 기념하여 “엘라 싱기념선교회”를 조직하고 한국에 7명의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이렇게해서 1895년 폴링부부와 가들라인이 공주를 거처 강경에서 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테드맨 선교사가 오게 되었습니다. 강경 선교활동은 다음기회에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나 폴링, 가들라인 그리고 스테드맨 선교사는 강경선교를 하던 중 1900년 미국의 고든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재정난에 선교를 접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회의 사업은 1889년부터 독립선교사로 활동하던 캐나다 출신 평신도 선교사 펜윅에게 이양되었고, 펜윅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라는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갖추고 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후일 동아기독교(로 개칭되었고, 해방 후 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미 감리교회 선교부는 1892년부터 수원 공주를 선교지역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27일 <조선그리스도인회보>에 당시 충남 덕산에 교회공동체가 자생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쌀장사를 하던 유제라는 사람이 면천군수로 있으면서 수십만냥에 해당되는 쌀을 내포 십여 고을의 기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기독교에 관한 책들을 나누어 주고 기독교 이치를 묻는 이들에게 설명을 하는 등 나름대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1897년 최병헌 박덕환을 보내어 신앙지도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입교인 수십명과 학습인 수십면을 얻게 되었습니다. 덕산 인근 수촌에는 조원식이 교회를 설립하고 전ㄷ를 하고 있어 역시 최병헌이 지도하였습니다.(대전 충남지역 교회사 연구 55-56쪽) 한편 감리교 선교부는 1896년에 스크렌톤을 1898년에는 스위러 선교사를 충남지역 선교 책임자로 활동하게 하던 중 1903년 공주에 선교부를 설치하였습니다. 북 장로교회 밀러선교사는 자신의 선교활동을 충남의 홍주(홍성)와 조치원에까지 선교지를 확대하였습니다. 1904년 남장교회 선교부는 침례교회 스테드맨 선교사의 철수하기 전 그와 협상하여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을 인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미 불 선교사는 1903년부터 금강을 건너 충남의 서천과 한산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터라 계속 충청남도 남도지역을 남 장로교회 선교회 선교부 관할로 두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905년 북 장로교회와 선교지 분할 협정을 맺은 미 감리교회는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된 남 장로교회와도 1907년 선교지 분활 협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주 아래 오천 보령 남포 홍산 비인 서천 한산 임천 그리고 안면도를 남 장로교회가 그 이북지역은 미 감리교회가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천군 최초의 교회는 종촌면 신검리 신검교회로 일려져 있습니다. 1894년 강규형이 “예숙성경전서”를 어디서 구입하여 숙독을 하던중에 스스로 예스를 믿고 강주희와 더불어 1896년에 군산으로 건너가 전킨 선교사에게 받습니다. 남평리의 솟동네에 민가를 얻어 예배를 드리다가 1901년에는 신검리 조종록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신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산면에 화산 교회(현재 기산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화산리 문화골에 살고 있는 박난수씨는 아들 형제를 낳아 키우던 중 큰 아들은 중병으로 죽고 작은 아들 박종무가 나이 13세 때 큰 아들과 같은 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박난수씨는 구산의 서양 사람이 운영하고 있는 구암 병원에 가보라는 이웃 사람의 말에 1900년 4월 급히 강을 건너 와 입원을 하였습니다. 드류 선교사의 치료를 받은 아들 박종무의 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컷었는가 박난수는 바로 예수를 믿기로 하였습니다. 1901년 10월 불 선교사 일행이 박난수 마을로 와서 나팔을 불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이때 박난수와 함께 김창건 박태윤 양지삼등이 예수를 영접하니 1902년 3월 1일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 163번지에 화산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1904년에는 5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1915년에는 목조건물 3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병 고침을 받은 소년 박종무는 1925년 12월 12일 화산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고 슬하에 5남 3녀를 낳아 그중 3남 박은출 장로는 교육자로 종직하며 화산교회를 섬겨오고 있습니다. 2002년 100주년 기념 예배 시 3대를 섬겨 온 박은출 장로와 이종만 장로에 대한 공로 시상이 있었습니다.
연봉교회는 한국교회역사상 잊을 수 없는 한 훌륭한 신앙의 가문과 목사님 장로님들을 배출하였습니다.
바로 김규배장로의 가문과 김인전 목사님 이창규 목사님입니다.
연봉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화산교회에 연봉리 용산리 구동리 등지에서 십여명의 주민들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 중 최천일 김경림 박명심 임원실 등은 이미 화산교회에서 학습교인이였는데 불 선교사가 한산 동면에도 교회가 설립하겠다 하니 이들이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동면 신도들은 하계동에 사는 이계문씨의 주선으로 그 동리의 전씨 댁 사랑방을 당분간 빌려 마침내 1904년(1906년) 2월 4일 불 선교사, 럽 선교사, 조사 박화성과 함께 동면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연봉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회 이름이 다리목 교회라 불렀습니다. 전씨 댁 사랑방에서 두 주일 예배를 드리고 다음 주일부터 후포 박영술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인도는 화산 교회의 김성찬 방우경이 다니며 수고하였습니다. 1906년 2월 구동에 있는 초가 5칸을 사서 연봉리 현 위치에 대지를 구입하여 예배당 건축공사를 시작하여 교인들의 헌신으로 3월 13일에 완공을 보았습니다. 1906년 4월 20일 김경림 최천일 박명심 임원실이 북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이창규 박영술 강필주 강공선 이원익이 학습교인이 되었습니다.
