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일 주일아침 예배 빌3:12-14 막10:13-16 라온코이노니아의 미완성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하여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가족의 자녀와 손녀 손주들에게 그리고 어제 아침에 태어난 최장식 집사 외 손녀위에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을, 지혜와 명철을, 평강과 기쁨을 그 자라가는 동안 넘치도록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린이 주일의 유래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면, 방정환(1899.11.9.-1931.7,23)선생이 주도하는 색동회에서 1922년 5월 1일에 제 1회 어린이날을 기념하였습니다. 1927년부터는 5월 첫 주일을, 1946년에는 5월 5일에 기념하였습니다. 1961년 아동복지법이 제정되면서 5월 5일을 국가 지정 어린이 날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6월 둘째 주일을 꽃주일이라 하여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정하였습니다. 본래 미국에는 나라가 정한 어린이날이 없고 1856년 레오날드(G H Leonald) 유니버살리스트 제일교회목사가 어린이를 축하하며 꽃주일이라 부르면서 지키던 것이 전 미국 교회가 따라서 지키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어린 유아들에 대해 국제아동절(1950년 국제민주여성동맹이사회제정)로 6월1일에 그리고 초중고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6월 6일에 소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남자어린이날을 5월 5일(탄고노세쿠)로, 여자어린이날로 3월3일(히나마쓰리)을 정하였습니다. 중국은 6월 6일을, 터키는 4월 23일을, 태국에는 어린이날이 없는데 선교사들이 1월 26일을 어린이날로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는 어린이날이란 특정한 날이 없고 일 년 365일이 다 어린이 날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이를 상징하는 특별한 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5월 5일 탄생 꽃이 은방울꽃이라 합니다. 은방울꽃을 어린이를 상징하는 꽃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저 나름대로 말해봅니다. 은방울꽃을 영어로 May Lily 5월의 꽃이라 하는데 그 꽃말이 순결, 기쁜소식, 행복을 말합니다. 은방울꽃을 어린이 날 꽃으로 추천 하는 데는 또 그럴만한 작은 이유가 있습니다.
어린이 동요로 1948년에 정세문(1923-1999) 선생이 일본으로 부터 해방된 새 나라의 어린이들이 씩씩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곡한 “어린이 행진곡”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1절
발 맞추어 나가자 앞으로 가자
어깨동무하고 가자 앞으로 가자
우리들은 씩씩한 어린이라네
금수강산 이어받을 새싹이라네
정세문 선생이 1954년“어린이 행진곡”을 비롯하여 작곡한 동요들을 모아 동요곡집을 출판하였는데 그 동요곡집의 제목이 ‘은방울’이었습니다. 무슨 의미로 ‘은방울’이란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저의 생각처럼 어린이를 상징하는 꽃으로 ‘은방울 꽃’이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어린이 행진곡‘ 노래에서 어린이를 ’새싹‘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어린이에 대한 이미지가 새싹으로 표현한 노래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1983년 MBC창작 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세싹들이다”(좌승원작사작곡)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 하늘을 보라 넓고 높고 푸른하늘
가슴을 펴고 소리쳐보자 우리들은 새싹들이다
푸른 꿈이 자란다 곱고 고운 꿈 두리둥실 떠간다
구름이 되어 너른 벌판을 달려나가자 씩씩하게 나가자
어깨를 걸고 함께 나가자 발맞춰 나가자
어린이는 새싹입니다. 봄이면 대지위에 파릇파릇 새싹 들이 돋아 나오듯이 어린이들은 세상에 방금 태어난 어린 새싹입니다. 새싹이라 함은 아직 여리고 약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아·이·기·살 = 아껴주고 이끌어주고 기뻐해주고 살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기가 살아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마냥 약한 것만이 아니라 새싹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직은 작은 싹이지만 앞으로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이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린이라는 말이 별로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어린이란 ‘어리다’란 동사에‘이’를 붙여 인칭명사로 만든 말입니다. 그런데 ‘어리다’란 본디 ‘어리석다’라는 뜻인 순수 우리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란 어리석은 사람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어린이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전에는 어린이를‘아해’라고 불렀습니다.‘아해’를‘아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은 아해를 한자로 봅니다, 물론 한자로 를 ‘아이 아兒’‘ 어린아이 해孩’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어린이를 ‘해자孩子 haizi’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아들자子 받들어 모실 공供, 자식을 받들다란 말로 어린이를 子供이라고 부릅니다. 아해는 순순한 우리말로 한자를 빌려 썼을 뿐입니다. ‘아’는 ‘ᄋᆞ’로 인류 공통으로 기본 발음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발음하는 소리가 ‘ᄋᆞ’입니다. 가족의 호칭을 보면 아버지 어머니 아들 아가 아이 모두 ‘ㅇ’에서 시작됩니다. ‘ᄋᆞ’는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아我라고 씁니다. 그러나 오吾라고 나를 가리킵니다. 삼일독립선언문에서 맨 처음 나오는 글자가 오吾입니다. ‘해’는 ‘ᄒᆞ+이’로 해 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해란 ‘나의 해 같은 밝은이’란 의미입니다. 아해는 가정에서나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막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동녘의 해 같은 존재임을 의미하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아해를 ‘아이’라고도 말합니다. 아가 또는 아기를 한자로 小兒에서 온 말이라 봅니다. 그러나 제 해석은 우리 한글의 모음이 ‘아야어여오요우유의이’로 처음 모음이 ‘아’이고 끝 모임이 ‘이’입니다. 