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6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성경 고후 4:7-11 라온 코이노니아의 자존감
1988년 제 24회 서울 올림픽 경기에서 독일의 올림픽 복싱경기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인 헨리 마스케(Henry Maske, 1964년 1월 6일 ~ )가 은퇴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스케는 그의 친한 친구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이자 파페라창시자인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 2004년 6월 8.9일 서울 올림픽경기장에서 내한 공연)에게 은퇴경기 날 축하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사라 브라이트만은 기쁘게 승낙을 하였습니다. 사라브라이트만은 제가 좋아하는 성악가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잘 아는 ‘넬라 판타시아’ 노래를 제일 처음으로 부른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그 녀의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환상 속을’ 헤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노래 중에 아마도 가장 유명한 노래는 따로 있습니다. 그녀는 어떤 노래를 마스케의 마지막 경기 축하노래를 부를까 고심하며 어느 날 이태리 여행 중 한 까페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이태리 성악가인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른 ‘콘 테 파르니토 ConTe Partiro’란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가겠다는 의미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ConTe Partiro를 듣고 바로 안드레아 보첼리를 만나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경기장에서 그 노래를 두엣으로 부르자고 하였습니다. 다만 마지막 후렴부분을 ‘타임 투 세이 굿바이’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타임 투 세이 굿바이’는 이 노래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1996년 11월 17일은 독일 국민에게나 헨리 마스케, 사라부라이트만 그리고 안드레아 보첼리에게 아마도 잊지 못할 날일 것입니다. 이날 두 사람이 부른 “타임 투 세이 굿바이”란 노래는 세계 최고의 히트를 하였습니다. 전 세계에 전해지자 2600만장이나 레코드 판이 팔렸습니다. 이로서 안드레아 보첼리도 세계적이 가수가 되었습니다. 저에게도 이 노래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되었고 사라브라이트만과 안드레아 보첼리의 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노래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안드레아 보첼리에 대해서 소개하려 합니다. 보첼리는 12살 때 친구들과 축구놀이를 하다가 머리에 공을 세게 맞았는데 그로인해 후유증으로 두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물론 처음 그에게 닥친 시련은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법학박사가 되었고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시련을 노래로 달래어 온 그는 여기 저기 음악 콩쿨대회에 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본격적인 성악가로 팝페라 가수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절망을 이기는 길은 그리고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은 음악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잘나가던 변호사의 길을 떠난 것입니다. 물론 맹인이기에 다른 사람보다 몇 갑절의 노력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그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갔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가장 열망하는 것, 제가 가장 바라고 원하는 것은 제 음악을 듣는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는 것입니다. 어릴 적 제가 누군가를 통해 감동 받았던 것처럼 똑같이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저를 울게 하고, 저를 꿈꾸게 해주었던 가수들에게 그토록 감동 받았듯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비록 맹인 성악가이지만 그에게 엄청난 자존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부른 많은 성가곡이 있습니다. 특히 지휘자 정명훈씨가 이태리에서 활동할 때에 함께 성가곡을 많이 취입을 하였습니다. 그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는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었습니다. 그가 부른 Panis Angelicus(생명의 양식)이란 노래 “Panis angelicus, fit panis hominum......”를 듣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꿀덕 꿀덕 넘어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이 시간 보첼리를 소개하는 것은 우리는 그의 노래에서 그의 자존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의 장애를 딛고 일어선 그의 노래하는 태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그의 신앙은 바로 그의 자존감을 높여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매년 전 세계에서 80여 차례 공연을 하고 있으며 유롭의 유명한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독일 베르린. 서울 음대 출신이 많이 유학을 하는 음악대학) 교수로 활동 중에 있습니다.
