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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주제강연)

최태용 목사의 사상과 그 신학적 배경에 대하여

증경총회장 목사 전 병 호

 

1장 최태용 삶의 궤적(軌迹)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원구단(園丘壇)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반만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고종황제는 이 날에 나라의 번영과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였지만 이로부터 12년 후, 열국으로부터 불어오는 광풍에 나라의 기둥이 휘청거리다가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에게 삼천리강토를 강탈당하는 참담한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어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고 한창 축제의 분위기가 온 나라에 전해지던 그러한 시절, 1897년 12월 18일(음11월25일. 토) 최태용은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 동원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2년 후 1950년 9월 11일 북한 공산주의자들 손에 체포되어 납북되던 중 피살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최태용의 반백년의 삶은 민족의 애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어 기도하고 또 한편으로 민족을 바라보며 발이 부르트고 입술이 터지도록 ‘새로워지자!’고 외치며 살아갔던 삶이었습니다. 나는 최태용의 삶을 한마디로 초극(超克)이란 말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제부터 그 연유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최태용의 삶은 기왕의 소개된 책들에 의해서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연대순으로 3기로 나누어 말씀 드립니다..

 

1. 초기는 1897년부터 1925년,

2. 중기는 1925년부터 1945년,

3. 말기는 1945년부터 1950년

 

1. 초기는 최태용의 출생과 5년 여 간에 걸쳐 신 농업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고, 수업농업학교 재학시절 기독교 입교하여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며 복음사명자의 부름을 받아 연희전문학교 신학부에 등록을 하던 초년 시절입니다. 그는, 당시 선교사들에 대한 회의로 내촌감삼의 영향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후 귀국하여 당시 조선교회의 암담한 현실에 1925년 12월 6일 조선교회의 신앙혁명 선언을 외치었습니다.

 

2. 중기는 1925년 6월 10일-1927년 3월 “천래지성”을 창간하여 문서를 통한 신앙혁명 사상을 전개하였으며, 다시 1929년 2월6일-1939년에 “영과 진리”라는 개인잡지를 등사판으로 작성하여 조선교회의 혁신과 민족구원의 신앙으로 “영적 기독교론”을 피력하던 시절입니다.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조성된 근본주의 신학에 도취되어 있던 조선의 교회는 최태용의 개혁열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되었을 뿐 아니라 배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디 내촌감삼의 무교회주의에 동조하였던 최태용은 이에 벗어나 비교회주의 운동 즉 현실교회는 부패코 말라 교회로서의 본질이 죽어 버렸기 때문에 새롭고 산 생명의 교회 운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당시 기성교회로부터 배척당하게 되자 1935년 12월 21일 최태용은 3대 표어를 내 걸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새로운 교회로 복음교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3대 표어는 1)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2)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3)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입니다. 물론 이 표어는 현재 복음교회 성도 중에 모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3대 표어가 복음 교회 교인들의 신앙 속에 용해되어 있는가? 묻게 됩니다. 복음교회 설립 후 당시 식민지 하의 조선 땅에 민족구원의 교회로서 정착하고자 하는 최태용 목사와 초대교회 복음 성도들의 열정과 현명적인 헌신이 참으로 감격의 연속이었습니다.

 

3. 말기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격의 환호성과 분단으로 인한 분노의 함성이 들끓고 있던 그 때에 최태용 목사는 역사의 현장으로 나갔던 때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53세 그의 민족 구원과 새 나라 건설의 열망은 급기야 산화되어, “나를 따라 오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처럼, 오늘의 복음교회 성도들은 그의 꿈을 이어받았다고 하겠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았듯이 우리 또한 최태용 목사의 옆구리의 분단의 상처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시선이 멈추는 곳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민족분단의 현주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일찍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민족의 산하를 다니면서 그에게 주신 복음과 생명신앙의 사명을 펼치신 최태용 목사님을 바라보신 하나님을, “힌네 엘로헤이켐(사40:9)” “보라, 너희 하나님이 여기계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 또한 바라봄으로 그 사명을 이어 받아야 할 것입니다. 최태용 목사의 생애 3기에 대하여 제 3장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2장 최태용 목사의 사상과 신학의 배경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이 나라 백성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인한 억압과 수탈에 시달렸고, 해방의 기쁨도 잠시간 허리가 잘려 신음하다 급기야 삼국시대 이래 1,000년 만에 처음으로 민족 간에 전쟁을 치루었으며, 우리는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영원하기를 기원하던 한반도는 이데올로기로 인한 찔레와 엉겅퀴가 뒤엉켜 있는 인고의 세월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최태용 목사는 때로는 민족의 아픔을 몸에 짊어진 체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때로는 전국교회를 순회하며 사자후의 생명신앙 진리지식을 외치었고 또 해방 후 어지러운 정치 바람을 맞바람으로 부딪쳐 나갔습니다. 광복 후 민족이 나아갈 길에 앞장섰던 최태용 목사의 삶은 성령의 불에 살라진 불꽃처럼 살다가 간 삶이었습니다. 1950년 9월 패주하던 공산군에 붙들려 북으로 끌려가던 중 급기야 그 어느 야산을 제단삼아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그 시에 그의 모습이 어떠하였을까? 그 마지막 시간에 그는 어떤 기도를 하였을까? 짐작할 수 없지만,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신 마지막 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눅23:34)”가 아닐까 합니다.

 

기독교는 성경의 교훈과 그 가르침을 따라 여러 갈래로 교파가 갈라졌습니다. 장로교회는 칼빈의 신앙과 신학이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감리교회는 죤 웨슬레의 신앙과 신학이 그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복음교회는 창립자 최태용목사의 신앙과 신학-생명신앙, 영적 기독교론과 민족구원을 그 기저로 삼는다면 최태용 목사는 처음부터 무엇을 바라보며 어느 길을 가고자 하였을까?를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신앙과 신학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사명에 그가 몰입하였을까가 궁금하게 됩니다. 나는 이 궁금증에 몰려 최태용 목사님의 뒤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혹자에게는 창립 80주년의 역사가 지나가는데, 언제까지 최태용을 말해야 하는가? 지나간 사람들을 말하는 일이 마치 노인들의 왕년에 하면서 옛날이야기를 들먹거리는 꼰대의 말처럼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천 여 년간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면서도 그들은 오경이야기를 수없이 전하고 또 전해 오면서 오늘의 이스라엘을 세웠고 아직도 회당이나 각 가정에서는 여전히 아브라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였던가요? 복음교회의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말할 수 없기에 불가불 또 최태용을 여러분에게 말해야하는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최태용 목사의 신앙과 신학과 민족애국의 얼은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그에게서 발아 되었는가? 그의 생에 분기에 따라 4부류로 나누어 말씀드리려 합니다.

1. 초기에 6년간 농업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2. 중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우치무라 간조(내촌감삼)의 무교회주의를 따랐고,

3, 일본신학교에 들어가 복음적 기독교를 주창한 다카구라 도쿠타로(高倉德太郞1 885-1934) 아래에서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4. 당시 일본 철학계의 선두에 서있던 일본 교토철학과 근대 초극론에 영향을 받아 광복 후 새로운 나라와 민족혁신에 노력하게 됩니다.

 

 

(1) 1기 1897년부터 1925년간의 최태용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

 

1. 6년간의 농업교육

1876년 개항 이후 고종은 청나라와 일본에 수신사, 영선사, 조사시찰단 등 문물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변화의 모습들을 살펴 조선의 개화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1880년 이후 통리기무아문 혹은 내무부 등 특별기구를 설치하면서 농업진흥정책을 실시하여 선진적 농업 기술을 실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수리시설의 축조와 개간을 비롯하여 서양의 선진적 농업기술의 수용 등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1883년 10월 1일에 통리군국사무아문을 통하여 전교를 내려 농업진흥정책을 제시하였지만, 19세기 말, 조선은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탐관오리들의 고질적인 가렴주구로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고통스러워 갔습니다. 더욱이 오랜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흉년이 계속되었고 전염병으로 농민들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여기저기 농민들의 항쟁이 각 지방에서 일어나 급기야 198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에 이르렀습니다.

동학농민혁명군에게 개틀링 기관포를 발사하여 진압한 일본군이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승리한 이후 그야말로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독무대가 되어 일본인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녔습니다. 그중에 일본의 상인들이 조선의 농촌을 돌아다니며 곡물수매에 주력하였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자국의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곡물을 대량 수입해 감으로 인해 조선내의 곡물 가격이 폭등 되게 되니 도시 빈민층과 빈농층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습니다. 나아가 일본 상인들은 곡물수입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의 농토를 마구잡이로 강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농민들은 자구할 능력을 잃어 속절없이 일본인들 손에 농토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조선 총인구의 80%인 농민들은 가뭄, 전염병, 관리들의 수탈과 일본인들의 강탈 등으로 나날이 살길이 막막해져 갔습니다.

조선 백성들이 살아가는 가장 급선무는 농촌 살리기이며 새로운 농업기술을 가르치는 일임을 알게 된 1895년 고종은 교육조서를 내려 대한제국 농상공부의 상공학교(1899. 6.), 동 농상공학교(1904. 6.), 동 농림학교(1906)를 세워 근대 농업교육을 실시하게 하였고, 이런 농업교육이 일제하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구자옥 서둔벌의 근대농학 교육과 과학기술 전개 2010, vol.9, no.1, pp. 97-136. 한국농업사학회)

 

1912년 9월 최태용 나이 14세 때 고향에 있는 영흥공립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면서 그 후 6년간 새로운 농업교육을 받게 됩니다. 최태용목사가 1935년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조선복음교회 포교관리자 설치계의 이력서를 보면, 1913년 9월에 영흥공립간이농업학과에 입학하여 전 과정을 수료 한 후, 1914년 4월 조선총독부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7년 3월에 졸업합니다. 그 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 신학과에 입학을 하는데,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농학과가 설치되면서 학생들 실습교원으로 농과생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 후 최태용은 일제 치하의 조선을 구하는 첫 번째 사명이 한국교회가 먼저 정신적으로 서구 교회로부터 독립하는 일이고 그래야만 일제로 부터 빼앗긴 땅을 되찾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먼저 한국교회의 개혁과 생명신앙을 부르짖었습니다. 어린시절 農業保國을 꿈꾸었던 그는 1945년 광복 후 독립된 나라의 할 일은 농촌의 발전과 농민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농민훈련원과 농회(농협협동조합 전신)를 설립하여 이끌었습니다. 이일에 대해서 다음 4장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2) 2기 1925년부터 1945년의 최태용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

 

