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7일 주일아침예배 시편 107편 23-31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영혼
대부분 사람들은 음식 식감이 씹는 맛을 즐기기 때문에 아삭아삭하고 쫄깃쫄깃한 음식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가 성치 않기 때문에 씹는데 부드러운 음식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과도 땅땅한 것보다 좀 부드러운 게 좋고 복숭아도 천도복숭아보다 수밀도 복숭아가 더 좋습니다. 라면도 불고 흐물흐물한 게 좋고요 삼겹살 돼지고기도 굽는 것 보다 푹 삶아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족발도 쫀득쫀득하고 쫄깃한 것 보다는 흐물거리는 것이 좋습니다. 생선탕 중에도 물메기탕을 좋아합니다. 1년간 숙성시킨 묵은 김치를 숭숭 쓸어 넣어 푹 끓여서 흐물흐물해진 몸통 살을 숟가락으로 떠서 먹으면 입안에 흐물흐물 살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맛이 일품입니다. 그야말로 ‘니들이 물메기 맛을 알기나 해?’입니다. 그런데 군산에서는 제대로 물메기탕을 먹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삼척에 가면 물메기탕집이 바닷가에 줄지어 있는데 그곳에 가야(그 중에 바다횟집) 진짜 물메기탕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장항에 가도 물메기탕 먹을 만한 식당이 있습니다.
흐물흐물한 음식을 좋아하지만 흐물흐물한 정신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흐물흐물한 신앙은 하나님이 결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이시간 지금 나의 믿음이 세상의 풍속으로 흐물흐물해지지 않았는가 점검해 볼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 107편은 시적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그 어느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빼어난 시중의 하나입니다. 시편 105, 106, 107편은 3부작으로 되어 있습니다. 105편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때로부터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를, 106편은 출애굽 이후부터 포로직전까지 이스라엘의 패역의 역사를 추적하며 죄를 부끄러워하였고, 107편은 바벨론 포로에서 구출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시편 107편은 시편의 제 5권을 열어주는 첫번째 시편입니다. 이 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는 시인이 그 포로생활의 역경과 고통을 인생의 네 여정인 사막 횡단, 감금, 병상, 바다 여행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삶의 위기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선하심과 그 사랑을 찬양하며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감사: 인생의 고통는 마치 ‘사막에서 방황’하는 것 같았으나 그 광야의 고통에서 건짐 받았음을 찬송하고 감사하라(4-9절)
둘째 감사: 인생은 어둠의 감옥에 쇠사슬에 무매어 있는 것 같았으나 그 감옥 같은 고통에서 건짐 받았음을 찬송하고 감사하라(10-16절)
셋째 감사: 인생은 병들어 아사직전에 죽을 것 같았으나 죽음에서 건지신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라(17-22절)
넷째 감사: 인생의 고통은 ‘바다에서 광풍을 만남’으로 영혼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으나 구원 받았음을 찬송하고 감사하라(23-31절)
오늘 봉독한 말씀은 네 번째 찬송과 감사의 내용입니다. 시인은 광풍이 불고 파도가 요동치는 인생에서 비틀거리며 그 영혼이 녹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녹았다’는 말은 원어로 ‘무그’란 말로 흐물흐물해졌다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영혼이 인생의 바다에서 흐물흐물해졌다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영혼이 흐물흐물거림으로 마치 술 취한자 같아 비틀거리고 그 생각하는 것들이 혼돈스러워 고통당하고 있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졸업여행으로 제주도엘 갔었습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가려면 오후 5시에 타면 다음날 아침 8시에 제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처음엔 바다가 잔잔하여 뱃전에 나가 바다구경도 하고 노래도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두세 시간 지나며 바다가 요동을 치고 억수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파도는 배를 삼키듯 배 위까지 치고 올라왔습니다. 배는 그야말로 술 취한 배처럼 비틀비틀 거리며 침몰하듯 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처음엔 구토증이 없었는데 옆 사람이 구토하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구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신이 아득하고 어지러워 서거나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3등칸은 배 밑이 였습니다. 3등칸 한구석에 누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기저기 누웠습니다. 