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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복음교회의 내일

전병호 by  조회 수:34 2018.02.07 12:09

2014년 1월 20일 총회 주제 발표

 

 

복음교회의 내일에 대하여

 

군산나운복음교회 목사 전 병 호

 

 

 

 

 

오늘 제가 여기에 서서 무슨 말씀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매우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쩌면 공식적으로 총회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부족합니다만 무언가 조금이나마 저의 소회를 전하는 것도 저에게 영광이라 생각하고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작년 11월 8일 2013년 총회 발전위원회에서 <복음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한 제안>이란 제목으로 발표한바 있었습니다. 당시 메모형태로 준비해서 발언을 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당시 메모를 중심으로 좀 더 보안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복음교회에서 올해로 43년째 목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저의 목회의 마지막 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동안 복음교회의 수많은 선후배 목사님들의 사랑과 협력으로 오늘에 까지 오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43년은 저에게 수없는 좌절과 도전이 점철되어 온 복음교회 목회자로 살아 왔습니다. 솔직히 저는 겉으로는 의연한 척 하였지만 속으로는 상당한 우울한 세월을 지내왔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외로웠고 제 영혼은 지쳐 갔으며 힘들어 주저 않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그래서 홀로 산속을 헤메 다닌적도 있었고 홀로 고속도로를 180km이상의 속력을 내며 달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신학자도 못되었고 그렇다고 성공한 목회자도 못되었고 사회운동가도 못되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았던 그 날, 그때 안수 후 목사 까운을 입혀 주었습니다. 축사에 이어 저에게 답사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저는 이 목사 까운에 갇혔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목사라는 포승줄로 나를 묶어버렸습니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저는 지난 43년간 예수님에게 사로 잡혀 여기까지 끌려와 70광장에 내동이 쳐져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43년간 복음교회 목사로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는 제 아내의 격려와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방황하고 좌절할 때 마다 저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제가 복음교회에 들어 올수 있었던 당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가 “신학을 하였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남이 가려 하지 않은 곳부터 가서 일하여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복음교회에 발을 디뎠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저를 떠 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저할 때마다 하나님은 저에게 항상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흥분을 가지게 하시였습니다. 저에게 하나의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것,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궁금증의 병이 오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였습니다. 내가 70세가 되면 그때 나는 어데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이 설흔 살 되던 설날에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데 아무것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캄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보여주시지 않은 나의 미래가 나는 무척 궁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궁금증을 풀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내일이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오늘을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야 내일을 알 수 있을 테닌까요. 저는 나의 미래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도 궁금합니다. 우리 지구의 미래도 궁금합니다. 과연 2050년에는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무척 궁금해서 그때까지 살고 싶습니다. 미래과학자들은 그 때 쯤에 사람들의 달나라 관광여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저도 그때가 되면 달에 발을 디딛고 걸어보고 싶습니다. 아, 그 꿈같은 미래를 생각하면 제 몸에 흥분의 전율이 부르르 전해집니다.

 

 

지난 43년간 복음교회의 목사로 저는 복음교회의 내일을, 그 미래에 대해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복음교회의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복음교회가 저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복음교회에 대한 꿈이 저의 꿈으로 제가 복음교회에 처음으로 들어 온 그때부터 꾸어 왔습니다. 제가 복음교회에 들어오던 당시 전국에 복음교회가 12곳 이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복음교회의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총회장 시절 200교회 10만 성도를 외쳤었는데 그것은 제가 바라본 미래의 아주 초기에 해당될 뿐입니다. 제 나이 28세 때 복음교회 목사가 되면서 모든 한국교회를 복음교회 날개아래 하나가 되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젊었던 그 때부터 제가 어디 있던지 교회연합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제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복음교회라는 입장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주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군산에서 그리고 NCC에서 제가 아니라 복음교회가 그 중심이 되도록 열심히 연합운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복음교회의 울타리가 나에게 개 교회의 울타리가 아니라 내가 살고 이는 지역 사회의 지경이요, 한국 삼면의 바다가 복음교회의 울타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 기도의 한계는 물론 내 사랑하는 내 교회의 성도뿐 만아니라 남북한 모든 민족이 내 목회의 한계 안에 있다고 고백하고 지난 43년간 기도하여 왔습니다.

