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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1월 6일  신정주일아침예배   시91: 14-16, 빌 4:11 知足常樂 행복하세요.

 


勸戒全書에 知足常樂 能忍自安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고 능히 잘 참으면 스스로 편안하다.”란 말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지족상락 – 만족하여 기쁘게 살아가자입니다.

동양의 고전 도덕경에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 보다 더 큰 재앙은 없고, 욕심을 내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禍莫大於不知足화막대어부지족이요 咎莫大於欲得구막대어욕득이라. 故고로 知足知足지족지족이면 常足矣상족의이라-재앙은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허물은 얻으려고 욕심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족한 것을 아는 것에 만족하면 항상 만족하다.道德經 第46章)”란 말이 있습니다.

 

왕년의 영국의 희극배우로 찰리 채플린(1889-1977)이란 사람이 있었습 니다. 그가 평생을 세계적인 희극배우로 숫한 사람을 웃겼지만 그가 죽기 전에 “나는 평생을 많은 사람을 웃기는 배우 노릇을 하였지만, 실상 나 자신은 하루도 정말 기뻐서 마음속으로 부터 웃어 본적이 없다.”란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배우 게그맨들 가수 연예인들이 TV에 나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별별 쇼를 다합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은 과연 즐거운 마음으로 그 쇼를 하고 있는가? 저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들은 얼마나 힘들게 저런 쇼를 보여주고 있는가? 한편으론 그들이 안쓰럽고 다른 편으로는 고맙기도 합니다. 어떤 연예인들은 자신들의 쇼가 끝난 다음 공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평생 후회스런 사고를 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육신적인 즐거움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근심, 허무, 고독이 뒤따르게 됩니다. 서울 명동이나 압구정동에 새벽3,4시쯤 나가 보면 밤새 나이트클럽에서 술 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나오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대부분 발걸음이 비틀거리고 어떤 여인은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구역질을 하고 누구는 길모퉁이에 오줌을 싸고 별의별 추태들을 벌이는 모습들을 봅니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만족이 있을 것이고 무슨 희망이 있을 것인지 숫한 죄를 밤새도록 짓고 나와 가는 그들의 발 앞에 무슨 안전이 보장될는지 참으로 불쌍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요즈음 하룻밤의 즐거움이 평생의 저주가 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2절에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잠언 18장 14절에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씀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육신이 즐겁고 마음이 기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영혼이 평안해야 합니다. 영혼이 건강하고 영혼이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됨같이 육신도 잘되고 범사가 잘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과 만족은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혼의 평안을 누려야만 육신도 행복하고 마음도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14에 하나님께서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암미 에드 투비 이스빠우 느움 야훼 使我民足沾我恩)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므로 만족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곧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흡족하게 하고 만족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지정한 만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나타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림으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경남 김해시에 사는 이태식(73) 성도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불교 신자인 어머니와 단 둘이 농촌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집 근처에 있는 ‘천성암’이라는 절에 시주해서 절을 다시 증축하는데 크게 기여한 열성 신자였습니다. 그는 그런 어머니가 정말 존경스러워 어린 시절부터 불교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가 군 복무를 마치고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아내는 비록교회를 나가지만 결혼 초기에 이씨 가정의 법대로 제사를 잘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됨에 따라 결국 이태식씨도 가정이 평화를 위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석수집이 취미라 주일이면 산으로 강으로 수석을 찾아다니기 일 수 였습니다. 그러니 교회를 제대로 다니지도 아니했고 어쩌다 교회 나오면 예배당 구석지에 앉아 졸기 바빱습니다. 그런데 이태식씨의 따님은 신앙생활 잘하다가 목사 사모님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외손자를 안으면 아이들이 할아버지에게서 담배냄새가 난다고 싫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온 몸에 마비증상이 생겼습니다. 병명은 척수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01년 그는 척수염에 이어 간경화 말기 판정까지 받았습니다. 전신마비로 인한 절망과 회한, 포기로 죽음이 다가 오고 있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을 쯤 그는 ‘내가 이제는 오직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겠다’라고 생각하여,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지난날의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제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제 자기를 고쳐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믿음을 갖고 퇴원한 그는 죽기전에 성경 말씀을 필사한번 하고 가야 하나님앞에 설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붓(서예/흘림체)으로 성경을 필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004년 4월 28일부터 2007년 4월 22일까지 1077일 동안 화선지에 신구약전서를 모두 기록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64세 때입니다. 이 기록은 한국기록보유원(기네스북)에 길이 3,890미터로 최단 기간 및 최장 성경필사 기록보유자가 되었습니다.

