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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7월 29일  주일아침예배  겔 17:22-24  그늘(枝之蔭下)

 

온도계는 1820년에 발명되었고 온도계가 만들어지고 102년 후 1922년 9월 13일 멕시코 기온이 섭씨 58도로 최고 더운 날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뒤로 58도보다 더운 날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우리나라에 40도가 넘는 곳도 있다고 하고 우리 군산도 35도를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너무 너무 덥습니다. 모두들 더위에 지쳐 헐덕 거립니다.

 

이런 무더위 속에 시원한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피서는 방콕여행입니다. 전기 값이 좀 듭니다만 에어콘 바람이 나오는 방안에 콕 박혀 있는 일이 가장 시원합니다. 예전에 더위를 어찌 이겨 낼 수 있었습니까? 선풍기도 없었던 시대 부채 부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에 돗자리 깔고 앉아 수박 나눠 먹는 때가 참 시원한 때 였습니다.

 

나무 그늘은 자연이 인간에게 더위를 피하게 하는 고마운 피서지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한낮의 더위에 허덕이고 있는데 하나님님께서 박넝쿨을 자라게 하시어 그 박넝쿨 그늘에 쉬게 하셨습니다. 요나서 6:6절에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크게 기뻐했다란 것은 너무 좋아 깔깔대며 웃었다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싱싱하던 박넝쿨이 시들어 갔습니다. 바로 작은 벌레가 박 넝쿨 줄기를 갈아버린 것입니다. 이러니 대단히 만족해하였던 요나는 곧 실망해 버려 엉엉 울음을 터트려습니다.  박넝쿨은 주저앉았고 뜨거운 해는 요나의 머리에 내려 쪼이니 정신이 혼미해져 갔습니다. 머리를 가려주던 그늘이 사라지자 뙤약볕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갔다가는 열사병으로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올 여름 우리나라에 이 열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12명이고 1043명이 병원치룔 받고 있다고 합니다. 더위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비올 때 우산 속으로 들어가면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날 그늘로 들어가면 더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30도가 넘는 날씨에 그늘 안에는 3,4도 온도가 낮아져 상대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가진다고 합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기뻐하고 있을 때 박넝쿨을 죽일 벌레가 땅속에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올 때 그 햇살과 동풍이 벌레 먹은 박넝쿨을 곧 시들게 했습니다. 벌레의 상징은 아주 사소한 죄입니다. 그 작은 죄가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원한 바다를 찾아가고 산곡의 그늘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아주 작은 실수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순간 내 기쁨의 박넝쿨을 시들게 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인생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찾았다고 기뻐하고 이제 시원하게 지내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것이 세상 그 무엇에도 없다는 것을 요나의 박넝쿨 사건에서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자 농부 비유가 그렇습니다. 부자 농부가 많은 수확을 하여 곡식을 창고에 가득 들여 놓고 이제 잘 먹고 편히 쉬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농부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창고에 가득한 곡식은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박넝쿨 아래에서만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박넝쿨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 박넝쿨이 시들자 요나는 너무 실망하여 엉엉 울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쉴 곳은 박넝쿨 아래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인 것입니다. 시편 91:1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아래 사는 자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0절에“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에스겔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예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백향목은 궁궐이나 성전을 지을 때에만 사용하던 최고급의 목재였습니다. 특히 레바논 지역에서 나는 백향목은 재질이 곧고 튼튼할 뿐 아니라 특유의 향내 때문에 벌레가 끼지 않고 썩지 않는 목재로서 유명했습니다. 백향목은 흔히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비유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백향목 역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백향목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 하나를 꺾어다가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시겠다고 하시는데 여기서 높은 산은 예루살렘 성전의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작고 연한 백향목 가지는 크고 강한 백향목인 강대국 바벨론과 애굽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약소국 이스라엘의 운명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작고 연한 백향목 가지가 온 세계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심겨지는 날 세계를 감싸 안을 수 있는 나무로 자라 세계의 온갖 새들에게 그늘을 제공하여 새들이 편히 살아가게 되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온 천하민족의 그늘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말씀은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는다"는 말씀입니다. 높은 산 꼭대기에 나무를 심으려면 큰가지를 꺽어 심을 것이지 왜 하나님은 연한 가지를 꺽어 심는다고 하셨을 까요? 강한 가지는 잘 꺽이지 않습니다. 큰 가지를 이식하면 오히려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잘 자라지도 않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는 큰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큰가지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세계에서 가장 약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큰 것을 택하여 더 크게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작은 것을 택하여 큰 것 보다 더 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유대민족은 바벨론의 포로백성입니다. 이들은 연한 가지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바벨론 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란 나라는 역사상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에스겔 선지자 이후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적으로 크게 기여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민족들의 그늘이 될 만한 나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연한 가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예언한 말씀이 아닙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사야 53장 2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이 연약한 가지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고 성전산 골고다 올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꺾이고 심겨지니 온 세상이 그 예수님께로 와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그늘에 들어오는 자마다 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수십억의 기독교인들이 그 십자가 그늘아래 살고 있는 있습니다. 국기는 그 나라의 상징입니다. 국기에 십자가가 그려진 나라들이 많습니다. 통가 자마이카 아이슬란드 슬로바키아 스페인 스위스 스웨덴 핀란드 리히텐슈타인 노르웨이 댄마크 그리스 그루지아 몰타 국기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영국국기에는 십자가가 3개나 겹쳐 있습니다. 왜 이런 나라들은 국기에 십자가를 그렸습니까? 십자가 그늘아래 그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어찌 기독교인들 뿐입니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십자가의 그늘아래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찌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 그리고 무생명체 까지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 415 <십자가 그늘 아래> 가사를 보면 1절에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곳 찾았네.”  3절 가사를 좋아합니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 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 없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이 찬송가사는 엘리자베스 클레페인(1830-1869)이라는 3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가기 전 1년전에 진은 가사로 그가 죽은 후 1872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가정의 보물’이란 잡지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가사는 원문 영어 가사와는 조금 다릅니다. 영어 원문 가사 1절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 밑에 나 기꺼이 서리니, 곤고한 땅의 큰 바위 그늘이요, 광야의 안식처라 한 나즤 뜨거운 햇빛과 그날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길에서 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가사에는 5절까지 인데 우리찬송에는 3절까지만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아, 십자가여, 나의 거처로 너의 그늘을 택하네, 나 주의 얼굴의 햇빛 외에 다른 햇빛을 구하지 않노라. 세상이 지나가는 것과 얻든지 잃든지 관계 없도다. 나의 죄가 나의 수치가 되나니 나의 영광은 모두 십자가 뿐이라”입니다. 