2.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

최태용의 초기 기독교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라고 라고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입니다. 1921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간 최태용은 동경영어학교를 다니면서 우치무라 문하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김교신, 함석헌, 유석동, 송두용 등이 우치무라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후에 최태용은 말하길 “그때에 나는 저의 안에 있고 저는 나의 안에 있는 것 같아서 저의 말은 나의 마음의 바닥까지를 울리는 것이었다.”고 술회 한 바 있습니다. 최태용은 과연 우치무라 간조에게 무엇을 배워 그의 신앙의 바탕을 삼았는지 알기 위해서 우치무라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20세기 초반 일본의 사회사상과 기독교의 변혁을 이루었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 변혁자, 시대의 예언자로, 일본을 사랑했던 애국자로, 비전론자(非戰論者)로, 성서연구자로 근대 일본 형성과정에 있어서 일본 국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1861년 3월 23일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무사로서의 교양에 뛰어나고, 또 유학자였으므로 아들에게 몸소 유교윤리를 가르쳤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내게로 중국의 성현의 정치도덕적인 교훈은 잘 이해되지 않았으나, 유교의 대강의 기분은 깊이 내속에 파고들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최태용이 16세에 수업농업학교에 들어갔던 것처럼, 우치무라 간조는 16세에 북해도 농과대학의 전신인 삿뽀로 농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당시 개화 일본의 농업발전을 위하여 서양학술의 수입과 연마를 목표로 설립된 학교로서, 초대교장은 미국인 윌리암 클라크(William Clark 1826-1886) 이였습니다. 그는 식물학자요 청교도주의의 신앙인으로서, 학교당국과 학생들 스스로 만든 일체의 교육방침과 규약을 없애고, 성서를 잘 배우고 성서대로 살도록 온 힘을 다하여 학생들의 전인교육에 힘썼으며, 청교도 신앙을 지도하였습니다. 그가 떠나면서 남긴 “Boys, be ambitious like this oldman"라는 명언을 남기고 말등에 올라타 숲사이로 살아져 갔습니다. 클라크 교장이 떠난 다음에 입학한 우치무라 간조이지만 그에게 미친 감화와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습니다.(흔히 ambitious를 번역하는데 일본에서는 ‘少年よ大志を抱け’ 즉 ‘포부를 가지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삿뽀로 농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우치무라 간조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에드윈의 주립 아동 병원 백치원에서 간호인으로 봉사하면서 8개월을 보내고 매사추세츠에 있는 애머스트(Amherst College)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2년 동안 사학, 독일어, 히브리어, 성서문학, 광물학, 지질학, 심리학, 윤리 철학등 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한 결정적인 회심을 얻게 됩니다. 이후 그의 전 생애와 사상을 통한 기독교적인 삶과 사회개혁은 그의 이 회심의 계기로 이루어 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1886년 3월 8일의 일기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극히 중대한 날, 그리스도의 죄의 용서의 힘이 오늘처럼 확실히 게시된 일 은 없었다. 오늘까지 내 마음을 고민시켰던 모든 의문의 해결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위 에 있다. 그리스도는 나의 부채를 낱낱이 지불하시고, 나를 조상의 타락이전의 청정과 순결로 되돌려 주셨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나의 의무는 예수를 믿는 일이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애모스트 대학 졸업 후 4개월 동안 하트포드 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공부를 하던 중, 3년 반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1888년 일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귀국하자마자 니카타 현의 호쿠에쓰 가칸학교의 교장으로 초빙 받아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기독교 주의의 학교였으나 선교단체에서 독립하여 지역의 유지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그의 오랜 친구 벨에게 취임시의 기대와 포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에 있어서의 이런 종류의 처음 경험으로서, 정부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떠한 외국 선교단체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본토인들에 의해서 경영되어야 한다. 잘 아는 것과 같이 나의 主義는 기독 애국(Christo-national)이며, 이것으로 내 나라에 있어서의 어떤 조직도 그것이 기독교가 아니며, 또한 동시에 애국이 아닌 것에는 나의 동정은 극히 조금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부임하자 먼저 학칙을 정하고, 그 목적을 고귀한 德義와 애국구민주의로 정하고, 선교단체로부터의 원조를 거부하고, 동양도덕을 중요시하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이 학교에서 선교사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 독립의 기독교 교육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일본의 재래문화를 존중하고, 그 도덕적 관념에 의하여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기독교를 믿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충돌을 불러 일으켜,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반대를 받아 단지 4개월 만에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우치무라 간조의 생애에 있어서의 싸움의 하나는 선교사 및 기성 교회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기독교신앙에 대한 싸움임과 동시에 애국심이 없는 신앙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였습니다.(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일본의 사회의식 개혁. 전 석재 백석대 선교학 교수)

 

1891년 뜻밖에 우치무라 간조의 不敬事件이 일어났습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제일고등학교(도쿄대학 교약학부의 전신)의 교사로 세계사 강의하고 있을 무렵인 1891년 1월, 학생일동이 천황의 서명이 있는 교육칙어에 경례를 했지만 그는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치무라 간조를 불경자, 불충국, 國敵, 외국의 노예라고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믿는 기독교까지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경자로 비난 받은 우치무라 간조는 그 후에 경례를 친구에게 대행시켜 교회의 일부로부터 비난받았습니다. 실은 우치무라 간조는 자신을 불경자라 부르는 일에 억울한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 애국을 외치고 충군을 강조하여 오던 터였습니다.

1889년 萬世一系 천황이 지배하는 대일본제국의 헌법이 발포되어 일본의 방향은 천황에 의한 절대 국가, 일본전통 회기로 ‘일본주의’로 급선회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국가를 경시하고 충효를 존중하지 않는 종교라고 공격하였습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우치무라는 義戰이라하여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노일전쟁에 대해서는 비전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우찌무라는 청일전쟁이 조선과 일본의 독립을 위해 일어난 暴虐에 대한 義戰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은 허락하지 않았고, 청일전쟁의 결과는 우찌무라로 하여금 전쟁의 정당성에 의문을 느끼게 하였다. 노일전쟁(1904-1905)에 대해서는 경험을 통해 비전론을 전개 하였다. ”(도히 아키오 ‘우치무라 간조’ 이도시소오 시리즈, 교단출판 1962. 사와 마사히코, 일본기독교사, 1995, 대한기독교서회. p.111)

우치무라 간조는 노일 전쟁에 대해 비전론을 주장하였지만, 정작 전쟁이 개전되자 그것을 거의 주장하지 않고 자신의 제자가 징병과 납세를 거부하자 그것을 금지 시켰습니다. 더욱이 일본 해군의 승리의 보도를 듣고는 “제국 만세”를 주변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큰소리로 삼창을 하였습니다.(후루야 야스오. 오키 히데오 공저. 권영국 옯김. 1994 대한기독교서회. p.155) 우치무라가 친구 야마카타 이소(山縣五十雄)에게 보낸 영문편지에서 “An inconsistent man I am!, 모순되고 있네요,”(ibid. 156) 그는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이었습니다.

1926년 ‘성서연구’에 “나의 애국심에 대하여”라는 단문에서 말하기를,

“나는 청년시대에 언제나 나의 외국친구에게 말했었다. 나에게 사랑하는 두 개의 J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수(Jesus)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Japan)이라는 것이, 예수와 일본을 비교해서 나는 어느 쪽을 보다 많이 사랑하는가, 나는 알 수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빠지면 나는 사는 보람이 없게 된다. 나의 일생은 둘에게 바치려고 하는 열심히 위로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본은 결코 예수가 나를 사랑해준 것 같이 사랑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역시 일본을 사랑한다. 부득이한 사랑이란 이런 사랑일 것이다. (ibid. 140, 142)”

우치무라 간조는 자신의 기독교를 “무사도 위에 접목된 기독교”라고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플러스라는 의미의 접목이 아니라 그의 삶과 신앙과 저술을 통해서 본 우찌무라 간조는 武士의 극기적인 정신적 기반위에 심겨진 기독교로의 회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와 일본의 사회의식 개혁, 전석재 백석대 선교학 교수)

 

1944년 일본 기독교단이 자칭 대동아공연권의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서한을 공포하였는데, 이 내용 중에 우치무라 간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서양문명의 당당한 수입과 동경에 지배하고 이는 시대 풍조 속에서, 세계는 필경 기독교로만 구원된다. 그러나 무사도 위에 접붙인 기독교로서만 구원된다고 갈파하였다. 그는 드디어 서양, 특히 미국 선교사의 세력과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는 신앙을 비 신앙이라고 배척하고, 선교사가 하루 속히 일본에서 물러가고 일본인의 손으로 일본인 자발적인 기독교의 필요를 부르짖은 선각자였습니다.... 대동아시아에서는 대동아시아적 전통과 역사와 민족성에 알맞은 대동아시아적 기독교가 수립해야 된다고 합니다.”(일본기독교사. pp.194-195)

비전론을 주장한 우찌무라 간조는 끝내 일본제국주의 자들에게 핍박받고 있는 조선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는 일본 무사도 위에 선 민족주의자로서 철저한 엠비발렌트(ambivalent. 스위스 심리학자 Eugen Bleuler 1857-1939에 의해 사용된 개념. 조현증shinzophenia 용어fmf 처음사용. 조현증 특징: association사고연상, affectivity감정 ambivalence양가감정 austism자폐)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rist.”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우치무라의 조선인 수제자라고 불려 질 정도로 그에게 심취하였기에 최태용의 신학과 사상에서 우치무라의 신학과 사상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당시 조선교회와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에서 우치무라를 보는 듯하며 특히 우치무라의 일본인 제자인 후지이 타케시(藤井武)의 독설에 섞인 반 선교사 글에 反芻해 봅니다.

 

최태용은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 이후 우치무라를 서서히 떠나 귀국하며 나름대로의 신앙혁신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왜 치태용은 우지무라의 슬하에서 떠났는가? 김교신으로부터 ‘알루미늄 냄비’같다고 그의 변함을 비난한 말을 들은 그는 “친구여 나의 잦은 변동에서 나의 안에 있는 불변의 순종을 보아주기를 바란다”(영과진리 7호 1929. 7.10. p.31,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 p.132)고 말한 최태용은 왜 그처럼 따르던 우치무라를 떠나 귀국하였을까? 분명한 최태용의 변론을 들을 수 없지만,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사건 때에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을 목도하였으며, 특히 선생인 우치무라가 자경단 일원으로 활동한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우치무라의 다른 조선인 제자들이 여전히 무교회주의 운동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태용은 결코 일본 무사도 기독교인으로 일본민족주의자인 선생을 더 이상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치무라는 J J 를 주장하지만, 최태용은 C C Chosen과 Crist를 외치며 민족 구원 신앙을 외치었던 것입니다. 최태용은 “하나님이여 조선을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시를 발표하면서, 일본 기독교인으로서 아니라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우치무라가 일본을 사랑하는 무사도 애국적 신앙으로 선교사를 비판 하였지만, 최태용은 국수주의적으로 반선교사를 말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근본주의 신학 고정주의적 율법화한 교회에 대한 신앙개혁적 반대 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우치무라의 무교회주를 초극하여 조선을 사랑하는 조선인으로 천래지성, 생명신앙, 영적기독교로만이 민족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나름대로 애국애족의 신앙을 나타내었다 하겠습니다.