그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신경이 살아나 지팡이를 짚고 다녔던 것만 해도 감사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지금 건강해져서 다시금 서울서 평양까지 길이 260km에 이르는 성경필사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3년간 3.9km의 화선지에 붓글씨로 성경을 필사해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최단기간 및 최장 성경필사' 한국기네스로 인증 받은 이태식(64)씨가 자신의 집에서 성경을 옮긴 화선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시편 107:8,9에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만족하게 해 주십니다.
2019년도 우리가 매 주일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은혜의 축복을 더욱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매 주일 하나님을 찬송하며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해주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봉독한 시 91:4 말씀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이 말씀을 하나님이 바로 우리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통성으로 읽을 텐데 말씀 중에 ‘그’를 읽을 때에 여러분의 이름을 말하며 읽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만족케 하시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를 만족하게 해 주신다고 하시였습니다.
14절 상반부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했으니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만족케 하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를 만족케 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람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데 꼭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할 때, 사랑 할수록 행복이 넘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아무것이나 사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대상을 분명하게 정해 주었습니다. 성경에 이런 것은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인생은 자꾸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에서 떠나 버립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곤고함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아무것이나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이 사랑해야 할 대상을 가르쳐준 대로 사랑하면 만족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거짓된 사랑은 혀끝에 있고, 진실한 사랑은 손끝에 있다고 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확증에 있는 것이며 확증이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일 3:18에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로마서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들이 감당 못한 죄악의 짐을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질병과 저주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1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타내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주님도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우리는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무슨 계명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두 번째,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네 번째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이 4가지 계명을 킨다면, 2019년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288:3)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에 풍랑은 잔잔하니...”, (찬송438:3)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으니, 여러분,  참 만족함을 얻으시길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을 만족케 하시는가? 14절 하반절에 보면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다녀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면서도 망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4:6에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망하는가? 하고 조사해 보았더니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 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성경을 많이 알았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자녀는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효도하지 않는 자녀는 아버지의 자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경하기에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예해야 합니다. 주일에 한번을 아버지 만나러 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아버지가 시키시는 심부름을 자 따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왕이신 하나님을 모릅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관하시고 지배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나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의 흥망성쇠를 온전히 관할하신다는 것을,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거나 아니면 지옥으로 내 쫒아버리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음생활을 소홀히 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들 있는 것입니다. 왕이 부르는데 달려가지 않을 신하가 있겠습니까? 왕이 기다리고 있는데 난 모르오 하고 모른척하는 신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 비유(마22장1절이하)에 임금님이 왕자의 혼인잔치를 열었습니다. 산해진미로 잔뜩 차려놓고 종을 보내어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돌아보지도 않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일하러 가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종을 잡아 모욕을 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22:7에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지어낸 말씀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적 사건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말씀은 왕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어 당시 예루살렘 성 사람들을 천국잔치에 초대하였는데 예루살렘 성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니 하나님은 군대를 보내어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킬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말씀도 그대로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 말씀이겠습니까? 이 비유말씀이 오늘우리에게도 역사적 사건으로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한다면 왕이신 하나님이 나의 행복과 불행을 나의 만족과 실망을 나의 성공과 실패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의 믿음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고 그래서 제멋대로 자기 맘대로 자기생각대로 행동한다면 결코 그 어디에서도 만족과 행복과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2019년도 우리의 왕된 하나님을 드높히고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정성을 다 기울여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함께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2번 반복해서 부르겠습니다.

