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5월 21일  주일아치 예배  롬 12:15  맥놀이 신앙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이 맥놀이 신앙입니다. 맥놀이가 무슨 듯인지 알고 계십니까? 두가지 근접한 음이 동시에 겹칠 때 일어나는 울림소리입니다. 맥놀이 원리는 피아노에서 저음의 흰 건반과 바로 옆의 검은 건반을 동시에 쳐보면 관측할 수 있습니다. 즉 피아노 소리가 번갈아가며 작았다 커졌다 하는 현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징적 맥동이나 고동을 맥놀이라고 합니다. 보신각종이나 봉덕사종처럼 몸통이 큰 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여, 마치 바다의 파도가 출렁거리듯이 들립니다. 이와 같이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작게 들렸다 하는 현상을 맥놀이라고 합니다.

 

이런 맥놀이 현상을 심리적 현상으로 적용해 봅니다. 이런 영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미국의 흑인과 백인이 모여사는 '캔튼'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토냐'라는 10살짜리 흑인 소녀가 슈퍼에서 물건을 사가지고 한적한 시골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트럭을 탄 건장한 백인 청년 둘이 나타나서 '토냐'를 산으로 끌고 올라갔고, 두 남자는 그 흑인 소녀를 묶고 옷을 찢고, 번갈아가며 성폭행을 했습니다. 그 순간 그 어린소녀의 순수한 모든 육신과 정신은 가차 없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토냐는 생명과 자손을 잉태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소녀의 아버지 '칼리 해일리'는 딸아이를 안고 아버지만이 흘릴 수 있는 분노의 눈물을 삼키다 못해 토해냈습니다. 잔혹스런 범행을 저지른 두 청년은 곧 바로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기위해 재판정을 향해 걷고 있을 때, 그 흑인소녀의 아버지는 총으로 범인 모두를 죽여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재판결과 배심원들은 백인위주로 짜여질 확률이 높았고, 그렇게 되어지면 그 청년들은 무죄판결을 받게 될 것은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원수들을 죽인 흑인소녀 토냐의 아버지가 일급살인에 해당되는지, 즉 사형에 해당되는지에 대한 재판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은 계속해서 '토냐'의 아버지 '칼리 해일리'에게 안 좋게 돌아갔습니다. 예상대로 배심원들은 모두 백인으로 구성되었고, 배심원들은 아버지 '칼리'에게 유죄를 선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제 '제이크 브리갠스'라는 변호사의 마지막 변론은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법의 눈은 사람의 눈이다"라는 논리로 시작되었고, 무참하게 성폭행당한 여자아이가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라고 가정하고 판결해줄 것을 배심원들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변호사의 감동어린 변론을 들은 배심원들의 판정결과는 '무죄'였습니다. 자신의 딸아이를 성폭행한 청년들을 총으로 쏴 죽인 아버지의 행위는 정당한 행위였고, 그래서 무죄라는 결론으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딸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범인들이 만일 내 딸에게 그러 짓을 저질렀다면 나는 어떻게 하였을 것인가 소년의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 아니였겠는가? 배심원들과 소녀의 아버지 간에 심정적으로 맥놀이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맥놀이 현상이 지난 5.18 광주민주화 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도 있었습니다.
특히 기념식에서 보여준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은 행사 하루가 지난 19일에도 모두의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기었습니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격식 없고 소탈한 모습에 시민들은 '감동적이었다', '대한민국이 함께 울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 순간은 대통령의 기념사 뒤 이어진 기념공연에서다. '슬픈 생일'을 주제로 한 이 무대는 1980년 5월18일에 태어났으나 사흘 뒤 계엄군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37ㆍ여)의 사연이 모니터를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당시 전남 완도 수협에서 일하던 당시 29세인 김 씨의 아버지 김재평 씨는 이날 태어난 딸 소형 씨를 보기 위해 광주에 있는 도청 앞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으로 오다 총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5.18 기념일마다 슬픈 생일과 아버지의 기일을 동시에 맞아야 하는 김 씨의 사연은 알게 된 사람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김소영씨가 눈물로 읽어간 <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영상을 지켜보면서 안경을 벗고 체크무늬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문 대통령은 소형씨가 편지 낭독 후 눈물을 흘리면서 무대 뒤로 나가는 순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소형씨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두 팔을 벌려 소형씨를 안아주려 걸어 나가는 대통령의 돌발행동(?)에 기념식 참석자들은 물론 청와대 경호팀도 크게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소형씨를 10여초간 꼭 껴안고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문 대통령의 모습은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울대를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도 TV를 보고 있다가 이 장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오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소형씨가 낭독한 사부곡(思父曲)은 다음과 같습니다.
<철없던 시절에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는 지금도 참 행복하게 살아계셨을텐데. 하지만 한번도 당신을 보지못한 제가 이제 당신보다 더 커버린 나이가 되고서야 비로서 당신을 이렇게 부를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희생이 사랑이었음을. 당신을 비롯한 37년전의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가 행복하게 걸어갈 내일의 밝은 길을 열어주셨음을
사랑합니다. 아버지.>

