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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3월 18일 주일아침예배  눅 17:1-4  不陷 自愼(실족하지 말고 스스로 조심하라)

 

 

행정안전부는 포근해진 날씨로 산을 찾는 국민들이 늘면서 낙석이나 미끄러짐 등 안전사고 발생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15일 당부하였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국립공원을 다녀간 탐방객 수는 연평균 3042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은 탐방객이 늘어나는 시기로 2월(144만명)에 비해 23%(33만명) 증가하였습니다. 최근 5년간(12~16년) 발생한 등산사고는 연평균 7273건이며 3월에는 446건의 안전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등산사고 대부분은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면서 발생하는 실족과 추락이 33%(2413건)로 가장 많았습니다. 이어 길을 잃고 헤매는 조난이 17%(1211건), 개인질환에 의한 사고가 11%(836건)나 발생 하였습니다 

(참고: 서울=뉴스1 박정양 기자 |2018-03-15 16:28 송고 )

문제는 실족·추락의 원인이 등산객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 대다수란 것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인증샷’ 찍기가 필수처럼 여겨지면서 주위를 살피지 않고 사진을 찍으려고 움직이는 도중 발을 헛디뎌 실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단순 골절 부상을 입는 정도면 다행이지만 높은 절벽 같은 곳에서 떨어지는 경우엔 사망에 이를 수도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실례로 2011년 5월에는 춘천 오봉산에서 한 남성이 아내와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순간 발을 헛디뎌 50m 아래 절벽으로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2014년 2월에는 서울 북한산 용암문 부근 절벽에서 사진을 찍으려던 등산객이 떨어뜨린 휴대전화를 주우려다 30m 아래로 추락해 사망하였습니다. 또 지난해 5월에는 보성 오봉산 전망대 부근에서 나무에 기대 사진을 찍던 50대 등산객이 나무가 부러지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떨어져 숨졌습니다. 
이처럼 부주의에 의한 실족·추락사고를 방지하려면 우선 등산 중에는 항상 주변을 잘 살피는 것이 기본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위치를 먼저 잡은 후에 카메라를 들고, 만약 이동해야 한다면 반드시 카메라를 눈에서 떼고 주변을 살피며 이동한 뒤 다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좋은 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에 절벽 끝이나 위험한 암릉에 오르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썩은 나뭇가지를 잡거나 절벽의 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는 것도 위험합니다. 2014년 7월, 한 남성이 출입이 금지된 설악산 용아장성을 산행하다가 40m 아래로 추락해 사망한 것처럼 지정된 등산로를 벗어나 산행을 하는 행위도 위험합니다. 산행 중 술을 마시면 시야가 좁아지고 민첩성이 떨어져 실족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등산 시 음주를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적발 시 1차에 5만원 2차 이상은 1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합니다.
 
인생을 흔히 등산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인생의 산을 오를 때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여 크게 어려움을 겪게 되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미국에 있었던 일입니다. 20년 전 우리 돈으로 무려 200억원이 넘는 복권에 당첨된 남자가 반대로 인생이 나락으로 실족한 사연이 전해졌습니다. 지난 3월 15일(현지시간) 미국 CBS뉴스 등 현지 언론은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배를 받아온 제임스 알렌 에이즈(55)가 은행 강도 등 여러 혐의로 법정에 섰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최대 80년 형을 받을 수 있어 사실상 감옥에서 인생을 마치게 된 그는 놀랍게도 한때 로또 복권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던 것입니다. 원래는 경비회사에서 일했던 그는 지난 1998년 1월 무려 1900만 달러(약 202억원)에 달하는 복권에 당첨됐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행복의 나날이었습니다. 당시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첨금으로 새 집과 자동차를 살 예정"이라면서 "이제 가족을 꾸릴 충분한 돈이 생겼습니다. 내 인생에서 지금보다 더 행복한 적은 없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그는 지난해 캘리포니아주 여러 곳의 은행을 털다가 덜미가 잡혀 결국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조사 결과 드러난 현재 그의 처지는 20년 전 상황과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화려했던 그의 저택과 자동차는 사라졌고 대신 버려진 창고에서 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기쁨을 함께했던 부인과는 오래 전 이혼했고 지금 그의 옆을 떠나지 않는 것은 마약 뿐 이었습니다. 현지 언론은 "한때 가장 행복했던 35세의 벼락부자가 지금은 1주일에 1000 달러가량의 헤로인이 필요한 마약중독자가 됐다"면서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평생 옥살이"라고 전하였습니다.(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nownews.seoul.co.kr)  이 사람은 엄청난 행복을 만끽하다가 깊은 인생의 절벽 아래로 발을 헛 딛어 실족하였던 것입니다.
 