정말 엄청난 풍파 속에 내 영혼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온 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이 되니 바다가 잔잔해 졌습니다. 잠을 깨고 보니 저는 어는 아주머니 다리를 베고 있고 내 베가 묵직해서 보니 어느 할아버지가 내 배를 베개 삼고 누워 있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폭풍과 파도와 두려워 출항 그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매여 있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은 아닙니다. 배가 항구를 출항한다는 것은 폭풍과 파도를 만나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배는 폭풍과 파도 속에서 마침내 임무를 수행하고 소원의 항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폭풍이 우리가 항해하는 인생의 바다에 갑자기 닥쳐오게 될 때에 우리의 영혼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어찌할까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에 우리가 물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런 광풍 속에서 우리가 할일은 무엇이며, 기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갑작스런 광풍과 파도를 만날 때 우리가 해야 할일은 무엇입니까? 본문 시편기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어(짜아크-‘아이구 하나님 나 죽어요. 살려주세요’)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보시면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하필이면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와야 할까요? 파도의 원인은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파도의 높이와 속도는 바람의 속도 혹은 지속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풍속이 클수록 파도는 커집니다. 바람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최고 파고는 30m이상인데, 전문가에 의해 측정된 최고의 파고는 34m정도로 보고 되고 있습니다. 1933년 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미국 샌디애고로 가던 선박 라마호가 만난 파도의 높이가 33.6m였다고 합니다. 아파트 10층보다 더 높을 것입니다. 파도는 지구 자체의 구조적인 원인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데 오늘 시편의 기자는 이런 자연적인 원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의 모든 움직임을 관할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인생의 환난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아프면 누구를 찾습니까 어머니를 찾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낳아주었기에 아이는 어마를 찾습니다. 엄마가 ‘엄마 손은 약손이다. 슬금슬금 나아라’하며 배를 살살 쓰다듬어주면 배 아픈 것이 사라집니다. 하나님 자녀인 우리가 ‘살려주세요’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집으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어루만지시어 구원해 주십니다.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인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Lewis교수가 옥스퍼드 채플에서 강연을 마쳤을 때 한 학생이 그를 붙들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교수님,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교수님은 이해할 수없는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루이스 교수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알려집니다. “성경은 설명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단지 반문을 제시할 따름입니다.--(무슨 반문입니까?)그러지 않아도 교만한 인간인데 고통마저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교만했겠습니까?” 이 말씀이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닌가요? 고통이 아니었더라면 예수를 믿을 수 없고, 고통이 아니었더라면 기도를 배우지 못할 인생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의 본문도 “고통 때문에--여호와께 부르짖으매”하지 않았습니까? 광풍을 만나셨다고요? 그러면 이제 당신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그분 앞에 나아와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조용한 상황은 조용한 기도를 필요로 하지만 특별한 상황은 특별한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내 삶의 정황이 비상한 상황이라면 비상하게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나는 네게 응답하겠고(렘33:3)--”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오늘의 말씀 28절에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그러면 기도하는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것입니까? 3가지를 기대하게 됩니다.
첫째로 광풍이 곧 잔잔해 지리라는 것입니다.