즉 ‘아이’는 처음과 끝 알파와 오메가로 부모에게 전부라는 의미로 붙여진 말이 아닌가로 추측해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린이’ 보다는 ‘아해’로 또는 ‘아이’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은 의미를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어린이라는 말 보다는 우리 아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감 있지 않습니까? 어린이날 보다는 ‘아해 날’또는 “아이 날‘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재 어린이라고 하니 그대로 부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 어린이는 아주 우리 가정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최상의 귀한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임을 이미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0: 13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의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니 어린아이가 예수님 앞으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 중에 예수님께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순서대로 말한다면 그 첫 번째가 어린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린이를 그처럼 중하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바로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고 살아갈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의 어린이들입니다. 앞으로 50년 후에도 세상에 살고 있을 사람이 여기 어른들 중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강하다 선생 최정남 선생은 틀림없이 살고 있을 것이고, 아마 전은청 집사도 그때는 90세가 넘어 호호 할머니로 살아 있을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러나 50년 후 그 때에 여기 나영이 서빈이 유빈는 우리 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손자 다경이가 50살 때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여 그때까지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50살 더 살기는 좀 쉽지 않겠죠?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다경이가 저같이 살아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칭찬받고 인정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의롭게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50년 후는 통일 한국일 것입니다. 통준위 경제분과 전문위원인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말하기를 2050년에는 한국이 세계2위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측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날이 오면 우리의 자손들이 세계를 이웃 집 드나들 듯 다닐 것입니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것입니다...... 정말 살기 좋은 파라다이스 세상일까요?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50년 전보다 지금이 세상이 더 악해졌고 사람들은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병으로 각가지 사고로 죽고 있습니다. 간난과 전쟁과 폭력이 50년 전 보다 더 악랄해 져 가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식량 부족, 물 부족, 에너지 부족현상들이 점차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50년 후는 어떠하겠습니까? 지금보다는 좀 나아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죄악이 가득하고, 지금보다 전쟁과 폭력이 더 심할 것이고, 지금보다 더 강한 병균들이 나타나 사람들은 더 많이 병으로 죽어갈 것이고, 지금보다 자연재해는 더 무섭게 지구를 흔들어 댈 것이고 아마도 그때에 백두산은 화산이 폭발하여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가 오고, 여기 군산의 대부분이 바닷물에 잠길 것이고, 일본은 바다 속으로 침몰할 것이고, 지금 보다 사람 살아가기가 더 힘들어질 세상, 그 세상이 50년 저 시공간 밖에서 지금 현재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오늘의 우리의 어린이들이 살아갈 것입니다. 50년 후 세상 지구를 구할 독수리 삼형제가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역시 오늘 우리 어린이들 가운데 자라가고 있습니다.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50년 후 세상을 이끌어갈 그 주인공들이 지금 어디선가 자라고 있습니다. 50년 후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세상 살아가기 힘들어 헉헉거리며 살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오늘의 어린이들 가운데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50년 후에도 세상에 뒤처지고 도태되어 타락한 세월을 뒷골목에서 살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지금 어린이들 중에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의 미래가 어떠할까요? 나의 사랑하는 손주들, 여러분 가정의 자랑스런 후손들은 미래의 역사의 선두에 서서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승리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50년 후 유빈이는 그때에 그 모든 악조건과 싸워 행복한 가정,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존경받는 삶을 살 것입니다. 일곱 살 유빈이 안에 50년 후의 미래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역사를 연구하고 지난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일생들을 연구하였습니다. 100년 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 아니면 어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는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완성품을 향하여 끊임없이 조립되고 고쳐지고 변경 돠고 새로워져가는 미완성품이라는 것입니다. 미완성은 불완전한 incompletion이 아닙니다. 완전하지 못한 unfinished도 아닙니다. 완성해 나가는 중 in the act of perfection 에 있습니다.
오래전에 이진환씨가 작사 작곡한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버린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라는 노래입니다.
