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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5월 29일 주일아침 예배  성경 고후 4:8-10  라온코이노니아의 곡선

선에는 직선과 곡선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입니다. 도시가 직선입니다. 길이 직선이고 집들이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곡선입니다. 시골에 들어서면 산길이 구불구불거리고 지붕들이 둥글 둥글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곡선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태양을 둘글게, 지구와 달도, 화성 목성 금성도 둥글둥글게 창조하셨습니다. 물 흐름도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흐르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길이 직선일까요, 아니면 곡선일까요. 성공을 향해 가장 빠른 길. 직선 그것도 지름길로 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는 게 인생입니다. 가능하다 해도 직선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곡선은 강물이 흘러가듯 길고 변화무쌍하며 많은 곳을 거치며 흘러갑니다. 벽에 부딪치면 돌아가고, 잠시 멈춰 때를 기다리며 만들어지는 것이 곡선입니다. 곡선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으며 가능하게 합니다. 네모나 바가지가 없습니다. 직선은 금을 그어 이쪽이냐 저쪽이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을 요구 합니다. 그러나 곡선은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둥글게 모든 것을 품습니다. 우리나라 3팔선은 직선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휴전선은 곡선입니다. 직선으로 나라를 죽 그어 나누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휴전선은 둥굴게 서로를 포용하는 마치 태극문양 같습니다.  직선은 부러지지만 곡선은 스스로 굽힙니다. 직선은 대립하지만 곡선은 어울림을 만듭니다. 직선은 단절이지만 곡선은 서로를 붙잡아 줍니다.

 


<곡선이 이긴다>(유영만, 고두현 지음)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성장이니 발전이니 하며 빨리 빨리 속도전을 벌리며 달려 왔습니다. 산지사방에 고속도로가 뚫리고 KTX기차가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 너무나 바뀌었습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윤리 도덕이 사라지고 온통 음주 도박 마약 성문란 심지어 동성애까지 온통 소돔과 고모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육체 마음들이 병들어 가고 영혼들이 썩어져 가고 있습니다. 도시에 날아다니는 마귀들을 봅니까? 지금 황사보다 더 무서운 죄악의 연기가 온 도시를 휘감고 있습니다. 직선문화는 소돔과 고모라 무너지듯 그렇게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조직행동과 기업경영 전문가인 찰스 핸디(Charles Handy)는 기업의 변화를 시그모이드 곡선(Sigmoid Curve)으로 표현하였습니다.(이 용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주기 곡선'으로도 불리는데 기업이나 국가, 상품 등은 시작과 끝이 있고 도입기와 성장기, 성숙기를 거치며 소멸해 간다는 이론입니다. 성장이 시작되는 도입기는 느린 속도로 성장하다가 10% 성장선을 넘으면 그 후로  빠른 속도로 성장해 나갑니다. 그러다 성숙단계에 이르러서는 성장속도가 낮아지고 정체하는 시간이 지속되다 어느 순간 퇴보하게 됩니다. 성숙 단계에서 새로운 동력을 얻지 못하면 갑자기 소멸해 버리게 됩니다.


