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6일 부활주일아침 예배 요20:1-31 카치구미 신앙
김연아 선수와 라이벌 관계였던 일본 피겨선수 아사다 마오가 지난 4월 10일 쓸쓸하게 은퇴를 하였습니다. 한 때 세계피겨선수의 최고봉으로 김연아 선수와 일 이위를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전 보다 그 실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유망주들이 등장하면서 일본인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최고로 인정받았을 때 은퇴를 하며 한국인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아사다 마오는 후배들에게 밀리면서 일본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옛날의 환호성이 비난과 야유로 바뀌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아사다 마오는 더 이상 일본 피겨선수로 활동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입니다. 한 때 그는 가치구미였지만 이제 마케구미로 일본인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카치구미 마케구미란 무엇입니까?
일본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가운데 카치구미(かちぐみ勝ち組)란 말과 마케구미(まけぐみ負け組)란 말이 있습니다. 카치구미란 승자의식이란 의미고 마케구미란 패배의식을 말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잘되는 사람(사업)은 더 잘 되도록 관심도 주고 도와도 주고 아낌없이 지원 하지만 안 되는 사람(사업)은 더 안 되도록 무관심하고 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거들떠도 안보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일본 젊은이들이 스스로 ‘마케구미’라 여겨 희망을 포기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다고 일본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여기에 역사적 유래가 있지만 시간관계상 설명을 줄이겠습니다.) 오늘 이 말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패배적 의식을 가진 마케구미가 아니라 언제나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카치구미 임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성탄절만 되면 교회에서 자주 하는 성극이 있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성극입니다. 이 성극은 원래 1977년 12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980년 성탄 무렵 한국일보 한 구석에 <월리의 성탄절>이라는 칼럼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감동받은 한동대 교수로 연출가 최종률씨에 의해 극화된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함께 많은 깨달음을 주는 성극이 되었습니다.
(#연극계의 멘토로 캐릭터 있는 연기자로 또한 복음과 삶을 이어주는 문화사역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최종률 장로. 그는 영화 <살인의 추억><타짜><마이파더><박쥐><나는 행복합니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강남엄마 따라잡기>탈북자의 삶을 다룬 뮤지컬 언틸더데이(Util the day)등에 출연한 대한민국 대표 중견배우다. 그러나 그는 극단 ‘증언’을 이끌고 있는 연출가로 더욱 유명하다. 학창시절 학예회에서, 교회에서 한번쯤은 보았거나 공연해 보았을 <빈방있습니까?>라는 작품이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 무려 30년이나 진행되어 온 이 작품은 수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성탄절 대표 작품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이지혜기자)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덕구는 ‘빈 방 없습니다.’라고 해야 하지만, 빈 방을 애타게 찾는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를 보면서 대본과 달리, ‘빈 방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연극을 망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연극처럼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에는 방 하나도 구하지 못하여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 그 어디에도 빈방이 없는, ‘NO VACANCY!‘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빈 무덤'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VACANCY!‘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삶은 ‘NO VACANCY!‘로 시작되어 VACANCY!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오늘아침 봉독한 요한복음 20장 1절 이하를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왔습니다. 물론 그녀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는 목적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육중한 돌문은 옆으로 옮겨졌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분명히 사흘 전에 예수님의 시체를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하기 위해 큰 돌을 굴려다가 무덤 문을 막아놓았습니다. 또한 그 돌문에 로마 황제의 도장이 찍힌 인봉을 붙여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 돌문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군대를 시켜서 24시간 동안 철통같이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는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외쳤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없어 졌어요! 누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나 봐요!” 마리아의 이 말을 들은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단숨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말대로 주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주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주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와 수건만이 잘 정리되어 개켜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9절에서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도 않고,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없어진 주님의 시신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간 베드로와 요한과 달리, 주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무덤에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두 번씩이나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빈무덤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11절을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여기 마리아가 '울었다(클라이오)‘는 것은 단순히 울먹이거나 눈물 흘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같이 소리 내어 통곡했다는 말입니다(눅22:62 베드로의 통곡).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주님의 빈 무덤에 다시 찾아온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주님의 시신이 사라지지 않고 무덤 안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녀는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주님의 시신에 정성껏 향품을 발라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주님의 무덤이 빈무덤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울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영원히 울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우리의 기독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무덤은 막달라 마리아의 기대와는 달리,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클리이오 심히 통곡하며 주님의 무덤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주님의 시신이 있었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어디로 옮겼는지 알지 못해서 운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인기척이 나며 이러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구나이, 티 클라이에이스)”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 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빈무덤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 빈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분명한 증거이며, 기독교진리의 핵심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죽으셨지만 원수 마귀를 짓밟고 죽음에서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인류의 영원한 원수인 사망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되셨습니다. 죽음이란 인생 최대의 원수이며 일찍부터 인생들은 이 죽음을 피하여 보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욥은 욥기 14장 14절에서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겠느냐(임 아묻두 께베르 하잏에)”라고 탄식했고, 동양의 위인 한무제는 장생불사를 바라고 소반에 찬이슬을 받아먹었으며,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려고 동남동녀 5백인을 삼신산(三神山)에 보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인생의 죽음의 해답은 찾을 길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증거가 되셨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에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일본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나가노 목사는 교회를 개척할 장소를 위해, 일본지도를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동서남북 100km이내에 단 1명의 교인도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마음먹은 다음, 기도를 하면서 찾았는데 바로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젊은 목사는 곧 그 지역으로 가서 텐트를 치고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났습니다. 