 

1936년 1월 YMCA강당에서 ‘복음교회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최태용목사는 말하기를 “서양선교사의 자선적 교회에 만족하여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전 인격이 뒤집히는 참 신앙을 하고 있지는 아니하는 것이다.... 조선인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라면 저희에게서 선교사의 자선교회 분위기를 일축하고 나타나는, 조선 사람 자신으로의 교회는 일어날 것이다. ...武勇無用이다. 조선인 신자로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이뤄보지 못한다니 말이 되는가”(복음교회50년 약사 p.41)

 

 

3, 일본신학교의 다카구라 도쿠다로(高倉德太郞)의 복음적기독교

최태용은 ‘천래지성’를 통해 문서 신앙개혁운동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신학을 배우기 위하여 1928년 메이지신학원(明治神學院)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 신학사상에는 우치무라 간조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가 영향을 끼쳤다고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신학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당시 일본 신학계는 관서의 동지사신학교와 조합교회의 세력이 크며, 관동지역에는 메이지신학원과 일본기독교회의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관동지역은 관서에 비해 교회주의가 강하며 대체로 보수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지역에는 일본교회의 중추를 이룬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 일본신학의 전환기를 가져온 다카구라 도쿠다로, 일본 교회신학 형성에 노력한 구마노 요시다카(熊野義孝)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1920년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관동지역 일본 신학계에 변증법 신학이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1924-1925년간에 후쿠다 마사코(福田正俊)가 브루너와 바르트를 일본에 소개하였고, 1932년에 구마노 요시다카의 “변증법적 신학개론”이 출간되고, 구와다 슈데이(桑田受延)의 “변증법적 신학(1932년)”이 나오게 됩니다.(일본 기독교사. pp.164-165) 이런 일본신학교에 최태용이 유학을 와 공부를 하게 됩니다.

특히 당시 메이지 신학교의 교장이 다카구라 도쿠다로로서 수많은 신학도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카구라는 아직 바르트나 브룬너에 대해서는 가까이 하지 못하였으나 바르트 이전의 바르트라고 불리는 포사이드(P.T. Forsyth 1848. 5.12-1921 11.11)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기독교의 3대 조류가 있는데, “복음적 기독교”, “문화적 기독교”, 그리고 “사회적 기독교”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카구라는 정통적인 복음주의자 이였던 우에무라 마사히사의 제자였지만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신학의 목적”이라는 스승(동경신학사의 강의 ‘계통신학’ 1장)과 달리 개인의 내면적 자아문제에 몰두한 신학자였습니다. 무엇보다 다카구라의 “복음적 기독교”는 당대의 명저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카구라에 의하면, 현재 교회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비판의 여지가 있음을 말합니다. 첫째는 신조나 교리를 승인하는 정통적 교회입니다. 이는 형삭적인 지적수준으로 “우리들의 주장은 신앙상의 intellectualism인 형식적 정통주의를 타파해서 참되고 살아있는 복음적 신앙에로 돌아가는 일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두 번째는 실증적이고 공리적이며 프라그마티즘적인 합리적인 자연주의적인 기독교입니다. 이는 기독교 전도가 양보다는 질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기독교의 미국화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종교라 하나 낭만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인본주의 흐름이 섞여 있는 ‘종교상의 주관주의’로 인간중심적이고 향락적인 불건전한 센티멘탈한 기독교입니다. 네 번째로 경건주의라 하나 감정주의에 흘러서 “신앙에 있어서 진리문제를 경시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신앙은 종교적 기질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진리를 문제시해야 합니다. 신앙의 객관적 근거, 역사적 계시를 경시하는 신앙의 주관적 방향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기독교의 ”문화에 대한 극단적 보수주의“로 자칫 문화 안에서 일어나는 죄악들에 대해 눈을 감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카구라는 복음적 기독교는 성서의 종교로서 말씀의 종교라 하며 바르트나 브룬너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상기하게 됩니다. 또 복음적 기독교는 은총의 기독교로 “우리들을 구원하는 것은 신에 관한 사색이나 아름다운 종교적 감정, 도덕적 수련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진리를 그 생활 속에 살리는 종교라는 것입니다.(김승철 최태용의 신학사상 형성에대한 연구.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5년. pp.224-230)

 

최태용은 1929년 2월 6일부터 ‘영과 진리’라는 개인잡지를 발간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이 있어 1929년 7월에 발간한 ‘영과 진리’ 7월호부터 100회에 걸쳐 ‘영적 기독교론’을 집필하였습니다. 최태용이 메이지 신학원 입학 전부터 다카구라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또 그 후에서도 그로부터 신학적 영향이 있었다는 말은 일절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신학교에서 서구의 신학들, 슐라이어마허, 칼 바르트, 브룬너 등의 신학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최태용의 논조에서 다카구라의 신학과 사상을 다분히 엿 볼 수 있습니다. 최태용 목사가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라, 충분히 학문적이라, 조선인 자신의 교회라고 주창하며 세운 교회를 “복음 교회”로 이름 한 것에서 다카구라와의 가까운 거리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김승철 ibid, 226) 그러나 복음교회를 창립하고, 그 후 해방 후에까지의 최태용의 신학과 사상은 다카구라를 초극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3) 3기 1945년부터 1950년 최태용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

 

4. 일본 교토철학과 近代초극론

 

교토학파(京都學派)라는 명칭이 최초로 공적인 기록에 등장한 것은 이 학파의 개조(開祖)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의 제자 토사카 준(戸坂潤, 1900~1945)이 1932년 한 신문에 게재한 〈교토학파의 철학〉이라는 기고문으로 알려졌습니다. 교토학파가 지향한 학문적 특성이 불교 그중애서도 화엄종과 일본 주체적 관점에서 서양사상을 해석하고 비교하며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것 등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철학, 불교학, 종교학 그리고 신학 등의 학자들도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 학파에 속한 주요 학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동조했던 행적으로 말미암아 정치학, 역사학 측면으로도 상당히 주목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교토학파와 이에 속한 학자들에 관한 여러 훌륭한 연구 성과로 간간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이 분야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안타깝게도 연구자의 층이 두텁지도 않고 이에 따라 연구 결과물 또한 많지 않습니다.(최용운. 교토학파의 사상과 교학적 성과. 불교평론 2021.6.27.) 더욱이 기독교 신학계에서는 전무하지 않는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교토학파는 일본제국의 철학적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와 해방 후에도 한국의 사상계, 문학계와 기독교계에도 음, 양으로 영향을 끼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한국의 신학계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굳이 기피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寡聞한 탓인지, 교토철학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연구하는 신학자를 찾기가 어려운 일이 신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니시다 기타로를 시작으로 다나베 하지메(田邊元, 1885~1962)와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1900~1990)를 교토학파의 ‘핵심 3인방’ 또는 소위 ‘빅 스리(Big Three)’로 불려지고 있습니다.(혹 기회가 있으면 이들의 사상을 소개하였으면 합니다,)

니시다는 유서 깊은 무사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의 초년의 삶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세월 지내었으니 가족들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들과 학교 교풍에 적응하지 못함으로 좌절을 경험한 후에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산사를 찾아 禪 수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니시다의 “철학의 동기는 비애의식(悲哀意識, 한국이 恨이라하면 일본은 아와레)이라고 하겠습니다.(이정우, 일본사상의 완성, 교토학파와니시다 기타로.) 그 모든 고통과 비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마음 깊은 밑바닥”을 찾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전반기 철학의 모티프라고 할 수 있고, 그 모색의 결과로 획득한 결정체가 ‘순수경험’이고 그다음이 ‘자각’이었습니다.

 

니시다의 철학은 첫 번째 주저인 <선(善)의 연구>(윤인로옮김, 도서출판b. 2019)에서 전개된 ‘순수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순수 경험이란 “조금도 사려분별을 섞지 않은 참된 경험 그대로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때문에 서구 철학자들은 니시다를 현상학의 범주에 넣어서 이해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주저라 할 <자각에 있어서의 직관과 반성>에서는 그의 일생의 테마인 ‘자각’의 문제가 전면에 드러납니다. 니시다 철학의 기본 주제는 그의 삶 그대로 ‘고뇌를 넘어 환희로’입니다. 어떻게 삶에 엄습해 들어오는 각종의 고뇌를 털어내고 환한 빛의 차원으로 나아갈 것인가, 여기에 니시다 사유의 기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3의 주저로 일컬어지는 <작용하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에서는 그 유명한 ‘장소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그의 자각론이 지나치게 유심론적으로 주관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의 장소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진정한 자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만이 아니라 자각이 이루어지는 장소 자체에 대한 자각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때의 자각이야말로 ‘절대무의 자각’입니다. 이 ‘절대무의 자각’에 이르러 니시다 사유는 최고조에 달하게 됩니다.(이정우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삶의 고뇌를 넘어 ‘참자아’를 찾아가다. 경향신문 2012.01.20.)

 

니시다를 이해하는데 그의 장소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토학파 3세대 학자로 분류되며, 소위 “서구의 대표적인 교토학파 대변인”이라고 불렸던 아베 마사오(阿部政雄, 1915~2006)에 따르면, 니시다의 사상은 순수경험 이후 계속 발전하며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해 가지만, 일관된 그의 근본적 관심은 ‘참된 실재’는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으며,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체계적·조직적으로 파악하며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아베의 설명과 같이, 순수경험을 기초로 한 니시다의 사상은 이후 다른 서양철학자의 사상과 대화하며 점차 발전하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먼저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과 ‘사행(事行, tathandlung)’을 골자로 하는 피히테(J. G. Fichte, 1762~1814)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각’의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직관’을 강조하는 자신의 철학적 특징을 살려 “일체의 작용을 초월한 장소(場所)의 입장에 도달”함으로써 그의 ‘장소의 논리(logic of place, 場所の 論理)’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던 니시다는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사상을 구성하는 ‘이데(idee)’와 ‘절대정신(absoluter Geist)’ 개념을 원용함으로써 ‘절대무(絶對無)’의 개념을 정립하게 됩니다. 그가 주장하는 ‘절대무’란 결코 단적인 공무(空無, empty nothingness)나 허무(虛無, nihilit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존재론적 유 · 무의 구분을 초월한 ‘무’로써,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절대무의 자각’으로 확장되며 그의 ‘자각의 철학’이 포섭하는 영역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순수경험과 절대무의 자각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논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점이 되고 있지만, 니시다는 이처럼 자신의 禪 수행 체험을 서구철학의 언어로 체계화함으로써 ‘불교적 자각의 철학’을 전개하였습니다. 니시다가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불교철학 내에 한정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관점은 넓은 의미에서 대승불교적 세계관(특히 화엄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 교토학파에 관한 연구 분야의 또 다른 대표적 학자인 이찬수 교수는 그의 철학에 대해 “대승불교적 입각점에서 동서양의 사상을 서양철학적 언어로 통합해낸 탁월한 성취”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어쨌든 순수경험에 대한 니시다의 공식은 명백히 禪이었습니다. 니시다가 스즈키처럼 교토(京都)와 카마쿠라(鎌倉)의 여러 사찰에서 1897년부터 10여 년간 禪 수행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니시다의 순수경험 이론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니시다가 가장 강력하게 비판받아온 영역은 그의 ‘역사 · 정치철학’에 대해서입니다. 일본이 전쟁기에 돌입하게 되자 그는 조국의 운명에 깊이 공감하며 역사, 정치철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대동아공영권을 철학적으로 지지한 것인데,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 5월 일본 군부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지침에 관한 글을 요구받고 〈세계신질서의 원리〉를 집필하였습니다. 당시 도조 내각은 이것을 수용하여 1943년 11월 5일과 6일 양일간 도쿄에서 열린 중국, 만주, 필리핀, 태국, 미얀마 등의 대표가 참가한 ‘대동아의회’에서 채택한 ‘대동아공동선언’에 상당 부분 반영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니시다는 중국과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고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지역 제국주의에 빠지고 말았고, 마침내 학자로서 훗날 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근대의 세계역사를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비판했던 그가 구상한 미래 역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끄는 세계였던 것입니다.

