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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4월 23일 주일아침 예배  요 1:12.13  아드 폰테스 (기독교의 본질-귀소본능신앙)


귀소본능(歸巢本能) 이란 말이 있습니다. 동물이 자기 서식 장소나 둥지 혹은 태어난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오는 성질을 말합니다.  ‘흥부전은 둥지에서 땅으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새끼 제비를 마음씨 착한 흥부가 구해주자, 가을에 먼 길을 떠났던 그 제비가 이듬해 봄에 돌아와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열리는 씨앗을  물어다 준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동물이 자신의 서식지 또는 산란하던 곳에서 멀리 떠났다가 다시 그 장소로  돌아오는 성질을 「귀소본능」 또는 「회귀본능」이라고 합니다.  흥부전에서처럼 제비는 놀라운 귀소본능을 지니고 있는 새입니다. 몇 해 전에 어느 조류 전문가가  제비의 귀소본능을 실험하기위해 제비 열 마리의 다리에 인식표가 새겨진 가락지를 부착했습니다.  이듬해 봄, 열 마리 가운데 여섯 마리가 원래 둥지에 정확하게 돌아와 전문가를 놀라게 했답니다. 연어도 대표적인 희귀동물 중 하나입니다.  연어는 민물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생에를 바다에서 보내다가 산란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옵니다. 이와 반대로 뱀장어는 바다에서 태어나 민물에서 대부분을 살다가 산란을 위해 다시 바다로 돌아갑니다. 새끼들은 부화한 후에,  어미가 살던 강으로 정확하게 돌아옵니다.  반려동물인 개와 고양이도 귀소본능은 가지고 있으며, 철새역시 지도나 나침판, 네비게이션도 없이 이렇게 먼 거리를 정확하게  찾아오는 비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연구된 결과를 보면, 별자리, 달, 태양을  방향지표로 사용하거나 뚜렷한 지형지물이나 냄새를 이용해 길을 찾고, 지구의 자기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인터넷 인용)’ 이런 귀소본능 동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서로를 돕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강어귀를 이르면 강물에서 생활하기 적합한 몸으로 바뀌기 위한 시간을 보내는 등  연어와 뱀장어는 기수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삼투압’ 조절이라는 생리적응 과정을 거치며  산란 준비를 합니다.  다른 동물과는 그 정도가 다르지만 사람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이런 옛날 유행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워하는 고향은 어디입니까? 흔히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돌아갔다란 말은 원래 와던 곳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원래 왔던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저는 하나님 나라보다는 에덴동산을 지시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본래 인간은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살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이 귀소본능이 기독교인의 본질적 본능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지구와 해와 달과 그리고 은하수와 우리의 상상을 넘어 먼 우주의 별들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지구 땅 위에 수많은 동물들 식물들을 또한 만드셨습니다. 이 우주 지구 땅 위에 삼라만상을 펼쳐 놓으시고 창조의 마지막 날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왜 사람을 맨 마지막 날에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기 엄마는 아기의 옷가지와 그리고 아이가 누울 요람과 이부자리 기저귀와 젖병 분유 등을 준비하듯이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갈 환경을 먼저 완벽하게 준비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겉모습만 닮은 것이 아니라 성격도 마음씨도 생활습관도 말투도 닮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유전자가 자녀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당신의 형상을 따라 당신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유전자를 사람에게 넣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은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창세기 1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세계를 보시고 ”야 참 아름답구나!“ 감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찬탄하실 정도 이니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에덴동산이 보고 싶습니다. 지금 저의 서포리 집에 울긋불긋 파랗고 노랗고 각가지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마당에 나서면 이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서 에덴동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짝지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일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일이었습니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 창조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본질로 돌아가자 이말을 라틴어로 아드 폰테스 Ad Fontes라고 합니다. 아드는 돌아가자, 폰테스는 폰스라는 말에서 온 말로 원천 샘(뜬봉샘: 금강 발원지 전북 장수군 장수읍 물뿌랭이길 10-18, 수분리 588)을 말합니다. 본질로 돌아가자는 본래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근원은 곧 에덴동산으로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일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이 본질을 상실하였습니다. 에덴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 추방(까라쉬) 당했습니다. 왜 추방 당헀습니까? 사단의 유혹에 빠져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은 절대로 마귀를 따를 수 없는 일입니다. 깨끗한 정한 수에 먹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면 더 이상 그 물은 정한 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사람 또한 거룩한 존재인데 마귀로 죄를 범하였으니 그 거륵함이 사라졌습니다. 거룩함이 사라진 인간은 더 이상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고 더 이상 그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가정을 살던 아담과 이브는 이제 더 이상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없었습니다. 불행이 곧 닥쳐왔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 하였습니다.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有史以來 이 지구상에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희생당했습니다. 인간세상은 이제 약육강식 강한자가  약한자를 학대하고 핍박하는 阿鼻叫喚 지옥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모든 인간 현상은 국가와 사회와 가정과 인간이 속하여 있는 모든 곳에 마귀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마구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긴 인간들의 역사는 죄악이 난무하고 멸망과 죽음의 세력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캄캄한 어둠속에 방황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산다는 것이 쓰리苦 고욕이요 고통이요 고생입니다.