이 학습교인 중에 장로교회 총회장을 지낸 이창규목사가 있습니다. 이창규는 농업에 종사하는 이경식과 우주 황씨의 장남으로 충남 한산국 동하면 용두리(현 용산리)67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웃에 살고 있는 김규배 선생이 훌륭한 한학자이지만 서울을 자주 왕래하며 이상재 선생등 개화인사들과 교제를 나누어 새로운 세계와 학문에 깊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리 젊은이들은 그가 시국담화를 즐겨 말씀 할 때에 늘 존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며 따랐습니다. 어느 날 김규배 선생은 내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으니 너희도 믿으라는 말에 그대로 순종하여 젊은이들은 한산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였던 것입니다. 이창규는 문중의 핍박이 심해져 매우 고통스런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모친이 나도 예수를 믿을 테니 너무 괴로워 말라 하며 함께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점차 종중의 핍박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1907년 5월 27일 세례를 받고 금산읍교회 진산읍교회등에서 조사로 활동하며 교회들을 부흥 시켰습니다. 노회 추천으로 1913년 3월 10일 평양 신학교에 들어가 1918년 5월 13일 졸업하고 동년 8월 28일 제 3회 전북노회(구암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금산지방과 삼례지방 1922년 제주 동부교회를 거처 익산 후리교회 위임목사가 되었습니다. 1925년 구암교회에 부임하였고 1948년 군산영명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1959년 9월 통합과 합동이 분열 되는 첫 총회로 서울 연동교회에서 개최된 장로교회 제 44총회에서 통합측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연봉교회는 1907년 봄 신축 예배당 헌당식을 거행 할 때 불 선교사 럭 선교사 미국선교부에서 시찰차 나온 선교부 총무와 함께 참석하고 인근 마을 주민들과 웅포 동연교회 대표들도 와서 성황리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는 나날이 부흥하여 연봉을 위시하여 주변 구동 화춘 지호 등지에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매 주마다 증가하여 100여명이 되었으며 한영학교 학생들이 30여명이 참석 하였습니다. 1909년 2월 7일 김규배가 장로로 장립이 되었는데 이는 충청남도에서 첫 번째 장로장립이라 하겠습니다.(1913년 2월 16일 서울 새문안교회로 이명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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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김규배장로
위당 김규배(1857.3.20-1914.10.4) 장로는 시대의 선각자 이였습니다. 김규배 장로는 사헌부 감찰 충남 남포현감을 지낸 김태현과 홍패를 3번이나 받은 숙부인 부령 김씨 열현에게서 1857년 3월 20일 한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김규배는 평소 중국에서 유입된 한문 성경을 정독하고 구원의 도리를 자각하여 숙고한 끝에 1900년 예수 믿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선교사나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기독교인이 된 예는 아주 드문 일이라 할 것입니다. 2003년 5월호 가족과 종중의 친척들을 불러 이제부터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구원과 영생의 도리 그리고 민족의 살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김규배는 전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수원군수로 제수를 받았습니다. 수원군수로 부임하던 중 묵상 중에 강한 성령의 체험을 받으니 강하고 위엄 있는 음성이 들리며, “군수 직임을 받지 말라 나라에 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국정은 점점 혼란케 된다”는 음성을 듣게 되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고 수원에 도착하는 즉시 고종 임금에게 관직 사퇴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김규배는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제와 자녀들 온 가족을 다리목교회로 인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이 김인전 김가전으로 우리나라에 손 꼽히는 위대한 애국의 가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일병탄 후 나라를 다시 회복하데 가장 급선무는 교육에 있음을 간파하고 김규배는 1911년 화양면 와초리 자신의 넓운 집을 개방하여 무상으로 중등교육과정을 실시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재정은 김규배장로가 담당하였습니다. 처음 김규배장로의 아들 김인전이 교장을 맡다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임학하자 동생 김규배가 교장을 맡았습니다. 이 시기에 한영학교는 2년제 초등중등교육과정으로 교직원이 5명, 보통과 학생이 10명, 고등과 학생 16명이었습니다.
1909년 군산선교부 보고서에 나온 내용입니다.