 

 

저는 최태용목사님을 영과 진리로 만난이후 그분이 바라본 미래를 저에게 공유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교회 50년 약사를 쓰고 최태용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지필하면서 20세기 초 최태용 목사님은 20세기 말을 바라 보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눈길이 그분의 눈길에 접변되면서 이제 그분의 눈길을 통해서 21세기 말을 바라보려는 작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태용 목사님은 1925년 12월 6일 주일 오후 서울 YMCA대강당에서 나이 30세 젊은 나이에 한국교회의 신앙혁명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선언하였습니다. “한국 교회여, 영이 되라, 진리가 되라, 생명이 되라” 외치면서 신앙혁명가를 높이 불렀습니다. 그때로부터 최태용목사님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 디딛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최태용의 스피릿은 바로 레볼루션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먼저 사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혁명적 사고가 요청이 됩니다. 최태용목사의 사고는 그때까지의 한국의 그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창조적 사고 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의 사고를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가르침이 다른 사람과 다른 권세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해서 따른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질시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최태용목사님은 복음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복음교회는 레볼루션을 위한 최태용의 이노베션이였습니다. 이노베션이란 경영학 용어입니다. 기업의 소득과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혁신, 그리고 기업의 체질 개선과 이를 위한 분명한 목표,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지와 이를 실행할 방법으로 전략과 전술을 이노베션이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셔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려는 이노베션으로 복음교회를 최태용목사를 통해 세우셨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로 영적기독교를 그 전략으로 3대 표어를 세워놓았습니다. 최태용목사는 나를 따르라 외치면서 민족의 엉겅퀴 가시의 역사의 밭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복음교회 초대 신앙인들이 그분의 뒤를 따라 미래로 풍덩 몸을 마꼈습니다. 그러나 최태용목사의 미래는 1950년에 필름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필름도 상실한 채 Feature도 없고 Peculiarity도 사라진 채 역사는 흘러갔습니다.

 

 

지난 발전협의회 때 저는 이 흘러간 노래를 불렀습니다.

 

 

꿈이여 다시한번

 

 

꿈이여 다시한번 백합꽃 그늘속에 / 그리움 여울지어 하늘에 속삭이니

 

일곱빛깔 무지개가 목메어 우네 / 꿈이여 다시한번 내 가슴에 피어라

 

 

꿈이여 다시한번 사랑의 가시밭을 / 봄 여름 가을 겨울 눈물로 다듬어서

 

다시 만날 그 날까지 기도드리네 / 꿈이여 다시한번 내 가슴에 피어라

 

내 가슴에 피어라 내 가슴에 피어라 내 가슴에 피어라

 

 