(복164)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세 번째로 15절에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만족하게 해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해에도 많은 사건 사고들이 우리 주변에서 이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것이고 만족하게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건저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 믿고 올 한해 살아 가시 바랍니다.

 

세계에서 자기가 사는 곳에 제일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발리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한 목사님이 발리에 여행을 갔었는데 안내한 가이드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발리섬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 지상에서 가장 천국과 같은 곳임을 느끼며 살기에 신혼여행을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발리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이 목사님이 일주일동안 머물면서 과연 그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발리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며 만족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큰 산업 시설이나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자세를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①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We have nothing) ② "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Our life is simple) ③ "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We like each other) ④ "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We have enough to eat) ⑤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섬에서 만족하게 살고 있습니다."(We live and have a satisfaction on a beautiful island) 이 세상에 만족을 보장하는 곳이라면 그 곳에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반전이 일어나게 디었습니다. 발리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인근에서 화산과 지진 그리고 해일까지 덮쳐 큰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발리섬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발리섬이 결코 지진과 쓰나미에 안전한 지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섬에서 만족하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발리섬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섬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 어디에도 가장 안전한 곳이 없으며 만족함을 얻을 자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빌 4장 11절~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기서 자족하다는 말은 만족하다라는 말입니다. 헬라어 ‘아르케오(archeo)’란 말인데 이 말은 ‘돕는다’를 뜻하는 ‘아레고(arego)’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족은 스스로 자신을 만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비결’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미에오(myeo)’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의 어원은 명사인 ‘미스테리온(mysterion)’입니다. 신비, 수수께끼, 불가사의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미스터리(mystery)’가 여기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바울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인생의 비밀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당시 아무도 몰랐던 비밀,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만족함”입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육체적으로 부자유합니다. 또 언제 사형이 확정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보건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행복, 기쁨, 평안, 만족 등의 말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나는 만족하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 4:4에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바울로 인해 근심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히려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할 때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기뻐 찬송을 불러 감옥 안이 그의 기쁨의 소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은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울고불고 야단일지라도, 좌절과, 불만과 불평 속에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인생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이 가능했다면 우리에게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똑같이 가능케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성경 전체에서 적극적으로 명령하고, 또 허락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기뻐하라’입니다.‘기쁨’이란 단어가 성경에 164번, 또 ‘기뻐하라’는 단어가 191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의 신앙 자세가 어떠한가?일 것입니다.

 

2019년 새해를 맞이해서 바라건대 바울처럼 어떤 상황 가운데라도 지족상락 만족하시고 항상 기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부터 550년전, 조선 중종 때 살았던 대학자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1485~1541)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509년(중종4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간(司諫) · 승지(承旨)를 거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자리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낙향을 해 정자를 짓고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부르며 지냈습니다. 녹봉(祿俸)도 없던 그가 8가지가 넉넉하다는 팔여(八餘)라는 아호를 지은 연유를 친구가 묻자,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고, 따뜻한 온돌방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하게 맡는다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도 서포리 시골집에서 “시레기국과 밥 한 공기 뚝딱 먹고, 철새들 끼욱끼욱 날치며 날아가는 뜰에서 개 두 마리와 놀고, 딸이 끌여 주는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며, 아내가 피아노 치며 부르는 찬송을 들으면서, 봄이면 목련꽃 매화꽃을 감상하고, 가을아침에는 붉게 익은 홍수감을 장대로 따 맛을 보며, 밤이면 하늘에 가득한 달빛에 마음을 맡기고, 대추나무에서 거둔 따뜻한 대추차 한잔 마시면서 겨울을 지내니 팔여(八餘)라! 이처럼 여유로운 만족이 또 어디 있을까요? 하는 기쁨을 가집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2019년 새초부터 새말까지 어떤 일이 있던지 어떤 환경에 서라도 知足常樂  주안에서 만족하시고 항상 기뻐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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