시그모이드 곡선에는 두 번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위기는 도입기와 성장기 사이에 있는 ‘특이점’singular piont-A지점-으로 한 번의 실수만으로 기업의 운명이 좌지우지 됩니다. 두 번째 위기는 성장기와 성숙기 사이에 위치한 ‘변곡점’inflection point(B지점)입니다. 특이점을 지나 성장곡선은 다시 변곡점을 지나게 됩니다. 이 변곡점은 접선의 기울기가 45도로 기우는 시점과 S곡선이 실제로 하향 커브를 그리는 시점 사이의 구간을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이라고 부릅니다. 성장곡선을 그래프로 그렸을 때 오목하게 내달리던 그래프의 모양이 볼록하게 바뀌는 시점이 바로 전략적 변곡점입니다. 이 시기는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안주하려는 타성(惰性)에 빠져 무모한 도전이나 시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문제는 다른 경쟁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그 기업은 어느새 쇠퇴(衰退)의 길로 접어든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새로운 상품을 계발하거나, 혁신적인 변혁을 이루어 내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쇠퇴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例가 세계적인 스마트폰 회사인 노키아입니다. 노키아는 전 세계의 스마트 폰 판매를 싹쓸이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애플의 아이콘과 삼성의 갤럭시가 출시되면서 노키아는 더 이상 발전을 계속 못하고 지금은 거의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이 시그모이드 곡선이 한국교회에도 적용됩니다. 한국교회의 발전이 1000만 명으로 치달려 달려오다가 지금은 800만 선으로 주저앉아 있습니다. 엄청난 교회들이 도심지 한복판에 우뚝 서 있습니다. 교회들은 그 직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고비입니다. 그 주춧돌이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 나라를 어찌하실 것인가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시그모이드 곡선이 적용됩니다. 처음 주님을 믿기로 결심할 때 주님만을 위한 절대헌신을 다짐합니다. 첫 사랑으로 불리는 이 시기에 믿음은 산을 옮기고도 남을 만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앙에 연륜이 생기고, 신앙생활에 익숙해지면 모든 것에 통달했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서서히 퇴보하는 것도 모르고 그저 옛 은혜만 우려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심각한 영적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을 당하고 믿음은 점점 약해지고 마침내 지옥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지옥 길에 들어서있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떨어지는 믿음의 그래프의 변곡점에서 다시 반등시켜 우리의 신앙을 다시 오르게 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스펜서 존슨 (Spencer Johnson)이 쓴 책 중에 <피크 앤드 밸리(peak and valley)>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산봉우리와 골짜기’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무엇인가 하면 ‘절망의 골짜기에서 다음 봉우리를 바라보라’입니다.

<현재의 생활이 늘 불만인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직장도 불안했고, 가족들은 자신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자신이 바라던 꿈과 현실이 너무 동떨어져 있음을 발견한 젊은이는 정상에 오르기로 결심합니다. 좁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지나 길을 잃어버리기를 몇 번, 위험천만하다고만 생각하던 산봉우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인생을 바꿔놓을 지혜로운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사는 게 지겹고 불행하다고 한탄하는 젊은이에게 노인은 인생의 절정과 나락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기쁜 때와 나쁜 때, 전성기와 침체기, 희망과 좌절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고 침체기를 전성기로 바꾸는 인생수업이었습니다. 젊은이는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걱정만 하고 포기해버렸던 자신을 떠올리며 노인이 말한 법칙을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삶의 고비마다 오히려 놀라운 발전을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책에는 한 젊은이가 일생 동안 피크(절정)와 밸리(나락)를 거쳐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누릴 때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고통스럽지만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굴곡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봉우리를 넘으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골짜기처럼 인생의 절정과 나락은 언제나 반복되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스펜서 존슨이 이 책을 통해 가장 먼저 일깨워주는 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르내림의 인생법칙. 시련이나 실패는 당신한테만 닥치는 불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승했다가 반드시 추락하고 마는 인생의 굴곡을 헤쳐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펜서 존슨은 오르내림의 인생법칙을 통해 굴곡의 형태를 우리의 의지대로 변형시키라고 말합니다. 먼저, 현실과 친해져라-일시적으로 전성기에 오른 것인지, 침체기에 떨어진 것인지 파악하고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해법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라. 둘째, 절망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 이용하라-언젠가는 침체기가 끝날 테니 긴장을 풀어라, 침체기에 빠진 원인을 파악해서 그 ㅢ지를 반대로 행동하라. 셋째, 전성기에 머물러 있을 때 자만하지 말라. 넷째, 명확한 비전을 따르라-더 나은 미래의 자화상을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게 그려라. 다섯째, 이 이야기를 전하라-인생을 즐기는 사람들과 함께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하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스펜서 존슨은 우리에게 믿음의 변곡점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바로 세워 굴곡을 헤쳐 나가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틀린 말입니다. 그 의지가 병들었고 그 영혼이 썩어져 있으며 그의 삶 전체를 마귀가 조종하고 있는데 자신을 일으킬 의지가 있을리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합니다. 마음을 비우라 모든 속세의 인연을 잊어버려라 그런데 이미 마음이 뭉그러져 있고 속세의 족쇄가 발목에 채워져 있는데 어찌 비우고 잊어버리라 할 것입니까?

