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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2022년 5월11일 동학의 날을 맞이하여

동학농민혁명과 기독교

- 군산 동학농민혁명과 전킨선교사 -

 

1. 동학농민혁명의 개요(槪要)

 

보리밭 가에서 조선낫이

목 놓아 운다.

작석(作石)더미 져다 부린

등 굽은 아버지의 지게가

부황난 황토 구렁에서 따라 운다.

 

황소가 밀고 간

눈물로 허덕인

황토 영마루 바람꽃 피고

조선 소나무처럼 불거진 목민(牧民)의

뼈마디 뼈마디에 바람이 분다.

 

할아버지 동학군(東學軍) 선두에 서서

죽창 들고 외치던 소리소리,

일어선 분노가

쾅쾅 죽은 역사를 찍을 때

쓰러지던 어둠의 계곡.

어둠에서 다시 빛나던 저 조선낫.

 

박두진을 필두로 안국선 조병화 이봉구 안막 등과 함께 안성 출신 임홍재(1942-1979)의 ‘청보리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백성의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조선사회에서 농토는 절대적인 생존 가치 기준으로서 農事之大本 농사는 삶의 전부이었다. 하지만 보리 한 톨마저 권세자들에게 빼앗기고 草根木皮로 보릿고개를 넘길 수밖에 없어 “뼈마디에 바람이 불고‘ 일어선 분노가 역사를 찍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일이다. 보릿고개란 가을에 수확한 곡식이 바닥나고 봄 양식이 되어야할 보리의 이삭이 패기 전인 춘궁기를 말하는데, 그 때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찾아 온 식구가 종일토록 산을 헤맸다. 이 때 지주들은 높은 이자로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수확 때 토지세에 봄에 빌린 곡식의 이자까지 붙여 도지를 징수하였다. 때문에 가을 수확은 더욱 줄고 다시 보릿고개에는 곡식을 빌려야하는 횡포와 수탈의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특히 위정자들의 학정과 부정부패는 가난과 궁핍에 더 이상 몰릴 때가 없는 조선의 농민들이 낫을 들고 일어설 밖에 무슨 도리가 있었겠는가.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가 발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래서 시작하였다. 이 농민항쟁은 주로 동학인들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일어났기에 동학농민혁명이라 말한다. 이 무장 봉기는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당시의 조선 전체 인구 1천1백만 명 가운데 2, 3백만 명이 참여하여 3〜5만 명이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고 관군과 민보군에 의해 약 25만이 학살되었다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이 얼마나 광범한 대중적 지지와 호응을 얻었는지를 알 수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왕조시대에는 ‘동학란’으로, 천도교에서는 ‘동학혁명’으로, 북한에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불려 지기는 삼일운동처럼 동학운동이라고 하였다. 남한에서는 최근에 동학사상이 바탕이 되고 농민이 주체가 된 혁명이라는 의미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정지창 동학과 개벽운동 ,2019. 5. 18)

 

김용옥은 동학 혁명의 주체가 수운 당시(1860년대)에는 일반 농민들이 주를 이루고 화전민과 머슴, 술장사, 종이장사, 퇴역 관리 등이 섞여 있었으나 1893년의 보은 취회(聚會) 당시에는 그 폭이 더 넓어져 나라를 걱정하는 이로부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까지 동학에 들어왔다고 본다. 당시 선무사 어윤중(당시 호조판서로 개화에 뜻을 가지었으나 살해당함)이 올린 장계에는 “(…) 끝내는 경륜과 재기를 가졌으나 막혀서 뜻을 얻지 못한 이가 따랐으며,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격분하여 백성들을 위해 막아보려고 목숨을 걸었던 이가 따랐으며, 오랑캐들이 우리나라 이권을 빼앗는데 통분하여 무턱대고 큰소리치던 이가 따랐으며, 탐학스러운 장수와 권력을 휘두르는 관리들의 침탈행위와 학대를 어디에도 신원하고 호소할 길 없는 이들이 따랐으며, 경향각지에서 무력으로 위협하고 억누름에서 스스로를 보전할 길이 없는 이가 따랐으며, 서울 이외의 곳에서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이가 따랐으며, 감영과 고을에 속한 벼슬아치들이 의지할 데 없어 각처에 흩어져 있는 이가 따랐으며, 양곡이 떨어진 농민과 손해 본 장사꾼들이 따랐으며, 어리석은 이들이 풍문에 따라 들어가면 살 수 있다고 하여 따랐으며, 빚 독촉을 참을 수 없는 이가 따랐으며, 상민과 천민으로서 신분을 벗어나려고 하는 이가 따랐다.”고 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김용옥은 동학이 농민뿐만 아니라 일부 양반과 아전, 상인, 노비 등 민중이 광범하게 참여한 항쟁이라고 보고 ‘갑오동학민중항쟁’으로 부른다.

 

2천 년 대 이후에는 동학을 농민봉기나 농민전쟁이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근대사상의 기점으로 보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동학은 19세기 후반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중국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천하)의 붕괴, 조선 왕조의 부패와 민생파탄의 위기 속에서 ‘개화’ 대신에 ‘개벽(開闢)’이라는 독창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동학사상 속에서 신분제의 타파와 만민평등, 생명존중사상의 뿌리와 함께 여성과 어린이의 해방 등 근대적 세계관의 뿌리를 찾아내는 한편, 동학의 ‘개벽’을 서구식 근대화, 즉 ‘개화’에 대한 대안으로 고찰하는 토착적 근대 담론으로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조선 말 고종 때에는 대규모의 민란이 26회나 발생하였는데 특히 고부(古阜)의 민란은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동기를 이루었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부임하자마자 만석보(萬石洑)의 수세(水稅)를 비롯하여 황지과세(荒地課稅), 불효(不孝)ㆍ불목죄명(不睦罪名), 대동미(大同米)ㆍ건비(建碑) 등 갖가지 명목으로 부당한 세금을 받아 착복하였고,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일삼고 있었다. 무론 이 같은 탐학은 고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8도 어디에서나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부패된 관리들의 모습이었다. 고종임금은 이같은 관리들에 대한 보고를 받아 가슴아파했지만 코끼리의 눈물에 지나지 않았다.

 

1894년 고종31년 6월 6일(양7월8일) ‘승정원 일기’에 고종의 감동적인 성명서가 기록되어 있다. “나의 생각과 뜻은 밤낮으로 국가의 안녕을 향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위해 더 많을 것을 하기를 원한다. 도처에서 나는 몰락과 가난을 목격하고 있다. 백성들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짐이다. .... 법질서가 혼란을 겼게 되었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상벌은 아무 효과를 내지 못하고 거짓말과 위조가 판을 치고 있다. ... 최고위 관료들조차도 더러운 소유욕을 보이고 있다. 반면 이들은 부하들을 다루는 데는 너무 관대하다. 그들의 의무를 위반해도 처벌하지 않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늘만 괜찮으면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니 국가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나는 너무 슬프고 부끄럽다. 총체적인 개혁과 단호한 조처 없이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 하지만 말을 하기는 해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그 죄는 내게 있다. 내 말을 명심하라. 그대들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두 번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오스트리아인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조선 1804년 여름. 책과함께, 2021.2 156쪽 이하)

고종의 성명에 대해 조정은 동학혁명군과의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단지 혁명군의 빠른 발을 멈추게 하는 입에 발린 말이 되었을 뿐이다.

 

고부봉기 이후 파견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의 횡포를 계기로 농민군은 1894년(고종 31년) 3월 20일 전라도 무장읍(茂長邑)에서 전면적인 봉기의 횃불을 들었다.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봉기하면서 전봉준은 “茂長東學輩布告文”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제1차 동학농민운동의 배경과 봉기 주도자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신통력 있는 명확함과 성스러운 명석함을 지니셨다. 현명하고 어질며 바르고 강직한 신하가 전하를 보좌하여 밝게 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와 문경(文景)1의 통치를 손꼽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라는 자들은 나라에 충성을 다할 생각하지 않고 다만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며,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하고 뜻만 맞추면서 충성을 간하는 말을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자를 비도(匪徒)라고 한다. 안으로는 나랏일을 도울(輔國)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아, 백성들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변하였다. 집 안에 들어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밖에 나와서는 몸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 학정이 날마다 심하여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 상하의 명분이 뒤집어지거나 무너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나라의 많은 재화와 물건들이 나라 창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 호주머니만 채우고 있다. 또한 나라 빚은 쌓여만 가는데 아무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 짓을 하는 것이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8도는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모든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도 수령들의 탐학이 참으로 그대로이니, 어찌 백성이 곤궁해지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쇠약해지면 나라도 쇠약해진다.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할(輔國安民)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집을 지어 오직 혼자만 온전할 방법만을 찾고 오로지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니, 이것을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우리는 초야에서 사는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있으므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없다. 이에 8도가 한마음으로 수많은 백성과 의논하여 오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를 하였다. 오늘의 상황이 비록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라. 다함께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今我聖上, 仁孝慈愛, 神明聖睿. 賢良正直之臣, 翼贊佐明, 則堯舜之化, 文景之治, 可指日而希矣. 今之爲臣不思報國, 徒竊祿位, 掩蔽聦明, 阿意苟容, 忠諫之士, 謂之妖言, 正直之人, 謂之非徒. 內無輔國之才, 外多虐民之官, 人民之心, 日益渝變. 入無樂生之業, 出無保軀之策. 虐政日肆, 惡聲相續, 君臣之義, 父子之倫, 上下之分, 逆壞而無遺矣. ...許多貨賂, 不納王庫, 反充私藏, 國有積累之債. 不念圖報, 驕侈淫昵, 無所畏忌. 八路魚肉, 萬民塗炭, 守宰之貪虐, 良有以也, 奈之何民不窮且困也. 民爲國本, 本削則國殘, 不念輔民安民之方策, 外設鄕第, 惟謀獨全之方, 徒竊祿位, 豈其理哉. 吾徒雖草野遺民, 食君土服君衣, 不可坐視國家之危. 而八路同心, 億兆詢議, 今擧義旗, 以輔國安民, 爲死生之誓. 今日之光景, 雖屬驚駭, 切勿恐動, 各安民業. 共祝昇平日月, 咸休聖化, 千萬幸甚.

『東學亂記錄』上(國史編纂委員會, 1971), 『聚語』, 茂長東學輩布告文

(사)무장읍성보존회 ・ 2021. 8.2 동학혁명과 무장. / 위의글 158쪽 이하참조 )

 

세계 각처를 여행하고 한국에 온 오스트리아 여행 작가인 바르텍은 그의 책에서 “모로코나 중동의 다른 나라에서조차 이보다 더 못된 소매치기와 방탕하고 무지한 협박자들의 무리는 보기 드물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리에 의해 자행된 도적질과 살인에 관한 소름끼치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형리들이 들이닥쳐 집을 점거하여 수색하고, 값나는 물건과 옷, 가축, 곡식을 강탈해 가며, 수감자들은 죽임을 당한다. 조선에서 소유란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망국의 책임은 이미 얘기했듯이 귀족들에게 있다.”(위의 책 159쪽 이하)

 

1895년 2월11일 전봉준에 대한 두 번째 공초에서 다음과 같은 심문이 있었다.

< 문 그대는 작년 3월 봉기한 뜻이 백성을 위해 잘못된 것을 제거하는 데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했는가?

담 당연하다......

문 그렇다면 전라도 한곳에서만 탐학을 일삼는 관리들을 제거 하고자 봉기했는가, 아니 면팔도 전체에서 그러한 뜻을 펼치고자 하였는가?

답 전라도 한 곳에서 탐학을 일삼는 자들을 제거하고 이와 더불어 내직에서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권력을 농단하는 신하들을 몰아내면 팔도가 자연히 한 몸이 될 것이 아니 겠는가?

문 전라도 감사 이하 각 읍의 수령들이 모두 탐학을 일삼았는가?

답 열에 여덟아홉이 그렇다.

문 어떤 일을 가리켜 탐학이라 하는가?

답 각 읍을 다스리는 수령과 벼슬아치들은 상납을 내세워 토지의 세금을 더 거두거나 집 집마다 져야 하는 부역의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인다. 또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백 성에게는 공연히 죄를 뒤집어씌워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경작지를 함부로 침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

문 그대는 어떠한 계책을 이용해 탐관오리를 제거하고자 했는가?

답 특별한 계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을 평안케 하려는 마음이 간절 하였 으므로 탐학을 일삼는 자들을 보면서 분노와 탄식을 이기지 못해 이런 일을 행한 것 이다.>(김흥식였음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 서해문집 2016, 57-58쪽)

 

 

특히 1876년 開港이래 주로 일본은 경제 침투를 감행해 한국을 시장화하고 쌀을 반출해갔다. 그들이 물가를 자극해 농민들의 생활이 궁색하게 되었고 탐관오리의 횡포는 날로 가중되어 농민과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동학의 고부 접주(接主)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고종 30년(1893) 12월과 이듬해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오히려 체포 또는 축출 당하였다. 고부 군민은 더 이상 악정을 참을 수 없어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1894년 1월 10일 새벽에 동학교도와 농민들 천여 명이 그간의 악정과 바로잡아야 할 여러가지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 관아에 밀어닥쳤다. 성난 군중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稅穀)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같은 고부 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전라감사는 군수 조병갑을 파직하고 용안(龍安) 현감 박원조(朴源朝)를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지방 실정을 잘 아는 신임 군수 박원조는 농민의 원성을 바로 듣고 적절하게 조처했고 군중은 일단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실정을 자세히 조사해야 할 안핵사(按使) 이용태(李容泰)는 민란의 책임을 일체 동학교도와 농민들에게 전가시키고 민란 선동의 주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피신해 정세를 관망하고 있던 전봉준은 차제(此際)에 관료들의 고질적인 악행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을 결심하고 인근(隣近)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敎祖) 최수운의 신원(伸寃)을 위해 다음과 같이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894년 3월 20일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이름으로 발표한 창의문(倡義文)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 지금의 신하들은 보국(報國)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녹위(祿位)를 탐하여 총명을 가리우고 아첨할 뿐 충성으로 간하는 선비를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나쁜 무리라 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人才)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사납게 하는 관리가 많아 인민(人民)의 마음이 날로 더욱 변하여 들어가면 생(生)을 즐길 직업이 없고 나가면 몸을 안보할 계책이 없어 학정(虐政)이 날로 심하매 원성(怨聲)이 계속하여 군신(君臣)의 의리(義理)와 부자(父子)의 천륜(天倫)과 상하(上下)의 분별이 무너져 남음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는 말하기를 사유(四維 ; 禮義廉耻)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이에 망(亡)한다 하였으니 방금 형세는 옛날보다 심(甚)함이 있는지라 공경(公卿) 이하(以下)로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함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자기 몸만 살찌우게 하고 자기 집만 윤택하게 할 계책을 하여 사람 뽑는 곳을 재물생기는 길로 보며, 응시(應試)하는 장소를 교역(交易)하는 시장(市場)으로 보아 허다한 돈을 국고에 넣지 않고 도리어 자기 주머니를 채워 나라에 누적된 빚이 있는데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짓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이 하여 팔로(八路)가 어육(魚肉)이요 만민(萬民)이 도탄(塗炭)이라. 관리의 탐학이 진실로 이러하니 어찌하여 백성이 궁(窮)하고 또 곤(困)하지 않으리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깎이우면 나라가 쇠잔(衰殘)하나니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책(方策)을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향제(鄕第)를 베풀어 오직 홀로 보전(保全)할 방법만 도모하고 한갓 녹위(祿位)를 도적질하니 어찌 그것이 도리이겠는가. >