전에 총각시절 오늘의 아내에게 연애편지를 쓸 때입니다. 쓰다가 버리고 쓰다가 버리고 몇 시간을 그렇게 쓰다버린 종이가 한 뭉치나 되었습니다. 나에게 연애편지를 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종이를 몇 장이나 쓰다가 버리고 쓰다가 버리고 하면서도 저는 즐거웠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다 쓸 때 까지 다시 쓸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미완성으로 있다는 것은 다시 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잘못 되면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시 고쳐 쓸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십 여 년 전에 어느 교회에 70여세 된 노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함씨라는 성을 가진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부목사님이 그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새 옷을 입혀드리고 그리고 음식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가지 않고 그 교회에 그대로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는 그 노인을 안동에 있는 "우리 집"이라는 양로원에 소개했습니다. 그 노인은 결국 안동에 있는 "우리 집"양로원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거지 노인이 한국교계와 사회에서 존경을 받던 함 석헌씨의 친 동생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형님과는 정 반대의 길로 걸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안동 양로원 집에서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운명할 때 그를 그 곳으로 소개했던 그 교회의 부목사님이 찾아가서 찬송과 기도를 해 드렸는데 그 분은 마지막 순간에 천사의 얼굴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마지막 순간에 그 노인이 구원을 얻기는 했지만, 그는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한 아들은 교계와 사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다른 아들은 사람들의 동정과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거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마지막 세상 떠나날 직전에 그는 기회를 얻어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고쳐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문제는 미완성 인생에게 돕는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은 돕는자(애제르 창2:18)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미완성 인생이 부셔지고 망가져버려 다시는 못쓰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인생에 돕는자(애제르)를 보내 주십니다. 이제부터 돕는자를 말할 때 애제르라고 말 하겠습니다. 애급에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돕는자애제르로 보내 주셨습니다. 우상숭배와 죄악을 망해가는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애제르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제르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시려 보낸 애제르의 말을 듣지 않으니 나라는 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대 땅에 애제르로 오시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들을 귀 있는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나 예루살렘은 로마군대들로 인하여 예수님이 이미 눈물을 흘리시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 말씀하셨던 그대로 황성옛터 쑥대밭이 되 버렸고 유대사람들은 2000년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에 떠돌며 수천만 명의 유대인들이 핍박받으며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도록 도우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미완성이 완성이 되기 위하여 나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빌3:12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의 완성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완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미완성 믿음을 완성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기 라온 코이노니아에서 예배를 드는 것입니다. 라온 코이노니아는 여러분의 미완성을 완성시키도록 돕도록 세우신 주님의 몸 된 애제르입니다. 왜 미완성을 완성시켜 나가지 못합니까? 애제르의 도움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인생환경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에든지 성공하려면 먼저 그의 의와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정치인도 사업가도 근로자도 자영업자도 군인도 선생도 가정주부도 먼저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는가 그들의 인생들을 죽-연구해 보니 분명한 한 것은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한 인생인가 아닌가가 확실하게 구분이 되었습니다 여기 라온 코이노니아는 여러분의 인생을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미래에 대한 미완성을 완성 시켜 나가는 돕는자 에제르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알게 되는 것은 미완성은 미완성 그 자체로 좋은 것입니다. 미완성이라고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혹 우리 어린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미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완성임을 이해하고 더욱 아이살기 아껴주고 이끌어주고 살펴주고 기뻐해주어야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음악가 슈베르트 제 9교향곡까지 교향곡을 작곡하였는데 제 6교향곡은 없기 때문에 8개 교향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제 8번 교향곡을 미완성 교행곡이라고 합니다. 본래 4악장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1822년 2악장 까지만 작곡을 하고 어떤 이유인지 계속 작곡을 미루다가 완성을 못보고 182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40년 후에 발견되어 1865년 12월 17일 비로소 초연되었습니다. 비록 2악장으로 끝난 미완성 교향곡이지만 브람스가 말하길 “이곡은 양식적으로 분명히 미완성이지만 내용적으로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이 두 악장은 그 어느 것이나 내용이 충실하며 그 아름다운 선율은 사람의 영혼을 끝없는 사랑으로 휘어잡기 때문에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온화하고 친근한 사람의 말로 다정하게 속삭이는 매력을 지닌 교향곡을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을 들으며 감동과 그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미완성 속에 놀라운 완성된 음악을 듣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많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세계적인 불후의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루지 못한 작품이 둘이 있습니다. “피렌체의 피에타”와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론다니니 피에타’(이태리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191cm)는 1547년에 시작하여 1564년까지 그가 89세에 이 땅을 떠났는데 죽기 6일 전까지 이 작품을 제작하였지만 그는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미완성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릴 때를 화강암 암석에 조각한 것으로 바위 위에서 축 늘어진 예수님의 시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모습으로 예수님에 대한 어머니의 심정을 표현한 조각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이 조각이 오히려 보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조각을 통하여 미완성의 믿음에서 완성을 향해 나가는 미켈란제로의 보다 큰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미켈란제로의 미완성 조각도 미완성 속에 진정한 완성을 감추어져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제로가 말년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시 Mea culpa의 마지막 소절)
“그동안 나의 삶에 큰 힘을 주었던 어떤 그림도 조각도
더 이상 내 영혼에 위로와 생기를 줄 수 없습니다.