병원 중환자실에 가면 환자의 심장박동을 체크하는 것을 봅니다. 그걸 보면 규칙적으로 산봉우리를 형성합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계속 이어갑니다. 규칙적으로 산봉우리를 형성했다가 내려와서 조금 평면상에서 이어지다가 또 산봉우리를 형성하고, 또 산봉우리를 형성하고, 이게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심장박동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수평면으로 쭉 그려집니다. 무엇을 의미 합니까?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심장박동 그래프처럼 어쩔 수 없이 봉우리와 골짜기, 절정과 나락을 오르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믿음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상승곡선을 이루다가 하강곡선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계속 됩니다. 믿음이 좋아 졌다가 나빠졌다가, 시험을 이겼다가 또 지기도 하고 그것은 아직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아진 상태가 계속 죽 이어졌다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그는 천국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나빠진 상태가 죽 이어진다면 그는 지금 지옥 문턱을 넘어서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등 까오 즈 바이” 중국말입니다. 그냥 귀에 들리는 대로 흉내 내 본 겁니다. ‘등 까오 즈 바이’, 우리 한문 글자로 ‘등고자비(登高自卑)’란 말입니다. 그 뜻은 “높은 데로 올라가기를 원하면 낮은 데서부터 시작하라” 우리의 믿음 상태가 나빠진 상태에서, 다른 말로 우리 인생이 온갖 고난과 역경으로 넘어져 죽음의 골자기에 빠져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어떻게 내 의지로 할 수 있습니까? 이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리다굼” 소녀여, 일어서라-

고후 4:8절에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강한 압력을 받아도(hard pressed) 산산이 깨지지 않는다(not crushed)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능동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예수님이 받쳐주기 때문에, 아무리 사방에서 내려 눌러도 깨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속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도전들을 감당하려고 하면 질그릇 인생이니 바작하고 깨어져 버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보통 고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을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11:23-25)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마흔 대 이상은 때리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범죄자를 39대까지만 때렸는데 바울은 그런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완전히 깨져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사명이고 나발이고 내 던져 버리고 고향 다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깨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속에 계셔서 언제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억울해서 통곡하며 뒹굴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간수들과 죄수들이 듣도록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것을 알아야 하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내 손을 붙잡아 일어나라 딸아 일어나라 아들아 라고 불러 주시는 주님이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어려울 때도 아무리 기분이 나락에 떠러졌다 하더라도 나 혼자 짐을 지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저의 이 무거운 짐을 주님이 져 주옵소서. 저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떨어져 가는 제 믿음을 고추 세워 주소서. 저의 두려운 인생길 아무리 굴곡졌다 하더라도 주님이 제 손 잡아 주시면 이 굽은 인생길이 제게 행복이 되오니 주님의 십자가 내려놓지 않게 하소서” 

복음성가232  주님여 이손을 꼭 잡고 가소서  ............

나의 내리막길 인생길에서 더 이상 떨어지지 아니하고 상승곡선을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십자가 붙드는 일입니다. 십자가 붙드는 사람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혼자 방황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헤맬 때가 어렵지 십자가 붙들고 나가면 내리막길에서 다시 치솟아 오르막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즉 마음 고생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 고생이 있을 때 십자가 바라보십시오. 머리에 가시면류관 쓰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270장 찬송 4절
십자가 단단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 앞에 찬양 할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희게 하셨네