 

그래서 이런 복음 성가가 있지요. <달리다굼>

캄캄한 인생길 홀로 걸어가다
지치고 곤하여 내 영혼
깊은 잠이 들었었네
인생의 어려움 절망 가운데
눈물과 한숨과 내 영혼
슬픔 속에 잠이 드네..............................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장병찬이란 분이 이런 글을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썼습니다.

< 꽃구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일까?
산 너머 저쪽에서 팡랑새 날개 타고 오는 것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행복은 오지 않는 그 행복을 잡으려고
발부동치고 안달해도 행복은 잡히지 않고 먼 곳에만 있는 것.

많이 가지고 편하게 살면 행복해질까?
편안한 부자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은 건 무슨 이율까?
행복지수 세계 1위가 제일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라고 한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인 소유나 편안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인, 인간관계속의 편안함과 향기로움에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와 친족, 이웃의 對人들
사람사이에 좋은 관계를 가지면 행복할 수 있고
좋은 관계를 깨어버리면 행복은 멀리 도망가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이럴수록 가까운 사람과의 사이 숨어 있는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머릿속의 막힌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스스로가 행복 하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해가 지면 우리들이 돌라 갈 가정이 있고 나를 반겨주는
가족이 있고, 모임에 나가면 다정히 대화 할 친구들이 있고
명상하는 밤이 가면 밝은 아침 해가 떠오른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들이 언제나 원하고 원하는 그 행복이
이렇게 가까운 우리들 사이에, 우리들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나 자신부터 넓은 아량으로
배려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낼 때
편안한 낮잠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고운 행복의 꿈을 꾸게 되리라.
오늘도 행복한 꿈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수놓아 주세요.
(2008년 12월 04일 장병찬(하얀불꽃) 씀)>

 