안희정 前 충남지사(53)는 “민주주의를 통해 정의·신뢰·평화의 가치를 높이고 기회의 공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2016년 9월14일 경향신문 인터뷰)라고 ‘안희정 브랜드’를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민주주의와 정의는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딘 1989년부터 변치 않는 소신이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적 됨됨이’를 강조했습니다. 저서 <안희정의 함께, 혁명>에서 “정치는 공적 삶의 영역이다. 공적 소신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안 전 지사는 자신의 비서를 성폭행했다는 의혹 속에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쳐 온 30년 공적 소신으로부터 스스로 실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안희정은 가치지향의 직업 정치인, 신뢰와 의리의 정치인으로 ‘인권 파수꾼’을 자처하면서 빛을 더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라워하였고 속은 기분에 분노 하였습니다. 그는 충남도의회가 인권조례 폐지안을 올리자 “인권은 협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재의를 요청하였고, 지난 3월 5일 충남도청 직원들에게 “미투(MeToo) 운동을 통해 인권 실현이라는 민주주의 마지막 과제에 동참해 달라”고 주장하였기에 더더욱 놀라워하였습니다. 미투 운동 동참을 촉구한 지 불과 11시간 만에 안 전 지사는 성폭력 가해자가 되면서, 실족질궐(失足跌蹶), 대통령을 꿈꾸던 자리에서 정치적으로 실족사 하였습니다. (참고: 경향신문 2018. 3.6 “공적 됨됨이·신뢰”외친 30년 정치인생 ‘추한 추락’구혜영 기자 koohy@kyunghyang.com)

사람마다 산을 찾는 이유가 다르겠지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가 있는데 아무리 정상이 아름답다고 해도 결국은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만나는 환상을 본 베드로는 이 산에 집을 짓고 여기서 함께 살자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내려가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한 40일간의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무리 산 정상이 좋아도 내려와야 합니다. 그것도 손에 아무것도 쥔 것 없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산을 오름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산에서 실족하는가? 그것은 산을 너무 경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름에 아무런 사전 지식을 가지지 않았거나 등산에 필요한 장비 준비를 소홀히 여겼거나 주의력이 산만하였거나 등등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란 산을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100미터 오르고 있고 어떤 이는 500미터 700미터 900미터를 오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750미터에 올라와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르느냐고 다리도 아프고 숨도 차고 이제는 쉬고 싶기도 하고 그러나 아직 올라갈 산  꼭대기가 보이기에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산을 올라오는 그 길은 모두가 달랐지만 그리고 이러 저러한 어려움도 굴곡도 많고 계곡과 바위산을 넘기도 하고 강을 건너고 자갈밭도 가시밭길도 지나고 가파른 절벽 길도 올라왔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기쁜 일입니까? 
인생을 산다는 것은 결코 슬프고 답답한 것이 아닌 기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인생의 산을 올랐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의 인생이 기적이요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 마다 기쁨입니다.