(....今之爲臣 不思報國 徒窃祿位 掩蔽聰明 阿意苟容 忠諫之士 謂之妖言 正直之人 謂之非徒 內無輔國之才 外多虐民之官 人民之心 日益渝變 入無樂生之業 出無保軀之策 虐政日肆 惡聲相續 君臣之義 父子之倫 上下之分 逆壞而無遺矣 管子曰四維不張 國乃滅亡 方今之勢 有甚於古者矣 自公卿以下 以至方伯守令 不念國家之危殆 徒窃肥己潤家之計 銓選之門 視作生貨之路 應試之場 擧作交易之市 許多貨賂 不納王庫 反充私藏 國有積累之債 不念圖謀 驕侈○昵 無所畏忌 八路魚肉 萬民塗炭 守宰之貪虐 良有以也 奈之何民不窮且困也 民爲國本 本削則國殘 不念輔國安民之方策 外設鄕第 惟謀獨全之方 徒竊祿位 豈其理哉.....천도교 의절[天道敎 儀節] 창의문(倡義文) 작성자선수당 박경희|작성시간15.07.29)

 

1894년 3월 하순에 동학혁명군은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부안(扶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부안 백산(白山)으로 모여 들었는데 그 수가 일만 명에 이르렀다. 대오를 정비하고 다음과 같은 4대강령(四大綱領)으로 거사(擧事)의 대의를 선포했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不殺生)

2. 충효를 다해 제세안민하게 할 것 (忠孝叢全 濟世安民)

3.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逐滅洋倭 澄淸聖道)

4.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문세도(權門勢道)가를 진멸할 것(驅兵入京 滅盡權貪)

 

사기가 충천해진 혁명군들은 군대를 편성해 태인의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옥문을 부수며 관속들을 응징했다. 한편, 급보를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과 이재섭(李在燮)에게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도록 명하니 이들은 군사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나와서 정읍 황토현(黃土峴)에서 마주쳐 4월 6일에서 7일 새벽까지 싸움이 크게 벌어졌으나 관군은 참패하고 영장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이긴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었다. 연전연승으로 각 지방의 관아를 습격해 옥을 부수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으며 원성 있는 토반과 관속에게 딸린 벼슬아치들의 집을 불살랐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全羅兵使) 홍계훈(洪啓薰 -1895. 임오군란시 민비구원. 을미사변때 일본군의 총탄에 죽음)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1,000여 명의 군사를 군산에 상륙시키고 다시 500여 명을 증원하여 법성포(法聖浦)에 상륙시켰다. 동학혁명군은 몰려오는 관군을 장성(長城) 월평리(月坪) 황룡촌(黃龍村)으로 유인해 격전을 벌인 결과 경군(京軍)을 물리쳤다. 전봉준이 이끄는 만여 명의 동학군은 정읍 지방을 거쳐 북상해 전주를 향해가는 중 금구현아(金溝縣衙)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원평(院坪)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꺾어서 모악산(母岳山) 자락의 청도(淸道)를 휘돌아 독배재를 넘어 그대로 진군해 세내(三川)에 도달했다. 그날 밤(4월 26일)을 지내고 다음날 27일(양력 5월 31일) 이른 아침부터 전주성 공략을 위해 동학군의 일부를 장꾼으로 위장시켜 전주로 미리 투입시켜 염탐하게 했다. 전라감영(全羅監營)의 관군은 용머리재와 완산에 대치하면서 지원군인 경군만 믿고 자체 경비를 허술히 하고 있었다. 동학군은 이러한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을 부수고 노도와 같이 입성해 성을 삽시간에 함락시켰다. 전봉준은 대장으로서 유유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전주성 가운데 위치한 선화당(宣化堂)에 위용을 갖추고 자리했다. 동학군은 너무나도 손쉽게 경군이 도망한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다. 성 안에 들이닥친 동학군은 승리에 도취해 거침없이 분탕질하였다. 약탈과 방화와 그동안 받은 억압에 대한 보복이 벌어졌다. 전라감사 김문현과 중영장(中營將) 임태두(林泰斗)와 판관(判官) 민영승(閔永昇) 등은 체통도 잊은 채 자신들 목숨을 구하는 데 급급해 전주성 동문으로 빠져나가 북으로 도주했다.

 

한편 전봉준의 계략에 말려 500리를 뒤만 쫓고 다닌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은 전주성이 점령당한 4월 27일(양력 5월 31일)에서야 금구에 도착해 전주 감영 함락의 이유를 ‘감영 내의 관속배 중 내응자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구차한 변명 보고를 띄웠다. 전라도의 심장부이며 호남 일대의 으뜸가는 도성인 전주성의 점령은 동학농민군의 전 기간을 통한 전투에서 최대의 승리였으며 최후의 승리였다.

 

초토사 홍계훈이 거느린 경군은 동학농민군의 뒤를 따라 6월 1일에는 전주성 밖에 이르러 서로 대치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그 동안 6월 4일과 6월 6일의 두 차례에 걸친 양군의 접전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나와 선제공격한 출격전 이었는데, 이번에는 동학농민측에 큰 피해를 준 패전으로 그쳐 도리어 전의를 상실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토사 홍계훈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무공작에 착수함으로써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고종의 윤음과 자신의 효유문(曉諭文)을 성내의 동학농민군에게 전하고, 탐관오리는 법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하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원정서(原情書)를 두 차례에 걸쳐 양호순변사 이원회(李元會)에게 제시하였다. 제1차 원정서는 14개 조목으로 되어 있고 제2차 원정서는 24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그 일부가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이래 여러 차례 제시한 바 있는 개혁요구 조목과 중복되어 있으니, 대체로 탐관오리의 숙청과 개항 이후 나타난 외국상인의 횡포와 국내 특권상인의 배격, 그리고 물가등귀의 원인이 되었던 미곡의 국외유출 방지 등을 주장한 것이었다. 동학농민군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의를 상실한 상황 아래서,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강화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험악한 정세가 벌어질 것을 예측, 속히 동학군을 회유하여 해산시킬 필요를 느껴 휴전을 교섭하돈중에 동학군에서 '동학 12개조 폐정개혁안'을 제안하므로 전주(全州)에서 강화를 맺었는데 그 내용은 ①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탐관오리의 숙청, ③횡포한 부호의 처벌, ④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을 처벌할 것, ⑤노비문서의 소각, ⑥7종의 천인(賤人)에 대한 대우 개선, ⑦과부 재가(再嫁)의 허락, ⑧무명잡세(無名雜稅)의 폐지, ⑨인재등용ㆍ문벌타파, ⑩일본과 간통(奸通)하는 자의 엄벌, ⑪공사채(公私債)의 면제, ⑫토지의 평균 분작(分作) 등 12조항이었다.

초토사 홍계훈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6월 10일(음력 5월 7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거한 지 10여일 만에 철수하고 모두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학교도들은 이미 전주성에서 철수하여 각자의 출신지로 돌아갔을 때 마을마다 포(包)를 설치한다는 구호로 조직망을 침투시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욱 포교에 힘써 전라도에서는 청소년의 대부분이 동학에 입교하여 접(接)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주변의 각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쳐 동으로는 경상도 일대, 북으로는 충청·강원도는 물론 경기·황해·평안도에까지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동학혁명은 여기로부터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동아시아의 변혁과 새로운 세기로 세계의 정국에 소용돌이치는 토네이도의 조짐이 되었다.

조선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하는데 어려움을 깨닫고 먼저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거한 전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요청은 원세개(袁世凱)를 통하여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전해지고, 그는 즉각 파병을 명하여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6월 8일과 12일 사이에 아산만에 도착하게 하였다.

한편 청국이 톈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해 오자, 일본도 즉각 파병을 청국에 통고하는 동시에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서 12일 사이에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 사이에 전운(戰雲)이 짙어져 갔다.

국내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전봉준으로 하여금 집강소에서 정세만 관망할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다시 봉기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기포(起包)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으며, 이는 집강소를 통해 연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은 처음 종교적 입장을 고수하여 무력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남접의 전봉준 등을 가리켜 ‘국가의 역적이며 사문(師門)의 난적’이라고까지 극언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오지영(吳知泳)이 그 조정책에 나서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남·북접을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손병희(孫秉熙) 지휘하의 1만 명에 이르는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청산(靑山)에 집결하고, 곧 남·북접이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로의 북상계획을 세웠다. 11월 하순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해 있을 무렵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도 산발적으로나마 항일전이 벌어졌는데, 목천·세성산(細城山)은 김복용(金福用), 이희인(李熙人) 등이, 수원은 김정현(金鼎鉉), 안승관(安承寬) 등이, 홍천은 고석주(高錫柱), 공주는 최한규(崔漢圭), 옥천은 정원준(鄭元俊) 등의 동학접주들이 점거하였다.

한편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은 충청감사 박제순(朴濟純)에 의해 정부에 보고되고, 곧 관군을 출동시키자 일본군도 이어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11월 하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상당수가 이탈하여 북상한 수는 겨우 1만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밖에 북접의 김복명(金福明)이 거느린 동학농민군 1부대가 목천 세성산에 포진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남방 해상으로부터 상륙할 것에 대비하여 손화중 부대는 나주에, 김개남 부대는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 목천 세성산의 전투였는데, 여기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김복명이 붙잡혀 죽고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서전에서 참패시킨 일본군과 정부군은 공주로 진격하여 전자는 우금치(牛金峙)에, 후자는 이인(利仁)과 효포(孝浦)에 진을 쳤다.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하던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노성읍(魯城邑)에서 공주의 경천점(敬天店)에 이르는 지역까지 이인역(利仁驛)으로 전진하였고, 다른 부대는 효포(孝浦)에 다다랐으며, 또 다른 부대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인 대교(大橋)로 나아가 공주를 포위하였다. 전봉준은 공주성 공격을 결행하기 위하여 전주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북상, 내원하도록 요청하였다. 11월 29일 이인 방면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정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이튿날 이두황(李斗璜)이 거느리는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효포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일단 저지당하고, 양군은 공주를 앞에 두고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12월 11일 동학농민군은 웅치(熊峙) 방면에 대한 총공격을 가하였으나 도리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양군 사이에는 혈전이 벌어지고 끝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점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6, 7일간 머물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김개남의 동학농민군 5,000명이 북상해 옴으로써 합세하게 되자 기세를 돌이키게 되어 다시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정부군은 공주의 공주 본영과 계룡산 뒤편인 판치(板峙)와 이천역 등으로 병력을 3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었는데, 우선 동학농민군이 판치 방면을 공격하자 정부군은 쫓겨 우금치에 있는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다시 우금치로 육박하자 이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혈전이었다. 그러나 6, 7일간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노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1만여 명의 병력 중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으로 항전을 거듭하면서 전주, 태인을 거쳐 금구, 원평까지 후퇴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김개남의 동학농민군부대도 북상하여 청주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다시 전주로 후퇴하고 여기서도 공격을 받아 태인 방면으로 패주하다가 김개남은 붙잡히고 말았다. 또 손병희의 북접 주력부대는 순창에까지 몰렸다가 본거지인 충청도로 북상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습격을 받고 마침내 충주에 이르러 해산되었다. 그 뒤 일본군과 정부군에 쫓기고 있던 전라도지방의 동학농민군은 한때 순천에 집결하여 여수의 좌수영을 향해 진격한 바 있으나 오래지 않아 패배하여 해산되었다. 이 무렵 강원도에서도 동학교도가 봉기하였다. 10월 초 영월, 평창, 정선에서 수천 명이 일어난 것을 신호로 강원도의 각 지방에 그 세력이 미쳤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섬멸작전에 의해서 대부분 그 지도자인 동학의 접주, 성찰 등이 체포되어 효수되자 이내 해산되었다. 황해도에는 동학이 비교적 널리 포교되어 있어서 1893년의 보은집회에 황해도의 동학접주가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황해도에서 동학교도가 크게 봉기하게 된 것은 1894년 10월 하순 장연에서 수만 명이 일어나 해주성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재령, 안악, 평산, 봉산, 신천 등지에 세력이 미치었으나, 이것 또한 일본군과 정부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금구, 원평 방면으로 후퇴하였던 전봉준은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김덕명(金德明), 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기를 다짐하던 중 1894년 12월 30일 밤 불의의 습격을 받아 관군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듬해 4월 23일전봉준은 김덕명, 성두환(成斗煥), 최영남(崔永男), 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이상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학운동(東學運動))

 

동학군을 진압할 때만 해도 합작하였던 청 일은 동학혁명이 진압되자마자 조선반도를 차지하려고 청일전쟁을 벌였고, 승리한 일본은 1899년 군산항을 개항하게 된다. 개항 전에 이미 군산항 일대에는 일본 장사치들이 득실거렸다. 동학혁명 당시 일본전선 수백 척이 군산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어서 놀란 백성들이 오히려 청군을 도와서 일본군을 물리치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동학혁명 당시 군산은 무능한 관군과 청군과 일본군이 뒤섞여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슬픈 역사다.(군산시민신문, 슬픈 항도, 동학혁명을 기념해야 한다. 2020.05.16 최연성 군산대 교수/군산발전포럼 의장)

 