 

니시다가 자신의 역사, 정치철학을 형성하는 이론적 기반으로 활용한 것 중 하나가 ‘일즉다(一卽多)’의 논리였는데, 화엄교학에 존재하는 사사무애(事事無礙), 사리무애(事理無礙), 혹은 사즉교(事卽敎)를 거론하며 불교적 가치를 지닌 논리로 전쟁과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이념으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대동아공영권의 이론 자체가 니시다에 의해 최초로 정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1938년 일본 육군성에서 작성한 〈국방국책안(國防國策案)〉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저명한 학자이자 사상가로서 피지배국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치 않은 채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편승했던 행적은 비판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최용운. 교토학파의 사상과 교학적 성과. 불교평론 2021.6.27.)

 

니시다 기타로의 “일본문화의 문제”(1940)에서, 그는 ‘생생발전’을 키워드로 하여 일본의 ‘역사적 생명’을 논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근원적인 ‘생명’이 역사상 나타난 것이 ‘역사적 생명’인데, 일본의 천황 내지 황실은 그 ‘역사적 생명’을 구현하고 있으며 거기에 일본문화의 독자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니시다의 영향을 받은 교토학파의 4인방(코사카 마사아키, 니시타니 케이지, 코야마 이와오, 스즈키 시게타카)이 <中央公論>紙에서 세 차례 좌담회를 가졌는데, 그 중 1942년 4월에 열린 좌담회는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을 서양제국주의의 세계제패에 대해 ‘아시아의 각성’을 알리고 아시아가 세계사에 그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근대의 초극’ 전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근대의 초극전쟁을 ‘창조’한 일본의 ‘생명력’을 구가하면서 대동아전쟁을 ‘황전’(皇戰) 또는 ‘성전’(聖戰)이라 하였습니다. 이 <중앙공론>의 좌담회는 일본이 대표하는 동양의 興隆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반증으로서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서구의 몰락" (Untergang des abendlandes 1918)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랑케(Leopod von Ranke 1795-1886)가 역사의 추진력으로서 설한 Moralisch Energie를 ‘도덕적 생명력’으로 번역 채용하면서 대동아전쟁을 ‘도의의 전쟁’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제국주의, 나치즘, 파시즘, 스탈리니즘을 분명하게 거부하면서 다원주의에 입각한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구체적으로, 일즉다의 원리로 가(家 이에)사상이 발전되어 천황을 아버지의 위치에 놓고 하나의 가족공동체로서의 대동아공영권을 묘사하였습니다. 실제로 태평양전쟁 개전 조칙에는 ‘팔굉일우’(八紘一宇, 세계는 일가족. 1940년 미야자키시에 팔굉일우탑 건립 한국 중국등 점령지 돌로세움. 패전후 ‘평화의 탑’이란 개명 했으나 중앙의 명문은 팔굉일우 ‘학고 이치우’탑이라 부른다.)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는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서, ‘국가생명’을 키워드로 하여 국가에 대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철학을 피력하였습니다. 이때의 멸사봉공이란 자기의식을 제거하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주체적 무(無)의 입장’ 내지 ‘무아무심’(無我無心)을 ‘국가의 생명’과 일체화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사(無私)의 생명관’은 그 정점에 이르렀던 것입니다.(박규태 일본인의 생명관 : 계보적 일고찰 원불교신문 2010.04.23.)

 

근대와 서구중심의 철학과 사상계로부터 초극하여 대동아의 팔굉이우의 사상을 펼치었던 니시다는 일본사의 암흑기라 할 쇼와昭化 전기에 초극이론을 내세우며 활동한 인물입니다.(그는 정확히 1945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하지만 그가 과연 대표 지식인으로서 이 시대에 감연히 맞섰는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태평양전쟁에 적극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시대가 지운 의무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해야 하며, 동북아의 다른 국가들, 당대의 타자들보다는 일본중심주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는 하이데거나 박종홍(유신체제이념화기여)의 경우가 그렇듯이 단지 그의 인간적 실수가 아니라 그의 사유 자체 내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었다고 하겠습니다.(이정우)

 

최태용목사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한국 내 교토학파 연구의 시작과 한국의 교토학파 연구 현황: 종교계 연구를 중심으로’ 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찬수 교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2019.03.29. 에큐메니안 )는 한국 기독교권에서(아마 전 영역에 걸쳐서도) 교토학파를 다루었던 최초의 인물이 최태용목사라고 말합니다(안병무박사도 교토철학연향받음). 최태용은 1928년에 메이지 신학원에서 공부하기 이전부터 교토학파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는가? 그가 메이지 신학원에서 공식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1925년 신앙혁명선언을 한 그의 논조와 니시다의 이론의 거리가 멀지 않지 않는가? 1932년 귀국 후에 썼던 그의 글에는 니시다 기타로(Nishida Kitaro)가 말하는 장소론을 차용해 “아담의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장소에로의 옮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가 전개하는 논리의 구조가 니시다의 장소론 혹은 행위론과 거의 같다고 하겠습니다. 1936년도에는 니시다의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의 논리에 기대서 “다수와 한 개체는 부정적 관계”에 있으며 “한 개체 즉 다수”라는 논리를 통해 여러 ‘교파들’과 전체로서의 ‘기독교’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찬수 교수에 의하면, 1946년 해방 정국에서 최태용목사가 한국적 국민운동론을 만들고 실제로 국민운동을 펼치는 과정에 교토학파 사상가들의 제국이론을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최태용이 자신의 논리가 교토학파 철학자들에게서 왔다고 명시하고 있지 않았고, 교토학파 자체를 연구했거나 체계적으로 소개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국민운동에 뛰어든 1940년대 후반의 강의록 “新國家觀”에 교토철학자들인 스즈키 시게타카(鈴木成高), 타나베 하지메(田邊元), 미키 기요시(三木淸) 등을 인용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상 안에는 분명히 교토학파의 세계관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최태용 목사는 이미 1930년대에 교토학파의 논리를 일부 소화해 ‘국민’과 ‘국가’, ‘교파’와 ‘기독교’의 관계를 해명하고,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국민 통합을 통한 국가 구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구체적으로 농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던 그의 전력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홍정완교수의 “해방 이후 남한 ‘국민운동’의 국가·국민론과 교토학파의 철학”(2010)에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1945년 해방된 나라는 한순간의 환희가 사라지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미쏘간의 이데올로기 틈바구니에 혼돈의 극을 마지하게 되었으니 해방 78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민족은 단장의 비애를 맞보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해방되던 해 11월 초 최태용목사는 10여명의 교회 중진들에게 해방된 조국에 자신이 좌시할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밝히었습니다. “해방 된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는데 소위 민족 지도자란 자들이 제가끔 정당을 만들어서 싸움질만 일삼고 있을 뿐 먼저 국권을 회복하려는 국민운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일제 때처럼 나라가 다시 외국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다만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범국민 계몽 운동을 일으키겠습니다. 그러므로 복음교회의 감독은 백남용 목사에게, 서울교회는 지동식 목사에게 맡기려 하는데 여러분의 의향은 어떻습니까?”

 

최태용목사는 12월 초 新生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회장에 최태용목사, 총무부장에 서재권, 교육부장에 이덕봉, 종교부장에 김면호가 담당하고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정당부인 국민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YMCA강당에서 “비정당독립전취대강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혼란한 해방정국 난맥상은 최태용목사의 조직만으로 국민계몽운동한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1945년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를 조직하였습니다. 10월 25일자 매일신보는 독촉에서 말한 이승만의 발언을 실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로 만들자. 한 덩어리로 애국정신을 뭉쳐 우리의 원하는 바를 세계에 보여야 한다. 그 기관을 만들자. 이 모임을 실로 조선독립을 위해 우리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먹지로 뭉치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또 뭉쳐 만들려 하지도 않는다. 당신들이 뭉쳐서 조선 사람에게 실감하게 하라!”(나무위키 이승만 일생 2023.9.23.)

이승만은 박헌영의 좌익계와 김구의 임정계, 그 밖의 애국단체들과 함께 독촉을 이루어가고자 하였으나 미군정과의 갈등, 미소공동위원회, 모스코바 삼상회의, 신탁통치, 좌우합작운동 등으로 인해 독촉은 수많은 굴곡을 거치게 되고 결국 이승만 중심으로 남한만의 독립국가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안양대학교 이은선 교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기독교”(國敎會史學會誌 第46輯, 2017, pp. 287–325)라는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기독교가 어떻게 해방정국에서 활동 하였는가 그리고 최태용목사가 얼마나 깊이 관여 하였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일반역사가들이 독촉을 연구할 때, 기독교와의 관련성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해방공간에서 건국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고, 이들은 귀국 직후 1945년 12월 28일에 열린 ‘임시정부 요인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국가를 건설해야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남부대회에서 김구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망하지 않는 강한 나라를 세울까. 곧 성서 위에세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국민이 되어 서로 잘 살자”고 하였고, 이승만은 “우리는 신국가 건설을 할 터인데 ‘기초 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 곳 만세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했으며, 김규식 역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 책임은 교회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박사와 김주석을 낳았다. 3천만민족을 정치적으로 교회적으로나 바로 지도할 책임이 기독교회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활천」신년호 제229호, 1946, 3-5)

 