우리는 모두 떨어지는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아는 것은 공이 아래로 떨어지면 다시 튕겨 오르듯이, 지금까지 70여년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여러 번 떨어 졌지만 그때마다 일어섰던 것처럼 지금도 다시 오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전에도 나를 붙들어 주신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넘어졌다는 것은 주안에서 다시 일어날 기회요, 떨어졌다는 것은 주안에서 다시 튀어 오르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번에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곡선의 묘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묘미를 맛보게 됩니다. 이 묘미를 맛보는 사람은 9절 말씀처럼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했는데 6,000번을 실패했습니다. 누가 그에게 6,000번씩 실패했는데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에디슨의 대답이 “아니요, 나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었던 6,000가지의 방법을 터득했어요.” 라고 하더랍니다. 에디슨과 같이 우리는 때때로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 손 붙잡는 법을 배우고 그래야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그래야 믿음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왜 사람은 소나 말처럼 태어나자마자 일어서지 못합니까? 아기가 일어서 걷기 위해선 1년이란 시간 어머니의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7개월 된 아기가 뒤뚱뒤뚱 걸으며 얼마나 자랑스러워합니까? 그러다가 풀석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엄마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엄마는 얼른 아기 손을 붙잡아 다시 일으켜 줍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넘어지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자빠지는 것이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일어나기 위한 예비동작일 뿐입니다. 한번 씩 웃고 주님 얼굴 바라보면 주님도 씩 웃으시고 내 손 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돌아서면 다시 새 길이 나옵니다. 저는 잠을 모로 누워 잡니다. 그리고 꿈을 꿉니다. 그러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누우면 다시 새로운 꿈을 꿉니다.
흔히 오뚝이 인생을 말합니다. 오뚝이는 넘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섭니다. 어린 시절 궁굼해서 오뚝이를 해체해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아버지 손목시계를 해체해 완전히 망가뜨린 적이 있습니다. 오뚝이를 해체해 보니 오뚝이 속 밑바닥에 납덩어리가 있었습니다. 그 납덩어리가 중심을 잡아 주었던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인생이 있다면 이는 이 가슴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내안에 게시면 우리는 어떤 내리막길이라도 랄랄룰룰 하며 인생을 오르막길로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73년 인생동안 수많은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내리막길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 인생 곡선에 가장 밑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인생 종착역에 가까워 있는가? 피크와 밸리 산봉우리와 계곡 그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면 시그모이드 곡선의 원리를 적용해 봅니다. ‘등 까오 즈 바이’, 우리 한문 글자로 ‘등고자비(登高自卑)’ 여기까지 낮아 졌으니 다시 하나님이 나를 높여 주시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나는 다시 곡선의 변곡점에 서 있다고 이렇게 믿고 다짐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40년 전 제주도에서 제주복음교회를 사임하고 전국을 돌며 대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는 제주대학교와 제주실업전문대학교 그리고 야간에는 제주신학교학생들을 가르치고 목요일에는 천안호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금요일에는 부산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토요일 제주로 와서 주일에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주 중앙복음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때 개척 맴버가 12명이였습니다. 그리고 1년 만에 50명이 넘었습니다. 당시 몇몇 교인들과 지금도 서로 안부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분 중 한분은 가을이면 귤을 보내주어 우리가 잘 먹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라오코이노니아는 지금 한 고비 고갯길을 넘어 다시 새로운 고갯길을 오를 그 사이에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오를 것인가 아니면 저 산 아래로 내려 갈 것인가?  라온코이노니아 가족 여러분, 우리는 라온코이노니아는 직선이 아닙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손을 붙잡아 새로운 믿음의 역사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의 자녀 손들의 가정 가정을 붙잡아 인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지금 내가 선 자리가 우리 라온코이노니아가 선 이 자리가 낮아져 버린 넘어진 자리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다시 높여 주시는 발판이 되는 곡선의 ‘변곡점’inflection point자리가 되는 줄 믿습니다. 

곡직향전 복혜쌍전(曲直向前 福慧雙全)이란 말이 있습니다. ‘굽이굽이 인생의 굴곡이 있을지라도 앞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굳건히 나아가면, 복(福)과 지혜(智慧)가 함께하여 평탄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변곡점에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함은 ‘앞으로 나아가야 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붙들고 단단히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손 인사는 U입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U.  라온코이노니아와 여러분의 손을 주님이 붙잡고 어디든지 평화와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축원합니다.


*토론토대학교 생명과학을 전공한  주 보라씨가 금년 1916년 4월에 출시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 제목이 U입니다. 여기서 저는 U를 주님으로 이해합니다. 가수의 이름이 주 보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시간
어둡고 지친
날들은 지나가고

날 아프지 않게
어루만지던 그 손
항상 고마웠던
기억들만 준 그대

구름 높이
바다 건너
있을줄만 알았던 사랑

두 팔 벌려
안아줘요
내게는
그대뿐이야

I've waited for you
someone like you
그댄 나에게
전분걸요
나를 가득 채워줘요
I've waited for you
Baby it's you
그댄 나의 행운이죠

말 없이도
위로가 되는 사람
그대로 있어요
그 자리에 그렇게

구름 높이
바다 건너
있을것만 같던 사랑

두 팔 벌려
안아줘요
사랑은
바로 그대였죠

I've waited for you
someone like you
그댄 나에게
전분걸요
나를 가득 채워줘요
I've waited for you
Baby it's you
그댄 나의 운명이죠 my love
I've waited for you
someone like you
그댄 나에게
세상이죠
오 날 숨쉬게 해요
Baby its you
Thank god it's you
사랑해요 영원토록
its you you
its you you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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