나의 영혼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인을 껴안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에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슬퍼할 것은 우리가 이 미완성을 완성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것에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림으로 우리의 미완성 믿음을 완성하려 오늘도 열심을 다하는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기뻐하시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기도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언제나 어떤 일에서나 나의 미완성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마6:33, 마7:21).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있는 일인지,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있는 삶인지 그것을 깨달을 때 십자가에 두 팔을 버리시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며 ‘내가 너의 믿음을 아노라 미완성이면 어떠하냐 내가 너의 미완성을 축복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미완성, 우리의 미완성을 돕는 애제르 라온 코이니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귀한 것은 그들이 미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른들의 재케르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어린이들의 미래는 결코 미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것입니다.
사사기 6장 11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1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깁보르 헤하일)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결코 용사가 아닙니다. 그는 소심하고 겁이 많고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그를 ‘큰 용사’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을 원어로 옮기면 강력한 영웅이라는 의미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불렀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그의 미래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은 미완성이지만 미래에 얼마나 담대한 용사가 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기드온은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였으며 그가 사사로 있는 동안 나라가 평안하였습니다. 그는 미완성이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의 완성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어린이들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미완성 신앙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세우신 놀라운 은혜를 찾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니세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29개 항목으로 국제 어린이 행복종합지수를 조사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22개국 가운데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행복지수가 꼴지 이였습니다. 1위가 스페인 113.6 , 2위 그리스 112.5, 3위 네델란드 110.3, 미국은 102.58로 10위이고 우리나라는 65.98로 꼴지 이였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어린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모르고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린이 복지예산은 국내총생산 대비 0.8%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200만원 수입의 가정에서 어린아이를 위해 쓰는 비용이 16,000원 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비용으로 어린아이가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겠습니까?
가정의 행복은 어린이의 웃음 속에서 찾아옵니다. 하지만 정부는 어린이 성장과정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어린 시절 행복하지 못하면 미완성이 길가에 자라는 새싹처럼 돌작밭이거나 가시덤불에서 자라는 새싹 같아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성인이 될 위험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아동복지계의 거장 조너선 브래드쇼 영국 요크대 교수는 한국사회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려면 정부가 어린이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합니다. 아이들 성적 올리는데 만 집중하고 아이들의 삶 자체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전 '키즈카운트'재단 위리엄 오헤어 애니 케이시 연구원은 세계경제 10위권의 한국이 어린이 삶을 조명할 행복지수가 개발되지 않은 것은 코미디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이는 미래의 재산입니다. 어린이를 돕고 어린이들을 위한 투자는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 역시 그들에 의해서 돌보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의 미래를 도와 줄 애제르 입니까? 바로 오늘의 어린이들입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미래를 돕는 가장 강력한 일은 바로 어린이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그들을 맡기고 하나님이 그들의 미래를 완성시켜 주실 것을 기도할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일화가 유명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할 때에 성경에 오른손을 얹고 대통령의 선서를 해야 하는데, 다 낡은 조그만 성경책을 들고 나와 그 성경을 들고 선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책은 “어머니가 내게 주신 성경책입니다. 이 성경책으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링컨의 손에 쥔 성경책은 아주 적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성경책이 아브라함 링컨으로 하여금 대통령이 되게 하였다고 말하는데, 한 가지 놀라만한 사실은 아브라함 링컨의 어머니는 두 번째 어머니, 계모였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린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려고 힘을 기울였으며, 계모가 링컨의 나이 14살 때에 돌아가셨지만, 그 여인은 가장 훌륭한 어머니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링컨의 전기를 쓰는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링컨에게는 위대한 사람이 될 만한 조건은 한 가지도 주시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는 가난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만을 주셨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미완성으로 귀하고 아름답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날마다 받아서 쑥쑥 성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미완성 어린 링컨에게 애제르 돕는자 어머니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여러분들의 어린아이들 손자 손녀들에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돕는자 에제르가 되게 하셨으니 저들의 미완성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어린아이들의 50년 후 이래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미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돕는자 에제르로 허락하신 라온 코이노니아 안에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행하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욱 뜨겁고 활기가 넘쳐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도 미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완성을 어여삐 여기시고 기뻐하시며 축복하실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라온 코이노니아에 보내신 돕는자 에제르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 모두 함께 라온 코이노니아가 더욱 하나님이 맡기신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라온 코이노니아와 함께 모든 우리 한 가족들에게 날마다 새 은혜로 우리의 미완성을 채워나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서빈이 귀염이 유빈이에게 안수 축복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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