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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3월 31일 주일아침예배 출 37:1-9 싯딤나무 신앙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하심대로 성막을 만들고 성막안에 둘 여러 가지 기물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기물들은 최고의 장인인 브사렐에게 맡겼습니다. 브사렐은 등대와 법궤와 븐향단 떡상을 만드는데 등대는 정금 한달란트로 만들고 다른 기물들은 조각목(早角木)이란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조각자(早角刺 주엽나무)나무와 비슷하다고 해서 조각목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나라말로는 아카시아나무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스라엘 말로는 싯딤(Shittim 괴롭히는 가시라는 의미)나무라고 말합니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네~”

박화목 작사, 김공선 작곡의 동요, 과수원길! 어린시절 자주 불러보았던 노래입니다. 동요로 작곡된 것이지만 합창곡으로도 편곡되고,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 사이에서도 널리 불려지고 있는 노래입니다.. 5, 6월이면 이 노래가 더욱 생각나는데요. 산과 들에 하얗게 핀 아카시아 꽃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이 노래에 오해가 있습니다. 동구 밖에 활짝 핀 꽃은 아카시아 꽃이 아니라 아까시 꽃이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우리가 아카시아로 알고 있는 아까시 나무는 콩과의 낙엽교목이고, 진짜 아카시아는 열대와 온대지역에 분포하는 상록수나무로 오늘 소개하는 싯딤나무입니다. 그러닌까 우리나라에서 보는 그런 아카시아나무는 아까시 나무라고 불러야 합니다. 아까시 나무는 1891년 사가끼란 일본인이 중국 상해에서 묘목을 구입하여 인천에 심으면서 처음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각목 또는 아카시아나무라고 하는 싯딤나무는 광야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뿌리가 물을 찾으러 땅속 50~60미터까지 뻗어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싯딤나무는 뿌리가 2km까지 뻗어 있다고 합니다.

 

전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광야 풀 한포기도 없는 사막에 우두커니 서서 뜨거운 태양빛을 받고 서있는 이 싯딤나무를 보면서 시편 63편 1절의 말씀이 떠 올랐습니다.시편 63:1을 보면 시인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이 바로 광야입니다. 이러한 땅에서,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영혼과 온몸으로 주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시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마치 사막에 우뚝 서있는 싯딤나무를 보자면, 홀로 외롭게 서서 기도를 하고 있는 듯 하고, 그 모습이 매우 안쓰럽고 절실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순례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싯딤나무는 물론 더 좋은 땅에서 자란나무는 10m도 자라지만 광야에 자라는 싯딤나무는 3-4m정도 자랍니다, 나무는 마르고, 거칠고, 볼품이 없는 데다 가시로까지 덮여 있습니다. 가시는 웬걸 3-5cm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광야에 자라다보니 자기보호를 위해 가시가 길다고 하겠습니다. 물이 절대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흔적들로 두텁고 거친 껍질 그리고 단단한 옹이들 때문에 사람들이 목재로 쓰기에는 합당치 않은 나무입니다. 싯딤나무는 굵은 나무도 아닙니다. 손쉽게 다룰 수 있도록 무르지도 않고,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에 이러 저리 뒤틀린 나무입니다. 지나가던 사막여우가 나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못생겼냐? 아무 적에도 쓸모없는 나무가 왜 여기 서있는 거야?” 싯딤나무가 대답했습니다.“야, 모르는 소리 말라. 만일 내가 쓸모 있게 생겼다면 지금 내가 여기 서 있을 수 있겠느냐? 벌써 인간들의 손에 잘려 나갔을 것 아니냐? 나는 못생겨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단다.”

한 마디로 싯딤나무로는 어느 종류이건 가구를 제작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런 거칠고 뒤틀린 나무가 하나님의 지성소에 쓰이는 기구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차라리 레바논의 백향목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이 아무쩍에도 쓸모없는 처량한 나무가 천하제일의 목수인 브사렐에 의해 하나님의 전에 귀한 성물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냥 쓰이는 것이 아니라 순금을 입혀 최고로 귀하게 높임을 받는 성물이 되었습니다.

 

다시 성지순례 때입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광야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황량한 땅.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태양열은 해질 무렵까지 여전히 뜨거웠습니다. 모래를 쥐어보지만 습기라고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생물이라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이곳에 싯딤나무 한 그루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이처럼 광야 한 모퉁이에 고독하게 뿌리를 내린 한 그루 싯딤나무를 보면서, 바로 나도 그런 볼품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나를 택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척박한 땅 시내광야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순간 행복함과 고마움, 감사함, 기쁨이 가득 채워졌었습니다.