동학농민혁명은 1년 만에 전쟁에서 패배로 끝나고 그 주동자들은 한 서린 땅의 고혼이 되었다. 그러나 외로운 넋이 아닌 그들이 피로서 표출한 정신은 후대에 계속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고도 하겠다. 동학혁명이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크다. 동학은 한국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반외세, 반봉건의 자주적 근대운동이었다. 斥倭洋, 이를 강하게 부르짖는 것을 볼 때 대외저항정신이 강하고, 대내적으로는 신분적 평등을 요구하는 근대적 개혁을 제시한 '페정개혁 12개조'에서는 근대적 성격도 나타난다. 이는 일본은 서구의 근대주의를 도입하여 명치유신을 일으켰지만, 동학은 자주적으로 근대정신을 종교적 신념으로 승화시키었다. 국가의 세기말적 위기적 상황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억압받고 미천한 삶을 살아오던 민중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종교를 기반으로 한 호국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양반사회와 관료의 부패,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국사상(國史上) 최초의 민족운동으로 지도층의 부재와 국제정세의 불리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학운동은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쳐 대내적으로는 위정자(爲政者)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경장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고, 대외적으로는 청ㆍ일 양군의 출병을 유발시켜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조선왕조의 붕괴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동학은 실패로 끝났지만 민족의 가슴을 여미게 하는 애국애족의 정신이 살아있는 농민혁명이었다. 이후 삼일만세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항일운동에도 큰 정신적 영향을 끼치었다, 상해 임시정부를 이끈 백범 김구선생도 황해도 팔봉 접주였다.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을 만든 몽양 여운형선생도 그 뿌리가 동학에 있었다. 몽양의 작은 할아버지가 동학경전을 간행했다. 홍구공원에서 도시락폭탄을 터뜨려 세계를 놀라게 한 매헌 윤봉길의사도 충청도 동학리더 배성선의 훈도를 받았다. 배성선은 그의 장인이었다. (김용옥 동학혁명선언 ,2021, 5,11중에서. 한韓문화타임스, 박찬화 기자)

 

 

2. 동학의 斥洋論의 이유를 알아본다.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 경주(慶州) 선비 집안의 사람인 최제우(崔濟愚, 水雲1824.12. 18 -1864. 4. 15)에 의해 창도된 조선말기의 대표적 신흥종교였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유교의 경전을 통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원군의 정치가 끝나 주도 되는 정치세력이 없게 되자 토반호족(土班豪族)들의 횡포가 극심했으므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억울함을 풀길이 없어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백성들 정신적 지주(支柱) 역할을 해야 할 유교와 불교는 부패하고 무능하였으며 조정은 민중을 이끌어 갈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또한 서학(西學)이라 하여 조정에서 핍박해 오던 천주교가 국민의 마음에 파고들어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재래 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천주교는 이질적인 가르침과 행동이기에 그 동안의 전통적인 종교와는 충돌될 수밖에 없었다. 최제우는 서학에 대한 새로운 도(道)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입산수도한 결과 ‘동학(東學)’을 창설하였다.

 

동학은 한국 재래의 민간 신앙에 풍수 사상, 유교 윤리, 불교의 각성(覺性), 불성(佛性), 선교의 양기(養氣), 양성(養性) 등이 혼용되어 있고 심지어는 천주교를 반대하면서도 ‘천주(天主)’라는 용어를 차용하는 등 유·불·선(儒·佛·仙)의 교리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원리를 내세우는 동학은 서학의 기독교 사상과 대립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또 만민 평등의 이상 실현을 주장하면서 능동성이 희박한 유교적 양식을 비판하고 퇴폐한 양반 사회의 질서를 부정하고 봉건적인 것들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비적인 부분도 있었다. 13자로 된 ‘본주문(本呪文,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과 8자로 이루어진 ‘강령주문(至氣今至願爲大降)’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즉 이 주문을 지성으로 외우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 고침을 받으며 영세 무궁한다는 것이다. 총알이 비켜 간다는 주장도 한다. 양반 및 상민의 계급 차이와 적서(嫡庶)의 신분을 타파한다는 등의 대중적인 주창은 질병이 만연하고 사회적인 불안이 가중되고 있던 당시에 신속하게 받아 들여졌고 전파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경상·전라·충청 등의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조정에서는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하며 탄압하기로 하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동학교도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체포·구금하고 이듬해 교주 수운(水雲) 최제우를 사형에 처했다.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海月)은 태백산·소백산 등지를 전전하며 은밀히 교세를 확장하고 접주(接主) 제도를 확대·개편했다. 각 지방의 접주들이 직임을 분담해 조직과 교세를 펴서 동학 농민전쟁에서 한동안 우세를 떨칠 수 있었디. 동학 창시자 제1대 교주인 최제우가 사형되자 교도들은 교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신원(伸寃)운동을 벌이며 1892년과 1893년에 걸쳐 공주 집회(忠淸, 公州, 1892. 10), 삼례 집회(全羅, 參禮, 1892.11.)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으며, 1893년 3월에 대궐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訴)를 할 때는 단순한 신원 운동에 그치지 않고 민심에 부응할 수 있는 척왜양(斥倭洋)을 겸해 주장하였다. 보은 집회(忠淸, 報恩, 1893. 4.)와 금구 집회(全羅, 金溝, 1893. 4.)에서도 대대적으로 척왜양을 앞에 내세웠다. 동학교도들은 일본인과 일본상인들이 침투하는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또한 교세의 전파에 대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는 반면 서양 종교(천주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제약 없이 전도를 하고 있음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 ‘척양(斥洋)’운동으로 전개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전주 함락을 전후해 전투 기간 중 천주교에 대해서는 서학(西學)을 뿌리째 뽑겠다고 외쳤으며 이에 전주 지방을 중심으로 이미 상당수 분포되어 있던 천주교 신도들은 심리적으로 불안과 위기감에 싸여 있었다. 그 당시 전주 지방 신부들과 서울 주교관 사이에 전보 연락이 잦았는데 그 내용은 “신도들이 절박한 위험에 처해있음” “신도들이 약탈과 구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음” “신도와 선교사들이 모두 죽음에 직면하고 있음” 등이었다. 또 전주성 탈환을 위해 청나라 원군이 전주에 입성하고 동학교도들이 도주하자 사람들 사이에는 동학교도들이 서양인을 완전히 추방하고 천주교인을 살해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렇게 동학교도와 천주교도는 심각하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군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천주교도의 재물이 약탈당하고, 또 신자가 붙잡히면 배교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한 예로 고산(高山)의 죠조(Jozeau Moyse, 趙時夏, 趙得夏) 신부는 전주 지방의 천주교인 구원을 청원코자 서울로 가는 도중 공주(公州) 산 속에서 동학군의 패잔병에게 추격당하였고, 대치하고 있던 청국 군대에 체포되어 억울하게도 동학농민군의 선동을 받은 청국 군인에게 살해되었다. 당시 동학교도는 척양 사상에 상당히 고취되어 있었으므로 ‘천주교도는 서양 침입자의 앞잡이이고 당연히 탄압받아 마땅한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동국대전 東學論에서

西人言無此第 書無早白 而鈍無爲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謨 身無氣化之神 學無天主之敎 有形無迹 如思無呪 道近虛無 學非天主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조리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속셈이 없고 오직 제 몸을 위한 술책을 바라며, 몸에는 기화(氣化)의 신비가 없고, 학(學)에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없고 형식만 있지 실속은 없다. 이와 같이 한울님을 위하지 않으므로 도(道)는 허무에 가깝고 학(學)은 한울님을 떠났다.”

 

수운은 조상제사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를 향해 공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동학의 자세는 경계심을 넘어 일종의 도전으로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운의 이런 시각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서학을 좇는 무리로 단죄 받고 말았다.

 

그렇다면 동학을 바라보는 가톨릭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가톨릭의 프랑스인 선교사(佛人敎師)들은 동학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4년 일어난 동학혁명에서 전주성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된 후 관군과 전주화약(和約)을 맺고 비교적 큰 싸움 없이 해산했을 때, 선교사들은 그때야말로 폭도들을 전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을 승리자로 철수시켜 준 것에 대하여 크게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는 전주에서 철수하던 동학군들이 가톨릭 교인들에게 피해를 입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청군(淸軍)이 동학군에 대한 진압을 이유로 국내에 들어와 일군(日軍)과 전투하다가 아산에서 공주로 쫓기면서 프랑스인 선교사들과 조선 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는데, 그 본을 따서 전라도와 충청도에 있던 동학군들이 가톨릭 교인들을 향해 가혹한 박해를 했다는 것이 윤치호의 일기에도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는 충청도에서 동학교도들이 가톨릭 교인들을 박해한 까닭이 나타나 있다. 가톨릭 외국 신부들의 힘을 믿은 가톨릭 교인들이 추행과 난폭을 일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윤치호 자신도 이런류의 가톨릭 교인들을 원산이나 안변에서 보았다고 썼다. 이를 보아 동학과 가톨릭의 관계는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기수, 초기 한국 가독교의 동학에 대한 인식과 대응, 기독교사상 2014, 3월호 에서 인용)

 

3월 28일(음력 2월 11일) 동학교도들의 복합상소(伏閤上疏)로 인해 서울 인심이 흉흉하게 되자 조선 총리교섭사무로 주재하고 있던 청국의 원세개(袁世凱)는 자기 나라에 군함 파견을 요청해 순양함 ‘내원(來遠)’과 ‘정원(靖遠)’ 2척이 4월 8일(음력 2월 22)에 인천에 입항했다. 한편, 영국 순양함 ‘세븐(Seven)’호가 4월 14일(음력 2월 28일)에 인천에 들어왔다가 영국 총영사 하일러(Water C. Hilier)가 조선의 종주국(宗主國) 행세를 하는 청국의 원세개를 찾아가 조선 재류 영국인들의 신변 안전을 상의했고 곧 원세개의 책임지겠다는 보장 언명을 받고 4월 19일(음력 3월 5일)에 일단 중국으로 이동 출항했다. 미국 역시 경성 주재 미국 공사관의 요청으로 4월 18일(음력 3월 3일)에 군함 1척을 일본 요코스카항에서 인천으로 입항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4월 17일(음력 3월 2일)에 일본 공사관 건물 벽에 일본인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는 방문이 붙었다.

 

또 하나 주목할 일은 이 무렵에 호남지방의 동학교도들이 전라감영에 소장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일본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과 경계의식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고 척왜양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길 뜻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전주 근방 삼례에 모인 동학교도 4천여 명은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 ① 동학에 대한 사도지목(邪道指目)을 시정하고 ② 외국 선교사와 상인을 축출할 것이며 ③ 지방 관아의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 등의 3개조를 요구하였다. 이들 문제는 중앙조정에서 처리할 사안(事案)이라는 감사의 답변을 듣게 되었고, 이에 동학 내에서는 교도들 중 20여 명을 총대로 뽑아 3월 31일(음력 2월 14일)에 서울에 올라가 3개조 요구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 거동이 불온하다 해서 전원을 포도청에 구금하고 심문하며 죄인으로 다루었다. 특히 기독교가 주목할 일은 위 3개조를 상소하는 내용 중 제2항의 ‘외국선교사의 축출’을 말한 것으로 이는 동학교도가 널리 퍼져 있는 호남 지방에서 앞으로 시작해야 할 개신교 선교 사업의 방향을 세우는데 특별한 각오와 준비를 요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선교 초창기 이 지방에서는 천주교나 야소교(耶魚禾敎, 예수교, 개신교)는 한통속으로 구별 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유생(儒生)들까지도 같은 의식으로 배척했던 것이다. 그 당시 동학농민군 가운데는 동학농민과는 관계없는 무뢰한들까지 섞여서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피해를 받은 많은 백성들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관군을 지원하지도 않은 채 그저 난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그래서 시일이 지나자 여론도 변화되었고 서울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조정과 일반 시민들은 예수교가 천주교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3. 개신교와 동학과의 관계

 

1894년 7월에 동학의 재기포(再起包)가 있었을 때 천주교에 대한 경우와는 달리 동학군이 예수교를 직접 공격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분별없이 날뛰는 동학군을 피해 각지에서 선교사들은 서울로 급히 도피했고 교인들도 당황해 산골짜기로 피신하니 예배당은 여지없이 훼파당해 그 모습은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민심의 변화를 깨달은 동학군도 투쟁목표에서 척양의 조항을 빼고 그 동안 주장했던 왜놈과 서양 놈은 일반이라는 왜양일체(倭洋一體)에서 일본과 서양은 다르다는 왜양이체(倭洋異體)로 변화되어 동학의 투쟁 목표가 진멸왜이(盡滅倭夷, 왜놈 오랑캐를 진멸하라)로 바뀌었다. 이것은 전봉준이 스스로 다짐해 밝혔던 것이다. 1894년 12월 8일, 전봉준이 자기 군영에 내린 교시 내용을 살펴보면, “도는 서로 다르나 척왜, 곧 항일 저항을 위해서는 신교(信敎)가 비록 다를지라도 우리는 합심해 성업(聖業)에 전진할지라.”라고 하여 개신교의 척왜성(斥倭性)이 현저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은 동학난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은 다음에 개신교가 뒤늦게 찾게 된 값진 발전의 기회였다.