이승만은 건국과정에서 기독교 국가 건설론을 실제로 실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미 해방 이전부터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일제 강점기 하에서 기독교청년연합회회(YMCA), 안창호 중심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 이승만 중심의 대한인국민회와 흥업구락부, 신흥우 중심의 적극신앙단 등이 조직되어 한말부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정교분리의 원칙 하에서 교회를 모체로 정치활동에 가담하지 않았고, 교회 밖의 조직들을 통하여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방공간에서 독촉에 가담했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부터 다양한 기독교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기독교신앙에 근거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정당조직이 아닌 국민운동의 방식으로 건국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독촉에 가담하여 기독교인들인 건국지도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공산주의 세력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주독립을 달성하는 목표를 특정 정치 조직이 아니라, 국민전체가 참여하는 국민운동의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하였습니다. 국민운동의 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독촉에는 이 방식을 추구하는 우파세력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자주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반탁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이 조직에는 반탁운동의 효과적인 전개를 위한 이승만과 김구 세력이 연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조직에 당시에 임정을 지지하는 다양한 기독교 인물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승만과 김구는 총재와 부총재에 추대되었으나 취임을 유보하였고, 회장은 오세창, 부회장은 이갑성과 방응모가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갑성이 이승만의 지지자였으나 일제 말기 행적에 대한 의혹 때문에 반발이 일어나 이후에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부회장이 오하영으로 바뀌었으며, 독촉출신과 임정의 반탁총동위 소속 인물들과 오하영 계열 중심으로 임원진을 구성하였습니다. 독촉 고문에 천도교의 권동진, 유교의 김창숙과 함께 기독교의 함태영, 오하영, 조만식이 참여하여, 5명의 고문 가운데 3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 고문 3명 가운데 함태영은 기호계, 오하영은 서북계, 조만식은 북한기독교를 대표하여 선출되었습니다. 18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 가운데 김관식목사, 김여식, 이규갑, 배은희목사 등 4명이 참여하였고, 남상철은 천주교신자입니다. 김관식은 1945년 11월 27일 개최된 ‘조선 기독교 남부대회’에서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대회는 이승만이 11월 19일 기자회견을 하면서 “한마디 부탁할 것은 유교, 불교 등의 종교단체가 활발히 움직이는데 기독교들만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3·1운동 당시보다도 더 활발한 움직임이 있기를 바랍니다”고 촉구한 후에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남부대회는 친일과 성립 배경 등을 놓고 난항을 거듭하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에게 건국이념을 제공하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합의하여 개최되었는데, 조선 독립 촉성과 임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형무소에 목사 파견하여 전도한다고 결의하였고, 여기서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후 이승만이 독촉을 장악하면서 그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 것이 바로 민족통일총본부였습니다. 이 조직은 6월 29일에 공식출범했는데, 김구의 비상국민회의와 김규식의 좌우합작에 대응하기 위한 이승만의 친위조직이었다고 보겠습니다.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의 중앙조직을 확대하고자 했는데, 전국애국단체연합회가 7월 15일에 민족통일총본부에 가입하며 해산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1946년 5월 14일에 조직하여 최태용목사의 주관하에 ‘독립전취대회’를 추진했던 조직으로 여기에 가담했던 ‘미소공동위원회대책국민총연맹’의 김일, 최태용, 서재권, 조선민주당의 이종현, 청년단체의 문봉제와 김헌, 대동신문의 양우정 등이 가입을 통해 이승만과 결합하였습니다. 이들은 기존 정당과 관련이 없던 인물들로 김일, 최태용, 이종현 등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비로소 이때에 신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최태용목사는 이승만의 독촉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46년 9월에 임원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기독교 세력은 7월부터 참여했던 이종현(1904-1959평남 덕천출신 1949년 농림부장관), 김일, 변성옥, 이태영, 최태용 등입니다. 이종현은 북한에서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해서 활동하다 남하하여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는데, 9월에 조직부장을 맡았습니다. 이태영은 기독신민회에 가담했던 인물인데 조직부차장이 되었습니다. 변성옥은 북한에서 활동하다 남하하여 YMCA에 가담하였는데 청년부장을 맡았습니다. 최태용은 국민지도자양성소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선전부장에 임명되었고, 김일은 산업부장이 되었습니다. 이 때는 황기성 부녀부장까지 포함하면 12명의 부장 운데 5명의 부장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최태용이 가담한 후에 독촉은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갈 전위대를 육성하고자 1946년 7월 총무부실에 국민운동지도자양성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이 양성소 입소자격은 중등학교 졸업 이상자이며 1회 입소인원은 50명이었습니다. 이 기구의 운영 책임자는 최태용 목사, 사무장은 이태영, 재정담당자는 정인봉 목사였습니다. 고정 강사진은 신익희, 이범석, 지청천, 홍성하(1898-1978), 장덕수, 백남훈 등 이었는데, 홍성하, 장덕수, 백남훈은 한민당 소속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와 때를 맞추어 독촉에서는 “국민운동과 건국투쟁에 관한 근본이념을 일반국민에게 철저히 침투 인식시켜 국민운동의 이론적 무장화를 기하기 위하여” 전국 수시 강연을 위한 23명의 강사들을 선정했는데, 오하영, 김상덕, 이관운, 백영엽, 유재기, 임영신, 황민총연맹의 김일, 최태용, 서재권, 조선민주당 사무국장 이종현, 청년단체 문봉제, 김헌, 대동신문의 양우정 등은 이후 독촉과 친이승만계 세력에서 언론, 노동, 청년 기관에서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홍정완, “정부수립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국민운동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敷衍하면, 최태용이 해방 이후 현실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발 딛기 시작한 것은 앞서 소개한 바대로 1946년 2월 1일 “政黨否認 獨立戰取 講演會”를 열어, 기존 정당운동을 비판하고 ‘독립’을 향한 “국민대중”의 “직접적인 궐기”를 주장하면서부터입니다. 이후 1946년 4월 6일 우익세력이 장악한 서울지역의 ‘洞會’ 조직과 연계하여 ‘美蘇共同委員會對策國民總聯盟’을 결성하였고, 이 조직을 포함하여 여러 우익청년·사회단체대표들로 구성된 ‘전국애국단체연합회’가 1946년 7월 이승만이 만든 “民族統一總本部”에 합류하면서 최태용 그룹은 이승만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946년 중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독촉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독촉은 1948년 5·10총선거로 남한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향후 노선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신익희를 비롯하여 정치적 명망이 있는 세력은 ‘政黨化’ 노선을, 최태용·李活 등 중앙의 부장급 간부들은 관민합작(官民合作)을 통한 ‘국민운동’ 노선의 확대·강화를 주장하였습니다. 정부수립 이후 최태용 그룹이 국민운동으로서 적극 추진했던 사업은 중앙의 ‘국민훈련원’과 각 지방에 ‘국민훈련원 분원’을 증설하고, 여기에서 양성한 청년들로 농촌건설대를 조직하여 촌락별로 파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업은,1949년 후반 최태용이 대한농회를 장악하고 1950년 대한농회와 대한농민총연맹이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농민회’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중앙에 農村建設委員會를 설치하고 대한농민회의 지부 조직원을 국민훈련원·분원이나 별도 개설한 “농촌지도자강습소”에서 교육한 후 농촌건설대로 편성·파견하는 사업으로 확대하였습니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同年 3월까지 약 2500명을 훈련시켜 농촌건설대를 부락단위로 파견한다는 계획 하에 점차 전국적으로 전개되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각 道에 道農會 차원의 농촌지도자훈련소를 설치토록 하고, 각 군 농회장과 농회 직원 등을 교육시켜 이들을 중심으로 농촌건설대원을 각 부락단위로 파견, 활동케 하였습니다. 최태용은 향후 農會의 모토로 농촌의 “자력건설”을 표방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3대 정책으로 “첫째 농민조직, 둘째 협동조합체제 확립, 셋째 농업증산”을 내세웠습니다.(전병호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최태용,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 한국신학연구소간 1995, pp. 442-468. 청소년 시절 농업부국의 기도가 다만 꿈이 아닌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최태용목사와 니시다와 교토철학

최태용목사가 해방 후 독촉운동에 참여하면서 무엇을 희망하고 초극하고자 노력하였는가? (그의 국민운동사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홍정완교수의 글을 참고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국민운동을 주도했던 최태용 그룹의 논리에는 ‘제국’의 사상, 그중에서도 니시다 기타로를 비롯한 교토학파 사상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해방 후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한 청사진으로 최태용이 주장한 것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미국을 비롯한 서구주의도 아니고 일본의 대동아공영주의도 아닌 이러한 사조들을 초극하여 Theocracy위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최태용 신국가론).

 

1932년 초엽 제4복음서의 구원관 이라는 졸업논문을 완료하여 신학부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귀국하지 아니하고 계속 학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종래의 신학형식으로는 산 신앙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함을 느낀다”고 하고, “산 신앙과 철학을 결부시켜 철학적 범주”를 빌어 기독교 진리를 구명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겼다면서 일본 체재를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더 “철학적 공기를 쐬고자 한다”고 말하였는데 그 공기란 무엇이었을까? 1930년대 이후 그의 사상적 변모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대 급변하던 현실에 관한 인식과 맞물려 쐬고자 했던 “철학적 공기” 즉, 당시 일본에 유행하고 있던 칼 바르트의 신학, 현상학, 실존주의, 그리고 이른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등 교토학파의 ‘행위’적 사유 등의 사조를 접하고, 이에 대응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대응 속에서 그동안 비판해 마지않았던 ‘교회’와 ‘성경 해석’ 등 기존 기독교계의 제도적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논리화시켰습니다.

 

최태용은 대체로 193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체계화하여 서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일찍 시작된 것은 당대 일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신학이었습니다. 바르트의 신학은 슐라이어마허 이래 근대 자유주의신학, 혹은 더 넓게 본다면 기독교의 자연신학적 경향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최태용 스스로 정리하고 있듯이 바르트 신학은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서 “超然神觀”, 절대타자의 신관과 그에 대비된 “죄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구도 설정에서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상의 세계는 철저하게 神의 은총에 의거할 뿐이고 “신”에 대한 어떠한 인간적 입장의 해석이나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영적 기독교’론에서 일정 부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르트 신학의 ‘초연신관’에 대해서 최태용은 적극적인 동의를 표하였고, 바르트의 신학을 통해 그동안 스스로가 제창했던 ‘신앙’론에 내포된 근대 자유주의신학의 요소, 신앙에 대한 진화론적 인식, 영적 체험의 주관성 문제 등을 한계로 자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르트 신학에서 하나님 파악이 변증법적 형식에 얽매여 있음으로 인해 일종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적으로 경사되었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초월성만이 강조된 채 ‘영적 체험’을 통한 ‘신앙의 생명성’은 적극적으로 주장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신앙의 말 , 영과 진리 68, 1934. 9; 영, 육, 진리)

 

무교회주의에서 교회 운동으로

최태용목사는 바르트 신학을 대폭 수용하면서도 실존주의적 사유를 매개로 신앙의 생명성을 재 개념화하는 가운데, 인간의 ‘구체적 실존’과 역사적·사회적 실재로서의 ‘생명’의 의의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실존’으로서의 결단행위, ‘하나님’을 향한 비약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시간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특성에 대하여 주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는 역사적·사회에 실존적으로 존재하여 그 시대적 사명을 수행”(두 가지 의견에 대하여, 영과 진리 96, 1937. 2.)한다거나 “시대적 역사적 실존으로서 그 시대에 창조된 인격의 증언으로서 기독교”(구체적 실존인 기독교, 영과 진리 90, 1936. 9) 등을 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신학적 측면에 한정되지 않고, 기독교의 기성 제도 등에 대한 관점에도 투영되었습니다.

 

무교회주의로부터 그의 교회 긍정은 우치무라 간조의 사망(1930) 직후부터 “외적 권위의 필요성”이라는 차원에서 시작되었고(외적 권위의 필요에 대하여, 영과 진리23, 1930. 12), 1930년대 전반 ‘교회’에 관한 입장을 재정리하여 논리화하는 가운데(영과 진리55, 1933. 9) 기독교조선복음교회의 창립(1935)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무교회주의자였던 최태용의 ‘교회’ 긍정은 1930년대 이후 현실사회에 관한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실존주의, 니시다 기타로의 철학사상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그의 현실사회 인식을 특징짓는 것은 “현대는 사상계에서 일대 전환이 행한 시대”라는 ‘전환기’적 인식(영적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 (2) )과 함께 ‘근대’에 대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근대문명’에 대한 최태용의 태도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영과 진리’에 거의 매 호마다 반복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근대문명 비판에서 강조점은 ‘개인주의’, ‘자유주의’, ‘주관주의’에 놓여 있었고, 그것은 무교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권위와 객관주의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이 근대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중요한 계기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개인의 영혼 가치를 중시하고, 개인의 신앙과 구원”을 중시한다고 하면서도 자칫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경향으로 경사”되기 쉽고, 특히 ‘무교회주의의 기독교’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던 것입니다.(자유와 복종 , 영과 진리 91, 1936. 9.) 특히 무교회주의는 교회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개인적 파악”을 의미하는데, 이에 있어서 “종교는 훨씬 주관적인 것이 되고, 권위 없는 자유주의”가 된다고 말합니다.(하나님의 산 말씀 , 영과 진리 117, 1939. 5.) 여기서 우리는 최태용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듣게됩니다.