 

타타타의 노래를 아십니까? 1991년 양이지 작사 김희갑 작곡 김국환 노래입니다. 그 노랫말 가사에 “산다는건 좋은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 /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거지 / 그런거지-음—아허허 / 산다는건 좋은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벌은 건졌잖소 /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 한 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 무슨 재미- 그런게 덤이잖소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 /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거지 / 그런거지-음—아허허 / 산다는 건 좋은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벌은 건졌잖소 /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살면 / 무슨 재미- 그런게 덤이잖소”
이 노래는 처음에 조용필에게 주려고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용필이 노래를 부르고 녹음을 하였는데, 마지막에 호탕하게 웃는 부분에서 닭살스럽다면서 못하겠다고 해서 그 부분을 제외하고 녹음을 하였다. 그러나 그 부분이 노래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라서 그냥 갈 수 없었고, 다른 곡도 여유롭게 녹음을 했기 때문에 이 노래를 빼기로 하였다. 그러다가 조용필과 목소리가 비슷한 위일청에게 곡을 주게 되어 녹음을 하였고, 그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는 양인자가 각본을 쓴 드라마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김국환이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이 노래를 부를 때 조용필이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나서 녹음을 하였다고 한다. 김국환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를 담은 음반은 1991년 2월에 출시되었다. 김국환이 부른 노래가 발표되고 나서 간간히 라디오 방송을 타기는 했지만 가수의 출연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2년 초에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 삽입이 되었는데, 극중에서 자녀를 결혼시킨 두 중년 여성(김혜자, 윤여정)의 허탈감과 외로움을 그려내는 배경음악으로 쓰여진 것이다. 또한 극중에서 김혜자가 이순재에게 이 노래의 가사인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를 적절히 인용하여 대사처리를 하였으며, 홀로 이 노래를 감상하는 장면이 방영된 후에 당시 주 시청자인 중장년층 주부에서부터 젊은층에 이르기까지 인기가 확산이 되었다. 이 노래가 드라마에 삽입된 것은 당시 드라마 극본을 쓴 김수현이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우연히 노래를 듣고나서 드라마에 사용을 했다고 한다. 거기에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 노래도 인기를 얻게 되자 노래를 부른 김국환까지도 수지맞는 가수생활을 하게 되어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요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거지, 그런거지-음—아허허’ 손해 본 장사가 아닙니다.
타타타라는 말은 인도 산스크리트어(तथाता, tathātā 眞如=진리의 법신의 본질로 "있는 그대로의 것" · "꼭 그러한 것")로 ‘그래 그거야’ 라는 의미라 합니다  작사가인 양이지 씨가 인도 여행 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되어 가사를 썼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산을 오른다는 건 좋은 것입니다. 타타타 입니다.

 

성경이 말씀한 99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99법칙이란 전도서 9:9의 말씀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레에 하-임)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헤레크)이니라.” 즉 “모든 날 동안 가족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인 나에게 주신 분복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분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슬프다, 인생은 괴롭다, 인생은 가시 밭 길이다라고 슬퍼하고 낙심하며 괴로워 몸부림칩니다. 이러 사람들은 한마디로 인생의 산을 오르다가 실족한 사람들입니다. 왜 사람들은 산을 오르면서 실족하여 큰 고통을 당하거나 천인단애(千仞斷崖)로 떨어져 죽음을 당하는 일까지 있는 것입니까?

시 73:2에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幾乎失足 幾遭跌蹶)“의 말씀에서 ‘넘어질 뻔’이란 말이 전에 개역 성경에서 ‘실족’이란 말로 번역되었었습니다. 왜 시인은 실족하였을 뻔 하였다고 하였습니까? 그 다음절 3절에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고 그 이유를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비 신앙인들의 사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그들과 같아지려고 하다가 실족할뻔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를 인생이란 산에 여기 저기 사탄이 파놓은 함정들이 있다는 것을... 그 함정에 빠질 때에 실족하게 됩니다. 조심하지 아니하고 주의가 산만하면 마귀가 틈타게 됩니다. 