1977년 제 19회 총회는 다시 복음교회의 미래에 대한 꿈을 심기 시작하던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당시 오충일목사님과 저는 그야말로 복음교회의 미래를 향해 단짝 파트너로 꿈을 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꿈의 씨앗이 77선언문입니다. 제가 문장을 쓰고 오 목사님이 가다듬었습니다. 1977년은 우리나라 현대역사에 가장 암울하던 시절 이였습니다. 군사독재가 가장 세력을 떨치면서 긴급조치를 발령하여 마구잡이로 민주인사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 우리 복음교회는 미래를 향한 한 작은 꿈 씨로 77선언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씨는 있는데 밭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길가요 자갈밭이요 가시덤불 밭입니다. 그뿐 아니라 일꾼이 없습니다. 자갈을 일구고 가시덤불을 헤칠 일꾼이 부족합니다. 수십 년 동안 일꾼을 키우질 못했습니다. 신학교설립이 시급하였습니다. 복음교회 일꾼을 양성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설립을 할 만한 환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꿈은 환경의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도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쓰레기장에서도 장미꽃은 핍니다. 저는 제주도라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주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제주도엔 강경옥목사님과 만순녀사모님이 계셨습니다. 그 두 분의 뚝심은 알아주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제주복음교회 안에서 제주신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총회에서 총회 신학교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5년 동안 십여 명의 신학생을 양성하였습니다. 여러 졸업생들이 다른 교단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서 공부하던 분 중에 오늘날 우리 복음교회 중심적 역활 하였거나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저는 제주복음교회를 사임하고 제주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문화인류학과 사회정책론 등을 강의 하면서 제주 중앙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주신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제주도에 5개 교회를 설립하고 제주 지방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제가 최태용목사님의 생애와 사상을 집필하던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제주기독교문화원을 설립하고 제주방언성경도 출판한바 있습니다. 당시 제주신학교 학생들은 제주문화의 보전에 대한 비젼을 가지고 보존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권의 무인가 신학교에 대한 탄압으로 결국 제주 신학교는 5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산 남천중앙교회로 옮겨 왔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군산 신풍교회에서 정책협의회를 할 때 제가 주제 강사로 서게 되어 아주 강하게 강조한 것이 복음교회의 미래는 목회자 양성으로 현재 이대로 가다가는 복음교회는 자연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럼으로 시급히 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 신학교는 복음교회의 모태인데 지금 석녀로 있으니 어찌 복음교회의 미래가 있을 것인가? 한나가 되라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래서 사무엘을 낳아라 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많은 당시 동역자들이 함께 호응을 하여 기도하여 오던 중 마침내 군산 신학교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역시 신풍교회에서 지방회 연합부흥성회를 이중표 목사님을 모시고 개최하던 중 고 김천일 목사님이 갑자기 성령충만한 가운데 신학교 설립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합시다하여 마침내 군산신학교가 설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다시 부산에서 신풍교회로 오도록 하고 지금까지 복음신학교를 위해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학교의 설립은 복음교회의 꿈을 이루는 시발점이었고 나아가 최태용목사님의 오래전 꿈을 실현시켜드리는 일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총회신학교를 통해 우리 복음교회 교역자가 되신 많은 분들을 보면서 물론 시작은 미약하고 아직도 너무 부족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총회 신학교를 통해 복음교회에 새롭게 역사하고 계심을 저는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신학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복음교회의 신학교에 복음교회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장로회 신학교에서는 칼빈을 가리키고 칼빈신학을 가리키고 장로교 신학을 배워야 장로교회 목사가 됩니다. 감리교신학교에서는 웨슬레를 배우고 감리교회신학을 가리키고 감리교회 교리와 장정을 배워야 감리교회목사가 됩니다. 제가 아직 복음교회 들어오기 전에 저는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에 편입하여 그런 과목을 배웠습니다. 당시 감리교회목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엄격히 고백하면 다른 이유가 더 컸었습니다만. 그런데 복음교회 목사를 양성하는 총회신학교에 복음교회신학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교회 신학을 배우지 못한 목회자가 과연 복음교회목사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복음교회 신학을 알지 못한 교수가 복음교회 목회자를 제대로 양성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교회 신학은 복음교회의 정신입니다. 복음교회 존립의 근거입니다. 그것 없으면 복음교회로 설 수 없는 복음교회의 척추입니다.

 

 