 

최태용목사는 바르트 신학과 대결하며 ‘영적 기독교’를 개정한다고 할 때, “바르트에게 배워 영적 기독교에 교회라는 제한을 붙이기로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영적 기독교’는 “교회를 떠난 나 개인 안에 생장한 사상”으로서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 성격이 짙기 때문이며, ‘영적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 (1)’에서 “그 객관적 제한으로 교회를 범위로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개인의 신앙경험이 “교회를 인하여 공공한 자가 되고”, 또한 ‘영적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 (2)’에서 “교회에 말씀되는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객관적인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에게 실존으로서의 ‘사람’은 ‘교회적 실존’이 되었고, 교회는 “신앙을 위한 현실적 권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현실의 조선 기독교계에 대한 강한 비판적 태도로부터 기독교 역사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긍정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권위로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또한 기독교 교회사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인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로마서 13장 1절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더욱 ‘신의 권위’에 직접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세계는 역시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 우리들 기독교인의 신념이다. 이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세워 있는 모든 권위는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신념으로 신자는 권위에 복종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근대인의 권위 기피”에 대해 비판하고, “현대인에게 권위에 대한 인식이 강제”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권위의 인식 , 영과 진리 117, 1939. 5 )

 

무교회주의자였다가 비교회주의를 외쳤던 최태용목사가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한 배경에는 권위에 대한 그의 해석이 잇ㄷ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권위란 무엇인가? 그는 한 설교 가운데 “권위”의 중요성을 “작년 심각하게 깨달았다”고 술회하면서, 프로테스탄트는 “권위”에 관한 생각이 부족한 경향이 있는 반면, 가톨릭교회의 권위는 “자각 없는 권위”라고 보았습니다.(금마집회일기 (8), 영과 진리118, 1939. 6) 최태용은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에서 개인의 독립적 신앙은 필수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개인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또 그것은 공공적인 것”, 교회적인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영적 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 (3) ) 신앙의 개인성과 ‘교회’의 권위를 어떻게 새롭게 결합할 것인가의 문제에 당면하여 그는 “개인이 몰각되지 않는” 즉, ‘권위에 근거한 자유’, ‘자각’에 근거한 권위로서 ‘교회’를 그 방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있는 것을 창조하신다. 생명적인 존재는 기계로부터 제작된 획일적으로 똑같은 것들이 아니다. 생명 있는 것은 개체 개체 다르고, 면면이 다르다. 원래 구체적인 다수를 산출하지 못하는 한 개체는 그것이 관념적인 한 개체일 뿐, 실존의 한 개체는 아니다. 한 개체는 구체적인 다수의 한 개체로 실존의 한 개체요, 다수가 없는 한 개체는 없다. 한 개체는 다수에서 자기를 현현하는 개체요, 다수의 한 개체이다. 한 개체와 다수와의 관계는 한 개체 즉 다수인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다수는 연속적으로 한 개체가 되는 것은 아니고, 다수와 한 개체와 윤리적 구조는 소위 변증법적으로 생각할 것으로, 다수와 한 개체는 부정적 관계, 비약적 관계에 있다. 고로 다수와 한 개체와 통일은 범신론적인 것이 아니고, 다수는 구체적인, 타에 섞일 수 없는 다수요, 한 개체는 실존으로 한 개체다.”(교파의 발생 9, 영과 진리88, 1936. 7.56)

이 말은 매우 추상적인 논의인데, 이것은 ‘교파’의 존재, 교파가 없는 통일된 교회가 가능한가에 관해 논의하기 전에, 그 전제로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즉, 구체적이고 개성적인 교파들(개체들)을 산출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생명 있는 기독교(전체)’가 아니라는 것이고, ‘구체적’인 다수의 교파들(개체들)은 비약, 즉 초월을 통해 기독교(전체)로 되어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니시다 기타로의 ‘一卽多, 多卽一’의 논리, 즉 ‘절대모순적 자기동일’(絶對矛盾的自己同一. 니시다 기타로가 변증법적 현실세계의 내적 논리구조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으로 1930년대 초반 이후 ‘변증법적 자기동일’, ‘절대모순의 자기동일’ 등의 용어로 표현되었다가 1930년대 말 이후 통일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小坂國繼, 哲學論文集 第三について ,西田幾多郞全集 第八卷, 岩波書店, 2003, p. 587)의 논리로서, 이를 활용하여 최태용은 ‘교파’의 존재와 전체로서의 기독교 사이의 이상적 관계에 대해서 개념화했던 것입니다.

 

(가) “....인격의 사회는 서로 독립한 것이 “나”와 “너”로 서로 대면하는 데 있다. 나와 너는 절대로 서로 독립한 것으로 그 사이에 동일한 線의 연락과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인격은 역시 사회 중에 존재하여, 그것은 결코 독립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인격적 사회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에는 역시 불연속의 연속이 없으면 아니 된다. 절대로 서로 독립한 것이 또한 연락하여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서로 자기를 죽이고, 또 살림을 받는 일이 없으면 인격의 사회는 성립될 리가 없다.(참 생활, 영과 진리 106, 1938. 4)“

 

(나) “너(汝)는 절대로 나(私)로부터 독립한 것,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나는 너의 인격을 인정함으로써 나이며, 너는 나의 인격을 인정함으로써 너이다. 너와 나는 절대적 비연속으로서, 내가 너를 한정하고 네가 나를 한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밑바닥에서 절대적 타(他)로서 너라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자각적 한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나의 밑바닥에서 너를 보고, 네가 너의 밑바닥에서 나를 보며, 비연속의 연속으로서 나와 너를 결합하는 사회적 한정 같은 것을 진정한 사랑(아가페)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자각적 한정은 사랑에 의해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私と汝,1932, 西田幾多郞全集 第五卷, 岩波書店, 2002, 323~324쪽. 私と汝 의 초, 岩波書店, 1940, pp.41~45)

 

(가)는 최태용, (나)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논의입니다. 최태용은 자신의 논의가 니시다의 논리에 따른 것임을 밝히지 않았으나 니시다가 쓴 私と汝(1932)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앞서 언급한 ‘一卽多, 多卽一’의 논리가 개체와 전체의 관계에 대한 표현이라면, 위의 인용문에서는 개체와 개체 사이의 관계를 그 인격성과 연계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私と汝의 논리 또한 “절대적 他로서의 너(汝)”라는 개념에 토대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개체와 전체’의 관계와 동일한 논리구조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高山岩男, 續 西田哲學, 岩波書店, 1940, pp.41~45)

이와 같은 니시다의 논리를 매개로 그 ‘자유와 권위(공공)’의 문제를 논하는 가운데 이를 교회 이외의 사회, 조선인 사회에도 투영했습니다. 즉, ‘개인의 개성’과 ‘권위(공공)’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인 실존인 개체의 ‘자기부정’, ‘자기초월’―기독교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喚發”됨(개인과 교회 , 영과 진리 104, 1938. 3.)―을 매개로 하여 양자 모두 강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보편주의적인 관점에서 개진된 것이었는데, 그것을 식민지 조선에 투영할 때―“사람으로 회개할 뿐 아니라 조선인으로 회개”해야 한다(나의 걱정 , 영과 진리 97, 1937. 4.0회)―그가 ‘권위(공공)’의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는 조선인의 “특수한 운명적 곤란”을 지적하면서 “망국민은 현저히 개인주의자이고, 이기주의자이어서 공공함을 이해”하기 어려운 자라고 생각합니다.(하나가 되어라, 영과 진리103, 1938. 1) 이와 같은 관점을, “개인의 개성”이건 “국민의 특유한 정신”이건 그것 자체로는 “괴벽”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전 인류에 대한 사명”이나 의의의 측면에서 말해야 한다는 그의 다른 주장과 연결해보면, 그가 니시다 기타로 등 교토학파의 제국주의적 국민주의에 내포된 ‘주체화’의 보편주의적 측면에 공명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교토학파의 사회철학이 식민지문제를 비롯한 ‘이질적 것들(모순들)’ 속에서 그 연속성이나 통합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국가(제국)의 능력에 대해 낙관적인 담론이었다고 한다면, 그에 비해 최태용에게 “식민지적인 것”은 ‘보편’적 주체화의 통로이자 결과인 ‘공공적인 것=국가적인 것’의 형성을 저해하고 있는 제거의 대상이었고, 그런 만큼 더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보편적 주체화’를 욕망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최태용의 신국가관에서 인용된 글들(전병호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최태용. 최태용의 생애와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pp. 463 이하 참조)

 

해방 이후 최태용이 ‘국민운동’에 뛰어들어, 이른바 ‘국민운동’의 확산과 발전을 위해 지도자 양성과정에서 사용한 강의 노트이자, 저술 준비로 보이는 遺稿 ‘新國家觀’이 있습니다. 遺稿는 많지 않은 분량인데, 이의 소개 차원에서 어떠한 인물들의 저술 혹은 구절들이 인용되었는지 간단히 살펴본 다음,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하려고 합니다. 遺稿에는 교토학파의 지식인들이 다수 인용되고 있습니다. 스즈키 시게타카(鈴木成高)의 歷史的國家の理念, 야나기다 겐주로(柳田謙十郞)의 行爲的世界, 다나베 하지메(田邊元)의 哲學通論, 미키 기요시(三木淸)의 續 哲學—ト와 哲學入門 등이 인용되었습니다. 그 외 일본 지식인으로는 전향 맑시스트 사회학자인 시미즈 이쿠타로(淸水幾太郞)가 쓴 新しき人間이 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활용되었습니다. 이외에 문헌의 명칭을 표기하고 있는 경우로는 영국 역사학자 도슨(Christopher Henry Dawson 1889-1970)의 日譯 저서 政治の彼方に(1939), 영국의 철학자 벤(Alfred William Benn 1843-1915)의 The History of English Rationalism in the Nineteenth Century 등도 인용되었습니다. 저술명이 표기되지는 않았으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신학자이자 교회사가이기도 했던 존 맥머리(John Macmurray), 영국의 정치철학자 레오나르드 울프(Leonard Sidney Woolf), 그리고 최태용이 “전체주의(보편주의) 철학자”로 소개한 오스트리아의 오테마르 슈판(Othmar Spann 1878-1950 종교문화론적 발생론 주장) 등의 특정 구절이 직접 인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고찰하면서 독일의 저명한 신학사전(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RGG)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도 활용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토학파의 철학과 실존주의 외에 최태용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맥머리와 도슨의 경우, 유럽 근대문명의 위기와 그 극복의 모색이라는 맥락에서 이미 교토학파 지식인들의 저술에서 많이 인용하였습니다.(도슨의 경우, 鈴木成高의 歷史的國家の理念. 弘文堂, 1941, p.256이나 1942년 文學界) 위와 같은 인용 문헌들에 대한 표면적인 검토를 통해서도, 앞에서 살펴보았던 1930년대 이후 최태용이 걸었던 사상적 행보, 즉 ‘제국’의 사상을 수용하고 그에 대응하고 이를 초극한 사실과 그 방향성을 더욱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행보가 해방 이후 그의 정치적 언설에 매우 연속적으로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방이후 최태용의 현실인식과 새로운 세계관의 필요성