오늘 봉독한 17:1-3절 말씀을 요약하면 不陷 自愼“실족할까 스스로 조심하라“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성경에서 실족한다라는 말은 원어로 “스캔댈리조”란 말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 스캔들(scandal)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스스로 조심하라(프로셓테 헤아우토이스)’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야 합니다. 조심하라는 말씀은 명령형으로 현재 복수형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조심하라’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말씀 하실 때 ‘조심하라!’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실족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잘못 즉 죄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산에서 사진을 찍다가 좀 더 잘 찍기 위해 조금씩 뒤로 물러나다가 그만 벼랑 끝에 까지 온지 모르고 실족하여 세상을 떠난 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진 찍기 전에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실족케 하는 죄는 우리 스스로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조심하라!, 실족하지 말라!‘고 큰 소리로 명령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 때에 어찌 실족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예수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마18:7절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아낭케: 필연 불가불 부득불고전9:16)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도다”라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때때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거나 세상에서 실족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근신하고 조심하고 주의하고 스스로 경건의 연습을 부단히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뭐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야 실족하지 않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있습니까? 국가대표 선수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천국시민 되는 일을 어떻게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감당할 것입니까? 그래 포기하게 된다면 이 또한 실족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실족해서도 안 되고 실족 안할 수도 없고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답답한 일입니다. 때때로 믿음의 길엔 답답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답답하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쉽고 간단하고 누구에게나 주신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 특권을 잘 사용하지 않아 실족하여 망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 특권은 위를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위를 바라보는 것을 능력이라고 하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면 자기가 떨어진 아래를 바라봅니다.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나를 실족케하는 원흉인데 세상을 바라본다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굿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합니다. 귀신의 장난으로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또 귀신에게 절을 하며  잘 봐달라고 합니다. 귀신이 장난치면 거라사 귀신들을 예수님이 쫒아낸 것처럼 십자가로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방법을 모르니 여전히 귀신의 장난에 昏絶人生을 살고들 있는 것처럼, 실족하였으면 아래를 볼 것이 아니라 위를 보아야 합니다. 골 3: 2에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실족하였을 때 515장 찬송 3절에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살아계신 주 하나님 약한 백성 부르시어 하늘 뜻을 전하셨다”라고 찬송하여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란 분이 “위쪽으로 떨어지다(Falling Upward)”란 책을 발간하였습니다.(이현주 옮김, 국민북스 간) 실족하여 떨어질 때에 위쪽으로 떨어지라는 말입니다. 떨어지는 것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만유인력 법칙인데 어찌 위로 떨어지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에게로 떨어지라는 말입니다. 실족할 때에 땅으로 곤드박질 치지 말고 떨어질 장소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께로 떨어지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울왕은 질투로 인해서 실족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족하여 떨어질 때 마귀에게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말씀에 불순종하고 급기야 무당을 불러와 점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 성폭력을 행세 하였습니다. 더욱이 우리야를 계략으로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단 선지자가 미투운동을 벌였습니다. 당신은 성폭력을 행세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게 한 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다윗은 천길만길 인생의 낭떠러지 앞에서 떨어질 지경입니다. 그때에 그는 하나님에게로 떨어졌습니다. 만일 이런 비난을 한 나단 선지야를 죽였다면 다윗은 마귀에게로 실족하여 사울왕 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위로 떨어졌습니다. 나단 앞에 무릅을 꿇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시한 벌을 달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봅니다. 가료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냥에 예수님을 거짓 고발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야바 법정에서 불법적인 재판을 받았을 때에 베드로는 자신도 동조자로 걸려들어 갈까바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였습니다. 가룟유다와 베드로 둘 다 배신으로 실족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료유다는 실족할 때에 마귀에게로 떨어졌습니다. 결국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족할 때에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 통곡하며 회개 하였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중 멀리 호숫가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보고 앞 뒤 가리지 않고 물에 뛰 들어 헤엄쳐 예수님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교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실족할 때가 없을 수 없으나 그 때마다 위로 떨어지시기 바랍니다. 