 

미국 장로회 해외 선교부 총무인 스피어(R.E. Speer)는 말하기를 “동학도들은 기독교를 박멸하거나 서양 선교사들을 추방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교에 강력한 자극을 주고 복음 전파의 새 길을 열어 준 셈이다. 우선, 동학이 봉기했던 바로 그 불만과 불안의 상황이 기독교 메시지 전파에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으며, 동학 봉기가 실패했을 때 그것은 수많은 민중들로 하여금 더 절실하게 기독교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었다.”라고 했다. 박해와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 발전할 틈을 찾아 확장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우신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동학군이 자취를 감추게 되고 잔당을 체포하는 수사망이 압축되자 궁지에 몰린 동학군들은 ‘야소교인(耶魚禾敎人, 예수교인)’이라고 사칭해 모면을 꾀하기도 하고 교인이라 사기치며 교회를 곤란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1896년 9월 24일자 독립신문에 군산의 선교사 전킨이 송고(送稿)한 게재된 내용을 보면 “동학과 비도(匪徒)에게 들어갔다가 살기 위해 도망한 자들이 거짓으로 예수교인이라고 말하며 전주·옥구·임피·함열·만경 등지로 다니며 서양 선교사의 심부름이라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며 토색하는 일이 무수하다. 원래 예수교 사람이야 이런 일은 도무지 없는지라 관찰사와 관원들은 이런 자들을 잡아서 엄히 다스려 달라고 했더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개중에는 아예 마음을 돌이키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인이 되어 새로운 인생길을 찾기도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전킨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에 찾아 와서 신실한 교인으로 후에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된 동학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맥켄지(W. J. Mckenzie 1861-1895)선교사와 동학

 

‘척왜양’(斥倭洋)을 내세운 동학이었기에 개신교 선교 초기에는 ‘배척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특히 남접군이 활동한 호남지역에서는 교회의 피해가 많았다. 그러나 북접군이 활약한 서북지역은 초기의 갈등관계에서 전통적으로 흐르는 민족의식을 매개로 ‘항일투쟁’이라는 공동목표가 설정되었고, 그에 따라 둘의 관계는 ‘이해와 공감’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러니까 가톨릭이 대체로 동학과 갈등 관계에 있었던 반면, 개신교는 남부지역과 서북지역에서 각각 다른 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런 차이는 동학군의 반외세 기치였던 ‘척왜양’이 서북지역에 면면히 흐르는 민족의식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사의 태도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캐나다 출신의 맥켄지선교사와의 관계를 통해서 성취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빨간머리 앤’의 이야기가 펄쳐진 카나다의 작은 마을 ‘프린세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의 출신인

맥켄지는 1893년 11울 12일 카나다 밴쿠버를 떠나 한국에 왔다. 그는 일기에 “하나님 이제부터는 한국이 내가 받아들일 땅이 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랫동안 머물며 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죽음이 나를 삼킬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큰 나팔 소리가 울릴 때 까지 내 유골을 그들과 함께 썩게 하소서”(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81쪽. 에큐메니안, 윌리언 존 멕켄지 캐나다 선교사, 한국선교의 씨앗이 되다‘ 2021. 4.10) 참으로 비장한 순교의 각오로, 정작 1895년 월 24일 소래교회 건축 봉헌을 하루 앞둔 날에 일사병과과 마라리아 열병으로 559일간의 사역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기 까지 그는 한국선교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이처럼 하나님 선교의 각오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누구도 함께하지 못할 사람 없이 조선의 선교에 임하였다.

맥켄지선교사가 가장 좋아하던 찬송은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예수함께 가면 낙 없고 예수님과 동행하면 겁 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고 어디든지 예수함께 가려네” 이다.”(김재현, 윌리엄 맥켄지...한국선교의 밀알, 2019.5.27. 키아츠 프레스)

 

그는 선교사 모펫의 소개로 1894년 1월에 황해도 장연군 솔내교회(松川-서상륜이 한국최초로 세운 교회)에 와서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열악한 오막살이집에서 빈한한 조선인들의 음식을 먹으며 어렵게 살았다. 언더우드의 부인 호튼(Lillias Horton)이 어느 해 성탄절에 빵과 음식을 보냈지만 끼니를 제대로 차려 먹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 음식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그는 조선을 사랑했던 선교사였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에서 사람들은 진심어린 사랑을 느꼈고, 서양인에 대해 다른 인식을 할 수 있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 동학군들이 여러 마을을 공격하고 다닐 때, 그는 가지고 있던 총을 부숴 버렸다. 이런 그의 행동이 동학군들에게도 전해졌고 그 마을은 동학군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동학군 출신 중에 그에게 세례 받은 이들이 다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성품을 말해 준다.(황기수, 초기 한국 기독교의 동학에 대한 인식과 대응 기독교사상, 2014.3 39쪽)

 

맼켄지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 나의 마음은 더는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평안하다.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고통이 심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 그것은 조선을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조선 사람들 처럼 살아서 그렇게 죽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서경조는 그해 12월 26일 그의 죽음을 알리고 한국선교를 요청하는 편지를 캐나다로 보내어, 그의 후임으로 그리어슨, 푸트, 맥래선교사가 1898년 한국을 찾아왔다. (김재현, 위의 글)

 

 

이미 카톨릭과는 갈등 관계에 있는 동학은 개신교를 카토릭과 다르다고 생각할 만큼 이해가 깊지 않았다. 동학교도들은 개신교 역시 가톨릭과 별 다를 게 없는 서양세력으로 이해하였다. 더구나 그동안 박해를 받아 오던 동학과 달리 개신교는 시작부터 조정의 공인을 받았다는 것이 배척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척과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1893년 3월 광화문에서 있었던 ‘복합상소’(伏閤上訴)였다. 1864년 교조가 처형당한 뒤 정부의 탄압으로 동학은 괴멸 상태가 되었다.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구교(救敎) 노력과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로 1860년 후반에 이르러 동학을 복구재건 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 1871년 3월 10일(음력) 이필제(李弼濟)가 제2대 교주 최시형과 손을 잡고, 동학의 조직망을 통해서 동학도 2백여 명을 동원해 야간 기습 작전으로 영해(寧海)에서 봉기해 부사를 죽이고 군기를 탈취하였으나, 8월 2일 문경 봉기를 주모하다가 체포되어 12월 23일 처형되었다. 이처럼 이필제의 교조신원 운동이 실패한 후 재차 기회를 엿보던 중, 1892년 11월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 모여 동학신앙의 자유와 수운의 신원을 탄원하였으나 전라관찰사 이경식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이듬해 1893년 3월 다시 광화문 앞에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 3일 주야(晝夜) 동안 상소를 올렸다. 수천 명을 모이게 한 동력은 교조신원이었는데, 이것은 조정에서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의 서학은 공인하면서 동학은 공인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항거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인 공사관이나 선교사 주택 등에 기독교 배척문을 붙여졌다. 감리교 선교사 존스(G. H. Jones)의 집 문 앞에 붙었던 격문의 내용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너희 서양 무리들아! 이제 속히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만약 거부하면 우리가 충신의 갑주를 입고 인의(仁義)의 몽둥이를 들고서 오는 3월 7일에 너희 죄를 성토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기포드(D.L.Gifford) 학당 문 앞에 붙었던 「야소교 배척방문」(耶蘇敎 排斥榜文)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너희 교두들은 마음대로 연달아 들어와서 조약에도 없는 전교(傳敎)를 함부로 하고 명색 은 한울님(上帝)을 공경한다 하나 비는 데만 힘쓰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단지 찬 미하는 것으로 법을 삼을 뿐이니,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실한 뜻을 가르치는 이치(學)는 찾아볼 수 없다. … 처음엔 영어를 가르쳐 주고 한문을 가르쳐 준다고 하여 양가집 자제 들을 끌어 들이더니 끝내는 너희의 집단(敎中)에 서둘러 들게 하도다.”

 

선교사들을 향해서 조약에도 없는 전교를 함부로 하는 등 바른 마음(正心)과 성실함이 없다고 공박한다. 헌금을 걷는 행위 등으로 자국(自國)의 이익을 챙기고 양반가의 자녀들을 교육시킨다는 명분으로 개종시키고 있으니 더럽기(鄙陋) 짝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빨리 사라질 것을 기한부로 협박하는 글이었다. 다행히 미국 공사관에서 조선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하여 선교사를 보호하게 함으로써 물적 피해는 없었다. 이처럼 초기의 동학과 기독교 관계는 ‘배척과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북지역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한국 기독교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는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앞서 언급한 선교사 맥켄지가 있었고,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 가운데 한 명인 서경조가 교인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아~니, 여긴 웬 일로 오셨수?”

“그대들을 가르친다는 서경조라는 분을 만나러 왔는데, 지금 계시는가?”

서경조의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감시하던 동학군의 지도자 김원삼이 어느 날 서경조를 찾아 온 것이다. 서경조와 마주앉은 김원삼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의 한 구절을 펴 보이며 물었다.

“그대가 학식이 넓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오늘 내 눈으로 확인해 볼까 하고 찾아왔소이다. 여기 이 구절 ‘아양숙기’(兒養淑氣)의 뜻을 아시겠소?”

“……”

“허허… 그대에 관한 말이 다 헛소문이었구만. 어찌 이런 글귀 하나 해석을 못한단 말이오? 이것은 ‘갓난아이의 맑은 기운을 그대로 기르라’는 뜻이오이다.”

김원삼의 풀이를 잠자코 듣고 있던 서경조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이같이 무식할 수가 있는가! 자고로 갓난 아이의 맑은 기운을 기른 자가 있다면 데리고 와 보시오. 그 글귀는 ‘사람의 맑은 기운을 갓난 아이 보양하듯 하라’는 뜻이오!”

(**동경대전 歎道儒心急에서 나오는 말로 消除濁氣 兒養淑氣 도올 김용옥은“내 몸의 탁한 기운을 쓸어 내버리고 맑은 기운을 어린아이 기르듯 하라”고 하였다.)

서경조의 풀이를 들은 김원삼은 무릎을 치며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과연 듣던대로 대(大)선생이로다. 천도(天道)하는 대 선생이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소래교회와 교인들은 공격하지 말고 보호해 주라는 명령이 장연의 동학군들에게 떨어졌다.

 

비록 선교사들의 전하는 복음을 듣지만 초기 한국인들은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함으로 동학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김원삼과 서경조의 만남으로 확인되었다, 기독교가 단순히 서양의 종교, 서양 사람들의 문화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김원삼의 입에서 “이는 과연 천도로다!”는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 동학군 지휘관들은 기독교인들과 친밀해졌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회를 보호하였다.

 

해가 바뀌어 1895년 1월, 동학군과 일본군의 접전이 있었다. 동학군은 기세등등하게 싸웠지만 훈련된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패퇴하던 동학군들이 숨어 들어간 곳은 교회였다. 멕켄지의 일기에 나오는 글이다.

 

“나는 가까운 곳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아졌다. 일본군이 자신들의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 록 하는 어떤 힘이 나에게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 문 앞에 기독교의 깃발을 세워 달라는 요청을 했다. 모든 종교의 차별 없이 동학군이든 관군이든, 기독교인이든 악마를 믿는 사람이든 모두 합심하여 깃발 을 높이 세웠다. 이 깃발은 흰 색 바탕의 가운데에 성(聖) 조지(George)의 십자가가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십자가 깃발 아래 모두 모여 조선말로 ‘예수 이름 높여서 다 찬양하여라’를 불렀다.”

1895년 소래교회에 게양된 성조지의 십자가깃발

 

이런 변화는 당시 일본군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안전을 보장해 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동학과 기독교의 관계가 크게 변화했다는 것을 뜻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동학혁명 말기부터 동학군의 기독교 개종 현상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후퇴하던 동학군들이 선교사를 찾아가 입교(入敎)하는 일도 생겨났다. 물론 우선적인 목적은 보호받기 위함이었지만, 계속된 선교사의 가르침에 세례 받고 신도가 된 동학군들이 많았다.

 

매켄지는 동학의 기독교적 요소를 중시했다. "동학의 한 지도자는 기독교도와 동학교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러므로 동학과 기독교는 동일하다"고 말했다는 것을 적고 있다. 메켄지는 동학에 대한 이해는 아마도 전킨 선교사의 글을 읽은 것 같고 대부분 현지 동학인들을 통해서 알게 된 정보라 하겠다. 그는 "동학교도는 몸을 정결하게 하며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종종 헌금도 바친다, 몇몇 지도자들은 성경을 소지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서양 사람들은 동학교도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Elizabeth McCully는 맥캔지의 선교활동을 ‘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Rev. W. McKenzie of Korea'(1903)란 제목으로 출판 하였다. 이 맥컬리의 저술은 ’케이프브랜톤에서 소래까지-윌리엄 존 맥캔지 선교사의 생애와 황해도 선교기- 유영식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2‘로 소개되었다. 김희영, 개화기 선교사들의 동학 인식-기독교의 영향과 과련하여, 동학연구 30, 2011.6, 51-69쪽를 통해 소개 되었다.)

 

이어 맥캔지선교사는 12월 3일 일기에서 서경조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한 동학지도자가 동학교리를 가르칠 때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하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매켄지선교사는 동학교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장치 기독교도가 될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다. 실제 백범 김구선생도 처음에는 동학교도였다가 기독교로 전향한 바 있다.

 

매켄지와 많은 친분을 나누었던 언더우드 여사 역시 동학을 중국의 의화단과 같은 반서구적이면서 조선을 위한 조선의 신조로 판단했다.

언더우드 여사에 의하면 "동학의 명분이란 동학교도의 목표는 간단히 말해서 ‘오리앤트를 위한 오리엔트’, 또는 ‘조선을 위한 조선’이었다는 것이다. 동학교도들은 서구인들, 서구적 사상, 서구적 개혁과 변화를 물리치고 옛날의 법과 관습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재확립하고자 하는 요구와 뜻을 선언하였다" 고 했다. “이것이 갑작스럽게 조직되어 놀라울 만큼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된 까닭은 분명히 수많은 썩어빠진 관리들의 지나친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그 관리들은 세금을 부당하게 높이 매겨 사람들을 괴롭혔고 그 결과 불길하고도 무서운 불만이 싹트게 되었다.

동학당은 여러 면에서 중국의 의화단과 비슷하다. 자기들은 죽지 않으며 총을 맞아도 다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 조직은 빠른 속도로 온 나라에 퍼졌고 관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청한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국은 이 반란을 누르겠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고, 일본인들은 이를 이용했다. 그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상대방의 동의가 없이는 어느 편도 조선에 군대를 보낼 수 없다는 상호 약속이 있으며, 그 약속을 어기면 ‘개전 사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그들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대궐을 포위하고 제물포로 들어오는 중국 군함을 침몰시켰다.”고 기록하였다.

 

반면 영국여성으로 작가 겸 지리학자로, 63세의 나이로 1894년부터 1897년 사이 4차례 조선을 방문하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는 동학에 대해서 "모두 중요하고 대규모로 조직된 운동이었고, 명분 또한 분명하게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동학의 지도자를 반란자라고 부르기 보다는 무장개혁자(armed reformer)로 부르고 싶었다"고 하여 서구인들이 보는 관점이 공통적인 면도 있지만 다양했다.(H. 언더우드 지음, 신복룡, 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 집문당, 1999)

 

일본에 머물면서 선교사로 교육자로 언론인으로 친일 활동하던 그리피스(William Elliott Griffis 1843-1928)목사가 있다. 그는 1882년 10월에 “꼬레아, 은둔의 나라”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그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 대해 편향적인 이해를 가졌고 조선이 일본에 비해 미개한 나라라고 말하였다. 이 같은 그의 잘못된 인식이지만 한국에 대한 소개서가 아직 많지 않은 서구세계에서는 그의 책이 널리 알려졌었다.