“세도 있는 어느 양반이 우리의 선교거점에서 떨어진 곳에 남학교를 세워 그 지역에 있는 명문가의 많은 소년들과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서울에서 교육받은 그의 아들이 그 학교의 교장이 되어 월급도 받지 않고 날마다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젊은이의 영향력으로 그 학교의 많은 소년들과 청년들이 교회로 인도되었다. 이 젊은이 스스로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의사를 표시 한 바 있다." (호남교회춘추, 2006. 11에서 재인용)
당시 한영학교 출신들은 상급학교인 군산 영명학교 특별과(대학과정 2년제)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한영학교를 졸업한 인물들 중에 상당 수가 군산 영명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한 사실을 영명학교 졸업생 명부에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영명학교 특별과 1회 졸업생인 김영배(김규배 장로 5남)를 비롯해서 임진규, 김인선(김가전), 장세환, 유재남등이 한영학교를 졸업하고 영명학교 특별과에 진학하여 1회로 졸업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군산영명학교 교가의 가사를 지은 이수현 목사는 한영학교를 졸업하고 영명학교 특별과에 진학하여 4회로 1915년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또한 군산지방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해방 후 군산 영명학교를 복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이창규목사(개복교회 고김종석목사 사모의 부친)도 한영학교 출신입니다. 1919년 3월 29일 한산 마산시장 3.1운동의 주역이 유재남, 송기면, 임학규, 이근호, 김인두 등으로 모두 김인전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한영학교 출신 이였습니다. (군산제일 고100년사 발췌글) 이외에도 제헌국회의원으로 초대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윤석구 전라북도 초대 도지사 김가전, 그 외에 김정복 김방호 장세환 정재환 유재남 이세직 박중규 김시경 김연배 김달수 김노수 임선 임진규 임종섭 최연만 이건직 윤건병 등 내 노라 하는 인물들이 한영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
와초리에서 한영학교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김옥준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영학교는 남다른 민족교육을 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교가 달랐다. 애국가를 불렀고 운동장에서 공을 방망이로 치던 생각도 난다. 미국인 선교사도 가끔 오고 가고 했다. 학교 건물은 김홍전(김영배의 아들)씨의 집 내에 있었다. 살림집과 사랑채. 학교. 광녕(말 사육장) 등이 함께 있었는데 학교는 기와집이었다. 당시에 학교에서 애국가를 불러서 일본인들이 학교를 못하게 했을 거다. 김인전 선생님은 안경을 쓰고 검정 양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니셔서 아이들이 보면 겁이나서 도망칠 정도로 무서운 분이셨다. 그때 한영학교는 일본인과는 등지게 가르쳤다.”
(* 이상의 글은 김영배선생의 장남인 김홍전 목사가 초안한 것을 군산제일고100년사 집필자가 현대문으로 다듬어 쓴 것이다)
현재 군산에서 하구둑을 건너 장항으로 건너가는 도로 변에 서천군에서는 김인전 목사 기념공원을 아름답게 조성하고 추모비와 흉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규배 장로의 아들들 중 김인전 목사와 김가전 선생에 대해서는 비교적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한영학교 교장으로 후학을 양성한 김규배 장로의 5남인 김영배 선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11년과 1915년 일제는 소위 사립학교 규칙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이 요구와 기준에 못 미치는 사립학교들을 폐교시키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족교육에 온 힘을 쓰던 한영학교는 1916년에 폐교됩니다. 김영배 선생의 아들 김대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일제는 한영학교에서도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도록 강요해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학교 문을 닫겠다 해서 학교를 자진 폐쇄하였다고 합니다. 한영학교가 폐교되면서 이 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군산 영명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영명학교는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명학교 특별과 1회 졸업생이며 한영학교 교장을 했던 김영배는 3.1운동 이후에 군산선교부에서 운영하던 여학교인 멜볼딘 여학교에서 교감으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재직하였습니다. 이시기 멜볼딘여학교의 교장은 미국인 여선교사 엘리자벳 이었습니다. 김영배 선생은 일제의 회유에 타협치 않았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함은 물론 왜정의 창씨개명 강요에도 불응하고 이로 인하여 8.15 민족해방이 되기까지 왜정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 의식에까지 궁하게 살며 어려움을 감내하고 말할 수 없는 곤경을 겪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선생은 자녀에게나 누구에게나 왜정에 항쟁하는 의식을 주장하고 민족적 의식을 가지고 지조를 굽혀서 타협하는 일은 말할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고 지극한 주림에도 끝까지 말없이 참고 견디었던 것입니다. 8.15해방을 맞이하자 선생은 다시 교육계로 나오게 되어 1946년 봄부터 전북김제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이리여자고등학교, 전주북중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1954년 만 70세로 정년 사임케 되자 국가로부터 교육공로상을 수여받았습니다. 그 후 1956년 봄에 서울로 이거하여 차자의 봉양으로 서울 종로구 봉익동 자택에서 한거하던 중 1960년 10월 10일 오전 11시 45분 노환으로 생애를 마쳤습니다.