꼭 위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또 다시 실족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어두움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요11:9에서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 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미 빛 되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기에 우리는 대낮인생을 살고 있는데 여전히 캄캄한 밤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시길 요 3:19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그러하니 항상 어둠인생을 살아갑니다.  요 8:12에서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실족하는 것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실족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어둠에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둠에 다니지 않고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대낮같은 밝은 세상을 살기 때문에 실족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실족하였다면 다시 우리가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고 대낮인생을 살기 위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인도 흰두교에서 쓰는 용어로 ‘다르샨(darshan)’이란 말이 있습니다.(***수슘나 다르샨(Sushumna Darshan)의 산스크리트어 수슘나는 '수슘나 나디(Susumnna-Nadi)'를 의미하고 다르샨(Darshan)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비전' 또는 '거룩한 광경'을 뜻한다. 흰두교의 수슘나 다르샨 행법 수련을 통해 제3의 눈, 심안이 열려 차크라를 볼 수 있게 되거나, 그 외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비전' 또는 '거룩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말을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영안이라고 합니다. 영안이란 하나님을 응시하는 눈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르샨 곧 ‘화려한 응시(splendid gaze)’라고 말합니다. 응시(凝視)가 무엇입니까? 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빛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서나 무엇을 하던지 언제나 하나님을 응시하는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응시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꼭 시간을 정해 무릎 꿇고 수십 분 한 두 시 간이 아니라도 길을 가다가도 차를 타고가다가도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라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 중에라도 하나님을 응시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실족할 때가 없을 수 없으나 설혹 실족하다가도 영안을 떠 하나님을 응시하는 사람은 그 기도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그 실족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응시를 다르샨 곧 ‘화려한 응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는 바라봄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입니다. 교회 가서 예배드릴 때 가만히 제단 가운데 있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점점 제가 십자가 가운데로 빨려들어 가는듯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그 십자가 속에서 들려나오듯 합니다. 당시 변홍규 목사님은 70세가 가까운 노 목사님이셨는데 이가 빠져 말씀이 헛 나와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게 되는데 제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습니다. 그 후로 저는 습관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눈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길을 갈 때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할 때나 운전을 할 때나 저는 조용히 하나님을 응시하며 기도합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화려한 응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앞산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하늘을 날아가는 철새들을 바라보면서, 나무를 바라보면서, 작은 들꽃들을 바라보면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잎을 바라보면서, 뜰에 잡초를 뽑으면서, 심지어 아내를 도와 설거지를 하면서 그 때가 바로 조용히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화려한 응시의 체험시간입니다. 저는 이 설교 말씀을 준비할 때도 마치 하나님을 바라보듯 화려한 응시의 체험을 하면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마치 기계적으로 받아쓰듯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저도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을 응시하는 체험을 통해 그 실족한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길가는 나그네를 영접하므로 부지중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모세는 시내산 기슭에서 양을 치다가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기드온은 미디안 군사 모르게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형들을  대신하여 들에 나가 양을 치다가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왕으로 하나님의 간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일들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늘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화려한 응시하고 기도하는 생활에 하나님의 응답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산을 오르다가 성적인 문제로, 또 돈 문제로, 또 권력문제로 심지어 올림픽 경기장에서 실족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어찌나 안타깝고 슬프게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티브이 뉴스 시간을 통해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실족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상하고 슬퍼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들이 영영 그 실족의 자리가 마귀의 자리가 되어 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회개할 수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텐데,  그들의 인생의 실족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라온코이노니아 성도들은 인생을 기쁘게 사셔야 합니다. 인생의 산을 여기까지 올라 온 것이 기적이요 대단한 일이요 큰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산을 오를 때에 결코 실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주안에서 실족할까 조심하여 믿음을 지키고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주신 명령이십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혹은 말로서 때로는 행동으로 실족하게 된다면 두려워 말고 곧 두 가지 방법 첫째로 윗 쪽으로 떨어지기 둘째로 영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화려한 응시 체험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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