자존심이란 말과 자존감이란 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를 높이는 감정입니다. 영어로 pride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존감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self-value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자존심은 끝없이 타인과 경쟁해야 존재할 수 있으며 패배할 경우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칩니다. 반면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기에 경쟁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본래 자존감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자존감이란 말보다는 자긍심이란 말로 사용됩니다. 영어로 자존감을 self-esteem(단어 자체는 심리학 용어로써 1890년경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음)이라고 번역하는데 오히려 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자긍심이란 스스로에게 긍지를 가지는 마음입니다. 이 글자에서 로 긍(矜)이란 말의 의미가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긍(矜)이란 말이 불쌍히 여길 긍矜 입니다. 그런데 긍(矜)자는 `창 모'(矛)와 '이제 금'(今)으로 이루어진 한자입니다. 그러므로 '창자루'를 '지금'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창자루를 쥐고 있으니 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긍심'은 '스스로 창자루를 쥐고 있는 듯한 자신만만한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존감이란 말은 그 의미가 자긍심하고는 다르다고 합니다. 중국어로는 自豪感 zìháogǎn이라 하는데 이 말도 자긍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존감이란 2005년 이전에는 국내에서는 이런 말은 거의 쓰이지 않았습니다. 전문서적이나 신문에서 조차도 거의 쓰이지 않은 단어로서 오로지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그리고 심리적일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항우와 한신의 이야기에서 자존감과 자존심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힘이 장사였던 항우는 서초패왕이라 불리며 전투할 때마다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203년 12월 한나라 장량의 사면초가(四面楚歌) 계책으로 항우의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쫓기는 신세가 된 항우가 해하강에 이르자 초라한 노인이 항우에게 배를 내어주며 '지금 강을 건너 몸을 피한 뒤 다음을 기약하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한 항우는 노인의 권유를 듣지 않고 무리하게 적과 싸우다가 자결하였습니다. 알량한 자존심이 한때 영웅이었던 그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당시 자존심을 잃어버린 항우는 사랑하는 우희(虞姬)를 옆에 두고 해하가(垓下歌)를 불렀다고 합니다.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時不利兮騶不逝(시불이혜추구서)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는 나아가지 않는구나
騶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나하)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虞兮憂兮奈若何(우혜우혜나약하)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또 한 사람 한신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가난한 고아출신이지만 검술에 능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신이 시장거리를 지나다가 불량배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 그렇지 않으면 내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나가라"고 불량배 두목이 말했습니다. 한신은 묵묵히 불량배의 다리 밑을 기어갔습니다. 후에 그는 항우를 물리치고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 공신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에 의하면 이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於是韓信孰視之 俛出跨下 蒲伏(어시한신숙시지 면출과하 포복)-이 때 한신은 그 우두머리를 말없이 한참 동안 孰視(숙시)하다가-노려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그의 가랑아 사이로 蒲伏(포복)하여 지났다! 기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跨下之辱(과하지욕) 이란 말이 생겼다)
한신은 자신에게 모욕을 준 불량배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그때 너를 죽였다면 내가 살인자가 되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을 것이다. 그때 눈물을 머금고 너를 죽이지 않았기에 지금의 성공을 얻었다"며 그 불량배를 호위무사로 삼았습니다. 한신은 자존심을 버린 덕분에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있어도 쓸데없는 자존감이란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여인들은 자신의 모습에 못마땅하여 얼굴을 성형을 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쁘다는 여자들과 비교해 보니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고 이주일씨는 “못생겨서 미안합니다”라는 말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자신의 못난 얼굴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주일씨는 매우 자존감이 높은 사람 이였습니다. 게그우먼 박지선(朴智宣, 1984년 11월 3일 ~ )을 아십니까? 요즈음은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KBS2TV 개그프로에 '난 못생기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며 많은 사람들을 웃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 스스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가해 본적이 한 번도 없어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려들도 박지선이 ' 평상시에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상당히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것에 대해 존경스럽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그우먼 박지선씨도 아마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럽으로 유학을 간 한 한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학생은 성악전공을 하고 유럽에서 취업을 하기 위해 면접을 계속 봐왔지만 취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취직이 되지 않고 있는 원인을 자신의 얼굴에 쌍커풀이 없기 때문에 오디션에서 매번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이 여학생은 쌍커풀 수술 예약을 해 놓고 수술하는 날 전에 한인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간, 주일예배 시간 목사님의 설교내용이 쌍커풀 수술에 대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 왜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않습니까? 왜 여자들이 멀쩡한 눈에 쌍커풀 수술을 받습니까? 쌍꺼풀 수술을 받고 이다음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넌 누구냐, 난 네게 쌍꺼풀을 준 적이 없는데 대체 넌 누구냐? 이렇게 물으시면 어쩌시렵니까?"
이 여학생은 목사님의 설교가 자신을 향한 주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수술 예약을 취소하고 그 날자와 겹쳐있던 소규모 콩쿠르에 참가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뜻밖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현장에 앉아 있던 독일의 한 극장장에 의해 그 여학생은 그 자리에서 전격적으로 오페라 나비부인 주인공으로 발탁되었습니다. 하루는 이 여학생이 극장장에게 자기처럼 서툰 사람을 왜 주연으로 뽑았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극장장의 대답은 '당신의 눈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극중의 나비부인은 일본 여성이지만 일본인의 가창력은 한국인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혹 가창력을 지녔다 해도 유럽에 진출한 일본 성악인 중에 쌍커풀 수술을 받지 않은 여성이 없기에 일본 여성을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 유럽관객들이 보기에는 일본인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충분한 가창력을 지니고서도 쌍커풀이 없는 동양여자는 당신뿐이라 당신을 발탁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의 사람은 자기의 외모를 높이려 하지만 자존감은 자신의 속 마음을 자신의 정신과 의지를 높이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일보 조윤성 논설위원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이라 원문 그대로 인용을 하겠습니다. “한국인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하지만 자존감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글자 하나 차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사랑할 줄 아는 안정된 정서이다. 배가 풍랑에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발라스터 밸브(배의 밑바닥 부분에 주로 설치되며 물을 채워 배의 무게 중심(발렌싱) 을 잡는)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당당하다. 그리고 호의적인 평가를 구걸하지도 않는다.