한영학교 자리는 그새 몇 차례 주인이 바뀌고, 건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어 안타깝게도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는 개인 별장으로 사용되는 중이어서 외부인은 출입에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극동방송 녹음 용)
위당 김규배(1857.3.20-1914.10.4) 장로는 시대의 선각자 이였습니다. 김규배 장로는 사헌부 감찰 충남 남포현감을 지낸 김태현과 홍패를 3번이나 받은 숙부인 부령 김씨 열현에게서 1857년 3월 20일 한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김규배는 평소 중국에서 유입된 한문 성경을 정독하고 구원의 도리를 자각하여 숙고한 끝에 1900년 예수 믿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선교사나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기독교인이 된 예는 아주 드문 일이라 할 것입니다. 2003년 5월호 가족과 종중의 친척들을 불러 이제부터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구원과 영생의 도리 그리고 민족의 살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김규배는 전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수원군수로 제수를 받았습니다. 수원군수로 부임하던 중 묵상 중에 강한 성령의 체험을 받으니 강하고 위엄 있는 음성이 들리며, “군수 직임을 받지 말라 나라에 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국정은 점점 혼란케 된다”는 음성을 듣게 되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고 수원에 도착하는 즉시 고종 임금에게 관직 사퇴서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김규배는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제와 자녀들 온 가족을 다리목교회로 인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이 김인전 김가전으로 우리나라에 손 꼽히는 위대한 애국의 가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일병탄 후 나라를 다시 회복하데 가장 급선무는 교육에 있음을 간파하고 김규배는 1911년 화양면 와초리 자신의 넓운 집을 개방하여 무상으로 중등교육과정을 실시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재정은 김규배장로가 담당하였습니다. 처음 김규배장로의 아들 김인전이 교장을 맡다가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임학하자 동생 김규배가 교장을 맡았습니다. 이 시기에 한영학교는 2년제 초등중등교육과정으로 교직원이 5명, 보통과 학생이 10명, 고등과 학생 16명이었습니다.
1909년 군산선교부 보고서에 나온 내용입니다.
“세도 있는 어느 양반이 우리의 선교거점에서 떨어진 곳에 남학교를 세워 그 지역에 있는 명문가의 많은 소년들과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서울에서 교육받은 그의 아들이 그 학교의 교장이 되어 월급도 받지 않고 날마다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젊은이의 영향력으로 그 학교의 많은 소년들과 청년들이 교회로 인도되었다. 이 젊은이 스스로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의사를 표시 한 바 있다." (호남교회춘추, 2006. 11에서 재인용)
당시 한영학교 출신들은 상급학교인 군산 영명학교 특별과(대학과정 2년제)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한영학교를 졸업한 인물들 중에 상당 수가 군산 영명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한 사실을 영명학교 졸업생 명부에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영명학교 특별과 1회 졸업생인 김영배(김규배 장로 5남)를 비롯해서 임진규, 김인선(김가전), 장세환, 유재남등이 한영학교를 졸업하고 영명학교 특별과에 진학하여 1회로 졸업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군산영명학교 교가의 가사를 지은 이수현 목사는 한영학교를 졸업하고 영명학교 특별과에 진학하여 4회로 1915년에 졸업을 하였습니다. 또한 군산지방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해방 후 군산 영명학교를 복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이창규목사(개복교회 고김종석목사 사모의 부친)도 한영학교 출신입니다. 1919년 3월 29일 한산 마산시장 3.1운동의 주역이 유재남, 송기면, 임학규, 이근호, 김인두 등으로 모두 김인전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한영학교 출신 이였습니다. (군산제일 고100년사 발췌글) 이외에도 제헌국회의원으로 초대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윤석구 전라북도 초대 도지사 김가전, 그 외에 김정복 김방호 장세환 정재환 유재남 이세직 박중규 김시경 김연배 김달수 김노수 임선 임진규 임종섭 최연만 이건직 윤건병 등 내 노라 하는 인물들이 한영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
와초리에서 한영학교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김옥준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영학교는 남다른 민족교육을 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교가 달랐다. 애국가를 불렀고 운동장에서 공을 방망이로 치던 생각도 난다. 미국인 선교사도 가끔 오고 가고 했다. 학교 건물은 김홍전(김영배의 아들)씨의 집 내에 있었다. 살림집과 사랑채. 학교. 광녕(말 사육장) 등이 함께 있었는데 학교는 기와집이었다. 당시에 학교에서 애국가를 불러서 일본인들이 학교를 못하게 했을 거다. 김인전 선생님은 안경을 쓰고 검정 양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니셔서 아이들이 보면 겁이나서 도망칠 정도로 무서운 분이셨다. 그때 한영학교는 일본인과는 등지게 가르쳤다.”