참으로 아름다운 글이요 이 글을 읽으면서 행복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행복한가? 스스로 물으면서 그 행복은 다만 글자사이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다만 느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찾을 때 행복합니다. 그 본질은 에덴동산입니다. 행복은 인간이 돌아가야 할 에덴동산에서만이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추방된 인생의 행복은 그 어떤 미사여구일 뿐 단 1시간도 누리지 못합니다. 교도소 감방안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지금 최순실씨는 행복할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는 아마도 그 어떤 수감자 보다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행복한 수감자라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그리고 사단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온갖 죄 가운데 살면서 나는 행복 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탄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모양따라 지음 받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또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이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란 에덴동산이요 그의 의란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본질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인생의 본질을 찾느냐 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사실 모든 종교는 이 문제를 본질로 삼고 있습니다. 불교도 유교도 인생의 본질을 찾는 종교입니다. 본질을 찾아가는 길이 여러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온갖 종교가와 철학가와 사상가들도 이 본질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공산주의도 이 본질을 찾으려 했던 이념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수천 년 이 본질을 찾아 그 길을 개척한 딱 한사람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헛길 눈먼 사람이 코끼리만지는 격일뿐입니다. 누가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습니까?
요 14: 6에 예수님 말씀하시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에덴동산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그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한방울 한방울 흘리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사실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은 저 멀리 있는 길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사단이 막아버린 죄악덩이로 콱 막혀 있는 것입니다. 마치 터널이 붕괴되어 동덩이로 앞뒤가 막혀있듯이 지금 여러분의 인생 터널에 나의 죄악덩이로 그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그 죄악덩이가 치워져야 하는데 너무 무겁습니다. 너무 두껍습니다. 너무 단단합니다. 아무도 나의 이 죄악덩이를 치워버리지 못합니다. 흔히 죄를 회개하라 그러면 죄가 사해질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갇혀 있으니 죄가 무거운지 단단한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도둑이 도적질을 죄인 줄 모릅니다. 성추행을 방조하고도 구것을 놀이로 생각할 뿐 죄인 줄 모릅니다. 차명폰 대포폰으로 국정농단하고도 그것이 애국하는 줄 알지 얼마나 큰 죄인 줄 모릅니다. 어둠속에 있으면 어둠이 어둠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햇빛이 비추어지면 어둠이 밝혀집니다. 의로운 해가 떠오르면 불의가 밝혀집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앉으나 서나 십자가를 못 박히며 피 흘리시면서 자신의 살덩이가 찢겨지고 자신의 피 한 방울이라도 다 남김없이 사단에게 나의 죄 값으로 치루시면서 한사람이라도 더 죄의 담벼락을 무너뜨려 에덴의 길을 열어주기 원하시었던 것입니다. 그 길이 본질을 찾아가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예수님 꼭 붙잡고 인생길을 가는 사람은 임마누엘 예수님과 함께 에덴의 길을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희덕(羅喜德, 1966 ~ )이란 시인이 <푸른밤>이란 시를 썼습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호나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떠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이 나혜덕 시인이 지름길과 에움길을 말했습니다. 지름길과 에움길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지름길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끔 빠른 길인 줄 알고 가던 지름길이 오히려 막힌 길이고 빙빙 돌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유일한 길일 때가 있습니다. 돈이 행복의 지름길인 줄 알고 달려가다 전보된 인생들을 봅니다. 권력이 행복의 지름길인가요?  명예가 행복의 지름길인가요? 자식이 형제가 친구가 나의 인생을 향복하게 해주는 지름길인가요? 미국이민생활이 행복의 지름길인줄 알고 이민 갔다고 그 길이 고통의 길임을 안 이민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지난 4월 22일 오후 2시 40분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 앞에서 차량 한 대가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로 돌진하여 5명이 죽고 40명이 다쳤는데 그중에 한국관광객 5명도 중경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한분은 뇌를 다쳐 수술을 받았는데 치매 증상이 생겼고 문제는 언제 퇴원할는지 기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관광여행이 행복의 길로 생각하고 관광 갔다가 큰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 끝나면 그 길이 행복의 길이 아닌 것을 모든 후보들은 알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길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렵게 인생을 살다가 이리저리 빙빙 인생의 에움길을 걸어오다 예수님을 마남으로 비로소 행복의 길을 찾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요 1:12에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권세란 말이 의미 심장합니다. 성경원어로 ‘엑수시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엑수시아란 말은 엑스란 말과 우시아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엑스란 말은 ...로 부터란 의미이고, 우시아란 본질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엑수시아란 본래 의미는 ‘본질로 부터’란 뜻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누가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자 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함나님과 함께 살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처럼 여전히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니 죄로 말미암아 에덴의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길이 막혀버림으로 교회는 다니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고 여전히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고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고통스럽고 여전히 세상가운데 방황하고 있습니다. 

라온 코이노니아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 우리는 아드 폰테스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라온 코이노니아는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에덴의 길입니다.  오늘도 그리고 언제나 에덴동산을 꿈꾸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라온코이노니아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활짝 여신 에덴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에서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가족들은 행복한 인생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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