사기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적은 이처럼 자존심은 강한데 자존감은 낮은 사람들이다. 1970~1980년대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네다바이는 이런 심리를 이용한 전형적인 사기였다. 엉터리 물건을 들고 접근한 후 안사겠다고 하면 “당신이 이런 물건을 살 주제나 되겠느냐”며 염장을 지른다. 자존심을 들쑤셔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포장만 더 그럴듯할 뿐이지 마케팅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수법과 다르지 않다.
한국이 명품업계가 가장 선호하는 시장으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난 주말 한국의 한 백화점에서 실시한 명품세일 행사에 안전사고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는 소식이다. 한국의 명품광풍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많이 팔수록 좋은 명품업체들조차 의아하게 여길 정도라니 정상은 아니다.
명품시장을 받쳐주는 계층은 부자가 아니다. 자존심은 높은데 정작 자존감은 낮은 사람들이다. 아시아가 명품시장으로 급격히 떠오르는 것에 대해 한 마케팅 전문가는 사회적인 불안감이 높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아주 정확한 분석이다. 자존감이 약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게 마련이고 이런 흔들리는 감정을 달래기 위해 소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높은 자존심과 낮은 자존감이 초래하는 한층 더 파괴적인 결과는 치솟는 자살률이다.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것은 한국의 자존감 수준이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일리노이 소재 브래들리 대학이 53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자존감 수준 조사에서 한국은 44위에 머물렀다. 세르비아, 칠레, 이스라엘 등이 상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은 6위였다.
이 조사결과가 말하듯 자존감의 수준은 경제적 지위와 비례하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개념을 국민복지 지수로 처음 도입한 히말라야의 부탄 왕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에 불과하지만 돈 쓰겠다는 관광객들도 가려 받을 정도로 자존감은 대단히 높다. ‘졸부근성’은 굉장히 잘 살게 됐는데도 자존감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를 꼬집는 말이다. 경제적으로 조금 잘 살게 됐다고 해서 자존감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자존감이 허약하면 항상 불안하고 다른 이들의 시선에 쉽게 휘둘린다. 그래서 삶의 만족감이 떨어진다. 개인과 국가 모두 마찬가지다. 더 당당하고 행복해지려면 쓸데없는 자존심과 체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몸 챙기고 돈 버는 일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가끔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나의 자존감은 안녕한가.“
우리에게 자존감은 어떠합니까? 성경에 보면 자존감이 높은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시골 어린 목동입니다. 그는 당당히 불레셋 골리앗장군 앞에 섰습니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다만 물맷돌 다섯 개를 주머니에 지녔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당히 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거가가 어디라고 어린 다윗이 나서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존심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는 무서울 것이 없다는 확실한 자존감으로 골리앗 앞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백성들이 다윗을 칭찬하는 소리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 소년 이였습니다. 그런데 왕궁에서 주는 진수성찬을 마다하고 핍박받고 있는 자기 민족들을 생각하며 채소 소찬을 먹겠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바벨론 왕 외에 어떤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어 죽이겠다는 왕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보라는 듯 창문을 활짝 열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붙잡혀 사자 굴에 던져 집니다. 어리석은 행동아닙니까? 그러나 다니엘의 자존감이 승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험한 죽음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능히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귀와의 싸움은 자존감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면 가룟유다는 왜 배신자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면 무슨 벼슬이나 할까 하였는데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건 아니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진한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열등감에 반항자가 됩니다.
바울은 누구입니까? 자존심으로 말하면 하늘을 찌를 듯 젊은 율법사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자존심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이방인 전도자로 자존감을 드높혀 어디를 가든지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였습니다. 믿음은 자존심은 내려놓고 자존감을 가지는 일입니다.