해방 이후 최태용의 독특한 현실인식을 살펴보려합니다. 해방 이후 한반도의 대내외적 정세에 대해 위기의식을 표하는데, 그 중점은 미국과 소련에 의한 점령과 대립, 그리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사회의 혼란과 이념적 갈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최태용은 그 해결을 당대의 ‘좌우합작’이나 ‘미소 교섭’의 성공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좌우합작과 ‘중간노선’은 정치적 타협 또는 “無사상, 無확신의 중간적인 것”에 불과하며, ‘절충주의’로는 당시의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신국가관, 1949년 6월 1일, 최태용전집 6, pp.250~251) 즉, 미소의 대립이나 내부적 이념 대립은 단순히 권력의 대립이 아니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사상적 대립이기 때문에, “세계관”이 다른 두 세력 사이의 알력이 절충이나 교섭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신국가론의 수립, 1947년 1월 18일, p.195) 문제는 그가 해결방안으로 내놓은 것이 두 사상 중 하나를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이를 통해 다른 사상을 제압하는 형태로 제기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른바 둘 다를 부정하고 지양한 “새로운 세계관”의 수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최태용은 “현대는 시대의 전환기”라고 하면서, “근대문명이 그 淸算期”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사상계의 “정론”이라고 하고, “최근의 철학적 경향은 현대를 초월하려는 노력”이라고 제시하였습니다.(근대주의의 초극, 1947년 2월 15일, pp.214-216) 해방 이후 그의 ‘근대문명’ 비판의 주요한 지점 또한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에 놓여 있었습니다. 개인의 자립과 이익에 근거한 ‘근대문명’은 세계에 조화와 평화를 이룰 수 없고, 결국 두 차례의 세계전쟁은 “근대문명이 난숙하여 파괴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단 종료된 당시의 상황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는 세계전쟁에서 ‘데모크라시’가 승리했으니, 세계는 “데모크라시로 돌아갔다”고 하는 세간의 이야기에 대해 과연 ‘데모크라시’가 새로운 세계의 조화와 평화를 가져올 “세계관”인가? 를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우리는 이미 민주주주의가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근대문명의 비극에 참여한 것을 보았다”고 말 하였습니다. 개인주의, 자유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계급투쟁과 국제투쟁의 참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승전국 미국에 대해 “인도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표현이 아니라, 두개 주의의 “우연적 결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정치사상비판—민주주의 비판. 1947년 3월 22일, 3월 29일, 4월 5일, p238) 나아가 그는 ‘공산주의’나 ‘맑스주의’도 “다윈의 진화론처럼 前代의 遺物”에 지나지 않으며, “현대의 사상이 못 되”는 것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獨立, 革新, 指導者 , 獨立戰線 1, 獨立戰線社, 1946. 3, p.4) 공산주의는 “기계주의적 균등화와 무리한 인간·자연의 억압”을 추구하는 “근대적 합리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근대주의의 자기 분열이요, 자기파탄”에 지나지 않으며, “이성의 분열성의 비극이 결전을 위해” 내세운 ‘장사(將士)’가 다름 아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것입니다.(근대주의의 초극, 1947년 2월 15일, p.215쪽; 민주주의의 초극 Ⅲ—합리주의 1947년 3월 8일~15일, p231)

이와 같이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의 대립은 재편된 ‘근대문명’의 대결로 최태용은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결과 나타난 ‘재편’이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서구 근대문명의 초극을 주장한 교토학파의 ‘세계사의 철학’을 최태용목사는 다시 자신의 논리에 등장시킵니다.

 

2차 세계대전 결과로 나타난 미소의 대립은 근대적인 성격을 탈각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또 다른 차원으로 진전되어 “세계관적”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최태용은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당시의 세계사적 과제는 그 기저에 ‘근대문명’을 ‘초극’하려는 것이지만, 세계관적 대립의 지양, 통일, 즉 ‘냉전의 초극’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그에게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근대의 산물로서 새로운 “통일적 세계관”, 이념에 의해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새로운 통일적 ‘세계관’은 근대문명이 초래한 분열과 대립, 전쟁을 넘어서 조화와 통일, 평화를 가능케 하는 원리를 담은 사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의 논지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른바 ‘세계관’의 수준에서 보았을 때, ‘공산주의 소련’과 ‘민주주의 미국’에 대한 평가가 사뭇 다르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무력에나 기댈 뿐, 민주주의는 “산만한 자유주의 주장에 불과”하여 ‘思想戰’, 즉 ‘세계관’의 싸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고(ibid. p.239), 반면 공산주의 소련은 “사회와 문명의 원리”로서의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국가를 다만 정치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명의 원리”로서 바라보고, 새로운 ‘타입’의 인간, “인생의 개조, 다른 문명의 건설”을 꿈꾸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신국가론의 수립 1947년 1월 18일, pp.193~194; 역사적, 현실적 인간관, 1947년 2월 1일, p.207) 따라서 최태용에게는 공산주의도 근대문명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소련은 하나의 ‘세계관적 국가’라는 측면에서 그의 새로운 “통일적 세계관”에 가장 위협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교토학파의 ‘세계사의 철학’이 최태용에게는 새로운 ‘세계사적 과제’를 발견케 하는 기본 논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소련에 관한 평가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의 새로운 통일적 세계관은 곧바로 세계주의(cosmopolitanism)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적 국가”를 매개로 세계사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세계주의는 근대의 추상적 개인에 근거하여 출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정치사상비판—민주주의 비판, 1947년 3월 22일, 3월 29일, 4월 5일, p. 239.) 그는 “세계와 일거에 통하는 행위로서 우리는 국가를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신국가관, 1949년 6월 1일, p.264)

 

이제 최태용은 새롭게 건설하려고 하는 ‘대한민국’이 다음과 같이 세계사에 등장하기를 원합니다. 세계사에 있어서 동양인은 그 본래의 가능성이 예상된 외에 지금까지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사는 서구인의 역사였었습니다. 또한 사실에 있어서 우리는 좋건 싫건 서구적 세계사 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사적 현실은 동양에 와서 특히 한국에 와서 응결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38선은 세계 양 조류가 마주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감연히 일어나 민주, 공산 양 주의를 지양하고, 새 사상으로 새 나라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새 시대는 “한국으로부터”라고 우리는 자각해야 된다. 그래서 이 일이 성공한다면 韓族은 바로 세계사상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였습니다(신국가관, 1949년 6월 1일 p. 251). 이른바 교토학파의 ‘세계사의 철학’에서 ‘동양’은 철학적 차원의 새로운 원리 즉, ‘有의 서양’에 대비된 ‘無의 동양’이라는 차원에서든, 근대의 산물인 국민국가 간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협동체, 공영권을 안출하기 위해서든 중요한 ‘개념’이었지만(히로마쓰 와타루廣松涉, 김항 옮김, 근대초극론, 민음사, 2003, 1장과 2장 참조) 이런 교토철학의 이론과는 달리 최태용은 ‘동양’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기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최태용은 ‘동양’이라는 개념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그가 근대문명의 원리를 넘어선 ‘세계관적 국가’의 수립을 주창할 때, 명목상이나마 근대문명의 산물인 ‘국민국가 간 질서’를 넘어서야 한다는 논의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새롭게 파악된 ‘세계사적 과제’는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라는 형태의 구도 속에서 산출된 것이 아니라 “세계관”과 “세계관”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파악된 것이었고, 따라서 그의 새로운 ‘세계사적 과제’는 그 이전과 같은 ‘지역’이나 ‘心象地理(imagined geographies. 후쿠자와 유기치 담론)’적인 개념의 장치들을 통과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계사의 철학’을 냉전적, 내전적 맥락에 놓고 ‘이데올로기’ 투쟁의 구도 아래 비틂으로써 ‘국민운동’에 대해 식민지로부터의 단순한 ‘독립’이 아닌 ‘세계사적’ 의의를 부여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점은 김동리가 해방 이후 교토학파 철학에 기대어 “제3기 휴머니즘”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와 맑스주의를 비판하고 “동서정신의 창조적 지양”, “동양적 대예지(大叡智)” 등을 제시한 것과도 대비됩니다.(김건우, 김동리의 해방기 평론과 교토학파 철학 , 민족문학사연구 37, 민족문학사학회, 2008.) 최태용은 새로운 ‘세계관적 국가’의 원리를 산출하면서 ‘절대적 장소로서 무(無)의 세계’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신국가관, 1949년 6월 1일, p.256쪽), 이를 ‘동양적 무’이라고 하여 ‘동양’이라는 개념을 활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김동리의 ‘동양적 대예지’가 ‘전통론’적인 색채가 가미되어 ‘민족혼’ 등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논리 또한 교토학파의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국가’나 ‘민족’으로 수렴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붕괴된 제국의 변경에서 작동한 ‘교토학파’의 철학이 내전과 냉전의 조건 속에서 그 가치가 발현될 수 있었던 방식은 국가로의 침몰 밖에 없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일제시기 최태용의 ‘교회’와 ‘권위’에 관한 사유에서 일정하게 확인되었던 전체와 개체의 관계에 관한 논리, 즉 一卽多 多卽一의 논리가 식민지에서 벗어난 ‘사회’, ‘국가’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먼저 ‘세계관’ 대립을 극복할 새로운 원리의 “세계관적 국가”란 스즈키 시게타카(鈴木成高 서양사학자)의 歷史的國家の理念에 빚지고 있는 개념이라고 보겠습니다. 이 책에서 스즈키는 “중세의 교회가 단순히 종교기관이 아니었던 것”처럼 “현대의 국가도 단순히 정치기관”이 아니라 “중세의 교회가 담당했던 권위주의를 今日의 국가가 담당한다”는 관점을 말하였습니다.(鈴木成高, 歷史的國家の理念, 弘文堂, 1941, pp.166~167; 신국가론의 수립)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최태용은 ‘냉전의 초극’이라는 ‘세계사적 과제’에 맞게 “세계관적 국가”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그의 “세계관적 국가관”은 개인주의, 자유주의 등 근대사회의 원리들을 ‘당연히’ 벗어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을 잃어버린” 근대인에게는 갈등과 대립만이 있을 뿐 “통일, 조화”는 산출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통일적 세계관을 위해서는 “권위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대인이 “중세적 권위”, 즉 일제시기에 그가 표현한대로 한다면 ‘가톨릭교회의 권위’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자유’는 “인격의 본질”이므로 ‘자유’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개인으로부터 전체에 통하는 길”로서 “절대자각의 권위주의”를 제시하였던 것입니다.(근대주의의 초극 Ⅱ—자유주의, 1947년 2월 22일, pp.223~225)

 