그리피스는 그의 저술에서 청일전쟁을 언급하는 가운데 동학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동학의 창도와 관련하여 수운 최제우의 천주교에 관한 관심을 언급하고 있다. 즉, 최제우가 조선의 천주교도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들에게 가헤진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데 감명을 받아다는 것이다. 조선의 다양한 종교적 전승에 비교하여 천주교는 무자비한 고문에도 신자들이 그들의 신념을 포기하지 많을 정도로 강한 구속력을 갖는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저자는 최제우가 상제의 계시를 받고 서양의 천주교에 걸맞는 조선의 천주교, 즉 동학을 창도하였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천주교는 외래종교로 조선 문화적 상황에는 맞지 않고 따라서 조선의 문화적 전승을 기반으로 조선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道, 곧 동학을 확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동학의 기본적인 원리를 단고 있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공자의 윤리와 그 계승자들이 철학에서, 노자와 그 주석가들의 저술에서, 그리고 불교의 경전과 그 관련된 전거에서 발췌한 것을 종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그리피스는 동학의 교리, 문체, 그리고 기도문등의 형식이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최제우와 그의 교도들이 ‘외국인과 다를 바 없는 조선인’ 또는 천주의 추종자, 즉 천주교 신자라는 공식적인 혐의를 받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최제우가 재판에 회부되어 고문을 당한 다음 처형되고 그의 교리가 불법적인 것으로 낙인찍힌 것도 그가 천주교도이며, 그의 교리 역시 천주교와 다를 바 없다는 이유에서 이였던 것이다.(김희영, 개화기 서양인들의 동학 이해, 동학연구, 30)

 

그리피스가 조선을 ‘은둔의 나라’라고 말한데 대해서 지금부터 120~130년 전에 이런 표현이 조선(대한제국)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것이라고 맹비난한 분이 있다. 바로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이다. 조선이 왜 은둔의 나라인가 그러나 1886년(고종 23) 육영공원(왕립영어학교) 교수로 입국한 이래 조선을 제2의 조국으로 삼았던 헐버트가 보기에 그리피스는 문외한에 불과하였다. 헐버트는 특히 “1882년 출간된 이 책(<은둔의 나라 한국>)은 너무 많은 오류를 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리피스가 한 번도 조선(대한제국)에 와보지도 않고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 관련 책을 썼다”고 비판했다. 일본에 앉아 일본, 중국, 서양 자료를 토대로 쓴 조선 이야기니 왜곡·편향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1902년 그리피스가 미국 동부에서 발행되는 잡지(‘뉴잉글랜드’)에 ‘한국, 난쟁이 제국(Korea, the Pygmy Empire)’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기사를 본 헐버트가 분노하였다. 헐버트는 “한국인을 마치 미개하고 지능이 낮은 열등 민족으로 표현했다”는 반박글을 기고(‘한국평론’ 1902년 7월호)하였다. 아프리카의 왜소한 부족을 가리키는 ‘피그미’는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작고, 지능이 낮은 부족’으로 해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또한 “백두산 천지의 수원지를 압록강과 두만강이라 왜곡했고, 조선을 ‘Chosen’으로, 백제를 ‘Hiaksi’로 표기하는 등 많은 인·지명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했다”고 분개했다. 헐버트는 “조선은 지금 개화를 앞당기고 있고, 정치형태도 변하고 있어 더는 운둔의 나라가 아니”라면서 “그리피스는 제발 조선에 와보고 조선 관련 글을 쓰라”고 그리피스에게 제안하였다.

조선이 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가 헐버트가 또 하나 수정을 요구한 표현이 있다. 바로 ‘조선(朝鮮)’을 ‘Morning Calm’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을 잠깐 방문한 퍼시벌 로웰(1855~1916)이 1886년에 쓴 책 제목(<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국호에 ‘아침 조(朝)’가 들어가 있으니 로웰이 ‘Morning’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헐버트는 “‘밝다. 아름답다. 깨끗하다’는 뜻의 선(鮮)자를 왜 ‘고요하다’는 뜻의 ‘Calm’으로 해석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였다.

헐버트는 만약 조선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고요한 아침’이 아니라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이라는 뜻인 ‘Radiant Morning’이나 ‘Morning Radiance’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기환의 Hi-story: 조선이 조용한 은자의 나라라고?2021.12.24.)

 

그리피스가 조선에 와보지도 아니하고 동학을 소개한 바를 여기에 소개한 이유는 바로 당시 일본 특히 일본의 지식인들이 동학에 대한 판단을 듣고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를 통해 일본의 잘못된 인식을 알고자 하였다.

 

한 사람을 더 소개하려한다. 그는 러시아제국의 반정부인사로 후에 폴란드문학아카데미총장을 지낸 바츨라프 세로세프스키(Waclaw Kajetan Sieroszewski 1858-1945)이다. 그는 극동을 여행하던 중 조선을 방문하여 “코레아 1903년 가을”이란 조선견문록을 당시 사진들과 함께 발간하였다. 그는 여기서 동학을 소개하고 하고 있는데, 그는 동학의 가르침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동학당은 여러면에서 중국의 의화단 비적과 유사한 독특한 종교적 신비주의 교파였다고 기록하였다. 의화단 비적처럼 외국인을 증오했고, 구습을 회복하는 것이 조국 구원의 길이라 여겼고, 비밀스럽고 신비한 부적과 건강을 회복시켜주고 죽은자를 부활시켜 준다는 주문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동학의 영향력 확대와 관련하여 그리피스는 정도를 더해간 관리의 부패와 압제를 지족하고 있다. 즉, 그로인해 괴로움을 겪던 농민들에게 동학은 어둠 속에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동학이 종교운동으로 시작된 것이었지만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정치적인 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희영. 그리피스 책 599-600)

 

이와 같이 당시의 서구 선교사들과 대부분 외국여행자나 외국신문기자들은 동학이 천주교로부터 와서 기독교의 영향이 상당히 지배적인 것으로 판단하였고, 나름대로 동학은 서학을 끌어들인 오리엔탈리즘으로서 사회현실의 부조리를 보고 현실개혁으로 뜻을 이루려는 실천종교로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후대 어떤 사람들은 동학이 실천과 개혁을 추구하는 기독교와 많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훗날 많은 동학인들이 교회로 들어왔고, 이들이 항일개혁운동을 하는데 선두주자로서 역할을 하였던 것이라 이해하였다.

 

실제로 민족 33인 대표 중에 동학(천도교)교도가 15명으로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것만 보아도 동학이 항일운동에 앞장을 섰고, 또한 기독교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동학에 기독교와 동일한 요소가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서양종교란 인식으로 인해 ‘갈등과 배척’ 관계였던 동학과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직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더 이상 배척해야 할 서양의 도가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고, 점차 ‘이해와 공감’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특히 서북지역 특유의 민족의식으로 인해 양자가 반일(反日) 저항면에서 더욱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협력관계로까지 나아갔다. 1900년대 동학의 3대 교조 손병희의 의지로 구성된 진보회(進步會)에 개신교 지도자 서상륜이 의장을 맡았던 것이 좋은 예이다. 그리고 그 협력은 기미년에 일어난 3.1 운동에서 꽃을 피웠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개신교 15인, 불교 2인, 기타 1인으로 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천도교인과 개신교인이 숫자를 양분하여 연대한 점이 주목된다.

천도교 측의 대표 가운데 손병희를 비롯하여 양한묵, 박준승, 이종훈, 홍기조, 권병직, 권동진, 라용환, 라인협, 임예환, 홍병기 등 11인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홍기조는 평안도 지역으로의 포교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양한묵은 진보회를 비롯하여 자강운동에 참여하였다. 15인 가운데 나머지 4인도 <활빈당>에 가입한 최린, <대한협회>를 이끈 오세창, 황성신문 사장을 역임한 이종일, 그리고 김완규 등 대체로 한말 계몽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제창되자 이에 고무된 천도교 간부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최린 등은 민족자결과 자치운동을 모색하였다. 또한 평양의 장로교 기독교도들도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개신교 측은 오산학교장 이승훈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와 교섭하였다. 개신교 측에는 서울의 감리교도 참가하여 1919년 2월 24일 천도교와 개신교의 연합이 결정되었다.

중앙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만세운동도 각 지역의 천도교, 개신교 조직과 서울에서 내려간 학생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천도교와 개신교의 교세가 강한 평안도 지역에서 일찍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평양의 경우 세 부류가 시내에서 합류하여 만세운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3월 1일 장대현교회의 장로교인들과, 남산현교회의 감리교인들, 그리고 설암리 천도교당의 천도교인들이 오후 1시경 각각 대형태극기를 게양하고 광무황제 봉도식과 조선독립 선포식을 개최한 뒤, 수백여 명이 시내로 행진하여 연합 만세시위를 벌였다. 3.1운동에서 개신교와 천도교가 연대한 실상은 앞으로 자료발굴과 연구가 진전되어야 할 부분이다.(기독교사상 2014년 3월호. 이영호, 동학과 개신교, 그 갈등과 소통의 이야기. 28-29쪽. 이영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4. 군산 동학인들의 활동

(***김중규: 군산근대역사관 관장이 연구 발표한 <군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과 특징>,2019, 동학학보 제51호를 소개한다, cf. 이이화, 동학농민혁명과 군산지방의 역할,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과 새로운 사실들, 김중규, 군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과 특징)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태인, 고부, 원평, 전주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곳이 주요 무대는 맞지만, 군산에서도 동학의 불꽃은 타올랐다. 2019년 5월에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125주년을 맞이하여 ‘군산, 동학에 물들다’라는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김중규 박물관장은 잊었던 역사의 장면을 찾아내어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었다. 특히, 이 전시회에서는 49명의 군산 출신 농민군을 일일이 거명하며 그들의 행적을 조명한 바 있다. 봉건제도와 외세에 저항하며 뜨거운 피를 뿌렸던 자랑스러운 선열들이 우리 앞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언제부터 군산의 주민들이 동학을 접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1880년대 중반 경 익산 등지에서 동학이 포교를 시작하여 1880년대 후반 전라북도 전역에 포교가 확대된 기록들을 볼 때 이 시기 군산지역의 임피, 옥구, 군산진의 일부 백성들이 동학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군산시사」에 의하면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 대집회 때 옥구현 대접주 장경화가 참여했으며

1894년에는 허공집이 입교하여 지도자가 되었다 한다. 또한 오사옥, 장원경이 입교하였다고 기록한다. 1차 봉기에 군산지역 동학농민군의 참여와 관련한 또 다른 기록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조사자료(이하 참여자 조사자료)」에서이다. 참여자 조사자료에 따르면 군산의 옥구지역 출신 참여자는 5명이다. 그중에 허진(許鎭)의 참여 내용에는 “허진은 1894년 3월 백산 봉기에 전라도 옥구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함”이라고 기록하여 군산의 옥구현 출신 허진이 1차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거병 시점인 백산 대회에서부터 개인이 아닌 군산지역 옥구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석했다고 한다.

 

“옥구 동학농민군 백산 대회 참여”와 관련한 또 다른 자료로는 〈전라도 고부민란시초〉이다. 이 문서에는 “~1894년 3월 8일 전녹두가 거느린 수천 명이 부안읍에 들어가 군기고를 탈취하였고 옥구, 태안, 고부의 군기고도 탈취하여 고부에 진을 쳤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글은 작성자와 작성 시점이 밝혀지지 않고 다만 전라감영에서 고부민란의 원인과 경과에 대하여 보고서 형태로 작성한 문서로 추정되는데 전봉준을 전녹두로 표현하고 특히 부안, 고부는 이해가 가지만 태안은 태인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여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문서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문서에서 옥구의 군기고를 탈취하여 고부에 진을 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앞서 허진의 옥구 농민군 백산 대회 참여 내용을 상호 보완해주는 자료이다.

 