 

성경에 많은 나무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백향목 감람나무 포도나무 에셀나무 상수리나무 떨기나무 석류나무 뽕나무 종려나무 향나무 잣나무 로뎀나무 그리고 아무쩍에도 쓸모없는 싯딤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싯딤나무가 성경에 싯딤이라는 이름으로 24번 아카시아나무로 19번 그밖에 다른 이름(조각목등)으로 5번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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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째서 하나님은 수많은 나무들 가운데 가장 볼품없고 외롭고 쓸모없는 나무인 싯딤나무를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성전의 서울을 만드는데 쓰게 하시고 법궤를 만들어 순금까지 입히셨는가?

 

싯딤나무로 법궤를 만드는 과정을 따라 가면서, 우리의 믿음생활이 얼마나 감사한 생활인지를 살펴보려합니다. 싯딤나무가 성물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은 택함 받고 잘리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궁궐을 건축하기 위해 택해진 나무는 강원도 태백산맥에서 자란 소나무로 소나무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적송입니다. 높은 바위산이나 토양이 맞은 곳에서 200-300년 자란 적송은 송진이 많아 튼실하고 곧고 강하다고 합니다. 특히 왕실에서 이런 적송을 관리하는 감역관(監役官)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감역관이라면 싯딤나무는 거들떠도 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브사렐은 법궤를 만들기 위해 마땅한 싯딤나무를 찾아 광야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합당한 나무를 발견하고 베어 왔습니다.

 

우리 세상은 마치 광야와 같습니다. 여기에 비록 많은 인생들이 살고 있지만 알고 보면 모두 외롭고 쓸쓸한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군중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짝지껄 떠드는 시장을 걷다가 문뜩 나 혼자로구나 하는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문뜩 나는 혼자다!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60억 세계 인구가운데 신기하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혼자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있지만 사람은 언제나 외롭습니다. 그런데 ‘나는 혼자가 아니다!’ 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나를 찾아 나를 만나주십니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에게 취하고, 세상에 취하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외롭고 쓸쓸한 사람을 찾아와 주시어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나는 버림받은 인생 같고, 뭐 하나 자랑할 만한 것 없고,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나를 지켜보셨으며 그런 나를 그 외로움의 땅에서, 그 지치고 힘들었던 시간들 속에서, 그 수많은 죄악의 바람이 쉬임없이 불어오는 그 광야세상 한복판에서 나를 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별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다!”

다같이 복음성가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하께 부르겠습니다. 이 복음성가에서 괴로울 때를 외로울 때라고 바꾸어 부르겠습니다.

 

<외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브사렐은 싯딤나무를 광야에서 잘라 가져와 나무의 껍질을 벗기게 됩니다. 성물로 쓰임 받기 위해선 겉껍질을 벗겨내어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으면 세상에서 입혀진 모든 껍질들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무슨 껍질입니까? 먼저 교만이 벗겨져야 합니다. 체면이 벗겨져야 합니다. 고집과 아집이 벗겨져야 합니다. 자기주장이 벗겨져야 합니다. 세상의 자랑이 벗겨져야 합니다. 세상의 습관들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세상적 욕심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와 생각들을 벗겨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나를 죄 짓게 하는 원흉들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온 땅을 정복할 때 모두를 다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ㅋ헤렘이라고 하는데 너무나 잔인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제하여지지 않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게 됩니다. 가나안땅의 풍속과 우상숭배에 유혹을 받게 되어 하나님 신앙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의 세상껍질들은 그 속에 죄악이 스며져 있어 온전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벗겨버려야 합니다.

 

옛날 김제 조덕삼이란 부자는 자기 집 마부인 이자익이 자기보다 먼저 교회의 장로가 되니 양반체면을 벗어버리고 자기 집 머슴인 이자익장로에게 장로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예우를 하였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이자익이 장로가 되니 조덕삼은 창피스러워 교회를 안나올 것이라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이 장로가 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니 어찌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자익장로도, 후에 목사님이 되시고 총회장까지 되신 분으로, 훌륭하지만 더 훌륭한 분은 조덕삼씨, 후에 장로가 되셨는데, 그분은 자신의 체면을 완전히 벗겨버렸으니 이보다 훌륭한 신앙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구암교회 첫 번 장로였던 양응칠 장로는 주일날 동리에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부인이 하인들을 시켜 음식을 장만하게 한 것은 안식일을 범한 일이라고 하면서 벌로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부인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철저한 안식일 신앙이 그의 후손들에게 큰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양응칠장로님도 훌륭하지만 더 훌륭한 이는 그 부인이십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종아리 맞는 부인은 자신의 자존심을 벗겨버린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세상 것에 잔뜩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받기에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다 버리고 새것이 도어야 하겠기에 우리의 겉껍질들을 벗겨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게 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복음성가 117장을 다같이 부르겠습니다. 1절과 4절만 부르겠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 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

 