미국 템플대학교 설립자인 레셀 콘웰(Russell Conwell 1843-1925)목사의 설교 중에 “다이아몬드 밭”이란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는 너무나 유명해서 콘웰 목사는 이 설교를 5000번 이상이나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나가던 장사꾼이 한 늙은 아프리카 농부에게 내륙 깊숙이 들어간 사람들이 다이아몬드광산을 발견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농부는 그 이야기에 무척 흥미를 느꼈습니다. 고심 끝에 그 농부는 자기 농장을 팔고 카라반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찾아 아프리카의 광대한 내륙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그는 광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다니면서 다이아몬드를 찾았습니다. 결국 돈이 다 떨어진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엔 홀홀단신인 된 그는 절망감으로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가 팔았던 농장에서는 새 주인이 농장을 가로지르는 개천에서 나귀에게 물을 먹이다가 이상한 빛을 내는 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그 돌을 가지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잊고 지냈습니다. 몇 달 뒤 예전에 왔었던 그 장사꾼이 그 농장에 들러 하루 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그 이상한 돌을 보고는 대단히 흥분하면서 다이아몬드를 찾아 떠난 옛 주인이 돌아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새 주인은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흥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장사꾼은 그 이상한 돌을 들더니 “이것은 대단히 값비싸고 귀한 다이아몬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이아몬드를 찾은 곳을 함께 갔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에 다이아몬드가 널려 있었습니다. 농장 전체가 다이아몬드 밭 이였습니다. 옛날 농장 주인은 자신의 발밑을 찾아보지 못하고 다이아몬드를 찾으려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옛날 농장 주인은 가공하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은 다이아몬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다이아몬드 원석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통 돌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보석 가계에서 볼 수 있는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컷트 연마 세팅 등 가공과정을 거쳐야 합니다.>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다이아몬드 밭이 무엇입니까? 천래지성 영과 진리 이 최태용목사님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책들입니다. 그리고 그 최태용목사님의 다이아몬드 밭이 원석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1970년대 말 저는 최목사님의 원석을 찾으려 동분서주 하였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천래지성 영과 진리를 수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읽기도 어려운 옛 필기체 잡지를 밤새가면서 몇 날 몇일지 읽어내려 갔습니다. 아, 이것 다이아몬드로구나 저는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이 다이아몬드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저의 숙명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는 최태용의 생애와 사상이란 책을 신들린 사람처럼 5일 만에 탈고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영진 박사님의 도움으로 출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이아몬드를 처음 알아본 장사꾼에 불과 할 뿐입니다. 그 후 30여년이 지난 후 고 채문규 장로님이 먼지 묻고 흙 묻은 천래지성 영과진리 잡지를 탈탈 털어 깨끗이 현대어로 단장하여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다시금 고 채문규 장로님의 노고를 치하하며 심심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아니라면 이제 누가 이 다이아몬드를 컷트 연마 셋팅할 엄두라도 낼 것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컷트자가 필요하고 연마자가 있어야 하고 셋팅 기술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신학부나 대학원 교실에서 저 나름대로 복음신학 소위 영적기독교론을 가르쳤었습니다만 저의 신학적 한계를 느끼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교단에 신학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실상 수많은 신학자들이 우리 교단에서 배출 되었습니다만 다른 교단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젊은 신학자들이 우리교단에서 일어났고 또 하나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길고 긴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를. 저분들은 그런 인고의 신학공부를 마치고 우리 교단의 신학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정말 우리교단의 귀한 집현전 학자들이십니다. 저는 신학위원회에서 이제 우리 교단의 복음신학을 정립하여 주실 것을 누누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이루어 질 신학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하면 끝을 볼 것이기에 저는 가끔 총회신학교에서 이것이 복음 신학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그 미래의 교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매우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과연 우리가 얼마나 복음교회를 알고 있는가? 얼마나 목회현장에서 복음교회를 교인들에게 말해 주고 있는가? 저는 우리 복음교회 목회자들이 복음교회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리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최태용의 그 깊은 꿈을 함께 공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분의 미래를 열어가는 영안을 함께 바라보며 그분이 바라보는 오메가 포인트에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최태용목사님이 20세기 초에 20세기 말을 바라보았다면 우리는 이제 21세기 초에 21세기 말을 바라보며 오늘의 꿈을 꾸기 시작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리무중 캄캄절벽 어찌할까 생각이 정지되고 동공이 풀어지며 동맥경화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미래는 흥미진진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미래가 어떠할지 그것이 궁금해서 오늘을 삽니다. 그것은 저의 시각은 미래에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미래에서 오늘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우주에 떠있는 인공위성 기지로부터 네비게이션 길 찾기를 안내하듯 미래에서 보면 오늘의 우리의 갈 길이 보입니다.

 

 

이미 21세기에 대한 수많은 길잡이 연구자들의 연구물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미래에 우리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 이제 하나하나 따져보고 길을 찾아야 합니다. 앞에서 저는 미래에 복음교회의 울타리가 한국 전체교회를 아우르는 그런 꿈을 꾸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 먼 미래가 아닌 바로 내일에 할 일은 무엇인가를 머리를 맛 대고 우리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최태용목사님 시절에는 최 목사님의 카리스마가 복음교회를 리더 하셨지만 지금은 그런 카리스마가 없습니다. 이제는 아주 카리스마가 무시되는 시대입니다. 이제는 백가쟁명의 시대입니다. 위아래도 없고 좌우도 무시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복음 교회는 시대 물결을 따름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카리스마로 함께 어울려 우리의 꿈을 공유하며 미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와 여의 나누어짐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복음교회의 내일을 함께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다만 견마지로 할 따름입니다.

 

 

내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저 개인적으로 몇 가지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으로 총회에서는 이미 교단 발전위원회를 발족시켜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직 흐지브지 일이 진행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한 곳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손은 못 잡을지언정 눈은 한곳을 바라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Steven G. Smith(The concept of the Spiritual)는 '지향적인 함께함' intentional togetherness라고 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사고의 틀로서 통전적 영성이 요구됩니다. 여기에 따른 구체적인 설명이 혹 다른 기회가 있으면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서로 마음이 어울어지고 뜻을 더불어 세우는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배우고 꿈을 꾸는 그런 시간들이 상시적으로 필요 합니다.