(* 이상의 글은 김영배선생의 장남인 김홍전 목사가 초안한 것을 군산제일고100년사 집필자가 현대문으로 다듬어 쓴 것이다)
현재 군산에서 하구둑을 건너 장항으로 건너가는 도로 변에 서천군에서는 김인전 목사 기념공원을 아름답게 조성하고 추모비와 흉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규배 장로의 아들들 중 김인전 목사와 김가전 선생에 대해서는 비교적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한영학교 교장으로 후학을 양성한 김규배 장로의 5남인 김영배 선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11년과 1915년 일제는 소위 사립학교 규칙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이 요구와 기준에 못 미치는 사립학교들을 폐교시키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족교육에 온 힘을 쓰던 한영학교는 1916년에 폐교됩니다. 김영배 선생의 아들 김대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일제는 한영학교에서도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도록 강요해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학교 문을 닫겠다 해서 학교를 자진 폐쇄하였다고 합니다. 한영학교가 폐교되면서 이 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군산 영명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영명학교는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명학교 특별과 1회 졸업생이며 한영학교 교장을 했던 김영배는 3.1운동 이후에 군산선교부에서 운영하던 여학교인 멜볼딘 여학교에서 교감으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재직하였습니다. 이시기 멜볼딘여학교의 교장은 미국인 여선교사 엘리자벳 이었습니다. 김영배 선생은 일제의 회유에 타협치 않았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함은 물론 왜정의 창씨개명 강요에도 불응하고 이로 인하여 8.15 민족해방이 되기까지 왜정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 의식에까지 궁하게 살며 어려움을 감내하고 말할 수 없는 곤경을 겪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선생은 자녀에게나 누구에게나 왜정에 항쟁하는 의식을 주장하고 민족적 의식을 가지고 지조를 굽혀서 타협하는 일은 말할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고 지극한 주림에도 끝까지 말없이 참고 견디었던 것입니다. 8.15해방을 맞이하자 선생은 다시 교육계로 나오게 되어 1946년 봄부터 전북김제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이리여자고등학교, 전주북중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1954년 만 70세로 정년 사임케 되자 국가로부터 교육공로상을 수여받았습니다. 그 후 1956년 봄에 서울로 이거하여 차자의 봉양으로 서울 종로구 봉익동 자택에서 한거하던 중 1960년 10월 10일 오전 11시 45분 노환으로 생애를 마쳤습니다.
한영학교 자리는 그새 몇 차례 주인이 바뀌고, 건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어 안타깝게도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는 개인 별장으로 사용되는 중이어서 외부인은 출입에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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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극동방송 녹음용 끝)
서천교회 요람(2015)의 교회 연역을 보면 군산 만지산 교회를 다니던 성명 미상의 교인이 1901년 군산리에 서천교회를 설립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천군지(491쪽)에는 1904년 10월 10일 종지교회와 같은 날 설립되었다고 하였습니다. 1903년 작성된 불 선교사의 개인 보고서에 의하면 1903년 보다 그 이전에 서천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러노회 어디에도 서천교회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전북노회 23회의록(1929년 5월28일)에서 서천교회 재건에 대해 논의 한 것과(충남노회사 60-61쪽), 서천교회요람에서 1926년 10월 10일 박상건전도사 부임 기록을 보면 그간 20여 년 동안 교회가 운영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박상건 전도사에 의해 교인이 70여명으로 증가하였고 1932년 8월 29일에 박상건이 서천읍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1933년 박상건전도사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청주제일교회로 떠나니 이재봉 전도사외 여러분이 교회를 맡다가 1937년 8월 순회목사 이춘원목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인도하니 비로소 서천의 중심교회로 발 돋음 하게 되었습니다. 서천읍 교회당 앞에 이춘석 집사와 박대순 집사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50년 9월 27일 공산당원들에게 잡혀가 서천등기소에 감금되었는데 인민군들이 퇴각하며 등기소에 불을 질러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춘석 집사는 서천읍 두왕리 이중현의 막내아들로 1919년에 태어나 불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19세 때 집사가 되어 산천 남전 옥사등지에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었습니다. 박대순집사는 보령시 도화담 교회 박성찬의 장남으로 서천읍교회 청년회 회장을 맡으면서 교회에 헌신하였었습니다. 지난 2014년 12월 서천읍교회는 순교비를 세워 이 두 분의 순교신앙을 기리었습니다.
1904년 10월 10일 서천교회 설립을 인도한 불 선교사는 다시 한산면 종지리로 가서 종지교회 (옛 이름은 종동교회)설립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봅니다.(133쪽)
”서천군 종지동 교회가 설립하다. 선시에 이승인이 남감리교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은 후 감리교회 예배당에 내왕하더니 그후 본 리에 전도하여 신자가 증가하니 예배당을 신건하고 교회를 설립하니라. ”
그러나 종지교회 설립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이야기가 먼저 있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상재(李商在, 1850년 10월 26일 - 1927년 3월 29일)는 서천군(당시 한산군) 한산면에 살던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 이희택(李羲宅)과 밀양박씨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이색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15대손입니다. 그의 가문에는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李塏)가 있고, 조선 중기의 철학자 토정 이지함과 화가 이산보, 선조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5대조 이익태(李益泰)는 한성부좌윤, 고조부 이덕한(李德漢)이 사마를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다시 아버지 이희택이 선공감의 가감역으로 출사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18세때 과거에 응시하지만 당시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부패한 조정의 모습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서울에 이는 동안 우연히 개화파 한사람인 박정양(朴定陽, 1841년 - 1905년 11월)을 만나게 된 것이 그의 일생의 몰표와 방향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상재는 그의 개인 비서로 있으면서 당시 내로라하는 김옥균 홍영식 유길준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1887년 6월 박정양이 조선의 첫 주미국 공사로 임명되어 이상재는 2등공사관으로 1년간 미국 워싱톤에 근무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박정양이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S. G. Cleveland)를 처음 백악관에서 만났을 때 큰절을 올려 대통령을 당혹케한 일이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상재는 감신정변에도 연루되기도 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지금까지 그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1903년 어느 날 밤, 감옥에서 잠을 자던 중 스스로 “위대한 왕의 사자”라는 이가 꿈속에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천사라하겠습니다. 