 

(*김용민의 그림  그래, 이게 나라다)

 

문재인대통령의 눈물은 소형씨와 감정상 동감하는 일이었고 그 장면을 TV로 보고 있던 저와도 동감되어 눈물을 흘리였던 것입니다. 아니 모든 국민들도 그 순간 동감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소형씨가 부등켜 안고 울고 있는 그 동감하는 가운데 맥놀이현상이 온 국민들에게 퍼져 같은 동감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맥놀이 울림이 퍼져 나가 이때는 여?야 할 것 없이 민족이 하나를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맥놀이 현상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공감(sympathy이란 말과 동감(empathy)이란 말의 차이를 아십니까?
사전에 의하면 공감이란 남의 생각이나 의견·감정 등에 대하여 자기도 그러하다고 느낌, 또는 그런 감정'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동감이란 남과 같게 생각하거나 느낌, 또는 그 생각이나 느낌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넓은 주제, 사회적인 문제, 좀 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쓸 때는 동감이라는 말보다는 공감이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동감은 상대적으로 좀 더 개인적인 느낌의 단어입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다고 한국인들은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니 나는 이 망언에 울분을 금할 길이 없으며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나와 같이 전적으로 동감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공감하는 것입니까? 동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해 공감하는 생각을 가졌을까요? 아니면 동감하는 신앙을 가지셨을까요?
히4:15말씀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쉼파데시아)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꼭(호모이오테스) 같이 시험을 닫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동정이란 말을 지난 번 개혁성경에서는 “체휼體恤”이란 말로 번역하였는데  저는 동감이란 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 동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꼭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능력으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긴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자신을 위하여 배고픔을 해결 하고자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고 친히 우리들과 같이 배가 고프셨습니다. 예수님 배고픔을 해결 하고자 제자들은 동네에 먹을 것을 사려고 들어간 것을 요4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가성에서 우물물을 먹으시려고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까지 하시는 것을 보아서 예수님은 목이 마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행렬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마리아를 사람들의 돌팔매 징벌에서 구하여 내시고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아픔, 사람들의 원통함과 고통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미움, 비난, 욕, 배신, 매 맞음,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까지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은 인간고통 고난 어려움을 외면하지 아니하시며 함께 동감하시었습니다. 자신의 피로 산 인생들이 배고파 울 때 함께 우시고 힘들어 할 때 함께 힘들어 하시는 동감자 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을 바로 우리에 대하여 동감하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향해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동감하시니 우리도 주님을 향해 동감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설 격이 다릅니다. 감히 함께 설수 없는 우치입니다. 가르ㅓ나 주님이 우리를 옆으로 부르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동감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동감이 중첩되면서 신비한 맥놀이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울울한 울림 저는 그 울림을 거룩한 울림이라고 말 합니다 그 거룩한 울림이 내안에 울려 퍼집니다. 심장이 떨리고 머리 속에 가득히 그 울림이 채워집니다. 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구나 나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내안에 계시는 구나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엔 크리스토)’라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신비한 세계가 펄쳐지게 됩니다.