29절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우리가 광풍 속에 휘말릴 때 우리는 그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 시작이 있는 것처럼 어떤 고통에도 끝이 있습니다. 특별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고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곧 소멸될 고통입니다(사10:17). 수많은 태풍들이 불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불고 있는 태풍은 없습니다. 몇칠 지나면 쾌청한 날 밝은 태양을 볼 것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에서 인생의 모든 고통이 우리의 기도와 함께 즉시로 다 소멸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를 고통하게 한 문제 그 자체는 그대로 상당히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버티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라도 참으로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했다면 우리 마음속에서 이미 광풍은 소멸되고 잔잔한 고요가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혼의 고요를 간직한 사람들을 더 이상 태풍이나 파도가 흔들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찬송이 있습니다. 작사는 엘라이자 휴윗(Eliza Edmunds Hewitt, 1851-1920) 그리고 작곡은 존 스웨니(John Robson Sweney, 1837-1899)입니다. 엘라이자 휴윗(Eliza Hewitt)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어느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던 여 선생님입니다. 휴잇선생님은 늘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휴윗은 성격이 삐뚤어진 한 학생을 조용히 타이르고 학생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화를 참지 못한 반항아는 벌떡 일어나 옆에 있는 의자를 들어 휴윗 선생을 등을 내려쳤습니다. 그 일로 휴윗은 척추를 크게 다쳐 상반신에 석고붕대를 하여 움직이지도 못하고 대소변조차 혼자 해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기약 없는 병원생활이 6개월쯤 됐을 때 겨우 석고붕대를 제거했습니다. 조금은 회복되었지만 더 이상 교사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요?” 그녀는 의지하고 살았던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며 살아온 인간 휴윗선생님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휴잇선새의 영혼은 흐물흐물 녹아내렸습니다. 사고 후 일 년이 지나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봄날이었ㅅㅂ니다. 그녀는 몸을 다친 후로 맘대로 걷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쳐다보는 눈도 싫어 병원 밖을 나서는 것이 싫었습ㄴ다. 하지만 그날은 예전에 가끔 들렸던 공원을 꼭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담당의사의 외출 허락을 받고 페어마운트공원(Fairmount Park)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목발을 짚고 어린아이처럼 한걸음씩 발걸음을 떼어 놓았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니 눈이 부셨습니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새로 돋아난 초록색 나뭇잎이 햇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웠습니다. 봄 햇살의 따사로움이 온 세상을 품고 있는 듯 했습니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뛰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햇빛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휴윗의 영혼을 감싸버렸습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이 얼어붙어있던 원망과 미움이 흐물흐물 그 햇살에 녹아버린 것입니다. 자연 속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낀 휴윗은 그녀가 아프기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 자신을 때린 학생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휴윗은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온 우주를 감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였습니다. 병원에 돌아온 휴윗은 창가에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며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쓴 글이 바로 찬송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There is sunshine in my soul today,
더욱 밝고 영광스러운 빛이라네. More glorious and bright
이 세상 하늘의 어떤 빛보다. Than glows in any earthly sky,
예수님이 나의 빛이시기 때문이라네. For Jesus is my Light.
(후렴)
오, 햇빛, 복된 빛이 있네. O there’s sunshine, blessed sunshine,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이 밀려올 때 When the peaceful, happy moments roll;
예수님이 웃는 얼굴을 내게 보이실 때 When Jesus shows His smiling face
내 영혼에 햇빛 비치네. There is sunshine in the soul.
우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건에 대하여 흥분하고 소리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인생의 광풍을 벗어나지 못한 증거인 것입니다. 요즈음 대통령 입후보자들이 흥분을 하고 모욕적인 말들을 하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하는 이런 일련의 모습들을 보면서 누구는 모두 선거전략에서 나온 말이고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 그런 마음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오늘의 광풍 앞에 보이고 있는 한 나약한 후보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좀더 당당 하지 못하고 좀 더 자신의 소신과 국민을 향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를 진진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어찌 국민의 리더자로 대통령이 될 것입니까? 또 한 사람의 전 대통령 박근혜가 될 뿐입니다. 흑인을 해방한 유명한 링컨 대통령에게 한번은 그의 정적이 그를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고 의회 공 석상에서 조롱했을 때 그는 잠간 묵도한 후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정말 두 얼굴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자리에 제가 하필이면 못 생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까지 유쾌한 웃음을 웃고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그는 후일 이런 기지를 자신의 성격이기보다 기도로 얻은 지혜이었을 따름이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광풍 가운데 계십니까? 진지하게 기도하십시오. 광풍은 소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의 바다에 고요함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광풍 앞에서 비록 영혼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 영혼에 해빛 비춘다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광풍중에 흐물 흐물 영혼이 녹아내리어 부르짖어 기도할 때 기대해도 좋을 일 둘째는 소원의 항구에 곧 도착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항해 중 풍랑을 만나면 그 만큼 항해는 늦어 질 것이라는 통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사실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우리는 파도를 타고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오히려 우리의 항해의 여정을 앞당기는 경우입니다.