 

 

장기적인 계획으로 한국인 자신의 교회로서 정체성과 교단 신학의 확립이 있어야 하고 계속적인 물적 인적협력이 지속적으로 요구 됩니다만, 무엇보다 77선언문에 대한 목회적 신학적 연구와 실천방안이 마련되고 여기에 따른 교육재료 훈련 교재들이 발간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에 윤기열 목사님 살아계실 때에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교단의 교육 훈련 교재들, 영성훈련 교재를 만들어 보자고 상의하고 그래서 총회적으로 여름성경학교교재와 구역공과를 만들어 사용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교단의 교리와 예식서가 발간되지 않아 대부분 목회자들이 타교단의 것을 이용하고 있는 부끄러운 형편입니다. 물론 오래전에 작으마하게 발간한 바 있지만 너무 부족하여 사용하지 않은지 몇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신학위원회에서 새롭게 꾸며 그 신안을 지난 총회 때 보여드린바 있지만 그것도 지금 거의 진행이 멈추어 있는 상태입니다.

 

 

신학교가 활발하게 성장하기 위해 제도적 구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각 교회와 성도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성원이 요구됩니다. 지난주간에 전주에서 세계에 각국에 한국교회들이 세운 대학들의 보고대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창기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교육기관을 세우고 특히 대학들을 세웠듯이 지금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가서 대학들을 세웠는데 현재 25대학 이였습니다. 그중에 이미 수천 명 현지 학생들이 다니는 그 나라의 최고의 대학으로 발전한 그런 대학도 있습니다. 그 대학들이 한국의 교회들과 교인들에 의해서 지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신학교는 자체 건물도 없어 개 교회의 교육관 교실을 빌어쓰고 있습니다. 그것도 재정상태가 열악하여 금년 예산도 긴축 예산안을 작성 중에 있습니다. 신학교의 활성화가 교단의 내일을 좌우하게 됩니다.

 

 

미래를 향한 교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여기에 상응하는 재정적인 뒷받침이 요구 됩니다. 그러나 현재 총회예산으로는 경상비 충당으로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교단발전위원회에서는 수년전부터 교단발전 기금을 모집하고 각 교회와 교인들의 협조를 부탁한바 있습니다. 각교회의 일 년 예산의 1/100을 발전기금으로 그리고 전국 복음교회 교인들의 자발적으로 1004운동을 합시다라는 켐페인을 벌린바 있습니다. 매월 한사람이 천원을 일 구좌로 발전기금으로 총회에 보내주면 이 발전 기금에서 미자립교회와 새로 설립하는 개척교회를 후원하자는 취지 였습니다. 그러나 몇 교회의 협력으로 그 성과는 대단히 미약한 현실입니다. 진정 내일의 교단발전을 꿈꾸는 복음교회 성도라면 이 작은 정성부터 우리가 함께 모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발전위원회 보고사항을 참고해주셨으면 합니다.

 

 

뿐 아니라 타 교단 같은 경우 여기저기 교단 소유 부동산 수입으로 막대한 선교자금을 이용하고 있지만 우리 교단은 전혀 없기 때문에 선교자금의 확충을 위한 특별사업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 필요한것을 재수 좋게 찾아내는 능력)가 있다면 교단발전의 자급자족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단 내에 이런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교단발전의 내일을 위한 우리는 무엇보다 교단의 제도와 구조와 조직의 재정비가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교단의 정치 제도는 장로교회 같은 대 교단의 제도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으로 횡으로 조직의 원활함이 매우 취약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교단 같은 대부분의 소 교단들은 대체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회 루터교회 구세군 물론 각 교단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앙고백으로 된 제도라 하겠습니다만 우리 복음교회도 최태용 목사의 복음교회는 감독제도 였습니다. 그러나 최태용 목사님 이후 지도력의 부족으로 이사장제도가 되었다가 총회장 제도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흔히 중앙집권적 제도는 민주적이지 못하다고 말합니다만 감독제도하에 얼마든지 구조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목회의 전문화 다양화 다문화 정보화가 지향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개 교회 목회자 스스로 목회의 전 분야를 맡아 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목회의 페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서울교회와 군산 교회와 남천중앙교회가 함께 하나의 목회 공동체를 가집니다. 그래서 목회 교육 선교 등 같은 프로그램을 가지는 목회공유를 하게 됩니다. 세 교회 목사님들이 모여 함께 공동 목회 페러다임을 구성하고 함께 정보를 공유하며 세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삼위일체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저는 이런 삼위일체교회를 21세기의 성례전적인 교회라고도 부르고 싶습니다. 지금 작지만 그리고 조금은 다른 입장입니다만 병점교회 이용한 목사님의 목회 페러다임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도시교회와 농촌교회, 순수목회지향교회와 사회사업목회지향교회, 장년 중심 목회와 청년 또는 청소년중심 목회간 서로 교회간의 특징을 공유하며 함께 힘을 모아 발전해 나가는 네트웤 시스템입니다.