 

고전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우리가 주님과 동감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과 우리가 동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면서  예수님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감이 되지 않음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예수님이 피리를 부시면 기뻐 춤을 추어야 하고, 예수님이 눈물을 하시면 내 마음도 아파 가슴치며 울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예수님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는 사람,  예수님의 꿈을 내가 꾸며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예수님이 가고 싶어 하시는 것에 내가 가며, 예수님 기뻐하시는 일을 마음껏 나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님과 동감되어 그의 심령에 맥놀이 현상이 일어나는 그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슴으로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과 매 순간 순간 동감되어 맥놀이울리임 이어나니 이런 감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동감되어 맥놀이가 내 심령 속에 울울하게 울려 퍼질 때에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되고 하늘의 평화와 신비한 힘이 내안에 가득하게 됩니다.

흔히 하나님께 순종하라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을 합니다. 어떻게 순종이 일어납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어려워 순종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 천지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 한다는 이 말은 예수님과 나 사이 동감현상이 일어나는 일이요 이 신앙을 맥놀이 믿음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하나 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가슴 안에 내 머리 속에 내 팔 다리 오장육부를 통해 맥놀이 진동이 발생합니다. 아주 작은 진동이 엘리야가 들었더 그 세미한 음성이 그러나 나의 인생 전체를 오직 주님께 묶어버리는 엄청난 굉음으로 나를 전율시킵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 가운데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들려옵니다
나의 자그만 안뜰에 남몰래 돋아나는
향기로운 풀잎, 당신의 말씀

그 말씀 아니시면
어떻게 이 먼 바다를 저어 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직은 메마른
나무의 둘레, 나의 둘레
꽃도 피지 않고 뜨거울 줄 모르는 미지근한 체온
비록 긴 시간이 걸려도 꽃은 피워야겠습니다
비 온 뒤의 햇살같이 안으로 스며드는 당신의 음성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가까이 들려옵니다
빛나는 새아침을 맞기 위하여 밤은
오래도록 어두워야 한다고
아직도 잠시 빛이 있을 동안에
나는 끔찍히 세월을 아껴써야 한다고
마음이 가난치 못함은 하나의 서러움
보화가 있는 곳에 마음 함께 있다고
아직도 가득차 있는 나의 잔을
보다 아낌없이 비워야 한다고
...
네, 그래요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분명히 들려옵니다.

(1971. 3. 3.이해인의 '사계절의 기도 중에서')

 

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주님과 동감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 내 마음 되어 내 안에 맥놀이 떨림이 들려오면 말씀이 들려오고, 그 말씀의 떨림이 없으면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 법입니다. 말씀에 맥놀이 떨림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그 음성이 들려지게 되고, 말씀에 맥놀이 떨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셔도 결국 듣지 못하게 됩니다.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 분명히 들을 수 있다'는 해인 수녀의 그 말은 해인 수녀와 하나님과 동감반응이 일어나 해인 수녀의 마음에 맥놀이 떨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맥놀이 떨림이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사람의 마음을 펼쳐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입니다.

죽추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지금은 대나무 가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절기상 소만입니다. 소만(小滿)은 24절기 가운데 여덟째 절기로 '만(滿)' 자에는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찬다는 뜻이 있습니다. 《농가월령가》에 "4월이라 초여름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라고 했지요. 소만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집니다. 이른 모내기, 가을보리 먼저 베기, 여러 가지 밭작물 김매기가 줄을 잇습니다. 또 이때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먹고, 냉이 나물은 없어지고 보리 이삭은 익어서 누런색을 띠니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또 이 무렵을 '보릿고개'라고 하는데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목숨을 지탱하던 때입니다. 소만 때는 모든 들과 뫼가 푸르른데 대나무는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이는 새롭게 태어나는 죽순에 영양분을 모두 주었기 때문이지요.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래서 봄철의 누런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竹秋)라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은 죽추와 같으십니다. 당신의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였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지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새 생명을 얻어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동감 될 때에 여기에 맥놀이 떨림이 내 인생 전체를 뒤 흔들게 됩니다. 그래서 순교적 신앙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졸 때 마다 이 맥놀이 떨림이 내 심령가운데 일어나야 합니다. 이때 주님의 사라이 은총이 축복이 나의 인생에 소만의 축복이 왕성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여름이 왔습니다. 풍성한 여름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