 

영어에서 쓰는 수사법 중에 'Oxymoron'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모순형용법'이라고 부릅니다. 정반대되는 말을 나란히 병치시켜서 어떤 상황을 강조하거나 독자의 관심을 끄는 비유법이지요. 예컨대 "더럽게 예쁘다"는 말이나 "병아리 눈곱만큼 많이도 주네", '지독한 친절,' '작은 거인', '다 아는 비밀', '우둔한 천재' 등등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언어는 대체로 민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입니다.

 

며칠 전 정의당 노회찬의원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이들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노회찬의원은 이런 역설적인 민중언어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비극적 죽음이 그의 정의당을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들은 이런 민중언어였습니다. 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거나 죽으면 살리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런 용어는 옥시모론 모순형용법을 사용한 민중언어였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하다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복음성가에도 "약할 때 강함 주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모두 다 모순어법이지요.

연한가지를 꺽어 높은 산에 심어 큰 나무로 자라 각종 새들이 그 그늘에서 살았다는 말씀을 다시 옥시모론의 법칙에 따르면 그 연한 가지는 오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순어법으로 가득찬 생활입니다. 꺾이기 쉬운 연한 가지가 될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거목이 됩니다. 약할 때 강해집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슬퍼할 때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꺾이지 않는 가지는 옮겨심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꺾여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우리 복음성가 131장에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역시 저는 2절을 좋아합니다.
십자가 죄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이제 우리에게 큰 나무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부솰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님이 큰나무 이십니다. 그리고 그 큰 나무에 우리는 연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연한 가지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꺾이고 심기기 쉬운 연약한 순과 같을 때 귀하게 쓰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가지 같았을 때 꺾어서 심고 거목이 되어 숱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모세도 80 노인이 되어 아무 힘도 야망도 없는 야인이 되었을 때 꺾어서 심고 출애굽의 영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바울 역시 가장 약하여 두려워 떨 때 가장 뛰어난 사도가 되게 하셔서 그 나무 밑에 모든 이들이 몰려드는 큰 나무 가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삼복 불 볕 더위에 많은 사람들은 시원한 그늘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시원한 그늘은 십자가 그늘아래 인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십자가 그늘 아래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원한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연한 가지 같은 우리들이지만 우리들도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 주어야 합니다.  노회찬 의원에게 올 여름은 무척 더운 여름이었을 것이고 결국 그는 인생을 시원케 해줄 그늘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 분 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박넝쿨 같은 그늘에 머물러 있다가 영원한 그늘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세상이 험하다고 뜨거워 못살겠다고 원망들 하니까? 왜 뜨거운 여름 무덥고 지루한 인생들을 살아갑니까? 세상살이 사느냐고 얼마나 땀을 흘리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의 그늘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연한 우리들이 그들의 그늘이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크게 자라지 못하여 그늘이 되어 주지 못한다면 그늘이 어디 있다고 알려라도 주어야 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아주 연한 가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연한가지인 우리의 그늘이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곳 라온 코이노니아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찾아와 하나님의 시원한 은혜를 체험하는 그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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