천사는 귀청이 울리라고 큰 소리로 이상재를 꾸짖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나는 몇 년 전 당신이 워싱턴에 갔을 때 성경을 주어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그대는 거절했다. 첫 번째 죄다. 또 나는 그대가 독립협회에 있을 때에도 기회를 주었건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까지 방해했다. 이런 식으로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막았으니 이것이 더욱 큰 죄이다. 나는 그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감옥에 두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다. 그대가 지금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것이 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 이상재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 보았습니다. 그가 많은 기독교 지사들과 만났었고 특히 미국에서 기독교 국가의 발전상을 보았으면서도 전혀 기독교에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연히 감옥 마루바닥 틈새에 종이쪽지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궁금해서 그것을 손톱으로 파 펼쳐 보았습니다. 그것은 처음 보는 글귀였습니다. 맹자나 사서삼경 같은 유학의 글귀도 아니고 불경의 한 대목도 아니고 보닌까 예수교 성경 말씀인 한문으로 씌어진 마태복음 5장 팔복 말씀 이였습니다. 언제부터 그것이 그 바닥 사이에 박혀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오래전 천주교 순교자 한사람이 집어넣은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어 도로 종이 쪽지를 틈새에 집어넣었습니다. 잠시후 다시 꺼내어 읽고 말도 안된다 싶어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차레 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 글귀를 외워 버렸고 그 말씀이 머릿속을 뱅뱅 돌며 생각하는 가운데 아! 깨달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엎드려 회개의 기도를 하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54세 때 일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바로 세우는 원리를 깨닫고 가장 급선무가 이 도를 널리 알리기 위해 교회를 세우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둘째 아들 승인씨를 고향으로 보내어 교회를 세우게 하는 일이 였습니다. 그래서 이상재 본가 바로 뒤에 ㄱ 자 형 교회당을 마련하고 1904년 10월 10일 종지교회의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3.1운동도 배후 지도자로 특히 김규배 장로와 함께 서천 삼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인생 말년 YMCA 청년회의 2대 총무, 신간회 회장 등 독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여 그가 고향에 내려와 연설할 때마다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옛 노인 한 분이 어린시절 이상재 선생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저 한산면 있는 데까지 사람들 줄이 이어졌지”라는 말을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생가 마당에 서 그의 시선을 따랐습니다. 저 멀리 낮은 산이 흐릿하게 보일 뿐 시원하게 너른 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곳을 가득 채운 100년 전 기독교인의 기도 소리와 함성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합니다.(국민일보 2011.5.22 조국현 기자 jojo@kmib.co.kr )
서천군에서는 2007-2011년 총 30억 3천만원을 투입하여 부지면적 9천740평방미터 건물면적 241평방미터 규모로 생가 5채와 유물 전시관 등 ‘월남이상재선생전시관’을 세우고 산책로와 부속건물들까지 조성하여 이곳은 제법 규모 있는 역사탐방지가 되었습니다. 유물전시관 안에는 YMCA와 독립협회, 신간회 등을 통해 민족계몽과 자주독립에 앞장섰던 이상재 선생의 일대기가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 선생이 쓴 서적 132권, 임명장 6장 등 총 244점의 유품도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경 및 교리해설서 등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유품들이 눈에 띄고, 선생이 요한복음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 써내려갔다는 “萬事無求眞理外 一心相照不言中(모든 일의 해결책은 진리 외에서는 찾을 수 없나니,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비춰보면 한마음이어라)”는 시귀가 관람객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종지교회를 말할 때에 이처럼 이상재선생의 영향력이 대단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정작 교회를 지키고 발전시킨 이는 이상재 선생의 처 조카인 유성열 장로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김규배 장로 다음으로 충남에서는 두 번째 장로가 되었고 1915년 제5회 전라노회에 참석하고 1918년 총회총대로도 참가하였으며 1919년 3월 29일 한산 마산의 만새운동 때는 주동자로 공주 감옥에도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1918년 유성렬 장로의 보고에 의하면 종지교회의 상황은 “조사 1명, 장로 1명, 장리집사 1명, 서리집사 3명, 주일학교교사 2명, 주일학생 40명, 세례교인 40명, 학습교인 19명, 원입인 27명, 제일 많이 모인 수 60명, 소학교 학생 30명, 재정 157월”을 기록하였습니다. (대전 충남지역 교회사 연구115쪽)
(극동방송 녹음 용)
서천교회 요람(2015)의 교회 연역을 보면 군산 만지산 교회를 다니던 성명 미상의 교인이 1901년 군산리에 서천교회를 설립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천군지(491쪽)에는 1904년 10월 10일 종지교회와 같은 날 설립되었다고 하였습니다. 1903년 작성된 불 선교사의 개인 보고서에 의하면 1903년 보다 그 이전에 서천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 여년 동안 교회의 존재 여부가 전혀 알려 져 있지 않다가 서천교회요람에서 1926년 10월 10일 박상건전도사 부임 기록을 보면 그간 20여 년 동안 교회가 운영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박상건 전도사에 의해 교인이 70여명으로 증가하였고 1932년 8월 29일에 박상건이 서천읍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1933년 박상건전도사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청주제일교회로 떠나니 이재봉 전도사외 여러분이 교회를 맡다가 1937년 8월 순회목사 이춘원목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인도하니 비로소 서천의 중심교회로 발 돋음 하게 되었습니다. 서천읍 교회당 앞에 이춘석 집사와 박대순 집사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50년 9월 27일 공산당원들에게 잡혀가 서천등기소에 감금되었는데 인민군들이 퇴각하며 등기소에 불을 질러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춘석 집사는 서천읍 두왕리 이중현의 막내아들로 1919년에 태어나 불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19세 때 집사가 되어 산천 남전 옥사등지에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었습니다. 박대순집사는 보령시 도화담 교회 박성찬의 장남으로 서천읍교회 청년회 회장을 맡으면서 교회에 헌신하였었습니다. 지난 2014년 12월 서천읍교회는 순교비를 세워 이 두 분의 순교신앙을 기리었습니다.