요즈음 고 성완종회장 사건으로 기독교인들의 자존심이 확 구겨졌습니다. 어찌 교회장로가 그런 정치 뇌물로 사업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불교 중을 자신의 멘토로 삼고 그것도 모자라 자살을 하는 등 그야말로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존심은 강해서 기어코 출세하겠다고 덤벼들다가 자신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고 기독교도 욕먹게 하는지 이 뉴스를 접할 때마다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자존심마저 낙마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왜 성완종 회장이 그렇게 망한 것입니까? 기독교인으로 자존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존심을 내 세우려 말고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
바울은 인생을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질 그릇 같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질그릇 같다는 것은 가치 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가 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의 원료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흙입니다. 그냥 공짜로 얻을 수 있습니다. 만드는데도 별로 어렵지 않고 돈도 많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셨기에 언제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영웅호걸도 세계적인 예술가도 과학자도 다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치장하고 호화로운 옷을 입고 레드카페를 걸어가며 온갖 자신의 미모를 뽐내는 미인들 본래 싸구려 흙덩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흙인 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잘 난체 해보고, 대단한 척해 봐도 나는 흙이다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질그릇 같다는 것은 우리 인생은 질그릇처럼 쉽게 깨진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의 성분은 흙 속에 여러 가지 물질들이 뒤 섞여 있어 불에 구었다고는 하지만 그 응집력이 약해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집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받던 때 있었던 일입니다. 8월 초 훈련을 받던 중에 옆에 있던 훈련병이 쓰러졌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죽었다는 것입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웃고 잘 떠들던 친구인데 너무 허망하였습니다. 죽은 이유를 들으니 더위 먹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훈련 받으러 나오면서 소금물은 한 컵씩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마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소금물 한 컵 마시지 않아 쉽게 깨지는 인간입니다.
어제(25일) 오전 11시 56분 네팔에서 7.6도 강지진이 발생하여 네팔의 리잘 정보장과의 말에 의하면 사망자가 4,500명가량 될 것이며 부상자가 4만 5000명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인간이 얼마나 잘 깨지는 연약한 그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병들고 힘들어서 약하고 비참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질그릇같이 연약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그릇같은 우리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중국 내지 선교의 문을 연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말을 종종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사람들은 모두가 연약한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늘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기에 그분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질그릇과 같이 죄인이고, 약하고, 흠이 많고, 넘어지고 깨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질 그릇 같이 연약한 자가 강한자 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강하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그를 강하게 하십니다. 마태 8:17절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니 죄로 인한 나의 연약함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이라는 자존감을 확실히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존감을 가질 때에 원수 마귀가 범접하지 않으며, 세상에서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대를 받아도 부끄럽지 않고, 깨어져도 아깝지 않고, 그 누가 멸시해도 조금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예수라는 보화를 담고 있어서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지만 주님의 능력은 강합니다. 유식한 사람을 보면 “이 무식한 사람”하면 가만있지만,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하면 싸우자고 달려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를 내고 분노하고 열등의식을 가지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 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 났다고 해도 허허 웃고 맙니다. 못 난 사람이 못 났다는 말을 들으면 싸우려고 달려들게 됩니다.
누가 나를 무시한다, 누구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았다는 말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나의 진정한 가치가 내 외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보화입니다. 내 속에 이 보화를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교만하지 않으며, 보배로 인하여 자존감을 드높이게 됩니다. 비록 질그릇은 잘못 구워지고 깨어지고 금이 가서 땜질을 했어도 보화는 그래도 있는 것입니다. 망하여도 깨어져도 멸시를 당하는 것은 질그릇뿐 보화는 어떤 경우에도 남습니다. 우리 안에 보화가 무엇입니까? 본문 11절에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안에 보화는 곧 예수의 생명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하여야 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망해도 깨어진다면 오히려 그 깨어지는 것을 통하여 예수의 십자가 영원한 생명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존감입니다.
이런 믿음의 자존감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합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마침내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에게 라온의 자존감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저는 지난 연말에 심히 자존심을 상한 일을 당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그런 생각 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통해 새로운 계획을 하시리라는 확신으로 믿음의 자존감을 오히려 더욱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까지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적이 없었고 이 작은 자를 한국교회의 최고의 지도자 자리에까지 두 번이나 세워 주셨습니다. 그 자리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또 여전히 인도해 주심을 믿으니 나의 자존감은 오직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이 세워주고 계신다고 믿는 믿음이 저의 자존감입니다.
시 39:4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원어로 “애드아 메 ㅎ하델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ㅎ하델”은 연약함 보다는 “일시적인, 끝나버린”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LXX70인역에 ‘휘스테레오:일시적인’으로 , 공동번역, 카토릭번역성경에는‘덧없이“라고 하였습니다.)우리가 일시적인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자기가 강한 줄 알고 외칩니다. “나는 내 주먹을 믿는다! 나는 내 실력을 믿는다! 나는 내 재산을 믿는다!...”그래서 대한항공 조현아부회장은 자존심으로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연약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연약한 질 그릇 같이 보이지만 God is here,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니 라온코이노니아는 여러분들의 자존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God is with us, 하나님이 저와 제 아내 사모와 함께 계시니 저희가 여러분의 자존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God is with yours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니, 여러분이 있기에 바로 저의 자존감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 세상가운데 자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저의 자존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존감을 드높히 드십시다. 우리의 잔존감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감을 나타냅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이전글 - 2015년 4월 19일 주일아침예배설교 막11:12-14,20-24 라온코이노니아의 무화과
- 다음글 - 2015년 5월3일 주일아침예배설교 막10:13-16, 빌3:12-14 라온코이노니아의 미완성