그렇다면 ‘절대자각의 권위주의’에서 개체(개인)와 전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전체도 무시할 수 없고, 개인을 무시할 수도 없다. 개(個)와 전(全)의 문제는 어찌되는가? 근대주의의 초극 Ⅱ—자유주의(1947년 2월 22일, pp.223~225)에서 최태용은 ”주체의 논리로써 개인과 전체, 자유와 권위의 문제는 잘 풀릴 것이다. 주체의 논리에 있어서 주체인 개인은 언제든지 개인으로 남아 있다. 주체가 없는 초월은 없는 것으로, 개인 없는 전체는 없다. 개인은 다른 개인으로 더불어 너와 나의 상호 한정에서 자각과정을 통해서 초월에 있어서 너와 나의 공통된 지반으로 절대적 장소를 파악하는 것이다. 개(個)는 그 자기부정의 바닥에서 전(全)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최태용의 관점은 1930년대 이후 접한 니시다 기타로의 논리로서 개인과 전체의 문제에 접근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가정, 사회, 국가의 문제가 도출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절대자각의 권위주의에서 “절대자각”이란 위의 글에서 설명한 “초월”을 통해 “주체의 바닥”에 놓인 “절대적 장소=無의 세계=절대적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사람이 그 주체적 방향에서 초월에 의한 공공적 이데아의 자각을 의미”한다고도 표현하였습니다.(정치사상비판—민주주의 비판, 1947년 3월 22일, 3월 29일, 4월 5일, p.242)

그는 ‘주체적 초월’에 의한 ‘공공적 이데아’의 자각이라는 문제, 즉 독립체인 “인격체”가 어떠한 계기로서 “공동체”로 구성되는가를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에로스’와 ‘아가페’의 논리를 가지고 ‘가정’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이를 결혼의 예에 의해 설명해보자.....결혼의 에로스적 계기는 강한 것이다. ... 그런데 에로스뿐이라면 그것은 동물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이 성립됨에는 에로스 이외에 아가페가 요구된다. 아가페란 고도한, 정신적인 형이상학적인 사랑이다. .... 에로스가 자기중심적임에 대하여, 아가페는 자기를 타(他)에 인도하는 것이다. 자기부정, 자기희생이 아가페의 특징이다. 아가페는 공동체적 사랑이다. 그래서 이 아가페에 의해서만 가정은 성립된다.”(ibid. p.243) 에로스와 아가페. 인간의 모든 공동체는 ‘자연적 계기’를 넘어선 ‘인격체’의 자기부정적 행위, 즉 ‘초월’-초극-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가페’의 장소를 ‘초월-초극-의 장소’, 너와 내가 다 함께 죽고 사는 ‘절대적 장소’라고 하였습니다. 니시다 기타로 등 교토학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논리를 토대로 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개념화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공공적 이데아’에 철저한 사람을 “새 인간”, “새 타입의 인간”이라고 불렀고, 따라서 ‘국민운동’이란 “절대자각의 권위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주체’ 즉, “근대인을 장사(葬事)”하고 그것을 ‘초극’한 ‘새 인간’을 만드는 “새사람운동”에 다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근대주의의 초극 Ⅱ—자유주의, 1947년 2월 22일) 어떤 하나의 ‘공동체’가 성립된다면 거기에는 “절대적 장소”가 내재한 것으로 그는 ‘국가’ 또한 “주체의 자기초월에 있어서 절대적 장소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즉, 개체의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이라는 ‘정신적 사랑(=아가페)’이 없는 곳에 공동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고, ‘정신적 초월’이 곧 공동체가 존립할 수 있는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국가’는 ‘주체’의 입장에서 사회, 교회, 가정과 병렬적인 동일 수준에 그치는 것인가? 국가는 생명적 개체적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초월하여 있습니다. 그것은 개개인을 넘는 독립한 실체로써 “저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국가는 그 자체가 불가분성, 자기목적성, 자기동일성을 가진 한 생명체인 단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국가 없는 민족이나 개인은 “사람으로서의 자각에 철저하지 못한 자”,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발현치 못한 자”라고 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악역사(惡歷史)를 革淸”하여 버리고, “역사적 필연성에 몰려서” 자각과 단결, 일치된 행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성가를 세계에 선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신국가관발췌록, p.270; 역사적, 현실적 인간관, 1947년 2월 1일, p.207)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일제시기에 그가 견지했던 주체화의 논리가 해방 이후에도 연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공공적인 것’, ‘국가적인 것’의 결여를 상징하는 “과거”는 오직 제거나 부정의 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빈 몸으로 역사적 현실에 돌입”할 것을 역설하였던 것입니다.(신국가관, 1949년 6월 1일, p.246)

 

그런데 최태용의 사상에서 교토학파의 논리가 유지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민족과 국가를 구분하여 파악하는 점이라고 보겠습니다.(니시다 기타로의 국가론은 당시 일본의 국체론자와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國家理由の問題 (1941), 西田幾多郞全集 第九卷, 岩波書店, 2004; 嘉戶一將, 西田幾多郞と國家への問い, 以文社, 2007 참조. 다나베 하지메의 ‘국가론’이라 할 수 있는 ‘종(種)의 논리’에 대해서는 사까이 나오끼, 이규수 옮김, 이연숙 대담,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창비, 2003 中 민족성과 종(種)—다민족국가철학과 일본제국주의 참조.) 에로스와 아가페의 논리를 연상해본다면, 생물적 종으로서 민족, 즉 그 자연적 계기인 혈연, 지연, 언어, 풍속의 공통성만으로는 국가를 이루지 못합니다.(정치사상비판—민주주의 비판, 1947년 3월 22일, 3월 29일, 4월 5일, p.244) 따라서 “민족”이 국가의 基體로서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각”이 필요하고, 이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원동기”로서 운동, 즉 국민운동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신국가관, 1949년 6월 1일, p.263) 그는 “세계사의 첨단에 서서 세계관적 사실(史實)로” ‘신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을 비판하는 “설교를 던져주거나” “개인의 수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국민훈련원’에 들어온 ‘국민운동지도자’들에게 “엄격한 규율 밑에서 훈련된 단체생활”과 “단체적 생활에 의한 창조적 운동” 등을 강조하고, “새로운 도(道)”를 전파하는 확실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국가관(1949년 6월 1일)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체적 입장에서 국가와 내가 하나가 되어, 내가 자유로, 자발적으로 국가의 창조적 成素가 되어, 국가의 일을 하게 되는, 그러한 새로운 타입의 새 인간, 동지들이여! 한 차례 국가광(國家狂)이 되자”.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공공적인 것’, ‘국가적인 것’을, 그것도 ‘내전’과 ‘냉전’의 맥락에서 ‘운동’으로서 창출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최태용의 ‘영적기독교론’에서 자기부정(우사릌스)으로 초극을 상기하게 됩니다,

 

(4) 나가는 말

 

일제시기 최태용의 사상은 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로 무교회주의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자 개인잡지 형식을 취했던 것과 같이 최태용 또한 天來之聲(총 24호, 1925. 6~1927. 5), 靈과 眞理(총 119호,1929. 2~1939. 7)를 통해 주변 신앙인들과 그의 사상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첫 번째 조선인 제자였고, 우치무라의 저서(傳道の精神)를 직접 번역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우치무라를 떠나 독자적인 신앙·신학 세계로 나아갔지만, 우치무라를 매개로 형성된 그의 초기 신앙적 특성은 여러 측면에서 지속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성 교계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 비판의 주된 표적은 조선의 기독교계가 선교사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을 의존하여 종속되어 있던 현실과 그에 직접 연결되어 존재했던 주류 교계의 근본주의적 신앙, 신학이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비판을 쏟아내었고, 결국 당대 주류 교계로부터 이단이라고 공격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존 최태용목사에 관한 연구가 많지는 않지만 대체로 복음교회 창립ㅈ로서 그리고 그의 ‘영적 기독교’론에 집중되어 있을 뿐, 193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사상적 변모과정에 대하여 그리고 해방 이후 그의 ‘국민운동’에 관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겠습니다.

 

일본 도쿠가와 시대 이후부터, 탈 중화에서 근대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탈아론,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 옼구라 텐신(岡倉天心)의 범아시아동맹론, 미야자키 도텐(宮崎稻天)의 중국혁명론, 이사하라간지(石原莞爾)의 동아연맹론, 미키 기요시(三木淸)의 동아협동체론, 니시다 기타로, 스즈키 시게타카, 고야마 이와오(高山岩男), 고사카 마사아카(高坂正顯), 니시다니 게이지(西谷啓治)의 근대 초극론 등이 나타나(박규태 근대 일본의 탈중화, 탈아, 아시아주의. 2006. 10.1) 조선, 만주 중국, 동남아와 태평양 島嶼 국가들을 일본 천황 아래로 복속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런 동아문명의 맹주국을 바라는 일본인들의 광적 애국심에 대해 최태용 목사는 그들의 논리를 채용하면서 그 비틀고 초극하여 새로운 제 3세대의 세계관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니시다 기타로와 교토철학이 一 卽 多의 논리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장소로 주장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이 패망함으로 근대 초극론은 역사의 뒤안길로 빠져버렸습니다(그러나 최근 우익계의 등장으로 일본 철학계에 다시 초극론이 인기리 대두되고 있습니다). 왜 교토철학의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근대 초극을 실패하였는가 여기서 논의를 끝내야 하기에 어느 시간에 니시다와 교토처학 그리고 최태용과의 관계를 다시 논의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니시다의 초극론이 결국 그들의 바람대로 되지 못한 이유는 첫째로 그의 초극사상이 禪 - 화엄종에 그 철학적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 대동아 맹주로 일본제국. 그것도 그들이 신으로 추앙한 일본천황 중심의 팔굉리우 국가주의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최태용목사는 로마서 8장의 말씀을 통해 영적기독교론을 발표하는데 있어서, 니시다의 순수경험, 자각, 절대무 장소이론이 일본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었다면, 영과 진리의 논리로 그들을 초극하여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최태용은 1930년대 후반 이후 교토학파가 제창했던 ‘근대초극’론과 ‘세계사의 철학’ 등을 반복하면서도 ‘내전’과 ‘냉전’이라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적 국가’의 형성, ‘냉전의 초극’이라는 세계사적 과제와 의의를 ‘대한민국’의 등장과 임무에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국가에 상응하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주장하면서, 근대인을 ‘초극’할 새로운 타입의 공공적, 국가적 주체들을 만들기에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초극’ 논리를 매개로 하여 당대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의 재설정을 통해 대한민국 건설운동 자체에 ‘초월적’ 이념을 부여하려 하였고, 냉전시대 극복하고 어떤 국가권력과 지배자에 의하지 않고 수수한 국민들의 자각운동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뜻을 피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냉전의 초극의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냉전의 제물의 제물이 되어 북으로 끌려가다가 그가 그토록 극복하려 하였던 공산주의 자들에의해 어느 산골짜기에서 학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총회의 주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입니다.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기독교교회들은 그리스도론이나 속죄론 아니면 성령론에 경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세계 신학계에서 창조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지면서 신론에 대한 연구가 크게 대두되어 오고 있습니다. 에하드 야훼,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로 찾고 바로 아는 일이 영생의 길의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분쟁과 다툼이 만연한 세상에서 에하드 야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에하드 하나가 되어 집니다. ‘힌네 엘로헤이켐(사40:9)’하는 우리는 최태용 목사가 평생토록 하나님만 바라보며 모든 세속주의, 세상의 철학과 사상, 이데올로기를 초극하고 오로지 민족을 하나님의 영안에서 하나 되게 하며, 인류를 하나님의 진리가운데 하나로 묶으려 하였던 그의 신학, 사상, 신앙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교회 창립자의 초극신앙으로 영과 진리를 다시 살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래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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