 

 

저는 다시 최태용목사님의 꿈을 따라가 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줄기차게 생각하고 있는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상의 근본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사상의 근본은 땅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난 오천년간 우리 백성을 주장하던 무속신앙 도교 불교 유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 와서 새로운 신앙으로 변화를 이룬 것은 이 나라 땅과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심지어 풍수지리까지 공부해 보았습니다. 온갖 산들을 돌아 다녀 보았습니다. 몇 년간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답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바로 농토입니다. 농토가 한국인의 생명의 땅입니다. 저는 씨앗뿌리는 예수님의 농부의 비유에서 저는 하나의 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농토가 둥우리고 복음이 알이라고. 복음이란 알이 아름답게 부화하기 위해선 농토에 품어져야 한다고.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농토는 점점 삭막해져가고 피폐해져 가면서 한국교회 역시 정체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사고의 끄트머리에서 불이 반짝 켜지게 된 것은 몇 년 전 1935년 최태용목사님이 당시 일본 총독부에 제출한 복음교회 설립신고서를 발견하였을 때입니다. 저는 그 설립신고서에 함께 첨부한 최목사님의 자필 이력서를 보고 아 하고 소리쳤습니다. 최태용목사님은 1912년 영흥공립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면서 계속해서 동교 연구과를 졸업하고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농업지도원으로 근무였습니다. 그의 학창시절은 한국의 근대 농업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개혁운동과 복음교회 설립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행동 그 아래에는 마치 자갈밭을 뒤 엎으며 옥토를 만들어 복음의 씨앗을 뿌리듯 복음의 농사꾼으로 살으셨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그는 한국의 농업의 현대화를 위한 농민훈련원을 개원하고 수천 명의 농민들을 새 농민으로 양성하였습니다. 저는 최태용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 땅을 살리는 일이였습니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교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땅을 버렸습니다. 시골의 교회들은 땅과 함께 그 빛이 바래져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도시의 교회들은 수백 수천억 원의 휘황찬란한 교회들로 예루살렘성전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일입니다. 미래로부터 오는 묵시록의 사기사가 이 땅으로 달려오고 있는 말발굽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글로발 메저 곡물상사들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벌써 옥수수 콩 등은 다 메이저 브랙홀에 빠져 들어 갔습니다. 이제 먹거리 전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공장이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땅이 먹여 살립니다. 언제가 4월경 북한 땅을 가보았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길가에 쪼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밭에 나가 농사를 짓지 안고 저렇게 앉아만 있습니까? 안내원이 말하길 땅에 심을 씨앗이 없습니다. 지난겨울 너무들 배가 고파 밭에 심을 씨앗들을 죄다 먹어버렸수다라고 하였습니다. 북한문제만이 아닙니다. 언젠가 여기 우리나라에도 다가오는 문제입니다. 돈이 많아도 먹을 거리가 없다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응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다만 농촌교회 살리기 운동이 아닙니다. 교회들이 농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서울 교회가 저 농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복음교회가 도시교회로가 아닌 땅을 살리는 농촌교회의 본을 보일 때 그때 우리나라 백성들이 복음교회를 통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21세기의 비전을 저는 땅에다 둡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2시간은 더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저는 오늘도 최태용목사님의 영안을 따라 미래를 꿈을 꿉니다. 복음교회 100년 기념 예배 때 저는 그 자리에 참석한 저를 바라보면서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꿈을 꿉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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