또 다른 관련 자료는 앞서 언급한 「군산시사」이다. 이 자료에서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때 허진과 양기용이 참여했다고 하여, 허진의 백산 대회 참여가 사실임을 말해준다. 이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1차 봉기 때 군산지역은 옥구현 대접주 장경화가 1893년 보은 대집회에 참여 할 정도로 자체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1894년 3월에는 옥구현의 동학농민군들이 허진을 중심으로 거병하여 옥구현의 군기고를 탈취한 후 백산 대회에 참여했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혁명 당시 군산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동학군이 호남을 장악하고, 전주 감영까지 쳐들어오자 놀란 고종 임금은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고 인천항에서 창룡호, 한양호라는 군함 두 척에 경군을 태우고 군산포로 가게 한다. 동시에 청나라 군함 평원호는 청병을 태우고 군산포로 간다. 군산포에 하선한 이들은 임피를 거쳐 전주로 진격했다. 이때가 1894년 갑오년 4월 6일 군산포에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파견되어 온 홍계훈의 진압군과 관련한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군산진첨사보고서와 중국측 기록인 동정일기(東征日記), 이홍장전집(李鴻章全集), 당시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참고해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1년(1894년) 4월 4일 기록에는 하교하기를 “초토사(招討使)가 오늘 신시(申時)에 배로 출발하면 언제 군산에 도착하는가?”하니,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모레 아침에는 도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들이 다 흩어지면 하필 꼭 상륙하겠는가?”하니,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상륙할 필요가 없지만 또한 선뜻 돌아오기도 어렵습니다. 마땅히 형편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보면, “정부는 4월2일 초토사에 홍계훈을 임명하고 4월4일 정오 인천항에서 창룡호, 한양호에 각각 1대씩 2대를 싣고 홍계훈은 청국 군함 평원호에 3대를 싣고 오후 3시 출발하여 당일 석양 무렵 군산지역 군산진의 군산포에 도착 6일 오후 평원호의 선체가 커서 하선을 못하여 창룡호, 한양호에 분승시켜 군산포에 상륙 임피에서 노숙한 후 7일 전주성에 입성하였다.”라 하였다. 위 내용을 보면 제물포항에서 4일 출발 전승선 상황에서부터 5일 출발하여 6일 군산지역에 도착 상륙하는 과정 그리고 바로 전주로 출발하여 6일 저녁 군산지역의 임피현에서 저녁 식사 후 노숙을 하고 7일 전주성에 도착하는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 내용들은 이제까지 동학농민혁명 기간 군산지역의 역할과 관련되어 비교적 많이 알려진 사실들로 800여 명의 경군(京軍)상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전주감영과 동학농민혁명군 간의 호남지역 53개 군현에 집강소 설치 약속에 따라 1894년 7월부터는 각 군현에서 집강소가 설치되어 운영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군산지역의 임피현과 옥구현 그리고 군산진에도 집강소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피현, 옥구현, 군산진의 집강소 설치와 관련해서는 별도의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군산시사」에는 옥구현에 대접주 장경화와 두 명의 지도자가 있다고 하며, 참여자 조사자료에 등재된 주성갑은 옥구의 수접주라고 기록되어 있어 옥구지역 동학의 규모가 대접주, 수접주, 지도자 등이 있는 집강소가 설치될 만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피현 역시 오지영의 「동학사(東學史)」에서는 북접파에 속하는 각 지방의 주요 인물로 임피(臨陂) 진관삼(陣寬三)을 거론하는데 진관삼은 참여자 자료조사20에 등재된 임피 출신 10명 중에 한 사람으로 “1894년 전라도 익산 각지에서 집강소 활동을 전개한 뒤 같은 해 10월 2차 봉기 시 임피현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임피현도 집강소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군산진의 경우 1894년 11월 군산진에서 작성한 <향소열명기>에는 군산진의 유향소 책임자 명단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집강(執綱) 전대창(田大昌)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문서가 작성된 11월은 군산진이 동학농민군의 영향 아래 있는 기간으로 동년 11월 30일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에서 “진(鎭)의 아전과 백성들이 대부분 사악한 데 물들어 비류와 한통속이 되어 있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당시 상황을 볼 때 갑오년 11월 군산진의 집강 전대창이 전통적 의미의 집강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군산진에 동학농민군의 집강이 있었고, 그가 업무를 보는 집강소도 존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집강소가 설치되는 시기 군산지역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군산진에서 작성한 <군산진 소명서〉이다. 이 문서는 제목도 없고 작성자와 받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는 문서인데 내용상 작성자는 군산진의 아전이 전주감영에 갑오년 자신들의 처지와 고통을 알리고,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변명의 취지로 작성된 문서로 추정되어 가칭 <군산진 소명서〉라 하고 있다. 따라서 내용의 전체 흐름은 군산진의 관리와 백성들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하는 과정을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같은 해에 작성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이나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 내용을 보건대 진압군에게 목숨을 보존하고자 실상을 왜곡하는 정황이 있어 문서의 사실 관계는 신뢰할 수 없다. 하지만 갑오년 군산진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 정황을 파악하는 문서로서의 가치가 있다. 작성일자는 갑오년 12월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는 “....본진은 금년 5월에 전운소가 중간에 폐지되기 이전까지는 애당초 동학이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6월에 갑자기 각 처의 동학들이 날마다 침범해와 무덤을 파내고 가산을 멋대로 빼앗아가니 개개인들이 삶을 지탱하고 보존할 수가 없어서 비록 흩어져 살려고 했으나 바로 그물을 치니 하늘과 땅 사이에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군산진의 경우 5월까지는 동학농민군이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운이 끊어진 6월부터 각처의 동학도들이 날마다 침범해 와서 군산진이 점령된 상태였음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5월 군산에는 폭도(동학)를 볼 수 없었다.” “1894년 6월 군산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주민이 모두 동학에 입도한 상태였다.” 기록하여 5월까지 군산진에 동학농민군이 없었음은 두 문헌이 일치한다. 그러나 6월 군산진이 동학농민군의 영향아래 놓이게 된 과정을 <군산진 소명서〉는 타의(외부 농민군의 공격)에 의해서였다고 하지만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자체적 봉기로 보고 있다. 또한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에는 “군산진은 일개 진(鎭)의 아전과 백성들이 대부분 사악한 데 물들어 비류와 한통속이 되어 있다”라고 적어 <군산진 소명서〉의 타의에 의한 동학 참여보다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같이 군산진이 자발적인 봉기의 여건이 강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참여자 자료조사에서는 임피 출신 김준홍(金準弘)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준홍은 전라도 임피 출신으로 1894년 7월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후 1900년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처형됨”이라고 하여 임피지역의 접주 김준홍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미나미 고시로 문서에 기록된 고도정의 문보에는 “임피 북일면 성동의 탁지대신댁 산지기 고도정이 문보 합니다. 본동의 접주 김문화는 동학의 괴수라고 일컬으면서 한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데 날이 갈수록 더 심하였습니다. 도정은 7월에 그의 행패를 견디기 어려워 집을 버리고 달아나 숨어 버려 저희 집은 회소(會所)가 되었습니다. 본동의 잔민(殘民)들에게는 세미를 어느 명목으로든 두세 번이나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바람에 거주민들이 대부분 유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연변에 오가는 배들을 마음대로 붙잡아 들였으며, 장사꾼의 전곡을 무수하게 탈취하였습니다.”라고 당시 군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을 남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의 구전에 의하면 군산진에 속한 석치리(문화동) 출신 김학배는 설애(중동)접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밖에도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1894년 7월 8일 동학농민군 군산에서 강경으로 이동-군산에서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강경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강경에서 석성을 거쳐 공주로 가서 그 곳에서 바로 경성을 향하여 출발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이상의 자료들을 근거로 보면 집강소 시기 군산지역에는 임피현과 옥구현 그리고 군산진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옥구현의 경우 대접주 장경화, 수접주 주성갑, 지도자 허공집이 있었으며 임피현에서는 김준홍 접주가 활동하였고, 성동(현 성산면 성덕리)에서는 김문화 접주가 회소를 설치하고 활동하였다. 그리고 군산진에서는 집강(執綱) 전대창(田大昌)이 있었고 설애(중동)에 김학배 접주가 활동하였다. 그리고 칠월에는 수백명의 동학농민군이 군산진에서 강경으로 이동하였고, 금강변의 군산진과 성동리 달개포구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이 세곡을 자체적으로 징수하는 상황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최시형의 동학 총동원령에 따라 2차 봉기를 일으킨다. 이 시기 군산의 임피에서는 홍교식(洪敎植), 홍경식(洪敬植), 김상철(金相哲), 최순 봉(崔順奉), 유원술(劉原述), 김해룡(金海龍), 진관삼(陳官三), 장한여(張漢汝) 등 이 임피현의 동학농민군으로 2차 봉기에 참여한다. 이 기간은 동학군이 각 지방 관아의 무기고를 탈취하며 삼례 봉기에 참여하는 시기로 군산지역의 군산진에서는 10월 22일 군산진에 부임한 최건수 군산진 첨사가 10월 23일 군산진이 보유한 무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확인하는 문서를 남긴다.

 

또 다른 군산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 여기에 호남의 김제(金堤) 강명선(姜明善), 임피(臨陂) 김해룡(金海龍)등이 거느리는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금강(錦江)을 건너 이에 합세하니 그 세력은 능히 호우지방을 한때나마 장악할 수가 있었다.”라고 하여 동학군과 진압군이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긴장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금치 전투에서 처절한 패전을 하게 된 동학농민혁명군은 김개남 장군의 청주공격 실패, 진압군의 전주성 탈환, 태인 전투 패배 이후 전봉준 휘하의 농민군이 해산하며 실질적으로 와해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 군산 관련 동학농민혁명군 기록을 보면 동학군의 패전에 따른 진압군의 진격과 학살이 이어진다.

 

11월 21일 우금치 전투에서 후퇴하여 서천 인근에 주둔하던 동학군을 토벌하는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에 의하면, “20일 한산을 점령하고 21일 .... 신아포에서 강을 건너(군산쪽이 아니고 서천군 관내임) 임피 출신 김해룡 등 7명의 적을 급습하여 죽였습니다.”

11월 22일 죽산부사 이두황의 보고에 의하면, “22일에는 나포(羅浦 군산시 나포면)에 도착하여 동도 몇 명을 정탐하여 붙잡아 처리하였으며, 책자로 만들어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23일에 또 일본군 사관의 지시로 강을 따라 내려가 서포(西浦 군산시 나포면 서포리)를 수색하여 임피(臨陂 군산시 임피면)에 다다랐고, .... 25일에 진군하여 전주에 이르러 아군 및 일본군 소좌(少佐)와 회합하였습니다.” 또한 『갑오농민혁명사』에서는 “임피 (臨陂·羅浦) 하치홍(河致弘), 이경한(李敬漢), 김래경(金來敬), 이중백(李仲白), 김기서(金奇瑞), 조학동(趙學東), 권덕수(權德秀), 김윤칠(金允七), 김달환(金達煥), 서경삼(徐京三), 김영언(金永言), 이기찬(李起贊), 조만홍(趙萬弘), 박경희(朴京喜) 등 14명을 11월 24일 임피, 나포에서 총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갑오농민혁명사』의 기록은 11월 22일 죽산 부사 이두황의 보고 내용과 동일한 사건으로 추정된다.

11월 25일 고도정의 문보에 의하면, “임피 북일면 성동의 탁지대신댁 산지기 고도정은 .... 다만 이 형편을 틈타 곧장 본동으로 들어가 이달 25일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할 즈음에 마을 앞에 불을 지르고 성동리의 접주 김문화를 결박하고 불에 던져 곧바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놈의 집도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그밖에 무지한 동도(東徒) 거주민으로 구타를 두려워하여 입도(入道)한 자들과, 도박 빚을 피하여 겉으로만 도를 받드는 체하는 자들이 모두 한꺼번에 그림자처럼 배도(背道)하였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문서인 도정(都正) 고태흥이 전라감사에게 올린 소지에는 앞부분은 미나미 고시로 문서의 고도정 문보와 같으나 뒷부분은 “ .... 그런데 지금 경군이 내려와 동학도들을 제압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11월25일 성동에 들어가 김문화를 불에 태워 죽이고 나머지 일당들도 모두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그 밖에 입도자 4~5인은 동학도들의 구타에 못 이겨 돈을 내고 명색만 입도한 자들로서 이때를 타 김문화 일당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모두 춤추며 나와 큰소리로 배교한다고 외쳤습니다.”라고 좀 다른 내용을 기록한다. 그러나 내용을 볼 때, 미나미 고시로 문서의 고도정은 전라감사에게 글을 올린 도정 고태흥이며 그가 접주 김문화 뿐만 아니라 김문화와 함께한 동학농민군들을 같이 불태워 죽인 것으로 추정한다.

 

서산군수 성하영이 보고에는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이 보고 합니다. 이번에 서천과 한산 등 두 읍에서 적을 격파한 뒤에 나머지 무리들이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여러 날을 순행(巡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산(群山)의 경우는 비록 호남에 있기는 하지만 호서(湖西)에서 나루 하나만 건너면 도달하는 지역입니다. 달아난 적이 군산진에 몰래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지난달 29일에 서천에서부터 행진하여 한산을 거쳐 30일에 바다를 건너 군산에 도착하였지만 적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미 달아난 뒤였습니다. 부대를 주둔하고 뒤쫓아 정탐해 보니 일개 진(鎭)의 아전과 백성들이 대부분 사악한 데 물들어 비류와 한통속이 되어 무기를 빼앗았으며, 공사로 내왕하는 배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실은 곡물을 총을 쏘며 빼앗아 창고에 쌓아 두고 출납할 때에는 도장을 찍는 것을 마치 관청의 장부와 같이 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 둔 쌀 602섬과 조(租) 80섬, 콩 7섬은 군산진의 첨사(僉使) 최건수(崔健洙)가 있는 곳에 맡겨 두었습니다. 좌수(座首) 문규선(文奎璇)은 오랫동안 동학에 물든 자로 곡식을 맡은 박가(朴哥)와 자초(煮硝)를 담당한 최가(崔哥), 도포수(都砲手) 문가(文哥) 등과 함께 붙잡아서 총살하였습니다. 그 후 전곡(錢穀) 외 지출과 상하군기(上下軍器) 장부 및 미곡과 군수물자는 군산진의 공형(公兄)에 맡겨 두었으며, 고음(侤音) 2건은 선봉진으로 보냈습니다. 당일 옥구현감(沃溝縣監) 김주호(金疇鎬)가 전(錢) 1백냥, 소 1마리, 담배 20묶음, 짚신 20켤레, 술 7동이를 가져와서 병정들에게 먹였습니다.”라고 기록한다.

또한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에 대하여 갑오쪽 군정실기에서는 “좌수(座首) 문규선(文奎璇)과 곡식을 맡은 자와 염자초를 담당한 자와 도포수(都砲手) 등 4놈이 거괴(巨魁)여서 모두 (붙잡아서) 총살하였습니다. 쌀 602섬과 조(租) 80섬, 콩 7섬은 군산진의 첨사(僉使) 최건수(崔健洙)가 있는 곳에 맡겨 두었습니다. 화약과 탄환 및 깃발들도 또한 많이 빼앗았습니다.”라고 성하영의 보고와는 약간 다른 내용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우금치 패배 후 군산지역의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사람들은 도정 고태흥의 표현처럼 “다만 이 형편을 틈타” 개인적 원한과 복수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한 죽산 부사 이두황과 일본군에 의하여 나포, 서포, 임피의 동학농민군 14명이 총살당하였고, 서산군수 성하영의 진압군에 의하여 군산진의 좌수를 비롯한 동학 지도자 4명이 총살당하는 상황이 된다.

 

또한 12월 10일 옥구출신 동학농민군 최중여가 전주감영에서 죽음을 당한다. 이 와중에 동학 3걸 중 한 명인 손화중이 1895년 3월 30일 사형당하기 전 손화중의 친척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진압군들이 집을 불태우자 부인 류씨는 네 살짜리 셋째 아들과 한 살짜리 막내딸을 안고 화를 피하고자 군산의 옥구현으로 숨어 들어와 김씨로 성을 바꾸고 3년간 숨어살다 무장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진압은 1895년에도 지속되어 2월 19일 군산진에서 동학 관련 인물들을 체포하는데 체포된 자는 경포리의 김사원, 안덕량 석치리의 김응방, 김학수(그의 아들 종록을 대신해 체포함) 신풍리의 전두용(그의 삼촌 준여를 대신하여 체포함), 전행선, 임피면의 양가 등 7명이다. 이 기록은 을미년 2월 <비퇴수도기乙未二月日匪頹囚徒記>에 기록된 내용인데 석치리는 현재 군산시 문화동에 위치한 김해 김씨 안경공파의 집성촌으로 김해 김씨 150가구 정도가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3선의원 김판술1909-2009이 이곳출신이다) 석치리의 김응방은 1869년생으로 족보에는 남식으로 올라 있다. 그리고 김학수는 기유생(1849년)으로 특이한 점은 김학수는 본인이 동학농민군이 아니고 아들 김종록이 1878년생으로 16세에 동학에 가담하였으나 체포할 수 없으므로 아들을 대신하여 체포하는 연좌죄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비퇴수도기>에는 이름이 없지만 이 마을 출신 김학배는 <비퇴수도기>에 기록된 김응방과 김종록을 동학농민군으로 이끈 인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학배는 석치리 김씨의 3대 독자 장손으로 배움이 많아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설애(경포리)접주를 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동학 가담자 명단에서 김학배의 이름을 빼내기 위하여 집안의 전답을 모두 팔았다고 한다.