내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주여 이 죄인이 무한감사 드립니다.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브사렐은 싯김나무의 껍질을 다 벗김 다음 바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바싹 말렸습니다. 잘 말려야 목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겉에만 말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 속까지 물기를 다 말려야 합니다. 만일 온전히 마른 나무가 아닌 것으로 집을 짓는 다면 집이 기울어지고 속에서부터 썩어지고 급기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에만 믿음이고 속까지는 아직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겉으로는 교회에 충성한다고 하면서 세상에서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시 겉에만 교인이요 속에는 아직 세상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겉은 형식이지만 속은 내용입니다. 아무리 포장이 좋아도 내용물이 안 좋으면 불량식품입니다. 불량식품은 사람의 목숨을 헤칠 수도 있습니다. 불량한 교인들은 세상을 더 더럽히고 어지럽히고 자신을 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겉에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속에도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예맘담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마음을 내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예수님 마음을 담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이 나를 돌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내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경험하면 마음에 예수님의 평안이 가득차게 됩니다. 항상 의 반대여야 합니다. 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옛날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이를 합니다. 어떤 친구가 맛있는 과자를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합니다. 야 그 과자 나 좀 줘하면 그 친구가 의 반대라고 말합니다. 과자 안주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세상의 온갖 시험으로 마음이 괴롭고 뒤숭숭할 때 이것은 마귀의 시험이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 반대해야 합니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 의 반대해야합니다. 나는 외롭지 않다 주님이 친구되시어 나와함께 계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괴롭다! 의 반대. 나는 기쁘다. 저 사람이 밉다! 의 반대. 저 사람이 사랑스럽다. 이렇게 의 반대로 하므로 마귀의 시험을 말려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안에 예수님의 평안이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하였습니다. 왜 사랑을 못 합니까? 마음이 평안치 못하면 사랑도 못합니다. 감사도 못합니다. 기쁨도 모릅니다. 마음이 평안치 못하면 믿음의 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일한 증거가 마음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이는 바다의 일엽편주 안에서도 배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셨습니다. 여러분,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 안에 있는 평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마음 안에 세상 것들이 가득차여 있다면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 해도 불안과 근심 걱정에서 벗어 날수 없습니다. 세상 것들을 내 안에서 모두 다 말려버리고 오직 예수님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 채우신다면 세상은 결코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세상이 아니라 아름답고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다같이 복음성가 46장을 부르겠습니다.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앗아갈 수 없네

주는 내 마음에 구주 되시었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오 주없이 살 수 없네 주님만 나를 구하시네

주 없는 세상 평화는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부사렐은 마른 나무 싯딤나무를 대패질하고 곱게 다듬어서 법궤를 만들어 그 겉에 순금을 입히게 됩니다. 광야에 홀로 아무렇게나 자라 아무쩍에도 쓸모없었던 싯딤나무에 순금을 입히니 세상에 이보다 귀한 나무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었다고 하여도 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싯딤나무 궤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가치를 가진 궤가 되었다는 것은 그 위에 순금으로 감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약하고 어리석고 죄 많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택함 받아 세상껍질이 벗겨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내 안에 가득 채우니 하나님이 우릴 내 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욥기서 23:10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순금이 무엇입니까? 99.99% 24K를 순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은 성도들은 순금 성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순금 기독교인이어야 합니다. 99.99%가 아니라 100% 순금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18ㆍ성도가 있고 14K성도가 있습니다. 18금은 75%가 금이고 25%는 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4K는 58.5%만 금이고 41.5%는 일반 금속이라는 것입니다. 18K 성도는 75%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25%는 세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고. 14K 교인은 58.5%만 교회에 있고 나머지 41.5%는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쪽 신앙이요 그러니 좌로나 우로나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온갖 세상풍상에 마르고 힘들고 죄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보혈로 완전한 금으로 옷 입혀 주셨으니 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입니까? 그래서 하나님 말씀하기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천하보다 귀한 순금으로 입혀진 성도가 세상가운데서 더럽혀지고 마구잡이로 쓰여 질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뽐내며 빛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이 기간에 다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 53:3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싯딤나무로 만든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에게 씌운 가시관은 바로 싯딤나무의 가시 줄기로 엮은 가시관 이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고 만왕의 왕 만군의 주가 되시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님은 이런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었습니까?

사 53:3 다음에

사 53:5. 6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은 그 입을 굳게 다물고 열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주께서는 내가 세상에서 온갖 죄를 저질렀던 허물도, 제멋대로 내 고집대로 살았던 일까지도 모두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시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벗겨 주시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아니면 싯딤나무 같은 우리의 광야인생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광야에 외로이 서있는 비틀어지고 메마른 싯딤나무 같은 인생살이에서 구원받아 순금 같은 귀중한 인생으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싯딤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싯딤나무 가시관을 쓰시어 보혈의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게 기뻐하며 날마다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들은 전에는 싯딤나무 같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싯딤나무 같은 인생이 변하여 순금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제나 세상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주님의 평안이 나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내 인생 속속들이 가득 채워져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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