찬송가 373장 찬송에
“1.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2.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본문의 30절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소원의 항구-개역 한글역)로 인도 하시는도다.” 광풍 속에 기도하면 기도는 우리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재촉하는 방향조정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광풍 속에서 벗어나 목적지로 뱃머리를 돌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하나입니다. 기도를 통해 목적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에게는 고통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고통에 집중하지 말고 목적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도의 목적지는 무엇입니까? 성도가 바라 볼 목적지는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시선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나치 독일의 감옥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싸우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여사는 감옥 속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 절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내면을 보면 낙담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안식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리스도안에 평온히 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마침내 소원의 항구로 움직여 가시는 전능자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광풍 중에 여호와께 나아와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우리 모두는 마침내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시편 107편은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묘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이런 고통에 대한 묘사는 이런 고통에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고통에서 그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매 단락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8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 지로다’ ,15절, 21절, 31절이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요두 라야훼 카세도 외닢레오타이우 리베네이 아담 팔랄=기적)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전화해서 실직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때 마귀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때 “큰일 났네. 이제 망했네.”라고 아내의 영혼이 흐물흐물해 집니다. 만일 이 흐물흐물해진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마귀가 그 흐물거리는 마음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안을 풍지박산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믿음의 여인이라면 이 흐물후물한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남편의 실직 소식을 통해 “이제 망했다.”라고 반응하지 말고 즉시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수고했던 남편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해 피할 길을 내어주시고 더 좋은 길을 예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향한 감사와 찬송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우리의 영혼을 다시 고쳐 잡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는 기적(팔랄)을 체험합니다. 21세기 과학의 세기에도 기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눈이 먼 빌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빌!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신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늘 하세요.” 그때부터 맹인은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맹인이지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그가 믿는다고 하다가 미쳤다고 놀렸습니다. 아이들도 놀렸습니다. “야, 볼 수 있는 맹인아!” 그런 조롱을 들을 때마다 그는 상처를 받기보다 오히려 “아멘! 아멘!”이라고 반응했습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은 불쌍히 보시면서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얼마 후 그가 이발소에 갔을 때 이발사가 은근히 조롱했습니다. “빌! 당신이 볼 수 있는 맹인이면 혼자 머리를 깎지 왜 여기에 왔소!” 그때 맹인은 그 조롱이 자기보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으로 여기고 소리쳤습니다. “여보! 나는 진짜 볼 수 있는 맹인이오!” 바로 그때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바로 자기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이야기가 늘 상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누구에게나 이런 치유가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면 사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맹인이 볼 수 있게 된 사실보다 볼 수 있든지 볼 수 없든지 상관없이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 신실한 믿음을 통해 그에게 상상을 초월한 가장 선한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영혼이 녹아내리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이 복된 일이며 기적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영혼에 두려워하고 눈물짓고 살 것입니까?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가족들도 때로 녹아내리는 영혼의 아픔을 겪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허물어지듯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인생의 고통을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요두 라야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며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시고 평온케 하시며 팔랄 기적의 인생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바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광풍과 파도가 나에게 닥아 올 수도 있습니다. 이 인생의 폭풍 앞에 있을 때에 이 해인 시인의 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바다여 당신은”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목 놓아 울고 싶은 건
가슴을 뒤흔들고 가 버린
거센 파도 때문이 아니다
한밤을 보채고도 끊이지 않는
목쉰 바람 소리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어둠을 울다
빛을 잃어버린
사랑의 어둠
죄스럽게 비좁은 나의 가슴을
커다란 웃음으로 용서하는 바다여
저 안개 덮인 산에서 어둠을 걷고
오늘도 나에게 노래를 다오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서투른 이방인
언젠가는 모두가 쓸쓸히 부서져 갈
한 잎 외로운 혼임을
바다여 당신은 알고 있는가
영원한 메아리처럼 맑은 여운
어느 피안 끝에선가
종이 울고 있다
어제와 오늘 사이를 가로 누워
한 번도 말이 없는 묵묵한 바다여
잊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노래를 내게 다오
당신의 넓은 길로 걸어가면
나는 이미 슬픔을 잊은
행복한 작은 배
이글거리는 태양을
화산 같은 파도를
기다리는 내 가슴에
불지르는 바다여
폭풍을 뚫고 가게 해 다오
돛폭이 찢겨도 떠나게 해 다오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