 

결국 가담자 명단에서 이름을 빼내어 목숨은 구했지만 김학배와 후손들은 평생을 이사 다니며 숨어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김학배는 두 딸을 계룡산 신도안의 천도교 마을로 시집보낼 정도로 동학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신풍리 전두용 역시 연좌죄형에 따라 삼촌 전준여를 대신하여 체포당하였다. 신풍리는 담양 전씨 야은파 집성촌으로

대신 체포된 삼촌 전준여는 1865년생으로 당시 29세였다. 이밖에도 1895년 2월 6일 미나미 고시로 문서에는 “아카마쓰 소위에게 옥구(沃遘)에 잠복한 아산(牙山) 지나(支那)의 잔병을 포박하기 위해 나주를 출발하여 공주에서 본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군산지역과 관련해서는 다소 의외의 청국 패잔병이 군산의 옥구에 있으니 포박하라는 명령이 일본군 문서에 등장하는데 이후 결과에 대하여는 확인할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군산지역에 위치한 군산진의 역할을 군사적 거점기지로서의 기능과 식량 병참기지로서의 기능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1) 군사적 거점기지로서의 역할

동학농민군이 군산지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문서는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는 자료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1894년 7월 8일 군산에서 동학농민군 수백명이 강경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강경에서 석성을 거쳐 공주로 가서 그 곳에서 바로 경성을 향하여 출발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에 대하여 「갑오군정실기」54에서는 “염자초를 담당한 자와 도포수(都砲手) 등 네(四)놈이 거괴(巨魁)여서 모두 (붙잡아서) 총살하였습니다. ..... 화약과 탄환 및 깃발들도 또한 많이 빼앗았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자초(煮硝)를 담당한 최 가(崔哥)는 화약제조 및 관리자를 칭하며, 도포수(都砲手) 문가(文哥)는 포수 중 우두머리를 뜻하여 모두 군사조직의 운영과 관계된 인물들이다. 또한 군산진에서 “화약과 탄환 및 깃발들도 또한 많이 빼앗았습니다”라는 기록을 볼 때 군산진에 있었던 동학농민군의 군사적 역량을 확인하게 한다. 진압 경군의 입장에서 군산지역은 1894년 4월 6일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이 상륙하여 전주성으로 이동한 상륙 및 병참기지로서의 거점이었다.

 

(2) 식량 병참기지로서의 역할

동학농민혁명군에게 있어 군산지역의 또 다른 역할로는 식량 병참기지의 역할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4년 9월 18일 삼례 대도소 군산진에 유박미(留泊米) 1천석 요구-삼례 대도소에서 군산진에 통문을 보내 유박미(留泊米) 1천석을 즉시 전주 대장촌으로 운반하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은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를 앞둔 시점에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에서 지방관청에 군량미를 공개적으로 요청하고 관청에서는 이를 수용하였다.

 

이밖에도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에는 “공사로 내왕하는 배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실은 곡물을 총을 쏘며 빼앗아 창고에 쌓아 두고 출납할 때에는 도장을 찍는 것을 마치 관청의 장부와 같이 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 둔 쌀 602섬과 조(租) 80섬, 콩 7섬”라고 기록하여 동학농민군이 700여 섬의 식량을 보관 운영했다고 보고하는데, 여기에서 출납이 관부와 같았다고 하니 이 곡식들이 각처에서 전투 중인 동학농민군에게 조달된 군량이 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제물포항에는 군산창의 미곡공급이 중단되었다.... 군산은 전주 옥구 익산 금구 태인 김제 등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의 주변 고울 세미를 모아 조운선에 실어 마포로 보내는 통로였다. ....기아에 허덕인 농민군은 쌀의 유출에 누구보다도 반감을 보였으니 군산창을 주목하지 않ㅇㄹ 수 없었다. 이 시기 농민군은 금ㄱㅇ입구를 틀어쥐고서 군산 옥구를 비롯해 장항 서천 한산을 석권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산창의 세미 불법 유출을 막았다. 그리하여 집강소기간 동안 일본 상인들이 이곳에 어린도 하지 못했다. .... 농민군들은 군산창이 폐쇄되자 제물포항을 한산하게 만들어 일본의 쌀 수입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던 것이다.(이이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분에 대한 언급은 다양하다. 이병규는 “군산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활동 양상이 새롭게 확인되고 있다.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에 따르면 ... 오랫동안 동학 활동을 한 좌수 문규선, 곡식을 맡은 박가, 최가, 도포수 문가 등을 체포하여 총살하였다. 서산군수 성하영의 진압 활동을 통해서 군산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매우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들의 조직에 좌수가 참여하고 있고, 곡식을 담당한 사람·무기를 담당한 사람이 있으며, 진압군에게 빼앗겼지만 상당한 양의 곡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군산지역 동학농민군들 활동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군산진은 포구로서 많은 교역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전봉준공초>에서 확인되는 폐정 개혁안의 내용은 주로 세금과 상업 활동에 대한 것들이 많은데 군산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농민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당시 상업 활동을 한 사람 중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있다는 점을 군산지역 동학농민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성하영의 보고를 다시 살펴보면 “일개 진(鎭)의 아전과 백성들이 대부분 사악한 데 물들어 비류와 한통속이 되어 있고 좌수(座首)는 오랫동안 동학에 물든 자로”라고 하여 좌수와 아전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동학에 물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군산진의 경제 문화적 환경이다. 군산진은 수군부대이며 동시에 군산창(群山倉)과 군산포(群山浦)가 공존하는 상업 포구지역이다. 따라서 그곳의 좌수, 아전 백성이 동학에 물들었다면 양반(좌수)과 중인(아전) 그리고 포구의 백성(상인)이 모두 동학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군산진 소명서>에서는 군산진에 진압군이 도착한 후 “진에 소속된 아전 중에 도망가서 흩어진 자가 지금 이미 반을 차지하고”라고 하여 동학에 가담한 아전들은 처벌이 두려워 절반 이상이 도망쳤다고 한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비퇴수도기(匪頹囚徒記**1895년 2월19일에 수포된)>에 기록된 7명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체포자 중 현재 군산지역 문중의 족보에서 확인 가능한 석치리의 김응방, 김학수는 김해 김씨 안경공파이고, 신풍리의 전두용, 전행선은 군산의 대표적인 토반인 담양 田씨 야은파이며, 이름 없이 성만 적힌 임피면의 양가 역시 임피면의 대표 토반인 남원 양씨로 추정되어 군산지역에서 다수의 중인 이상 신분계층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외에 경포 김사원, 안덕량이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포구의 상업적 특징을 지닌 군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농민뿐만이 아니고 지역 양반, 중인, 상인들도 참여하였다.

 

군산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1차 봉기와 군산지역 동학농민군 활동, 초토사 홍계훈의 군산상륙, 집강소 시기 군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2차 봉기 이후 군산지역 동학농민군 활동과 진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군산지역의 동학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동학농민혁명 기간 군산지역은 임피현과 옥구현 그리고 군산진에 집강소가 있었고 1차 봉기와 2차 봉기에 많은 군산지역 동학농민군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더불어 군산지역 중에서 군산진의 경우에는 상업적 특징이 강한 포구라는 특징 때문에 양반, 중인, 상인 등의 일반 백성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93년 3월 보은 집회에 옥구의 장경화 대접주가 참여했으며 역시 옥구의 허진이 1894년 5월 배간 대회에 옥구현의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여다고 한다. ... 갑오년 12월 30일 서산군수 성하영의 진압군이 군산진을 점령한후 임금에게 ‘일개 진의 아전과 백성들 대부분이 동학에 물들어 동학군과 한통속이 되어...그 우두머리인 좌수 문규선은 오랫동안 동학에 물든자로’라고 보고하여 군산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동학농민혁명 연표에 의하면,

1893년 3월 11일 교조신원운동을 벌린 보은 집회에 옥구현 대접주 장경화가 참여하였고, 옥구에서 허공집이 입교하여 지도자가 되었고 오사옥, 장원경이 입교하였다.

1894년 5월 1일-3일에 옥구 허진이 백산대회에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으며,

6일 초토사 홍계훈이 경군 800명을 군산진 상륙하여 전주로 이동하였다.

7월에 각처의 동학농민군이 군산지역에 집결하였고, 8월에 옥구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임피에 김준홍접주와 설애에 김학배접주가 활동하였으며 성동에 김문화접주가 회소를 설치하였다. 10월에 임피지역 동학농민군이 2차봉기에 홍교식, 홍경식, 김상철, 최순봉, 유원술, 김해용, 진관삼, 장한여 등이 참여 하였다.

11월 21일 성하영의 관군이 서천에서 임피 출신 김해룡등 7명을 사살하고 22일 최건수가 군산진 첨사로 부임하였고, 이두황의 관군이 나포, 임피에서 동학농민군 14명을 처형하였고, 30일 성하영관군이 서천에서 군산진에 상륙하여 좌수 문주선등 4명을 처형하였다.

1985년 1월10일 옥구출신 동학농민군 최중여등이 전주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3월19일 군산진에서 동학교도 김시원, 안덕량, 김응방, 김학수, 전두용, 전행선, 임피의 야가가 체포되었고,

21일 고진호가 옥구현 동헌에서 관군에게 처형되었다. 그리고 4월 24일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이 교수형을 당하므로 동학농미혁명의 막이 내리게 되었다.

 

2019년 5월 11일을 기해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김중규관장은 군산의 동학농민혁명전을 개최하여 125년 전 군산 땅에 울려 퍼진 군산 농민군들이 흘린 숭고한 피로 금강 하구 갯벌이 더욱 붉게 물들이었던 그 자랑스런 자취를 확인시켜 주었다.

 

 

 

5. 군산 첫 선교사 전킨의 동학 이해

 

예양 협정으로 호남지역을 선교지로 할당 받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준비하기 위해서 1893년 6월에 정해원조사를 전주에 내려 보내 완산 은송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게 하였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9월에 전킨선교사와 테이트선교사가 전주에 내려와 두 주간 머물렀었다. 1894년 3월 말 레이놀즈선교사와 드루의료선교사가 전라도지방의 선교 적합도를 알아보고자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군산진에 내려 임피를 거처 전주성에 들어갔으며 전라지방을 종주하여 목포 순천에 까지 여행을 하였다. 4월 6일 초토사 홍계훈이 창룡호, 한양호, 평웒ㅎ에 800여명의 경군을 싣고 군산진에 도착하여 7일 전주성에 입성하던 그때 레이놀즈와 드루 역시 전주에 들어가니 간이 배밖에 나올 일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대단히 위험하였던 일이었다. 한편 4월에서 5월간에는 전킨선교사가 안성과 공주를 방문하여 예비 선교활동을 하였다. 여러 방면으로 호남선교의 적합성을 확인한 다음 마침내 1895년 3월 31일 전킨선교사와 드루의료선교사가 공식적으로 호남선교의 첫발을 내딛기 위해 군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군산진항 인근의 수덕산 기슭에 있는 초가집 두 채를 마련하였다. 두 선교사가 군산진항에 잔뜩 흐리게 낀 슬픈 역사를 알아채는데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 호남에 불고 있는 동학농민들의 들끓는 혁명의 함성이 군산지역에 맴돌고 있는 때였다. 지난 2월 19일 군산진에 동학관자를 체포하여 경포리 김사원, 안덕랑, 석치리의 김응방, 김학수, 신풍리의 전두용, 전행선, 임피 양가등이 처형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던 것이다. 사실상 서양 선교사들이 이러한 군산진에 들어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겁 없는 일이요 무오한 일이 아닌가? 혁명의 시간은 마치 초단위로 급하게 돌아갔고 서울에서 빨리 올라오라는 급전에 전킨과 드루는 군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킨선교사는 <The Korean Repository>라는 영문 잡지에 1895년 2월 호에 ‘동학 <The Tong Hak >’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린다. 그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 <The Korean Repository>紙는 개화기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관한 이해와 연구논문들을 소개한 대표적인 영문 잡지였다. 이 잡지에 전킨선교사는 동학에 관련해 당시 조선에 체류 중인 서양인들 특히 선교사들에게 동학에 대한 개론적인 이해를 돕고자 서술하였다. 전킨이 동학에 대한 연구를 얼마나 깊이 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글을 통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동경대전을 읽었거나 동학의 전문 서적을 보았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1892년에 한국에 온 그가 아직 한글 독해력이나 한문서적을 읽고 이해할 만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군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접촉한 여러 동학인들을 통해 동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겠다. 앞에서 소개하였지만 당시 군산에 수 백 명의 동학인들이 있어 동학 집강소가 운영되어 나름대로 동학지도자들이나 지식인들과 교류하였으리라 추정하게 된다. 당시 군산진항을 통해 동학인들의 미곡등 물자를 수송하는 창구역할을 하였으며, 전킨선교사가 서울로 돌아간 후 수 백 명의 정부군과 일본군들이 군산에 들어와 동학인들을 마구잡이 죽이고 붙잡아 참형하였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가서도 동학인들이 교주신원을 위해 탄원하는 모습들을 직접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신문기자처럼 그 때의 모습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본래 전킨선교사의 학구열은 대단하여 한국에 들어 온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한국어로 전도를 하였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익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의 심각성을 알아 동학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선교사들에게 동학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 동학을 영문 잡지에 기고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의 기사에서 동학의 창도과정, 동학의 교리 및 불가사의한 기적, 동학교도들의 참형, 그리고 동학의 사회적 영향력등에 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김희영, 개화기 서양인들의 동학인식. 동학연구, 30, 51-69참조)

 

전킨선교사의 <동학>내용을 발췌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 얼마 전 일본인 친구와 대화하면서 동학이 중국 일본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감사하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네,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 동학이 석유에 불붙이는 격이 되었습니다." 이 큰 전쟁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 더 많은 조사를 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동학은 1859년 경상도지방의 경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경주는 부산에서 북쪽으로 45 마일 떨어진 성벽 마을입니다. 창립자 최 채우는 학자였으며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몇 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발전을 목격 한 그는 그것이 참 종교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와서 전파하는 데 엄청난 돈을 썼으니, 사실이 되어야합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왜 추종자들이 지금 정부에 의해 범죄자로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는 매일 그렇게 피를 토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약을 먹었지만 더 나아지지 않았고 마침내 죽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태양 광선이 동쪽 언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졌고 그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의 이름을 "최재우 야!"라고 불렀습니다.