교인이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1년이 가고, 5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주신 것을 믿기에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 그 교회에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감격했습니다. 5년 동안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욱’ 하더니 식탁에 피를 쏟았습니다. 그 청년은 폐병환자였던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을 지금 당장 쫓아 버려야 하나, 아니면 내가 이 핏덩이를 씻어내고 계속 밥을 함께 먹어야 하나?” 그런데 이때 “주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첫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피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과 다시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한 정치인의 사생아였는데 자신의 출신 때문에 어려서부터 고민과 괴로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신학하는 도중에 그만 폐병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정학을 당했고 다니던 교회에서는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도 거짓말이고, 예수도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치료비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내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싫어한다. 아,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한 사람도 그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청년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또 우연히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고 하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 번 찾아가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나가노 목사를 찾아왔고 그날 저녁 밥을 먹다가 피를 쏟은 것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피를 닦아내고 다시 밥을 차려왔습니다. 그 순간 이 청년이 다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폐병도 낫게 하셨습니다. 1909년 12월 24일 청년은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빈민굴로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1888.7.10.-1960.4.23.) 목사입니다.도요히코는 독일의 슈바이처, 인도의 간디와 함께 20세기 3대 성인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도요히코 목사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한 번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자기는 죽고 사선(死線)에서 재출발하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그 후의 생명은 덤으로 사는 것이니 아까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다."
날마다 살아가는 것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살았다는 것은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 라이벌과의 경쟁, 악한 영과의 영적 전쟁 등 많은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싸움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싸움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닥쳐올 때 '나는 승리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이래 이런 승리를 고백한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예견하면서 승리를 말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에고 네니케카 톤 코스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분안에서 함께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늘 싸움을 걸어오는 세상은 어떤 존재입니까? '세상'은 죽이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비난하고 거절하는 세상입니다. 핍박하는 환난의 세상입니다. 선한 일을 오해하는 세상입니다.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에 나가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살아갈 일을 생각하며 불안해 합니다. 세상에서 만날 환난을 바라보고 도피처를 찾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만나는 환난이 두렵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어려운 업무를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오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쓰를 받고 위축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들고 나아가 전하려고 하면 온갖 공격이 집중되지 않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하면 가만 두지 않으려고 날을 세우지 않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병들게 되고,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지기도 합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되게 틀어 지기도 하고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기도 하고 아내나 남편이 속을 썩여 미워질 때도 있습니다. 부모와 형제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먹고 사는 데 힘겹게 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되기도 합니다. 불의와 불법이 득세하는 것을 보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겁내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에고 네니케카 톤 코스몬’ 그런 세상에서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 담대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우리가 환난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모든 환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서반아 왕 가운데 페르디난드 5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 "왕께서는 마드리갈이라고 하는 곳에는 아예 가지 마십시오. 그 마드리갈에서 왕께서 장차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왕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두려워서 좋은 별궁을 지어 놓고도 21년 동안 거기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마한 촌락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왕은 신하에게 "이 지방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옆에 있던 신하가 "네 폐하, 이 곳 이름은 마드갈레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드갈레'가 '마드리갈'과 발음이 비슷했습니다. 사실은 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왕은 '아이구,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더니 며칠 안 되어 정말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왕을 죽였습니다. 두려움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두려움을 온전히 이기고 든든한 믿음과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지구상에서 활보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부르신 것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이런 지경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위험한 곳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될 때 천군과 천사가 우리 편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롬 8:35-39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8절에 "내가 확신하노니.(페페이스마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확신한다는 말입니까?
35절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귐노테스:헐벗음)이나 위험(킨뒤노스:위기)이나 칼” 등등 그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38절,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우테) 생명이나(우테) 천사들이나(우테) 권세자들이나(우테) 현재 일이나(우테) 장래 일이나(우테) 능력이나(우테) 높음이나(우테) 깊음이나(우테)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우테)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우테...두네세타이)라."
본문에 10번에 걸쳐 ‘...이나’는 ‘끊을 수 없다’라는 말로 각각 연결된 말씀입니다. 즉 ‘사망이 끊을수 없다’ 생명이 끊을 수 없다‘ ’천사들이 끊을 수 없다‘.....’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페페이스마이 나는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so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버리거나 분리시키거나 나누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승리에 대한 확신이요. 이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일 5:4“무릇 하나님께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의 믿음이 무엇이라고요? 부활하심으로 마귀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주안에서 우리도 이긴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이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결코 ‘마케구미’가 아니요 ‘키치구미’ 항상 승리자라고 하겠습니다.
라온코이노니아는 부활하신 승리자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카치구미 승리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결코 패배자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요 승리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승리자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도우시니 우리도 넉넉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갑시다.
부활승리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