1904년 10월 10일 서천교회 설립을 인도한 불 선교사는 다시 한산면 종지리로 가서 종지교회 (옛 이름은 종동교회)설립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봅니다.(133쪽)
”서천군 종지동 교회가 설립하다. 선시에 이승인이 남감리교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은 후 감리교회 예배당에 내왕하더니 그후 본 리에 전도하여 신자가 증가하니 예배당을 신건하고 교회를 설립하니라. ”
그러나 종지교회 설립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이야기가 먼저 있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상재(李商在, 1850년 10월 26일 - 1927년 3월 29일)는 서천군(당시 한산군) 한산면에 살던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 이희택(李羲宅)과 밀양박씨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이색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15대손입니다. 그의 가문에는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李塏)가 있고, 조선 중기의 철학자 토정 이지함과 화가 이산보, 선조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5대조 이익태(李益泰)는 한성부좌윤, 고조부 이덕한(李德漢)이 사마를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다시 아버지 이희택이 선공감의 가감역으로 출사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18세때 과거에 응시하지만 당시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부패한 조정의 모습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서울에 이는 동안 우연히 개화파 한사람인 박정양을 만나게 된 것이 그의 일생의 몰표와 방향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상재는 그의 개인 비서로 있으면서 당시 내로라하는 김옥균 홍영식 유길준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1887년 6월 박정양이 조선의 첫 주미국 공사로 임명되어 이상재는 2등공사관으로 1년간 미국 워싱톤에 근무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박정양이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S. G. Cleveland)를 처음 백악관에서 만났을 때 큰절을 올려 대통령을 당혹케한 일이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상재는 감신정변에도 연루되기도 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지금까지 그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1903년 어느 날 밤, 감옥에서 잠을 자던 중 스스로 “위대한 왕의 사자”라는 이가 꿈속에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천사라하겠습니다. 천사는 귀청이 울리라고 큰 소리로 이상재를 꾸짖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나는 몇 년 전 당신이 워싱턴에 갔을 때 성경을 주어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그대는 거절했다. 첫 번째 죄다. 또 나는 그대가 독립협회에 있을 때에도 기회를 주었건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까지 방해했다. 이런 식으로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막았으니 이것이 더욱 큰 죄이다. 나는 그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감옥에 두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다. 그대가 지금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것이 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 이상재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 보았습니다. 그가 많은 기독교 지사들과 만났었고 특히 미국에서 기독교 국가의 발전상을 보았으면서도 전혀 기독교에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연히 감옥 마루바닥 틈새에 종이쪽지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궁금해서 그것을 손톱으로 파 펼쳐 보았습니다. 그것은 처음 보는 글귀였습니다. 맹자나 사서삼경 같은 유학의 글귀도 아니고 불경의 한 대목도 아니고 보닌까 예수교 성경 말씀인 한문으로 씌어진 마태복음 5장 팔복 말씀 이였습니다. 언제부터 그것이 그 바닥 사이에 박혀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오래전 천주교 순교자 한사람이 집어넣은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어 도로 종이 쪽지를 틈새에 집어넣었습니다. 잠시후 다시 꺼내어 읽고 말도 안된다 싶어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차레 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 글귀를 외워 버렸고 그 말씀이 머릿속을 뱅뱅 돌며 생각하는 가운데 아! 깨달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엎드려 회개의 기도를 하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54세 때 일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바로 세우는 원리를 깨닫고 가장 급선무가 이 도를 널리 알리기 위해 교회를 세우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둘째 아들 승인씨를 고향으로 보내어 교회를 세우게 하는 일이 였습니다. 그래서 이상재 본가 바로 뒤에 ㄱ 자 형 교회당을 마련하고 1904년 10월 10일 종지교회의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3.1운동도 배후 지도자로 특히 김규배 장로와 함께 서천 마산장터 삼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인생 말년 YMCA 청년회의 2대 총무, 신간회 회장 등 독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여 그가 고향에 내려와 연설할 때마다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옛 노인 한 분이 어린시절 이상재 선생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저 한산면 있는 데까지 사람들 줄이 이어졌지”라는 말을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생가 마당에 서 그의 시선을 따랐습니다. 저 멀리 낮은 산이 흐릿하게 보일 뿐 시원하게 너른 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곳을 가득 채운 100년 전 기독교인의 기도 소리와 함성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합니다.