"예"

"누가 너에게 말하는지 알지 못 하겠는가?"

"예.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하느님이다. 나를 경배하라. 너는 백성을 가르쳐라."

최씨는 그동안 가장 궁금하였던 질문을 하였습니다.ᅟ“로마 카톨릭이 참 종교입니까?”

대답은- "아니다, 말과 때는 같지만 생각과 정신은 진리로부터 거리가 있다."

 

나는 위의 내용을 해석하지 않겠습니다. 신은 떠났습니다. 최 씨는 가까이 있는 붓을 들어 헐떡거리며 종이에 원형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예전부터 하느님을 경배 하였으니(당신에 관련된)모든 것을 선의에 따라 항상 우리에게 알려 주셨나요. 당신의 말할 수없는 생각이 우리에게 왔으니 우리의 소망대로 우리를 위해 풍성하게 하시옵소서. " 최씨는 두루마리를 집어 태워 재를 물 한 그릇에 붓고 마셨습니다. 즉시 그는 일어나 그의 병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최씨는 새로운 종교를 세우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성경대전 (Sung Kyeng Tai Chun*본래 동경대전인데 1890년에 성경대전이라 불렀다) 또는 "위대한 성서 (Great Sacred Writings)"라고 불리는 동학 성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교에서 5경과, 불교에서 정신 수양 법(*반야심경?), 도교에서 도덕경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사용 된 이름 중 하나는 세 종교 유불선 삼도의 이름을 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의 영향은 기도에서 하느님이라는 용어로 볼 수 있는데, 天主라는 이름을 선택하였습니다. 또한 적어도 간접적 영향이지만, 로마 카토릭은 동학 또는 동쪽 가르침이라는 이름에 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동양 종교의 조합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그 이름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경상도에서 시작된 동학 종교는 충청도와 전라도로로 퍼져 나갔습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발발 한 1865 년까지 그 수가 증가했습니다. 최씨는 로마 카토릭인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조정의 명령에 따라 경상도 감영이 있는 대구에서 참수 당하고 종교는 금지되었습니다.

 

동학은 일신론입니다. 그들은 윤회사상애 대한 불교의 믿음을 거부하고 예배에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식은 적고 간단합니다. 회원이 입문 할 때 의식의 주례자가 후보자를 먼저 이름을 부릅니다. 두 개의 양초가 켜지고 물고기, 빵 및 달콤한 술이 그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동학 기도문인 "시천주(*-조화정)"등을 합쳐 24 번 반복합니다. 촛불 의식을 마치기 전에 절을 하고 일어나서 연회에 참여합니다. 그 비용은 새로 입문자가 지불합니다. 그들은 희생제물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며 제사와 치성을 구별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예배 합니다 : 내용물, 황토와 매끄러운 돌 하나를 취하고 제단을 만듭니다. 그 위에 청수(淸水) 한 그릇을 놓고 밤에는 이마를 바닥에 대고 "시춘주(*-조화정)"등을 기도하며 절을 합니다. 기도자들이 기도가 끝날 때에 신의 은혜가 담겨져 있는 그 그릇의 물을 마십니다.

 

창시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을 때, 그는 종이쪽지(*부적)에 여러 가지 신비한 표시를 썼고, 한 병든 동학인에게 주어 졌을 때 즉각적인 회복을 가져 왔다고 합니다. 나는 최근에 충청지방에서 살해 된 동학인의 시체에서 가져온 종이 사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지판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거미를 그리는 아이의 첫 번째 시도와 매우 흡사합니다. 첫 번째는 이걸 가지고 다니면 수백 명의 악마가 너를 이길 수 없다”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몸을 보호하는 무기입니다. 한 동학인이 종이 중 하나를 들고 정부군 병사들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의 대담한 행동에 총 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더 대담한 병사가 총을 쏘고 동학인을 죽여 마법을 해제했습니다.

 

세 번째는 여행 중에 보호해줍니다. 이 미신은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본 마술사들이 같은 신비한 캐릭터를 통해 치유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동학은 의심 할 여지없이 그것을 중국에서 채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다른 기적의 힘에 대해 여러 사람들로 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름을 타는 것은 창시자의 습관이었습니다. 집을 뛰어 넘거나 한 언덕에서 다른 언덕으로 점프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동학의 지휘소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였습니다. 적이 갑자기 동학인의 방에 들어 왔을 때 동학인이 불가사의하게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진술에 약간의 진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중국의 예에서 보게 됩니다. 빈 지갑이 마술사의 명령에 따라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소위 기적은 외경 복음서들 중 하나를 상기시키고 그리고 세상에 있는 다른 종교 예배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의 신성한 주님과 연약한 인간의 모든 시도 사이에서 보여주신 진정한 기적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줍니다.

 

유교와 도교는 미래의 삶에 대해 아무 말도 없으며 동학이 불교도의 교리를 거부함으로 그들의 가르침은 오직 현재 세계에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 불멸이라는 위대한 성경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른 모든 한국인들과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대답하기를,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다"는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동학을 순전히 종교 단체로 취급했으며 아마도 "종교적"이라는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몇 년 전까지 만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아마도 몇 년전 공직자들에 의한 억압이 점점 더 심해져가 백성들은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년 동안 매년 봄에 혁명의 소문이 있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도움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갔습니다. 대다수는 동학인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권위자들에 게 저항하는 공통된 원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학 지도자는 참수 당했고, 그들의 종교는 금지되었습니다. 동학인이라 이름으로 불려지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동학이 좋은 정부와 조화를 이루는 원칙을 가진 종교 단체로 남아 있었다면 그것은 존재할 권리를 가졌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곧 정치적 요소가 종교를 지배했고 그들은 혁명가들이 되었습니다.

 

1893 년 봄, 동학인 50 명이 서울로 와서 궁전 문 앞, 탁자 위에 붉은 천을 덮었습니다. 불만을 퍼트렸습니다. 순교자인 최재우에게 무죄 선고를 하여 신원이 회복되어 기념비를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의 종교에서 금지령이 벗겨져,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동등한 특권을 부여 받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허용되지 않으면 그들은 모든 외국인을 나라에서 몰아 낼 것입니다. 왕은 그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여 시행 하겠다고 대답하고 임금의 성문 앞 도로를 막지 말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후 50 명의 동학인들이 그들의 지역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의 청원은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봄에 오랫동안 예상했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그들 앞에 휩쓸려갔습니다. 정부군은 병력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감사, 현감 및 기타 많은 군관들이 해임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에 대해 신속하게 정의를 세워나갔습니다. 동학인들은 광례에 따른 좋은 태도로 백성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고위 관리 옷을 입은 남자가 마을에 왔습니다. 그는 왕이 사자에게 준 갈대 인 병부(*兵符 옛날 군사를 일으키는 일을 신중하게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왕과 지방관 사이에 미리 나눠 갖는 신표)라는 권위의 인장을 가져왔습니다. 이 갈대는 부러졌고, 절반은 궁전에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그 관리가 들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동학인들 사이에 왕가와 연관이 있음을 암시했습니다. 이 군관은 그의 앞에 마을 사람들을 불러 동학인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반대자들은 다수가 올 때까지 정중하게 참여하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들은 중단 된 소수에 대해 보냈습니다. 만일 그들이 실패하면 군관은 심지가 곧은 사람을 그의 앞에 불러 세웁니다. 그는 얼굴을 보게끔 두건을 벗기고 피해자를 관사 문 밖 땅에 무릎을 꿇게 하였고, 즉시 합류하거나 그 결과 중범죄로 취급하여 사형을 언도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모두 승리했지만 일본이 그들과 맞서 싸웠던 이후 점차적으로 코너로 몰려가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1 월 22 일, 작은 서쪽 문을 지나가 다 동학교도들의 지도자이자인 "김"(김개남?)의 머리가 다른 세 가죽의 머리를 머리카락으로 묶고 매달린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범죄자에 대한 경고로 의도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강하게 비난 할 수밖에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정당화 할 수없는 관습입니다. 동학의 수장 김의 머리는 이 의도했던 목적에 맞지 않고 국민의 사기를 꺾고 피의 장면에 익숙해지는 관습의 마지막 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전킨은 최제우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최제우는 서양 천주교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천주교가 진정한 종교라면 조선조정으로부터 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는가를 의아해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한다.

최제우가 어느 날 혼수상태에서 신을 만났는데 신이 나를 경배하면 "너는 사람들에 대한 권세를 갖게 될 것이다"고 하면서 최제우가 신에게 "천주교가 진정한 종교입니까" 라고하자, "아니다, 가르치는 말씀과 하늘이 정한 것은 전진이나 그 사상과 정신은 진실하지 않다"고 대답하여 최제우가 유일신체험을 한 것을 소개하여 동학에 상제개념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소개하였다.

최제우는 천주교로부터 신의 개념을 끌어들였지만 기독교의 신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서학으로부터 유일신 개념을 끌어들이고 여기에 5가지 유교관련 서적과 불교, 도교등의 원리를 기초로 <동경대전>을 집필하였다고 보고 있다. 전킨은 동학의 기도문 채택도 서학에서 왔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외에도 전킨선교사는 충청도에서 살해된 동학교도에서 부적이 나왔는데 내용을 보면 부적을 넣고 다니면 수많은 악마를 물리칠 수 있고, 무기에도 견딜 수있고, 자유자재로 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킨선교사는 부적에 대해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듯 하고, 동학은 종교로서 출발하여 정치화되었는데 정치성을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종교단체로서 살아남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아직 동학인들의 원한이 군산의 하늘에 사무쳐 있고 금강에 동학 농민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던 1895년 9월 전키선교사와 드루의료선교사가 군산에 내려와 봄에 마련하였던 선교지를 돌아보고 드루는 한달 정도 머물러 있다가 상경하였지만 전킨은 1896년 1월까지 머물러 동학인들을 돌아보고 위로와 용기를 주며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 이사준비를 서둘러 3월28일 부인 레이번선교사와 드루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서울을 떠나 바다의 풍랑과 싸워 마침내 4월 5일 군산에 도착하였다. 비로소 호남최초 군산 선교스테이션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전킨선교사는 동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김제지방의 선교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으니, 송지동교회를 비롯하여 월성리교회, 대창교회, 입석리교회, 봉월리교회 등이 김제지방에 속하여있다. 관군의 추격과 감시를 피하여 많은 동학 농민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갑오경장이후 동학교도들은 상투를 자르고 채색 옷이나 검정 옷을 입도록 하는 진보적인 개혁을 선도하였는데, 당국은 상투 자른 자들은 동학교도들이니 무조건 잡아 드리라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이 상투를 잘랐다 하더라도 불심검문에 기독교인이라 말하면 모두 방면하였다. 이러한 일은 상투 자른 기독교인까지도 검문하여 동학교도라고 강제로 붙잡아 가기 때문에 전킨선교사가 관청에 찾아가 기독교인임을 증언해주므로 방면 받게 하였던 것이 소문이 났던 것이다.

그 중에 입석리교회는 특히 동학농민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였다. 1900년 동학농민군으로 동학의 접주였던 김국현이 살아남기 위하여 기독교에 귀의를 하고 월천면 입석리 선돌 도로변에 있는 4칸짜리 자기 집을 기도처로 삼으라고 전킨 선교사에게 연락을 하였다. 당시 전킨선교사는 송지동교회를 시작하여 열심히 이 지역을 찾아 전도를 하였었다. 이래서 전킨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김국현, 구덕삼, 이기선, 조원배 그리고 목수일을 하면서 매서인을 하던 곽성국등이 모여 예배를 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기선에게 전도를 받은 이순명, 최학성, 최대삼, 최윤증등이 입석리교회를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호남은 피와 한과 기도의 땅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 사건은 당시 막 시작하던 기독교 선교초기에 선교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다. 선교 초기 대체로 선교사들의 입장은 다분히 한국민들에 대한 동정과 협력적 자세를 견지 하였었다. 특히 전킨선교사에게서 분명히 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처음 수덕산 기슭에 초가집을 얻어 찢어진 창호문에서 된바람이 휘파람소리를 내는 방에서 4년여를 지내며 군산인들을 만났다. 아이가 이 방에서 태어나고 이방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그는 군산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킨선교사가 군산 선교를 시작하기 앞서 이미 동학을 알고 있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그 한복판에 들어가 거기서부터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미국의 남북전쟁의 실패한 남부인으로서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던 버지니아 출신으로, 그것도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중에 남부군 출신으로 어쩌면 동병상린의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대부분 한국교회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고 특히 혁명의 와중에서 혁명군들과 함께한 전킨을 모르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일이 왜 인가?

 

개신교의 선교 초기 때부터 동학-천도교와의 관계는 不可近 不可遠의 관계로 서로 소통과 갈등을 반복하여 왔다. 동학의 후신이 천도교와 1919년에 있었던 3.1독립만세운동에서 연대함으로써 관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사회적 공통의제를 중심으로 협력 연대한 전통을 잘 계승되지 못하였다. 민족의 독립과 자주의 역량을 함께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한국기독교역사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계설정에 대한 빈자리가 한국기독교 초기사를 작성하는데 전혀 논의 되지 않고 있다. 어느 한국교회사에서도 동학농민혁명과 기독교와 선교사와의 관계를 들어 볼 수 없다. 기독교사가들의 동학-천도교에대한 연구도 찾아보기 어렵다. 혼돈과 어둠이 짙게 깔린 19세기말 한 종교를 창도하여 민족의 희망의 깃발을 드높이 올린 동학과 이 땅의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바다 건너온 젊은 선교사들이 십자가 깃발을 교회 문 앞에 매달은 선교열정이 맞부딪치는 모습을 보며 교회의 민족사적 역사의 책임임을 反芻해 본다.

 

본 논문에서 가장 강조하고자한 것은 군산 주민들의 동학혁명의 참여와 군산에 처음으로 선교하러 온 윌리엄 전킨선교사의 동학인식에 대한 것이다. 특히 김중은 관장의 군산 주민들의 동학혁명 참여에 관한 연구는 그동안 전킨선교사의 군산선교사에 잃어버린 열쇄를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가지었다. 김중은 관장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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