서천군에서는 2007-2011년 총 30억 3천만원을 투입하여 부지면적 9천740평방미터 건물면적 241평방미터 규모로 생가 5채와 유물 전시관 등 ‘월남이상재선생전시관’을 세우고 산책로와 부속건물들까지 조성하여 이곳은 제법 규모 있는 역사탐방지가 되었습니다. 유물전시관 안에는 YMCA와 독립협회, 신간회 등을 통해 민족계몽과 자주독립에 앞장섰던 이상재 선생의 일대기가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 선생이 쓴 서적 132권, 임명장 6장 등 총 244점의 유품도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경 및 교리해설서 등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유품들이 눈에 띄고, 선생이 요한복음을 읽다가 영감을 얻어 써내려갔다는 “萬事無求眞理外 一心相照不言中(모든 일의 해결책은 진리 외에서는 찾을 수 없나니,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비춰보면 한마음이어라)”는 시귀가 관람객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종지교회를 말할 때에 이처럼 이상재선생의 영향력이 대단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정작 교회를 지키고 발전시킨 이는 이상재 선생의 처 조카인 유성열 장로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김규배 장로 다음으로 충남에서는 두 번째 장로가 되었고 1915년 제5회 전라노회에 참석하고 1918년 총회총대로도 참가하였으며 1919년 3월 29일 한산 마산의 만새운동 때는 주동자로 공주 감옥에도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유성열 장로는 전북노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노회 발전에 기여를 하였습니다. 1918년 유성렬 장로의 보고에 의하면 종지교회의 상황은 “조사 1명, 장로 1명, 장리집사 1명, 서리집사 3명, 주일학교교사 2명, 주일학생 40명, 세례교인 40명, 학습교인 19명, 원입인 27명, 제일 많이 모인 수 60명, 소학교 학생 30명, 재정 합 157원 교회용비 19원 15전 조사월급 19월 50전 외지선교비 2원 내지 전도비 6원 95전 건축수리비 4원 90전 학교용비 100원 구제비 20전 노회비 3원 60전 잡비 70전”을 기록하였습니다.(충남노회사 79쪽) 종지교회의 학교용비가 다른 예산 보다 월등하게 많이 책정한 것을 보면 그만큼 후세대 교육에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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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극동방송 녹음용 끝)
1907년 설립된 금당교회의 출발은 애국의 신앙인 조남명(淸河 趙南明) 장로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조남명 장로는 1874년 9월 24일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에서 한 학자인 조찬구(趙粲九) 선생과 남양 洪氏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유년시절 영재소리를 듣는 소년으로 향시에 최연소 장원에 합격하니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는 이웃의 이상재 선생과 선교사들과 교제하며 선각자의 정신으로 봉건사상을 타파하고 신학문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개화의 물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화산교회에 출석하였고, 학당(淸河堂)을 세워 주민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기도 하다가 1907년 유성열과 함께 자기 마을에 금당교회를 설립을 하였습니다. 조남명은 열성을 다하여 복음 전도에 매진하다가 191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후에 부통령이 된 함태영과 함께 공부를 하던 중에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교회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1919년 3월 4일 군산 삼일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면서 군산영명학교 유재경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3월 6일과 7일에 이근호 한백희 최경진 이경욱 정희석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밀이 누설되어 체포되어 서천경찰서로 압송 되던 중에 삼산리 시장 마침 장날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 있는 앞에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었습니다. 이에 서천군민들이 분기탱천하여 송기면, 유성열, 사위 박재엽, 제자 이근호등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2000여명이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 대대적인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남명은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어 동년 4월 1일 조선 총독부 판사 引地寅治郞의 法廷에서 “被告의 所爲는 총독부 保安法違反事犯으로서 懲役刑(2년이하)을 받겠느냐, 朝鮮 笞刑令에 의한 笞刑을 받겠느냐?”는 요구에 조남명은 “本人은 朝鮮人으로서 어찌 너의 나라法을 따를 수 있겠느냐! 笞刑을 받겠다”고하여 처음엔 90대를 언도받았으나 태도가 불순하고 뉘우침이 없다하여 30대를 더 받게 되니 조남명은 거의 죽음에 이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가족과의 간호와 교인들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구해 주시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조남명은 1923년 4월 금당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하고 강도사로 목회에 전념을 하며 1924년 3월 “기도와 전도와 성경공부와 연보하는 것이 전진되어 예배당 10 간을 새로 짓게 되었다” 라고 노회에 보고하였습니다. (대전 충남 교호사연구 134쪽). 그러나 교회짓기에 빚을 청산하지 못하다가 1928년에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는 더욱 발전되어 1938년 교인수가 38명이였는데 1930년에는 62명으로 부흥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받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늘 조남명 장로는 괴로워하며 지내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사람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니 일제의 감시와 박해가 날로 더 심해져 갔습니다. 마침내 고향을 떠나 1937년 서울로 상경하여 여러 애국지사들과 교제하며 시를 짓기도 하고 교회 찬송가 가사를 작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조남명 장로는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47년 7월 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